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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뉴턴 알렌

last modified: 2017-05-14 15:50:04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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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ace Newton Allen (호러스 뉴턴 앨런)
1858. 04. 23 ~ 1932. 12. 11
(사망 당시 만 74세)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조선왕실의사가 되다
2.2. 이권 챙기기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2.4. 떡고물이 떨어지자..
3. 트리비아

1. 개요

미국 북장로교 선교 의사이자 조선 왕실부 의사.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

현대 외과의학을 조선에 도입했다고는 하나, 사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의료선교보다 개인의 영달과 로비스트 활동에 더 치중하는 등 위선자적 면모도 많았다. 완전히 나쁜 인물은 아니지만 이중적이고 쓸데없이 욕심이 많아서 평판 깨나 깎아먹는 50점짜리 인물.

2. 생애

2.1. 조선왕실의사가 되다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중국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884년 한국에 들어와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지내면서 기독교 선교사업을 겸하였는데, 그 해 겨울에 터진 갑신정변 때 첫 희생자로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준 것[1]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사 겸 고종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 조선말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제중원)이 세워지자 의사와 의학 교수를 겸하면서 운영까지 담당했다. 그 후 1890년에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의료활동 대신 외교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전권 공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우선 고종과 가깝다는 점을 이용해 하와이의 노동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 이민자 모집을 공고하였는데, 그 처리 과정에서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의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로 볼 때 조선인들에 대해 저평가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했다. 또 이를 잘못 뽑는(...) 의료사고가 났을 때 이를 은폐하기도 했다.본인 스스로 글에다 고백했다는게 함정

2.2. 이권 챙기기

조선의 각종 이권을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해 미국으로 넘겼다는 점도 그가 비판받는 부분이다. 큰 건수만 보아도 나라 빚을 다 갚고도 남았을 거라는[2] 운산 금광 채굴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 서울 시내 전등·전차 부설권 등...그러고도 1904년에 고종은 알렌에게 훈일등 작위와 태극대수장을 수여했다. 허나 이 당시 알렌은 고종을 혹평했다..

특히 왕비의 한마디에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하루아침에 하사받게 된 알렌은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개광회사를 설립,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아 자국에 막대한 이득을 안겼는데, 당시 미국은 평안도 운산 금광에서 40여년 동안 순금 80여톤을 채굴한다. 당시 시세로 1500만 달러, 현재 시세론 332억 달러(약 36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미국의 실(J. M. Sill) 공사는 이 계약에 대해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다고 했으며, 알렌은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기록은링크를 참조.

이 때문에 알렌은 금광회사로부터 일종의 두둑한 커미션을 받게 되고, 제물포에 근사한 별장까지 거느리게 된다.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렌은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두 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도 여느 외국인과 다를 바 없이 개인의 영달과 자국의 이득을 최대한으로 챙기는데 전력투구했다는 점에서, ‘환자’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의술 활동에 전념했다고 흔히 묘사되는 대중매체 속 그의 모습은 여러모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는 것.

때문에 의료인이지만 자기 사업(?)에 치중했던 알렌은 동료 의사인 존 헤론과도 마찰을 빚었고, 결국 대한제국 왕실의 비호 아래 재산을 치부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천문학적인 금액을 치부했는지는 기사를 참조하자.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알렌은 고종에게
'미국 국민은 대한제국이 만일 곤경에 빠질 경우에 강력하고 사심없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국민이 될 것이다'
'미국과 다른 조약 체결국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강탈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어렵게 만들것이다.'
라고 표현했다. 당시 외교독립론에 빠져서 미국이 큰 형처럼 느껴진다[3]라고까지 할 정도로 미국과 손잡으려 애썻던 고종 입장에선 이보다 달콤한 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렌은 '고종이 멋대로 미국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제물포조약의 우호관계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한다. 당혹스럽다'라는 식으로 미국에 전문을 보내는 것으로 고종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알렌이 초창기에 미국에 대한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전문을 보내고, 대한제국이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주장을 해서 고종의 알렌 매수설이나 루즈벨트와 대립씩이나 하게 된 배경이 바로 이 이권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권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고종이 군주로 있는 대한제국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었던 것.

2.4. 떡고물이 떨어지자..

