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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last modified: 2016-08-14 19:35:31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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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유대인들도 보이는데, 얼마 안 가 자신들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암울하다.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한 독일 여성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그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 미 육군, 레슬리 브라운 병장

Contents

1. 역사의 참극
1.1. 개요
1.2. 배경
1.3. 전혀 다른 의미의 학살
1.4. 홀로코스트의 경과
1.5.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
1.6. 전후 유럽의 반응
1.7. 일부 시오니즘 과격파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병크
1.8. 전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판
1.9. 反홀로코스트부정법
1.10. 황당한 유대인 분류 기준
1.11. 기타
1.12. 관련 항목
2. 영화 카니발 홀로코스트

1. 역사의 참극

1.1. 개요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자,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비극.[1]

제2차 세계대전나치 독일에 의해 이루어진 대량학살을 가리키는 용어다. 어원은 그리스어 'holokauston'(완전히 holos + 불태움 kaustos).[2]
서류가 중간에 중단되지 않고 그대로 승인으로 직진하면 벌어지게 되는 경우를 보여준다. 이런 대규모 학살은 혼자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된 희생자는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나치스를 정치적으로 반대하던 자들이었다.

1.2.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은 종료됐으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에게는 해당되지 않았고,[3]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항목에서 보면 나와있듯이, 바이마르 정부가 보상금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않자 결국 거의 다 삭감해주었다. 보상금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미국영국의 경우고,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계속 대립했던 프랑스는 삭감안에 반대했고 결국 삭감되지 않았다.)

이미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에는 반유대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그 정도의 반유대주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 흔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감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4]

히틀러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따라, 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에게 찾아야만 했는데, 그 목표가 바로 유태인이었다. 히틀러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에서 진 이유는 유태인의 배신과 무능 때문이었다. 유대 자본은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히틀러에게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1931년,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1.3. 전혀 다른 의미의 학살

20세기는 난징 대학살 사건, 아르메니아 학살, 스탈린 강제수용소에서의 학살, 킬링필드 등 무수한 학살이 자행된 시기이며, 때문에 20세기를 학살의 세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홀로코스트 역시 이러한 학살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일종의 보편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 같은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동시에 다른 학살과 구별되는 유일성을 지니는데, 그것은 홀로코스트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론)마지막인 산업적 방식의 학살이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무수한 희생자들을 관리하고 그 과정을 기록할 사람들, 추상적인 구상에 맞춰 실질적인 절차를 계획할 사람들과 실무를 수행할 사람들이 없었다면 실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홀로코스트가 20세기에 접어들어 완비된 고도의 관료제와 잘 정비된 행정체제, 조직적 국가체제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함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물론 에메 세제르나 뒤 보아 같은 비백인 학자들은 '선진국 백인'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백인의 이성을 맹신하는 풍조에 제대로 철퇴를 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인의 이성이 만들어 낸 제도가 그전에는 "유색인"의 존엄성만 유린했는데 이번엔 감히 백인의 존엄성을 이렇게 끔찍하게 유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홀로코스트 이후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은 인간의 이성의 순기능과 도덕적 의지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로부터 지나치게 나아가서 종종 홀로코스트도 그저 그 수단이 칼이나 총이 아닌 가스실로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른 학살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위험한 시각으로, 네오 나치 등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이나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들의 시발점이 되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의 우발적인 강간 사건이나 종군하는 창녀 등은 이미 기원전부터 존재했음에도, 일본군 위안부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용 되었으며 군 상층부의 지시에 의한 포로의 위안소 강제동원 등 그 성질이 분명히 다르다는 점에 비교해본다면[5] 홀로코스트가 이전의 다른 학살과는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그 차별점을 간단히 무시하는 일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즉, 홀로코스트는 기존의 강제수용소나 강제노역으로 인한 학살과도 매우 다르다. 일반적인 수용소나 강제노역은 죄수들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최대한 착취하는 경제적인 문제가 우선이고 학살이 그 부차적인 생산물이라면, 홀로코스트는 목적 자체가 학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학살이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함께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트레블랑카 역의 경우, 수용소에 들어가 강제 노역을 하게 될 줄 알았던 희생자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가스실로 직행되었고 학살만을 위한 전문 부대도 계속 존재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서 총, 폭약,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별걸 다 이용하다가 결국 치클론B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유대인을 안 죽이면 이따위 고생을 할 이유가 없잖아? 차라리 살려놓고 노역이라도 시키면 노동력으로도 이용할 수 있고, 어차피 민간인들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군대에 저항할 능력도 없으니 현지에서 징발해서 노역시키면 그만이지 굳이 힘들여서 수용소로 모을 이유도 없었다.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서 둘 다 전쟁에는 도움이 안되는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였지만 나치 독일은 멸망할 때까지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전쟁이 끝으로 치달으면서 나치가 인적자원이 매우 부족해 병력은 물론 공장을 가동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태인 학살은 언제나 계획에 차질없이 진행되었고, 유태인 희생자들을 노동 인력으로 보충하려는 시도가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심각성이 잘 드러난다.

