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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제

last modified: 2019-08-16 20:15:04 Contributors

  • "헌제(憲制)"는 나라의 제도나 법을 의미합니다. 누가 이거 찾아 왔을까 이런 말도 있었나?

Contents

1. 후한마지막 황제
1.1. 개요
1.2. 일생
1.2.1. 황제 즉위
1.2.2. 낙양 천도
1.2.3. 조조의 꼭두각시
1.2.4. 선양
1.2.5. 사망
1.2.6. 자손
1.3. 선양에 대한 평가
1.3.1. 긍정적
1.3.2. 부정적
1.4. 기타
1.5. 미디어 믹스
2. 의 5대 황제 옹정제의 시호


1. 후한마지막 황제

후한의 역대 황제
13대 소제 유변 14대 헌제 유협 조비(조위)
유비(촉한)

조위 산양공
없음 유협 유강(劉康)[1]

생몰년도 181~234[2]
재위기간 189~220[3]
묘호 없음
시호 효헌황제(孝獻皇帝)[4]
효민황제(孝愍皇帝)[5]
능호 선릉(禪陵)
도읍지 낙양장안허도
협(協)
백화(伯和)
부친 후한 영제 유굉
모친 영회황후 왕씨
황후 복 황후(伏皇后)
헌목황후(獻穆皇后)
연호 영한(永漢, 189)[6]
중평(中平, 189)[7]
초평(初平, 190~193)
흥평(興平, 193~196)
건안(建安, 196~220)[8]
연강(延康, 220)[9]

1.1. 개요

후한의 마지막 황제로 본명은 유협(劉協), 자는 백화(伯和)다. 유비와는 엄청나게 먼 친척인데, 촌수로 따지면 사실상 남이나 크게 다를바 없다.[10] 그래도 유비가 조조의 부하 시절에 헌제는 그 먼 촌수를 따져서 결국 유비가 자신의 숙부에 해당된다는 것까지 파악했다.

1.2. 일생

1.2.1. 황제 즉위

영제의 후궁인 왕영의 아들이며 황자 시절의 작위는 발해왕(渤海王)→진류왕(陳留王)[11]. 그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영이 영사황후에게 독살당했기 때문에 영제의 어머니 효인황후 동씨가 그를 길렀다. 이복형인 소제가 폐위되자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동탁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는데 이때 겨우 9살이었다. 헌제는 후에 어머니 왕영을 영회황후로 추존했다.

차남인데다 서자이며 이복형을 죽인 동탁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는 약점은 헌제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할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헌제를 괴뢰황제로 규정해서 한때 유우[12]대립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유언, 원술은 황제를 참칭했고 유표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200년 칭제했다. 그래도 대체로 지지받았던 편이라 원소와 원술 외에는 특별히 전국적인 도전을 받지는 않았다.[13] 조조와 손책은 이런 헌제를 옹립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전-후한 교체기처럼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반 동탁 연합군이 공세를 퍼부어오자 동탁은 낙양에서는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헌제와 그 이하 백관들을 제2수도격으로 수비하기가 보다 편한 장안성으로 강제로 옮겼다. 장안에서는 과거 전한 시대에 소하가 건설한 미앙궁(未央宮)에 머물렀다.

1.2.2. 낙양 천도

황제였지만 어린 나이로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동탁의 폭정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192년 동탁은 왕윤여포에 의해 살해당했고 헌제는 자유의 몸이 될...뻔했다.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 곽사 등이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안을 함락시키니 여포는 퇴각하고 왕윤은 사망하여 헌제는 사악한 늑대의 손에서 벗어난 후 교활한 승냥이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형 소제를 독살하는 데 관여한 이유의 죄를 물으려 시도했으나, 이각에 의해 저지당했다.

