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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사건

last modified: 2015-03-03 19:33:59 Contributors

상위항목: 항쟁, 학살


二二八事件
Érèrbā Shìjiàn
Jī-jī-pat sū-kiāⁿ

Contents

1. 개요
2. 원인
3. 발단
4. 항쟁의 격화
5. 진압과 학살
6. 그 뒤
7. 대중문화

1. 개요

중국 역사상 혹은 타이완 역사상 최악의 양민학살이자 흑역사. 아직도 대만 최대의 아픔으로 남는 사건이다.

2. 원인

일본의 패망 이후, 대만은 중화민국으로 반환된다. 그러나 대만의 역사 자체가 중국 본토와 연관을 맺은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통치 자체에 신중을 기할 필요성이 많았다. 문제는 국민당 정부의 통치가 일본의 그것보다 더했으면 더 했다는 점.

“신임장관(진의)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 국무성, 중국백서

여기에 인구 구성비도 본성인(17세기부터 1945년 일제 패망 전까지 대만에 정착한 한족계 주민)과 외성인(1945년 일제 패망 후부터 1949년말까지 대만에 이주한 한족계 주민)이 대략 8 대 1의 비율로 내성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정부의 요직은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중국 국민당정부는 내성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피면서 본성인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국민당 정부는 대만 자체를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에 협조했던 한간(漢奸)의 섬으로만 취급하여 처음부터 의혹의 눈으로 보았고[1][2], 또 대만이 국공내전의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까닭에 유능한 인재를 파견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자연히 국민당 정부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 클 수 밖에.

3. 발단

사건의 발단은 정말 어이없는 사건에서 일어났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과부 린장마이(林江邁)[3]가 담배노점을 하고 있었는데, 담배는 당시 정부만 독점으로 파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 이 노점을 허가받지 않았다고 탄압했다. 문제는 적당히 잡아들여야 하는데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잡아들인 것.

지나치게 과격한 탄압에 항의하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 급기야 경찰이 쏜 총에 학생 천원시(陳文溪)가 맞아 사망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4. 항쟁의 격화

학생이 사망한 날이 그 다음 날인 1947년 2월 28일인데,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대만에 들어온 국민당 경찰과 장개석 휘하 군 부대 본부를 에워싼채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관을 구타해 사망케 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군중들은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점차 시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 전 섬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3월 2일, 대만의 지식인들은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대만성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진의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포하였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한 발포를 하는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부터 사태가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리위원회의 성격이 점차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여기에 대만 본토인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까지 발전한다.

5. 진압과 학살

진의(陳儀)는 사건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한 입장으로 전개되자, 시간을 벌면서 장개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미 대만 자체의 병력으로 시위의 진압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에 대륙에 있는 국민당 군의 증파를 요청한 것이다. 처음에 장제스는 국공내전 때문에 군대 파견을 거부하다가 이번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3월8일 증원군을 대만에 파견했다.

그리고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된다. 계엄령이 선포되고[4], 국민당 군 21사단이 타이완 북부에 투입되면서 시작된 진압은 일주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아울러 대만 본토인에 대한 대약탈까지 벌어진다. 다만, 사건 발생 50주년에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만 8천명에서 2만명 사이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5] 학살과 약탈로 인해 대만 자체가 초토화되었고,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 위윈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한다. 결국 5월 16일 장개석이 공식적으로 사건의 종료를 선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물론 상처는 그대로 남았지만.

6. 그 뒤

이 사건은 대만에서 최대의 금기였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대만으로 본토인들이 들어오고,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로 남았다.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대만에서 언급된 것은 1988년 리덩후이 총통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리덩후이는 대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던 위치였다. 오랜 논란 끝에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대만 정부가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뒤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 장개석이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온 상황이다.[6]

대만 독립 주장의 근원이 되는 사건이다. 본토에서 들어온 군인에 의한 2만명 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라서 대만 독립 주장의 원천이 된다. 즉, 본토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믿을 수 없다는 정서다. 사건의 근원에 본성인 (대만 본토 출신)과 외성인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의 갈등이 깔렸기 때문에 더더욱 대만 독립 주장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아울러 뒷날 대만에서 계엄반대 운동의 최근원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대만 민주진보당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만의 국부 격인 장개석이 직접 연루된 사건이라 아무래도 논쟁이 있는 모양이다.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장개석을 기념하는 중정기념당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7], 여기에 대해서는 워낙 논쟁이 많아서 쉽게 결론이 날 것 같지는 않다.

