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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last modified: 2019-05-26 01:33:37 Contributors



대한민국 4대 구기 스포츠
농구 배구 야구 축구
한국프로농구 V-리그 KBO 리그 K리그

한국의 야구 리그
구분 명칭
프로 1군 KBO 리그
2군 KBO 퓨처스리그
­
실업 한국실업야구
­
아마추어 대학 한국대학야구
사회인 봉황기 전국사회인 야구대회
여성부 한국여자야구대회
­
유소년 고교 고교야구 주말리그
대통령배 / 봉황대기 / 청룡기 / 황금사자기 / 협회장기 / 명문고 야구열전
중학 대통령기 중학야구대회 외 2개대회
초등 박찬호기 전국초등학교야구대회 외 3개대회
리틀야구 리틀야구 주니어부/리틀야구 리틀부


정식 명칭 한국야구선수권대회(1982~2014)
KBO 리그(2015~)
리그 운영주체 KBO 사무국
(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
현임 총재 구본능(21대)
리그 창설 1981년 12월 11일
리그 1호 경기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
삼성 라이온즈:MBC 청룡
리그 참가팀
(2015년 기준)
넥센 히어로즈,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
LG 트윈스, NC 다이노스, SK 와이번스, kt 위즈.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간략한 소개
2.1.1. 1970년대 ~ 1981년 : 프로야구의 태동
2.1.2. 1982년 ~ 1999년 : 프로야구 출범 그리고 프로야구의 첫번째 황금기
2.1.3. 2000년 ~ 2005년 : 암흑기
2.1.4. 2006년 ~ 2012년 : 프로야구의 부흥기
2.1.5. 2013년 ~ 2014년 : 10구단 체제에 따른 선수수급과 경기력 하향 논란
2.1.6. 2015년 : KBO 리그로의 재출발, 그리고 사상 첫 10구단 1군 진입
2.1.7. 기타
2.2. 현재 구단
2.3. 해체된 구단
2.4. KBO 리그 야구단 구장
3. 한국프로야구선수
3.1. 신인 드래프트
3.2. 2차 드래프트
4. KBO 시범경기
5. KBO 리그 시즌
5.1. KBO 올스타전
5.2. 역대 우승팀
5.3. MVP, 신인왕
5.4. 골든글러브
5.5. 타이틀
5.6. 역대 기록
5.7. 역대 팀 스탯
6. 역대 리그 스폰서
7. 역대 프로야구단 가치평가
8. 우승 트로피
8.1.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
8.1.1. 1982년 ~ 1998년
8.1.2. 1999년 ~ 2010년
8.1.3. 2011년 ~ 현재
8.2.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
9. 국제 대회의 성적
10. 중계 방송
11. 사건 사고
12. 리그 레벨차 논쟁
13. 그 외 관련 링크


프로야구 30주년 기념 영상. 출연자는오승환(삼성), 김광현(SK), 강민호(롯데), 윤석민(KIA), 김현수(두산), 박모씨(LG), 류현진(한화), 강정호(넥센), 나성범(NC)

1. 개요


1982년에 창설된 대한민국프로야구. 리그명칭은 2014년까지 한국야구선수권대회였으나 2015년 부터 리그 브랜드 아이덴티티 통합을 위해 KBO 리그라는 브랜드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주관 단체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국).

한국프로야구는 연혁과 관중 동원력에서 볼때, 단연 한국 프로 스포츠의 선두주자라고 말할 수 있다.프로스포츠 관중 추이 관련 자료 1982년 한국 최초의 프로스포츠로 탄생한 이래, 2015년 현재까지 34년이란 역사를 자랑한다. 또한 한국의 여가문화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스포츠산업중에서 굉장한 편이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유통업의 경쟁 상대는 야구장이 될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역사적인 첫경기는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삼성 라이온즈의 경기.[1]

2. 역사

2.1. 간략한 소개

2.1.1. 1970년대 ~ 1981년 : 프로야구의 태동

1970년대 고교야구를 보러 동대문야구장을 찾은 인파

1960년대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휘몰아친 고교야구의 폭발적 인기[2]와 더불어 1970년대 중반 야구의 프로화 논의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씨가 방한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여 프로야구 창설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고,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하여 재입국, 프로야구 창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리그 운영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고, 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은 프로 출범에 찬성하는 입장 이었지만 다른 야구협회 이사진들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프로화 움직임은 좌초되고 말았다. 결국 홍윤희씨는 무소득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프로야구 얘기는 한동안 사장된 떡밥으로 묻혀버렸다.

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국민정서와 여가선용을 위한 3S정책의 일환으로 프로 스포츠 창설지시가 떨어졌고, 비서관은 야구협회와 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때 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조명 설치 등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 반면, 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가세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주목받으며 우선 프로야구 부터 출범시키기로 낙착을 지었다.

정부 보조가 없는 방법 이라는 것은 바로 대기업 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따르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면에서 여러 혜택(특히 기업 세무 면에서)을 주기는 했다.

최초 계획안은 이러했다.

제 1안
서울 롯데 자이언트[3] 부산 럭키금성그룹[4] 대구 삼성그룹[5]
인천 현대그룹 대전 아건설 광주 삼양사
제 2안
서울 대우그룹[6] 부산 럭키금성그룹 대구 포항제철
인천 대한항공 대전 한국화약[7] 광주 금호그룹
해태제과
미원

위 1,2안의 연고지-기업안은 청와대에는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이호헌, 이용일이 계획한 첫번째 계획이었다. 보기에는 1안을 만들고 2안을 다시 만든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계획서를 만들때 연고지별로 2개 이상의 기업을 적어놓았다. 청와대에 실제로 올라갔던 프로야구창립계획서에는 아래문단의 연고지-기업안이 올라간다.

사실 프로야구도 프로축구와 더불어 너무 급하게 밀어붙였다는 점은 야구계에서도 공감한다. 프로축구가 할렐루야같은 종교구단까지 급하게 억지로 끌어들였던 불찰이 있다면 프로야구는 주춧돌이 될 고교야구를 죽여가면서 프로야구를 홍보하여 유소년 야구의 싹을 잘라버렸다는 점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남는다. 2006년에 재창간되었다가 1년도 못 가 폐간된 월간 야구 컬럼부터가 프로야구의 자랑스러운 시작의 아쉬운 점으로 이 점을 언급할 정도였다.

일단 청와대에 올라간 계획서의 연고지 계획으로는

청와대 기획안
서울 MBC 부산 /
경남
롯데 대구 /
경북
삼성
인천 /
경기 /
강원
현대[8] 대전 /
충청
광주 /
전라
삼양사

처음의 연고지안부터 최종 안까지 공통점으로는 그룹 오너의 고향지역이거나 그룹이 위치한곳 혹은 처음 시작한곳 같은 각 그룹에 있어 중요한 지역을 맡긴다는 원칙을 내세워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룹 회장들의 애향심을 이용하려던 것이다. 이렇게 염두에 두었지만, MBC삼성그룹, 롯데그룹을 제외하고는 연고권 문제와 프로야구라는 생소한 사업에 진출한다는 불안함과 부담감을 표출하며 대부분 고사하는 걸로 인해 출범은 어려움을 맞았다. 결국 당시 신군부 세력을 포함한 정치권의 연줄 등을 총동원하여 협상을 한 결과, 광주에 해태가, OB가 연고지인 충청도에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3년후 서울연고 이전을 약속받고 충청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립총회 직전 거의 기적적으로 인천직할시 연고기업으로 프로야구 참여를 확정지었다.