장안은 기근이 일어나 피폐해졌는데, 헌제는 시어사 후문(侯汶)을 시켜서 태창의 곡식을 가져다가 을 만들어 빈민에게 주도록 했다. 근데 후문이 농간을 부렸는지 구제가 제대로 되지 않자, 직접 시험을 해보고 후문을 추궁하여 곤장을 때려 빈민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각과 곽사는 권력을 차지한 후 분열하여 서로 정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삼아 마침내 16세가 되던 196년에 장안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충신인 동승과 함께 1년여간 극도의 궁핍과 기아 그리고 이각과 곽사의 추격 속에서 생활하였고, 그 과정에서 양봉, 산적 출신인 한섬 등이 군을 이끌고 와 그들과 함께 낙양으로 향했다. 이각, 곽사의 추적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희생자가 발생했고, 노숙을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낙양에 도착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는데 제후들이 조세를 올리지 않아 백관이 직접 보리 곡식을 거둬들여야 했고 몇몇은 굶어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양봉과 한섬 등은 권력을 노려 동승을 공격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고, 낙양에 도착한 후 군을 이끌고 헌제를 맞이한 조조의 힘이 커지자 조조는 한섬과 양봉을 속이고 헌제를 허창으로 데리고 갔다. 이에 양봉과 한섬이 조조를 공격하나 패해 군세가 흩어진다. 이 사건이 바로 삼보의 난으로 이 일로 동탁에 의해 안 그래도 피폐하던 수도권이 완전히 끝장나 버린다.

1.2.3. 조조의 꼭두각시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조조에게 옹립되는데 조조는 자칭 헌제와 한 황실의 보호자가 되었고 헌제는 당시 그저 그런 일반적인 군웅수준의 세력[14]을 가지고 있던 조조에게 강력한 명분적 무기를 제공하여 조조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는데 일조하게 된다.[15] 이는 처음에는 일종의 윈윈관계였으나[16], 조조의 권세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가면서 결국 일방적인 관계로 변질되게 된다. 물론 조조 이외에 이를 시도하려는 군웅은 손책이 유일했으나 손책은 너무 남쪽에 있었던 데다가 일찍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황실 종친이라는 유비는 여포 때문에 빈털털이..

기껏 이각, 곽사 등의 억압자로부터 자유를 찾아 고생하며 낙양에 도착하지만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온 조조에 의해 낙양을 등지고 허창으로 끌려온 후 곧 헌제는 모든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국가의 대소사는 사실상 조조가 모두 처리하게 되었고 당시 헌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조조가 가져온 문서에 인을 찍는 것 뿐이었다. 관직 임명부터 각 제후들에 보내는 황명까지 모두 조조의 손을 거쳤으며 실제 당시 다른 군웅들 역시 헌제가 보낸 칙서는 곧 조조의 뜻으로 여기곤 했다. 사냥터에서 조조에게 활을 빌려주었다가 조조의 "아, 그거 내가 맞춘 건데? 데헷^^"에 개굴욕을 당하거나, 칼찬 조조가 헌제 자리에 앉은 명장면(?)도 이 당시의 일.

헌제는 조조에 의해 허창으로 강압적으로 끌려온 게 맞다. 연의에서는 헌제가 "낙양이 폐허가 되었고 내가 있는 허창이 아주 좋으니 그쪽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조조의 말에 이각, 곽사 때와 같은 꼴이 난다며 매우 근심해하다 거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천도하여 허창으로 가게 된 것으로 묘사되었고, 정사에서도 진동장군(鎭東將軍) 조조(曹操)가 스스로 영(領) 사례교위(司隸校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고 후에 헌제를 허현(許縣)으로 천도케하며 스스로 사공(司空)이 된 것으로 나온다.

결국 200년에 헌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암살하려고 계획하지만(의대조 사건) 일이 누설되어 실패한다. 이 일로 인해 헌제가 어릴 때부터 그를 모시던 동승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신들은 삼족에 걸쳐 파리처럼 죽어나갔으며[17] 임신하고 있던 동귀인[18]까지 헌제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다. 헌제 자신도 목숨이 위험한 판국이라 눈물만을 흘릴 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유비 또한 이 일에 개입하여 삼국(드라마)에서 처럼 바깥에서 원소의 70(?)만 대군과 서주의 군대 등을 동원해 조조를 토벌하는 것이다. 나중에 조조가 직접 와서 서주를 뺏기고 부하들을 잃고 원소에게 의탁하게 된다.

나중에 관도대전의 발발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한중왕 즉위와 관련하여 헌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도 "의대조 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한다.링크 사이트에서 익주 관리들과 유비가 건안 24년 가을에 보낸 표문을 보면된다.

