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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last modified: 2017-08-25 21:16:5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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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Riot.

Contents

1. 개요
2. 전개
3. 원인
4. 영향
5. 한인 사회와의 관계
5.1. 한인 사회의 대응
5.2. 폭동 당시 한국인 조폭들은 뭘 하고 있었나
5.3. 후속적인 위기
5.4. 한인 사회의 변화
5.5. 그 밖에


1. 개요

LA폭동 혹은 4.29 시민봉기(4.29 Civil Uprising)는[1][2]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어진 미국 역사상 12번째 흑인 소요다.


2. 전개


폭동의 발단은 일명 '로드니 킹 사건'에서 출발한다. 1991년 3월 3일 LA 경찰국 소속의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으로 달리던 흰색 차[3] 를 추격전 끝에 세우고 범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경찰은 운전자인 로드니 킹[4]을 끌어냈지만, 그는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고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들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다음 날 이 테이프는 그대로 뉴스에 방영되었지만 이 테이프는 81초에서 65초로 편집된 테이프였고, 이 테이프에는 로드니 킹이 경찰에게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장면이 편집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로드니 킹 사건은 언론이 조작한 것이었다.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법원에 기소되었다.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4명의 경찰관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결정.[5][6] 당연히 이런 흠좀무한 판결에 분노한 LA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불이 나며 상점들은 털리고 박살났으며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5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고 마지막 정리는 켈리포니아 주방위군 6000명과 그에 따른 장갑차 부대, 연방군 1000명이 동원[7]되고 나서야 정리됐다.

3. 원인

결국 폭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인종차별이었다. 거기다 당시 LA의 슬럼가에는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고 있었던 때였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를 폭동으로 표현한, 아주 당연한 결과가 나온 셈이다. 사건이 터진 후 같은 해 6월 28일에는 LA 경찰국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후 원인 제공자인 백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다. 그 결과 2명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나머지 2명에겐 끝내 무죄가 선고되었다.

4. 영향

이 사건은 현대의 인종 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 되었으며,[8] 아직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9]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LAPD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었으면 관련자들이 줄초상나면서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않던 유색인종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수사에 인권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으며,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오던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이고 스토리도 흑인 갱과 경찰관의 이야기다.[10]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 거기다 마지막 미션을 할 때쯤 되면 터지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쥬다. 참고로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5. 한인 사회와의 관계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한인 타운이 있었다.[11] 당시 흑인폭동에서 제일 문제시되었던 것은 경찰이 흑인폭동을 막으면서 백인거주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블럭했었고 한인지역으로 가는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것이였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당시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관계가 나빠지기도 했었다. 주 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 때 차단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심각했다. 다만 흑인들에 대한 한인들의 편견과 차별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미국의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으며[12] 설상가상으로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순자 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

참고로 두순자 사건의 영상인데, 두순자는 상대방이 고개를 돌렸을 때 총을 쏴댔다. (뒤통수에 총격을 가했다.) 일방적으로 보면 두순자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미국 법원이 그냥 상기의 판결을 내린 것이 아니다. 후에 미국 법대에서 이 사건을 수업시간에 다루었고 사건 내용을 설명한 후,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대부분이 두순자에게 내린 판결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판 자료 중 하나인 사건 영상을 보자 대부분이 두순자가 총을 쏠 만한 위협을 느꼈다고 의견을 바꿨다. 라타샤는 나이가 어리고 비무장이었지만 그녀가 휘두른 주먹은 마치 프로복서가 일반인을 폭행하는 것을 연상케 할 정도로 무자비해서 그 영상을 봤던 배심원들도 피고인 두순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정황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 금태섭 변호사는 문서상으로만 설명되는 사건 내용은 실제로 사건 유관자들이 직접 겪었을 당시의 급박한 정황을 전달하지 못하기에 생긴 괴리라고 평했다.

