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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last modified: 2016-09-23 22:54:34 Contributors

KBO 리그 / 해체된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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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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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Hyundai Unico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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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원더스
(2군 번외, Goyang Won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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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야구단
(2군, Police)
◀ 현재 참가하고 있는 구단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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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엠블럼 팀 마스코트
코니[1]
현대 유니콘스'''
Hyundai Unicorns
인수 1995년 9월 21일
팀명 변경 1996년 3월 11일
마지막 경기 2007년 10월 5일
vs 한화 이글스
해체 2008년 1월 7일
구단 법인명 ㈜현대유니콘스
연고지 (사실상) 경기도 수원시
구단 연고지 변천 인천광역시 & 경기도 & 강원도 (1996~1999)
경기도 수원시 (2000~2007)
구단명 변천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구단 해체[2]
해체 당시의 구단프런트
(2007년)
구단주 공석[3][4]
사장 김용휘
단장 정재호
감독 김시진
홈 구장 숭의야구장 (1982~1999)
(12,000명)
수원야구장 (2000~2007)
(20,000명)
2군 구장 원당야구장

최종 우승
4회
(1998, 2000, 2003, 2004)
역대 우승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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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97-해태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1999-한화 이글스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99-한화 이글스 현대 유니콘스 2001-두산 베어스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2002-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2005-삼성 라이온즈

Contents

1. 개요
1.1. 현대 유니콘스 연표
1.1.1. 1996년 이전: 현대그룹의 야구단 창단 시도
1.2. 숭의야구장 시절
1.2.1. 1996년: 창단 첫해부터 준우승
1.2.2. 1997년: 2년차 징크스?
1.2.3. 1998년: 인천야구, 첫 우승!
1.2.4. 1999년: 투수진이 붕괴
1.3. 수원야구장 시대
1.3.1. 2000년: 뜬금없는 시즌전의 연고지 이전
1.3.1.1. 연고지 이전은 과연 최선이었는가?
1.3.2. 2000년: 수원으로의 연고이전, 두번째 우승 그리고 무너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3.3. 2001년: 빈약해진 선수층에도 4강진출 성공.
1.3.4. 2002년: 또 4강만 가면 광탈
1.3.5. 2003년: 정민태의 투혼, 그리고 우승.
1.3.6. 2004년: 왕조의 마지막 우승
1.3.7. 2005년: 진만이도 없고, 정수도 없고...
1.3.8. 2006년: 유니콘스 마지막 가을야구
1.3.9. 2007년~2008년: 왕조의 멸망
2. 유니폼
3. 역대 등번호
4. 역대 선수
4.1. 투수
4.2. 포수
4.3. 내야수
4.4. 외야수
4.5. 역대 외국인 선수
5. 역대 성적(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 포함)
6. 그 외 트리비아

1. 개요

한국 프로야구에서 두 번째[5]왕조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안타깝게 해체된 구단.

KBO 리그에 있었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 경기도 & 강원도 - (사실상)경기도 수원시.

창단연도는 1982년(삼미-청보-태평양 순으로 인수), 해체는 2008년이다. 원래 연고지는 인천, 경기, 강원권역이었으나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하면서 임시 홈 구장으로는 수원 야구장을 썼다.

1.1. 현대 유니콘스 연표

현대그룹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여 프로팀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재창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탄생한 팀이다.

1996년 취임해 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한 김용휘 단장(2004년부터 사장으로 승진) 이하 구단 프런트가 개념이 넘친 현장 지원으로 명성을 떨쳤고, 역대 감독은 김재박-김시진이었다. 상징동물은 유니콘. 별명은 투수왕국. 내로라하는 투수들이 정말 많았다. 정민태, 정명원, 위재영, 김수경, 임선동, 조용준, 장원삼 등이 현대 유니콘스에서 활약한 투수들이며 무려 4명의 투수신인왕을 배출했다. 1998년 김수경,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재영[6][7]

역대 우승은 1998년(인천연고팀의 첫 우승), 2000년, 2003년, 2004년(수원 임시연고)으로 총 4회이며, 해태 타이거즈에 이어 두번째로 2년 연속우승에 성공했다. 팀이 존재한 12년간 4회 우승을 거두며 짧고 굵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줬다. 하지만 관중 동원은 인천을 떠난 2000년 이후로는 기존의 팬들이 많이 떠나면서 경기당 평균 2,000명[8]이 채 안되는 등 최하 수준이었다.

1.1.1. 1996년 이전: 현대그룹의 야구단 창단 시도

현대는 프로야구 참여시에 현대 피닉스로 대표되는 아마추어-프로 간 대립을 이끌며 '제2리그' 창단을 공언하다가, 결국 태평양 돌핀스를 430억에 인수하여 프로야구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삼성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를 돈지랄판으로 만든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인천지역 야구팬들은 이제야 가난한 팀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열광했고, 덕분에 아모레퍼시픽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야구로 돈을 번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원래 프로야구 출범 추진 과정에서 출범 추진 인사들이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 회장에게 인천/경기/강원을 연고로 현대그룹 야구단의 창단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이었고 88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한 직후였기 때문에 올림픽에 전념하겠다고 하면서 거절했다.[9] 더구나 당시 현대그룹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양궁과 수영 2개 종목을 맡고 있었다.[10] 하지만 올림픽 이후부터 프로야구 진출을 시도하면서 한때 울산을 연고로 신생구단을 창단하고 야구장까지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무산되었다.[11] 결국 실업팀 현대 피닉스로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키다가 태평양 돌핀스 인수로 프로야구에 진출한 것이다.

태평양 입장에선 1987년에 50억에 청보에게서 구단을 사서 근 10년만에 9배의 값으로 팔았으니, 야구구단 운영비를 빼고 나서도 엄청난 대박이였다 할수 있겠다. 당시 현대그룹의 돈빨이 얼마나 쌨냐면 고려대 진학을 원했던 박진만이 귀찮게 달라붙는 현대 구단 직원들을 떼어버리기 위해 계약금 4억원이라는 (당시로는) 터무니없는 큰 돈을 요구했더니(당시 최고 계약금은 정민태의 1억 8천) 현대 직원이 알았다면서 자동차 트렁크에서 4억원을 꺼내 오더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12]

1.2.1. 1996년: 창단 첫해부터 준우승

1996년 첫해에 타석에선 박재홍-김경기의 활약, 마운드에선 정민태, 위재영 , 정명원의 활약 등에 힘입어 4위를 기록, 준플에서 한화 이글스를 2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플레이오프 진출, 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에 패하며 밀리는 듯했으나 3차전부터 극적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3연승을 거둬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2승 4패로 분패하고 준우승을 기록한다.[13]

1.2.2. 1997년: 2년차 징크스?

