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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last modified: 2015-04-07 01:31:42 Contributors

Contents

1. 한국/북한의 정치인
2. 만화 럭키짱의 등장인물
2.1. 소개
2.2. 행적

1. 한국/북한의 정치인

북한의 인물
최고지도자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정치인 / 군인 강건 · 강명도 · 고영희 · 김경희 · 김두봉 · 김설송 · 김여정 · 김영주 · 김영남 · 김옥 · 김원홍 · 김일 · 김일철 · 김정각 · 김정남 · 김정숙 · 김정철 · 김주애 · 김책 · 김평일 · 김한솔 · 김현 · 남일 · 리설주 · 리영호 · 리학구 · 무정 · 성혜랑 · 성혜림 · 오극렬 · 오진우 · 우동측 · 장성택 · 최광 · 최용건 · 최룡해 · 현영철 · 황병서
문화예술체육인 / 희극인 / 과학자 계순희 · 류정옥 · 리명훈 · 리승기 · 리춘히
음악인 김병화 · 김주혁 · 신광호 · 이면상 · 장룡식 · 최기혁 · 채주혁 · 현송월 · 허문영
탈북 인물 강명도 · 강철환 · 김만철 · 김용 · 신동혁 · 이웅평 · 주성하 · 황장엽
월북 인물 김원봉 · 박문규 · 이강국 · 무뇌봉 문예봉 · 박헌영 · 고자 심영 · 신불출 · 오장환 · 이극로 · 이태준 · 임화 · 최덕신 · 최승희 · 최홍희 · 허헌 · 황철 · 홍명희 · 월북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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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대한민국으로 치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지위)으로 재직한 바가 있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 최고 의결기구의 의장이 국가원수로 대우받는 것과 달리[1]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것은 북한이 국가주석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다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지위는 시기에 따라 좀 달랐다. 국가주석제는 1972년 헌법 개정에서 국가주석제가 생겼으며 그 전까지 다른 공산권 국가들처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로 활동했다. 황장엽의 경우, 국가주석제가 도입된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되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도 국가원수는 아니었다. 여하간 이런 특성 때문에 황장엽이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임명되었을 때, 외국 언론이나 정보기관의 동아시아라인이 발칵 뒤집힌 바 있다.

"황장엽이란 사람이 북한의 새 의장이랍니다!"
"그런가? 그런데 황장엽이 누구야"
"모릅니다. 아까 기자클럽 다 뒤져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북한에서 사는 동안 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행적은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황장엽의 김일성의 조카 사위로 따지자면 종친에 해당하긴 한다.

1996년 5월 10일 노동 신문은 당 내에 수령을 받드는 척하며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가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이는 숙청을 암시하는 기사였다. 다시 7월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사상비판을 가했다. 이미 황장엽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 기반 장악을 위한 타겟이 된 상태였다.

황장엽은 1997년 1월 30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나리타 공항을 통해 방일하여 조총련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회주의의 실패 운운하는 발언을 했고 일본의 야마자키 자민당 정책 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식량 원조, 북일 수교 문제를 논하려 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은 황장엽과의 면담을 거부했고 황장엽은 13일간의 일본 체류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수행원 김덕홍과 함께 2월 12일 바로 중국의 북한 대사관으로 갔고 다시 한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전격적으로 망명의 뜻을 전달했고 미국,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이 모두 개입된 치열한 외교전 끝에 67일만인 4월 20일에 한국에 들어왔다. 황장엽 정도의 고위급 인사가 (그것도 70대의 늘그막에) 망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북한 내부에서도 그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인지,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황장엽과 아무 상관도 없는 멀고 먼 친척들까지 모조리 다 수용소에 가두어졌다고 한다. 이후 황장엽은 북한이 봉건주의 국가라고 맹비난하면서 반(反)김정일 운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이 선물 사러 외출한 황장엽을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3] 2월 18일에 그 주장을 접었다. 이후 북한은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압박을 가했고 황장엽 망명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황장엽의 망명 요청 불과 4일 후인 2월 16일에 망명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에게 총격을 가해 끝내 숨지게 만들었다.[4] 황장엽이 망명한 순간은 등소평의 사망, 한보사태, 이한영 피살이 겹친 대혼란의 와중이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쳤고 "처음으로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란 소감을 발표했다. 그의 수행원 김덕홍은 "설레이는 마음 진정할 수 없고 남녘형제들과 만나게 된 이 기쁨과 감격은 그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동창인 유창순 전 국무총리와 그의 제자이자 먼저 귀순한 현성일, 최세웅, 신형희등과 오랜만에 회후했다.