어쨌든 이 폭동으로 한인 사회는 직접적으로 크나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물론 한인이 운영한 가게 중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었는데, 이유는 두 가지. 평소에 흑인들을 편견없이 대했거나,[13] 폭도들이 거기까지 가지 못했거나.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최소 3억 5천만 달러의 손해,[14] 2300여개의 점포손실, 그리고 가게 주인만 다섯 명이 사망했다.[15]

여담으로, 두순자는 흑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 숨어살기에 그녀에 대한 소식은 재미교포들도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증오를 받는지 2013년 8월 6일 미국 매체에 따르면 최근 사우스LA에서는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는 한 한인 업주가 1991년 발생한 ‘흑인소녀 총격살해’의 장본인 두순자씨”라고 주장하는 괴 전단지가 나돌고 있다. 그런데 그 리커는 신모씨 내외라는 한국계가 운영하는 것으로 두순자와 아무 연관이 없음에도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욕설이 벌어진 탓에 업체에선 해명에 나서야 했다.

5.1. 한인 사회의 대응


어떤 한인 가게 주인들은 산탄총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흑인들과 성전을 벌이기도 했다. (...) 뉴스에 방영된 동영상 중 가장 유명한 동영상은 "가주마켙"의 주인과 점원들이 소총샷건, 글록17 등으로 무장하고 거리를 경비하며 권총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이렇게 폭동 속에서도 털리지 않고 정상영업을 계속한 가게들은 대개 옥상에서 총 들고 지킨 가게들이었다. 대개의 가게들이 쇠창살과 안전문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평소의 도둑 하나 둘은 막아줄 수 있어도 무리지어 떼로 덤벼드는 폭동 앞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옥상에서 총을 들고 강력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을 보여주자 폭도들이 알아서 피해갔다고 한다.

흠좀무한 사실은, 한인 타운에서 경비에 동원한 총기들 일정 크기 이상의 중화기는 모두 장난감 총이었다고 한다. 발사한 산탄 탄피 같은 걸 땅바닥에 좀 뿌려놓거나 실루엣만 기관총처럼 보이는 나무 모형을 만들어서 옥상에 올려놓은 경우도 있었는데, 기관총이 등장했다는 신고를 받고 미국 경찰들이 와서 조사해보고는 가짜라는 걸 깨닫고 그 황당한 발상과 용기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사실상 허세로 물리친 셈.[16] 다만 실제로 AR-15AK 계열 화기, 그리고 UZI가 사용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하며, 그 당시 어떤 한인청년단이 5정의 AK를 구매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때 어느 한인 보석상이 털렸는데 그 주인이 총포상 주인이기도 해서 온갖 총기류를 즉각 풀어버렸단 이야기도 있다.

또한 재미교포들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대처도 빨랐다. 사건 당시 한인 라디오 채널인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어느 곳에 피해가 있으니 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실시간 중계를 했다. 이 대목은 무릎팍도사 이장희 편을 보면 그 일화가 자세하게 나온다. 이 구호활동으로 인해 당시 이장희 씨가 책임자로 있던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고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친히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LA 폭동이라고 하면 보통 두순자 사건 때문에 미국 내에서 한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절에 한인 타운의 자경 활동을 직접 봤던 미국 경찰관들에게는 의외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공공 기관 중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 경찰서와 소방서였는데,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차에 폭도들이 총을 쏴서 불 끄러 가는 것을 막았던 일까지 있었다. 폭도를 때려 눕히러 가는 것도 아니고, 단지 불 끄러 가는 사람에게 말이다. 물대포를 쏠까 봐서 그랬나 결국 각급 소방서들은 선별적으로 장비와 인원을 파견해서 방어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인 자경단 사람들이 총을 들고 와서 이들을 지켜주었다.