이런 알렌의 생각도 러일전쟁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사실 알렌의 생각은 알고보면 단순했는데,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중립국으로 존재하고 이것을 미국이 중재하면서 자신과 미국이 이권을 얻는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칭다오를 확보하고, 러시아가 이에 자극을 받아서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왕따가 되면서 사정이 변화한다.

국제정세가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그를 통해서 이권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게 낫다는 쪽으로 러일전쟁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의 변화를 인식한 알렌은 태도를 일변시킨다. 자신이 반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1902년과 1903년[4] 미국 본국에 전보를 보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할 가능성에 대해서 엄청나게 혹평을 한 것이다. 심지어
"러일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승리하면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 더욱 적합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해야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알렌은 한국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수십번 말했으며, 더욱이 한국이 망하고 있다는 것에 즐거움마저 나타낸 일이 있었다."
알렌과 함께 공사관에서 일했던 F.H.해링턴의 말이다.

이 과정에서 고종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일찍이 고종과 친하게 지내서 이권을 받을 때는 좋게 평가하던 고종을, 1904년에 이르면,
'이 나라의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다. ... 로마가 불타고 있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라며 네로급 암군(...)으로 혹평했다.근데 이 당시 고종은 할 말이 없다 돌아가면서는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한국 황제 같은 인종은 처음 봤다.며 무지막지하게 비난했다.

결국 루즈벨트와 대립한 전적이 있던 알렌은 1905년 3월에 해임당한다. 이전에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어서 한국에서 떠났다고 되어있었지만, 알렌의 후임 공사도 존재한다. 바로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있던 에드윈 V.모건이다. 그리고 이 모건도 을사조약에서 반대 입장을 표시했었다. 때문에 알렌이 친한파라서 해임되었다거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어서 자연스럽게 출국했다는 것은 잘못된 소리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돌까? 다시 해링턴의 말을 인용하면,
"이제 와서 알렌은 자신을 한국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으며, 일본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해임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였다. 그리고 실제로 갑자기 생각을 틀었는지 혹은 너무 진행이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을사조약 이후 공사관의 철수가 너무 빠르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루스벨트에게 "일본은 결국 미국의 태평양 정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것이며 언젠가 미국과 충돌할 것이다." 라고 말했으나 친일 성향이 있었던 루스벨트는 이 말을 씹었다.[5] 그리고 30여년 뒤 태평양전쟁이 터지며 그의 말이 현실화되었다! 예언자?!물론 이에 대해서는 외교관으로서 너무 급하다고 비판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일리나 루즈벨트가 조선에서 환대를 받고 돌아간지 몇주만에 미국은 공사관을 철수시켰는데, 이게 외교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3. 트리비아

평하기를 좋아했는지 인물평들이 꽤 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한때 영민하다며 칭찬했던 이완용인데 "한마디로 기계(로봇) 같은 사람이다"라는 평을 남겼다. 그리고 이 기계 같은 이가 후에 어떤 저지르는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이 초대원장을 지낸 광혜원(제중원)[6]은 나중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가 되는데,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가 1957년 합쳐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가 된다.언더우드만 설립자 취급하는게 함정 자세한건 연세대학교/역사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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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외과수술로 기록된다.
  • [2] 사실 대한제국 초기에는 빚이 없었다. 당시 외세는 국채를 넘기기보다는 이권을 확보하는데 골몰했고, 고종도 재정 유지에 발악적으로 움직인 것도 있기 때문에, 빚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할 수가 없었고 설혹 존재했다고 해도 고종의 개인재산이 내장원 소속 재산보다도 많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빚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국채보상운동 때문인데, 이것은 러일 전쟁 이후에 일본이 억지로 떠넘긴 것이지 이전부터 존재하던 빚이 아니었다.
  • [3] 고전적 사대외교에서 형제지국의 관계라는 의미로 발언한 것일 수도 있다.
  • [4] 참고로 러일전쟁은 1904년에 터진다.
  • [5]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친일이었던게 아니라 일본 문화에 심취한 상태였다.
  • [6] 인터넷 백과에도 보통 이 사람이 설립했다고 나와있는데, 정작 제중원 항목엔 아니라고 되어있다. 정확한 내역 아시는 분은 수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