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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위기

last modified: 2013-11-02 21:27:55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원인
3. 해당 시기의 로마황제

1. 개요

3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한 마디로 3세기 내내 로마제국이 봉착한 혼란과 위기의 국면을 통칭하는 말. 통상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암살된 직후부터 시작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즉위로 끝난 군인황제 난립기인 235~284년의 약 50년을 일컫는다.

이 시기 로마제국은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 격화와 이로 인한 현저한 국방비 증대, 제국의 인재풀을 이루었던 원로원 계급과 기사 계급의 정치력 저하, 정국 불안과 치안 악화, 중과세에 따른 국내 상업의 쇠퇴, 기독교 세력의 급속한 대두라는 위기를 겪게 된다. 3세기의 위기에서는 로마 제국이 전형적인 국가 막장 테크 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 멸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2. 원인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3세기의 위기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독한 정국 불안정을 꼽지만, 사실 이는 그녀가 그렇게도 애찬하는 원수정 체제 자체[1]에 내재한 모순점이었다.

그 시기에 그런 단점이 크게 돌출되지 않았던 것은 기독교완 전혀 무관한 극히 우연적인 몇 가지 요소에 기인하고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세기의 위기를 종식시킨 대가로, 후기 로마 제국이 그전 로마 제국의 유연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실상과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유연성이란 체계적인 관료 제도 운영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무질서한 황위 계승 방식을 고집하면서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은 그만두란 얘긴데, 사실 3세기의 위기는 그런 게 미비했던 내부 상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응을 못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전통에 대한 이상한 강박적인 집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대응을 늦춰서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가며, 다행히 로마인들은 시오노 나나미처럼 어떤 한 가지 요소에 대한 괴이한 집착이 없었기에 계속 여러 대응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3~4세기의 경제 회복과 체제 안정화이다.

3세기의 위기가 반 세기나 이어진 현상이 된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의 대두를 꼽는 것도 사실 아주 낡은 18~19세기 학설에 불과하며, 이런 단순한 분석은 20세기 중반 넘어 이미 학계에서는 타파된 방법론이다.[2]

그렇다면 3세기의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점점 로마 사회를 본받아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쌓아가고 있던 야만족 사회의 성장과, 로마 제국 체제 자체의 한계 수익성 악화 이 둘로 압축된다. 더 요약하자면 외부 상황은 변화하며 가혹해지는데 그에 대처하는 내부 역량은 약화된 상태로, 이 두 가지 문제점에 대응하는 것이 당대 로마 사회의 최대 과제였다.

로마 제국이 3세기에 이런 과제들을 그저 손놓고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며, 그 해결책들을 종합해서 본격적인 체제 수술에 들어간 건 디오클레티아누스지만 그런 작업들도 3세기의 황제들이 이미 한 여러 조치들의 선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3. 해당 시기의 로마황제

3세기 가운데 235~284년 집권한 황제들의 대체적 연표와 중요한 이정표적 업적을 나열한다. 악행이나 실수는 워낙 다루는 곳이 많고, 내용이 편파적인 경우도 있어서 해당 황제의 목록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군인 황제'들도 생각보다 역량이 뛰어난 편으로,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었던 자는 적다. 다만 더 강력한 경쟁자가 있거나 하는 식이 많아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제거당한 경우가 많다. 이는 그 전 시기와 그 후 시기를 살펴봐도 드문 일이다.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5~238, 암살)
    3년동안 라인강 유역의 야만족을 토벌.

  • 고르디아누스 1세(자살), 고르디아누스 2세(전사), 푸피에누스(암살), 발부스(암살, 이상 모두 238년 한 해에 재위)
    막시미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황제들. 3세기의 위기중 첫번째 위기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혼란했다.

  • 고르디아누스 3세(238~244, 암살)

  • 필리푸스(244~249, 자살)
    로마제국 천년제를 주최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

  • 데키우스(249~251, 전사)
    발칸반도로 침입한 야만족을 막다가 전사. 최초로 전사한 로마황제다.

  • 트레보니아누스(251~253, 암살)

  • 발레리아누스(253~260, 포로로 옥사), 갈리에누스(253~268, 암살)
    3세기의 위기중 가장 큰 위기를 불러온 것이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돼서 최초로 포로가 된 로마황제가 된 것이며, 이 때문에 사실상 로마제국이 3분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마군의 대대적인 전술 교리 개편이 바로 이들 부자에 의해 이뤄졌다.

  • 클라우디우스 2세(268~270, 병사)
    야만족을 막고 어느 정도 로마 제국의 교통정리를 했다.

  • 아우렐리아누스(270~275, 암살)
    로마시의 성벽 건설. 삼분된 제국을 재통합했다. 개인비서의 개인적 이유로 인한 암살행위로 인해 죽었으므로 수개월동안 차기 로마황제가 결정되지 않았다.

  • 타키투스(275~276, 병사)
    역사가 타키투스의 먼 후손으로 자칭했지만 근거가 없다.

  • 프로부스(276~282, 암살)
    군사, 정치를 잘 수행했으나, 이미 전투에만 익숙한 병력들에게 토목공사와 농사를 가르쳐서 농민화를 추진하려던 계획이 병력들에게 지지를 못얻은 것이 한계다.

  • 카루스(사고사), 누메리아누스(암살, 이상 둘 다 282~283년 재위)
    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동부 국경에서의 시간을 벌었다.

  • 카리누스(282~284, 암살)

  •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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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시오노 나나미는 원수정이 정확한 용어가 아니며 그저 제정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전제정과 전제정에서의 여러 체제 개혁책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이유는 학계에서는 원수정이라 칭하는 시대에 시오노 나나미가 극도로 애호적인 관점을 내세우는 데 있다.
  • [2] 시오노 나나미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유물론적 그리고 사회과학적 해석을 도외시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공학적 면을 강조하지만 그건 자기가 맘에 드는 부분에 한한다. 이점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