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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

last modified: 2015-11-23 16:16:4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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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1998년의 평범한 뉴스.jpg

출처는 1997년1998년MBC 뉴스데스크다. 출연자는 당시 평일 앵커인 이인용/김지은-정혜정, 주말 앵커인 권재홍/최율미. 대우그룹 부도는 1999년이다. 그 밖에 위의 스크린샷에서 언급된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외환위기 이후에 회생되었거나 부도를 당하지 않은 다른 기업에게 넘어가 이름까지 바뀌기도 하였다.

자고 일어나니까 이랬다. "부도... 부도... 부도... 이제 이 말도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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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듯한 환율 폭등으로 절망감에 빠진 외환딜러들의 모습

아래 본문에도 상당히 잘 설명되어 있긴 하지만, 그보다 전문적이고 세밀한 통계를 기반으로 한 분석을 보고 싶다면 여기를 참고하자.

Contents

1. 개요
2. 원인
2.1. 투자만능론
2.2. 정경유착의 정점이었던 한보사태
2.3. 내재적 취약성
2.4. 외부 충격에 대한 취약성
3. IMF의 구제금융과 구조개혁 요구
4. 기타
4.1. 다른 원인들?
4.2. 펀더멘탈 타령?
5. 다시 문제는 투자가 되었다
6. 영향
6.1. 경제적 영향
6.2. 정치적 영향
6.3. 사회적 영향
7. 세계경제계의 변화


1. 개요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벌어진 최악의 흑역사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한 대사건.
미국의 21세기가 9.11 테러로 시작했다면, 대한민국의 21세기는[1] 1997년 11월 21일에 외환위기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고 불리던 시절을 누렸다.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결국 외화보유액 부족과 여러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어 현대의 대한민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며 자랑했으나, 현실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7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국민들을 절망케 한 사건이다. 돈을 함부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2]

본격적으로 진행된 산업화 이래의 한국 역사는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전과 그 이후, 그리고 1997년~1999년 경제위기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이를 능가하는, 역사상 중요한 경제적 사건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경제위기 이전에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던 한국은 경제위기 이후 한동안 벼랑끝으로 추락했다. 단기간에 회복했긴 했지만 막대한 사회적 후유증을 불렀다. 예를 들면 자살률 급증, 이혼과 가족 해체, 출산율 저하, 양극화, 고용 불안, 청년실업 등의 암울한 그림자를 남겼다.

이렇게 한 국가의 미래를 한순간에 뒤바꿔버린 사건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외환위기가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2015년 현재도 그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다분히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가계는 과소비를 했고[3] 기업은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았으며[4], 정부는 인위적 환율 유지를 했고, 외국의 단기자본들은 치고 빠지기 식으로 공격했다. 부동산 광풍[5]으로 물류비용도 높았고, 근로자들은 쟁의로 제몫찾기에만 골몰했다.[6] 이렇듯 모든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해이가 위기를 가져왔다. 누구의 책임이 더 중하거나 덜 한게 아니다. '내 탓이요'라는 자세로 우리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식의 두리뭉실한 진단은 받아들이기 매우 쉽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한다면 다음 위기는 단지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는 것만으로 예방될 것이기에. 하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 때문에 오히려 현재 안좋게 작용하는 것 또한 많다.저소비랄지. 저투자랄지.

2. 원인

2.1. 투자만능론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경제에 있어 매우 좋은 시기였다. 부동산[7][8] , 주식[9] 등 자산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긴 했지만 경제성장률은 7~9%를 찍으며 고공행진이었고 경기과열을 우려할 정도로 내수도 급신장하는 상황으로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10] 거기에 실업률은 더이상 통계를 낼 필요가 있을까 싶을듯한 수준으로 낮았다. 거기에 1995년에는 GNI가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으며 그 기세로 1996년 10월에는 일명 경제선진국가단체인 OECD에 가입하는 기염도 토했다.

이 모든 활황세는 단 한 가지 동인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투자였다.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11]은 전년대비 약 30%라는 증가율을 보이며 불타올랐다. 이건 좀 과하지 않냐는 견해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렇다고 당장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뉘앙스는 전혀 아니었다. 한국경제에는 모종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즉, 투자란 너무도 건전하고 고귀한 것이었기에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은 경기과열이 아니다라는 것.

이런 투자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는 얼핏보면 다음과 같이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1) 투자는 그 자체로 GDP의 구성요소이므로 투자증가는 경제성장률을 높인다.
(2) 투자는 단기적으로는 거시경제의 총수요를 구성하는 요인이지만 그로인해 자본량이 증가하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거시경제의 총공급이 증가한다. 즉, 투자증가가 일시적으로 수요견인 인플레이션을 가져온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공급증가가 뒤따라서 물가는 안정된다.
(3) 투자는 단기적으로 기계류 수입을 증가시킬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본 증대에 따라 수출을 더 증가시킨다. 즉, 투자증가는 결국은 경상수지를 개선시킨다.[12]

즉 투자만능론에 의하면, 소비증가에 의한 불건전한 경기확장과 투자 증가에 의한 건전한 경기확장은 마땅히 구분해야 하며, 투자증가의 모든 부작용은 일시적인 것으로(약장수들이 명현현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1996년 들어서도 투자증가율은 여전히 전년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물가상승률을 5%에서 방어하겠다던 호언장담은 물건너 갔다. 경제성장률도 수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경제는 GDP의 5%를 넘는 아주 골치아픈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다. 위에서 떠들어댄 일시적인 부작용이 장기적인 부작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는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투자촉진을 위한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의 주장은 사치성 소비재 수입으로 경상수지가 악화되었으니 또 투자를 해서 수출을 늘려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전무했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최근 한·일 간 냉랭한 기류를 감안해 경제분야에서 한국의 기(氣)를 꺾어놓겠다는 심산으로 해석된다. 16일 기획재정부와 경제계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게 된 데는 일본이 1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일시에 인출한 것이 '결정타'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2. 정경유착의 정점이었던 한보사태