MBC는 청와대의 프로야구 출범계획과 별도로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할렐루야 축구단을 모델로 한 단일 프로야구단 창단을 계획중이었고, 삼성의 경우 당시 경북고, 대구상고 등을 중심으로 한 대구직할시 야구가 전국을 주름잡고 있었던 시기였던 지라 전력구상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으며, 롯데는 이미 1975년부터 실업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모기업 일본 롯데도 프로야구팀을 보유하고 있던데다 당대 최고의 에이스이던 최동원의 보유권을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 기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프로야구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특히 롯데는 신격호 회장이 무조건 참여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서 일선에서 제기한 포기를 각오한 강경책을 모조리 쳐버렸다. 신격호 회장의 이런 결단이 없었다면, 부산 경남을 연고로한 기업은 결국 럭키 금성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이 기존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정설이었다. KBO에서 83년 발간한 연감[9]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창설 과정을 설명했고 과거 유명 야구 기자인 홍순일 기자 역시 같은 내용을 연속 기고하기도 했다.

다만 어느 자료를 참고하더라도 MBC의 참가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것은 같았는데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는데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당시 MBC사장이었던 이진희 사장이 'MBC만 프로야구팀을 만드는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4팀이 참여하는 리그를 구상하라'고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그걸 기획한 다음 이진희 사장에게 보고하고, 이진희 사장이 그걸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전두환이 깜짝 놀라면서

"어, 뭐야. 야구야?"

라고 했다고 한다.출처 그 뒤에 전두환이 한 이야기가 "난 프로축구인 줄 알았지".

전두환은 과거 육군사관학교 시절 문지기골키퍼 출신일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래서 축구때문에 전두환과 인연이 된 연예인들도 제법 많은 편. 박종환 감독이 다른 건 집어치고 축구에 관해서만은 전두환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즉, 프로야구는 지금껏 알려진 것처럼 전두환의 지시와 의지로 출범한 게 아니라 MBC 이진희 사장이 기획하고 연출해서 역사적인 출범을 한 것이다. 그렇게 K리그는...

다만 정부가 개입을 하긴 했는데, 이건 주도를 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세 조정 과정이었다. 해태와 삼성은 일단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연고도 있었고, 군산상고를 주로 한 전라도 선수들과 경북고와 대구상고를 중심으로 한 대구 경북 지역연고 선수들만 갖고도 국가대표 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나머지 팀들이다.

가장 큰 문제가 OB였다. OB는 대전 충청권과는 연고가 없었고 그 지역 선수층은 두꺼운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OB는 서울을 요구했었다. 그러다가 현대가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포기하고 삼미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두산 창업주 박승직이 경기도 광주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이 두가지 요청은 구단주 회의에서 모두 거부 되었다. 재밌군.

이렇게 OB가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롯데도 같이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섰다. 롯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처럼 수도권이 아니면 흥행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한 해태가 참여하게 된 것도 문제였는데, 원래 같은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는 프로야구에 넣지 않는다는 밀약이 있었는데 해태가 들어오면서 제과업계 라이벌 구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핑계가 되었다.

이 두 팀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재안이 나왔는데, 우선 롯데는 힘으로 눌렀다. KBO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앞서 각주에서도 언급된 럭키금성이다. 프로야구에 참여할만한 재정규모가 되었고[10], 럭키금성 이후에 밝혀지듯이 참여의사가 있었다. 다만 시기적으로 그룹 최고위층이 외유중이어서 당장 확답을 얻지못한 상황에서 롯데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배경이었다.

당시 외유중이던 구자경 회장 대신 이헌조 그룹 기획조정실장이 부산 연고 프로팀 창단 제의를 받고 "지금 오너가 부재중이니 돌아오신 후에 협의 후 확답하겠다" 라며 답변을 미뤘지만 시간이 촉박했던 지라 결국 부산 연고는 롯데에게 돌아갔다. 이후 구 회장이 귀국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자 무릎을 치며 "이 문디야, 그냥 하겠다고 받아 들였어야 안카나!" 라며 이 실장을 나무랐다고 한다. 프로야구는 구단주 회의로 대표되는 대기업의 카르텔 구조이기 때문에, 한번 때를 놓치면 마음대로 참여할 수도 없다. 그래서 LG가 MBC를 인수한 다음에나 참여가 가능했고, 현대는 타 구단들이 전부 대놓고 반대하는 바람에 현대 피닉스를 통해서 외부전쟁 비슷한 구도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었던 KBO측은 정 안되면 부산경남 연고를 럭키금성에게 주겠다고 롯데를 압박했고, 신격호는 '서울에 갈 수 있으면 가라고 한거지 언제 하지 말라고 했냐'라고 하면서 부산경남 연고를 굳혔다. MBC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애초에 MBC에게 서울을 준 이유 자체가 홍보를 해 달라는 것과, MBC가 친정부 성향이어서 암묵적으로 그 덕을 보려는 2가지 의도가 모두 있었다. 그래서 MBC가 연고를 나눌 수 없다고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을 때, 청와대가 개입했다. 이상주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이학봉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이진희 MBC 사장을 겨냥해서 압박한 것이다. 사실 전두환은 MBC를 뺄 것이냐 말 것이냐도 잠깐 고민한 장면이 있다. MBC가 친정부 언론이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MBC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른다는 것이 싫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여차하면 프로야구를 때려치울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굴러다닌 끝에 MBC도 굴복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실리는 챙겼는데, 원래는 MBC와 OB의 선수 배분은 1대 1이었던 것이, 협상 과정에서 2 대 1로 변했던 것이다. 그 결과 원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MBC는 김재박이해창을, OB는 박철순을 각각 지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록 당시 정부가 프로야구를 3S정책에 이용하려한건 맞아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마침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우승한 상황이라 야구쪽으로 시선이 쏠려있었기에 나름대로 시기적절한 상황이긴 했다.네이버 스포츠 박동희 칼럼 매거진S 하일성-허구연 대담 "마이크가 나를 불렀다." 지역연고 역시 윗 각주에서 보듯이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일의 아이디어로, 되려 5공은 초기에 지역감정 심화를 우려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정권 자체에 명분이 없다보니 대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뉘앙스를 띄면 정권 유지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래 원년팀 가운데 롯데, 삼성, OB는 처음부터 프로야구팀을 만들려고 했었고, MBC야 자신들이 기획하고 연출했으니 빠질 수 없었겠고. 삼미와 해태가 마지막에 합류하게 되었다.

삼미의 참여는 결과적으로 기적이라고 묘사되지만, 어쩌면 결과론일지도 모른다. 현대가 경기 연고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 두산이 경기 연고를 요구했다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데, 이걸 막은 것은 이용헌 등 KBO에 충청권에 참여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서 두산에게 충청권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2안에서는 충청권 연고의 기업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화약이다. 실제로 한국화약도 오너 일가가 야구 팬들이었기 때문에[11] 만일 제의했으면 받았을 것이란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빙그레는 원년기업일 수도 있었고, 두산이 인천연고구단으로 출발했다면 인천연고구단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론적 이야기다.

