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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last modified: 2016-06-05 00:27:4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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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8일 육사생도의 5.16 쿠데타 지지 시위를 지켜보는 5.16 쿠데타의 주도 세력. 좌측부터 박정희, 박종규, 이낙선, 차지철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혁명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 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혁명공약 전문)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ㅡ 당시 대통령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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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후 한달 뒤 발행된 우표. (오른쪽)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박정희의 이력
3. 과정
4. 들통이 났지만 성공한 쿠데타
5. 각계의 반응과 평가
5.1. 군사독재정권 시대와 오늘날의 평가
5.2. 지식인들의 반응
5.3. 일반 국민 및 대학생들의 반응
5.4. 북한의 반응
5.5. 미국의 반응
6. 이후
7. 해외 사례들과의 비교
8. 주요 인물
9. 여담
10. 관련 항목

1. 개요

1961년 5월 16일 대한민국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장장 18년 간의 박정희 장기집권(국가재건최고회의 2년+대통령 16년) 및 박정희-전두환-노태우[1]로 이어지는 32년 간의 군사독재정권이 사실상 시작된 날이다.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군부는 한국의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이후 30여년 동안 한국의 정치·사회 등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2. 배경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이승만 대통령 하야 당시 외무장관이던 허정[2]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이 구성되어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10년이 넘는 독재정치가 한국사회에 남긴 해악은 너무나 지대했고, 사방팔방에서 터져나오는 국민들의 요구에 모두 응하지 못했다.

이후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경제는 나아진 것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집권여당민주당의 신, 구파간 갈등이 빚어지며 정치권의 밥그릇싸움이 격화되자, 국민들은 이러한 현상에 크게 실망하여 장면 내각을 성토하는 데모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3][4] 덤으로 북한의 대남 도발이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자 정부에 대한 불신은 한층 높아지게 된다. 게다가 비대해진 군부에서 인사적체 등으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면 정부는 국군을 감축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재원을 경제개발에 투자하려 했다. 당연히 장교들 입장에서는 '너를 실직자로 만들어 주마'라는 정부의 정책에 반발할 수 밖에 없다. 지금처럼 여건이 좋아서 퇴역군인에게 직장 자리 잘 봐주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이미 군인들은 질적으론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축에 속했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월급으로 일가족을 건사하기가 어려워서 부정부패, 물자 횡령과 뇌물이 오가는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군인들의 불만은 날로 가중되고 있었다.

거기다 당시 군인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군식 행정시스템을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훨씬 뒤떨어진 일제시대 행정업무 능력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삽질에 불만도 많이 갖고 있었다. 우리가 나서면 저 ㅂㅅ들보다 훨씬 잘할 자신이 있는데...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 4.19로 인해 계엄이 선포되자 민관 업무에 파견된 장교들은 공무원들의 일처리를 보면서 뭐 저런 것들이 있나 하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1953년 기준으로 미국 유학생이 7백명이 좀 못되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간 장교들은 1천에 육박한다. 이미 육군사관학교에는 원자력공학과가 설치될 정도로 군은 질적으로 선두주자였다.

5.16 쿠데타의 명목상의 지도자는 장도영 육군 중장(보직은 육군참모총장)이었으나 이는 쿠데타 이후이며, 실질적이고 분명한 지도자는 박정희 육군 소장(보직은 제2군 부사령관)이었다. 병력동원등은 영관급 장교들이 했다.

2.1. 박정희의 이력

박정희는 여순 반란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모든 것을 자백하고, 백선엽이나 원용덕과 같은 만주군 출신 군인의 옹호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하긴 했다.[5][6] 이 와중에 한국전쟁 발발, 소령 계급을 달고 군인으로 복직되었다. 그 후 순조롭게 군생활을 이어가면서 준장 소장으로 차례로 진급하였고,[7]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쿠데타 당시에는 2군사령부 (현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데 사실 군에서의 부사령관은 예비 예비역 그러니까 곧 나갈 사람이라는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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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 준장.

군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정치적인 기질에 기인하였는데 제일 먼저 남로당 전력이 있었고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당시 [8] 육군본부 제2작전참모부장이였던 박정희는 "육군장병들에게 고함"이라는 훈령(217호)을 기초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때에는 9년 뒤의 상황과는 달리 계급도 대령으로 많은 상관과 선배들을 제치고 무슨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일단 별은 달고 때를 기다리자.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김동하 제1 해병대 상륙 사단장과 공모하여 서울을 칠 계획을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의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에게 이를 갈면서 그를 박살내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어쨌든 그가 가지고 잇는 정치적인 기질은 육본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고 박정희가 쿠데타니 어쩌니 소리를 하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이 발목잡아서,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오히려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변명했다.'우국충정'의 마음이 자유당 집권기의 개판을 보고 품은 것이라면 해명이 되는 것 이긴 하지만...