이 사건 이후 권력을 노린 조조가 헌제를 협박해 위공의 위를 받고 헌제를 구석에 박아놓은 채 스스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황제를 무시하게 된다. 이에 복 황후와 그 외척세력이 황제복권을 위해 조조 암살 계획을 세우다 들키자 조조는 황궁에 군사 500을 보내 궁벽을 무너뜨린다. 복 황후는 벽을 부수고 쳐들어온 조조군에게 산발이 된채 머리를 잡혀 끌려나와 매맞아 죽었고 조신 200여명이 살해당했으며, 헌제의 두 아들도 독살당했다. 이때 헌제는 앉아 떨고 울면서 살려달라는 복 황후에게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이후 죽은 복 황후를 대신해 조조의 딸 조절(헌목황후)을 강제로 황후로 맞는 등 완전히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또한 조절의 자매들인 조헌, 조화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1.2.4. 선양

위왕에 오른 조조가 죽고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왕으로 등극하자 조비의 협박으로 조비에게 선양하게 되었고 이로써 4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은 완전히 멸망했다.

선양 후에는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해졌다. 식읍은 1만호였고, 도읍은 하내군(河內郡) 산양현 (山陽縣) 탁록성(濁鹿城)이다. 헌제가 산양공으로 내려가면서 왕에 봉해져 있던 헌제의 황자들 역시 열후로 지위가 내려갔다.

제후로 전락했으나 한때는 황제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대우를 좋게 받았다. 수례와 의복(車服)은 천자의 것과 같이 하며, 천지, 종묘, 조상에 대한 제사 역시 한나라 때의 제도를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 제후왕(諸侯王)보다 지위가 위에 있고, 위 황제에게 신하로서 예를 갖추지 않도록 허가하는 다소 특별한 예우를 받았지만 위안은 되지 않았을 듯하다. 해당 지방의 민간 전설에 따르면 산양공으로 봉해진 헌제는 봉지에서 백성들을 매우 어질게 대했다고 한다.

1.2.5. 사망

조비보다도 더 오래살며 234년까지 살다가 53세[19]로 세상을 떠났다. 명제 조예는 산양공의 시호를 추증하여 효헌황제(孝獻皇帝)라 황제라고 했으며 한나라 황제의 예로 선릉에 안장했다. 사망한 것은 234년이지만 촉한에서는 이미 220년에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고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까지 올렸다. 그리고 유비는 한나라의 계보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것이 실제로 착각이었는지는 한 번 의심해 볼 법하다. 왜냐하면 224년 제갈량이 쓴 편지에 의하면 4년 후에도 촉 사람들은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한의 황제였던 인물인데다가 선양한 이후에도 봉토를 갖는 제후의 신분이었다. 조비가 헌제의 신병을 비밀리에 구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주요인물의 행방을 4년 동안이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정보전달이 느렸던 고대사회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다만 이러한 착각(?)이 촉한의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 정보는 유비가 황제에 오를 명분을 가져다 주었으며 "헌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익주민들을 동원하는 데에도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224년 제갈량이 썼다는 편지는 관리를 등용하기 위해 쓴 것이다.

의외로 후한의 황제 중에서는 2번째로 장수했고 2번째로 재위기간이 길었다. 참고로 장수와 재위기간 1위는 창업자인 광무제인데 그렇다고 헌제가 특별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건 아니고 이정도로 후한의 황권이 막장이어서 그렇다. 사실 헌제의 재위기간은 31년 정도로 긴 편이었으나 스스로 통치한 기간은 이각과 곽사에게서 탈출한 뒤 조조에 의해 권력을 잃을 때까지 극히 일부 기간이었다. 그나마 그 기간에는 이미 군웅할거 기간이 개막한 상태라 전국에 그의 황명이 전달된 기간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바지황제 이냐?? 근데 정작 황신을 상징하는 황색은 황건적이 가져갔다.