재밌는 사실은, 사실은 금호가 호남지역에서 창단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금호그룹은 호남색을 지우고 싶어하는 데다가 스포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오너인 아버지가 아들들이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나가리'시켰는데 이 때 해태 박건배 회장이 프로야구 준비위에 전화를 해서 "호남지역 창단을 우리가 하면 안 되느냐"고 해서 결국 해태가 참가하게 되어 전설의 팀이 된 것이다. 만일 해태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금호그룹은 회장이 청와대에 끌려가서 억지로 구단을 떠맡거나 정권에 비협조적 이었다는 이유로 국제그룹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알려진 것처럼 해태 회장을 청와대에 불러 협박한 것이 아니라, 박건배 회장이 야구를 좋아해 야구팀이 생긴 셈.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 쌍방울 레이더스, NC 다이노스처럼 한국프로야구 팀의 확장은 야빠 사업가들의 공이 컸다.

다만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는데 해태의 초대 감독이자 당시 유명 야구인인 김동엽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김동엽이 MBC의 프로야구창설계획 극초창기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후에 광주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본인의 연줄을 이용 해태를 청와대에 추천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김동엽과 박건배회장을 부르는데 이 자리에서 정부는 프로야구 참여를 권유한다. 이때 박건배 회장이 정부 인사 앞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라는 것이 김동엽본인의 자서전에 나온 내용이다. 본인이 청와대에 연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부분은 83프로야구 연감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2.1.2. 1982년 ~ 1999년 : 프로야구 출범 그리고 프로야구의 첫번째 황금기

1982년, 한국야구선수권대회 개막식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나온 드라마같은 만루홈런 두개[12]로 인하여 "이 홈런으로 앞으로 10년은 족히 먹고 살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82년에는 OB의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고, MBC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으며, 해태의 김성한은 투타를 겸업하며 3할 타율에 13홈런, 10승을 기록[13]하는 등의 진기록이 세워졌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해당 문서 내용에서 보듯 국가대표 출신 한 명 없는 철저히 무명 선수들로만 구성된 약체 팀으로[14] 1982년 1할대 승률이라는 세계 야구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고, 1983년 시즌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의 맹활약으로 반짝 상위권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후 제자리를 찾은 팀성적과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1986년 청보 핀토스, 1989년 태평양 돌핀스,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구단 운영주체가 바뀌며 활동을 이어갔지만 2007년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결국 해체하게 된다. (넥센 히어로즈는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한 후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를 중심으로 창단한 신생구단이다.) 1986년 잠시 충청도에 연고지를 두던 OB 베어스가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그 자리를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가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90년에는 전라북도를 연고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이 있었다.


원래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던 해태 타이거즈는 1980년대 프로야구 열기의 견인차였다. 선동열이종범 등으로 대표되는 스타 선수들의 존재감과, 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1986~1989년)기록 등, 통산 한국시리즈 9회 우승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8개구단 체제가 본 궤도에 오른 1993~1996시즌은 동원관객수가 4년 연속 400만을 돌파하여, 20세기 야구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시기로 꼽힌다. 당시에는 전통의 인기팀인 엘롯기(당시에는 해태) 팀이 모두 플레이오프 이상의 성적을 기대할 수 있던 시절이었고 만년 약팀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도 가을야구를 하는 등 순위싸움도 예측할 수 없는 혼전양상이었다. 프랜차이즈 스타도 다량 배출되어 화제성에 있어서는 2000년대 후반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1995년에 수립했던 540만 관중 돌파 기록은 2009년에야 다시 달성하게 된다.

2.1.3. 2000년 ~ 2005년 : 암흑기

그러나 1997년에 터진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가 경영난으로 정상적인 구단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2000년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SK가 구단을 새로 창단하여 SK 와이번스가 되었다. 2001년, 자동차 회사인 기아자동차(현재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면서 KIA 타이거즈가 된다.

암흑기때의 수원 야구장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소비 축소와 1999~2000년 2년간 시행한 매직,드림 리그 양대리그 체제의 흥행 실패,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미국과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의 활약과 더불어 TV 중계를 통해 해외파의 출전 경기를 보면서 국내리그와 수준 격차를 보여줘 그로 인한 국내야구 외면, 아테네 올림픽 본선 탈락, 2002년의 한일 월드컵 열풍, 2006년 도하 참사로 연속적인 악재로 인해 흥행 암흑기를 맞았다. 1993~1996시즌이 4시즌 연속 400만 관중을 넘긴 황금기였다면, 2000-2004시즌은 5시즌 연속 200만명대 관중을 기록하는 데 그친 흑역사였다. 2002년에는 축구 열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8개구단 체제 이후 최저 관객인 230만 관객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이듬해 이승엽왕정치(오 사다하루)의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인 55개를 뛰어넘어 56개를 기록하면서 이슈몰이를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15] 이승엽의 홈구장인 대구구장의 작은 구장규모로 인해 관중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4년 이승엽이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인기는 다시 시궁창으로... 이후 국내 양대 인기구단인 롯데와 기아의 동반 부진,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2004~2006년의 극심한 투고타저 트랜드 등으로 인해 팬들의 관심도 급격히 사그라들었다지만 TV 시청률 부분에서는 암흑기 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1.4. 2006년 ~ 2012년 : 프로야구의 부흥기

2006 WBC

현재의 인기로 이어진 본격적인 프로야구의 중흥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선전이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WBC의 선전은 2000년대 중반 열기가 식었던 야구팬들의 눈을 다시 야구장으로 돌렸던 것.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에서 본선 전승을 기록하는 쾌거로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획득하며 야구에 관심없던 사람들(특히 월드컵 세대)의 관심을 다시 끌어오는 데 성공했으며[16] 2009년에는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우승으로 절정에 달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전 구장 동시 케이블TV 중계 역시 프로야구의 중흥에 큰 몫을 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부흥을 이끈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
한국 프로야구의 중흥은 전통적 인기 팀들의 부활도 한 몫을 담당했다. 2000년대 비밀번호'8888577'이라는 안습기록을 달성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2008년 로이스터 매직으로 8888577이라는 비밀번호를 끊어내는 데 성공하였고, 사직구장은 2002년 암흑기의 한해관중 13만에서 2009년 130만 관중돌파로 무려 10배가 넘는 관중몰이에 성공하면서 야구 열풍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2009년에는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 명가를 재건하며 흥행에 큰 몫을 하였다. 반면 삼성 라이온즈는 베이징 올림픽으로 유입된 신규 야구팬들에게 비인기팀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러한 흥행 돌풍에 힘입어 2009년에는 포스트 시즌까지 합치면 600만명으로 역대 최대 관중수를 기록했고, 2011년에는 정규시즌 관객으로만 680만 관중을 넘기는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2012년에는 710만 관중을 넘기며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야구의 첫 황금기로 불리던 1990년대 중반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 파이가 커진 것이다.