한때 국내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은 1997년 초에 결국 부도를 냈는데, 부실 대출의 규모가 5조 7000억여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여서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이를 발단으로 이와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정태수(鄭泰守) 한보그룹 총회장과 관련하여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와 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면서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도 정태수와 비리 관계가 있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먼저 한보그룹은 1990년부터 5조 원 규모의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견제를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건설부가 부지매립 허가를 9개월 만에 내주었음은 물론, 통상산업부(지금의 산업자원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철강업계에서는 한보의 경영능력으로는 이 프로젝트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음에도 1조 원 규모의 코렉스 설비를 도입하여 계속 철강사업을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제철소의 투자비를 2조 2800억 원으로 책정하였으나, 2년 만에 5조 7000억 원으로 불어났고, 1995년에 1조 4300억 원, 1996년에 2조 원이 더 늘어났다. 이렇듯 대출금 규모가 늘어난 것은 정부채권은행단이 한보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인데, 한보는 이 와중에도 18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계속해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었다.

결국 은행들은 한보철강에 거액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금융계는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상세한 검토도 없이 외압에 따라 대출을 결정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실제로도 3개의 시중은행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은행감독원 등 금융감독기관도 동일인 여신한도를 넘어선 한보철강에 대한 제일은행의 편법 지원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가벼운 문책만 함으로써 감사원의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갚을 능력도 확실하지 않은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큰 돈을 마지못해 빌려주었다가 홀랑 다 떼이는 것과 비슷하다.

더구나 조사 결과 한보철강이 금융기관 대출금 가운데 유용한 자금이 2136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혀짐으로써 조사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은 물론, 한보 부도와 관련한 각종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쨌든 1997년 5월, 이 사건으로 인해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20~5년을 선고받았는데, 이 역시 빙산의 일각이라는 평가와 함께 시간 속에 묻혀버렸다.

이 사태가 발생하면서 제철소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부도 여파로 인해 171개의 영세업소와 외상 거래자들이 빈 손이 되었고, 국가 대외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해 국가 경제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또 금융계에도 여파가 크게 미쳐 시중은행장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되었으며, 이른바 '한보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2.3. 내재적 취약성

한국의 고정투자에 대한 두가지 실증적 사실부터 지적해두자.
(1) 한국의 고정투자는 이자율에 대해 매우 비탄력적이다.[13][14]
(2) 한국의 수입은 원자재, 자본재, 소비재 각각 약 50%, 40%, 10%로 구성된다.

이런 경제에서 투자과잉의 효과는 우선 경상수지 적자 압력이다.

수입에서는 (2)의 사실을 기억해보라. 원자재와 소비재의 구성비율은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허나 자본재는 그렇지 않다. 고정투자는 일단 기계류의 구입이다. 당시 정밀기계류의 구입은 거의 1대1의 비율로 일본에 대한 수입이었다.[15]

또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세계 경제는 활력이 저하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에 의한 자본증대로 수출을 늘릴수 있을까? 일단 자본을 투입해 물건을 많이 찍어내서 수출물량은 늘릴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많이 찍어낸 물건이 전부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다시말해 수요와 공급 법칙에 의해 수출단가가 쪼그라들어서 수중에 얻는 건 거의 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소국으로 세계 교역조건에 특별한 영향을 미칠수 없으므로 밀어내기 수출에도 수출단가 하락은 피할수 있다고 한다.[16] 하지만 한국의 수출품목은 60, 70년대부터 정부 정책에 의해 특정 품목에만 집중적으로 개발된 형태다. 적어도 해당 품목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의 수출이 수출단가를 하락시킬수밖에 없다.

수출액은 거의 늘지 않고 수입액만 증가하면 경상수지는 악화된다. 당시 고정자본형성 증가율은 이미 30%에 달한 상태였고 위에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은 일본에서 기계를 왕창 수입하고 있었다. 결국 대규모 적자를 피할 방법은 달리 없었다.

다음으로 언급할 점은 기업 경상이익 악화다.

통상 한국에서는 투자가 경기를 이끌 때, 소비는 내리막길인 경우가 많았다. 즉, 한국 기업의 투자결정은 이자율보다 일단 소비의 추이에서 자극받는 전형적 동아시아 경기변동 사이클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기업의 영업이익은 감소한다.

나아가 많은 기업들이 투자에 나섰으므로 시중 이자율은 올라간다. 보통 이자율이 올라가면 투자가 뜸해져야 하는데, 한국 기업은 이자율에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이자율 상승에 따라 투자가 감소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앞의 영업이익 감소와 결합해 경상이익은 더욱 감소한다.

경상수지 적자는 자본유입으로 국제수지 균형을 맞춰 주어야 하고, 경상이익 악화는 유동성으로 메워야 한다. 즉, 나라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야 하고 기업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야한다.

여기서 금융기관이 등장한다. 예컨대 당시의 종합금융회사들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외국에서 자금을 빌려, 그것을 다시 국내기업에게 빌려준다.

이는 김영삼 정부 초기부터 기획된 자본자유화에 의해 지원되었다. 1993년에 발표된 ‘3단계 금융자율화 및 시장개방계획’은 1997년까지 모든 금융 시장 규제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획기적으로 늘렸고, 채권시장을 개방했으며, 재벌들의 해외차입과 관련한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잘 굴러갈 때는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잘 굴러갈 때는 말이지...

2.4. 외부 충격에 대한 취약성

금융기관들이 외국에서 돈을 빌려 그것을 다시 국내기업에게 빌려주는 것이 경상수지 적자와 경상이득 감소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그 리스크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금융기관들이 외국은행들로 부터 돈을 빌릴 때, 좀 낮은 금리의 대출을 선택할까, 아니면 좀 높은 쪽을 선택할까? 질문이랄 것도 없다. 당연히 낮은 금리가 좋다. 그리고 단기 대출인 경우가 금리가 낮다. 그래서 한국의 단기외채는 늘어났다. 여기에 덧붙여 선진국 은행들도 비록 금리수익이 낮아져도 단기 대출 쪽을 선호했다. 왜냐하면 BIS의 초기 규정에 다소 난맥상이 있어서 은행이 단기대출을 해준 경우 장기대출에 비해 위험가중치를 매우 많이 낮춰 줬기 때문.

