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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last modified: 2018-02-01 20:48:48 Contributors

헌종은 묘호인데, '바칠 헌' 자를 쓰는 獻宗과 '법 헌'자를 쓰는 憲宗이 있다.

시법에 따르면 獻과 憲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 총명하고 지혜가 깊고 사리에 밝음을 이라 한다(聰明叡哲曰獻).
  • 바탕을 알고 성인의 자질을 가졌음을 이라 한다(知質有聖曰獻).


  • 견문이 넓고 재능이 많음을 이라 한다(博聞多能曰憲).

Contents

1. 고려 헌종(獻宗) 왕욱
1.1. 소개
1.2. 잘못 끼워진 단추
1.3. 쿠데타 그리고 양위
1.4. 평가
1.5. 사망
1.6. 가족관계
2. 조선 헌종(憲宗) 이환
2.1. 개요
2.2. 치세
2.3. 기타
3. 당나라 헌종(獻宗) 이순
4. 서하 헌종(獻宗) 이덕왕
5. 명나라 성화제 헌종(憲宗) 주견심

1. 고려 헌종(獻宗) 왕욱

고려의 역대 국왕
13대 선종 왕운 14대 헌종 왕욱 15대 숙종 왕옹

묘호 헌종(獻宗)
시호 공상정비회효대왕
(恭殤定比懷孝大王)
왕(王)
욱(昱)
배우자 회순왕후(懷純王后)?
아버지 왕운(王運)
어머니 사숙왕후(思肅王后)
생몰년도 음력 1084년 6월 27일 ~ 1097년 윤2월 갑진일[1]
양력 1084년 8월 1일 ~ 1097년 (14세)
재위기간 음력 1094년 5월 2일 ~ 1095년 10월 7일
양력 1094년 6월 17일 ~ 1095년 11월 6일 (1년 142일)

고려의 제14대 왕.

단종의 대선배. 살면서 겪은 사건도 단종과 80% 이상 같다. 이 둘의 대선배는 신라 40대 국왕인 애장왕. 애장왕은 헌종, 단종보다 더 안습인 게 쿠데타를 일으킨 숙부 김언승에게 왕궁에서 대놓고 죽임을 당했다.[2]

1.1. 소개

性聰慧 九歲好書畫 凡所見聞 未嘗遺忘。
성품이 총명해 아홉 살 때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했으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 《고려사》헌종 총서

그는 어려서 소갈이라는 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다. 고려에서 형제상속은 일반적인 일이라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선종이 병약하고 어린 그의 아들 욱 대신에 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명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1.2. 잘못 끼워진 단추

하지만 이게 웬일, 선종은 병약한 아들인 욱을 후계자로 삼았고 결국 그가 11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명군 소리 듣는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결국 병석에 누운 11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병세가 좋아지기는커녕 날로 쇠약해졌고, 이런 판국이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1.3. 쿠데타 그리고 양위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인,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로 헌종의 이복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자의는 사숙왕후의 사촌으로 당시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왕숙이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막강했다. 그는 왕이 병들어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다.

조정은 종친대표 계림공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1095년에 계림공이 먼저 선수를 쳐서 이자의를 암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했다.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왕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없었다. 결국 3개월 후 헌종은 병을 이유로 들어 계림공에게 양위하고, 계림공은 숙종으로 즉위한다.

그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다.

朕承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爾有衆 奉纂丕圖。 朕當退居後宮, 獲全殘命。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왕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한 관계로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나는 후궁으로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보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다.

1.4. 평가

이제현은 이를 평하기를

"고대 중국의 하우씨(나라의 우왕)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아들 계왕에게 왕위를 넘긴 부자상속)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한 조치였던 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 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했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 저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평을 한 '이제현'은 고려말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 시대일 때 당대 고려 제일의 유학자로 손꼽히던 사람이다. 당시 중국의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교(성리학)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는데, (이는 이후 유교국가 조선 건국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본문을 보더라도 고려 중기에는 유교가 그리 절대시 되지 않았는지, 당시에는 부자상속이더라도 어린 임금의 제위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고려 말은 유교를 더 숭상하는 분위기여선지 이제현은 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숙종의 (사실상) 찬탈에 대한 반발이 크게 없던 반면,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음은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갈은 사람이 없어서 나랏일을 맡아 정치를 보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운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 것은 볼을 보듯 뻔한 일이 아떤가.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서 강보에 싸인 유아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맡기게 될 래에는 이것으로써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주공은 하도 오래전 인물이라 그가 진짜 '사기'의 기록대로 섭정하고 순순히 정말 물러났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또 당시는 봉건제라 주공은 섭정에서 물러나도 자기 영지에서 따로 왕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유교에서 '주공', '주공'을 그리 외쳤건만 정작 지킨 이들이 적은 이유다.

1.5. 사망

肅宗 二年 閏二月 甲辰 薨于興盛宮 壽十四 在位一年。
숙종 2년 윤2월 갑진일에 흥성궁(興盛宮)에서 죽으니 향년 14세이고 1년 동안 재위했다.

그는 상왕이 된지 얼마 후 1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소갈증으로 인한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병석에 누워있었으니 숙종의 입장에선 나중의 단종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다. 물론 일부에선 숙종이 헌종을 사사했을 것이란 주장도 하지만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였다.

