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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집회

last modified: 2015-04-09 16:22:24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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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중순부터 8월 중순에 걸쳐 FTA 개정을 통한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문제를 중점으로 하여 대한민국에서 대규모로 일어났던 촛불시위·집회를 일컫는다.

Contents

1. 배경
2. 과정
3. 최고조
4. 소멸
5. 내용
5.1. 반정부적 시위와 경찰과의 충돌
5.2. 시위자들이 지목했던 우호기업과 혐오기업
5.3. 진보와 보수의 반응과 대립
6. 이런 저런 이야기
7. 평가
8. 참고 링크
9. 관련 항목


1. 배경

한미 FTA 관련 쇠고기 통상 협상에서 광우병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에 대해서 정부의 불통으로 해명이 되지 않자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는 수입할 수 없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들의 불안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보다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시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공식적인 시위의 시작일은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공식으로 시위를 주최한 2008년 5월 2일이지만, 실제로는 4월 중순부터 연예인 팬클럽에 소속된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이후 대책회의가 가담한 형국.

2. 과정

초기에는 '촛불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자발적 참여자에 의한 연설, 즉석 토론, 노래와 구호 합창이 주 메뉴(?)였다. 김장훈, 윤도현 등 문제의 취지에 공감한 몇몇 인기 연예인들의 즉석공연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경찰들의 태도도 그리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가두 행진을 막기 위해 전의경 병력들과 경찰 버스로 벽을 쌓기는 했지만 오후 10시 이후 해산권고 방송을 반복적으로 했을 뿐 물리적 진압은 없었다. 참가한 시민들도 해산권고에 응해 '내일 또 모입시다'라며 알아서 퇴근(?)하는 분위기. 이 때 집단으로 참가한 10대 청소년의 비율이 의외로 높았다.

이 상태로 장기간 시위가 이어지는듯 했으나 점차 경찰의 촛불문화제 원천봉쇄 압력이 강해지고 실효성 있는 공청회 등 정부의 성의있는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시위대도 가두행진을 시도하는 등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5월 31일 이뤄진 전경과의 대규모 물리적 충돌은 이러한 분위기를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경의 군홧발에 밟힌 여대생은 분노의 기폭제가 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청와대와 대통령측의 "저 촛불들을 누구 돈으로 샀는지 조사하라"(배후세력이 있다는 식의 발언), "안 사먹으면 될거 아니냐"등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시위대의 가두행진은 종로, 율곡로 뿐 아니라 서대문, 신촌 등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기습/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참가인원이 점점 늘어나면서 경찰의 눈치를 볼 필요가 줄어들자(?) 광화문과 시청광장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3. 최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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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7일, 서울 시청 앞 광장

달아오른 시위의 분위기는 6월 현충일 전후로 그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시작일인 6월 10일에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때 참여인원은 경찰 추산 20만 명, 대책위 추산 약 100만 명.[1] 추산 인원의 차이가 크기는 하나, 정말 많이 참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 광화문-안국동-종로3가-종로2가-종각이 모두 사람으로 덮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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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2008년 6월 10일, 서울 시청 앞

이후 대책회의 측은 의료 및 수도 민영화, 한반도 대운하 사업, 언론 탄압과 같은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들로 의제를 확산했다.

전경과의 물리적 충돌의 강도가 높아지고, 시위가 장기화되며, 시위의 이슈가 보다 강한 정파성/반정부성을 띔에 따라 부동층 시민들의 참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종교계가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행진을 주도함으로써 7월 4일 다시 절정을 이루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등 정부의 입장 후퇴로 다시 부동층 시민들의 참여가 감소하였다.

이전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수비적인 진압을 하거나 새벽/아침 무렵 진압/해산을 시작했으나 이 때부터는 시위진압 시각도 당겨지고, 그 강도도 훨씬 높아졌다. 시위대 또한 과격화되거나 내부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이용하는 비도덕적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중 유명한 사람이 안마열사, 새총열사, 염산열사 등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대부분 이 때의 일.

4. 소멸


이 시기 시위는 논조가 더욱 극단화되어 이명박 정권의 퇴진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시위대 내부의 물의와 유언비어로 인한 신뢰도 하락, 논조의 극단화로 인해 지지자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정부 담화문 발표 이후 촛불시위는 이후 다함께 등과 같은 전문적 운동 단체의 가세[2][3], 그리고 정부의 사과 담화문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경찰의 과잉진압을 체험하고 공분한 시민들의 감정의 격화로 인해 "시위대와 전경 사이의 전투"로 비화되었다.[4] 더불어 지속되는 정부의 모르쇠 대응에 시민들 스스로가 지치면서 결국 2008년 8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촛불시위는 끝났다[5].