실제론 청년시절부터 나름 야망은 있었던 듯 하다 박정희의 제자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 시절 문경의 하숙집에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떡 붙여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군인이 된 후에도 나폴레옹이나 터키의 케말 파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했다고[9]. 또한 그는 일본군 장교 시절에 황도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하다. 소령으로 복직된 후 2.26 사건을 거론하며 가까운 장교들에게 "우리도 이런식의 군사혁명을 해 보자"는 식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10]

3. 과정

애초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여러차례 쿠데타를 준비했었고 제2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4.19 혁명 1주년을 맞이하여 분명히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이고, 이러면 사회혼란을 명분삼아 자연스레 군이 출동하는 시나리오를 세웠는데... 4월 19일날 아무 일도 없었다! 대규모 시위나 혼란상황도 전혀 없고... 그냥 조용했다. 즉, 이 때 쯤이면 4월 혁명의 흥분에서 벗어나서 사회가 안정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11] 당황한 박정희는 쿠데타를 연기했으나 시간이 지체되면서 조금씩 계획이 누설되고 있었고, 결국 민주화 촉진 대회로 인해 혼란이 생기자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청와대, 방송국, 육본을 위시로 한 서울의 주요 기관을 차례로 점령하기 위해 육사 8기생, 해병대, 육군 공수특전단, 6군단 포병대 등을 동원한다.

5.16 쿠데타 당일 새벽, 여러 사단에서의 병력 차출이 계획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쿠데다 수뇌부에서는 거사 실패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육사 2기 출신이자 박정희의 동기인 한웅진은 이렇게 병력 동원이 지지부진 하니 차라리 야산이나 도시를 점거하고 협상을 해야 하는 것(플랜B)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어디 병력이라도 출동해야 협상이고 나발이고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플랜B를 시행하는 것조차도 살짝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김윤근 준장의 해병대 병력 1500명이 합세한 후에 한시름을 덜게된다. 주요 방송국과 청와대를 접수하기 위해서 병력을 한강이남에서 한강이북으로 이동 중, 참모총장 장도영이 출동시킨 헌병대와 한강다리에서 위에서 교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서로 2시간동안 대치하였으나 김윤근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대 병력이 한강다리를 돌파하고 방송국 등을 점거하였고, 같은 시각 문재준 대령이 지휘하는 6군단 포병단 1300명이 육본을 장악하게 된다. 결국 해병대가 쿠데타의 주역인셈.[12]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은 쿠데타가 일어날거란 정보를 입수한 뒤, 장면 총리에게 보고함은 물론 쿠데타군 진압을 위한 헌병대까지 보냈다. 한강 다리 위에서 괜히 해병대와 헌병대 간의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장도영이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는 점. 육참총장으로서 그는 당장 UN사령관 매그루더와 연락해 매그루더의 허락하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 쿠데타 진압이 가능했다. [13] 그러나 장도영은 소규모 헌병대를 동원하는 데 그쳤고 정확한 상황에 대해 주한UN사령관 매그루더, 대통령 윤보선 그리고 총리 장면에게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14] 쿠데타 첩보를 전해들은 장면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을 때마다, 장도영은 매번 "문제없다." "진압중이다."라고만 답했다.(…) 즉, 장면은 눈도 귀도 닫힌 채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다.

쿠테타가 발생했을 때 제2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출동된 병력은 1개 중대뿐이었고, 이마저도 서울시청 앞에서 반란군에 접수되어 총부리를 반대로 돌려야 했다. 이와는 별개로, 이광선이 지휘하는 약간의 헌병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목적지는 6관구 참모장 김재춘이 장악하고 있고 박정희가 먼저 가기로 예정된 6관구 사령부. 박정희가 그 헌병대와 대치하자 우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즉석에서 일장연설을 했고 손을 내밀면서 "같이 합시다." 라고 하자, 6관구 방첩대장 정명환 중령을 필두로 즉석에서 죄다 반란군으로 가담을 해 버렸다.(…)

쿠데타 세력은 새벽에 중앙방송국(현재 KBS)을 점령하였고 아침에 박종세 아나운서의 낭독으로 혁명공약을 방송하였다.[15] 당시 박종세 아나운서는 박정희에게도 직접 낭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혁명공약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김종필이 초안을 잡은 것이라고 한다. 장도영은 이후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반혁명"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잠시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를 받고 도미했고 거기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2012년 8월 3일 작고했다.

이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자고 일어나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있었더라..." 하는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고는 한다.

