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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last modified: 2015-04-13 01:44:49 Contributors

역대 잉글랜드 국왕
튜더 왕조 튜더 왕조 튜더 왕조
헨리 7세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왕호 헨리 8세
(Henry VIII of England)
부친 헨리 7세
모후 요크의 엘리자베스
생몰년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
재위기간 1509년 4월 21일 ~ 1547년 1월 28일
대관식 1509년 6월 24일
서명

헨리 8세의 문장.

16세기 영국(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왕. 헨리 7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다.

장미전쟁으로 절멸한 랭카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1] 앤 불린과의 결혼에서 비롯된 갈등 등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함으로서, 이후 영국은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 못할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종교개혁, 그와 관련하여 국내외적으로 벌어진 격렬한 대립, 그리고 6번의 결혼 생활 중 2명의 아내가 그에 의해 처형되는 등 요란하기 그지없는 사생활 등, 그의 재위 기간(1509∼1547)은 여러모로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가득하여 오늘날에도 곧잘 회자되고 여러 창작 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등 이래저래 인기 많은 왕. "허세왕 할(Bluff king HAL)", "건장한 왕 해리(Burly king Harry)"라는 애정섞인(?) 별명이 있을 정도.

Contents

1. 잉글랜드의 폭군
2. 막장인가 정상인가
3. 헨리 8세의 왕비들
4. 매체에서의 헨리 8세
4.1. 튜더스에서의 헨리 8세

1. 잉글랜드의 폭군

젊어서부터 놀기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지만, 동시에 마르틴 루터에 대한 반박문을 손수 작성하기도 하는 등 가톨릭교황의 열렬한 신봉자이기도 했다. 훗날 그가 성공회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이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엔 여성적인 외모를 지닌 미남으로 스포츠와 춤과 음악에 능통하며, 당대의 석학이던 네덜란드라스무스조차 감탄할만큼 학문 수준도 무척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장애가 생긴 이후로는 예전과 달리 사냥과 스포츠 등을 즐길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방종한 생활태도와 과식으로 인해 엄청난 비만이 되었기에 그가 입던 옷에 젊은 남자 셋이 들어갔을 정도라고 한다[2].

개인적 성격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여서 기분이 좋을 땐 매우 너그럽고 호탕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짜증을 잘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하우스? 거기에 왕비를 둘이나 참수시키고 중용했던 관리들의 목까지 베어댔기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다.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했으며[3] [4] 나이가 들면서는 매독으로 인해 몸 곳곳에 종기와 수포가 자라 보기에 몹시 흉했으며 악취도 지독했다. 지금에야 드라마틱한 삶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궁정의 모두가 미친 왕이 빨리 죽기만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냥저냥 재위했다면 군사적 진흥 외에 대체로 허랑방탕하고 포악하게 재위하다 간 국왕 이상이 되지 못했을 그를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군주로 만든 결정적인 전환점은, 아마 냑 동맹을 결성해서 카를 5세를 배신해 어그로를 끌어버린 사건일 것이다.

헨리 8세는 원래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을 통치하며 프랑스와 대치하는 젊은 황제 카를 5세를 지지했었지만, 카를 5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를 캐바르고 프랑스 왕을 사로잡는 등 지나치게 잘 나가는 바람에 그만 경각심을 느꼈다. 그래서 잘나가는 놈은 일단 패고 본다는 유럽의 빛나는 전통(…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란 멋진 용어로 표현한다;)에 입각해 프랑스와 교황 편에 붙어 코냑 동맹을 결성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러고도 깨졌다는 거다(……).

동맹군을 짓부수고 로마까지 쓸어버린 카를 5세는 과거 반항하던 교황을 꼭두각시처럼 부리게 됐다. 헨리 8세에게도 불편한 감정이 오죽 없잖았겠느냐만, 이모인 캐서린이 헨리의 왕비였기 때문에 그냥 참아주었다. 그런데 헨리가 갑자기 이혼을 하겠단다. 드디어 폭발한 카를 5세는 자신의 꼭두각시가 된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 이를 절대 불허하게끔 압박했다.