안 좋은 점은 아무래도 이 경우 금융기관의 유동성은 낮아져서 결제에 곤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단기 대출은 외국은행들이 롤오버[17]를 거부하면서 자금을 회수하기에 더 편리하다. 즉 국내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증가하고 경제는 해외자금동향에 극도로 예민한 상태[18]가 된다.

여기서 한국 금융기관들이 단기 저리 대금을 빌려와서 장기 투자 자금으로 기업에 대출을 해준 셈인데 이를 자금운용의 미스매치로 보아 문제삼았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다. 단기조달-장기대출이 바로 간접금융의 정의라는걸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 있는 은행들을 싹 다 없앨겨? 확실히 단기외채에 외환당국이 좀더 신경을 써야 했었지만, 그게 투자로 불질러댄 방화범들이 소방수더러 할 소리는 아닐듯 싶다.

3. IMF의 구제금융과 구조개혁 요구

결국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가 이렇게 간신히 존재하던 시스템의 취약성에 직격탄을 날렸다. 동남아 외환위기는 외국은행이 리스크를 기피하게 만들었고, 외국은행들은 이미 리스크가 부풀대로 부푼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대출을 꺼리게 된다. 이렇게 자금의 국제유동성이 감소하자 국내 금융기관은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결국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려다가 그걸 그대로 국내 기업들에게 빌려주던 시스템에 차질이 생겨 기업은 대출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따라서 외환의 수요와 기업의 대출수요는 더 절박해졌고 이는 다시 결제상 문제를 야기시켜 한국에 대한 자본도피[19]를 강화시켰다. 이런 악순환의 최종귀결은 누가 보아도 뻔한 것이었다.

국내금융기관들이 해외은행의 롤오버 거부로 더 이상 과잉투자로 인한 경상수지 및 기업경상이익 두 부분의 적자를 자금융통 해줄수 없게 된 와중에 경제부총리는 공식적으로 원론적이고 타당한 말을 했다. "은행도 망할 수 있다." 그 말은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실무적으로는 은행이 결코 망하지 않을 듯이 보이는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소리다.[20] 신용을 팔아먹고 사는 것이 금융기관인데 그 신용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말이 아닌가? 금융기관이 건전하게 잘 굴러갈 때는 이런 말을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척 보기에도 리스크가 커보이고 불안불안했던 금융기관의 신용은 이런 식으로 추락했다. 이처럼 금융기관에 대한 암묵적 지급보증이 공식적으로 부인되자 더욱 불안해진 해외 금융기관들은 자금회수에 박차를 가할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여러가지 내부문제로 구부러질대로 구부러진 나귀의 등은 동남아 외환위기라는 마지막 지푸라기 한줌에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IMF는 1997년 12월 3일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했고 더불어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가 지원을 결정함으로 200억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환율은 미친듯이 튀어올라서 달러당 800원 대으로부터 달러당 2,000원에 근접할 정도였다. 한 프랑스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Blessing in disguise[21]라며 구제금융을 가져 오면서 시중금리는 30%에 달했다. 1998년 경제성장률은 -6.9%였다. 이런 숫자들 뒤로 모든 것들이 녹아내렸다. 기업이, 금융이, 정권이, 사람들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도...[22]

IMF의 구조조정 처방은 헐값에 국내기업을 외국에 내줬다는 식으로 비판을 받는 편인데, 사실 이미 한국 기업들은 무분별한 투자로 평균부채율이 400%가 넘는 등 IMF가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사태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한편 거시경제적으로 IMF는 두가지를 강권했다. 하나는 재정긴축, 또다른 하나는 통화긴축.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올정도로 한국이 정말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고 생각한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도 그 적절성 여부를 두고 말이 많았고 아직까지도 너무 가혹했다는 비판을 상당히 받고 있다.

우선 이전에 이미 디폴트 직전까지 간 국가들과 비교했을때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재정긴축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한 외국계증권사 애널리스트는 "IMF 노친네들 대가리에는 남미만 있나보군."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대체 정부부채가 고작 GDP의 반도 한참 못미치는 국가에서 자국의 경제안정을 위해 재정지원정책이 아닌 긴축재정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걸로 IMF를 너무 탓할건 없다. 어차피 재정긴축은 바로 뒤집혀 버렸으니까.

그러나 고금리정책은 6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사실 실익은 거의 없었다. 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고 할때, 이 말은 채권시장을 통한 자본유입을 의미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정말 미약한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거기다 자본도피가 애초에 금리때문이 아니라 위험회피 목적임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23] 애초에 당시 죽을 쑤고 있던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히 소소한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지...

고금리정책은 분명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워주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면 확인사살 그 이상이 될지 모르지만 이하는 되지 않는다.(정확하게 그들의 판단은 고등학교 경제교과서 수준의 대처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워낙 높은 고금리 덕택에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다 . 높아진 이자를 갚기위해 차환기채[24]를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상 다소나마 성공적인 정책이라면 해외 채권자들과의 채무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IMF가 한 역할은 미미하다. 돌이켜보면 금융가 어르신들의 탁상공론의 끝을 보여줬으며 차라리 채무재조정 외에 자금수혈 만약 그것이 안되더라도 거시경제적으로 방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고금리정책이 아니었다면 비록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피할수 없었겠지만, 6.9%라는 재앙적 수준은 아니었을거다. 경제회복은 어차피 드라마틱하게 폭등해준 환율이 수출을 통해 이끌어 내주었을 것이고...

4. 기타

4.1. 다른 원인들?