1.2.6. 자손

헌제가 사망한 뒤 산양공의 작위는 헌제의 손자 유강(劉康)[20]이 세습했고 유강의 아들 유근(劉瑾)[21], 유근의 아들 유추(劉秋)[22]까지 헌제의 현손까지 세습되었다. 이렇게 서진시대까지 작위가 이어지다가 팔왕의 난를 거쳐 영가의 난이 일어난 영가 3년(309년), 유추가 이민족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의 일족이 죽거나 흩어져 산양공국이 소멸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르기 전 해에 헌제의 네 황자를 왕으로 봉했는데, 각각 제음왕(濟陰王) 유희(劉熙), 산양왕(山陽王) 의(劉懿), 제북왕(濟北王), 유막(劉邈), 동해왕(東海王) 유돈(劉敦)이다. 파촉에 있던 허정이 이 말을 듣고 숨을 들이쉬기 위해서는 잠시 내셔야 하고, 빼앗기 위해서는 잠시 주어야 한다는데 그게 바로 맹덕(조조)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탄식하며 앞 일을 내다보았다고 한다. 이들은 헌제가 양위한 뒤 열후로 강등되었다.

복 황후 소생 황자가 2명 있었는데 복 황후와 함께 살해되었다.

1.3. 선양에 대한 평가

1.3.1. 긍정적

논(論) 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정[23]이라는 기물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무거우므로 신(神)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 하였다. 위나라가 짊어지고 가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천운이 다한 귀결이로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으니 산양공을 어찌 꾸짖겠는가! -후한서 효헌제기-

전대 황제로서 일종의 예우를 받아 황제의 의관과 그 외 예식은 황제급으로 행하게 되었다. 또 위 황제에게 글을 올릴때 "신(臣)"이란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유선이나 조환 등이 선양 혹은 폐위되었지만 전 황족으로써 제대로 대우를 받고 산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남북조 시대 유송(劉宋)의 마지막 황제 순제 유준은 죽을 때 "다음 생에는 절대 왕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기를"이라고 부르짖었다.[24] 왕조교체 과정에서 하도 유혈사태가 난무하는 중국사에서 헌제의 무난한 선양과정은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남았고, 그나마 이후의 몇 번 있던 "평화로운 선양" 전통도 이 사건을 전례로 삼았다. [25]다. 그 이후의 훈훈한 선양은 후주(後周) 공제(恭帝)와 송태조 조광윤의 케이스가 있다.

이외 이민족 왕조의 경우에도 대체로 전 왕조의 구성원들을 살려주고 때로는 우대했다. 하지만 이쪽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정통성을 갖고 형식상으로는 선양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사실상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 참고로 이런 조치는 이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계속되어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도 그럭저럭 우대를 받으며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헌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한 황실의 권위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진지 오래였다. 후한의 황제는 13명이 있었는데 이 중 35세를 넘어서까지 생존한 황제는 헌제를 포함하여 단 3명 뿐이다. 후한 황제들의 평균 즉위연령은 약 13세이며 사망연령은 29세, 제위기간은 12년 정도였다. 그나마 이건 초대 광무제와 2대 명제가 있기 때문이고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더욱 안습이다. 다시 말해서 광무제와 명제를 제외하면 후한의 황제들은 평균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황제에 올라 약 10년 간 보위에 앉아 있다가 30세 근처가 되면(...) 죽음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앞뒤 분간도 못하는 유아 시절에 일단 보위에 앉았다가 사리를 분별할 법한 나이가 되면 제거당하는 소년황제시대가 100년 간 이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중 2명은 '확실하게' 신하의 손에 죽었다. 황제가 제구실을 못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은 언제나 환관과 외척들의 정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즉 헌제가 즉위할 당시에 이미 한 황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라꼴이 막장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서 사회 곳곳에서 한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대규모 농민봉기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후한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이들을 진압한 후에는 그 과정에서 성장한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다. 이 시점에서 중앙의 권력은 더욱 위축되어 사실상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형주의 유표와 익주의 유언은 조공을 끊고 황제의 의식주를 사용하는 등 일찍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원술은 형주 북부 남양에서 황제를 자칭했으며, 기주의 원소는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 했다.[26] 옹, 양주는 184년, 187년에 이미 한수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을 정도로 중앙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고, 한수는 10년 후에 마등과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킨다.(이 사건에는 유언의 아들이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헌제에게 표변적으로나마 우호적이었던 지방군벌은 정권 초기의 조조와 남양주의 손책, 그리고 유비 정도였다. 하지만 조조는 이후 권신이 되어 그 아들이 한을 멸망시켰고, 요절한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도 훗날 칭제했으며, 유비마저도 결국은 칭제를 했다(...) 후한의 권위가 이 지경이 된 것이 헌제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쯤되면 이런 안습도 없다.