이후 장면 총리는 18일 오후 1시, 중앙청에 나타나서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금번 군사혁명 발생에 대하여 우리 일동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하는 바이니, 국민 제위(諸位)의 양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태 수습에 있어서는 유혈을 방지하고 반공 태세를 강화하며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편, 1962, p.923~924

처음에 미국은 이 사태가 공산주의 계열이 저지른 반역인 줄 알고 진압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군사통제권을 미군이 지니고 있었는데 박정희가 무단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열받은 주한미군 매그루더 사령관이 장면의 요청만 있었더라면 당장 박정희를 진압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발포가 없었다는 점에서 윤보선이 이를 이용하려다 오히려 역관광당했고, 장면은 미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지만 새벽이라 문이 잠겨졌고 수도원으로 피신해 쿠데타를 진압할수 없었다. 결국 진압은 무산되었다. 또한 집권한 군부도 바보는 아니어서 적극적인 친미 반공정책을 펼쳤고 미국도 반공정권이 들어서는게 이래저래 이득이었기 때문에 박정희 소장의 5.16 쿠데타를 묵인했다. 제2공화국 정부가 지속됐다면 아예 미국이 자기네 입맛에 맞는 정치인을 끌어다가 앉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5.16 쿠데타의 소식을 들은 육군 대위 전두환은, 쿠데타가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진지 며칠간 주도면밀한 조사를 한 끝에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육사 교장에게 사관 생도들이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교장은 생도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다면서 거부했다. 결국 전두환은 끈질긴 설득 끝에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이후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 되어 12.12 군사반란을 저지르는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아!"로 유명한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군사정부는 "조국재건최고회의" 라는 조직을 설립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정치깡패 재판. 이정재라든가….

게다가 혼란스러운 사회를 일단은 안정시켰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한테는 큰 저항감이 없이 받아들여졌다. 국민들의 반응은 하단에 다시 서술된다. 그리고 후일 재야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장준하 같은 경우는 초기에는 저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6] 하지만 그 뒤, 사회가 안정을 찾고도 내려올 생각을 안하자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여론을 조성하려다 포천의 어느 야산 절벽에서 의문의 실족사. 장준하 항목 참조.

4. 들통이 났지만 성공한 쿠데타

사실, 1961년 4월부터, 이미 미국 등으로부터 10여 건에 달하는 쿠데타 정보가 장면에게 쏟아져 들어갔다. 특히 미국은 이미 1959년 9월부터 민간조사기관 콜론협회가 미국 의회에 "한국에서 군사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고 보고했었다. 최소한, 미국은 쿠데타 발생 6개월 전부터 박정희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들을 토대로 장면은 충분히 쿠데타를 대비할 수 있었다. 게다가 3,600여 명에 불과한 쿠데타군 규모라면 당시 한국군으로 충분히 진압이 가능한 상황. 그러나 쿠데타는 성공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시 정가 및 군에서도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엄청나게 파다했었고 장성에 영관급 장교들도 술자리에서 만나면 박 소장이 쿠데타한다며? 라고 떠들 정도였다. 박정희 본인은 육참총장 장도영에게 이미 자신이 쿠데타를 할 것이라고 알아두라는 식의 통보를 했다고 언급한바가 있으며 5.16 쿠데타의 주체들 및 당시 2공화국의 장성들은 훗날 그 증언이 맞다고 하거나 맞을 것이라고 회상했지만, 유독 장도영은 이 사실을 극구부인했다. 아마 자신이 5.16과 무관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인 모양인데 정작 그의 동료들은 말도 안된다고 비웃었다. 각설하고 이외에 방첩대장 이회영도 박정희에게 누군가 쿠데타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훗날 외무장관이 되는 이동원 박사에게도 박정희가 찾아가 "내가 쿠데타하면 미국이 어떻게 하겠소?" 라는 자문을 물었다. 근데 다들 이런 말을 들었다 하니까 구라 내지 누군가는 신고하겠네 하는 심리가 조장되어 아무도 그런 말에 신경쓰지 않았는데... [17]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하에 다시 서술되지만, 미국이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것을 윤보선이 내란을 막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거부한 것 역시 하나의 이유로 꼽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쿠데타 묵인 내지는 인정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미국의 불개입 입장 역시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핵심적인 이유가 되었다. 쿠데타 익일인 17일, 지지세력이 늘어나자 렘니처 미 합참의장은 매그루더에게 더 이상의 성명 발표를 피하라고 지시했다. 곧이어 보울즈 미 국무장관 대리 역시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쿠데타에 개입하는 발언을 삼가 할 것을 요청했다.[18] 여기서 장면은 좌절, 은거하고 있던 수녀원에서 나와 18일에 사퇴를 표명했던 것.

결국, 5.16 쿠데타는 미리 발각되었음에도 성공한 쿠데타의 드문 케이스이다. 사실상 박정희는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고, 목숨을 걸었으나 저항은 적었다.

