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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족

last modified: 2019-01-15 20:35:23 Contributors

華族 (かぞく)

근현대 일본에 존재했던 귀족의 명칭.

Contents

1. 설명
2. 작위 수여 기준
3. 특권
4. 패전 이후
5. 화족이거나 관련있는 인물

1. 설명

메이지 유신 이후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개편하면서 1884년에 생긴 새로운 계급이다.

기존의 사농공상 제도를 없애면서 모두를 같은 계급으로 내리고, 그 상태에서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과 고위 계층(다이묘들과 공경들), 그리고 부르주아를 묶어 새로운 귀족인 화족으로 분류했다. 화족에는 고대 중국 서주의 봉건제에서도 쓰였던 오등작의 다섯 계급인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있었다. 이는 서양의 귀족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화족을 5등작으로 나누려 한 것은 아니었다. 제출된 초안들을 보면

  • 화족을 『공(公)』『경(卿)』『대부(太夫)』『사(士)』의 4계급으로 나누고, 공과 경을 2계급, 대부와 사를 3계급으로 나누어 9계급으로 하는 안 (1869년)
  • 화족을 『상공(上公)』『공(公)』『아공(亜公)』『상경(上卿)』『경(卿)』의 5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1년 9월)
  • 화족을 『공(公)』『경(卿)』『사(士)』의 3계급으로 나누는 안 (같은 해 10월)
  • 화족을 『공(公)』『백(伯)』『사(士)』의 3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6년)

으로 계속 변했다. 공후백자남 5등작 안이 제출된 건 1878년의 일로, 『예기(禮記)』에 등장하는 『王者之制禄爵 公侯伯子男 凡五等』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화족 대우를 받는 사람은 화족과 같은 호적에 있는 사람들뿐으로, 화족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평민과의 결혼 등으로 분가한다거나 하면 평민 취급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황실 역시 이 체계에 편입되어서 이왕가(李王家)로 불렸다. 정확하게는 왕공족(王公族)이라 하여 화족과는 별개의 규범으로 신분이 규정되었는데, 왕공족의 위치는 명목상으로는 "황족 이하, 화족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2. 작위 수여 기준

  • 공작 : 교토 조정의 오섭가(五摂家: 고셋케)[1], 도쿠가와 가문 종가, 몇몇 다이묘가(武家: 시마즈(島津) 종가, 모리(毛利) 종가 등), 기타 국가에 큰 공(偉功) 있는 자(예: 이토 히로부미[2] 등). 여담으로 영어로는 Duke가 아니라 Prince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황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3]
  • 후작 : 교토 조정의 청화가(清華家: 세이가케), 도쿠가와 가문의 고산케(御三家)[4] 및 10만석 이상의 다이묘, 류큐(琉球) 왕가,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
  • 백작 : 교토 조정의 대신가(大臣家)와 일부 당상가(堂上家), 5만석 이상의 다이묘, 쓰시마 섬 도주(島主)인 소(宗)씨[5], 서본원사(니시혼간지), 동본원사(히가시혼간지)의 세습 주지,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
  • 자작 : 기타 당상가, 기타 다이묘[6], 분가한 공/후작가의 차남,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
  • 남작 : 메이지 유신 이후에 화족이 된 자, 류큐 방계 왕족, 주요 신사(神社)에서 세습해 신직(神職)을 맡은 14가문, 정토진종(浄土真宗)계 세습 주지 4가문, 남조 조정의 충신의 후손,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

이토처럼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작위가 점점 상승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한편 여자는 화족 가문의 당주가 될 수 없어서, 남자 계승자가 끊기면 작위는 반납되었다(다만 서양자(壻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나 외손에 의한 계승은 가능했다). 1928년 당시 공작 18, 후작 40, 백작 108, 자작 379, 남작 409가문(조선귀족 제외)으로 총 954가문이 화족이었고, 이 숫자는 1944년에 1,016가문으로 증가한다.

3. 특권

  • 귀족원(貴族院) 의원이 될 자격. 30세 이상의 공후작 의원은 종신, 백자남작 의원은 7년 임기로 선출되어 귀족원에 소속되었다.
  • 황족과의 결혼 자격이 주어짐.[7]
  • 제국대학에 결원이 있으면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음. (1922년까지)
  • 가쿠슈인에서 낙제를 해도 화족 집안 자녀라면 고등과까지의 진학 보증.
  • 유작자는 궁내대신의 인허를 받아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집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인 '가범(家範)'을 정할 수 있었다. 가범으로는 배우자 및 입양 자격[8], 재산 처분의 절차[9]를 정할 수 있었고, 가범을 위반한 경우 궁내대신은 화족령의 규정에 따라서 징계 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화족목록은 http://cafe.naver.com/booheong/102601

4. 패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들어선 미군정에 의하여 1947년에 새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화족 제도는 사라졌다. 참고로 원래 덴노가의 방계 중에 전통적으로 왕(王) 작위를 칭하던 가문들이 있었는데 이때 모두 취소당했다. 이런 가문을 미야케(宮家)라고 한다. 본래 친왕(親王) 작위를 칭하던 4개의 가문, 즉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10]가 있어서, 덴노 직계가 끊어지면 이 가문 출신들이 대를 이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궁가가 대거 생겨났다가 1947년에 11개 궁가에 소속된 51명이 대거 평민으로 되었다. 이게 바로 신적강하라 불리는 사건이다.