현대에 이르러 시민사회가 성립되고 더 이상 전제군주제적인 역사관에 얽메이지 않게 되면서 선양에 대한 시각도 점차 바뀌었다. 이를 군주에 대한 신하의 찬탈로 보는 시각에서 점차 권력이 교체되는 변혁으로 보는 관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후한은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가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난세를 종식시킬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군주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으나 현대적 사관은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또한 '조조가 난세를 열었다'는 말 또한 설득력이 없는 것이 5호 16국 시대는 조조 사후 80년도 더 지나서 시작된다. 오히려 난세는 조조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조조가 보여준 일련의 정책들은 후한말의 혼란을 수습하고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한 황실의 권위 추락도 중국의 난세도 이미 조조 이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진 이후의 혼란기까지 조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간에서는 조조를 감정적으로 악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학계에서는 그 업적과 위진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다.

1.3.2. 부정적

중근세까지의 중국에서는 위의 선양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당시 사람들이 조조의 능력과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도로 망탁조의라 매도하면서까지 이를 역적의 행위로 본 이유는 헌제가 살아있을 당시엔 한의 복권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예를 든 남북조 시대 유송의 선양과 비교하면 안되는 게, 유송 때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라 자체가 막장이었고 왕조의 역사도 50년 정도밖에 안 되는 단명왕조였다. 당연히 백성들의 유송에 대한 감정도 매우 차가웠고 유송이 망할 때 반발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 때문에 유유와 달리 소도성이 굳이 유송의 황족들을 몰살시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27]

하지만 헌제는 달랐다. 유방이 세운 한은 400년의 세월 동안 중국인들을 강하게 묶어놓았고 황실의 힘이 약화되자 너도나도 황실복권을 부르짖으며 자체적으로 18로 제후가 일어났다. 동탁의 전횡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나 혼란과 군벌의 피튀기는 난립은 낙양의 동쪽인 하북지방에만 한정되었고 서량의 옹주와 양주, 서남의 익주와 교주, 중원의 형주는 겉으로나마 황실에 순응하며 조용했다.

조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조가 동탁을 추격하다 서영에 의해 할아버지 조등이 환관으로 재직하며 모아두었다 넘겨준 권력과 군사를 모두 잃은 후, 막장이 되어 1000명 정도의 군사만을 가진 채 하내에서 원소에게 객장으로 있을 때 조조를 재기시켜준 것이 역적 동탁을 끝까지 치려 한 진정한 한의 충신이라며 조조를 찾아 몰려든 순욱 등의 모사들과 군병들이었다. 또한 비슷비슷한 일개 군벌 중 하나에 불과했던, 특히 원소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조조가 갑자기 하북의 천하이강이 된 것도 헌제를 허창으로 데려와 한실의 이름을 등에 업은 후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조는 유유, 소도성, 소연, 진패선 등과는 다르다. 이들은 처음부터 썩을대로 썩은 전 왕조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이를 토대로 자체적인 힘을 길러 군과 신과 백성들의 지지하에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선양을 받아 새 왕조를 창업했다. 하지만 조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왕조라는 소에 붙어 그의 피를 빨아들였다. 이 당시 한 왕조엔 아직도 한을 그리워하는 많은 충신이 있었다. 특히 조조가 위공에 오르려하자 당시 조조군의 최고 중책이었던 순욱이 자살해버린것은 당시 한나라에 충성하는 명사들이 많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28] 조조가 결코 쉽사리 헌제를 죽일 상황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백성들에겐 종친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따라 길을 나설 정도로 한 왕조를 재건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고, 영웅호걸들은 한의 이름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한실은 동탁에 의해 권위가 추락했으나, 지속될 수 있었고, 잘하면 다시 화려하게 복위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량을 조조가 한의 보호자인양 행세하며 몰래 빨아들이고 동귀인과 복 황후 등을 죽이고 헌제의 옆에서 황실의 권위를 천천히 망가뜨려가면서 최악의 형태로 한은 무너져내렸다. 물론 조조는 황제 자리에 직접 오르지 않고 실권자로 머물렀지만 그 아들이 황위를 찬탈하도록 판을 깔아놓은 것은 언제까지나 조조. 그 때문에 후세의 역사가들은 조조를 까면 깠지 조비는 그렇게 심하게 까지 않는 것이다. 훗날 후조를 창건한 창업군주 석륵이 조조와 사마의를 평가하며 "나는 조맹덕 부자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 받으면서 헌제를 죽이지 않은 것을 무리하게 옹호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고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양한 황제가 죽은 기록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다. 조비 입장에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고대부터 단 한번도 깨지지 않은 전통을 깨고 헌제를 죽이기는 걸리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망탁조의 항목을 참조하자.