자기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업주로서의 입장도 있겠으나, 치안에 대한 유교적인 보수성을 지닌 한국인의 특성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재해 체제를 지키면서 가게는 계속 정상 영업을 해서 일상을 지켜나가는 행동은 지극히 보수적인 미국 경찰관들의 감성에도 와 닿았는지, 지금도 당시를 추억하는 나이든 경찰관들은 그 때의 혼란 속에서도 괜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경찰들이 달아나기 바빴다. 1992년 5월 3일자 LA 타임즈에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총포상의 인터뷰에 의하면 "경찰차가 4대나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마자 (경찰들이) 거의 0.5초도 안돼 죄다 차를 타고 도망갔다. 솔직히 실망했다"고 한다. 폭도들도 살해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자신들이 피해를 입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 일례로, 히스패닉계 마을에서는 갱단들의 저항에 의해서 폭도들이 잽싸게 물러났다고 한다.


당시 한인타운의 한인들의 총격전 영상.[17] 대부분의 교민들이 군대 경험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전쟁 참전 경험자나 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가전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 ㅎㄷㄷ... 이 영상의 문제는 이 앵커가 매우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것.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인 가게 주인들이 총기를 들고 자신의 가게를 지키는 상황으로, 당연히 정당한 저항이다. 그런데 이 앵커는 그들(영상의 한국인들)이 폭력 사건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흥분하여 소리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마구 총을 쏴대고 있습니다!" 이런 뉘앙스로. 아니 이 양키년이? 덕분에 영상 댓글도 앵커의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욕하는 것이 태반. 2011년 5월 기준으로 최다 추천 댓글을 보면...

  • 내가 병X인가, 아니면 "흑인 어린애들"을 좋은 놈으로, 한국인 가게 주인들을 "개지X한다"고 심각하게 보도하는 저 띨띨한 리포터X이 병X인가? 저 여자는 당장 짤라야 돼요. 잘한 게 없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비정직한 썩을 것이네요.
  • 뭐 어쨌든... 적을 잘못 골랐네요. 흑인들에겐 안됐지만, 저 나이의 모든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서 3년을 복무해요.(지금은 26개월 복무한다.) 만약 한국인 남자, 그것도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절대 공격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관련된 사진을 모아놓은 주소. 단, "각종 중화기가 모여 있었다"고 되어있는 끝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근근이 장사를 하고 살던 한인촌의 사정으로 중화기 따위를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다수는 나무로 만든 모형이었다.

한편 사건 이후 전미총기협회는 "총은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임."이라는 떡밥을 강화시키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서 가게를 지킨 한인 이야기를 인용하기 시작했다.