철저하게 이성으로서 관리된 학살이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행동을 하는 목적에는 전혀 합리성이 없었다. 기괴하기 그지 없는 사건이다.

1.4. 홀로코스트의 경과

  • 1933년. 나치당이 집권.
    4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이 시작.
    6월, 유대인이 모든 공직에서 추방. 강제수용소 및 노동수용소의 설치가 시작.

  •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 시행.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혼인이 금지. 유대인의 시민권이 박탈당함.

  • 1936년. 유대인은 전문직(변호사, 의사, 교수직)에서 제외됨.

  • 1938년. 11월 9일 유대인 대박해(Kristallnacht, 혹은 Pogrom) 시작.
    게토설치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유대인의 법적 권리 상당부분 박탈.

  • 1939년. 2차대전 발발
    4월까지 유대인 재산의 강제 매각 실시. 장애인 살해계획(T-4 프로그램) 시작되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안락사.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 장애의 정도, 종류에 관계없이 이루어짐. 부모나 보호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음. 총 희생자 수 약 20만명.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추정한 수치이다. T-4 프로그램은 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명목상으로 보면 이 항목과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인력이 41년 이후 홀로코스트에 참여(특히, 노약자들 골라내는 것)했으며 인종차별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 1940년. 게토실시.
    수용소로의 강제이주 전에 유대인들을 지정된 일정 구역으로 강제이주, 거주하게 함. 1945년 종전 시까지 운영.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바르샤바 총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수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의 2.4%밖에 안 되는 게토 내에서 거주. 열악한 시설로 전염병 등이 창궐했다. 개전 이후 거의 모든 점령지에서 게토 성립.

    현지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직/간접적 협력. 게토에 대체로 호의적.
    당시 유럽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사지절단 당한 여자 항목 참조.

  • 1941년 12월. 아돌프 히틀러, 유럽 유대인을 전멸시키기로 결정. 소련 공격 시작.
    40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루어짐. 대부분의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뤄졌다.

    치안유지군(Einsatzgruppe)의 학살 시작.
    소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죽음수용소가 가동되기 전까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6] 아래 유대인, 소련인, 폴란드인을 대량학살. 이틀만에 3만명이 살해된 경우도 존재. 총 160만명 살해.

    최초의 학살수용소가 12월 헤움노(Chelmno)에 세워짐. 이어서 7곳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은 산업적인 방식으로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강제수용소/노동수용소와 다른 방식). 독가스를 통한 샤워실 학살이 이루어진 곳. 일반적인 살해방식에 의한 학살도 여전히 자행된다. 총 300만명 학살(학살수용소 한정).

  • 1942년 초. 반제(Wannsee) 회의. 홀로코스트 전면실시. Final Solution(마지막 해결책)이 채택되다. 7월, 게토에서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짐. 학살수용소 본격적으로 가동 시작. 종전까지 가동된다.

