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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last modified: 2015-03-26 14:28:3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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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망측스러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이 없지. 불의를 보면은 일어나야 해.
-이승만-, 학생대표들을 면담하고 뱉은 말.

Contents

1. 개요
2. 상세
3. 결과
4. 누구의 책임인가?
5. 이야기거리
6. 관련 항목


1. 개요



대한민국, 그리고 자유당 정권이었던 제1공화국 최대의 병크이며 부정부패로 가쁜 숨을 내쉬던 자유당 정권에 최후의 비수를 꽂아버린 부정선거 사건이다.

2. 상세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은 라이벌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병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아래에서 장관직을 역임했던 조봉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었다.[1]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그가 상심한 것은 당연한 일. 이승만에게 아부하기 바쁘던 자유당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뚜렷한 대안 세 가지를 통해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어보고자 하였다.

  • 첫째, 평화통일을 부르짖던 조봉암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박살냈다.
  • 둘째, 자유당 정권의 처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언론[2]에 재갈을 물리는 국가보안법을 발동시켰다.
  • 셋째, 민주당이 아직 대통령 후보조차 정하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던 1959년 3월부터 이미 새로 내무부장관이 된 최인규의 지도하에 부정선거 계획을 수립했다.

그렇게 다 준비를 했는데, 정작 1960년 대선 직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죽는다. 이로써 사실상 대통령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저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내세웠던 이기붕이 보기 좋게 민주당의 장면에게 박살이 났기 때문. 자유당으로서는 이승만의 나이가 지금봐도 장수이고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85세인 고령인데다가 건강이 매우 안좋았으므로 유고 시 대통령을 이어받게 될 부통령 자리는 반드시 자유당이 차지해야만 했었다. 덕분에 애써 준비한 부정선거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1년여를 기다려 마침내(?) 시작된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과 그 떨거지들은 꾸준히 준비해 온 자신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는데, 그 수법들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우선 일정 비율의 표를 사전 투표해서[3]투표함에 채워넣는 방식은 기본이고 3인조/7인조 투표라고 해서 세 사람이나 일곱 사람씩 짝을 지어서 투표소에 들어간 뒤 서로 확인을 받게 하며 죽은 사람이 버젓이 선거인 명부에 올려서 자유당 표에 추가했다. 심지어 투표소 시계를 몇십분 빨리가게 조작해놓고 시간 다 됬다며 민주당의 선거관리인을 쫓아내는 등 속이 뻔히 보이는 짓을[4] 한 후 투표함을 바꿔치기도 했다. 또한 개표할 때도 다른 사람 표를 이기붕의 표로 집계했다. 표를 집계할 때 다른 후보에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만 이기붕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의 표라 집계했다.

이렇게 자유당의 부정선거는 막장의 극한으로 치달았다.

3. 결과

결국 대통령에는 이승만 당선, 부통령에는 이기붕 당선이라고 발표를 하였으나[5] 바로 그 날 마산부터 시작하여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결국 4.19 혁명의 씨앗을 뿌려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좆망...

2010년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마산[6]에서는 3.15 의거 관련 행사도 열렸다. 현재도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4. 누구의 책임인가?

이를 전적으로 이기붕과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의 문제로 돌리는 시각도 존재한다. 가령 이승만 입장에선 재임 중 사망할 가능성이 큰 나이었고 죽으면 대통령이고 정치생명이고 다 끝이고 어차피 경쟁자의 급사로 대통령이 된거나 마찬가지인데 뭐하러 부정선거를 주도하겠는가라는 것.

하지만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승만이었으므로 그 몰래 이기붕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은 이승만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고 또한 신문, 방송 등에서 부정선거의 가능성, 민주당의 비난 성명 등으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는데 이승만만 몰랐을 리가 없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냥 알고도 묵인한 것.

