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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last modified: 2017-08-01 01:37:31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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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한국소설가, 민족운동가,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이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친일, 홍명희는 월북으로 인해 평이 좋지 않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로,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설에 따르면 장남 홍명희를 앉혀 놓고 그가 보는 앞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을 다니다가 한일합방이란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1919년 괴산에서 3.1 운동에 참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보고 왔으며[2]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문제는 할아버지 홍승목으로 이 인간은 친일파(…).[3]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단 한편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여담으로 일제치하에서 수감된 문인들중 유일하게 옥중집필이 허용된 작가가 홍명희 였다. 홍명희가 수감된이후 임꺽정이 연재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에 맛들려서 제정신을 못차렸던 상황. 옥중에서 임꺽정 집필이 완료되면 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고 한다.

1928년 11월 21일 연재되기 시작된 <임꺽정>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이 소설은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소설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연재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손자 홍석중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으므로 대를 이어서 창작한 셈이다.

그밖에도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인보의 둘째 딸 정경완, 사위 홍기무,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해방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고 여운형 암살 후 지도자가 되기도 했으나 환경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결국 이후 월북했다. 월북 계기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그의 월북 동기에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행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는 견해가 있다. 근데 김일성 정권도 친일청산 안했잖아?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되었고,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대부분 월북 인사들이 숙청당한 것에 비해 홍명희는 성공한 삶을 누렸다고 볼 수 있으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와도 개인적으로 친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은 벽초를 극진히 존경하고 예우했다. 홍명희의 계모는 홍명희를 따라가지 않고 괴산의 집을 지키다가 6.25 전쟁 중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북한군이 후퇴하는 급박한 와중에도 그 시신의 수습을 명령했을 정도였다.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김일성과 친했던 점, 북한에서 죽을 때까지 잘 대우받은 점 때문에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1990년대 중순부터에서야 서서히 알려졌는데, 그의 이름을 재발굴하려던 국내 학자들도 홍명희와 더불어 이태준이라든지 여러 월북 작가와 더불어 꽤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겪은 바 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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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글이 장군님이 직찍[4]김일성과 홍명희.

그의 아들 홍기문은 조선왕조실록을 완역[5]한 유명 국학자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평통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손자인 석형은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를 역임하다 2011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형의 동생 석중은 <황진이>를 쓴 유명 소설가다.

일화로 벽초가 어느날 집으로 오다가 그의 선산에서 몰래 벌목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벽초는 평소에 다니던 길을 버리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후에 그 이유를 말하기를, 그 사람 눈에 자신이 띄면 미안해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외에도 아들 홍기문과 함께 맞담배를 피운 개방적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오오 대인배.

한용운과도 사이가 돈독하여 이광수, 최린, 최남선 등의 창씨개명 소식을 듣자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벽초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지금은 1, 2년 차이로도 형동생 하지만 당시에는 위아래로 10년까지는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은 아버지와 열다섯 살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자기 친구가 알고보니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행사 때 아버지 친구이자 자기 친구인 사람이 오면 대하기가 꽤 곤란했다고.

괴산군에서 그의 생가와 업적을 조명하려 하자 주민들이 월북한 '빨갱이'가 뭐가 위인이냐고 격렬히 반발하기도 했다.

시(詩)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국민시인 김소월의 장인이기도 하다. 김소월의 아버지가 홍명희와 친구였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홍명희가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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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비슷한 이야기가 최남선과 정인보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 [2] 이 당시 이광수와 친해졌다. 이때 벽초는 이광수에게 톨스토이의 책을 권했다고 한다.
  • [3] 사실 홍명희도 친일의혹이 없는것은 아니다. 일제 연간에 임전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의혹이 있다. 사실 이건 당시 지도층 인사들의 인칭 도용 때문인데 이런 사례는 조만식,안재홍이나 여운형 같은 사람들도 이같은 일을 당한 바 있다.
  • [4] 김정일사진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관련 이론에 대한 책을 직접 쓰기도 했다.
  • [5] 북한에서는 이를 “리조실록”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