  • 1944년 죽음의 행진 시작.
    연합군이 급속히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학살수용소를 파괴하고 수감자 및 포로들을 이송. 이 과정에서 기아, 구타, 병, 추위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 정확한 사망인원 추산 불가.

  • 1945년 종전
    죽음의 행진에서 약 6만명이 생존한다. 종전 이후 4주동안 질병 등의 후유증으로 1만명 사망.[7]

1.5.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

또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8]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 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 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던 존재했다.

유럽의 반유대감정은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9]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는 것과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보다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러시아의 포그룸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명언이 있다.

처음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by 라울 힐베르크)"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 유대인들은 우리가 섬멸(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 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Chavlkowsky에게 보낸 편지

  •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이상의 발언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자 했다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이 2개의 유명한 어구에서 사용된 vernichtet라는 단어가 실지로는 '절멸'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annihilate로 번역되며 '절멸시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1:1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폭력을 행사해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destroy로도 번역될 수 있고 전간기에 사용된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주로 군사교리의 용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섬멸하다'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섬멸하거나 몰살하거나 그렇게 심각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Volkischer Beobachter 1922. 3.10

  •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Das Schwarz Korps

  •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K. Jager 1941, 12.1

이 외에도 다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최종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절멸이라고 명시된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절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설이 자주 제시된다.[10] 그러나 아래에서 읽어낼 수 있다시피 '최종 해결책' 혹은 '물리적 해결', '정치적 해결' 등의 단어[11]는 언어를 관용화해 이의 무게를 무화(無化)시킨것에 불과하다고 해석되는 것이 학계 다수의 의견. 신어를 떠올리면 알 수 있을듯. 실제로 렌베르크 전범 재판과 예루살렘 재판과 같은 전범 재판 당시 피고로 심문받던 나치 수뇌부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 선전문구(Schlagworte)를 주로 사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 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추상적인 분노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임을 추구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12]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13]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학살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1.6. 전후 유럽의 반응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종전 직후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혀졌다.

이만큼 거대한 사건이 그토록 쉽게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은 얼핏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6.25 전쟁에서 그토록 무수한 학살을 겪었으면서도, 막상 우리가 기억하는 학살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 않은가. 무수한 학살이 이뤄졌던 많은 장소들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거나 시가지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한 상황이 전후 유럽 전체에서 일어난 것이다. 과거 있었던 다른 수많은 유색인 학살처럼 홀로코스트도 잊혀질 뻔 했다.

많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에 대해 잊고자 했고,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 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14] 또,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다른 학살들이 외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당장 2차대전 당시에 동유럽인들은 3,000만, 중국인들은 4,000만이 죽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600만이 죽었다고 추산되는데 대중은 유대인 학살에만 관심을 갖지, 더 많은 수가 죽은 그 이외의 학살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비단 2차대전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는 미국 언론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강조했다. 유대인의 3~4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낸 중국과 소련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성향을 더욱 더 부채질했으며, 결국 우리가 2차 대전의 학살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만을 떠올리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합리적이고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 특히 랑크푸르트 학파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것이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예시, 뉘른베르크 법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15]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네오 나치가 아니다.이들 역시 네오 나치와 나치가 행한 여러 만행에 대해선 의견을 같이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의 여건 등을 고려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다른 비판으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를 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들먹이냐는 내용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 외에도, 그 작은 벨기에조차 콩고에서 고무 등의 자원확보 과정에서 나치보다 더 많은 1천 5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그외에도 중국, 소련, 터키, 스페인, 포르투갈, [몽골, 일본, 이스라엘 등등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해왔다. 또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식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들은 사과하지 않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던 외침은 쉽게 묵살할 것이 못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학계에 따르면 미국이 학살한 아메리카 원주민 숫자만 최소 5,000만이며 최대 8,000만이라는 통계결과도 나왔다. 영국이나 프랑스, 소련도 아무리 못해도 2,000~3,0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숫자만 보면 나치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다. 실제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역사에 가지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확실히 잊지 말아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린 홀로코스트와 함께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다른 학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폴 포트천안문 사태 등이다.