아들을 꼭 갖고 싶었던 헨리 8세는 마침 애첩인 앤 불린을 좋아하고, 당시 캐서린은 아이를 낳기엔 힘든 나이인지라 이혼하려고 한 건데, 카를 5세 때문에 이뤄지지 않을 거 같자, 결국 수가 틀렸음을 절감하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성질머리 같아서야 아주 영국군을 대륙으로 보내 카를과 맞장이라도 뜨고 싶은 심경이었겠지만 워낙에 상대가 넘사벽이니까(…). 그래서 결국 교황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아예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해 스스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버렸다. 물론 헨리 8세가 오로지 이혼허락 안해주는 교황이 싫어서 수장령을 선포했다고 하면 너무 과하고...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상당하다는 분석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뜬금없이 1531년에 죽은지 300년이 넘은 토머스 베켓을 역모 혐의로 고발해 법정에 출두하도록 30일의 기간을 주었지만 당연히(…) 베켓은 나타날리가 없고, 이에 따라 베켓에게 유죄를 선고한 다음 켄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을 부수고 유해를 불태운 뒤 무덤을 찾는 순례객들이 바친 막대한 보물을 몰수하기도 했으니…

이런 막대한 수입은 본인의 궁궐 건축과 보석, 향연, 의상 등의 낭비와 전쟁비용으로 대부분 충당되어 자식들은 궁핍한 국고에 시달리게 된다. 몰수 토지들도 총신들한테 거의 하사하거나 매각하여 낭비해버렸다. 이런 탕진은 프랑스의 왕정과 달리 허약한 재정능력을 가진 왕정을 남기게 된다. 더불어 헨리가 불하한 토지를 매입해 신흥 지주층으로 떠오른 세력들이 의회를 차지해가면서, 왕권에 대한 강한 반대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헨리 8세 생전에는 공포정치로 인해 고위 귀족도 하루아침에 사형당하거나 투옥되는지라 이들도 이때는 그냥 버로우 상태...

이렇게 해서라도 해피 엔딩이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건만, 실은 이게 바로 그의 가정사가 꼬이는 첫 스텝이었다. 이후의 가족사는 아래 헨리 8세의 왕비들 참조. 더불어 수장령 선포와 이혼 과정에서 자파 세력으로 채운 의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의회 조칙을 통해 왕족의 신분 및 국가 중대사까지 결정하게 되면서 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때는 토머스 크롬웰 등 울지를 대신한 총신들의 모략으로 의회가 왕의 거수기 노릇을 했기에 왕권이 강했으나 나중에는 이것이 왕권의 발목을 잡게 된다.

한국으로 치면 어쩐지 조선숙종과 이미지가 겹치는 인물. 심지어 간신히 얻은 아들내미가 워낙 병약해서 왕위에 앉은지 오래 못 가서 사망한 것까지 비슷하다(…). 그리고 시녀 출신의 여인[5]에게서 얻은 자식이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것까지.

여담으로 특이하게도 남성의 성기를 강조하는 코드피스라는 양식의 바지를 늘 입고 다녔다. 심지어 초상화도 이걸 입고 그렸다.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남성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매독으로 인한 성기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제시되고 있다.

파란만장한 사건들로 가득한 헨리 8세의 치세기는 후세의 창작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제공하여, 오늘날에도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2. 막장인가 정상인가

저렇게만 적고보면 막장의 극치인 왕으로만 보이겠지만 그 긴 치세기간 동안 저렇듯 막장으로 일관했다면 영국 국민들에게 '해리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름대로 인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주변인들과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궁정의 일을 알리가 없는 백성들에게는 호탕하고 강한 왕으로 여겨졌다.

헨리 8세가 방탕했다지만 이는 구두쇠 소리까지 들을만큼 재정 회복에 집중했던 그의 선왕 헨리 7세 시절의 우중충한 이미지를 희석시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도 일부 사실이고, 또한 헨리 8세는 집안에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과의 연이은 충돌이나 아일랜드 원정을 비롯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오랜만에 출현한 대외정책과 외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왕이었다. 위에서는 삽질의 연속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즉위하기까지 장미전쟁과 요크 가문 출신 왕들의 불안정한 치세를 거치며 집안싸움에 박터지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 잉글랜드로서는 헨리 8세의 저런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잉글랜드 또한 나름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는 인상을 받을 만도 했을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경우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지만,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유럽 정세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계속 관여하며 열강 행세를 하게 되는데, 그 시초는 헨리 8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선왕 헨리 7세 시절부터 추진[6]되던 해군증강 정책의 기조를 이어 조선시설을 정비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런 의도에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강력한 전함인 리 로스호를 만들었다. 이 전함을 건조한 목적은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메리 로스호는 그러나 프랑스를 침공하기도 전에 헨리 8세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가라앉고 말았다. 후에 수백년이 지나서야 인양에 성공했는데 인양해놓고 보니 실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메리 로스호의 대포는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대포장인에게 의뢰해서 사정거리가 다른 대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었고 배의 설계구조도 이전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것을 시도해서 어느 배보다도 거대하고 초강력한 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포 포문을 배 밑까지 설치하고 이 대포가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진수식에 너무 많은 병사를 태운탓에 침몰하고 말았지만...전문가들은 메리 로스호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엄청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메리 로스호는 홀라당 가라앉았지만 헨리 8세는 그외에도 재위기간 내내 전함 건조에 공을 들여서 헨리 8세가 사망할때 50여척에 달하는 신규 전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장 그와 같이 해군을 증강했던 헨리 8세의 목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대륙 공격이었을런지 모르나 이런 해군력 증강과 조선시설의 기반 정비는 결과적으로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상대하는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훗날 세계최강으로 불리게 될 영국 해군의 전통 마련에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헨리 8세의 공은 상당히 큰데, 당시 스페인-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우수한 화기의 운용으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유럽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화기의 도입과 화기에 대한 대처 방안의 마련에 적극적이기도 했다.[7] 이 일환으로 신개념의 방어시설을 건축하기도 했는데 원형의 탑들을 두른 독특한 포대를 해안 방어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원형으로 탑을 만든것은 적의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수있다.