  • 전 문화부 장관 어령이 쓴 책을 보면 당시 일본 방송이 방송에서 한국인들이 총을 쏘는 모습만 집중적으로 보여주어서 한국인이 과격하다는 편견을 심으려고 했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18] 당시 NHK의 기자들은 한국인 슈퍼마켓 앞에서 전격 취재를 했는데, 이 장면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무슨 종군기자 취재같다
  • 재미교포 영화감독 크리스티나 최는 1988년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19]라는 다큐멘터리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여성 감독이다. 4.29 사이구(영어 제목도 Sa i G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으나 이 작품은 그녀의 지뢰작으로 평가받는다.
  • 당시 많은 가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정반대로 보험 처리로 팔리지 않던 재고까지 보상받아 그래도 이득인 경우도 꽤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험사에 제품 판매 신고를 엉터리로 하던 가게들은 신고한 만큼만 보상받아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자업자득이다.
  • 한국인들끼리 충돌도 이 때 빚어진 바 있다. 한인 사회의 주류층인 교회파와 비교회파가 나뉘어서 난데없이 종교드립을 하는 통에 한 재미교포 목사가 종교놀음을 하는 교회들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자 다른 목사가 그 목사가 사탄이라며 비난 광고를 실었다고. 이런 쓸모없는 예수쟁이들 같으니라고 [20]
  • 모 소설에선 주인공의 미국에 이민간 아버지가 폭동 당시에 가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모습이 미국 전역에 방송되자, 한국인들은 총이나 드는 야만적인 민족으로 매도되어 아버지는 상심 끝에 죽었다는 묘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서상으로는 오히려 이런 아버지 쪽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위의 내용만 봐도 NRA는 좋다고 선전했고, 총들고 자기 가게를 지키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수적 미국인들은 오히려 좋게 보았다고 한다. 애초에 미국은 헌법으로 국민의 총기무장을 명시하는 나라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동양인들과는 다르게, 미국은 총들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100% 찾아먹어야 하며, 그러지 못하고 참거나 희생되는걸 얼간이로 여긴다. 개인 상대로든, 집단 상대로든, 정부 상대로든. 따라서 미국에서는 폭도에 맞서 총으로 자기방어 하는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긴다.[21] "총이나 드는"이라는 수식어와, 그런 야만인으로 매도되다 상심끝에 죽었다는 전개는 말 그대로 이런 미국의 풍토를 생각하지 못하고 작가의 "(내 생각에)총이란 혐오스럽다 = 그러니 LA폭동 당시 총든 한인에 대한 시선은 이러이러 했을 것이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만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이주민 1세대라면 소설처럼 상심하다가 건강을 해친 교민들은 있었다. 당시 교민사회는 지금보다도 보수적인 가치관이 강한 편이었다.
  • 본래는 이 항목에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한국인의 기질도 어느정도 엿보인다면서, 위의 의견을 한국인들의 체면치레 의식이랑 결부하여 비판하는 항목이 있었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전제가 틀렸을 뿐이라서 논외적이다.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합의점을 찾아내려는 의식은 동양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어떤 세상에서든 통용되는 태도이다. 애초에 한흑 갈등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해봐도 어리석은 주장.
  • 본 항목은 전세계의 한민족과 흑인들의 대결의식이 생겨난 것처럼 묘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교포들의 피해를 걱정하면서도, 인종차별 이슈 또한 이해한다는 태도가 공존했다. 심지어 교민들 사이에서도 근본주의 교회를 비롯한 일부 여론이 흑인들을 무시했던 정황에 대한 반성이 많이 나왔다. 고립적인 태도만으론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유도 "당연한" 공존의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여담으로 드라마 아테나:전쟁의 여신에서 손혁(차승원)이 윤혜인(수애)를 이 사건 때 만난다.

5.2. 폭동 당시 한국인 조폭들은 뭘 하고 있었나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이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흑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혼란을 틈타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어갔던 것이다. 가까운 동네의 히스패닉 갱단이 자신들의 동네 주민들을 지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이들도 평화시에는 동네주민들을 착취하겠지만...)

마찬가지로 한인 조폭들은 세계 각지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다. 문제는 이 당시처럼 한국인 가게들로부터 보호비 뜯고는 일절 도움이 안 되었다는 점. 파라과이에선 한국인 조폭들이 걸려 추방당한 바 있다. 여담으로, 프랑스에서는 빠리지엔느라는 술집이 외인부대 출신 한국인을 주인으로 두었었는데, 이 가게에 생판 모르는 한국인들이 와서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려다, 주인이 파리 갱단 친구들(외인부대원 동기)에게 연락하자 조폭들이 쫄아서 엎드려 울며불며 빌었던 실화가 있다... 그야말로 자업자득.

참고로, 당시에 한인타운을 구역으로 삼은 조폭들은 한국에서 건너간 자들로, 당시에 한국 정부에서 펼쳤던 캠페인인 범죄와의 전쟁의 단속을 피해서 미국으로 도망친 조폭들이었다. 당연히, 같은 한국인이라도 갱단 같은 범죄자들은 경원시 당하는 입장이므로, 위기가 터졌을 때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긴 했다.