5. 각계의 반응과 평가

5.1. 군사독재정권 시대와 오늘날의 평가

박정희 집권기(군부,군정)부터 전두환, 노태우 집권기까지는(신군부) 5.16 혁명으로 일컬어졌다. 군사독재정권 당시에는 5.16 쿠데타는 분명히 기념해야 할 일로 취급되고 있었다. 현 여의도공원 자리에 있던 여의도광장은 처음에는 5.16 광장으로 불리는 등. 붙일 수 있는 곳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 단어가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은 1995년, 문민정부 때의 일로, 이때서야 4.19 "의거"가 4.19 혁명으로, 5.16 "군사혁명"이 5.16 군사정변으로 바로잡혔다. 또한 그 의미는 쿠데타라는 것을 당시에도 이미 밝히고 있다. 갑신정변의 예처럼, 정변은 제 3자의 시각에서 쿠데타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오늘날은 보편적으로 쿠데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때 KBS에서 "군사혁명"이라고 하는 바람에 꽤나 까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이 없었으면 12.12 군사반란처럼 그나마의 옹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 나라가 가진 법적 수단과 형식을 통해 정권이 교체된다면 이것은 단지 계승일 뿐이다.
하지만 국가가 정의한 권력이 양수단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은 혁명이라 칭해 질 수 있다.
4.19가 혁명이되 불법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해 일어난 시민운동에 의해서라면,
5.6또한 밀리터리 쿠데타를 수단으로 한 혁명일것이다.
이것은 감정적 심정적 동조에 의해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으로 ㄱ은 혁명 ㄴ은 쿠데타라 단정해서는 안되는 사항이다.

5.2. 지식인들의 반응

개신교인 논객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은 딱 잘라서 "혁명은 민중이 하는 거지, 군인은 혁명 못 한다." 며 쿠데타를 대놓고 깠다.[19][20] 그 외에 다른 예로는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 등이 이를 비판했으나 한창우의 경우 금세 군사정권의 응징탄압을 받았다. 안습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 층에선 장면 정권을 적극 수호해야한다는 분위기를 감지하기 어려웠는데, 일반론적으로 쿠데타를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시선은 적잖이 복잡했다. 어떤 이들은 기득권이 청산된다며 기대감을 보였고, 반면 어떤 이들은 반공 친미 노선이라고 하니 상당히 안심하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당시 시대상 자체가, 군부의 쿠데타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은 비교적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제 3세계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적, 개혁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집트나세르, 미얀마의 네윈, 이라크의 꽁레 등의 쿠데타를 들 수 있다. 게다가 5.16 쿠데타의 주역들이 제 3세계 쿠데타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소장파였다는 사실 역시, 해외의 소식들에 귀기울이는 지식인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했다.[21]

그리고 지금은 군이 쿠데타한다면 헌정을 유린하는 반민주적이고 반국가적 행위란 인식이 강하며 군은 군에 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의식이 강하지만, 5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군은 하나의 정치세력인 경우가 허다했다. 프랑스만 해도 프랑스 아프리카 군이 허구한날 공공연하게 쿠데타 위협을 하면서 1961년에 알제리 독립세력과의 평화협정에 반발하여 실제로 쿠데타를 감행하기도 했다가 드골에게 진압당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대학 진학률이 90%에 육박해 엘리트들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엘리트들이 손에 꼽았고 사관학교를 나와서 군사교육이나마 제대로 배웠던 군인들은 몇 안되는 엘리트들에 해당했다. 따라서 군인들도 몇 안되는 지식인으로 인정을 받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같으면 '무식한 군바리들이 미쳤나?'하는 말이 튀어나오겠지만 그때는 반응이나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군사정권이 쿠데타 직후에 실시한 사회정화 정책들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일례로 지식인들의 초창기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5.16 군사혁명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혁명 정권은 지금 법질서의 존중, 강건한 생활 기풍의 확립, 불량도당의 소탕, 부정축재자의 처리, 농어촌의 고리대 정리, 국토건설사업 등에서 괄목할 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