이러한 열풍속에서 롯데 자이언츠는 경우에는 한국 프로야구단 사상 첫 흑자 구단의 탄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장사하자 프로야구구단에 경영의 개념을 강조한 넥센 히어로즈는 2012시즌 괄목할만한 관중 수 증가를 이뤄내고, 2013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성공하며 대기업 스폰서 없이도 프로야구구단을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또한 사회 전반에 야구 열풍이 불어 사회인 야구단이 무더기로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리틀야구단 또한 두배로 숫자가 늘어나고 중학생 이상의 아이들을 위한 리틀야구단인 시니어 리틀야구단의 출범까지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야구계의 발전을 위한 발판이 만들어진 한 해였다. 2009년의 흥행에서 나온 인기와 사회적인 요구에 맞춰서 인프라의 확장에 나서면 더 큰 전성기를 불러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큰 기회로, 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2011년 창원을 연고로 하는 NC 다이노스가 제9구단으로서 공식 출범하였고(1군 경기 참가는 2013년부터) 2013년 kt 위즈가 제10구단으로 창단했다(1군 경기 참여는 2015년 예정).

2.1.5. 2013년 ~ 2014년 : 10구단 체제에 따른 선수수급과 경기력 하향 논란

2008~2012년까지의 프로야구 황금기를 거치며 신규 팬들이 많이 유입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팬들의 경기를 보는 눈도 올라가면서[17] 그간 묻혀있던 문제점들이 하나둘씩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두 가지인데 바로 프로 선수들의 실력이 저하되고, 고교 야구에서 유망주가 나오지 않는 문제다. 오심 문제야 심판들 한두해 저지르는 것도 아니니 특히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타이중 참사가 일어나면서 프로야구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 큰 나왔다. 하지만 류현진, 추신수 등의 해외진출 선수도 불참하였고 각 구단에서도 병역혜택도 없는데다가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선수차출에 매우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경기력 하향의 원인으로 유망주 감소가 제기되기도 한다. 2002년, 한국축구가 한일 월드컵 4강이라는 전대미문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한국에 축구 붐이 일어나며 운동 좀 한다는 유망주들이 대거 축구쪽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프로야구의 유망주들이 크게 줄어들어 당시에 운동을 시작한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본격적으로 성인으로서 뛰기 시작할 시점인 2010년 초에 들어서면서 유망주 부족+유망주들의 질적 저하 문제로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다만 이러한 주장만 마냥 내놓기엔, 초등학교 야구부는 매년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7년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리틀야구단의 수가 늘어났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허나 리틀야구단이나 사회인 야구단에 비해 중고교 야구부의 증가세가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야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거기에 취미 활동 이상의 의미를 주지는 않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엘리트 체육과 사회 체육의 간극이 상당히 벌어져있다는 점이나 한국 청소년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입시위주 교육 또한 고려할 부분.

유망주 수도 문제지만 사실 유망주를 육성할 시스템이 아직도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데, 매년 꾸준히 지적된 혹사 논란과 코치들의 조련 능력 부족 등등이 그 예. 그리고 예전부터 논란이 이어진 2004년 봉황기부터 적용된 나무배트 문제 등으로 인해 지난 몇 년 사이에 홈런 갯수가 크게 줄고 국제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이 부진한 면을 보여 알루미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만... 규정대로 만들어야 할 공인구를 양모의 비중을 속여 제조 판매한 업체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나무배트가 원인이 아님을 밝혀졌다.백구(白球)안에 숨겨진 검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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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KBA 공인구를 양모 94% 이상으로 제조한 모 업체의 공을 사용 후 고교야구에서 정상적인 홈런 풍년을 맞았다.

스타급 선수가 배출이 안 될수도 있는 상황에서 맞이한 "프로야구 경기력 저하 논란"은 프로야구계에 큰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00년대 중후반에 비해 성적이 침체된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쪽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반면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넥센 히어로즈 등의 팀은 오히려 성적이 급등하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시 SK 한 팀에게 엘롯기 세 팀이 승리를 조공하던 시절이라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결국 본인 팀의 성적이 떨어져서 나오는 볼멘소리로 매번 결론이 난다.

또한 2013년부터 2년간 9개구단으로 운영되어 3일동안 한 팀은 쉬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스케쥴로 인해 선수들의 경기감각과 집중력 등을 비롯한 내적인 요소들이 불안정해져 경기력에 문제가 있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2012년 후반기부터 성장세가 둔화되어 내려갈 기미를 보이던 프로야구 관중수는 2013년에는 소폭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원인에 대하여 롯데 자이언츠의 관중수가 40%로 크게 감소한 것을 드는 사람도 있지만, 치킨게임 관계에 있는 NC 다이노스의 첫해 관중수와 롯데 자이언츠 관중수를 합산해보면 2012년의 롯데 단독 관중수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보면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떠난 선수 붙잡지 않고 전력 보강을 하지 않아 공격야구를 원하는 팬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했다는 의견이 가장 타당성이 높다. 문제는 9개 구단 체제가 되어서 전체경기수는 소폭 증가했기 때문에 관중수의 맥시멈은 작년보다 더 늘었다는 것. 즉 야구 자체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2013년에는 전체적으로 약간 하락하였다고 판단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물론 KBO와 KBA도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은 아니고, 1차지명 부활과 2차 드래프트 제도 도입[18], 고교야구 창단시 지원 등 프로야구의 전략적 우위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구단이 10개팀으로 늘어나면서 정읍 인상고, 시흥 소래고, 수원 장안고, 의정부 상우고 등 신규 야구단 창단이 줄을 잇고 있고,새로 창단하는 서울 디자인고 야구부[19] 같은 케이스들이 등장했으며 경기양산에서도 야구부 창단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kbo에서 고교야구 활성화 대책을 위해 기존의 팀들에게 10억 6천만원을 지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신생팀 창단시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실로 율곡고등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하고, 2008년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던 경주고가 부활하면서 한국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고교야구팀이 60개를 돌파했으며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고교야구 선수는 역대 최다를 2012년부터 갱신하고 있다.기사(2014년 7월 기준 60팀, 2066명)

허나 10구단 체제는 결과적으로 프로야구의 저변을 늘리는 판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60개밖에 안 되는 고교야구 인재층 중에 실력이 미달되는 선수까지 프로층에 유입될 수도 있으며, 대학야구에도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전망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아마야구 저변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 많다. 고양원더스 경기 수 좀 늘려달라고

아무튼 이러한 문제점들이 불겨지며 한국 제1의 프로스포츠의 자리가 위험해질수 있다는 위기론이 KBO와 야구관계자들이 가지게 되었고 선수협에서도 이러한 위기의식에 동참해서 2014년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수를 3명으로 늘리는 방안이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특히나 3명 보유에 2명 출전이 가능하며 3명 다 한 포지션에 집어넣는 것이 불가능하게 적용될 것으로 보여지며 이로 인해 팬들이 원하는 외국인 거포들도 맞이할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2013년 11월 5일 외국인 선수 제도를 위와 같이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