5. 내용

5.1. 반정부적 시위와 경찰과의 충돌

초창기까지는 경찰도 평화적인 집회를 보장한다며 이 때까지는 전의경 일부만 경계대상으로 투입시키고 그 외에는 엄호대상으로만 두었을 뿐 유혈진압이나 과격행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까지는 사실상 평소대로 했던 시위처럼 그렇게 끝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예정되었던 소고기 수입고시가 승인되면서 일부 시위가 반정부적 과격시위로 바뀌어가게 되었고 성격과 규모도 과격하고 거칠어지게 되자 경찰도 전의경 모든 중대를 경계투입하게 되었고, 테러 진압 전용인 경찰 특공대까지 출동하는 등의 사례를 남겼다. 경찰은 일부 시위대가 청와대와 그들이 주장하는 혐오기업 및 언론사까지 습격하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전의경들을 길목에 배치하여 시위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쇄를 하였고 뒤이어 물대포와 최루가스, 소화기 분말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반면 시위대의 길을 봉쇄하자 충돌을 빚기보다는 시청, 신촌으로 돌아가는 등(...) 이전 시위문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경찰이 당황했다는 사례도 있다.

시위자들과 경찰의 대립과 갈등도 격화되어서 시위자들은 경찰이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잡아서 폭행과 구타를 일삼으며 유혈사태를 불렀다고 주장하였고, 경찰들은 시위성격이 반정부 시위로 변질되어가기 때문에 일반시민의 안전과 사회안정을 위해 강경진압으로 풀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5.2. 시위자들이 지목했던 우호기업과 혐오기업

촛불시위자들은 시위 중에 국내 일부 기업 및 언론사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곳과 혐오적인 기업을 지목하기도 하였는데 우호적인 기업으로는 삼양식품, 다음,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등이었고 혐오적인 곳으로는 삼성, 농심, 롯데, 조중동, KBS 등을 지목하였다. 이들은 조중동 계열 및 그들의 대형 광고주이다. 특히 광화문에 있는 동아일보조선일보는 본사 사옥이 시위대에 의해서 입구가 점령되고 습격을 당하여 동아일보 깃발이 강제로 끌어내려질 뻔도 하였고 동아일보조선일보 그리고 코리아나호텔과 일민미술관 등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간판이 파손되고 입구가 파손되어 봉쇄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일부는 근처에 있는 삼성 태평로 본관 사옥으로까지 습격을 시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일설도 있다.

또한 이들은 삼양식품을 우호기업으로 표방하며 시위참가 때 삼양식품들의 제품들을 산성처럼 쌓아놓고 삼양식품 제품을 이용하자는 운동을 펼쳤으며 "조중동" 절독 및 불매운동, 조중동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상품에 상품 불매운동도 벌이는 등 이들 기업에 대해서 반(反)기업 시위로 연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삼양식품은 조중동 지면광고를 내지 않기로 하는 등 기업들이 시위대의 반응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이에 해당 언론들은 시위자들이 이제는 언론사 고유권한까지 방해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친정부 언론이던 "조중동"은 집회에 우호적인 미디어다음에 뉴스공급을 중단했고 다음측도 이에 2011년까지 조중동 관련 매체의 뉴스게재를 거부했다.

5.3. 진보와 보수의 반응과 대립

이 시위에 대해서 진보와 보수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으며 진보쪽에서는 정부의 무리하고 지나친 소고기 수입에 맞서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한 행사이자 평화적인 문화집회라며 지지를 표방하였고 보수쪽에서는 반정부, 반미를 앞세우고 심지어는 친북종북 좌파들이 정부전복과 반미를 빙자하여 폭력시위를 찬동시켰다고 주장하는 등 대립각도 심각했다. 친미 성향에서는 친북 좌파 빨갱이들이 반정부, 반미를 조장하여 사회전복을 꿈꾸고 있다는 논란까지 주장하였다.