일본이나 한국의 사관과는 달리 중국 사관은 아직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이 많은데 이는 위나라가 불과 몇대만에 망하고 이를 이은 진나라도 통일을 이룩한후 불과 10여년만에 힘을 잃고 30여년만에 망한데서 기반한다. 역성혁명은 기본적으로 기존국가가 하늘의 뜻을 잃어 더이상 백성을 다스릴 힘이 없어 백성을 괴롭게 하니 신왕조를 세워 난세를 편안히 하겠다는 것이 골자인데. 위·진나라는 난세 종식에 완벽히 실패하여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후 최악의 헬게이트를 열었기에 그 명분이 매우 하락하는 것. 이러한 난세는 무려 589년까지 계속 되며, 중국역사상 역성혁명은 무수히 일어나왔지만. 이러한 장기간의 대난세를 연것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이때가 유일하다. 한마디로 조조가 정권을 잡는다는 면에서 보면 성공한 역성혁명이나 백성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역성혁명이었기에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진나라의 멸망은 조조 80년 후인데 그 책임을 조조에게 묻는것은 너무 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확히 해야 할것은 그가 난세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역성혁명을 일으켰음에도 난세를 종식시키는데 실패 하였기에 그 명분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삼국지 연의의 영향으로 다른 삼국지 군웅도 그러하지만 그와 그의 위나라가 지나치게 과평가 되는경향이 있는데. 실은 그의 위나라는 역대 역성혁명을 일으킨 왕조중에서 중앙집권의 정도이나 국력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되려 최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었고, 중앙집권정도가 약했기에 그의 사후 불과 30년도 채 안되어, 고평릉 사변으로 말그대로 사마의의 꼭두각시 정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실제로 조조 사후 위나라의 행적을 보면 거의 비이상적인 수준으로 자주 반란이 일어난다 고평릉 사변을 비롯하여 관구검,문흠의난, 제갈탄의난, 종회의난, 공손연의 난 등 불과 30년도 안되는 기간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도 신하에 의하여 2번이나 갈렸다. 역대 이정도로 불안했던 왕조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찾기 힘들 지경. 진나라의 조기 멸망은 이미 위나라 때부터 그 조짐이 강하게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진나라도 위나라를 멸망 시킨 후 얼마 못가 망하니 난세 종식은 완전히 실패 하고 말았다.

중국인이 자신을 한족이라고 칭하고, 조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워낙 이 헬게이트가 괴로웠던 시기 였기에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한나라를 그리워 했던때에서 기인한다. 정작 그 한나라가 조조가 태어날 때쯤부터 천재지변과 식량난으로 막장테크를 타며 이미 난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함정 그래서인지 실제 이 난세를 격지 않은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조조에 호의적인 의견도 많지만 중국에서는 재평가론이 일기 전까지 조조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편이었고 이후 중국 문학계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조조의 재평가 이후로는 호의적으로 보는 의견과 맞물리는 편이다. 여담으로 국내에서는 유독 조조의 악역 이미지가 순전히 삼국지 연의 때문에 생긴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조조의 악역이미지는 굳어 있었고, 나관중 또한 그런 성향을 그대로 따라 조조를 악역으로 그린거지, 악역 이미지는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당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시성인 두보가 자신의 벗 조패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 "영웅 위 무제의 후손" 이라고 칭찬하는 등 조조에 대한 시선이 나쁘지 않았으니 금나라의 침공으로 강남으로 밀려나 촉나라와 동질감을 느낀 송나라 즈음부터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명분에 죽고사는 성리학으로 인해 조조는 완전히 간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다만 상층부와는 달리 당시의 백성들은 조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더욱 이전 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다. 당장 바로 후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의 가십등을 정리한 책인 세실신어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이미 매우 부정적으로 굳어 있다는 것은, 상층부라면 모를까 백성들에게 조조의 이미지는 진나라 멸망 직후부터도 매우 안 좋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남북조 초기에 노예에서 황제까지 오른 인생역전의 주인공인 석륵또한 조조를 간교한 술책이나 부리는 자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등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29] 또한 조조의 적인 관우나 제갈량을 모시는 관제묘나 무후사등이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중국인들이 자신을 한족이라고 칭하기 시작한것도 송나라보다 훨씬 이전이다. 더불어 송나라 이후의 작품이지만 삼국지 평화같은 작품을 보면 조조는 훨씬 더 잔혹하고 찌질하게 나온다. 이런 삼국지 평화의 과도하게 악역적인 조조적 이미지는 민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라고 하며, 이를 보면 백성들에게 조조의 이미지는 삼국지 연의 이전부터도 매우 안 좋았던듯 하다. 솔직히 서주 대학살만 놓고 봐도...이를 볼때 조조의 이미지는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오랜 시대에 걸쳐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4. 기타