또한 리그 종료 후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의 몸값 거품 논란이 2012년보다 더 말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2012년보다 FA 선수들의 이름값이 컸다고는 하지만 2011년 시즌 후 이택근의 50억 계약을 시작으로 2012년 시즌 후 김주찬도 역시 50억 계약을 맺었고 이에 더불어 스토브리그 이전 대놓고 FA 영입을 선언한 한화와 NC로 인해 선수들이 자신들의 몸값에 대한 대우를 더 받고 싶어한다는 분위기가 흘렀다. 선수들의 전체적인 기량이 나아지지 않고, 실력이 검증된 선수들은 희소하다보니 FA의 거품이 증가하는 추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수들은 두터운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FA로 인한 선수이동이 대거 일어나 FA 영입비용이 총 523억이 나왔다. 이번 FA 빅4로 평가받은 강민호, 장원삼, 정근우, 이용규의 몸값만 272억 합계였다. 이 모든 것은 2014 시즌 후 FA를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판이 작고 선수수급이 메이저리그나 일본야구보다 부족한 국내야구에서 이렇게 몸값이 과열될 경우 그 나비효과가 좋지 않게 작용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반면 슈퍼스타들이 나와서 몸값이 올랐고 나머지 쩌리(...) 선수들이 몸값 상승의 효과를 같이 봤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게다가 고연봉은 운동 유망주들이 야구로 들어오게하는 유인 요건이 되며, 해외로 바로 가려는 고교 유망주들이 한국에 남을 이유가 될 수 있다.


2013년은 분명 프로야구에게 있어서 위기의 메시지를 던져준 해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가 가장 큰 고민거리로 남게 되었다.

2014년부터 눈감고 아웅이었던 "외국인 선수 연봉 상한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유명무실했던 30만 달러 상한선 폐지.

2.1.6. 2015년 : KBO 리그로의 재출발, 그리고 사상 첫 10구단 1군 진입

2015년부터 한국야구선수권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KBO 리그라는 브랜드로 바뀌며 구단을 운영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사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SAFE 캠페인이 벌어지며 메이저리그[20]일본프로야구의 일부구단들 처럼 입장시 음식물 및 음료의 반입 금지를 처음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구단들의 배를 불리는게 아니냐는 비판부터 해외의 사례를 들어 구단의 매출액이 올라가며 구단의 자립을 위해 지지한다는 의견으로 나누어 져 있다.[21]

2.1.7. 기타

거의 대부분의 규격은 변함이 없는데 마운드는 매우 드물게 변화를 준다.

1982 ~ 1989 : 15인치
1990 ~ 1999 : 10인치
2000 ~ 2006 : 13인치
2007 ~ 현재 : 10인치

1980년대 투수들 성적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투수에게 유리한 15인치가 10인치로 낮아지고 리그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99년 타고투저를 만나서 마운드를 높였는데 다시 투고타저현상을 만났다. 사실 원래 돌고 도는거라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은 아니다. 참고로 2006년 이대호가 홈런왕에 오를 때 시즌 홈런 개수가 26개였다.(...) 10인치 마운드에서는 2009년 처럼 타고도 있었고 2012년처럼 투고도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 역대 1위의 타고투저 시즌을 맞이했다. 10인치라서 다행인게 15인치였으면 2014년 터져나온 기록들이 안 나올 확률이 매우 높았다.

2008년 설문 조사에서 선호구단 1위가 롯데 자이언츠, 2위가 KIA 타이거즈로 나왔다. 요즘 설문조사에서는 삼성이 1위하는 경우가 많다. 저 1,2위 조사가 의미가 있는지는 알아서 판단할것.

2011년,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한국프로야구의 경제 파급효과는 자그만치 1조 2,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같은 해 7,800억 원을 기록한 K리그와 2,000억 원을 기록한 한국프로농구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로 근래의 야구 인기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팀당 133경기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팀당 128경기제로 바뀐 이후 2015년부터는 팀당 144경기 (총 720경기)로 확대하기로 확정되었다. 경기 숫자로만 보면 늘어나는거 같지만 실제로는 9구단으로 운영하던때와 리그의 기간은 차이가 없는데 왜냐하면 9구단 체제에서는 한 팀은 반드시 쉬어야만 하는데 10구단 체제에서는 쉬는 대신 경기를 하게 되므로 144경기를 하는데 걸리는 날짜는 동등하다. 숫자로 계산하자면 2013~2014 시즌의 경우 (128 * 9) / 2 = 576경기를 하루에 4경기씩 진행하니 총 144일이 든다. 10구단 체제에서는 144경기를 쉬는 팀 없이 진행하므로 같은 기간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슈퍼 한국시리즈 개최해야지.

2.2. 현재 구단[22]

팀명 연고지 참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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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 서울특별시 2008~
Nexen Hero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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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서울특별시 1982~
Doosan Bears[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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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부산광역시 1982~
Lotte Gi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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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대구광역시 1982~
Samsung L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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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대전광역시 1986~
Hanwha Eagl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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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광주광역시 1982~
KIA Tigers[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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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위즈 경기도 2015~
kt wiz 수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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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서울특별시 1982~
LG Twins[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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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경상남도 2013~
NC Dinos 창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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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인천광역시 2000~
SK Wyverns

축구, 농구 혹은 배구[27]와 달리 왜 팀명에 지역명이 아예 없냐고 묻는다면 필요가 없어서라고 답할 수 있다.[28] 전국 순회 리그로 시작한 축구와 배구와는 달리[29] 처음부터 확고한 지역연고로 시작해 지역명 안 넣어도 연고지를 모를 리 없고, 초창기엔 광역연고라 지금 도시연고제라도 지역명 넣으면 소외감 느낀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롯데 자이언츠라고 하면 부산 울산 경남까지 내 팀이라는 소속감이 드는데 부산 자이언츠라고 하면 부산 말고는 소속감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게 된다. 또 해태가 호남 타이거즈라고 이름을 지어서 광주(당시에는 전남 소속) 전남 전북을 아우른다 해도 비호남 지역민들은 아무래도 심리적 거리감이 더 생길 수 있다. 기업명은 전국 어디서나 일반적이라서 장점을 가지기도 한다. 연고지 없는 전국 투어리그는 어떨까? 이를 증명하듯 2000년대 초반에는 유니폼등에 지역명 등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광역연고+타지역팬의 반발로 결국 빠졌다.[30][31]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지역명 붙이는 다른 종목들 인기가 야구를 넘지 못하다 보니 지역명이 큰 이슈가 되지는 못한다.

허구연 하일성의 증언에 의하면 초창기에는 지역명으로 중계를 하거나 뒤에 붙은 베어스, 라이온즈 등을 사용하였는데 프로스포츠로서 자립이 힘든 한국의 실정상 기업명을 불러줘야 모기업이 구단에 더 관심을 가지고 좋은 시선을 줄것이라며 기업명을 쓰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정책이 없었으면 넥센 히어로즈 같은 케이스는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명을 쓰는 프로팀만 옳고 기업이름 외치는 팬들은 우스운거라며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 세계 많은 종목에서 기업명이 들어간 프로 스포츠 팀을 만나볼 수 있다.[32], 어느 한 쪽만 옳은것은 절대 아니다.

