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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쓰야

last modified: 2015-01-24 12:16:57 Contributors


이름 후루타 아쓰야(古田敦也)
생년월일 1965년 8월 6일
국적 일본
출신지 효고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0~2007)

199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잭 하웰
(야쿠르트 스왈로즈)
후루타 아쓰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구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마쓰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루타 아쓰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사사키 가즈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Contents

1. 개요
2. 데뷔하기까지
3. 전성기 시절
4. 일본프로야구 파업 시절
5. 감독 겸 선수 시절
6. 기타


1. 개요

일본 야구 만화에서 가장 많이 오마쥬되는 선수 중 하나.[1]

일본프로야구 선수였던 인물로 현역 시절에는 일본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대표적인 레전드이며, 팬들은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담아 그를 미스터 스왈로즈라고[2] 부른다. 현역에서 은퇴 뒤로는 해설가, 평론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 데뷔하기까지

대학 시절 나름대로 주목 받던 포수였던 그는 리츠메이칸 대학을 졸업할 당시 2순위 이상 지명이면 프로, 3순위 이하로 지명 받으면 실업팀 도요타 자동차로 보낸다고 대학팀 감독이 공언. 닛폰햄 파이터즈로부터 2순위 지명한다는 약속을 받고 기자회견 준비까지 했지만, 정작 드래프트 현장에 있던 당시 닛폰햄 감독이 안경 낀 포수는 안 된다면서 엉뚱한 선수를 2순위로 지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지자 닛폰햄 구단 측에선 부랴부랴 그에게 3순위에선 반드시 뽑겠으며, 대우는 2순위 수준으로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동료 선수들의 패키지 취업에 대학팀과 사회인야구[3] 간의 관계 등을 감안하여 결국 사회인야구팀으로의 진출을 결정하게 된다.

이후 사회인야구팀 도요타 자동차 야구단에서 뛰던 후루타는 88년 서울올림픽 때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노모 히데오와 함께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가치를 재평가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덕분에 1989년 드래프트에선 2순위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지명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앞선 드래프트에서 약속까지 받고도 물을 먹었던 경험 때문인지 지명 받은 이후는 이게 정말 생시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 다만, 이런 드라마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드래프트에 노모 히데오가 등장하여 무려 8개 구단이 1순위에서 경쟁을 벌였던 탓에 상대적으로 주목은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4] [5] [6]

우여곡절 끝에 야쿠르트에 입단한 후루타였지만, 이후의 길이 그리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안경 낀 선수는 포수에 적합하지 않으며, 성적도 시원찮다는 인식이 강했던 데다, 무엇보다 당시 야쿠르트의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부터가 후루타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노무라 감독은 후루타를 보고, "어깨는 1류지만, 타격은 2류, 리드는 3류"라 평하며, "안경 낀 포수는 곤란하다. 차라리 그냥 2군에 있는 다른 애들을 키우는 게 낫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기존 주전 포수의 입지까지 탄탄했다면, 후루타는 2군이나 전전하다가 백업 포수로 선수 생명을 마쳤을지도 모르나, 다행히(?) 당시 주전 포수였던 하타 신지의 어깨가 형편없을 정도로 약했던 탓에 노무라 감독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후루타를 적극적으로 조련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즌 도중 하타 신지를 밀어내며 야쿠르트의 안방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다만, 2류급 타격이라는 감독의 지적처럼 데뷔 초반에는 타격이 썩 뛰어나진 않았으나,[7]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을 차지할 수 있던 건 뛰어난 도루 저지율과 근성 넘치는 뛰어난 수비 실력 덕분이었다.[8]

3. 전성기 시절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후루타는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 1992년 마침내 리그 우승을 일궈냈고, 이어서 1993,1995,1997,2001년에는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며, 팀의 최고 간판 선수이자, 90년대 야쿠르트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9][10]

또한, 데뷔 이듬해부터는 약점으로 지적됐던 타격 부분까지 완벽하게 각성하여 1991년에는 센트럴리그 타격왕을 차지하고, 1992년엔 3할 타율, 30홈런과 함께 일본 최초로 올스타전에서의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으며, 2003년에는 1경기 4홈런, 2004년에는 한국 기준, 마흔의 나이로 23홈런을 치는 등 은퇴할 때까지 2097안타, 1009타점, 217홈런, 통산 타율 .294을[11] 기록하는 선수가 된다. 이 정도면 올스타전 17시즌 연속 출장이란 대기록이 단순한 덤으로 여겨질 지경.