한편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인정하고 종 차별을 제도적으로 실행했다는 사실을 사죄하는게 진심인지도 의심스러운데, 유대인에 대한건 사죄해도 집시에 대한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학살했던 약소국이나 식민지들에 대해서는 사과도 인정도 하지 않는다. 예컨데 제2제국 시절 식민지배하던 나마비아에서 1904년 헤레로 족의 독립투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은 7만명의 헤레로족중 6만여명을 학살하고 남은 1만여명의 노약자들은 헤레로족 포로라는 뜻의 GH라는 글자를 강제로 새기고 수용소에 몰아넣었고, 그들은 질병과 기아로 죽었다. 또한 공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현재 독일 내부에 존재하는 인종 차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독일팀을 응원하는 터키 출신 이민자들을 핍박하는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한가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이는 일부 유태인들의 입장 역시 씁쓸한 면이 있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건립 당시 추모비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가 1,000만명으로 기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 내에 거주하는 유태인들[16]의 강경한 반대로 인해 결국 해당 추모비에는 희생자가 600만명으로 기재되었다. 문제는, 1,000만명과 600만명이라는 희생자 수의 차이가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경우와 유태인 희생자의 수에 한정한 경우의 차이라는 것. 즉, 미국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의 추모비가 유태인뿐 아니라 집시, 폴란드 등 동유럽인, 동성애자, 나치에 반항한 정치범 등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유태인만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트 슈피겔만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는 미국 거주 유태인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고, 이 일화를 국내에 소개한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교수 역시 이런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가 반드시 외부 집단에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고,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유태인들이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유럽에 잔류했다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들에 대하여 보인 우월의식에 대하여 비판한 바도 있으니 참고할 만 하다.

1.7. 일부 시오니즘 과격파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병크

시오니즘에 입각하여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장하던 유대인 중 일부 과격파는 이 학살을 악의적으로 평가해서 동조, 호의적으로 평가해서 묵인했다.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에 대한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게 최악으로 발현된 것이 어떤 것이냐면, 나치와 시오니즘 지도부가 협력관계를 구축한 사례들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을 지지한 경우였다. [17]

우선 1941년 1월 11일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오니즘 군사조직 아르군[18]과 독일 나치 사이의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이것은 위에 쓴 대로 나치의 목적이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 영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가장 큰 적이었고, 마침 영국과 적대적인데다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나치는 자연스러운 동맹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이츠하크 샤미르

샤미르가 보낸 편지는 나치에게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독립 활동 - 게릴라전 - 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의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 것임을 명시했다.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지만,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총리가 된다.

또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소수라도 살리는 것 - 특히 건강한 젊은이들과 유명인사들 - 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일화로,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1,000여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댓가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지만, 카스트너는 나치로부터 이 소수의 유대인 - 정확히 1,684명 - 들을 살리는 댓가로 대부분의 나머지 80여만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 - 즉, 유대인들에게 수용소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지 않기로 - 했다. 카스트너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나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카스트너 자신이 말하기로도 저명한 유대인들[19]과 젊고 건강하며 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43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치에게 이 유대인들의 목숨값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 카스트너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중 150여 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서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고, 이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계에서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이스라엘의 법원에서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한다. 비록 카스트너가 죽은 후에 상위 법원에서 그를 무죄로 고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1.8. 전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판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건은 분명 다시는 있어선 안될 참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 시켜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여론도 나온다. 미국 유대인 로비단체들이 학살된 유대인들의 유럽은행 예금이나, 몰수된 재산과 미술품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내 상당액수를 유용하거나 하는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 또한 조부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태인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진상짓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미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인이기에 이 점을 고의적으로 우회하고 그들의 적인 아랍인의 잘못만 들춰서 비난하는 여론 조장에도 상당한 한몫을 한다. 이쯤되면 오히려 막나간다고 욕해도 모자랄 판으로 보인다. 역사적 문제는 역사적 문제이고, 현재는 현재임을 유대인들은 자각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위안부 문제와는 또 다르다. 역사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유대인은 전자이고, 위안부는 후자다.(일본은 전자지만)