과잉투자를 근본적 원인으로 지적한 만큼 기업의 책임이냐는 말이 나올것 같다. 그러나 투자과잉이 문제였다는 말은 투자의 주체인 기업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어디선가 두눈 시퍼렇게 드고 살아있는 투자만능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원인인가를 따지려는 것 뿐이다.

과잉투자외엔 과소비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상수지 적자 = 총투자 - 총저축 이라는 사후적 항등식을 생각해보자. 당시 가계저축률은 단독으로 GDP의 15%에 육박했고 경제 전체의 총저축은 무려 GDP의 35% 정도였다. 이들에게 과소비를 운운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호화사치품을 수입했다는데 수입 전체에서 소비재 수입 비중이 당시까지 10%를 넘긴 적이 있기는 했나? 몇몇 졸부가 초호화 수입품 샀다고 경제위기 생긴건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란 말은 너무나 남용되고 있는 경제학적 용어다. 계약체결 이후 계약자 상호간 숨겨진 행동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이 원인이 되는 현상을 일컫는 이 말은 역설적으로 어떤 도덕적 함의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모형안의 경제주체들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게 아니라 그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이말은 사회에서 쓰이다 경제학에 차용된게 아니라 그 반대다. 이걸 아무데나 써먹는다고 말이 되는게 아니다. 백보양보해서 그냥 편하게 통용하자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이유만으로 외환위기가 오나? 경기침체는 사회 도덕이 땅에 떨어져서인가?

정부가 뻘짓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그 상황에 투자촉진이라니... 그러나 정부가 외환위기 자체를 만들었고 거기에 기업이 희생되었다는 수준의 헛소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지금의 정부부채는 과거 공적자금의 상당분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공적자금은 기업쪽의 부채였다. 위기는 기업 쪽의 부채를 정부가 대신 떠 맡는 식으로 재분배해버렸다. 막말로 외환위기의 책임은 투자만능론에 눈이 멀어 대책 없이 투자를 싸갈겼던 민간경제에 더욱 막중하다. 단, 정부는 과거 자산동결조치처럼 기업의 채무조정이 필요할 때 정공법보다는 편법을 씀으로써 금융업을 박살내고 대기업들의 편을 들어 준 사례가 있다. 오죽하면 대우의 김우중 회장 등이 대마불사, 정부가 해주겠지 따위의 마인드를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했다가 망했을까.

물론 투자만능론으로 불거지는 비정상적인 경제상황에 제동을 걸고 재단을 해야하는 정부가 사태 진압에 실패한 것은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부의 문제점은 위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남이 만들어놓은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는 방화범이 아니라 소방수일 뿐이다. 책임 여하를 떠나 기업쪽은 이런 일에 대해 보다 염치있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실 외환위기가 발생한 당시에 청와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주장은 정말로 천박한 것이다. 032가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심지어는 투자만능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도 일부러 낮은 환율을 유지했다는 말도 돈다. 즉, 당시 한국이 OECD에 가입하기 위해 1인당 국민소득을 뻥튀기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 알다시피 1인당 국민소득은 달러로 표시되는데 환율이 낮으면 원화가치가 상대적으로 강한 것이 되기 때문에 같은 소득이라도 환율이 낮을 때 1인당 국민소득이 더 높게 측정된다. 그러니까 실질 환율은 상승해야 마땅한데 정부가 고의로 환율을 낮게 책정하면서 벌어진 사단도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환율의 상승압력을 막으려면 시중에 돌고 있는 원화를 매수하고 달러를 풀어야 한다. 이러면 외환보유고가 급속도로 떨어지는데 이러면서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외국에 원화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외환보유고가 없더라, 하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급격한 자본 유출을 한국은행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원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환위기를 부채질했다는 주장이다.

외국계 자본의 음모라는 주장은 몇몇 언론인 출신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헷지펀드는 언제 어디서나 위기의 순간에 들러붙는 초파리 같은 것이다. 그게 스스로 위기를 불러온 경우는 극히 드물고, 우리의 경우는 전혀 아니었다. 우리의 경우 자본도피는 주로 롤오버 중지로 발생했는데 롤오버 중지는 해외 금융기관들의 처방이었다. 해외 금융기관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돈 떼어 먹히기 싫어서 롤오버를 거부한 것이고 만약 IMF의 구제금융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들은 돈을 떼어 먹혔을 것이다. 뭐 여기서 "그러니깐 구제금융이 서구 금융권의 채권확보를 위한 음모라니까."라고 말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 도대체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하자는 말인가? 디폴트[25]라도 가자는 말인가?

국제자본에 대한, 보다 온건하지만 똑같이 틀린 입장도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국 경제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바람에 놀란 국제자본이 한국에서도 빠져 나가며 생긴 일이라고 한다. 타당한 측면은 이 주장이 위기의 원인을 무역이 아니라 국제금융으로 잡았다는 점일 것이다. 무역 측면에서만 볼때 동남아 위기가 한국만한 규모의 경제를 마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위에서 누누히 지적한 한국경제의 내적/ 외적 취약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그 덕택에 그들은 동남아 외환위기가 왜 한국에만 유독 심각하게 작용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4.2. 펀더멘탈 타령?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펀더멘탈 건전론은 아직도 많은 폐해를 끼치고 있다.

"경제지표만으로 안심시키려 들지 마라. 97년의 펀더멘탈 타령을 잊었나?" 와 같은 선동이 종종 이름있는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하지만 1995, 1996년의 경제지표를 보고 절대 펀더멘탈이 건전하다고 말할수는 없다. 사실 당시 당국자들도 대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펀더멘탈은 좋아요. (나지막한 목소리로)경상수지만 빼면요... 경상수지도 개선의 기미가 보입니다." 농담이 아니다. 달리 뭐라고 말해야 했겠는가? 금을 사두세요? 달러를 사두세요?

사실 이마저도 어설픈 거짓말에 불과했는데 문제의 당사자인 강만수 장관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26]

경상수지 개선과 경제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 것은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있었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경제수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 (중략) …대외신인도의 유지를 위한 전략 측면에서는 외국금융기관들이 급속하게 자금회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중략) …내부에서도 펀터멘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간부를 불러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사정이 날로 어려워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 (중략)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고 비극이었다.