그런데 진짜 문제는 포수로서의 수비 스킬과 리드 쪽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런 타격 실력을 쌍그리 잊게 할 정도였다는 것인데, 오죽하면 당시 일본프로야구 팬 대부분이 후루타를 수비만 전문적으로 맡는 포수 정도로 인식했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리드는 그 깐깐하기로 소문난 ID 야구의 노무라 감독이 아예 전부 믿고 맡길 만큼 뛰어났고, 수비율이 높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포수 스킬의 주요 척도 중 하나로 다뤄지는 도루 저지율에선 시즌 도루 저지율 1위를 9번이나 차지했을 정도로 막강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1993년도와 2000년에 기록한 도루 저지율은 자그만치 평균 6할대다.(1993년에는 .644이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했으며, 이는 2011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2]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의 모든 일본프로야구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후루타 아쓰야를 90년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뽑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를 일본 포수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여긴다.

4. 일본프로야구 파업 시절

2004년, 긴테츠와 오릭스의 합병 소식이 언론을 통해 밝혀졌을 때 일본프로야구계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전체적으로 재정 상황이 나빴던 퍼시픽 리그에서 두 팀이 합쳐진다는 건, 퍼시픽 리그가 아예 사라지고 센트럴 리그와 합병되어 통합리그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후루타는 각 팀의 주축이 되는 선수들을 설득하여 퍼시픽 리그 팀 병합을 반대하기로 결의, 결국 그의 주도하에 일본프로야구 사상 첫 파업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구단들은 수십억 엔의 피해를 입고, 주변 상가 역시 매상에 크나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후루타 쪽이었다. 그는 뛰어난 달변가였고, 때때로 눈물을 보일 줄도 알았다. 당시 TV아사히의 뉴스프로그램에서 파업에 대한 심경을 인터뷰하자, 후루타는 생방송 도중에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보내졌고, 이후 팬들은 경기장에 '지지마라 선수회', '후루타 선수회장 파이팅'등 다양한 현수막과 구호로 선수회에 지지를 보냈다.

협상 중에는 구단주 측의 인사가 악수를 청하자 "지금은 마음 편하게 악수를 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악수를 회피하는 장면이 중계되어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기도 했으며, 지속적으로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과 양대리그 유지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구단주들에게 새로운 구단을 공모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구단주들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후루타에게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긴데츠와 오릭스는 합병됐지만, 새로운 구단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이 탄생하면서 상당수의 선수가 이쪽으로 이적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양대 리그 체제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5. 감독 겸 선수 시절

2006년,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사임하면서 차기 감독을 전격 발탁되는데, 이때 구단과 선수로서 1년, 감독으로서 2년 계약을 맺게 된다.[13] 즉, 선수로 뛰는 동시에 감독의 역할까지 동시 맡게 된 것으로 이는 일본프로야구에서는 노무라 카츠야 이후 29년만의 일이었다고 한다.

감독 부임 첫해, 팀은 시즌 성적 3위를 기록하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만, 선수로서는 최악의 부진을 기록했으며, 2007년에는 팀이 21년만에 리그 꼴지를 하면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으로서,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

참고로 그의 은퇴 이후 그의 등번호였던 27번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예번호[14]로 지정된다.

6. 기타

2011년 현재, 후지 TV의 캐스터 겸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간간히 예능에서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하다. 후지 TV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갈릴레오 시즌 2 4화(2013년 5월 6일 방영분)에 게스트 출연. 어떤 베테랑 투수의 연습 파트너로 등장해서 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에는 자신이 대타로 나갈 때 직접 심판에게 다가가서 대타, 나(代打、おれ) 라고 외쳤다고 한다.(...)

상당히 온화한 성격인 데다 비교적 체구도 작은 편이라 상대팀 투수들이 만만하게 보고 위협구를 자주 던졌다고 한다. 즉, 싸움이 나도 후루타 정도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다. 심지어 한 타석에 4번 연속으로 공이 머리로 날아든 적이 있었을 정도다.