이 글은, 장준하 선생이 1961년 6월호 사상계에 기고한 글이다. 이걸 근거로 오늘날 '장준하가 5.16 쿠데타를 적극 지지했다'면서 정치적으로 정당화 시키는 세력들이 있다. 실제 장준하가 군사 쿠테타 발생 당시 초기에 이들을 지지했다는것은 사실이지만, 엄정하게 표현하면 장준하는 군인들의 반민주적 쿠테타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당시 만연한 사회 부패 현상을 척결하기 위해 양심적인 군인들이 행동에 나섰다는 것에 대한 기대를 말한 것이었다.[22][23]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식인들이 4.19 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완의 혁명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과 자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 혁명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욕은 욕대로 먹고 국정은 국정대로 말아먹고, 3.15 부정선거의 원흉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들은 늘 뒤 안 닦은 듯한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 무리의 군인들이 정계를 접수하더니 3.15 부정선거의 주동자들을 싸그리 색출해서 통쾌하게 처벌했던 것.(…) 그러자 지식인들은 대체로 "엄훠, 부끄러워라. 혁명의 주역인 우리가 못했던 일을 저분들이 대신 해주네요."(…) 식의 반응을 보이며, 5.16 쿠데타를 계기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고. 즉 지식인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쿠데타를 지켜보았던 이유는, 4.19 혁명을 끝까지 책임있게 완수하지 못한 자신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가 그리 오래 간 것은 아니었다. 불과 1년이 지난 1962년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많이 희석되었다. 즉 5.16 군사정변을 4.19 혁명과 연관 짓기는 하되, 혁명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4.19는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 1962년 4월 16일자 『연세춘추』에서 실시한 대학생 여론조사에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이양되어 수립될 민정의 성격 역시 군사정권의 연장이 될 거라고 응답한 비율이 65.7%에 달했다. 5.16 쿠데타의 의의 역시 "국민의 민의" 라는 응답은 불과 9.7%였던 반면, "정치적 혼란의 결과" 라는 응답은 무려 73.3%에 이르렀다.

5.3. 일반 국민 및 대학생들의 반응

쿠데타 직후 미국 24군단 소속 첩보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10명 중 4명은 우호적, 2명은 다소 우호적이나 시기상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 미국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서울대생들이 쿠데타에 대해 찬성 50, 반대 50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고 보고했다.

대학생들의 경우,[24] 쿠데타 당일에는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으나, 다음날부터 곧바로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학생들은 대체로 관망적 자세를 취했는데,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하나의 이유였다. 게다가 그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 내 세력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의 진의가 무엇인지 일단 알아야 했기에 당분간은 차분히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쿠데타라는 "뜻밖의 군의 움직임" 은 상당히 막연한 상황이었던 것도 있다.

이하의 두 인용은 쿠데타 익일의 서울대 및 고려대 학보 1면 헤드라인이다.

쿠데타 성공, 학원은 평온, 당연감(當然感) 속에 사태 주시

군사혁명에 학생들은 침묵, 무표정. 사태 진전을 주시

이후 군사정권이 3.15 부정선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사회악을 뿌리뽑기 위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먼저 서울대 학생회가 5월 23일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6월경, 서울대 학보의 「학생대담」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해서 크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했다.

  • 반공 및 (4.19) 혁명의 완수
  • 경제 및 민족정신 확립 이후 정권의 민정이양
  • 기본적인 자유의 보장

그 외에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할 것" 이나 "선의의 독재는 필요하다" 는 등의 주장도 있었다.

쿠데타 직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83%에 달하는 학생들이 "우리나라 실정에 비추어볼 때, 서구식 민주주의는 부적합하다." 고 응답했다. 이것은 그들이 4.19혁명을 이루어냈음에도,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무능력함에 일종의 회의를 느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위키러 여러분들이 직감했듯이 박정희가 "민족적 민주주의" 또는 "우리식 민주주의" 를 주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의적 반응을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5.4. 북한의 반응

앞서 서술된 바 있지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김일성은 한때 협상의 희망을 품고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이자 무역상 부상(차관급)이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보냈다. 그러나 되려 미국반공을 과시하기 위한 박정희의 의도에 따라 밀사만 사형당했다. 결국 다시 남북관계는 냉각… 이 때문에 박정희를 친김일성적 인물이라고 주장한 인물들은 대거 숙청당했다.

5.5. 미국의 반응

미국은 5.16 쿠데타 직전(열흘 전) 한국의 상황을 보고 한국과 한국 국민은 병이 들었다며 비관적으로 표현했고, 정부 언론 교육 종교 기업의 구조가 모두 부정부패로 연결돼 있으며 한국인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망상 속에 살고있다며 비판했다. 여기에 미국은 무기력한 장면 정부는 위기를 대처할 능력이 없으며 조만간 민중의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미국이 한국의 개혁을 직접 조종해야 한다며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장면 총리 뒤에서 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막후통치를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5개년 계획 역시 이것의 초보적 단계였다.) 그러나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여기에 동의하고 한국에 대한 막후통치안을 수립하려는 참에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무산되었다. #

미국의 경우, 앞서 언급되었듯이 처음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고, 이후 윤보선을 찾아서 "미군 및 4만명 정도의 국군을 동원하여 서울을 포위해버린 다음 심리전으로 반란군을 동요시키면 총 한방 쏘지 않고 반란군을 진압 할 수 있다"며 윤보선을 설득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반란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면서 그러면 서울에서 시가전이 벌어진다며 반대했다. 결국 둘은 한동안 이러쿵저러쿵 했다가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진압하지 말것을 지시하면서 진압작전은 포기되었다. 나중에 12.12 군사반란이 터졌을 때도 반란군과 정면으로 부딪히면 서울이 전쟁터가 된다고 적극적인 대응을 못했다.