현재 2월 28일은 중화민국에서 '평화기념일'이란 날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중화민국의 공휴일 중 '실질적 영토(=타이완 지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날'은 이 날이 유일하다. 그렇긴 한데 이 사건도 국부천대 전에 있었던 일이라, 국부천대 이후에 중화민국의 실질적 영토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어진 공휴일은 아예 없는 셈이 된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덩샤오핑 집권 전까지는 이 사건을 국민당 집단의 폭정에 대한 '대만 인민의 의거'로 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후 국민당과 관계 개선을 꾀하면서 이 행사는 없어졌다. 물론 기념행사를 한 것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논리였겠다.

한국대구 10.1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라 그런지 관련 기념재단 및 단체와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4.3 사건보다 먼저 명예회복과 정부 사과가 있어서 4.3 관련 단체에서 2.28 사건의 명예회복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8]

특이한 점이 있는데,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선 4.19 혁명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학생 민주 의거가 일어났다. 이른바 2.28 학생 민주 의거. 대만의 2.28 사건과는 정 반대의 결과가 빚어진 셈이다.

NPOV를 안 지키기로 유명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2.28사건이 일부 왜곡되어 해석되고 있다. 학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약하자면 반일 국민당이 친일 대만인들을 학살했다는 식으로. 2.28 사건을 '재대만 중국인'(외성인을 이렇게 표현)과 대만인의 갈등으로 묘사하여 외성인과 본성인을 철저히 분리했으며, 반대로 본성인들이 기미가요를 모르는 외성인들을 척살했다는 서술도 나오고 있다. 타이완에 대한 우익의 왜곡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이 사건의 원흉중 하나인 대만 행정장관 진의는 사건이 끝나고 해임되었다가 1년 뒤인 1948년에 절강성 정부 주석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국공내전 도중에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려했다가 발각[9]되어서 1949년에 체포되었고, 1950년에 자신이 사고를 쳤던 바로 그 대만땅에서 처형되었다. 천하의 개쌍놈자업자득[10]

7. 대중문화

영화 정성시의 배경이 바로 이 사건이다. 하지만 워낙 암흑에 가려진 사건이라 많은 대중문화로 제작되지는 않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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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위해 싸운 대만인이 21만 명에 달하며, 전사자는 3만 명에 이르렀다. 중일전쟁 당시 대만 성인남성의 1/7가 일본을 위해 싸운 것이다. 물론 본성인 입장에선 일본이 좋다고 입대한건 절대 아니므로 억울하긴 하다. 당장 조선인들도 강제로 끌려가기도 했고.
  • [2] 아이러니하게도 국공내전 이후에는 중국 국민당 부역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한간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 [3] 이 사람은 1907년생이다. 노파라고 하긴 그렇다. 린은 남편 성이고 장이 자기 본성.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결혼한 여자는 자기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인다. 대륙에서는 요즘은 이 방식을 쓰지 않으나 대만에서는 쓰고 있다.
  • [4] 이 때 내려진 계엄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해제된다.
  • [5] 3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 [6]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국민당 계열에서는 반발하고 있다. 천수이볜이 정략적으로 써먹기도 해서 그런 탓도 있고.
  • [7] 급진적인 독립파들에게 장제스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다. 침략자다. 올림픽에서 국기 게양 못한다고 하지만국기가 바로 그들에겐 침략자들의 상징물이다. 정말 극단적인 독립주의자들이 그 국기에 대해 갖는 감정은 한국 독립투사가 일장기에 대해 갖는 감정이나 똑같다.
  • [8] 6.25 전쟁 당시 전황이 불리해질 경우 망명정부를 고민하고 있었던 이승만과 미군(유엔군)의 경우 제주도는 유력한 피난지 가운데 하나였다. 만약 그랬다면 4.3의 위상은 2.28 사건과 정확히 같아졌을 것이다(...) 본토는 뽀글이 뚱뚱이 만세! 제주도는, 본토를 수복하자! vs 제주도는 독립 된 나라다!
  • [9] 자신의 옛 부하이자 장제스의 심복인 탕언보(湯恩伯)에게 같이 투항하자고 권유를 했는데 탕언보가 장제스에게 밀고를 해버렸다.
  • [10] 원한관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여기를 참조해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