당연히 이런 군사력 증강에는 돈이 많이 들수밖에 없었는데, 헨리 7세가 재건한 건전 재정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수장령 선포의 이면에는 지역경제의 중심지로 부가 쌓이던 수도원을 공격한다 장악해서 그 부를 털어먹으려는 숨은 계산도 깔렸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신규 건함 건조와 방어시설 구축등의 재원은 상당부분 이런 수도원에서 몰수한 재산을 투입했다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딱히 앤 불린만이 수장령의 배후는 아니었을듯 하다. 다만 처음 이혼요구를 강하게 요구하고 교황청의 특사에 의해 영국에서 공판이 진행될 때까지는 거기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무효의 가망이 없자 저지르다시피 나간 것인데, 크롬웰을 비롯하여 떡고물에 눈이 멀은 추종자들의 지지 속에 본인도 막대한 교회재산으로 자신의 원정과 사치 비용을 충당하게 되면서 재미를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더불어 교회까지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놓으려는 야심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헨리 8세 자신은 교황지상권을 제외하면 가톨릭 교리를 고수하면서 자의적으로 신학적인 교리를 수정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복음주의파인 캐서린 파 왕비를 가두기까지 했었다.

허세가 강하고 강한 기질에 무용에도 뛰어났던 군주였으나 전쟁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사실 부족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의 치세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고작 스코틀랜드랑 아일랜드 침략과 학살 정도였다. 그것도 치세 말기 처남 시모어의 지휘로 이뤄진 것이었다. 또한 원정을 나가거나, 물의가 생기거나 할 경우 보다 정통적 혈통이던 플랜태저넷 가문의 계승자 친척들을 죽이는 일도 잦았다. 사실 이는 튜더 가문 자체가 플랜태저넷의 방계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로서 서민층의 혈통도 섞인지라 격이 낮았기 때문. 한마디로 왕위 정통성을 지키기위한 무자비한 조치.

사생아로 리치먼드, 서머싯 공작 헨리 피츠로이가 있었으나, 에드워드 6세처럼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4. 매체에서의 헨리 8세

동화 왕자와 거지에서는 주인공아들에게 묻어가는 조연으로 나온다. 다만 리처드 플라이셔의 영화판에서는 찰턴 헤스턴이 특유의 카리스마로 휘어잡지만...

대항해시대2에서 영국 국왕으로 등장. 그런데 저 초상화와는 얼굴이 전혀 딴판이다. 옷토 스피노라로 진행 시 옷토에게 스페인 함대를 나포하는 사략함대의 결성을 명령하며 지원금을 대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길버트라는 오만한 감독관의 농간으로 옷토가 받는 왕의 돈은 고작 3백 닢(…).

토머스 모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9] 사계절의 남자에서는 비열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군주로 나온다. 배우는 버트 쇼, 발지전투의 전차장 헤슬러 바로 그 사람이다.근데 너무 날씬하다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에릭 바나가 연기. 앤 불린의 유혹에 허덕이는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도 좀 많이 날씬하다.

4.1. 튜더스에서의 헨리 8세



드라마를 보다 보면 쌍놈이 따로 없다. 근데 얘가 주인공.

튜더스에서의 헨리 8세는 그야말로 미남에 섹시(...)한 젊은 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끔씩 안습한 장면이 보인다. 나도 할 수 있다며 홧김에 제방 뛰어넘으려다 진흙속에 빠져 질식사할 뻔하질 않나 보호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서 잘못 머리 맞고 죽을 뻔하질 않나...가끔씩 초딩의 기미가 보인다. 또한 성깔이 굉장히 소심하며 신경질쟁이라서 보는 내내 그의 행각에 휘둘리는(ex: 토머스 크롬웰이라든가, 메리 공주라든가...) 주변인들을 보면 가엾을 지경이다.

