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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

last modified: 2015-04-13 23:00:50 Contributors

布施辰治
1879~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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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1]
(生きべくんば民衆とともに、死すべくんば民衆のために)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2]

Contents

1. 개요
2. 이력
3. 평가

1. 개요

일본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며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농담으로 비꼬기 위해 독립유공자로 부르는 무다구치 렌야츠지 마사노부와는 달리 정말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 힘썼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한 독립유공자이다. 저따위 작자들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 분에 대한 모독이다. "일본오스카 쉰들러"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

2. 이력

일본 미야기현의 이시노마키시에서 출생했다.[3]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 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1911년에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제국주의적 침략임을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1919년에는 2.8 독립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 한편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이다. 두 사람은 덴노를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덴노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박열 대역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 해 주었다. 또한 후미코가 자살하자[4]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매장을 해 줄 정도로 노력하였다.

이후 1932년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도중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가 법정 모독이라는 근거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이후에도 두번이나 더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였으며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받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45년 패전 이후에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뒤엔 재일 한국인 사건 및 노동 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으며, 한국을 위한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3. 평가

평생을 한국의 독립 운동의 변호에 힘써 왔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2004년에는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인 애국장을 수여했다. 후세 다쓰지 본인이 자연사한 관계로 훈장 자체는 그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 씨가 대신 수상하였다. 이는 2015년 현재 시점에서도 유일한 일본 국적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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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묘비에 쓰여진 그의 신념. 그는 이 말대로 생애를 이었다. 평생을 제국주의에 반대했고 일제의 한국, 타이완 통치를 반대한 몇 안되는 반전주의자이자 반제국주의자, 평화주의자였다.
  • [2] 1950년에 일어났던 한국전쟁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뻔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통찰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 [3] 가수 엔도 마사아키의 고향이다.
  • [4]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그녀는 감형을 거부하고 이듬해 스스로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