말 그대로 얄팍한 거짓말 말고는 포장할 수가 없는 재앙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5. 다시 문제는 투자가 되었다

1997~1999 경제위기의 최대 경제적 영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또한 투자다. 위기 이전 과잉투자의 시대는 위기 이후 과소투자의 시대로 변모했다. 경상수지가 지속적으로 흑자라는 건 경제의 저축이 투자를 지속적으로 능가한다는 얘기니까 과소투자 상태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청년실업문제는 이와 함께 대두했다. 그 때문에 1995년(1.63명)부터 점차 하락하고 있던 출산율(1996년 1.58명)이 더욱 낮아져 2005년에 1.08을 찍게 된다. 그리고 현재도 1.3 정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있어 이민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확실시된다.[27] 물론 출산율 급락의 원인에는 육아시설 부족, 과도한 사교육 열풍 등의 원인도 있으나, 당장에 청년실업이 주는 충격 하나만으로도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임을 무시할 수 없다.

1998년 이후의 사회진출자들의 경우 초혼연령이 급격히 올라갔는데[28] 그 결과 출산율도 급격히 떨어졌다. 최근 다소간 출산율이 오른 것은 이때 결혼을 미룬 이들이 늦은 출산을 하는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실업이 존재하는 한 초혼연령은 쉽게 낮아질 수 없고, 그들이 언젠가 결혼을 한다도 해도 폐경까지의 가임기간 감소는 피할 수 없다. 게다가 만혼일수록 임신과 출산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문제다.

다소 묘한 것은, 이 과소투자의 시대에도 투자만능론이 극복된 건 아닌 듯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언제 어디서나 투자만 촉진하면 물가도 떨어져요, 실업도 줄어요, 경상수지도 좋아져요 같은 약장수 소리를 만날 수 있다.[29]

하지만 기업들은 이제 국내에 더 이상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내 투자가 더 이상 큰 이윤을 남겨주지 못한다는 걸 아주 화끈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기업가 정신의 고취가 없어서, 투자세액공제기간의 연장이 없어서, 세금 때문에, 국민들의 반기업정서 때문에 투자를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나라의 내수 시장이 돈이 안 돼서 안 하는 거다. 그 이유도 간단 명료하다. 외환위기 이래 본격화된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인구는 줄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이라[30]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노후 돈이 없으면 갈 곳이 없으니 절대 돈을 쓰지 않으며,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렇게 투자 가치가 높지 않은 시장인데다 일자리 수요는 공급을 한참 초과하고 있어 기업들은 인건비를 높여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갖고 있는 자산도 중국이나 미국 등지로 돌려야 할 판이다.[31]

그럼에도 그들이 투자만능론을 정부에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요구를 정부가 들어줄 때 투자를 더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기왕 하고 있는 사업의 비용을 절감하려는 것 뿐이다. 그들은 돈이 된다고 여기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투자한다. 국내에는 최소한의 투자조차도 꺼리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제3세계 신흥국들에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그리고 정부는 규제를 풀어주건 뭘 하건 간에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주 잘 아는 상황에서 굳이 당근을 줄 이유가 없다. 기업은 장기적인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신흥국이라는 대안도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6. 영향

6.1. 경제적 영향

이로 인해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공약 당시 한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오히려 임기말에 한국병을 고치기는커녕 한국병을 부르게 한 원흉으로 전락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퇴임하였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김영삼의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타였다. 퇴임 이후에도 김포공항에서의 빨간물 계란투척 사건, 고려대학교 특강 무산[32]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과거 경제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대기업들이 부도로 줄줄이 망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어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은 1999년 최종부도로 그룹이 해체되어 망하였고 삼미그룹, 청구그룹, 해태그룹, 한라그룹, 한보그룹, 진로그룹 등 유명한 재벌기업들도 이 때를 계기로 모두 망하거나 해체되었다. 그리고 정주영현대그룹도 회사가 분할화되어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산업개발,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등으로 계열분리가 되어서 지금은 현대엘레베이터가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지만 현대자동차그룹에 아예 재계순위나 지위에서도 밀리는 편이다.[33] 그 밖에도 동화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 여러 은행들도 모두 망했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지기도 하였다.

다만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되었다. 정말 300%~400%라는 말도 안 되는 부채율[34]을 가진 건실한 기업들은 부채율 감축에 온 역량을 퍼부어 현재는 건실한 기업치고 100%를 넘는 곳이 드물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면역력과 긴축경영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잃은 것에 비하면 적은 소득이지만...

또한 이 때부터 경상수지 흑자에 목숨을 걸게 되었다. 외환보유고가 부족해서 겪은 설움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부터 시작해서 일반 기업들까지 죄다 수출에 목을 매는 것이다. 그 와중에 환율에 대한 정책은 저환율 정책에서 고환율 정책으로 완전히 선회했고 이 기조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대외 무역수지를 살펴보면 경상수지는 외환위기 이후로 계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계속 적자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는 그렇게 경기가 어렵고 안 좋았던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때에도 한국은 계속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성장률도 0에 근접할지언정 마이너스 성장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속적인 무역 흑자를 위해서 의도적인 고환율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수입물가가 비싸진 것도 사실이며[35] 무역 적자를 기록하는 미국 등의 국가로부터 환율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물론 그건 미국 내부의 사정도 한 몫 하고 있지만서도.


6.2. 정치적 영향

1997년의 이 참사는 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한나라당회창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36]그리고 국민의 정부 하에서 정리해고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진행되었다. 1996년 연말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로 도입된 유연화된 노동제도 역시 일시적 유예를 끝으로 즉각 도입되었다. (원래대로라면 97년에 다시 재검토 되어야 했을 것이다.)