이듬해 1997년에는 시즌전에 아마추어팀 현대 피닉스의 문동환을 롯데로 풀어주면서 위약금을 전액 탕감하는 대신 전준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확실한 1번타자를 영입해 전력강화를 꾀했으나[14] 그 해 타선이 지독하게 부진했다. 타선에서는 입단 첫해인 전준호가 트레이드 충격을 털어내지 못하고 0.247라는 프로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팀내 핵심선수인 박재홍은 20-20을 달성하는 등 그래도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시즌 중후반에 부상으로 전력이탈했고, 4번타자 김경기는 프로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역시 타선의 주축 역할을 해오던 윤덕규도 부진을 겪었고, 결국 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중간에 교타자인 김광림을 현금트레이드를 통해 쌍방울에서 영입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유일하게 시즌 끝까지 꾸준하게 활약했던 선수는 이숭용 정도였다.

투수면에서는 에이스 정민태가 건재했지만, 2선발 위재영은 시즌 도중 부상으로 드러눕고, 마무리 정명원은 갑자기 구위가 떨어지면서 난조를 자주 보였다. 1997년 시즌에는 내내 하위권 달리다가 롯데, 한화를 겨우 제끼고 6위 기록.

1.2.3. 1998년: 인천야구, 첫 우승!

이듬해 1998년 시즌에는 현대그룹의 과감한 지원이 이어간다. 시즌 전에는 당시 구단 재정난을 겪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핵심선수였던 박경완을 현금트레이드로 영입하고, OB 베어스의 베테랑 2루수였던 이명수를 영입하는등 타선을 크게 보완했다. 거기에 이명수의 뒤를 이을 주전 2루수로 육성하기위해 박종호까지 영입했다. 이러한 구단의 과감한 지원 속에 1998년에는 투-타 완벽에 가까운 활약을 보였다.[15] 타선에서는 박재홍-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타선은 실로 위력적이었고, 97년 트레이드 충격으로 입단 첫해 부진했던 전준호는 트레이드 충격을 딛고 1998년 시즌에 확실한 1번타자로 활약한다. 투수면에서는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한 정명원의 화려한 부활등 힘입어 정민태-정명원-위재영-김수경-최원호 1~5선발 전원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등 1998년 정규시즌은 엄청났던 해였다.

그리고 이 때도 어김없이 현질을 했는데, 시즌중 6억원에 쌍방울에서 조규제 투수를 영입했다는 것이다.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4승 2패를 거두며 창단 첫 우승[16]을 거두어 인천연고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냈다.

1.2.4. 1999년: 투수진이 붕괴

이듬해 1999년에는 타선은 역시 강했으나[17], 투수진은 그야말로 처참히 개발렸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무너졌다. 이 시즌에는 에이스 정민태 혼자서 다 버텨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정민태 이외에 선발투수들은 처참히 무너졌다.[18] 그럼에도 정규시즌 5위(당시 양대리그 체제였으니 4팀 가운데 3위) 기록했다.

시즌 끝나고 그 시즌 부진했던 LG 외야수 심재학을 영입했으며, 투수 최원호가 LG로 이적했다. 또한 지명권트레이드로 2차 1픽으로 지명된 마일영 투수를 쌍방울에서 5억에 사왔다.

1.3.1. 2000년: 뜬금없는 시즌전의 연고지 이전

비록 1997년과 1999년 시즌 그다지 썩 좋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삼미-청보-태평양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음에도 매년 눈에 띄게 줄어드는 관중 때문에 2000년 1월에 현대그룹에서 갑자기 돌연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을 서울로 연고이전 추진하겠다'고 선언을 하게 되었다.[19] 그후 인천-경기-강원권의 연고비용으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단을 기반으로 창단한 신생팀 SK로부터 54억 원을 받고, 연고이전을 추진하게 된다.

결국 현대그룹은 여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연고이전을 강행, 여기서 많은 경인지역 팬들이 실망감에 빠지고 분열되면서 크게 갈라져버려 기존 팬 전체의 약 3분의 1 정도 규모까지 줄었다. 당시 많은 팬들이 그만큼 충격과 실망감이 얼마나 무척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 기존의 인천 연고지역 팬들은 SK로 간 경우가 많고, 기존의 비인천권(주로 서울, 경기, 강원 지역) 팬들은 현대로 남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원래 이들 사이는 같은 한 지붕에서 응원하고 같이 웃고 울던 관계였는데, 지금은 서로 증오하고 이를 갈고 싸우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서술했듯 현대 기업이 연고지 이전을 추진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9년 개막전. 전년도 우승까지 한 팀임에도 불구하고 개막전 관중석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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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두고 일부에서는 1999 시즌 자체가 IMF의 여파로 야구인기가 사그라들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정작 위의 표와 그래프를보면 99년은 95년 이래 처음으로 야구 관중 수가 상승세를 기록한 해였다. 실제로 1998-1999 사이 팀별 관중 보면 저 사이에 관중 수가 줄어든 구단은 오로지 현대와 쌍방울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대가 전년도 성적이 씹망이었던것도 아니며 1998년은 현대가 인천야구 사상 처음으로 우승 한 해였다. 1996년에도 현대는 정규리그&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이었고 그 이전인 94년에도 태평양으로 정규리그&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룩했다. 이 쯤 되면 맨날 져서 안 간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다 보면 언젠가 이기겄쥬 실제로 태평양 준우승 다음해인 95년에는 여전히 40만명대의 관중을 기록했고, 1996년에는 리그 전체 관중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현대 관중은 오히려 늘었다. 결국 1996년의 475,910명을 기점으로 현대그룹은 이미 인천에서 더 이상의 관중동원은 힘들다고 판단한 것. 1989~1998년 사이의 관중집계에 수원야구장이 포함된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삼청태현이 사상 최고의 흥행을 이룩한 1994년이 바로 수원야구장 경기가 21경기로 늘어난 해였다. 이미 태평양 시절부터 인천에서의 관중동원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그 부족분을 수원에서 보충하려 했었다는 추론마저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인천의 낮은 관중 동원 능력은 도원구장의 열악한 시설과 교통 때문이며 이는 최신 문학야구장이 들어서면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막말로 우승을 해 와도 좁아터진 도원야구장조차 제대로 못 채우는 도시에서 거대한 문학야구장을 채울만한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까? 당장 동시기에 꼴데롯데 자이언츠는 그 거대한 사직야구장에 1997-1998년 연속 연간 고작 40만여명밖에 동원하지 못하면서 텅 빈 큰 야구장의 공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몇 년 후엔 10만명대까지 떨어졌지...., 광주, 대구 또한 열악한 야구장 상황에 불만만 많다가 연간 관중이 50만을 돌파한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신구장 건설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최신 문학구장조차 2006년까지도 도원구장과 비슷한 관중동원능력을 보여준 것을 보면 단순히 야구장 문제가 아닌, 인천야구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찾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도원구장 교통이 안 좋지도 않았다. 도원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5분거리잖아....