1.9. 反홀로코스트부정법

다른 한편으론 홀로코스트 수정론을 내놓는 학자들을 (적어도 그 일부는)법적으로 처벌하는 유럽사법제도가 학자들에게 끼치는 압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정작 "제국주의는 사실 좋은 거였다.", "사실 원주민이 그렇게 많이 죽인 건 우리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병 때문에 죽은 게 거의 다다." 같은 주장은 해도 처벌받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도 '역사적인 진실을 법적인 진실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라며 반홀로코스트 부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1.10. 황당한 유대인 분류 기준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그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일반 상식으로 보아도 유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거치거나, 자신의 종교에 냉담해지면서 서구 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보다 국가가 중요하게 된 근대 시기에는 이런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났다. 유대인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종주의에 경도된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조상까지 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으면 유대인'으로 보는 정신나간 기준이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몇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으로 분류당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몇대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한들, 자신이나 그 전 세대에서 이미 개종을 해서 유대교를 믿지도 않고 문화적으로는 유럽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100년 전 조상이 유대인에서 개종했다고 해서 그 후손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20]

히틀러가 집권하기 한참 전부터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는데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눌러앉아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유중 하나는, 그들 자신들부터가 자신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TV 미니시리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도 주인공들 중 1명인 유대인의 나이먹은 아버지가 상황이 심상치않게 돌아간다며 독일을 탈출해야 한다는 아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난 1차대전 때 독일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인데 설마 어떻게야 하겠느냐', '진정한 독일 시민이라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도리다'라며 가만히 있다가 결국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사망한다. 다만 이 사람은 1차대전 참전 경험 때문에 같은 참전용사 출신인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이면서도!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 국민'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실화를 베이스로 한 이야기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는 셈. 사족이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초기만 해도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탄압도 단계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나치가 정한 유대인 기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유대인 외모를 가진 자는 유대인으로 규정한다거나 상당수 독일계 유대인은 제외되거나등의 객관성, 일관성은 아예 없는 왜곡 된 기준들이다. 충공깽한 수준… 히틀러는 그저 감정의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식 영토나 국가가 없어 차후 합법적 보복이 불가능한 만만한 희생양이… 만약 유대인이나 집시들이 영토를 가진 정식 국가였다면 종전 후 구체적 피해 금액 요구가 가능해지니깐!

결국 나치 기준으로도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조상님들 가운데 유대인이 있다는걸 알지도 못했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찍혀서 끌려가서 살해당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편협한 인종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닫을 떄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 집어치우고 유대 사회는 모계사회이다. 이 원칙은 기원 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세계(특히 유럽)로 흩어지면서 아버지가 누군진 몰라도 엄마는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기에 지켜져 왔던 원칙이다. 즉,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가 백인 여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자식도 백인들과 결혼해 후손을 낳고 또 낳아서, 유대인 사회를 떠나 유럽 백인 사회 일원의 하나로 정착해버린 경우도 많았다.유대인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사고쳐서 낳은 사생아들은 어떻게 되는진 궁금해 하지말자(...).70년 부터 시작된 유대인 민족 대이동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기전까지 무려 1863년이란 긴 세월동안 이뤄졌는데 히틀러 그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의 어머니도 가계도 쭉 거슬러 올라가서 유대계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순수 혈통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짬뽕 혈통 유럽 사회에서(…)

1.11. 기타

  • 유대인의 시체에서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시전설. 자세한 것은 "인체 비누" 항목 참조.[21]

