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irected from page "5.17 쿠데타"

E,AHRSS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last modified: 2015-02-11 04:07:14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진행
4. 서울역 회군


1. 개요

1980년의 5.17 쿠데타. 그 전해 1979년12.12 군사반란과 연이어서 보면 6개월이나 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수식어가 있다.

2. 배경

1972년 10월 유신에 의하여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정우회, 긴급조치 등을 수단으로 하여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지배했다. 각각의 내용은 항목 참조.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유신 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1]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사살되면서 막을 내린다. 박정희의 사망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게 중요하다. 계엄은 1.비상계엄과 2.경비계엄으로 나뉘며 지역으로 보면 1.전국계엄과 2.부분계엄으로 나뉜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은 "부분계엄"에 해당하며 따라서 계엄사령부가 국방부장관을 거쳐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전국계엄의 경우에는 계엄사령부가 대통령 직속이 된다. 즉, 제주도를 포함한 비상계엄령을 내리면 명령체계가 대통령 바로 밑에 내각 대신 계엄사령관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본격 중요해진 제주도

12.12 군사반란이 터지고 그런 상황도 계엄사령관이 교체되고, 뭐되고 소란이 있긴 했지만 여하간 계엄령 하에서 일어난 일들인 것. 어차피 이전에도 독재체제였고, 부마민주항쟁으로 경남 지역등은 애초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이고, 무엇보다 체제의 큰 변화가 없었기에 아주 큰 차이는 없긴 했지만...

3. 진행

이듬해인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온다. 각 대학은 학생회를 재조직하고, 민주공화당신민당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이대로만 잘 돌아갔으면, 한국의 군부정권은 18년만에 막을 내렸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점차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신군부 퇴진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5월 15일 울역 회군 이후 자신감을 가지게 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부를 몰아붙여 1980년 5월 17일 21:30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국무회의에 상정하게 했다. 이 때 신군부가 표면적으로 내새운 계엄령의 확대 이유는 '사회 혼란에 따른 북괴의 남침 위기'였다. 정작 이 '사회 혼란'과 '남침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신군부 본인들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후안무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외부와의 모든 전화선이 끊어지고 중앙청 내부 계단과 복도에 1~2미터 간격으로 무장군인들이 배치된 공포분위기 속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장관들이 참석한 확대국무회의가 열렸다[2]. 당연히 내각은 전국에 비상 계엄 선포를 의결하였다. 단 8분만에, 아무런 토론과 설명도 없이. 5.16 군사정변 당시 상황을 오판한 윤보선이나, 무작정 도망간 장면보다도 어이가 없는 통과였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순간은 을사조약 강제통과 이후로 최초였다고 보아도 좋다.

변한건 딱 두가지, 사실상 정국에 상관 없는 제주도의 계엄령과, 대통령과 계엄사령관 사이에 국방부장관만 사라진것 뿐이었지만 대통령이 허수아비인 상황에서 이것은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군부에게 모든 전권을 맡겨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발표하고 군부대가 진주하였다. 서울역 회군이후 전국 학생회장단이 모여있던 이화여자대학교를 급습하여 전원 체포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해온 재야인사와 사회운동세력을 지명수배, 일제 검거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일어난 광주에는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발포하는 등 강력하게 탄압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동시에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던 제도권세력인 DJ, YS, JP의 삼김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5월 17일 당일 김대중은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20여명과 함께 전격 연행되어[3]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뒤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고, 김영삼은 오전 10시에 가택 연금되었으며, 김종필은 보안사령부에 감금되었다. 18일에는 김종필이 이후락 등을 포함한 공화당 거물 10여 명과 함께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되었고, 신군부의 협박 앞에 재산을 모두 헌납하고 9월 정계를 은퇴한다. 단 하루만에 모든 정적들이 제거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와 기존 정당들은 모두 사이좋게 해산되었고, 이후 여야를 막론한 관제정당들을 조직하고 제5공화국 헌법을 준비하는 등 모든 것은 전두환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물론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국군기무사령부가 만들었을 정도니...[4]

5월 21일, 무력감을 느낀 신현확[5] 내각은 총사퇴했다. 내각조차 없는 상황에서 최규하는 완벽한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렸고 결국 8월 15일 하야했다[6].

뒤이어 9월 전두환이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의 득표율로김일성과 타이기록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90.1%의 득표율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군사정권은 계속된다.

4. 서울역 회군

이걸 막을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5월 13일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 정점에 올라, 서울역에는 십만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운집했다. 군부는 저녁 8시까지 이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군부가 이를 진압한다는 것은 수도 한복판에서 킬링필드를 만들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이는 이승만하다가 쫒겨났던 일이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가 일어날 수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상황이 된다면 미국과 정치권이 가만히 손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6월 항쟁 때를 생각해 보자.

그런데,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더이상 시위가 과열되면 군부에게 무력개입의 빌미를 준다고 오판하여 전국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여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자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이틀 후,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군부독재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위화도 회군에 빗대 흔히 울역 회군이라고 한다.

여기에 반대했던 사람이 서울대 대의원회장 유시민과 고려대 총학생회장 계륜. 여담으로 이 세 명은 나중에 정계에서 재회하게 된다. 특히 심재철은 후에 한나라당 정치인이 되는데, 유시민이 야권의 정치인이 되면서 상당히 비교되었다. [7] 훗날 유시민은 '심재철은 최소한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물론 심재철은 당시에는 유혈을 줄여야한다고 생각했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
  • [1] 여담으로 중앙정보부의 長은 장관이 아니라 部長이다.
  • [2] 이때 정무수석이던 고건의 행적이 훗날 문제가 된다. 본인은 군정에 반대해서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칩거했다고 하나, 아무런 말없이 잠적했다가 모든 상황이 정리된 일주일 후에야 나타났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어느쪽이던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관료 특유의 무색무취한 보신주의라는 비판이 많다.
  • [3] 당연히 영장 따위 없는 불법 구속이었다.
  • [4]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야당인 민주한국당으로 공천확정이 되었다는 황당한 코메디도 있다.
  • [5] 이 신현확은 대단히 꼬장꼬장한 인물로 전두환에게도 먼저 노재현 국방부 장권의 제가를 받아오라는 호통을 치기도 했고, 일제시대부터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한 엘리트였지만 친일행위를 기피해 부임하진 않아 후에 친일파인명사전에서도 이의신청에 따라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50년대 말부터 마흔의 나이로 장관에 오른 경제계의 엘리트 관료였고, 이 사임 이후로는 삼성물산 등 기업가로서 지낸다. 하지만 동시에 비상계엄령 해제에 동의하지 않고 개헌에 대해서 속도 조정을 주문하는 등 최규하를 대신한 정권의 실질적 대변자로서 학생운동계에선 전두환과 맞먹게 취급되기도 했다. "TK 인맥의 대부"라고 불리기도 한다.
  • [6] 이 과정에서 최규하의 하야를 5시간에 거쳐 설득한 인물이 그의 오랜 친구 김정렬로, 그는 이 공로로 제5공화국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다.
  • [7] 참고로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도 정계에 입문해 있다. 제 14, 16, 17, 19대 민주당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