1999년이 인천 경제를 떠받치던 대우그룹의 몰락과 그로 인한 지역 내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인천 지역 관중 동원능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라고 하지만, 반대로 한두 대기업의 몰락으로 도시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미약한 지역에서그것도 250만 거대도시가! 안그래도 저소득 상황에서 무리하게 출범한 프로야구의 흥행은 더더욱 바라기 힘들어진다. 어쨌거나 현대그룹은 현대 유니콘스의 성공을 위해 무려 470억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은 판이었고, 특히 야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는 1998년 LG전자 반도체사업부 인수 이후 경영상황이 꾸준히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몇 년을 두고 길게 투자할 것을 바라는 것도 무리다. 오히려 야구단을 냉큼 팔아넘기지 않고 연고지를 옮겨서라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을 기특하게 생각해줘야 할 판이다. 인천 연고 팔아넘기고 무주지에 무료로 입성할게 아닌 이상 연고지 옮겨서 돈 벌어가며 유지할꺼라고 생각한게 가능할리 없지만. 목표인 서울구단 드립해도 이미 연고구단이 2갠데? 더불어 서울은 현재 시점에서 프로야구팀 세 개 써도 잘 돌아간다.

게다가 그 시절 인천시청의 한심한 프로구단 지원은 인천 스포츠 팬들 사이에선 악명이 자자했고, 실제로 인천 연고의 스포츠 구단들 치고 상태 좋은 구단 찾기가 힘들다.[20]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신구장이 건설된다 한들 현대가 인천에서 과연 비전을 찾을 수 있었을까? 오죽하면 이후 인천에 들어온 SK 와이번스가 인천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문학야구장을 마음껏 리모델링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으로 인천 민심이 한껏 격앙된 덕분이라는 분석까지 나올까.
1.3.1.1. 연고지 이전은 과연 최선이었는가?
물론 1999 시즌 당시 관중수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1998 시즌에 가장 적은 관중 감소폭을 기록한 팀 또한 바로 현대 유니콘스였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외지인이 많은 인천 인구의 특성상, 이를 관중수 증감과 단순 대입하는 것이 크나큰 무리가 있다는 것 쯤은 인천 야구팬이 아니라 야구를 오래본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도원구장은 광주구장보다도 더 오래되고 낡은 구장이었다[21].

특히 1999년 관중 감소의 직접적 영향 중 하나였던 인천지역의 경기침체는 요소는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요소였다. 비록 대우그룹은 부도를 맞았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인 자동차 부분은 매각이 될지언정 인천을 떠날 일은 없었고 이 부분이 정상화되면 인천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다른 그룹도 아니고 현대그룹이 그걸 모를 리가! 게다가 문학야구장과 연계되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연선에는 계산지구나 연수지구 등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인데다가 이런 아파트단지 주민들은 어느정도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들인 만큼 신규 수요를 창출할 여지도 많았다. 당장 송도신도시부터가 이 시기에 이미 한창 추진중이었다.

결정적으로 2002년 문학야구장의 개장 당시 SK는 402,732명의 관중수를 기록하였고 2001 시즌의 178,645명보다 무려 2.3배나 증가한 관중수를 기록했다. 당시 2002 시즌 SK가 야구를 잘 하기나 했나? 이는 열악한 도원구장의 상황 역시 관중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데이터라고 볼 수 있다.[22] 무엇보다 새로 짓고 있던 문학야구장의 토대를 다진 건 다름아닌 현대 유니콘스였다. 그리고 지네가 안쓰고 RUN

사실 이 문서나 현대 피닉스 문서 등을 보면 현대그룹 자체가 야구판에서 여러번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은 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야구 원년에 야구판에 뛰어들 수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하여 삼미와 같은 듣보잡 기업에게 드넓은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내주었고, 이후 왕회장님의 정치 놀음으로 그룹이 결딴날 위기에 처하자 부랴부랴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야구판에 뛰어들려다가 실패하자 현대 피닉스를 만들어 야구계 질서를 흐트려놓고 여러 선수 인생 조지는가 하면, 간신히 프로야구에 진입한 이후에도 엄청난 현질로 리그에 거품을 일으킨 주범이 바로 현대다. 현대가 분명 초기에 엄청난 자금을 야구단에 쏟아붓기는 했지만, 그 엄청난 돈을 아껴 눈앞의 성적 대신 긴 호흡으로 인천에서의 정착을 택한다는 선택지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따지고보면 급작스런 연고지 이전의 이면에는 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의 경영 악화가 있었고, 그 현대전자의 위기는 또한 현대그룹과 한국 대기업 특유의 문어발식 확장과 정경유착으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은 현대왕회장님 특유의 근시안적인 조급증이 현대, 그리고 그 역사에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후대의 팬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일 뿐. 실제로 SK 와이번스의 인천 연고와 현대 유니콘스의 수원 이전 결정이 있은 다음 날에 현대그룹 분열의 시발점이 된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니.

만일 이 때 연고이전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한 팀을 응원하던 팬들이 분열되어 싸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1차지명권을 잃은 후 경기•인천팜이 엄청나게 흥하였던 것도[23]더 아쉽게 느껴질수밖에 없는 이유중 하나이다.[24]

1.3.2. 2000년: 수원으로의 연고이전, 두번째 우승 그리고 무너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시즌 전에 전문가들로부터 '중위권팀'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자 우승후보 전문가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그 해 투-타 밸런스가 98년때보다 훨씬 완벽한데다[25] 선수단 구성도 매우 우수한 선수들이 많아 그해 정규시즌 승률 0.695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낸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4승3패로 우승.[26] 2000년 현대의 막강함은 이 글을 보라. #[27]

그러나, 2000년 현대는 최고의 한해를 보낸 동시에 가장 힘든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원래 현대그룹의 계획은 연고가 있었던 수원야구장에서 대략 3~4시즌 정도를 치르면서 그 사이에 서울에 전용구장을 확보, 서울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목동야구장의 증·개축을 시도하였으나 그 비용이 200억 이상으로 추산되자 신축으로 가닥을 잡았고 상암동에 25,000석 규모의 전용구장을 지어 이전하려 하였다.기사 그러나 이 직후 현대그룹의 분열과 정주영 명예회장의 타계 등 그룹에 악재가 줄줄이 겹쳤다.