5.3. 후속적인 위기

당시 한인들의 피해는 전체 피해액의 절반일 정도로 처참했다. 당시 18살이었던 교포 이재성은 과격한 폭도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흑인에게 집단폭행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고가품이며 식품 등을 강탈하고, 건물까지 훼손하면서 한인사회에 커다란 후유증이 남았다. 심지어, 폭동 초기에 파견된 경찰에 이어서, 방위대마저도 주로 백인 밀집지역에 몰리는 바람에, 한인촌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재미 한국인들은 물론 한반도한국인들까지도 흑인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한국에서는 무서운 일이 터졌다는 인식만 있었고, 전체적인 한흑 갈등이 커졌다기에는, 별다른 사건개요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오히려 한인사회의 태도(특히 교회)를 반성하는 의견도 있었다. 당장 맨 위의 항목만 봐도, 당사자였던 교민들마저도 민족대결이라는 식으로 상황을 파악하지는 않았다.

백인 및 주류 사회에서도 한인들을 모범 소수민족(model minority) 운운하다가, 정작 위기상황에서는 흑인들의 공격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22]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피트 윌슨은 재정 때문에 한인촌에 대한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서 교민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또한 애초에 언론들부터가 상술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한인에 대한 흑인들의 공격을 대놓고 부추긴 주범들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한국인들이 흑인 상권을 침해했다고 까는 추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명백하게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쓰겠다는 모습이었고, 상황을 파악한 교민들이 정신을 차리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어쨌든 한인들은 재기를 위해서 복구작업을 했고, 몇몇 한인들은 흑인과의 평화를 원하며 거리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로 히스패닉들과 흑인들과 결혼을 통해 좀 더 가까워지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덕분인지 현재는 미국 내 한인과 흑인간의 감정 갈등은 낮아진 편이라고 한다.

5.4. 한인 사회의 변화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로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인들이었으며, 심지어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세금만 더 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즉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에 무심했기 때문에, 흑백 양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다.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을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수많은 교포들이 시민권 취득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서, 미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순자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민자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의 눈치가 아니면 서슴없이 생활했던 인상이 있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주변의 흑인, 히스패닉과 더 많은 인적 교류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23]