앤 불린을 처형했을 때 후련해진 듯이 웃던 모습은 정말 그간 사랑하기는 한건지 비정하게 느껴지는 모습. 곧바로 제인 시모어와 혼인하면서 제인의 사려깊은 행동을 통해 가족이 생기지만 그에게 인간성을 준 제인은 얼마 안가 사망한다. 어찌보면 캐서린을 버리고 앤을 죽인 징벌과도 같은 느낌.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앤이 죽고 나서는 다른 이의 아이 취급하던 엘리자베스와 외면하고 있던 메리[10]에게도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외교관계 때문에 메리가 약혼을 번복하는 사태가 이어지는 등 좋은 아버지라고 하기엔 뭐하다.[11]

딸 엘리자베스가 총명함을 드러낼 때는 딸을 다정히 대해주면서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하는데, 마지막 화에서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앤 불린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앤을 처형했던 일에 대해서도.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그토록 원하던 아들이었던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지극 정성을 다하지만 때로는 과해보일 지경.[12] 에드워드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엔 스코틀랜드에서 달려와 밤새 병상을 지키기도 했다.

항상 안하무인이고 거침이 없던 그였지만 결국에는 나이가 들고, 마지막에는 병이 들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왕으로 전락한다. 그런 그의 눈앞에 캐서린, 앤, 제인이 환각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찌보면 가장 헨리를 사랑했을 아내들은 헨리에게 차가운 비난을 가한다. 캐서린은 자신이 결국 헨리의 진정한 아내였으며 그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고 있는 메리에 대해 토로한다. 앤은 자신이 결백했음을 헨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캐서린 하워드의 처형에 대해 말하며 냉소를 짓는다. 제인은 헨리의 잘못으로 에드워드가 일찍 죽을 것임을 말하고 사라진다. 이는 어찌보면 헨리 스스로가 초래한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가장 친밀했던 친구 찰스 브랜든과 오랜 세월동안의 냉랭함을 풀고 간신히 화해하나 그는 곧 헨리의 곁을 떠난다.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 자신을 생각하던 이들을 자신 손으로 없애버린 대가인지, 결국 홀로 남아 쓸쓸한 말로를 맞는다. 드라마 마지막에는 이 문서 맨 위의 초상화[13]를 헨리가 지켜보고는 뒤돌아가면서 초상화를 배경으로 헨리 8세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들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간략한 후일담이 자막으로 나오며 드라마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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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할머니 마거릿 쪽으로 랭카스터 왕가, 어머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요크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다.
  • [2] 당시 귀족들은 과시적인 식사를 했고 이는 건강에 좋지 않았다. 오히려 섬유질이 많은 야채, 생선, 빵을 먹던 서민층의 식사가 건강에 좋았다. 야채는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는 '하층민이나 먹는 것'으로 취급당해 귀족들은 잘 먹지 않았고, 영국은 과일 등의 생산도 부족하여 결과적으로 상류층의 영양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 [3] 매독으로 인한 뇌손상과 정신질환으로 추정된다. 이미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 [4] 로마 멸망 이후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아내의 목을 친 국왕은 거의 헨리 8세가 유일하다.
  • [5] 단 당시의 시녀는 명문가 영애들이 맡는 직위였고, 앤 불린은 엄연한 명문가 출신.
  • [6] 다만 헨리 7세는 짠돌이였기 때문에 상설적으로 유지되는 해군 자체를 증강하기보다는, 유사시에 해군으로 징집할 수 있는 민간선의 건조 및 임대를 통한 수익 확보에 더 치중했다. 전투용 시설을 평시에는 철거하고 상선이나 수송선으로 쓰다가 전시에는 전투용 시설을 급히 설치해서 해군으로 징집하는 형식.
  • [7] 당시 영국은 아직까지도 화승총보다는 장궁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 [8] 시즌 7에서 어쩌다보니 헨리 8세와 결혼서약을 맺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 [9] 동명의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연극의 명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작품. 시대극의 측면에서도 볼만하며, 주인공의 연기가 일품. 1967년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주연상 포함 6개부문 수상.
  • [10] 프랜시스 브라이언을 보내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캐서린과 자신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에 겨우겨우 서명했기 때문에 누그러진 것도 있다.
  • [11] 실제로 메리에게는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였다. 메리를 심하게 푸대접했다.
  • [12] 이 과보호가 도리어 면역력을 떨어뜨렸다는 주장도 있다.
  • [13] 얼굴은 배우 조너선 마이어스의 얼굴이다. 그래서 원본보다는 훨씬 슬림하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