게다가 모기업 하이닉스(구 현대전자)가 부도위기를 겪고 있다는 이유로 서울입성비용 54억을 가로채 써버렸다. 특히나 이 돈은 신생 인천연고팀인 SK 와이번스가 기존연고팀에 대한 연고침해보상비로 건넨 비용[28]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임시연고지였던 수원은 명목상(왜 명목상인지는 아래 각주 참고) SK 와이번스의 연고지이자 제2구장이었으므로, SK 와이번스의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주고 연고지는 연고지대로 침해받는 뚜껑 열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29] 이후 모기업 하이닉스는 2001년부터 2007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기까지 단 한푼의 지원금도 주지 않았다.[30] 심지어 현대자동차그룹에서 2001년 인수를 제안했으나 인수금액 900억드립을 쳤고, 결국 제안을 철회하고 해태 타이거즈인수로 방향을 돌렸다.

결국 모기업인 하이닉스가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원금 없다'고 GG를 치게 되고, 2001년 이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범현대가의 지원금으로 근근히 버텨왔으나 2003년 구단주 정몽헌 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 유니콘스 구단주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이후 정몽구 회장이 그룹 사정을 이유로 지원을 끊은 2007년부터는 선수들 연봉 지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KBO 기금으로 구단을 운영하게 되었다.[31][32]

이처럼 현대 유니콘스의 서울 연고이전은 대주주 하이닉스의 무책임한 행태로 인해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기존 팬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연고이전을 추진했던 현대그룹 고위간부들은 뒷날 2005년, 구단이 어렵게 되자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대거 빠져나가버렸다(…). 이후 8개구단 체제 유지와 현대구단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등을 감안해 KBO는 2007년부터 도시연고제를 시행하였다.[33] 하지만 수원연고로 전환해서 정착하기에도 너무 많이 늦은 상황이었다.

서울 입성 실패는 재정적인 문제 외에도 유니콘스를 괴롭혔는데, 현대는 수원구장을 잠시 임차점거[34]하는 상황이라 정식적인 연고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003년 드래프트부터 1차 지명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한 팀 뎁스의 약화는 이후 현대 선수단을 인수한 히어로즈가 극심한 전력저하에 시달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위라운드도 아니고 무려 6시즌동안 1차지명을 못 뽑았으니....[35] 히어로즈 약체화의 1차적인 원인은 넥센마켓폭풍 선수매각이었지만, 사실 선수매각은 주로 투수진 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야수진에서 넥센마켓이 판매한 사례라면 이택근황재균 정도가 전부다.그나마도 한 명은 돌아왔고 조평호, 김민우, 신현철은 2차드래프트 40인 외 지명을 통해 이적, 지석훈차화준NC 다이노스로 트레이드[36], 김남형, 전민수가 부상으로 방출되면서 팀을 떠났으니 이들은 사실상 유의미한 전력이라고 보기 힘들고, 이 정도의 전력이탈은 다른 팀들도 일상다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 넥센 히어로즈는 눈뜨고 못 봐줄 물빠따를 선보였고, 결국 그 공백은 트레이드와 자체육성을 통해 간신히 메울 수 있었다. 단적인 예로 2015년 현재 강정호의 미국 진출 이후로 내야진에 현대 출신 선수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고, 유재신....이 내야수일까?, 이숭용의 후계자인 박병호는 그의 은퇴 직전에서야 트레이드를 통해 간신히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외야진은 현대 출신은 이택근유한준이 있지만, 그 다음 서열은 유틸리티 플레이어인 트레이드 출신의 서동욱과 이성열 정도를 제외하면 바로 박헌도까지 내려가버린다.이종욱을 왜 내보내셨어요? 오히려 그나마 현대 출신들을 좀 찾아볼 수 있는 쪽이 융짱문오납 투수진, 허도환에 열광해야 했던 포수진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팀사정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정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한 원동력이 된 바탕은 구단만의 특한 가족같은 분위기 형성이 가장 큰 밑바탕이 되었고, 이는 넥센 히어로즈에서도 이어진다.

1.3.3. 2001년: 빈약해진 선수층에도 4강진출 성공.

2001년 시즌 전부터 투수진에서 이탈이 발생했다.
정명원이 현역은퇴했으며, 철벽계투 조웅천+조규제는 신생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15억원에 SK로 트레이드 되어야했다. 또한 에이스 정민태가 해외진출을 결심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임대되었다.

야수진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팀의 주포인 외야수 심재학이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상대는 외야수 심정수인데, 이 선수는 심재학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리며 활약하게 된다. 그 외에도 백업포수인 장광호를 5천만원에 SK에서 트레이드해왔고, 백업 내야수인 염경엽이 현역 은퇴를 했다.

시즌 개막전에는 정명원염경엽의 은퇴식이 수원 야구장에서 열렸다.

또한 시즌 초반에는 계투진에 자리가 없던 최영필+김홍집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면서 선발감으로 쓰기위해 좌완 이상열을 한화에서 영입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구단이 돈이 없었던지라, 정민태의 임대료+조웅천,조규제의 트레이드머니를 털어서 구단을 운영했다.

이 시즌은 임선동이 선발진에서 분전했지만, 4점대 방어율을 찍어서 에이스라 보기엔 모자랐다. 특히 정민태의 공백이 너무나 컸고, 김수경은 부진했다. 그 외에도 마무리 위재영의 부상과 박종호의 타율이 2할 4푼으로 추락하는 등의 악재가 있었다. 시즌은 정규리그 2위로 마감했지만, 그 해 두산에게 밀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2군의 무명투수 송신영이 발굴된 것과 신철인의 활약이 큰 소득이었다.

시즌 끝나고 김인호이명수가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백업포수인 이재주가 기아 타이거즈로 현금트레이드 되었다.

1.3.4. 2002년: 또 4강만 가면 광탈

2002년은 정규리그 3위로 마감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밀려 또 일찌감치 4강권에서 탈락했다.

한편 시즌 끝나고 주전포수인 박경완이 FA를 선언하면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중심타자인 박재홍기아 타이거즈정성훈+10억에 트레이드 되면서 팀 전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수공백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입단하는 이택근과 SK에서 방출되어 무적선수였던 김동수를 영입해 해결했
할 예정이었고, 중견수,중심타자 자리는 이숭용이 맡게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 해부터는 부상으로 추락한 위재영을 대신해 대졸신인 조용준이 마무리 투수로 뛰게된다는 것이었다. 조용준은 이 해부터 신인상을 받으면서 주전 마무리 자리를 굳혔다.

1.3.5. 2003년: 정민태의 투혼, 그리고 우승.