6.3. 사회적 영향

철덕들은 외환위기 사태에 대해 좀 다른 의미로 이를 갈고 있는데, 이 사태를 겪으면서 서울 3기 지하철 계획이 9호선을 제외하고 전부 폐지되었고 부산 4호선[37]과 5호선, 대구 3호선, 대전·광주·천 2호선 등 수많은 계획들이 지연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이다.[38]

프로스포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프로야구의 경우 모기업이 직접 부도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를 팔아 연명을 했고 이 때문에 하위권을 전전했다. 해태는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고 쌍방울은 아예 팀이 해체되어 SK그룹이 자유계약이 된 쌍방울의 선수단을 인계하여 SK 와이번스재창단했다.[39]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가 현대산업개발로 인수됐고, 프로농구광주 나산 플라망스도 역시 모기업이 망해서 이후 골드뱅크-코리아텐더로 2단 변신 후 KT에 인수되게 된다. 한편, 여자농구의 경우 남자농구가 프로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화에 의지가 없는 팀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프로화를 준비했으나 IMF 이전에 13개 팀이었던게 5개 팀으로 반토막 이상이 나는 후유증을 겪게 된다.[40] 실업리그였지만 거의 프로리그나 다름없었던 배구 역시 남자배구팀인 려증권 배구단이 모기업의 부도로 1998년을 끝으로 해체됐고, 여자배구는 더욱 더 심한 상황이었던지라 9개 팀이 5개 팀으로 쪼그라드는 암흑기를 맞았다.

보리스트의 중심인물이었던 정태수 회장이 뇌물을 돌릴 때 썼던 사과상자가 뇌물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문화계도 심한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1998년 메탈리카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대인배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분야는 투자자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98년에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의 경우,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의 계획이 엎어져버렸다.

취업에도 상당한 변화 정도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변경되었다. 기존에는 공무원은 대기업에 비해 급여가 적은 반면 업무강도가 쎄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으나 외환위기로 인하여 대기업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직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오히려 어지간해서는 해고하지 않는 공무원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일례로 그 이전에는 너무 지원자가 없어서 지원 = 합격이었던 순경도 현재는 단지 해고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원자가 몰려서 25:1을 웃도는 경쟁율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할 거 없으면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이 대기업보다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외환위기 동안 들려온 흉흉한 소식들로 인해 IMF괴담이라는 것도 생겨났다.

이 사태 이후로 과자 등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됐으며[41] 이는 훗날 과대포장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42] 실제로 식료품의 가격인상, 과대포장, 가격담합 등의 문제점들이 IMF 사태가 일어난 해부터 크게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요식업계에는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메뉴들이 생겨났고(대표적으로 롯데리아IMF버거),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IMF 드립도 성행했다. 반대로 고가의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등 고급 식당들은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실직자들은 자신이 애써 실직당했다는 것을 자신 혹은 주변에게 부정하고 싶어서 아침에 양복차림으로 출근하는 척 하고 산에서 지내다 다니던 직장 퇴근시간 될때쯤 귀가하는 이른바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43]

진짜 막장이었던 사건들은 바로 자해를 한 뒤, 폭력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신고해서 보험금을 받으려다가 들통나버리는 사건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 택시 기사는 택시강도를 당한 뒤 범인들이 자신의 발을 기차선로 위에 고정시켜 놓고 도망가는 바람에 발이 잘렸다고 해서 뉴스에 실렸으나... 결국은 얼마 못가 자기가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음을 자백하고 말았다.

또 어느 가정에서는 아빠와 어린 아들만 있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다가 그 집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진짜로 자르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알고 보니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친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뒤 강도사건처럼 신고했다는 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IMF에서 금융위기에 빠진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율 상한선 폐지를 권고하자 이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없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을 입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연 20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율이 나왔을 정도. #[44]

1998년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뱀발로 IMF 당시에는 농담조로 '나는 F학점이다'(I'm F(failed)), '나는 해고당했다'(I am Fired)라는 말이 유행했다. 심지어 'I'm Fucked'라는 버전도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치환하면 IMF의 별칭은 이런게 좋을 듯 싶다. 바로 International MotherFucker.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회자되었다. 정확히는 "total crisis"라는 영어의 번역. 이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어의 마술사 박희태 전 대변인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말을 그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그냥 이 무렵부터 유명해졌을 뿐이라고.

관련된 루머로 통일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댓가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과 단교하고 다시 자기네들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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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했지만 초등학교 교과서에 외환위기의 원인이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초등학생의 수준으로 이 사건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그런 표현을 썼다 감안하더라도, 이는 이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항목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국민 개개인의 과소비가 원인이 아니라, YS 정권의 '세계화' 정책의 대응 실패, 즉 시장개방에 따른 정부의 대응 미흡, 국가 경제체제의 구조적인 문제(펀더멘털)와 국제 투기자본의 자본 유동이 주 원인이라고 봐야 합당할 것이다. 그 덕분에 2010년도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수정이 되지 않았다.

오늘날 20대 초중반에 해당하는 1990년대 초중반 태생들이 학교폭력을 포함하여 각종 청소년 범죄를 이전에 비해 많이 일으켰던 이유도 IMF로 인한 부모의 부부싸움, 이혼으로 인한 암울한 유년기를 보내고, 가정교육의 부재로 인해 성격이 비뚤어져버린 영향이 크다.