다만 반론이 존재하는데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터라[7] 일처리라든가 정국의 장악력이 예전만 못했고, 나중에 하와이에 가서 박정희의 5.16 소식을 듣고 "그래, 박정희. 그 사람이 잘하고 있다더냐?" 라고 묻자 측근들이 "뭐, 그럭저럭 한답니다." 라고 대답을 했는데 "'한답니다' 란 애매모호한 말을 믿을 수 없다. 내가 4.19때 '그렇다고 합니다' 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라는 말을 했다고 그의 양아들이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 무책임론은 엄청나게 뻥튀기된 면은 있어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8]

결국 이승만은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해지고, 이기붕이 하야를 고려한다고 공식 발표하는 등의 궁지에 몰리자 "그렇게 망측스러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이 없지. 불의를 보면은 일어나야 해." 라는 말을 남기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한다. 기사. 그리고 이튿날 4월 26일에 방송을 통해 대통령 사임 선언을 하게된다. 하지만, 다음날 4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직 사임한 뒤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노(老)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측근 허정도 설득할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열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임하게 된것이다.[9]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뉴라이트 계열이나 조갑제조차도 이승만의 실수라고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지만, 이승만이 직접 한 게 아니며 저것도 밑사람을 위해서 책임을 더 덮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뉴라이트 계열에서 주장하는것과 달리, 실제 이승만도 이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승만은 2월 13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를 발표했는데,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내각(특히 최인규 내무부 장관)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뒷날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10]

뭐, 윤치영[11], 허정[12]등 여러 측근들은 이승만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는 했다.

5. 이야기거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국립 3.15 민주묘지가 있는데, 이 사건 및 4.19 혁명 관련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자들을 기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4.19 희생자들을 기리지만 3.15가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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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승만은 500만표, 조봉암은 200만표를 받았다. 놀라운 건 투표 당시 사망 상태인 신익희가 무려 180만표나 받았다는 것이다.
  • [2] 특히 경향신문.
  • [3] 당시 한국의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다. 분명 교육열의 영향으로 문맹률이 현저히 낮아지고는 있었으나, 노년층에서 문맹률은 여전히 해결이 안되었다. 이들의 선거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여당 의원을 찍으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쳐주어 여당 의원에게 몰표를 준 것이다.
  • [4] 이것은 조봉암이승만이었던 1956년 대선에서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 [5] 어떤 곳은 거주민수보다 득표수가 많은 웃기지도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기붕의 득표율이 99%에 육박하여 전체 유권자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그나마 염치는 있었는지 70%대로 줄여서 발표했지만...
  • [6]창원시.
  • [7]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여기가 어디냐고 헷갈리고 육사라는 대답에 다시 육사가 뭐하는데냐고 정일권에게 물을 정도였다. 뭐...
  • [8] 정신이 오락가락했다는것은 어느정도 사실인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의 권력욕은 끝이 없어 '독재자'라는 말 그대로 모든것을 전단(傳斷)하려고 했지만, 노인의 나이는 속일 수 없어 1958년경부터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때가 많았다고 알려져있다. 또 선거와 같은 예민한 권력문제를 제외하고는 이기붕과 박찬일 비서와 곽영주 경무관이 중요 업무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나이가 많았으므로 언제 사거할지도 알 수 없었던 상황. 이승만은 3.15 마산항쟁 후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역정을 자주냈고 신경질적으로 밑의 사람에게 부정선거 책임을 돌리려고 했다고 한다.(출처 - 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 - 허정 편', 희망출판사, 1966, p207)
  • [9] 출처- 김정렬, '김정열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년, p268~269
  • [10] 출처 - 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 [11] 윤치영은 일제말에 변절한 친일파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민당-이승만의 독촉 등 극우 반공주의 세력에 달라붙어 활동한 기회주의자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반민특위 활동 방해하고 때려부수는데 일조하였으며 반민주주의적이고 독재정권에 적극 협조한 앞잡이였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4.19혁명에 관련해서 '4.19 사태'라고 폄하했으며, '김창룡이 있었으면 4.19 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 [12] 허정은 이승만의 최측근에 있던 인물로 4.19 혁명 당시 부정선거 책임자 처벌에 매우 소극적으로 다뤘으며, 축소, 은폐에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