2003년에는 에이스 정민태와 4번타자 심정수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리그 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올라온 SK 와이번스와 상대를 하게 된다.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끝에 에이스 정민태의 활약[37]에 힘입어 3번째 우승을 하였다. 하지만 시즌 끝나고 주전 2루수인 박종호가 FA를 통해서 삼성으로 이적함에 따라, 김일경이나 서한규,채종국같이 박종호에 비해서 뭔가 모자란 선수들이 센터라인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시즌 끝나고 투수 권준헌한화 이글스로 가고, 외야수 송지만이 현대 유니콘스로 오는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물론 현대가 압승을 거둔 트레이드였지만, 차라리 내야수를 받아왔어야 한다는 의견이 트레이드 초기에 있었지만[38] 송지만이 잘해주다보니 그런의견들이 없어졌다.

1.3.6. 2004년: 왕조의 마지막 우승

2004년에 두산,삼성과 같이 치열한 선두권경쟁을 하던 끝에 정규시즌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라이온즈를 맞아 역사상 유례없는 명승부를 보였다. 4승 3무 2패.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11월 1일 열린 9차전에서 극적으로 우승함으로써 4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39]

하지만, 2004년 우승이 현대의 마지막 우승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시즌이 끝난 뒤 주축선수 박진만과 심정수가 FA를 선언, 삼성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특히 박진만의 삼성 이적은 구단은 물론 팬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치명타였다. 그 후유증은 히어로즈로 바뀌고서도 강정호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계속되었으니 상당히 치명적인셈. [40]

한편 이 시기에 위재영이 구단과의 불화를 통해 방출되었고, SK에 입단하여 현대팬들과 아예 등져버린 사건이 생겼다.[41]

그리고 2004년 이후로 매년 억대연봉을 수령하던 정민태가 1승도 못거두고 사라진걸 생각하면 악재가 한꺼번에 덮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조용준도 2005년 이후로 폭망했으니.... 망했어요

돈지랄로 흥한자, 돈지랄로 망하리라

1.3.7. 2005년: 진만이도 없고, 정수도 없고...

결국, 유격수 공백으로 2005년 시즌에는 내야진의 실책 연발과 체력저하 등으로 부진에 빠졌다. 시즌 중반까지만해도 4~5위를 하면서 나름대로 분전했으나, 후반으로 가면서 막장화하면서 7위를 기록. 이는 구단 인수이래 최하위 성적이다.

이 시절 5~8위팀은 모두 엘롯기였으니[42] 큰 굴욕이었다.

그나마 뒤늦게 황두성의 포텐이 터졌으니 다행이랄까?

1.3.8. 2006년: 유니콘스 마지막 가을야구

그 다음해인 2006년, 현대는 전문가들 사이에 가장 유력한 꼴찌후보로 거론되었다. 시즌 개막전 이래 4연패하는 등 매우 부진했지만 5월달에 갑자기 치고올라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와 삼성, 한화와 더불어 선두를 다퉜다. 결국에는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화이글스 상대로 1승 3패로 패하고 3위로 마감하게 된다.

이 시기의 소득은 신인선수들 이었는데, 하위픽으로 점찍어 놓았던 투수 장원삼이 대학에서 에이스가 되어서 억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이종범 이후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인 강정호가 이 시기에 입단했다. 또한 ,황재균,이현승이라는 준수한 선수들과 합법유망주 김영민 입단한 것도 이 시기의 일.

1.3.9. 2007년~2008년: 왕조의 멸망

2006년 이후 그나마 지원하였던 현대가에서 지원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운영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서 현대 유니콘스 고문 이사이자 현대해상 회장인 정몽윤이 KBO 총재를 직접 찾아가 구단 매각을 요청하게 된다. 2007년 1월 16일, "하이닉스의 경영 부진을 위해 농협중앙회에 야구단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1월 19일, 농협 측은 농민 등 여론의 반발을 이유로 인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되면서 현대 구단은 지원 한푼도 없이 KBO로부터 위탁 운영[43]을 받게 되면서 2007년 시즌을 치러나가게 되었다. 2007년 시즌 개막 3연전부터 3연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매우 심각한 부진에 빠지게 된다. 4월 말까지만 해도 7연패를 겪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연패를 끊은 이후부터 5월과 6월에 치고 올라가 한때 4위권 내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시즌 중에 용병투수 미키 캘러웨이가 부상으로 이탈함으로써 선발 투수진이 붕괴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즌 내내 투-타 불균형 엇박자가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단들은 포기하지 않고, 프런트의 지원과 열정속에 구단 특유의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끝까지 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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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아래쪽이 이 시절의 현대 유니콘스다[44](윗쪽은 당시의 LG 트윈스).[45] 얼마나 사정이 어려웠는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진이다…는 훼이크고, 사실 현대는 창단 때를 제외하고 매년 시즌개막 전에 신년회를 갈빗집에서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2007년 10월 5일 고별경기를 0:2로 승리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며 페넌트레이스가 끝난 시점에서, 팀 내외적으로 '현대'라는 이름을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정규시즌 6위였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거둔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처음 농협이 유력한 인수 대상자로 떠올랐으나 검찰 수사로 궁지에 몰려있던 경영자 측이 정권의 도움을 바라며 내린 독단적인 결정이었음이 밝혀져 파토[46], 이어 KT의 인수 떡밥이 있었으나 이 역시 논의가 진행되던 중에 어떤 파워블로거언론인과 KBO의 설레발로 노조와 주주들에게 알려져 무산되고 말았다.[47] 09년에도 한차례 인수 논의가 있었으나 기업 내부적으로 야구단 인수는 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07년에 STX 인수 떡밥도 있었으나 그룹 고위층이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고 또 두산 그룹과의 기술 유출을 둘러싼 대형 소송에 휘말리면서 또 무산되고 말았다[48].

네오플에서 인수를 희망했으나[49] 1월 중순,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에서 창단 의사를 밝힘에 따라 우여곡절 끝에 현대는 해체되고, '히어로즈'란 구단명으로 새로 창단하면서, SK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인수지만 공식적으로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지는 계보와 우승기록은 영원히 사라졌다.