묘호인 '헌(獻)'은 시법상으로는 '聰明叡哲 通知之聰 知質有聖 有所通而無蔽'라 하여 총명하며 성인의 자질이 있어 통하는 바가 있고 폐단이 없었던 왕이라는 뜻이지만, 글자가 "바치다"라는 뜻을 지닌 데다가 이 시호나 묘호를 받은 사람들이 대개 후한 헌제나 고려 헌종이나 서하 헌종(서하 말제 이전의 군주로 칭기즈칸에게 처절하게 밟힌 안습군주)처럼 재위의 끝이 좋지 않은 이들 뿐이라 대부분 안습하게 취급해서 시호로는 잘 쓰지도 않는 글자다.

1.6. 가족관계

병약하고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편이다.

2. 조선 헌종(憲宗) 이환

조선의 역대 국왕
23대 순조 이공 24대 헌종 이환 25대 철종 이변

묘호 헌종(憲宗)
시호 조선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사후시호)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1908년 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
장숙(莊肅,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환(烉)
문응(文應)
원헌(元軒)
출생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
사망장소 창덕궁(昌德宮) 중희당(重熙堂)
배우자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아버지 이영(李旲)
어머니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생몰기간 음력1827년 7월 18일 ~ 1849년 6월 6일
양력
재위기간 음력1834년 ~ 1849년 6월 6일
양력

2.1. 개요

조선 제24대 왕.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익종)의 외아들이다.

원래대로였다면 아버지 효명세자가 왕이 되었어야 했겠지만,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졸지에 8살 나이로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비슷한 경우로 충목왕이 있다.

2.2. 치세

어머니는 풍양 조씨다. 아내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에서 보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기에는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 체포령이 내려졌고(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서로의 집안을 감시하도록 한 오가작통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국 최초의 신부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기도 했다.

더욱이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선 서양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실로 안습의 세월이라 할 만하다.(…)

기존의 견해로는 현종조 전반을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와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시기로 알려졌고, 그래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들어 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째서인지 김좌근의 일화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안경)을 썼다고[3] 한소리 들은 것. 조병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황급히 헌종 앞에서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대비(신정왕후)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판윤, 예조, 이조,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그해 1845년 졸.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실상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 없이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고, 아내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 경빈(慶貧) 김씨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반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고,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5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 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률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100%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을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 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도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고 영상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 당한다. 그러나 그 직후 향년 23세로 사망(…) 앓다가 갑자기 차도없이 사망했다는 것과 안동 김씨의 세력을 한창 조지던 와중에 급사하는 바람에 미약하게나마 독살설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순원왕후의 어찰을 근거로 한 일부 독살설은 해석 오류가 많으며, 그닥 증거도 없다. 증조할아버지 정조처럼 헌종 역시 스스로 약을 조제하고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름대로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의 치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의 치적으론 조선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는게 문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을 척결하고자 하였지만 돌연 죽음으로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 사이에서 각각 딸 하나 씩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효종 때부터 이어진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혈통도 끊겼으며 결국 안동 김씨가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을 옹립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2.3. 기타

얼굴이 꽤나 잘 생겨 당대에 꽃미남 취급을 받았다고 하며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또한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4]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오른쪽에 왕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를 장사함)'의 원칙에 따라 맨 오른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인 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

순원왕후는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뭐든지 두번 생각하고 움직이며 눈치가 빠르다"는 평을 내렸다. 이를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보를 밟은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덤으로 한국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한번도 등장하지 못한 왕이다.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다. 물론 이는 아버지인 효명세자도 마찬가지. 존재감 없는 임금 중 하나였던 현종드라마에 출연하는 판인데 안습. 조상님들이나 후임 왕들은 실컷 출연료 받아 먹고 있는데 난 이게 뭐야 징징

사실, 주목을 별로 받지 않는 것에 비해서 포장을 하자면 의외로 드라마로 만들 만한 소재가 될 법 하기는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젊은 왕"이라는 점도 그렇고, 세도 정치를 개혁하는 개혁 군주의 모습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기는 하고, 게다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수를 적게 잡아도 된다.(…)

다만 사극에 머지않아 등장할 가능성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웹소설 '르미 그린 달빛'(작가 이수, 삽화 kk)이 얼마전 드라마 판권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 물론 판권계약 맺었다고 모두 드라마화되는건 아니지만 그도 이제 사극에 등장한 적 없는 유일한 조선의 왕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은 효명세자일텐데? 이름도 이영이고 누이가 명온공주고 게다가 세잔데 헌종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으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은 못 될텐데..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차기작인(현재 시점으로는 완결된)반월의 나라의 메인남주가 바로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된다는 듯.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3. 당나라 헌종(獻宗) 이순

당(통일왕조)의 11대 황제인 당헌종

4. 서하 헌종(獻宗) 이덕왕

서하의 제9대 황제. 헌종 참고

5. 명나라 성화제 헌종(憲宗) 주견심

명의 제8대 황제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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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숙종 2년 윤2월 갑진일에 흥성궁(興盛宮)에서 죽으니 향년 14세이고 1년 동안 재위했다.(肅宗 二年 閏二月 甲辰 薨于興盛宮 壽十四 在位一年。)
  • [2] 그나마 애장왕의 경우에는 단종(15세-폐위 기준)이나 헌종(12세-폐위 기준)과는 달리 성년(22세)까지 왕위에 있었다.
  • [3] 당대 예법에는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서재필고종 황제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었다.
  • [4] 초상화를 말하며 당시 효명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정학히는 효명세자의 어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