평소에는 위의 팀들이 단일리그로 경기를 하다가 올스타전에서는 나눔[33]과 드림[34]으로 나누어진다.
과거의 팀명은 야구팀 관련 정보 항목 참조. 퓨처스리그 참가팀은 KBO 퓨처스리그 항목 참조.

3. 한국프로야구선수

3.1. 신인 드래프트

3.2. 2차 드래프트

4. KBO 시범경기

정규시즌이 들어가기전 치르는 경기. 자세한 내용은 KBO 시범경기 항목 참조.

5.2. 역대 우승팀

한국시리즈에서 승리한 팀이 당해 시즌 우승팀으로 인정한다. 준우승도 한국시리즈 진출해서 패한 팀으로 정한다. 3위 이하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팀 중 정규 시즌 상위 순서대로 정한다.[37] 단, 1985년 시즌은 1985년은 전/후기 모두 1위팀이 같아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고 삼성 라이온즈가 통합우승.[38]

연도 우승 감독 성적 승패 현황 준우승 감독 MVP
1982년 한국시리즈 OB 베어스 김영덕 4승 1무 1패 △XOOOO 삼성 라이온즈 서영무 김유동(OB 외야수)
1983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1무 OOO△O MBC 청룡 김동엽 김봉연(해태 내야수)
1984년 한국시리즈 롯데 자이언츠 강병철 4승 3패 OXOXXOO 삼성 라이온즈 김영덕 유두열(롯데 외야수)
1985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김영덕 전, 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 미개최
1986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1패 OXOOO 삼성 라이온즈 김영덕 김정수(해태 투수)
1987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0패 OOOO 삼성 라이온즈 박영길 김준환(해태 외야수)
1988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2패 OOOXXO 빙그레 이글스 김영덕 문희수(해태 투수)
1989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1패 XOOOO 빙그레 이글스 김영덕 박철우(해태 내야수)
1990년 한국시리즈 LG 트윈스 백인천 4승 0패 OOOO 삼성 라이온즈 정동진 김용수(LG 투수)
1991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0패 OOOO 빙그레 이글스 김영덕 장채근(해태 포수)
1992년 한국시리즈 롯데 자이언츠 강병철 4승 1패 OOXOO 빙그레 이글스 김영덕 박동희(롯데 투수)
1993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1무 2패 OX△XOOO 삼성 라이온즈 우용득 이종범(해태 내야수)
1994년 한국시리즈 LG 트윈스 이광환 4승 0패 OOOO 태평양 돌핀스 정동진 김용수(LG 투수)
1995년 한국시리즈 OB 베어스 김인식 4승 3패 XOOXXOO 롯데 자이언츠 김용희 김민호(OB 내야수)
1996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2패 OXOXOO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 이강철(해태 투수)
1997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4승 1패 OXOOO LG 트윈스 천보성 이종범(해태 내야수)
1998년 한국시리즈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 4승 2패 OOXOXO LG 트윈스 천보성 정민태(현대 투수)
1999년 한국시리즈 한화 이글스 이희수 4승 1패 OOXOO 롯데 자이언츠 김명성 구대성(한화 투수)
2000년 한국시리즈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 4승 3패 OOOXXXO 두산 베어스 김인식 톰 퀸란(현대 내야수)
2001년 한국시리즈 두산 베어스 김인식 4승 2패 XOOOXO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 타이론 우즈(두산 내야수)
2002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 4승 2패 OXOOXO LG 트윈스 김성근 마해영(삼성 지명타자)
2003년 한국시리즈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 4승 3패 OXXOOXO SK 와이번스 조범현 정민태(현대 투수)
2004년 한국시리즈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 4승 3무 2패 O△X△OX△OO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 조용준(현대 투수)
2005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 4승 0패 OOOO 두산 베어스 김경문 오승환(삼성 투수)
2006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 4승 1무 1패 OXOO△O 한화 이글스 김인식 박진만(삼성 내야수)
2007년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 김성근 4승 2패 XXOOOO 두산 베어스 김경문 김재현(SK 지명타자)
2008년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 김성근 4승 1패 XOOOO 두산 베어스 김경문 최정(SK 내야수)
2009년 한국시리즈 KIA 타이거즈 조범현 4승 3패 OOXXOXO SK 와이번스 김성근 나지완(KIA 외야수)
2010년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 김성근 4승 0패 OOOO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 박정권(SK 내야수)
2011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4승 1패 OOXOO SK 와이번스 이만수 오승환(삼성 투수)
2012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4승 2패 OOXXOO SK 와이번스 이만수 이승엽(삼성 내야수)
2013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4승 3패 XXOXOOO 두산 베어스 김진욱 박한이(삼성 외야수)
2014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4승 2패 XOOXOO 넥센 히어로즈 염경엽 야마이코 나바로(삼성 내야수)

5.3. MVP, 신인왕

시즌 MVP와 신인왕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시상한다. 역대 수상자 목록은 역대 KBO 리그 MVP, KBO 리그 신인왕 역대 수상자 항목 참조.

5.4. 골든글러브

매해 12월 11일에 한 해 프로야구 성적을 토대로 포지션 별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역대 수상자 목록은 KBO 리그 골든글러브 역대 수상자 항목 참조.

5.5. 타이틀

시즌 종료 후 MVP, 신인왕과 함께 발표된다. 타자는 홈런, 타율, 안타, 득점,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8개 부문, 투수는 승리, 승률, 탈삼진, 평균자책점, 홀드, 세이브의 6개 부문에서 1위의 성적을 올린 선수에게 타이틀을 수상한다. 역대 수상자 목록은 KBO 리그 역대 타이틀홀더 항목 참조.

8. 우승 트로피

한국 프로야구에서 우승을 했을 경우 지급 되는 우승컵은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와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로 나뉜다.

8.1.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

8.1.1. 1982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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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우승 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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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트로피는 무식하게 컸다. 들고다니기는 커녕 아래에 달려있는 바퀴로 질질 끌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기단부 하단에 당시 리그 참가했던 팀들의 엠블럼이 박혀있는게 특징중 하나. 이 트로피는 무려 17년간 사용되었고 해태 타이거즈가 9개로 가장 많이 가져갔다. 다음이 롯데 자이언츠(2개), 엘지 트윈스(2개), 두산 베어스(2개), 삼성 라이온즈(1개), 현대 유니콘즈(1개) 순으로 가져갔다.

8.1.2. 1999년 ~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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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화 이글스 2009년 KIA 타이거즈

이후 우승 트로피는 아주 간소하게 변했는데 1999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디자인 변경이되었다. 이전 트로피와는 확연히 다른데 우선 사람이 들수 있고(...) 좀더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트로피는 12시즌이 사용되었으며 SK와이번스와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스가 각각 3개씩을, 한화 이글스, 두산 베어스, 기아 타이거즈가 나란히 1개씩을 가지고 갔다.