3. 역대 등번호

4. 역대 선수

4.1. 투수

가내영 47(1996~1998)
민범 67(1996~1997)
김성태 45(2002-2007)
김수경 30(1998-2007)
김영민 50(2006~2007)
노환수 43(2003~2007)
김홍집 11(1996-2001)
마일영 29(2000-2007)
배힘찬 21(2002~2007)
박장희 60(1999~2007)
박정현 21(1996-1997)
박준수 49 - 27(2000-2007)
손승락 21(2005-2007)
송신영 14 - 19(1999-2007)
신철인 23(2000-2007)
안병원 29(1996-1998)
오재영 59(2004-2007)
이대환 33 - 59 - 55(2002~2007)
이동학 65(2000~2007)
이보근 42(2005~2007)
이상열 11(2001~2007)
이현승 29(2006~2007)
위재영 18(1996-2004)
임선동 54(1999-2007)
장원삼 55(2006-2007)
장효훈 18(2007)
전준호 61(1996-2007)
정명원 28(1996-2000)
정민태 20(1996-2007)
조규제 21 - 27(1998-2000,2003)
조용준 51(2002-2007)
조용훈 57(2006-2007)
조웅천 41(1996-2000)
최영필 36(1997-2001시즌중)
최원호 45(1996-2001)
최창호 31(1996-1998시즌중)
황두성 41(2001-2007)

4.2. 포수

강귀태 12(2002-2007)
김동기 35(1996-1997)
김상국 2(1996-1997)
김동수 2(2003-2007)
박경완 26(1998-2002)
김필중 26(2003-2004)
광호 25(1996-1999,2001)
허웅 24
허준
유선정
임태준 26

4.3. 내야수

강기웅 34[50]
강정호 25 - 17 (2006~2007)
권도영
권준헌 55 (1996~2003)
김경기 00(1996-2000시즌중)
승권 14 (2006)
김일경 0 - 5(1997-2007)
김민우 3(2002~2007)
박종호 31(1998시즌중-2003)
박진만 7(1996-2004)
서한규 15(2001~2007)
염경엽 12(1996)-5(1997-2000) - [51]
이숭용 10(1996-2007) - [52]
이재주 37(1996-2002)
정성훈 16(2003-2007)
정훈
채종국 15 - 9(1998~2000)
이명수 4(1998-2001)
차화준 7(2005~2007)
유재신
김남형 14(2007)
지석훈 6 (2003~2007)
홍원기 3 (2006~2007)
황재균 13 (2006~2007)
오재일 34 (2007~2008)
조중근
신현철
차훈 9
의식 36
근엽
스캇 쿨바 12
톰 퀸란 17(2000-2001)

4.4. 외야수

강병식 25 - 36 (2002~2007)
영수 44
김광림 16 - 33 (1997~1998)
김인호 8 (1996~2001)
박재홍 62(1996-2002)
심재학 14(2000)
심정수 44(2001)-32(2002-2004)
송지만 17(2004-2006)-25(2007)
윤덕규 3 (1996~1997)
이종욱 39(2003)
이희성 51(1996)
유한준 39 (2004~2007)
이승주
전근표 64 (2000~2007)
재호 13
이택근 42-31 (2003~2007)
전준호 1(1997-2007)
정수성 8(2001-2007)
장기영 47 (2001~2007)
최만호 24(1997)
최익성 22 - 33(2002시즌중-2003)
클리프 브룸바 24 (2003~2004, 2007)
리 서튼 33 (2005~2006)
오윤 32 (2000~2007)

4.5. 역대 외국인 선수

  • USA : 미국
  • DOM : 도미니카 공화국
  • VEN : 베네수엘라

년도 이름 국적 포지션
1998 스트롱(Joe Strong) USA 투수
스캇 쿨바(Scott Coolbaugh) USA 내야수
1999 디 피어슨(Eddie Pearson) USA 내야수
지 카날리(George Canale) USA 내야수 시즌중 방출
렌트 바워스(Brent Bowers) USA 외야수 ↖ 대체 영입
2000 톰 퀸란(Tom Quinlan) USA 내야수
디 윌리엄스(Eddie Williams) USA 내야수 시즌중 방출
릴 브링클리(Darryl Brinkley) USA 외야수 ↖ 대체 영입, 시즌중 방출
스 카펜터(Charles Carpenter) USA 외야수 ↖ 대체 영입
2001 리 테일러(Kerry Tayler) USA 투수
톰 퀸란(Tom Quinlan) USA 내야수 시즌중 방출
J. R. 필립스(J. R. Philips) USA 내야수 ↖ 대체 영입, 시즌중 방출
스카 엔리케스(Oscar Henriquez) VEN 투수 ↖ 대체 영입
2002 키 토레스(Melqui Torres) DOM 투수
리 폴(Corey Paul) USA 내야수
리오 베라스(Dario Veras) DOM 투수 시즌중 방출
이클 프랭클린(Michael Franklin) USA 내야수 ↖ 대체 영입
2003 인 바워스(Shane Bowers) USA 투수
이클 프랭클린(Michael Franklin) USA 내야수 시즌중 방출
클리프 브룸바(Cliff Brumbaugh) USA 외야수 ↖ 대체 영입
2004 클리프 브룸바(Cliff Brumbaugh) USA 외야수
이클 피어리(Mike Fyhrie) USA 투수
2005 리 서튼(Larry Sutton) USA 외야수
미키 캘러웨이(Mickey Callaway) USA 투수
2006 리 서튼(Larry Sutton) USA 외야수
미키 캘러웨이(Mickey Callaway) USA 투수
2007 클리프 브룸바(Cliff Brumbaugh) USA 외야수
미키 캘러웨이(Mickey Callaway) USA 투수 시즌중 방출

5. 역대 성적(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 포함)

드 = 드림리그, 매 = 매직리그
연도순위/팀숫자팀이름경기수승률
19826/6삼미80156500.188
19833/6100524710.525
19846/6100385930.392
1985[53]6/6삼미 / 청보110397010.358
19866/7청보108327420.302
19877/7108416520.389
19887/7태평양108347310.319
19893/7120625440.533
19905/7120585930.496
19915/8126556920.444
19926/8126566730.456
19938/81263482100.310
19942/8126685530.552
19957/8126487350.401
19962/8현대126675450.552
19976/8126517140.421
19981/8126814500.643
1999드3/4132685950.535
2000드1/4133914020.695
20013/8133725740.558
20024/8133705850.547
20031/8133805120.611
20041/8133755350.586
20057/8126537030.431
20063/8126705510.560
20076/8126566910.448