이 시위를 계기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도 격화되었으며 시위가 끝난 지금도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로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6. 이런 저런 이야기

  • 이 사건의 영향으로, 온라인 세계에서는 정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대 포탈과 취미 관련 커뮤니티, 블로그, 취미 사이트 등에서는 연일 보수 vs 진보 대립으로 인한 개싸움이 수시로 벌어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루리웹이나 이글루스. 지금도 보수/진보 대립이 심각한 문제인 곳들이다. 물론 이는 온라인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술집 등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촛불시위가 화두로 나왔다가 싸움까지 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국 보수쪽은 네이버[6], 디시인사이드[7]등지에 몰려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진보쪽은 다음, 네이트, 싸이월드 등지에서 확연히 갈라서서 활동하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8] 디씨에 관련 갤러리로 촛불 집회 갤러리가 있지만 정사갤성향이 장악하기도 했고 현재는 아예 갤이 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터넷에 활동하는 정치 관련 네티즌과 선동가들을 대거 양성화 하게 되어 연일 선동을 하거나 단순히 정치 성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 언론사를 비난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 SLR클럽의 경우 자체적인 시민 기자단을 구성해 운영하였을 정도로, 많은 커뮤니티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아프리카 TV 등 온라인 현장 중계도 이 때 유명해졌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폰카, 문자 등을 이용해 순식간에 시위 관련 속보를 온라인으로 퍼뜨리는 정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9]
    쇠고기 등에 반대 광고를 게제한 커뮤니티도 수십 곳에 달할 정도. 이 외에도 카이스트를 포함한 다수의 대학 학생회들도 참여하였고, 이 외에도 많은 사회 단체에서 참여하였다.

  • 촛불시위 당시와 그 이후 한겨레로 대표되는 진보계열 언론에서는 촛불시위의 주 참여 계층 혹은 원동력을 10대 여학생이나 2,30대 여성으로 착각 파악하였다. 때문에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다고 단정지은 20대를 향한 20대 개새끼론[10][11][12] 그리고 강남 좌파 혹은 20대 여성에 대한 찬양론이 잠시 일기도 했다.
    촛불시위가 한참 진행될 때에는 촛불시위의 발화점이 된 광우병 문제에 대해 과학적 지식을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나, 웹툰 등을 통해 '촛불은 옳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식의 제안을 내는 사람들에게도 가차없는 마녀사냥을 하기도 했다. 한 예로 당시 '촛불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구원투수'지만 '시위가 더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이제부터는 정당이 제도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던 최장집 교수는 아직까지도 일부에겐 역적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 “100일 정권이 퇴진하는 사태 올 수도”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최장집 교수는 절대 이런 이유로 까일 사람도 아니며, 이 사람이 주장한 말도 절대 까일 말이 아니다. 정당이 이런 걸 안 하면,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라도 할까?

  • 2008년 7월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 바른사회시민회의 등으로 구성된 ‘바른 시위문화 정착 및 촛불시위 피해자 법률지원 특별위원회’는 광화문 주변 상인들의 위임장을 모아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국가 등을 상대로 손배해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불법·폭력적 시위를 조장한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졸속협상으로 시위를 촉발하고도 시위대를 방치하고 차벽을 설치해 통행을 금지한 국가로 인해 매출액이 감소했다”고 주장하며 전년 대비 카드매출액 감소분과 위자료를 청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현행 집시법은 공공의 안녕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 집회·시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개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집시법 위반이 손해배상 책임의 부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2008년 5~7월 해당 세무서 조회 결과 원고들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오히려 신용카드 매출액이 증가한 경우도 있어 손해를 입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또 손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불법행위의 간접적 손해는 가해자가 그 사정을 알거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당연한 결과다. 시위에 있어서 기물파손이나, 방화 등의 문제가 발생해 고의적인 손상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손해배상을 시위자들에게 요구하는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이 될 수 없는 행위다. 그리고 상인들의 증거마저도 신용카드 매출이 증가했다는 법원의 심리에 의해 부정되었다.

  • 당시는 숭례문이 붕괴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 세웠던 숭례문'이 무너진 이후 들어오게 된 '화기'가 이 시위대를 말한다는 평도 있었다. 그리고 숭례문 붕괴 또한 당시 서울시장이었던[13]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과오라는 평가를 받았기에, 숭례문 사고에 대한 비판이 시위와 연결되는 감도 살짝 있었다.