8.1.3. 2011년 ~ 현재

우승 트로피
무게 17.5kg
높이 65cm
제작사 골든듀
시가 5,000만원

2011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 보석 브랜드인 골든듀에서 제작하며 트로피 제작에도 상당히 신경을 썻다.
기존의 트로피들이 원형을 만들어서 제작하는 반면, 한국시리즈 트로피는 한조각 한조각을 자르고 형태를 만들어 조립하는 100% 핸드메이드 방식으로 제작되며, 화이트골드로 도금한 후 일부분에 24K 옐로 골드를 입혔다. 야구공에는 화이트골드로 도금한 185g의 스털링 실버에 1천개가 넘는 큐빅이 사용되었으며, 골든듀의 마스터장인들이 1.000개가 넘는 큐빅을 하나하나 발로 물리고, 스티치 하나하나를 에나멜로 채워 섬세하고 화려한 보석처럼 만들었다.##

컵의 외벽이자 중앙 경기장을 에워싸고 있는 10개 판은 경기장 내 10명의 선수를 상징하는 것이며. 빛처럼 위로 뻗는 역동적인 디자인은 선수들의 투혼, 관중의 함성, 웅장한 경기장의 느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 트로피는 단 한개만 제작되어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팀에게는 1년간 보관 할수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1년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경기장에 들고나와 KBO에 반환하며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1년간 보관할수 있는 권리를 준다. 그리고 우승 트로피와 함께 복제 트로피가 제공되며 진품 트로피는 1년후 다시 반납을 해야하지만 복제 트로피는 영구보관이 가능하다.진품 트로피는 만들어지고나서부터 삼성이 계속 갖고갔다가 다시 내놨다 들고가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8.2.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

2008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 2010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

이전까지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한국시리즈 우승팀만 진정한 우승으로 취급했고 리그 우승은 단순히 "1위팀"이라고만 평가했다. 하지만 2009년부터 페넌트레이스 팀에 대한 대우와 상금 분배에 대해 실질적으로 우승팀에 합당한 수준까지 올리는 방안이 모색되었고 그결과 이전까지 "페넌트레이스 1위"라고 기록되어 있던 리그 트로피에 "정규리그 우승"이라고 바뀌게 된다. 그리고 트로피 모양도 획일화 되어 있는데 2008년까지는 황동색을 띄고 있다가 2009년 부터 스테인리스 재질처럼 표면의 색이 바뀐다.

2011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 2012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
보유팀 : 삼성 라이온즈

2011년부터 KBO에서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기념하며 트로피를 특별히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우승 트로피는 한국시리즈 트로피와 다르게 페넌트레이스 1위팀이 영구보관하게 되며, 시즌마다 디자인이 각각 다르게 제작되어 지급된다.

9. 국제 대회의 성적

국가대표팀 경기의 경우에는 상당히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으나 클럽대항전의 경우에는 썩 좋지 않다. 7번의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1회 우승 2회 준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자국리그를 중시하는 프로야구의 특성상 시즌이 끝나고 열리는 대회에 대해서는 야구계나 팬들이 관심 가지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39]

국가대표팀 성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10. 중계 방송

방송국 캐스터 해설위원  
FM 라디오
KBS 제2라디오 김관동,이재홍 동봉철
KBS 대전 제2라디오 김연선,박명원 김병준 [40]
부산MBC 표준FM 김세원 최효석 [41]
대구MBC 표준FM 이동훈 홍승규
대전MBC 표준FM 김학선,임세혁,김경섭 여정권
MBC경남 창원본부 표준FM 김진철 한만정,김형표 [42]
KNN 라디오 이현동 이성득 [43]
TBC DreamFM 김대진 서석진 [44]
TJB Power FM 박영식 김성호 [45]
지상파 TV & DMB
KBS 2TV 김현태 이용철
MBC TV 한명재, 김완태 허구연
부산MBC TV 김동현 한만정
대전MBC TV
SBS TV 정우영 이순철
mYTN DMB SBS Sports 수중계
U1 SKY Sports 수중계
한국경제(DMB) KBS N sports 수중계
케이블TV PP
KBS N SPORTS 강성철,김현태,이기호,표영준 이용철,송진우,조성환
MBC SPORTS+ 정병문,정용검,한명재 박재홍,양준혁,허구연,이종범,정민철, 김선우 수도권 DMB 동시송출
SBS Sports 윤성호,이동근,정우영 안경현,이순철, 최원호, 이종열
Sky Sports 임용수 이효봉 , 김진욱
SPOTV+ 김철민 진필중, 김상훈, 동봉철, 민훈기