은퇴시즌에선 각 구장에서 후루타 은퇴 세레모니가 펼쳐졌고, 후루타가 타석에 등장하면 야쿠르트팬 뿐만 아니라 상대팀 팬들도 자발적으로 후루타 응원곡을 불렀다. 이쯤되면 후루타가 일본 야구팬들에게 어느정도의 존재인지 실감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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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2의 안경 낀 포수 노다의 모델이다.안경 낀 포수는 조심해야 한다고
  • [2] 프로 데뷔 이래로 쭉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도 장장 18년 동안 오직 스왈로즈에서만 뛰다가 은퇴했다.
  • [3] 일본에서의 사회인야구는 한국의 사회인야구와는 전혀 다르다.
  • [4] 이 89년 드레프트의 8개 구단 동시 지명은 아직까지도 진기록으로 남아 있다. 참고로 89년 드레프트에는 노모 히데오 외에도 유명한 선수들이 꽤 많았다. 외계인 신죠 츠요시가 한신 타이거즈에 드래프트 지명 5순위로 데뷔하였고,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드래프트 지명 1순위로 데뷔하였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4지명 마에다 토모노리는 2013년까지 무려 24년동안 현역생활을 하였다. 그 외 각 팀의 에이스나 주축 선수로 성장할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5] 당시 최악의 암흑기를 겪던 후루타의 고향 팀 한신 타이거즈도 원래는 후루타를 지명하려고 했지만, 위의 니혼햄의 경우와 같이 안경 낀 포수라는 점 등등의 이유로 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신은 1997년 주니치에서 노 아키히로를 받아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주전 포수를 마련하지 못하고, 흑역사는 2000년대 초까지 연장된다;
  • [6] 여담이지만 노무라-호시노 체제를 거치며 야노가 10여년간 안방마님으로 자리잡고, 한신은 나름 2000년대의 강팀으로 도약한다. 하지만, 야노의 노쇠화 이후 새로운 주전 포수를 키워내는데는 애를 먹으면서 조지마 겐지(前 시애틀), 후지이 아키히토(前 라쿠텐), 히다카 타케시(前 오릭스) 등의 외부 영입으로 포수를 충당하고 있다.그 사이 가능성있는 유망주들은 어째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갔다 카노 케이스케 항목 참조.
  • [7] 1990년 데뷔할 때의 성적은 홈런 3개, 타율 0.250, OPS 686였다. 포수란 걸 감안했을 때는 그냥저냥 쓸만한 수준.
  • [8] 이런 뛰어난 수비 실력을 인정 받아, 후루타는 데뷔한 해에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참고로 한국과 달리 일본의 골든 글러브는 순수하게 수비만 보고 주는 상이다.
  • [9] 특히 1997년에는 포수 최초 일본시리즈 MVP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쇼리키 마츠타로상을 동시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 [10] 90년대 후루타의 성적은 야쿠르트의 성적과 직결되었다. 후루타가 별 탈 없이 정상적으로 출장한 시즌의 야쿠르트는 리그를 지배하는 강팀의 포스를 보였다. 하지만 후루타가 부상당하거나 해서 제대로 출장하지 못한 시즌에, 야쿠르트는 얄짤없이 4위로 떨어졌다...; http://www.baywell.ne.jp/users/drlatham/baseball/yakult/players/catcher/furuta.htm
  • [11] 시즌 타율 3할을 넘긴 해가 8회나 된다.
  • [12] 포수의 도루 저지율은 4할만 넘겨도 뛰어난 건데, 6할을 넘겼다는 건 말 그대로 감히 범접할 만한 사람이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도루 저지 실력으로 명성이 자자한 포수였던 만큼, 주루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주자라도 어지간히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아예 도루를 시도하지 않았을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루 저지율이 6할이라니, 이건 그저 괴수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 [13] 당연한 말이지만, 각각의 연봉도 따로 받았다. 특히 감독을 맡은 이후 개인 성적이 급락한 바람에 2년차 때는 팀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쪽 연봉이 무지막지하게 깎여 나갔다.
  • [14] 명예번호는 지정된 이후에는 다른 선수가 쓸 수 없는 영구결번과는 달리 충분한 자격을 가진 포수라면 이 번호를 물려받는 것이 가능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한테나 줄 수 있는 번호는 아니다. 참고로 야쿠르트의 명예번호는 27번 외에도 카마츠 츠토무-케야마 타카히로-와무라 아키노리-아오키 노리치카로 이어지는 1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