  • 2011년 7월. 미국의 모 사이트에서 중우정치(Ochlocracy)의 한 예로 촛불시위를 짤방으로 내놓았다(해당 사이트 5번 항목).#

  • 시위가 한창일 때 군대를 제대한 예비역 남성들이 경찰과 시위대의 사이에서 스크럼을 짜고 충돌을 막은 적이 있다. 자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며 덕분에 해당 지역에서는 충돌로 인한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촛불시위 이전부터 1000일 농성을 벌여오고 있던 금속노조에선 촛불시위에 대해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촛불집회 얘기는 많이 해도 비정규직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비정규직이어도 우리 아이는 비정규직이 되지 않을 거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국민들이 가시적인 사건에만 분개하거나 자신들에게 직접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나섰을 뿐이고, 기존부터 사회전반에 산재해 있던 문제에 대해선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 촛불시위서 사모임 결성, 작정하고 쇠구슬·염산투척,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008년 8월 28일 경찰에 염산병을 던지는 등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 등)로 '열혈국민' 소속의 회원들을 구속하였다. 김모(41·무직)씨 등 3명을 구속하였다. 다른 김모(45·무직)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모임 회원 1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3명의 행방을 쫓는 등 추가조치를 하였다.

7. 평가

이런저런 모습들을 많이 보였지만, 2008년 촛불집회는

  • 행정부의 불통과 독단적 밀실적 쇠고기 협상 진행 (Wiki Leaks/2차 외교문건 공개 참고)
  • 이를 저지하거나 공론화하지 못한 정당과 입법부(국회)의 무능함
  • 많은 미디어에서 계속 쏟아져나오는 광우병에 대한 우려 제기와 추측
  •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비난여론 형성. 이 와중에 불안감 확산으로 인한 대량의 유언비어 생성.
  • 여론의 논란이였던 광우병 논란이 사실상 과민반응, 선동에 불과함으로써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
  • 길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상당한 규모로 집결.
  • 여론이 양분되면서 일반 시민층은 다소 소극적으로 변화
  • 시위대 규모의 축소, 전문 시위꾼들의 개입으로 일부 시위의 성격이 과격하게 변질 그리고 불미스러운 사고들, 정부의 모르쇠 대응이 겹쳐 시위대 해산
  • 이 동안/ 이후 시위에 대한 다양한 평가 등장, 이는 당시의 정치 인식과 연결되기도 함

큰 맥락에서는 이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집권 초부터 숭례문 화마, 태안 반도 석유 유출 등 영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도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이 시기후에 지지율이 올라갔다가 2011년 여름을 지나면서부터 곤두박질치고 있다.).

촛불시위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정운천 전 장관을 비롯한 촛불시위 당시 정부의 주역들이 다시 복귀하였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시위에 대한 조선일보의 비판적 기사를 극찬하며 촛불시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여 시민단체 및 언론들의 반발과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촛불시위가 공동체의 이슈를 통한 연대의 경험을 제공하였으며, 정부의 독선에 맞서 시민들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긍정적 평가 역시 존재한다. 특히 시위에 참여한 10대 청소년들 다수가 '즐기듯', 그러나 '진지하게' 자연스럽게 집회/시위라는 민주주의의 기초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진보진영 386세대 학자들과 운동가들을 설레게 하기도 하였다. 비장하고 숭고한 심정으로 집회에 임했던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14] 다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일부의 인식일 뿐이지 시위를 함부로 '즐길만한 것', '축제' 등으로 표현했다간 무개념으로 낙인찍힐수 있으니 주의할것. 무엇보다도 이 시위의 발단은 독재정귄이나 인권유린과 같은 막장사태로 기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숭고한 분위기는 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만일 구 체제식의 시위 진압이 이루어질게 뻔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이런 형태의 '즐기는'분위기가 나올지도 미지수.