  • 웹툰 조이라이드를 그린 윤서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폴란드 아우슈비츠 여행기를 올렸는데 거기에 유대인 학생들을 보면서 "근데 유태인들… 좀 짜증나긴 한다. 엄청 티내고 다니고 시끄럽고 안하무인이다. 돈밖에 모르고 이기적이고 너무 기가 쎄서 예나 지금이나 유럽인들이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유태인들 싸그리 잡아죽일 때 옆나라들이 알면서도 묵인했다는…"이라는 글을 올리는 병크를 터트리기도 했다. 한국인은 그런 인간 없는 줄 아나?[22]

  • 아트 슈피겔만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아버지와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태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기타 돈될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태인들이 돌아오자 유태인들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전 유태인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태인을 집단적으로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난지 1년 정도 지나서 폴란드가 안정을 찾고서야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태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태인 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 유대인 1,100만명이 살해되고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유대인이란 인종 자체가 전멸했다. 독일인들에게 유대인은 옛날에 분명히 있었는데 왠지 사라진 존재 정도로 거의 잊혀졌고, 홀로코스트의 존재는 극소수의 나치 간부들만 알고 있다. OMG!

  • 네오나치들은 연합군의 함부르크, 드레스덴 폭격 등을 예로 들면서 이걸 감싸기도 한다. 이뭐병. 그림자 정부도 같은 내용을 언급한 편지를 실으며 음모론을 주장했다.

  • 유대인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이와 관련된 음모론도 많지만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 씨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23], 집시, 공산주의자, 장애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의 희생은 엄청나서, 최소 500만에서 1,000만으로 추정되는 집시들의 희생자 수는 숫자로만 보면 유대인보다도 많다. 특히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명의 집시들이 처형되어서, 지금도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만 돌아갔고, 독일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

  • 대량학살이야 인류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국적은 다르더라도 백인이 같은 백인을 상대로 산업적으로 학살한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물론 같이 핍박받았던 동유럽 사람들의 경우 러시아 영화가 아닌 이상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해금된 각종 문서를 통하여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와 같이 비유대계 사람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는 것이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비슷한 시기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권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인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병크를 연달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바가 뭐냐."라는 소리가 나올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훅 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굉장히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라이징.[24]

  • 최근에 발표된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런 치들의 편견 배설이야말로 현재의 이스라엘과 유태계 권력자들에게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줄 뿐이다.

