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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가 된 것들/국방

last modified: 2015-04-13 00:37:09 Contributors

Contents

1. 각 국가별
1.1. 대한민국
1.1.1. 역사 시대
1.1.2. 정부수립 이후
1.2. 미국
1.3. 일본
1.4. 중국
1.5. 러시아
1.6. 독일

1. 각 국가별

1.1.1. 역사 시대

1.3. 일본

1.4. 중국

1.5. 러시아

  • 러일전쟁 : 일본을 치겠다고 북해에 주둔하던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 앞까지 빼오게 되었는데, 계일주나 마찬가지인 그 거리(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이미 개통이 되었다. 다만 러시아 함대 중 초기에 파견된 함선은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 깊이보다 더 커서 통과를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파견된 함선들은 통과할 수 있었지만))를 원정을 오면서 함대 사령관을 중심으로 "일본이 신묘한 신무기로 우리를 쥐도새도 모르게 요격하려 한다" 라는 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병사들 사이에서 저런 뜬소문이 퍼지는 걸 간부들이 진정을 시키면서 다독여주는 형태가 되어야 했겠지만, 이 때의 발틱 함대는 함대 총사령관이 저 소문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갈매기 소리에 비상출격명령을 내리고 지나가는 어선에게 사격을 지시하는 등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 앞바다에 도착해서는 병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고, 이는 일본의 승리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일본군의 해상 전략이 러시아군 해상 전략보다 뛰어났다는게 주된 이유겠지만.