5.5. 그 밖에

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벌어진 또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2014년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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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한국계 미국인 일레인 김(일Elaine H. Kim) 교수가 붙인 명칭이다. 4.19 혁명과 비슷한 명칭. 실제로 구글에 Sa-i-gu라고 치면 뜬다!
  • [2] 이 명칭은 이 사건을 단순히 인종 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계층구조와 그로 인한 반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본다. 백인들의 거주지역에만 중점적으로 폴리스 라인을 친 위치도 그렇고...
  • [3] 현대자동차엑셀 승용차였다. 사건 이후 현대자동차 측에서는 그 차량이 그런 속도로 달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속이라는 자체는 의심이 없었다.
  • [4] 2012년 6월 17일 자택의 수영장에서 익사했다.
  • [5]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나머지 1명에 대해서는 추가바람)의 이름은 바다 건너 어디와는 달리 공개되어 있다. 이 5명은 스테이시 쿤, 로렌스 파웰, 티모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노, 롤란도 솔라노이다.
  • [6]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 1명의 아시아인으로 구성되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 형평성을 중요시한건지, 아니면 재판 결과를 유도한 건지 원 덧붙여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 [7] 연방군이 동원된 건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다.
  • [8]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를 따져 조심스럽게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프리칸 아메리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근래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 [9] 정확히는 흑인과 백인 간의 문제.
  • [10] 덧붙여 GTA SA의 악역인 프랭크 텐페니 경관은 백인으로 설정하면 인종차별을 조장할 것 같아 흑인으로 교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11]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슬럼가로 알려져 있는 컴튼(Compton,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나오며 흑인 갱단의 근거지로 많이 묘사되기도 한다.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인공 CJ가 사는 동네 갠튼(Ganton)은 이 곳의 패러디)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즉 이 동네 흑인들이 뭔일 있어서 자기 동네 밖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한국 사람들 사는 동네이다.
  • [12]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래퍼 Icecube의 Black Korea란 곡이다.# 드렁큰 타이거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2부에서 잠깐 나오기도 했다.
  • [13] 실제로 LA에서 환전상을 겸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故홍정복씨는 그 지역의 흑인 및 히스패닉들에게 MAMA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누구에게나 친절했는데, LA 폭동 당시 흑인 주민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준 덕분에 아무 피해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홍씨는 1999년에 히스패닉 갱단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기사 참고
  • [14] 그 당시 일어난 모든 피해액이 약 7억 달러. 즉 한인 사회가 전체피해의 절반 이상을 받은것이다.
  • [15] 청년단 소속이었던 젊은이가 중상을 입고 병원치료 중 사망했다는 말이 있으니 사실확인, 혹은 추가바람.
  • [16] 물론 이는 단기적으로나 먹힐 만한 발상이니 폭동이 일찍 끝난게 다행일 따름.
  • [17] 이 영상은 영화 "프리덤 라이터즈"의 극초반부에 삽입되기도 했다.
  • [18] 다만 이건 일본 방송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지 미국 방송에서도 한인 가게가 털리는 모습은 거의 보도하지 않고, 옥상에서 총을 쏘는 한인들의 모습만 찍어서 논란이 됐다. 웃기는 것은 NRA를 비롯한 보수단체들에서는 흑인들을 까내리기 위해서 이민자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어느 쪽이든 강 건너 싸움구경
  • [19] 1982년 해고된 두 미국 백인 자동차 기술자들이 일본차 때문에 일본인으로 여겨서 술집에서 우연히 본 일본인을 그냥 죽인 사건, 그러나 죽은 빈센트 친은 중국인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무죄로 끝나면서 중국 및 동아시아 이민 단체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친 일을 다루었다. 여담인데 훨씬 뒤에 결국 범인 하나는 중국계 조직으로부터 살해되었다.
  • [20] 간단한 항목 하나정도로 넘어갔지만, 해외 한인교회의 실태를 어느정도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해외에서 생활하다 한인교회에 나가본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현지의 한인교회들은 자신들을 해외동포들을 결집시키는 구심점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어느정도 있다. 물론 해외의 "기독교" 동포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는 어느정도 있겠지만 그 경향이 지나쳐 안그래도 비판받는 근본주의 성향이 더욱 심해진 경우도 있고 이 기회에 해외나온 한국인들은 다 기독교인으로 만들자는 심산으로 비기독교인들까지 바득바득 한인교회에 데려가서 예배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표면상으로 보기에 해외 한인교회가 하는 일이라곤 돈걷는 일밖에 없어보인다는것. 외국인들이 다니는 다른 교회와 한인교회간에 벌어들이는 액수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큰 차이가 나는데, 외국교회가 기부에 있어 널널한 반면 한인교회는 우리에게만 익숙한 온갖 명목으로 별별 돈을 다 걷어가는걸 보면 상대적 박탈감으로도 모자라 회의감마저 들것이다. 더군다나 한인교회들간 알력다툼은 해외에서도 여전하다.
  • [21] 자기 집 마당에 무단침입한 도둑을 쏴죽여도 정상참작된 사례가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자기방어 개념이 있는것이 미국이다.
  • [22] 로드니 킹 사건 이후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은 보수, 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다. 보수언론도 흑인들과의 정치싸움에서 좋은 명분이자 방패막이로서 한인들을 띄워줬을 뿐이었다. 실제로, 격한 대립 구도에 끼어들면 죽어나는 건 주민들 뿐이다.
  • [23] 이점은 시대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영어가 서툴고 구식사고에 젖어있던 1세대들이 죽음이나 은퇴로 물려나면서, 미국식이 더 익숙한 세대로 교체되고, 새로운 이민 세대들은 유학 및 전문적인 직업으로 미국 현지인들과 섞이게 되었다. 또한 90년대 이후 한국인들의 사고가 선진화되면서, 새로운 세대들은 초기 이민자들보다 높은 교육수준으로 시작하기에, 다른 민족들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