이후 군 전반에서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전환되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나서서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벌이자, 미국은 쿠데타 불개입으로 입장을 바꿨다가, 국무성의 명의로 "한국의 정변은 반미 정권의 등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은 신정권을 승인할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 쿠데타를 인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친미 노선을 표방한 덕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간혹 5.16 쿠데타가 미국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자료가 없는 의혹에 불과하다. 되려 미국은 쿠데타를 우려하는 입장이었다.

# 미국 대사관 기밀 문건에서는 5.16 쿠데타 이후 파벌 문제로 인해 정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을 언급했다.

6. 이후

5.16 쿠데타 직후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된다. 그리고 정권 장악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이벤트들이 벌어졌다.

  • 5월 19일 : 주요 기업인 17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 이 중 10명은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 5월 20일 : 양곡을 매점매석했다는 이유로 서울의 쌀상인들로부터 6천가마의 쌀을 압수한 다음 영세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5월 21일 : 이정재 및 동대문파 정치깡패 집단 화랑동지회를 체포했다. 그 유명한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라는 조리돌림 행진을 했고, 이런 굴욕을 당한 이정재는 끝내 사형당했다. 그리고 전국에 깡패 검거령을 내려 1만명의 깡패를 체포한 다음 국토 건설 현장에 보내 부려먹거나 감옥에 보냈다.

  • 5월 24일 : 대낮에 춤을 춘 남녀들을 옥내외집회금지령(…)을 근거로 체포해서 징역형을 선고했다. 명분은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대낮에 춤을 춘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는 것. 관련영상.

  • 5월 25일 : 국가최고회의령 12호를 통해, 농어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리대금업을 일체 금지하였다. 이후 6월 9일에는 이것이 법제화되었는데, 여기서는 고리채의 기준이 연 20%에서 12%로 낮아졌다.

  • 5월 28일 : "부정축재처리위원회" 가 구성되었다. 120명의 기업인 중 30명, 공무원 32명이 부정축재에 대한 벌금 등의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이벤트들에 대해 시민들은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 지식인들은 일종의 포퓰리즘이나 일회용 이벤트에 불과하다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어차피 전반적으로 일시적이고 단회적인 정치적 행사에 불과했던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들의 지지는 사그라들고 말았다.

분위기가 악화된 대표적인 사건들이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사건들로 인해 군사정권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군사정권이 주장했던 "구악" 에 빗대어 "신악" 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읽다 보면 어째 좀 익숙한 스토리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스캔들은 거기서 거기였던 모양. 역사는 반복된다?

  • 워커힐 사건 : 1961년 이래 중정이 관광지 워커힐을 만들면서 높으신 분들이 건설자금을 유용하고, 군 장비 및 병력을 무상으로 대민지원 차출,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건.

  • 증권파동 : 1962년 5~6월경 중정이 주가조작을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 증권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5,000여 명의 피해자를 양산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건.

  • 새나라 자동차 사건 : 중정이 재일교포 자본과 합작하여 새나라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 이 과정에서 자금을 전용하다가 결국 회사가 은행으로 넘어가게 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건.

  • 파칭코 사건 : 1962년 10월경 파칭코 영업이 금지될 무렵, 해당 기계 도입과 관련된 밀수 의혹과 상납 의혹이 제기된 사건.

상기 사건들은 의혹이 불거지면 대충 조사하고 적당히 처벌하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식으로 조치되어,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실제보다 추잡한 내막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한편, 5.16 쿠데타 집권세력의 혁명공약은 당초 몇 달 이내에 민정 이양을 한다는 것이었지만, 몇 달 이상 미루어지다가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를 거쳐 제3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건이 약 20년 뒤 되풀이되고, 군사 독재정권은 주인만 바뀌면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대를 이은 장기간의 군사독재는 몇 십 년간 참아왔던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후 사실상 첫 민간인 정권이라 할 수 있는 김영삼 정부에선 군부 쿠데타의 싹을 제거하고자 군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싸그리 척결하고 그 핵심이었던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우는 등 여러모로 노력한 끝에 현재 한국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7. 해외 사례들과의 비교

5.16 쿠데타는 세계 역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민주 혁명 직후의 독재정권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반적인 민주혁명직후의 독재정권의 등장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 독재 정권->부패->사회 모순->민주 혁명->사회 혼란->정부의 능력 부족->국민의 실망->'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 + 정치적 무관심->새로운 독재자가 국민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정권 장악'.