  • 정치장교

1.6. 독일

  • 치메리트코팅 : 원래는 연합군이 노획한 자국의 흡착지뢰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종 기갑차량에 덧칠을 하였지만 정작 연합군은 흡착지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의 의미가 없었고 쓸데없이 차량의 중량만 증가시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전세계의 모델러들은 이걸 재현해내느라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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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수도 한성이 점령 당했었다.
  • [2] 다른 흑역사급 전투와 달리 영향과 피해가 엄청난 전투.
  • [3] 임진왜란 당시 민병을 포함한 50,000여 명의 군사가 왜군 1600명에게 전부 흩어졌다. 그래도 정규군이 나섰던 쌍령 전투에 비하면 나은 편. 애초에 민병이었으니 50,000명이 50,000명답게 싸울 수도 없었고, 이 전투로 인한 피해도 크지는 않았다. 여기서 도망쳤던 병사들 중 일부가 나중에 치 전투이치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 [4] 당시에는 은폐된 사건이지만 2005년에 같은 28사단에서 발생한 530GP 사건 때문에 덩달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서 마지막으로 군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기도 하며 이 이후로는 군법에 의한 사형집행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선고만 내릴뿐 실제로는 집행되지 않고 있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 [5] 후퇴작전 및 영내의 빨치산 소탕을 하기 시작하면서 적군이 주둔할 곳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여러 문화재를 우리 손으로 없애는 병맛 넘치는 짓들을 저질렀다. 월정사 등이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효과없는 작전으로 인해 사라졌으며, 해인사 역시 미군의 명령으로 사라질 뻔 했으나, 해인사의 중요성을 안 고 김영환 장군의 목숨을 건 항명 및 설득 덕분에 지켜낼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본토 공습이 한창이던 시절 미군 수뇌부가 교토를 문화재가 넘치는 천년고도라는 이유로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과는 은근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정작 김영환 장군은 미군의 그러한 문화재 보존 예를 지적하면서 해인사 유지의 당위성을 설명했다고 한다.
  • [6] 전쟁 때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되면서 평양을 정복하고 압록강까지 정복하였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 기습과 남하후퇴로 결국 완전정복은 이루지 못했다. 김일성도 잡아내지 못하였다
  • [7] 당시 이 수법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병역면탈이 이렇게 쉬울 줄이야'면서 사람들을 온통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작곡가 중에 한 사람이 이 방법으로 군면제를 받았었다.
  • [8] 2010년 중순쯤에 군 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하던 김 모 소장이 북한 간첩 흑금성에게 작계 5027를 유포. 이 사람은 27보병사단 33대 사단장이었고 현재 이등병 전역 후 감옥에 있다. 부대 흑역사
  • [9] 군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으로 피해자가 식물인간상태에서 사망했으면 영원히 묻혔을 사건이다.
  • [10] 1951년 1.4 후퇴당시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의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하였는데 사망자수만도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 참상은 국회에서 폭로되어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었다.
  • [11] 사고 사건이 타군에 비해 적었고 제일 신사다운 이미지를 가진 공군이었기에 더더욱 흑역사로 남았다. 원인, 과정, 수습, 결과, 전망 등 모든 부분에서 이전까지 타군에 존재했었던 추악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사건 이후에도 공군 가혹행위 사건이 줄줄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12] 군 의문사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군 수사가 얼마나 허술했고, 군 의문사가 왜 일어났는지 알게 된 사건
  • [13] 이 사건을 통해 국방부 측에서 유가족에게 군 사망자 조의금 지급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군 간부가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동안 관행적으로 군 사망자 조의금을 맘대로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14] 석사학위 소지자 중 시험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은 4개월 군사훈련+ 2개월 전방실습 등 총 6개월만 복무하면 예비역 소위로 제대할 수 있었던 우왕ㅋ굳ㅋ한 제도. 5공화국 정권이 이공계열 학생에 대한 군복무 혜택 목적으로 도입했는데 저 어마어마한 복무 기간 때문에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제도를 없애라며 데모도 한 적이 있는데, 정작 갔다온 선배들은 "이거 꿀인데 왜 저러지?"라는 반응이 많았다. 결국 전,노 전대통령 아들들이 모두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뒤인 1990년 폐지되었다.
  • [15]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져봐야 한겨레신문를 통해 알려진 사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85년에 절도범으로 오인되서 파출소로 연행되었고 그곳에서 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정신병 증세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86년에 입대하라는 통지서가 날라와 입대를 했는데 그대로 군복무를 하다가 88년에 동료를 사살한 사건을 벌였다.
  • [16] 속칭 "윤일병 사건". 병영부조리의 끝판왕. 전시에 이성이 끊어져 포로에게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행동들을 평시에 후임에게 해서 결국 죽은 사건. 잔혹하니 항목 참고시 주의.
  • [17] 속칭 "임병장 사건".
  • [18] 군기를 가장한 뻘짓. 항목참조
  • [19] 국방장관이 천안함이 침몰한 3월26일을 '국군 치욕의 날'로 기억할 것이라 말했다.
  • [20] 김훈 중위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비교적 타살이 확실히 증명되는 사건
  • [21] 한동안 야만적인 원주민에 둘러싸인 미군의 최후의 저항으로 미화되었으나, 현대에 이르러 이 전투는 커스터의 실책과 삽질로 평가받고 있다
  • [22] 미국이 독립한 이후 수도가 외국군대에게 점령당한건 이때가 유일
  • [23] 당시로서는 제어불가...결국 노스롭은 근성으로 B-2 를 만들어내게 된다.
  • [24] 럼스펠드가 예산크리로 인해 크루세이더 계획과 함께 계획이 취소, 덕분에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매우 격분했다.
  • [25] 형상때문에 간지를 중요시하는 밀덕들은 좋아했지만 현실은... 노스롭 중역들은 최종결정 직전 미리 탈락을 예측하고 몰래 주식을 처분했었다.
  • [26] 당시 만주는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장악하였는데, 노몬한 부근은 국경선이 확실하지 않아 가끔 분쟁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몽골군이 할하강(江)을 건너오자 일본군은 불법월경(不法越境)으로 간주해 충돌하였는데, 이때 몽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기계화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 [27] 2차대전 말기에 치치시마라는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가 지휘관인 다치바나 요시오를 중심으로 술안주가 없다면서 미군 포로들을 처형한 후 그 인육을 먹은 식인 사건으로 같은 일본군마저 이건 미친 놈들이라며 경악을 했고 A급 전범들에게 무죄를 주장한 인도 판사마저 "살면서 이런 또라이 색히들은 처음 본다"며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 [28] 다만 개발 당시 기준에서는 최소한 평균은 갔다. 또한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 중에서도 다소 과장되거나 와전된 것들도 많은편(예를들어 '장갑이 소총탄에 관통되기도 했다.'는 내용이 대표적)
  • [29] 1902년에 러일전쟁 대비를 위해 육군 보병 제 5연대에서 이 훈련을 하다 기록적인 한파와 눈보라를 만나 210명 중 199명이 동사했던 사건으로, 대한민국 국군에서 혹한기 훈련을 앞둔 군 장병들에게 실시하는 정신교육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 [30] 그덕에 도요토미가는 몰락함. 이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병크로도 기록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일관계 악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중심인 모리와 시마즈. 그들의 후손들은 조선을 침략해서 일제시대를 야기했다. 모리와 시마즈를 죽입시다. 도쿠가와는 착했습니다.
  • [31] 동진의 승리로 끝났으며 전진에는 각종 반란으로, 동진에는 승리로 인한 안이함으로 몰락. 결국 남북조시대를 여는데 한 몫함.
  • [32] 한 지방관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 보병 2000명으로 금의 사신을 공격했는데, 이에 호위무사 17명이 진법까지 구사해서 보병 2000명을 뚫어버렸고 사신은 가던 길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