그래도 상당한 재산을 모은 화족 가문들도 많아서 미군정 이후에도 대부분 명문가로 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상류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모두 그런 것도 아니어서 신직계 화족 가문들은 메이지 시기에 재산 관리 실패로 연금 외의 재산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공경계 화족들도 최상위 가문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다이묘 집안으로서 작위를 받은 화족들은 재산이 많았지만 이마저도 후작 이상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석고 5만석 이하 다이묘에서 시작된 화족들은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11].

정말로 돈 걱정이 없던 화족들은 당대에 재산을 모아서 귀족원 의원이 되고 남작위를 받은 소수 부르주아[12]들 뿐이다. 사실, 황족들조차 돈이 없어서 처가에게 신세를 지는 판국이었다.[13]

화족의 사전적인 정의는 전근대의 귀족과 같이 법률로 규정한 특권집단이지만 실제로 세간에 통용되고 인식되던 화족의 이미지는 전근대 유럽의 귀족보다는 근대의 부르주아, 정치인, 고위 관료, 군인 등의 기득권층 집합체에 가깝다. 특히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재벌이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인데, 예를 들자면 게임 화려한 나의 일족에 나오는 미야노모리 가문이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하나인 소설 이누가미 일족에 나오는 이누가미 가문의 모습이 바로 세간에 흔히 알려진 모습에 가깝다.[14]

한편 화족들의 친목 단체였던 화족회관은 1947년 이후 카스미 회관(霞会館)이라는 사단법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5. 화족이거나 관련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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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이은 다섯 가문으로 이치죠(一條), 니죠(二條), 쿠죠(九條), 고노에(近衛), 다카쓰카사(鷹司). 관백이나 섭관은 셋케 출신만이 될 수 있었다.
  • [2] 백작, 후작을 거쳐 1907년 공작으로 승급
  • [3] 사실 오해할만한 게, 일본인들이 직계황족인 친왕(親王)이나 방계황족인 왕(王)의 경우도 닥치고 Prince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가령 쇼토쿠 태자의 경우에도 영어로는 Prince Shotoku로 표기하고 있다. 이 문제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천황가가 실질적으로는 상류사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지 못했단 근거라고 보기도 한다.
  • [4]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분가인 오와리 도쿠가와가, 기이 도쿠가와가, 미토 도쿠가와가의 세 가문을 말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오와리 번), 10남(기이 번), 11남(미토 번)의 후손들이다.
  • [5] 본래는 자작급이었으나 조선과의 외교에 대한 공로로 백작이 되었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전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도 이에 포함된다.
  • [6]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들의 경우 자작작위를 받는다.
  • [7] 다만 직계황족은 화족중에서도 오섭가(五摂家: 고셋케)가문이나 황족, 또는 왕공족과 결혼해야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귀천상혼 위반으로 신적강하를 당한다.
  • [8] 화족 이상에 한한다 등
  • [9] 가문의 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 [10] 후시미노미야, 카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
  • [11] 그나마 석고 5~10만 석 이상 재산이 많았던 다이묘 출신 백/후작 이상되는 집안조차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사기(...) 등에 걸려서 몰락하거나, 땅만 넓었지 수익이 낮은 부동산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 [12] 에도 중기 이래로의 상인 집안이던 미츠이, 스미토모의 당주 집안이나 미츠비시 재벌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남작가 정도. 그 외에 세계 최초로 진주의 인공양식에 성공한 후 진주 판매로 소득세 납세액 1위를 기록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된 미키모토 집안 정도나 있다.
  • [13]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는 사가 번주 나베시마(鍋島) 후작 가문의 딸인데, 나베시마 가문에서는 매달 2천엔씩 '화장품 값'이라는 명목으로 시집간 이츠코에게 돈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방자 비가 막대한 재산을 운용하는 이왕가의 영친왕에게 시집가던 때, 황족들이 부러워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 [14] 즉, 화족의 서열은 작위순으로 정해져 있긴 했지만, 단순히 작위만 높은 가문보다는 작위는 다소 낮더라도 재력이나 영향력이 컸던 가문이 세간에 알려진 화족의 이미지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15] 다만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이토를 언급할 때는 '이등후작'이라고 표기. 이 때 이토는 공작으로 승작되기 전이었기 때문.
  • [16]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