7. 세계경제계의 변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탓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통화기금 창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통화기금 출범을 주창했을 정도. 그러나 IMF도 지역단위의 통화기금 체제가 들어서는 데에 딱히 찬성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어서 아시아만 통화기금기구 창설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010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이 공동으로 조성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라는 금융협정이 공식출범하게 되었다.[45] 총 기금 1200억 달러 중 중국, 일본이 각각 32%, 한국이 16% 그리고 동남아 10개 국가가 총 20%를 분담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라는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제공될 수는 없겠지만 대안이 존재하다보니 적어도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나 IMF가 작정하고 해당국가를 파산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MF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좁게는 대한민국이 맞이한 외환위기였지만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친 외환위기였을 만큼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당장에 이 항목의 이전 이름이 외환위기였다. 다만, 대한민국의 1997년에 한정됐기 때문에 현재 이름으로 수정했다. 어쨌든 이 외환위기로 IMF의 개혁요구를 충실히 따른 대한민국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국고를 풀어 내수진작에 힘을 쓴 말레이시아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간에 동아시아 각국은 외환보유고에 거의 노이로제 정도로 집착을 하게 되며, 2000년대 중후반 들어 전 세계의 달러화, 미국 국채 등을 거의 폭풍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당장에 달러 보유고 상위 10위권 국가의 다수가 동아시아 국가다.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2000년대 들어 소위 BRICs라 불리는 신흥국들이 IMF의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기존에 유럽의 독식으로 덕좀 보는 체제였는데 신흥국이 경제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던 IMF와 IBRD의 총재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특히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前 IMF 총재가 성추행혐의로 자리를 비우자 유럽과 제3세계는 서로 총재자리를 차지하려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2008년 이 사건보다 더욱 큰 부도 사태가 일어났었고, 그리스유럽연합 위기로 서구권의 세계 통화 패권에 대해 더욱 더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기존 기득권 층은 '지금 유럽에 IMF위기가 도래했으니 차기 총재도 유럽인이 해야 그리스 위기를 쉽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미 유럽이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신흥국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져 있다.