6. 그 외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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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니와 짝을 이룬다.
  • [2] 우리 히어로즈로 선수단과 프런트만 승계(해체)후 재창단. 우회상장 비스무리하게 재창단했다.
  • [3]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공석. 구단주 대행은 강명구
  • [4] 본래는 현대 유니콘스의 사장이 강명구였고, 단장이 김용휘였다. 그러나, 2003년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뜨고서 강명구 사장이 구단주대행을 맡고, 김용휘 단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 [5] 첫 번째 왕조는 1983년부터 1997년까지 9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9번 모두 우승을 차지했던 해태 타이거즈
  • [6] 다만 이동학의 사례에서 보듯 2003년은 두각을 나타낸 신인 자체가 보이지 않은 신인흉년의 해였다. 또 다른 신인왕 후보라 해봐야 이택근이 있었는데 이택근도 신인왕을 받을 성적은 전혀 아니었다.
  • [7] 그래도 조용준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기도 했었고, 오재영싸융짱문오에 포함될 정도가 되긴했어도, 어쨌든 잘 활약해주고있다. 반면에 이동학은 2009년 방출되어, 한화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거기서도 방출되어서, LG에 입단, 결국 2014 시즌중 방출됬다.
  • [8] 사실 인천에서도 1996년을 제외하면 평관 4~5천명 정도로 관중 동원면에서 리그 중하위권 수준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 [9] 하지만 1984년 울산 현대 축구단을 창단하면서 프로축구에는 참여했다.
  • [10] 1970년대부터 재벌들에게 스포츠 종목을 강제로 할당해서 협회 회장을 맡게했다. 이후 재벌들이 회삿돈으로 스포츠단체를 운영하면서 국제대회 성적을 책임지게 된다. 국가예산으로 해야할 스포츠진흥을 재벌에 떠넘긴 것이다. 이때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 - 대한수영연맹 회장, 정몽구 - 대한양궁협회 회장이었다. 양궁협회 회장은 현재 정몽구 회장의 큰아들 정의선 씨가 하고 있다. 삼성 - 레슬링, 두산 - 유도, 한화 - 복싱 등 지금도 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이 이런식이다.
  • [11] 이 와중에 울산 지역의 유일한 고교야구 팀으로 창단했던 현대공업고등학교 야구부가 지역 야구의 취약한 기반을 이겨내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 [12] 다만 박진만은 공식적으로는 체육특기자 수능 점수 상한선인 40점을 넘지 못해 진학이 좌절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 [13] 창단 초인 1996년의 현대는 김경기나 신인 박재홍을 제외하면 태평양 시절과 별 다름없는 물타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은 말 그대로 답이 없었다. 반면 투수진은 태평양 시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 첫 노히터를 기록한 정명원을 비롯한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다. 즉 타선의 힘보다는 투수진에 힘입어 겨우 4위를 하게 된 것. 특히 타선이 우수한 잠수함 투수 상대로 고전하는 일이 많았다.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의 이강철에게 2승 1세이브를 헌납하면서 무너진게 패인.
  • [14] 전준호 영입 이전만 해도 현대에서 1번타자는 김인호였다. 김인호는 근성하나는 강한 선수였지만(단적인 예로 1996년 포스트시즌 1차전 때 정민철의 볼에 일부러 맞다시피하며 출루하려 했다), 타율이나 장타면에서는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1번 타자로 활약하기에는 부족했다. 전준호 트레이드에 대해서 지금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1순위'로 꼽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롯데측 입장에서는 '전준호는 나이도 있고 기복이 심한 선수'라는 인식때문에 계륵같은 존재로 여겼고, 거기다 연봉협상에서 고작 몇백만원 더주기 싫은 것도 있었다(…). 당시 롯데는 전준호 대체로 젊은 유망주였던 김대익을 크게 기대했으나 주루가 시망.... 김주찬이 올 때까지 거의 5년 동안 제대로 된 리드오프가 존재하지 않았다.
  • [15] 하지만, 유일한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마무리투수 용병 조 스트롱. 6승 5패 27세이브로 스탯상으로만 보면 괜찮은 성적으로 보이지만 겨우겨우 세이브를 따는 모습을 보였으며 Whip(피안타율)이 1.60이나 되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올 때마다 맨날 불만 질렀다(…). 결국 한국시리즈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중에 메이저리그도 잠깐 밟기도 했다.
  • [16] 당시 LG는 태평양-현대전에 특히 강했고, 현대 입장에서는 LG하고 상대하는걸 극히 꺼려했다. 플레이오프 LG-삼성전에서 현대팬들은 삼성이 이기길 내심 바랐다. 그러나 LG가 승리하고 한국시리즈 진출. 한국시리즈 시작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LG가 이길 거라고 예상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민태, 박재홍의 맹활약에 힘입어 4승 2패로 우승.
  • [17] 타선에 베테랑 김경기가 시즌 중 부상으로 전력이탈된 것과 3루수 공백 이외에는 타선이 강했다.
  • [18] 김수경이 그나마 나름대로 버텼긴 했지만, 2년차 징크스가 좀 있었다.
  • [19] 알려진 것과 다르게 구단에선 연고이전을 할 계획이 없었다. 문학야구장을 사용하려 했었고, 건설 당시 설계 변경을 요구하기도 했다..
  • [20] 1983년 창단한 유공 코끼리는 1984년 서울로, 1984년 창단한 현대 호랑이 축구단은 1990년 울산으로 연고를 이전했고, 대우 제우스에서 시작해 이어져오는 개그랜드인천 연고 농구단은 삼산체육관이 건설되기 전인 2006년까지 부천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쓰는 판이었다. 남자배구의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도 도원체육관에서 어찌어찌 버티다가 계양체육관으로 이전, 여자농구 금호생명 팰컨스는 도원체육관 시설을 견디지 못해 아예 소도시인 구리로 이전해버릴 정도였다. 2014년 신한은행 에스버드가 안산을 떠나 인천으로 오면서 도원체육관을 다시 쓰고 있지만.
  • [21] 다만 설계도조차 사라진 광주구장에 비해 도원구장은 적어도 배수시설 개선 정도는 가능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쪽이 상황은 더 낫다고 할 수도 있다.
  • [22] 다만 어디까지나 '전년 대비 늘었다'는 수준이지, 최신 문학야구장과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이라는 훌륭한 인프라, 게다가 2003년 준우승과 2005년 3위라는 호성적을 가지고도 여전히 도원야구장 시절처럼 30~40만 사이에서 널뛰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SK 와이번스가 마의 50만 벽을 돌파한 것은 문학야구장 입주 6년차인 2007년에서야 가능했고, 그나마도 팬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무료표와 단체관람으로 출혈 마케팅을 감내해야 했다. 막말로 지금 야빠들이 괜히 연간 90만에 이르는 SK 와이번스의 관중 동원능력을 사상누각이라며 폄하하는 게 아니다. 물론 14년 기준으로 객단가는 8천정도로 올랐고, 관중 동원력은 LG-두산-롯데 다음이다. 객단가*인원수 해도 평균~중상위권.