이러한 식인데, 5.16 쿠데타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 '독재 정권->부패->사회 모순->민주 혁명->사회 안정기의 시작[25]->새로운 독재자가 정권 장악'

앞서 누차 언급되었지만, 사실 뜯어보면 여러모로 암초도 많고 성공 가능성이 낮은 편이었던 사건.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말이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9. 여담

5.16 쿠데타 당일 김도연이 거국내각을 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제의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

박정희가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이미 술에 취해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정희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하러 간 부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의 몸에서 술냄새가 상당히 풍겼다고...[27] 하지만, 5.16 쿠데타 당일 정명환을 필두로 한 진압군을 박정희가 직접 말빨로 귀순시켰다는 것을 감안하면 술을 한 두잔 한 건 몰라도 몇몇 증언처럼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술에 만취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김구의 아들 김신 또한 공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참여했고, 유신정우회에서 활동했다. 쿠데타 당시에는 공군참모총장이었다. 사위가 계산 회장님의 동생이다.

이정재, 곽영주,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은 복역 중 5.16 쿠데타 소식을 듣고, "아싸! 민주정권이 물러났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 세상이다!" 하며 좋아서 만세를 부르며 날뛰었다고 한다.(…) 그들은 불과 4일 후에 자신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를 조리돌림을 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 형장의 이슬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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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내겐 이런 일 없을 줄 알았어.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의 화랑동지회. 결국, 유지광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된다.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4.19 혁명. 그리고 혁명재판 항목을 참고하자.

훗날 박정희의 심복이면서도,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5.16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5.16 쿠데타 직후 반혁명 분자로 몰렸으나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마지막회에 아베 등 악역들이 일제히 몰락하는 사건으로 비춰진다. 쿠데타가 구악을 척결하는 모습을 너무 긍정적[28]으로 비춰져서 그런지, 나중에 케이블에서 재방을 할 때는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이 친일파 경찰들과 이정재 등을 잡아가는 장면을 삭제해서 방영했다.