그의 망명에는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가 성립되면서 서서히 권력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에 대해 비판이 약하다는 의견이 존재하나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라는 책에서 김일성을 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며 비판했다. 다만 그의 생 전반부나 후반부의 사건들에 대해서 김정일에 비해 우호적인 표현으로 정당화 하고 있는건 사실이다. 김일성의 무수한 과오 중에서도 김정일에게 아부하고 정권을 넘겨준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통하여 솔직히 더 망칠 것도 없는 생의 전반부까지 망쳐버렸다고 평했다는 것은, 황장엽이 언제나 주장하듯 현재 북한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적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에 대해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지, 문제의 본질적 원인 제공자로써의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권력 세습 자체가 비웃음거리이긴 하지만

그가 '남한에서 암약하는 고정 간첩이 5만명'이라고 고백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1997년 매일경제 기사 1998년 동아일보 기사

링크에서 볼 수 있듯이 법무부 장관과 황장엽 본인이 인증한 주작이다. 물론 '간첩 5만명설'을 긍정하는 보도도 많지만, '황 씨는 남한에서 암약하는 고정 간첩이 5만명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식의 인용구로, 망명 직후의 1차 사료를 넘어서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소문이 너무 유명해지니까 기자들이 사실로 믿어버린 듯.[5]

그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은 이렇다. 김일성 앞잡이로 수십여 년을 호강하며 살다가 김정일 밑에서는 권력이 줄어들자 남한으로 망명하더니만 자신이 반공투사라고 호들갑을 떤다는 의견이다. 또한 반공 검사와 국회프락치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제도와 의형제를 맺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단지 반 김정일주의자일 뿐, 그 자신이 창시해 수령절대주의의 이념적 바탕이 된 주체사상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용당했다고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주장했을 뿐이다.

실제로 직접 주체사상을 가르치려고 했고, 이 때문에 그와 같이 탈북한 덕홍도 이에 대해 비판하고 그와의 인연을 끊었다. 비록 망명한 이후, 대한민국에 정착하면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고 자신이 북한에서 호의호식했던 것에 대해 자아비판했으나 정작 그 '반공투사'로서 세월은 고작(?) 13년이었기에 그 4배가 넘는 과거사로 욕먹을 만하다.

그래도 북한 권력 정상급에 있었기에 고위층에 대한 정보력이 높아 쓸만하다는 평도 있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북에서도 불과 13년 때문에 4배가 넘는 동안 자기들에게 봉사한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독재국가에서 아무리 공신이라고 해도 이용가치가 없어지거나 충돌이 벌어지면 가차없이 제거, 숙청하는 건 흔하다. 그 본보기로 북한과 마찬가지로 2대째 권력을 누리는 시리아의 아사드 일가를 봐도 다를 게 없다. 현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휘하에 있던 노대신(?)들을 대거 숙청해 이들은 이란이나 여러 곳을 거쳐 미국 및 서구로 망명해서 이들은 지금은 신나게 시리아, 현 아사드 정권을 까고 있다. 물론 정권 싸움(숙부인 레하트 아사드를 숙청했다) 탓도 컸지만 세습 독재자라고 아버지 때의 가신들에게 잘 봐줄 것이라 믿었으나 돌아온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서도 북한의 현실에 대하여 알리는 활동을 벌였으나 미국에서도 '지난 40여년을 그럼 당신은 과연 뭐했는가?' 이런 질문에는 자신도 할 말이 없는데에 난감해했고 나중에나마 그동안 호강을 누렸던 건 사실이라며 인정했다. 다만 북한 실체를 알게된 게 너무 늦었다느니 이런 말을 하면서 미국에서도 '그러니까 권력에서 멀어지자 왔다는 거군?' 이런 투로 알려졌고 고위층에 대한 정보는 쓸만하지만 이 작자를 (만약의 경우의) 김씨 왕조 붕괴 이후 수복 지역의 관리자로 쓰기엔 무리라는 평을 받았다.

철학가의 면모로서 김용옥이 한때 그와 주체사상을 논의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그 다음 소식은 없었다. 진중권은 그 소식을 듣고 할짓이 따로 있지 주체사상 따위를 논하겠다고 헛짓하냐며 김용옥의 권위주의적인 모습까지 엮어서 김용옥을 신랄하게 깠다. 진중권은 주체사상과 NL을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다.

일부 탈북자들에게도 미움을 받기도 했었다. 실제 어느 탈북자남한와서 황장엽의 글을 보고 "무슨 지가 반공투사랍시고 설레발 치는 거 보면 구역질이 난다. 북한에서 얼마나 호강하던 작자인데 마치 자기가 북한에서 나중이나마 고생했다고 써대는 거 보니 어이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래도 북한 실체에 대해서 정치적 숨겨진 이야기라든지 여러 가지로 알렸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봐야할 점이다.

2010년 10월 1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사망 당시 따뜻한 안에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정황상 자연사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 전에 암살 미수 사건[6]도 있었기에 혹시나 하여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했다. 같은 날 북한에서는 노동당 65주년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3대 세습이 확정되고 가도에 오르게 된다. 참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7]

사후 한국에서 국가원수를 제외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네티즌정치인들 사이에 과연 그를 이렇게까지 대우할 이유가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사망 이후 북한 홍보용 모 웹사이트에서는 '황가 놈'이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다가 글을 지우고 다시 '노동당 행사날 죽었는데 우리 행사의 우렁찬 소리를 듣고 죽은 거 같다.'는 연이은 비난을 퍼부었다.