결국 2010년 경주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분의 6% 이상을 신흥국에 넘기고 유럽 이사 2명을 줄여 신흥국의 참여권을 확대하는 구조개편이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최국인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컸고, 대한민국 역시 IMF 쿼터에서 과소평과를 받았던지라 2010 G20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IMF 쿼터를 늘리게 됐다. 또한 2012년에는 그동안 IMF 사무총장이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었던 관례를 깨고 2012년에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IMF의 새 사무총장으로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이젠 미국과 유럽도 신흥국가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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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엄연히 말하면 20세기다...
  • [2] 참고
  • [3] 당시 가계저축률 감소 추세를 수치로 보면, 92년에는 17.5%였던 것이 97년 12.6%로 줄었다. 물론 가계저축률 12.6% 수준이 과소비라면 겨우 3% 대를 깔짝거리는 지금은 초 과소비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서민들은 '경기 침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했으나, 현재는 경기 침체는 물론이고 가계 소득이 악화되었으며 생필품 가격은 OECD에서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당시에는 엔간해선 저축을 어느정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축을 어느정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중산층 정도 된다는 소리다. 저축률이 3% 대로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외환위기 이전의 가계저축은 실제로 감소했다기보다 사회보장부담의 증가에 따라 가계저축이 정부저축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저축률은 1982년에 5.5%를 달성한 이후 1997년에야 겨우 10%였다. 그리고 가계저축률 하락에 발을 맞추듯 총저축률 역시 감소추세에 들어가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
  • [4] 다만 상당수 대기업들이 호황기를 틈타 투자를 과도하게 했다가, 외환위기가 닥쳐온 후(혹은 닥쳐오기 직전에) 망한사례는 꽤 많았다. 예: 기아그룹, 한보그룹, 대우그룹, 뉴코아 그룹, 해태그룹, 나산그룹, 쌍방울 그룹
  • [5] 하지만 당시 부동산 상황을 보면서 부동산 광풍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 1996년도를 제외하면 주택가격이 그리 오르지 못했다. 이는 1991년 들어 주택이 대거 공급되면서 80년대 후반의 부동산 상승세가 진정되어 주택가격이 안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단, 상승세가 진정된다고 높아진 가격수준이 낮아지고 물류비용이 감소하는건 아니다.) 부동산 광풍이 원인이라면 차라리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경제성황이 어려워졌어야 한다.
  • [6]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임금 인상투쟁이 상당히 벌어졌고 그 덕분에 고용도 안정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정부와 언론사들은 파업에 대해 우호적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내수는 급속히 신장되긴 했다.
  • [7] 1988년~1996년 신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이 대거 건설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 된 영향.
  • [8] 하지만 자금력도 안 되면서 아파트를 무리하게 찍어내고 방만한 경영을 하던 중견 건설업체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1995년 4월 유원건설, 1995년 10월 삼익건설, 1995년 12월 우성건설, 1996년 8월 건영건설이 도미노처럼 부도났다.
  • [9] 1994년 11월 8일 1138P로 고점을 찍은 뒤 오르락 내리락 했긴 했어도 98년 6월 277P로 저점을 찍을때까지 전체적으로 하락세하는 추세였다.
  • [10] 당대 정부와 언론에서 내세웠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더 이상의 과소비는 안된다!"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가계저축률은 20%대를 기록했을 정도로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선 당시 가계저축률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는 내용은 애써 무시한 채 외환위기의 원인은 과소비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거기에다가 GDP 대비 소비비중도 50% 중반 수준으로 2010년대에 비해서도 그리 높지도 않았다.
  • [11] 기업이 물건을 팔려면 일단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계나 공장이 필요하고 이것을 자본재라 일컫는다. 고정자본형성이란, 기계나 공장 등의 자본재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 [12] 단, 이 주장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뭐가 문제인지는 후술
  • [13] 이건 이자율에 대한 투자의 일반적 비탄력성만 말하는게 아니다. 국제비교상으로도 비탄력적이다.
  • [14] 우리나라 기업이 이자율에 얼마나 신경쓰는데 무슨 소리냐고 생각한다면, 지금 말하는건 투자결정이지 자금조달이 아님을 상기할것. 즉, 한국기업은 투자를 결정할 때 주로 이자율이 아닌 내수 시장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그 자금을 조달할 때만 저금리를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 [15] 지금은 많이 개선된 부분이다.
  • [16] 한국의 경제규모와 수출물량이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았던 60~80년대에는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한국의 경제규모모가 커지고, 비슷한 수출구조를 가진 라이벌 국가들이 많이 생긴 90년대까지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물이 가득 찬 종이컵에 물 한방울 떨어뜨린다고 넘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물 한수저 떨어뜨리면 넘친다.
  • [17] 대출 만기 연장
  • [18] 왜냐면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렸으니까.
  • [19] 국내 화폐가 폭락할 조짐이 보일 때. 기업들이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해 국내 화폐를 외국 화폐로 전환하여 보유하는 것
  • [20] 여기서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결정이 왜 엄청난 실책인지 알 수 있다.
  • [21] 전화위복
  • [22] 이 시기를 보낸 어른들이나 어린아이들이나 평생 절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거나 그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 당시 학창시절을 보낸 현재의 20대 중반~30대 중후반은 부잣집 아이가 갑자기 절대 입에도 대지 않던 반찬을 도시락으로 싸오거나 하얀 국화꽃이 책상위에 놓여있는 꼴도 봐야 했다.
  • [23] 아무리 고금리를 주더라도 곧 부도날 국가의 채권을 사 줄 은행은 없으며 고금리를 유지했다는건 부채도 막대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 [24] 돌려막기
  • [25] 채무불이행, 즉 부도
  • [26]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저 - pp.438-439를 참고
  • [27] 통계청은 아예 2100년 기준 인구가 현재 수준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예측까지 하기도 했다.
  • [28] 1996년까지만 해도 초혼연령은 남성 28세, 여성 25세 전후였다. 2014년 현재 남성 33세 여성 30세. 초산연령은 더 올라가서 1993년 26세였던 것이 2014년 32세로 수직상승했다.
  • [29] 실업이 줄어드는 것은 맞다. 당시 대학 졸업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은 결국에는 그 과투자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물가나 경상수지가 좋아진다는 것은 명백히 개소리고 실상은 정반대다.
  • [30]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성장이 덜할 뿐이다.
  • [31] 실제로 한국의 해외 도피 자산은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러시아 다음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경제 스케일이 큰 것도 고려해야 하니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막장인 러시아 다음이라고 보는 게 맞다.
  • [32] 그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김영삼을 특강자로 초청하였는데 이에 고대생들이 반발하는 뜻으로 김영삼이 탄 차가 학교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바람에 김영삼은 차안에서 수시간 밀봉된 상태로 있었으며 꼼짝없이 차안에 갇힌탓에 분유통에 소변을 봤다는 그야말로 굴욕을 당했다. 결국 김영삼은 강연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고대생 한 명이 김영삼에 손가락질을 하여 김영삼 개XX라고 욕까지 하는 바람에 민주산악회 회원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해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을 대신해서 김영삼에게 사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김영삼과 동행했다가 곤욕을 치른 인물중 하나로 당시 동아일보 회장이었던 故 김병관이 있다.
  • [33] 다만, 현대그룹의 분할은 IMF의 후폭풍이라기보다 정주영 회장 사후 2세들의 경영권 승계에서 발생한 다툼, 즉 왕자의 난이 원인인게 더 정확하다.
  • [34] 이 정도의 부채율은 상업은행의 부채율과 맞먹는다. 상업은행은 예금을 모조리 부채로 잡기 때문에 부채가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회사다. 그런데 일반 기업이 저러고 앉았다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 [35] 이 때문에 수출 경쟁력 재고를 위해 대기업 위주의 산업구조가 불가피하게 되었고, 분명 GDP는 높고 경제규모는 큰데 정작 서민들의 소득 비율 체감물가는 살인적이라는(자원빈국인 한국의 특성상 식량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원을 수입하므로)상황이 오게 되었다. 게다가 저출산과 인구고령화 현상이 지속되면서 내수시장은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즉 중국, 유럽, 일본, 미국 등의 주요 무역 파트너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는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당장은 중국이 고도의 급성장을 통해 캐리하면서 정작 진짜 세계경제 헬게이트였던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에선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았고(안 받았다는건 아니다.) 현재 문제가 안 생기고는 있지만 중국의 성장이 둔화되는 등의 문제가 생기면...
  • [36] DJP연합으로 인한 충청권 유권자들의 가세와 이인제 후보로 인한 득표 분산 등이 더 컸다는 분석도 많다. 자세한 건 15대 대선 항목 참조.
  • [37] 부산 앞바다에 인공섬 해상신도시를 매립해 연결하는 노선으로, 이후 2011년 3월 30일에 개통한 부산 도시철도 4호선(반송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서울의 3기 지하철 계획이나 부산 도시철도 5호선처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로 백지화되었던 다른 노선들은 대부분 경전철로 대체되어 재추진중이지만 이 경우 노선의 핵심인 부산 앞바다 인공 계획 자체가 무산되면서 부활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 [38] 많은 비용이 드는 당시 대부분의 지하 중전철 계획들은 현재 지상 경전철 계획으로 대체되어 각지에서 건설되거나 운행되고 있다.
  • [39]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SK그룹이 인수한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인천 야구의 정통성 논란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청태 항목 참고.
  • [40] 물론 구단을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데도 팀을 해체시켜버린 천하의 개쌍놈스런 기업도 있긴 했지만 여자농구팀을 운영했던 다수의 팀들이 금융권 팀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하다.
  • [41] IMF 사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이기 때문에 안그래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개고생인데 물가까지 덩달아 올라가버리니 대한민국 경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가 없다.
  • [42] 특히 빅파이가 이 시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과자 중 하나였다. IMF 이후로 같은 가격에 크기는 더욱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을 때는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가면서 식감이 푸석푸석해지고 맛도 오히려 퇴보해버렸다.
  • [43] 여기서 '등산'을 '오락실'로 바꾸면 한스밴드의 히트넘버 '오락실'의 가사내용이 된다.
  • [44] 이 시기를 전후해서 러시앤캐시산와머니 같은 일본계 사채업체가 한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그동안 일본에서는 사채업이 잘 안 돼서 사채업이 자유로운 한국에 온 거 같다.
  • [45] 처음 협정이 체결된것은 2000년 ASEAN+3 재무장관회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