10.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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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노태우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민주화 이후에 당선된 대통령...이긴 한데, 노태우 역시 군인 출신이고 제5공화국을 그 출범에서부터 함께 해 온 인물이며, 노태우 정권에서도 여전히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정(政)·관(官)·군(軍)에 포진하고 있었으며 1991년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1991년 연쇄 분신 파동) 때의 유혈진압 등 강경한 통치를 했으므로 노태우 정권 역시 엄연히 군사정권에 해당된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93년 노태우 퇴임 이후의 정치 관련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군사정권/군정(軍政) 32년'이란 표현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을 뿐더러, 5.18 특별법으로 인한 전두환·노태우 재판 역시 고등법원에서는 내란 범죄가 종결된 것을 1987년의 6.29 선언으로 보고 그 때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다시 내란 범죄가 끝나는 81년 1월 24일로 줄여 버렸지만, 5.18 특별법에 따라 1993년의 노태우 임기 종료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되어 1995년 당시에는 여전히 공소시효가 남아 있었다.
  • [2]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은 아들의 총격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그 다음 승계순위는 외무장관이 1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 [3] 오죽하면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도 나왔을 정도...였다는데 사실 최근엔 장면정부가 의외로 여러 정권 붕괴 위기설에도 불구하고 1961년 이후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사회적 혼란도 어느정도 진정되는 형국이었기에 쿠데타 후 군부가 의도적으로 이 시대의 혼란을 과장했다는 분석도 있다. 예컨대 군부가 주장한 2공화국의 부정부패에 관하여 살펴보면 김영선 재무장관 한 사람만 연루되었고, 죄목은 김 장관이 미국에 있을 당시 중고냉장고 한 대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쿠데타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저질렀다. 참고
  • [4] 또한 3.15 부정선거-4.19 혁명-이승만 하야-개헌-총선거-장면정권 수립까지 불과 6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 와중에, 더구나 독재가 해제됐는데 세상이 조용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 [5] 1950년 6월 23일경 박정희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게 뭔가 이상하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되었고 그 결과가....
  • [6] 이 시기 박정희의 인생은 막to the장 자체였다. 숙군 연류자로 군부에서 언제 짤려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내연녀 문제로 안 그래도 안 좋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당시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매일 마다 술이나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월급은 술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완전 폐인 상태. 이대로 놔뒀으면 독재자는 커녕 거리의 노숙자 혹은 낙향해서 농부나 학교 선생으로 살다 끝났을 텐데 그놈의 전쟁 때문에... 이게 다 혹부리 때문이다!!!
  • [7] 단 진급 자체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은게 미국측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았고 준장, 소장 승급 때마다 태클이 들어왔으나 백선엽 등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사히 승급할수 있었다.
  • [8] 이승만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4개 소대의 병력을 육본에 요청했는데 당시 참모총장 이종찬은 대통령 면전에서 병력파병을 거부한다.
  • [9] 다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참군인' 이순신를 많이 존경하고 강조했다. 당연히 자기같은 놈이 나오면 자기가 가장 먼저 당할테니까.
  • [10]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에게 "우리도 2.26사건의 우국 장교들처럼 한번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고 한다.
  • [11] 다만 진정한 의미의 사회안정이라기 보다는 장면 정부에서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등을 제정하여 그저 법으로 찍어눌렀을 뿐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 [12] 한떄 해병대 사령관이 규모에 안 맞게 대장이었던 이유기도 하다.
  • [13] 매그루더는 쿠데타에 부정적이었음은 물론이고 쿠데타 세력이 허락없이 병력을 이동한 것은 미국 또는 유엔사령관이 가지고 있는 전작권을 침범한 것으로 심대한 월권이다.
  • [14] 장도영이 장면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긴 했지만, 정작 그는 박정희와 다섯 차례나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다. 박정희는 이미 1961년 4월 10일부터 장도영에게 쿠데타에 대한 양해를 구했고, 장도영은 매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 [15] 맨 위의 라디오 방송 링크와 같은 링크다.
  • [16] 정확히 말하자면, 군사쿠데타가 민주주의적으로 볼때는 매우 불행한 일이나 민족적 위기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 [17] 마치 삼국지 연의에서 암살에 실패한 조조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니깐 의심도 못해본 동탁과 비슷한 케이스(...)
  • [18] 출처 박태균, 2006, p.214~220
  • [19] 출처 임대식, 2003, p.313~314
  • [20] 카네이션 혁명 같은 아주 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전 세계의 신생독립국들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군부의 쿠데타를 생각해보자(...)
  • [21] 출처 홍석률, 2002, p.49~52
  • [22] 제2공화국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內 신,구파 싸움에 대해 장준하는 회의감이 느껴 처음에는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었지만, 이내 박정희가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본색을 드러내 집권을 추진하게 되자, 장준하는 이에 대한 반발로 곧바로 지지노선을 철회하고, 곧바로 다음달 '사상계 1961년 7월호'에 반민주적인 군사쿠테타를 비난하는 어조로 기고했다.
  • [23] 우선, 장준하는 독립군(광복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군인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었다는 배경이 있었다. 그래서 장준하는 당시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고 있던 당시 '양심적이고 절도 있는 군인이 '불량도당을 소탕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이들을 처리하며, 농어촌에서 고리로 이자를 놓아 고통받고 있는 잘못을 정리'하는 데 군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초창기에 생각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쿠테타를 일으킨 세력에게 사회부패를 일소하는 일들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스스로 약속한 이른바 '혁명공약'을 군인답게 실천하라고 분명하게 요구했다.장준하의 잘못은 '그들'을 양심적인 군인으로 오판했다는 점일뿐...
  • [24] 경우에 따라서는 지식인들로 쳐줄 수도 있으나, 이 문서에서는 일단 여기다 서술한다.
  • [25] 이라고 하지만 이는 3.15부정 선거당시 자유당 측이 예언적으로 주장하던 "바꿔봐야 소용 없다."가 실현된 것일 뿐이었다. 2공화국은 기실 그 시작에 의욕을 가지고 많은계획을 세우며(기실 3공화국의 경제계발 5개년 계획도 그 초안은 이미 민주당 정권에서 잡은 것이었다)성장드라이브를 걸려 했지만 문제는 정치꾼들의 탁상공론이었는지라 재원의 조달등 문제에는 전혀 구체적 계획이 없었고 그간 억눌려 왔던 여러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오며 환란하던 초기의 열기가 가라앉자 좌절감이 고개를 쳐들면서 일종의 공황상태에 접어들어 조용해진 것이었다.
  • [26] 당시 육군 대위로 서울대 문리대에 ROTC 교관으로 파견 나가있다가 5·16 쿠데타를 맞았다. 5월 17일 아침 그는 육군본부로 찾아가 거사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과 면담을 청하고, 5·16 쿠데타의 주체가 젊은 장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박정희임을 안 뒤 육사 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제안했다. 5월 18일 아침 전두환의 설득을 받은 육사 생도 800여명이 동대문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벌인 시가행진은 그때까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부 국민과 외국인들의 시각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댓가로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군인으로 남겠다며 거절했다.
  • [27]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3공화국 5.16 쿠데타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박정희 외 1명이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쿠데타 지휘부들은 박정희 소장이 안 보인다며 당황하다가 술에 취한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찾아서 데려오는 대목이 있다.
  • [28] 김춘삼과 아는 사이였던 어리버리한 중대장은 혁명재판부의 검찰로 출세했다고 좋아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