11. 사건 사고

12. 리그 레벨차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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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날 시구는 전두환이 했고, 경기 결과는 이선희를 상대로 이종도가 끝내기 만루홈런을 쳐내며 MBC청룡이 승리를 가져갔다.
  • [2]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에도 한동안 고교야구의 인기는 프로야구 못지 않았으나, 프로야구 초창기 당시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억지로 마구 줄이면서(당시 야구계는 고교야구만 인기있어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에 침묵하거나 동의하였다.) 그 폭발적 인기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프로야구의 흑역사로 언급될만하다.
  • [3] 이호헌과 한국 프로야구를 계획했고 주도했던 이용일 前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실업야구 최강이었던 "롯데 자이언트"가 서울에 오는것이 프로야구 흥행에도 도움이 될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본에서 이미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어 프로구단 운영 능력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고 한다.
  • [4] 바로 LG의 전신이다. 실제로 럭키금성은 프로야구에 뛰어들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출범논의단계에서 그룹 고위층은 해외에 있어서 제대로 접촉을 못했다. 당시 구자경 회장이 귀국하여 자초지종을 듣고 프로야구 출범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여하튼 럭키 금성은 KBO의 믿는 구석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롯데가 서울을 내놓으라고 나오자 부산 경남을 대신 줄 그룹은 얼마든지 있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 [5]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의 고향이 경남 의령이었고 삼성그룹의 실질적 모태인 제일제당이 부산에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삼성도 부산 경남 연고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부산 경남에는 롯데, 럭키금성 등 다른 대안이 많았기 때문에 삼성상회가 설립된 대구를 연고지로 하는 안이 추진되었다. 나중에 대구 출신인 소병해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확정되었다.
  • [6]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대구 출신이지만 학창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 [7] 결과론이지만, 창단과정에서 한국화약에는 접촉도 하지 않았고, 한화는 기회가 온 줄도 모르고 날려버렸다. 당시 충청권은 연고기업이 없어서 OB의 참여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한국화약에 먼저 접촉했다면, OB는 참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 [8]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중에 현대는 해당 연고지에 현대 유니콘스로 프로야구계 입문.
  • [9] 매년 발간중. 비매품이나 도서관에서 확인 가능하며 2008년도 연감부터는 KBO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 [10] 당시 롯데는 일본 롯데 포함이라면 몰라도 국내 상황만으로는 럭키금성보다 재계순위가 낮았다.
  • [11] 재단 학교인 북일고에 야구부를 창단해 공격적인 스카웃을 하기 시작했다.
  • [12] 개막전은 MBC의 이종도가,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는 OB의 김유동이 기록했으며 공교롭게도 이 두 방의 만루홈런을 전부 삼성의 이선희가 두들겨 맞았다(...). 이 때문에 한동안 만루홈런으로 동터서 만루홈런으로 해 저물었다 란 유행어가 떠돌았다.
  • [13] 69타점으로 타점 1위까지 먹었다(...).
  • [14] 팀내 좌완투수가 없어서 계열사(삼미특수강) 직장야구팀에서 뛰던 감사용(실업팀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뿐 엄연히 전문 선수였다.)을 영입할 정도였다.
  • [15] 2003년 삼성의 이승엽-마해영-양준혁은 가히 괴물타선이었다.
  • [16] 이러한 효과를 편승효과(bandwagon effect)라고 하는데, 당시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배출했던 SK와 두산이 이 효과로 신규 팬들을 가장 많이 흡수했다.
  • [17] 단순히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거나 경기를 즐기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 야구 기록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웬만한 라이트 팬들은 관심 밖인 2군 선수들은 물론 아마 야구 유망주들까지 살피기도 하는 소위 하드코어 팬들이 늘어났다.
  • [18] 그러나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상당히 많이 드러났다.
  • [19] 링크된 기사에는 33년만에 서울 지역에 고교야구 팀이 새로 창단했다고 적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정보다. 서울디자인고 창단 이전 서울 지역 고교야구 팀 중 막내가 덕수고(1980년 창단)여서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사이에 창단했다가 해체한 팀들(광영고, 한서고, 한광고, 광문고)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 메이저리그의 경우 양키 스타디움처럼 물한통 못들고 들어가게 막는 곳도 있지만 다저 스타디움처럼 예약을 하게 되면 음식물을 일정량까지 반입을 허용해주는 곳도 있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경기장 입장때 음식물 반입검사와 더불어 총기검사도 강력하게 하는 편이다.
  • [21] 참고로 메이저리그는 음식물 반입 및 알콜 반입을 제한하고 경기장 내에서 소비할수 있도록 권장하기 때문에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구장 내에서 소비하는 금액이 큰편이다. 2013년 기준 4인기준 경기장에서 쓰는 금액이 입장료 포함해 23만원을 쓰는 것으로 밝혀졌고, 2014년 다저 스타디움은 1인당 경기장에서 사용한 금액은 56달러(한화 5만 6천원)라고 한다.기사.
  • [22] 2014년 현재 도시연고제를 시행 중이며, 포항, 군산 등 제 2 구장 지역은 사실상 중립 지역이다.
  • [23] 1982~1998 시즌까지는 OB 베어스의 명칭으로 운영, 1982~1984 시즌까지는 대전광역시의 임시연고 상태, 정식 서울연고는 1985 시즌부터 해당. 1999 시즌부터 팀명의 통칭을 모기업 두산으로 변경, 과거 통칭이었던 OB는 이후 브랜드의 매각으로 인해 쓸 수 없게 된다.
  • [24] 1986~1993 시즌까지는 빙그레 이글스의 명칭으로 운영, 1994 시즌부터 팀명의 통칭을 모기업 한화로 변경. 과거 통칭이었던 빙그레는 브랜드의 계열분리로 인해 쓸 수 없게 된다.
  • [25] 1982~2001 시즌 전반까지는 해태 타이거즈의 명칭으로 운영, 현재 팀명으로는 2001 시즌 후반부터 운영중.
  • [26] 1982~1989 시즌까지는 MBC 청룡의 명칭으로 운영, 현재 팀명으로는 1990 시즌부터 운영중. 구단의 인수인계 과정에서 LG그룹은 야구단 운영권만 넘겨받고 MBC 청룡이라는 과거 '법인명'은 1993년 6월까지 명목상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여 유지되다가 폐업하였다. 이 때문에 리그참여 시점을 1982년이냐 1990년이냐로 놓고 혼란스러웠던 부분도 있었지만, 현재 한국야구위원회 공식사이트에 분명히 원년부터의 기록을 승계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원년인 1982년부터로 적는다.
  • [27] 농구나 배구는 축약명이 기업명이긴 하지만 정식 팀명에는 지역명이 들어간다.
  • [28] 큰 원인은 사실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서종철 前 총재가 지역감정 조장 문제를 들며 프로야구에 지역명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막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문제로 기업이라든지 구단들이 알아서 지역명 넣는 걸 꺼려하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지역 중심으로 방향을 돌린 일본프로야구와는 크게 차이나는 부분.
  • [29] 농구는 처음부터 지역연고제였다. 하지만 코리아텐더라는 기업이 참가하자 당시 세 글자까지 밖에 표기가 안된 당시 전광판 덕에 코리아텐더 표기가 심히 골룸해져서 지역명을 붙이게 됐다. 국가대표 될 뻔
  • [30] 예를 들어 한화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도 유니폼에 '대전'이 있었는데 충북팬과 충남팬들, 특히 홈경기가 열리는 청주팬의 반발로 결국 유니폼에서 빠졌다고 관계자가 밝힌바 있다. 충청 붙이면 되잖아?
  • [31] 그나마 롯데 자이언츠가 2000년대 중반 자매구단인 치바 롯데 마린즈(한국과는 달리 팀명에 지역명이 들어간다)와 엠블럼을 통일하면서 로고에 지역명이 들어간 최초의 구단이 되었다. 이후 NC 다이노스, 두산 베어스, 넥센 히어로즈, kt 위즈가 로고에 지역명을 넣게 된다.
  • [32]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P가 필립스의 머릿글자이다), 독일의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등이 좋은 예이다. 그래도 여기는 지역명도 들어가는데?
  • [33] 넥센, 한화, KIA, LG, NC
  • [34] 두산, 롯데, 삼성, SK, KT
  • [35] 1999년까지는 강원도+경기도+인천광역시를 모두 연고로 했으며, 2000년부터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삼았다.
  • [36] 2014년에는 경기가 배정되지 않았다. 군산상고, 전주고가 NC 다이노스의 1차지명 권역에 들어가서 그랬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1차지명 권역 배정은 제2구장 홈 경기와는 무관하다.
  • [37] 정규 시즌 4위로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오더라도 일단 한국시리즈만 진출하면 최소 준우승은 확보된다. 2006년 시즌 한화이글스는 정규 시즌 성적은 3위이지만,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시즌 준우승으로 인정한다.
  • [38] 그 이후 생긴 규정은, 전·후기 리그 2위 안에 든 4개의 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주되,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그 팀은 부전승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이고 두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바로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정이 처음으로 적용된 1986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리그의 상위 두 팀 순위가 전기에는 삼성-해태, 후기에는 OB-해태 순으로 되었지만 두 번 모두 2위를 한 해태는 한국시리즈 직행하고 오히려 한 번씩 1위를 한 삼성과 OB는 다른 한 번은 2위 안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결국 한국시리즈 직행한 해태가 우승을 차지했다.
  • [39]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처럼 주요 선수들의 경우에는 아시아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 [40] 한화 이글스 대전 홈 경기 주1회 중계
  • [41] 롯데 자이언츠의 시즌 전경기를 중계한다.
  • [42] NC 다이노스 마산 홈 경기 중계
  • [43] 롯데 자이언츠의 전 경기를 중계하며, 롯데 휴식일에는 NC 다이노스의 경기를 중계한다. 롯데 혹은 NC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포스트시즌 전 경기를 중계한다.
  • [44] 삼성 라이온즈 전 경기 중계
  • [45] 한화 이글스 대전 홈 경기 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