야간 집회가 금지되어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헌법재판소 헌법 소원 끝에 위헌 5명, 헌법불합치 2명의 불합치 판결이 내려졌고 결국 야간집회 금지 규정의 효력이 상실되었다. 대법원도 기속력을 인정하여 야간집회 금지로 기소된 사람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 이후로 야간에도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14년 3월 27일에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 2명이 낸 헌법소원에서 결국 야간시위 금지에 대해서도 일몰후부터 자정까지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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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람이 많고 적음을 인식을 할때는 로그스케일로 인식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다.
  • [2] 이들이 시위의 과격화에 미친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촛불시위 당시 대부분의 시민들은 부동층 혹은 노무현 지지층이었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단체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으며, 실제로 운동단체들의 전투력은 노동 조합이 아닌 이상 그리 강하지 않다. 여담으로 다함께는 시위현장에서 800원에 팔아먹는 기관지의 제호를 '맞불'에서 '저항의 촛불'로 바꾸는 등 촛불시위에 편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지만 '확성기녀' 등의 사건으로 시민들의 신망을 전혀 얻지 못하였다. 역시 다단계
  • [3] 다함께의 참가가 후반기에 시작된것은 아니다. 그들은 촛불시위 초창기부터 어쨌든 확성기를 들고 대열선두에서 행진대열의 진행을 유도하였다. 물론 그때도 사람들 반응은 "쟤들은 뭐냐?", "꺼져라" 등등이었다.
  • [4] 보수/진보 언론의 논조가 다르기 때문에, 1면에 내건 신문의 분위기는 그 차이가 극명했다.
  • [5] 2010년 10월 프랑스에서 대규모로 벌어졌던 연급법 개정 시위도 사르코지 행정부가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결국 흐지부지 되었는데, 촛불시위도 비슷한 경우이다. 사르코지가 이 때 한 수 배웠을지도.
  • [6] 덕분에 네이버가 검색어 순위조작 의혹에 휘말린 것도 이때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 [7] 하지만 디시인사이드 전체가 우익화된 것은 2010년 이후로 진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가깝다. 정사갤의 우익화는 물론 그 이전으로, 보통 키보드 워리어의 어원으로도 알려진 전여옥과의 대담을 기점으로 보지만 이 정사갤은 당시에는 변방의 한 갤러리에 불과했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전성기를 맞았던 합필갤에서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와 서울시장 이명박 짤 등도 적극적으로 합성에 이용했다.
  • [8] 이러한 흐름이 나중에 디시인사이드에 파생된 일베저장소의 탄생에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 [9] 이 때 일부에서는 한국에서 쿠데타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반란군이 움직이는 순간 순식간에 시민들의 폰카와 문자를 통해 소문이 퍼질 것이라고.
  • [10] 엄밀하게 말하면 '대학생 개새끼론'이 되겠다. 실제로 각 대학 단위의 참여는 미미했던 것이 사실. 물론 개인이나 친구 단위로 참가한 대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대학 학생회 단위의 참여가 아니면 사회적으로는 그냥 참가한 일반인들과 아무런 의미 차이가 없는 것이다. '대학생 집단'이라는 대표성은 없는 것.
  • [11] 실제로 촛불집회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부정해 버리는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 [12] 대학생들 참여가 저조했던 것에는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말고사와 방학기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결집이 어려웠던 것, 운동권을 중심으로 한 학생회의 경우는 응집성이 높았던 광우병 문제를 넘어서 정권퇴진으로 몰고간 것, 대학 본부의 제어노력과 학생회의 반발과정에서 벌어진 블랙코미디 등에 비운동권인 일반 학생들의 거부감 등. 물론 근본적으로는 취업준비소가 된 대학과 아직 운동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학생회 지도부의 인식 차이가 자리잡고 있기도하고.
  • [13] 사실과 다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2~2006년 사이에 시장을 지냈으며, 당시에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다...라는 각주가 달려 있었으나, 여기에서 '당시'는 숭례문 개방 당시. 이명박 재임 기간 숭례문을 민간에게 개방하였다.
  • [14] 당시 촛불시위대는 경찰버스 위에 시위대 또는 전경이 올라가자 "노래해! 노래해!"하고 외치기도 했었다. 경찰버스 연행은 "닭장차 투어"라고 불렀다.(…) 이를 두고 한 기자는 "발랄한 축제의 장"이라고 표현했다. 해당 기사는 이하의 머니투데이 링크를 참고.
  • [15] 촛불시위서 사모임 결성, 작정하고 쇠구슬·염산투척,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008년 8월 28일 경찰에 염산병을 던지는 등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 등)로 '열혈국민' 소속의 회원들을 구속하였다. 김모(41·무직)씨 등 3명을 구속하였다. 다른 김모(45·무직)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모임 회원 1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3명의 행방을 쫓는 등 추가조치를 하였다.
  • [16] 다른 사이트도 많았지만 다음이야 말로 인터넷내 진보세력들의 최대 집결지였다. 당시 고2였던 andante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이 이명박 탄핵 청원을 올린 곳도 다름아닌 아고라. 촛불 집회 이전까지는 진보의 목소리가 크긴 했어도 보수 쪽 네티즌들의 댓글도 간간히 달렸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정치와 상관없는 기사에도 새누리당을 비꼬는 댓글이 최다 추천댓글이 되는 등, 완전히 진보 여론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사건 중 하나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논란이 최초 보도된 기사에 한때 39만명(3만 9천명이 아니라 진짜 39만명 이다!) 에 육박하는 댓글이 달렸던 것. 문희준 보고 있나? 자세한건 지곤조기 문서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