  • [23] 송은범, 윤석민, 최정,류현진,김광현등이 튀어나왔으니까. 그 뒤로 중3 이후의 유급생, 타 구단 연고지역 출신 전학생 1차지명 불가 및 전면 드래프트 시행으로 SK는 2013년 1차지명 부활 전까지 지역 팜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하지만.
  • [24] 사실 연고이전 직전에는 고졸 우선지명으로 입단한 박진만을 제외하고는 희한하게 1차지명이 다 실패하였다. 그래도 그와중에도 현대는 3년연속 신인왕을 배출하였다. 거기다 06드래프트의 선수들은 7픽까지 전원생존중. 후덜덜
  • [25] 포수 박경완, 1루수 이숭용, 2루수 박종호, 유격수 박진만, 3루수 퀸란, 좌익수 전준호, 중견수 박재홍, 우익수 심재학, 지명타자 윌리엄스(윌리엄스도 장타도 있고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잔병치레가 많아서 시즌 중 퇴출된다) 등 내야 수비진이 ㄷㄷㄷ했다.
  • [26] 1차전~3차전까지 일방적으로 이겼으나, 4차전부터 6차전까지 두산의 극적인 추격으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사상 초유의 리버스 스윕이 나오는가 했으나, 7차전은 수원야구장을 가득 메운 두산 팬들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3루수 톰 퀸란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
  • [27]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때는 어느 누가 현대 감독으로 앉혀놔도 우승은 기본!' 이렇게 인지하는데, 당시 2000년 시즌 시작 전에만해도 현대가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성적을 낼 것이라 기대했던 이는 보기 드물었다.
  • [28] KBO에서 책정한 SK 와이번스의 가입비는 250억원이었고, 이 중 쌍방울에 대한 선수보상비 70억을 제외한 180억 중에서 기존연고지팀에 대한 보상비용으로 30%인 54억을 현대 유니콘스에게 지불했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우 이 비율이 20%였는데, 현대는 이전대상지인 서울에 2개 팀이 있어 30%로 상향했다.
  • [29] 그래서 일부 SK팬들은 이 비용을 현대 야구단이 운영자금으로 썼다고 주장했지만 자금을 가로챈 것은 모기업인 하이닉스였고, 01년 당시 구단 운영금은 정민태의 요미우리 임대료였다.
  • [30] 자금난에 처한 현대전자는 대주주로 운영했던 현대 농구단을 매각했고, 야구단은 거들떠볼 겨를도 없었다.
  • [31]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미 2001년에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같은 리그에 2개팀을 지원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을 빼야만 했다. 포스코 역시 같은 리그2개 팀을 운영하는데, 이쪽은 그나마 포스코 아니면 투자할 기업도 없으니 리그 내에선 아무도 군말 안하고 있는거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틈만 나면 한 팀가능하면 두 팀 다 없애라고 난리다.
  • [32] 앞에서 나왔듯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 [33] 광역연고제 하에서 현대 유니콘스는 남의 연고지에 더부살이하는 상황이라 SK 와이번스에게 돈을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 [34] 하지만 SK는 오로지 인천 SK만 외쳤지 경기•강원지역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KT 위즈가 창단하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명목상 SK의 제2구장이었을 뿐 홈 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수원에서 홈 경기를 하겠다며 인천 SK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SK가 수원 2구장 경기를 배정하는 순간 현대가 비켜줘야 했겠다는 사실도 있겠지만
  • [35] 기간은 6시즌이지만 2007 드래프트에서는 1차지명이 2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날려먹은 인원은 7명이다. 사실상 한 시즌 드래프트를 통째로 스킵해버린 꼴. 6라 이하 포기하는 걸 밥먹듯이 한 팀도 있는데 뭘
  • [36] 그나마도 조평호를 제외한 이적인원들은 넥센 히어로즈가 리그 상위권 팀으로 도약한 2013년을 전후해 빠져나갔다.
  • [37] 1,4,7차전에 선발로 나와 승리를 얻어냈고, 특히 7차전에서는 완봉승을 하였다. 정민태가 이렇게 활약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38] 참고로 이 시기의 한화 센터라인 내야수는 전설의 임과장님부터 시작해서 원바운드 송구의 재호, 3푼이 한상훈유격수 꽃범호 등으로 구성된 최악의 내야진이었다.
  • [39] 3번의 무승부 가운데 4차전에서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 노런이 나오기도 했다. 자세히 적자면 8회 2사까지 퍼펙트였다. 하지만 2사 후에 박진만에서 풀 카운트 승부끝에 볼넷을 주면서 퍼펙트는 무산되었고, 무승부가 되면서 노히트 노런도 공식 인정받지 못하고 말았다.
  • [40] 이 무렵 박진만이 현대공홈에 가서 글을 썼는데, 팬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박진만이 영원히 현대맨으로 남아주길 바랬던 마음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 [41] 대충 쉽게 생각하면 이범호가 FA로 기아 이적했을때 한화 팬들이 뭘 느꼈나를 생각하면 된다. 위재영은 SK에서 부활에 성공해 FA 계약까지 이끌어냈지만 이후 다시 추락해버렸다.
  • [42] 5위 롯데, 위 LG, 7위 현대, 8위 기아
  • [43] 이 때 KBO 입장에서는 선택을 해야 했는데, 과거의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우처럼 선수를 매각하고 운영자금을 줄여가면서 천천히 구단을 구매할 상대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선수단을 KBO의 자금으로 유지하면서 구단의 가치를 유지시켜서 매각으로 회수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리그의 파행운행 등을 고려했는지 KBO의 선택은 후자였고, 이것은 결국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후 매각 루트를 타면서 완전한 실패로 결론이 났다.
  • [44] 잘 보면 김시진 감독이나 김성갑 같은 코치들도 보인다.
  • [45] 참고로 위의 LG 트윈스 사진에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현대 유니콘스에서 몇년동안 감독을 했었던 그 분이다.
  • [46] 그리고 2012년 NH금융지주가 농협중앙회와 분리되면서 프로야구에 뛰어들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 [47] 다만 이에 관해서는 60억 헐값 매각에 대한 타구단의 반발과 잠실구장 사용이 불발된 것이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 [48] 결과론이지만 2013년 STX그룹의 운명을 봤을 때는 STX 인수가 무산된 것이 다행이었다.
  • [49] 당시 가지고 있던 빌딩에서 나오는 돈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하일성에게 제안을 하였으나 어떤 회사인지 잘 몰라 거절당하였다는 설이 있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KBO의 무능함 때문에 신상우체제의 KBO 인사들을 저주하는 구 현대팬들이 많다.
  • [50] 본인이 영원한 삼성맨이라는 자부심이 강했기에 현대로 오자마자 은퇴를 선언해버렸다.
  • [51] 2007년 당시 75번을 달고 수비코치를 맡았으며 후신격 팀인 넥센 히어로즈의 제3대 감독으로써 부임하여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다시 올려놨다.
  • [52] 히어로즈에서 은퇴. 정민태와 함께 팀의 프랜차이저 스타였던 인물이다.
  • [53] 전기리그에서는 삼미 슈퍼스타즈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