망명할 때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두고 왔다. 부인 박승옥씨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부인은 북한 유수의 출판사이자 외국 책을 북한에 번역하는 외국문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아들은 외교관, 큰딸은 외국문학을 전공한 학자, 둘째딸은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다. 직계 가족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숙청되었다', '자살했다', '그래도 살아있다' 등등의 다양한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부인은 그의 망명 직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식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탈북자인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맏사위는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이혼하지 않고 같이 수용소에 들어갔고, 둘째 사위는 이혼당했으며 며느리 또한 이혼당해 아이(황장엽의 손자들)들을 빼앗기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척들 또한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의 수만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경부대에 있다가 DMZ를 넘어 탈북한 주성일씨의 회고에 따르면 황장엽의 먼 친척 되는 어떤 군인은 "당에 충성하던 내가 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황장엽 비서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하느냐"고 저항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최근 먼 친척 3명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탈북한 이후 교수 출신인 김숙향이란 여성을 양녀로 삼았으며, 비서로 있던 여성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다.
수양딸은 사실혼 관계 있는 여자에게 아버지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탈북자들에게 100억원 이상 돈을 사기친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 구속되었다.
황장엽의 수양딸은 2015년 3월 27일 징역5년이 확정됐다.

2. 만화 럭키짱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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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2.1. 소개

강건마에게 최초로 패배를 안겨준 사나이. 그러나 동시에 이 만화 최고의 샌드백.

일명 유도인 황장엽. 천산고의 2인자들 중 한 명으로 구룡 다음인 두번째로 등장했다. 3학년이며 신장이 205cm에 몸무게는 135kg이나 되는 엄청난 거구. 유도를 배웠기 때문에 잡기와 던지기를 주로 사용한다.유도 선수라도 해서 대회에 나가면 될텐데. 그건 대학 입학하고 나서의 얘기지. 부모님이 안계시는 소년가장으로 한때는 지대호 밑에서 일했었으나 지금은 손 떼고 어린 동생들을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럭키짱 등장인물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선한 성격의 소유자.

황장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한적이 없다고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설정일 뿐이고 본편에서는 지대호/나도하/풍호/중호/차단 등등에게 수 없이 발리고 발리는 전투력 측정기 신세다.

2.2. 행적

강건마나도하에 이어 구룡까지 꺾자 그를 경계한 지대호에게 돈을 받는 대신 건마를 쳐달라는 협상제의를 받는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거절했으나 결국 가정형편 때문에 승락한다. 이후 건마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열흘 후에 싸우기로 한다.

마침내 강건마와의 결전에서 유도의 던지기 기술로 강건마를 발라버린다. 이후 부산에서 돌아온 강건마가 쾌산고 학생들을 탄압하는 천산고 학생들을 쓰러뜨리고 다니자 지대호가 모사꾼 조구신의 아이디어로 황장엽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황장엽의 동생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는다. 인질이 잡힌 황장엽은 어쩔 수 없이 강건마와 싸우게 되지만 차마 강건마를 벽돌벽에 던지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진 강건마도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게 된다.

결국 더이상 비겁해지기 싫었던 황장엽은 지대호에게 받았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돌려주고 그 자리에서 지대호에게 도전하나 압도적인 실력차로 관광당한다. 구석에 몰려 얻어맞다가 지대호가 강건마에게 한눈을 판 틈을 타 조르기를 시도하지만 지대호가 발차기로 인중을 가격해 조르기가 실패하고 결국 지대호에게 전치 100주는 끊게 될 정도로 얻어맞고 지고 만다. 이후 강건마와는 친한 사이가 된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전치 100주라고 해놓고는 작가의 농간으로 몇화 지나지 않아 바로 조기퇴실된게 몸에 안 좋았던건지 이후 행적은 매우 안습해서, 기존 캐릭터가 파워업되거나, 신캐가 나올 때마다 그들의 강함을 보여주는 샌드백역으로 얻어터지게 된다. 심지어 풍호 등장 당시에는 공중전화부스를 점거한 풍호에게 비켜달라고 하다가 얻어터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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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행정수반으로서의 역할은 그 나라의 공산당 서기장이 담당한다.
  • [2] 이와 비슷한 체제가 현재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화인민공화국/정치항목 참고
  • [3] 황장엽은 북한 대사관에 선물을 사러 가겠다고 하곤 한국 총영사관으로 달려갔다.
  • [4] 근데 주성하 기자는 이한영의 사망 배후가 김정일이 아니라 러시아 마피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 [5] 군에서 장병들의 정신교육책자에 까지 인용 될 정도로 널리 퍼진 주작이다. 애초에 간첩 5만명을 심어놨다면 지금쯤 적화통일되야 정상이다. 막말로 대한민국 국민 천명중의 한명은 간첩이란 소리가 아닌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된다.
  • [6] 이전에도 협박을 여러 번 받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 암살조가 붙잡힌 사건이라든지, 모 종북 단체에서 황장엽 사진에 빨간칠을 하고 도끼를 박아서 황장엽에게 보낸 사건.
  • [7] 여담으로 중국, 특히 중화민국의 국경일 쌍십절이며 1945년 북조선 분국 및 노동당 창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