2. 영화 카니발 홀로코스트

카니발 홀로코스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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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굳이 이와 비견할 수 있는 사건들을 꼽는다면 난징 대학살,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일본군 위안부 문제정도다.
  • [2] 최근에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대재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휘인 쇼아(Sho'ah, שוא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더 높은 빈도로 쓰이는 것은 사실.
  • [3] 이때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지만, 독립은 실현되지 않았다.
  • [4] 히틀러 평전 참고.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와 군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빌리면 반유대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철십자 훈장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대위도 유태인이었다.
  • [5] 현 일본의 하시모토 도루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자들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역사상 언제나 존재해 왔던 보편적인 문제라는 식으로 문제의 수위를 낮추려 든다. 이들은 심지어 연합군도 전쟁터에서 윤락업소를 이용했으니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본질을 호도하는데, 이는 공창제와 위안부의 차이점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다.
  • [6] 여기에는 별의별 이유가 다 들어갔다. 오늘의 일과는 유태인 하나를 죽이고 끝낸다던가.(아트 슈피겔만의 참조.
  • [7] 일부는 연합군의 판단 착오로 사망하기도 했다. 가령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당시 의학에 무지한 병사들이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을 줘서 신체에 충격을 받은 수감자들이 사망한 적도 있었다.
  • [8] 독일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는 그야말로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국가에서 유태인 색출에 대한 협력은 각국마다 달랐다. 덴마크불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드러낸 곳도 있었으며 벨기에이탈리아처럼 사보타주를 벌인 곳이나 아예 유대인 단체까지 색출에 협력한 네덜란드같은 곳도 있었다.
  • [9] 그리스도교에서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은 이가 바로 유태인들이라는 논점.
  • [10]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 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로버트 위스트리치 에서 재인용.
  • [11] 당시 나치 군체계의 언어로 '최종 해결책'과 '물리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유대인 학살을, '정치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국외 추방을 의미
  • [12] 관료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일까? 지시한 사장인가? 계획한 과장인가? 실행한 말단인가? 관료제 속에서 죄책감은 모든 관료들에게 배분되어 희미해진다. 역으로 관료제의 이런 속성이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로 까발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13] 비슷한 예시로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짜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아라'라는 피상적인 명령을 받은 실험자들은 죄수 역의 실험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는 차차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루시퍼 이펙트> 참조).
  • [14] 홀로코스트 산업 - 노먼 핑켈슈타인,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 나치 대학살 - 최호근에서 인용.
  • [15]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설 개시 단계부터 장기간 소장을 지냈던 루돌프 회스(루돌프 헤스와 스펠이 다르다. 회스(Höß)다.)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희생자를 처음엔 250만정도(실려온 사람 숫자가 유대인만 250만으로,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이었다.)라고 진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100만을 조금 넘는 숫자로 정정했다. 1946년 봄에 처음 진술할 때에는 상관에게 들은 수치였고, 이후 1946년에 진술을 정정할 때는 폴란드 법정에 제출할 자술서 성격의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수용소 처리능력과 자신이 기억하는 실제 처리량을 비교해 본 결과 150만 이상은 수용소에서 죽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정정한 것이다. 회스의 진술 신뢰성은 상당히 높아, 현재는 아우슈비츠에서 직접 살해된 인원을 약 150만 이하로 추산하는 것이 정설이다.
  • [16] 특히 박물관 건립에 기부금을 낸 사람들
  • [17] 전에 있었던 서술의 반 이상은 네오 나치 및 음모론 사이트 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 출처가 확실한 자료만 기재하길 바람.
  • [18] 말이 좋아서 군사조직이지, 사실 테러리스트 집단이었다.
  • [19]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분류를 1942년에 나치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 [20]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전통을 따른다는 특성이 있으니 100%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는 마치 당신의 조부모 4명 중 1명이 알고보니 일제강점기한국에 와서 눌러앉은 일본인이었는데, 한국판 나치가 등장하더니 한일관계가 악화되어서 일본인들을 말살시킨다고 당신을 일본인이라고 하면서 강제수용소에 끌고 가는 꼴이다.
  • [21] 가죽을 벗겨서 책(나의 투쟁)을 만들었다거나, 나치 전범중 1명인 한스 뮌히는 유대인 시체가 잘 타지 않자 유대인들을 시켜 시체의 지방을 짜내 시체에 부었다는 등의 루머가 있다. (만화)에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면서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을 다시 퍼부어 더 잘 타게 했다는 말은 있다.
  • [22] 학살 수가 많아질수록 학살 대상이 유대인이고 아니고는 나치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유대인만 철저하게 골라서 죽였다고 해도 문제될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며, 그 먼 나라까지 가서 대체 뭘 보고 온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은 발언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당장 서구권 등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다니다간 어느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를만큼 위험한 발언이다.
  • [23] 유태인들이 '다윗의 별'이라 불리는 육망성 표시를 달았던 것처럼, 성 소수자들은 매우 큼지막한 분홍색 삼각형 표지를 달았는데, 이 표시(Pink Triangle)는 전후인 1970년대 말에 성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고난의 역사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사용하게 된다.
  • [24]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경우 같은 홀로코스트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지만 일방적으로 유대인 옹호와 나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열한 유대인', '좋은 독일인' 등을 등장시켜 보다 작품을 입체적이고 중립적으로 만들어 놓아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25] 사실 이쪽도 나치에 빌붙었던 세력이니 간접적인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