시호가 2개다. 위나라에서 올린 정식 시호는 효헌황제(孝獻皇帝)인데 대개 줄여서 헌제(獻帝)라고 부른다. 그리고 양위했을 때 촉한에서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착각해서(또는 일부러 살해당했다고 뻥쳐서 유비의 황제 즉위를 합리화하려고) 양위 소식을 접한 직후에 올린 시호는 효민황제(孝愍皇帝)로, 줄여서 민제(愍帝)라고 부른다. 촉한 정통론에 아주 철저한 사람들은 유협을 효헌황제나 헌제라고 부르지 않고 촉한에서 올린 효민황제, 약칭 민제를 썼고, 위진 정통론자들은 당연히 효민황제 또는 민제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헌(獻)이 시법에서는 좋은 의미로 쓰는 시호지만 한자의 의미가 바칠 헌자라서 뭔가 좀… 그리고 이 글자를 시호로 쓰는 황제는 헌제가 유일하다. 조선 헌종의 경우에는 '법 헌(憲)'자를 사용한다. 다만 고려 헌종은 헌제와 똑같이 바칠 헌(獻)인데 고려 헌종 역시 고려판 단종으로 숙부숙종에게 찬탈당했다. 결론은 여하간 민이든, 헌이든 보통 마지막 군주에게 붙여주는 시호란 것이다. 신라 경순왕이나 고려 공양왕"순순히, 공손하게 양위했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고 여하간 마지막 임금들의 시호는 줘도 이런 것 뿐이다.

중국 역대 왕조들의 마지막 왕들은 들로 항상 채워질 때 헌제만큼은 예외였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수수께끼로 남았으며 헌제를 통해서 암군인지 성군인지에 대한 떡밥도 간간히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30].

아무래도 원래는 영특하고 비범한 인물이었으나, 계속되는 환란과 동탁, 조조 등의 집권, 전 황제들의 실정으로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헌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빈털터리로 장안을 탈출해 조조와 손잡고 나중엔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주살하고자 꾀하는 등, 후한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1.5. 미디어 믹스

2. 의 5대 황제 옹정제의 시호

이쪽은 憲帝. 원래 시호는 매우 길지만 줄이면 헌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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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협의 손자이다.
  • [2] 아무래도 동탁, 조조 같은 두 거인들에게 압박을 받으며 살다가 끝내 그나마 갖고 있던 제위마저 조비에게 내줘서인지 단명한 것으로 유명한 동갑내기 제갈량과 같은 해에 죽었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듯.
  • [3] 후한 황제로서의 제위 기간이다. 위나라의 산양공(山陽公)으로서는 220~234.
  • [4] 위나라가 올린 시호. 황제에서 물러난 뒤에는 위나라로부터 산양공(山陽公)의 작위를 받았고, 사후에는 한나라 황제로 대우한 것. 헌제(獻帝)는 이 시호의 약칭이다.
  • [5] 촉한에선 헌제의 양위 소식을 들었을 때 헌제가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시호를 올렸다. 민제(愍帝)는 이 시호의 약칭이다.
  • [6] 폐위된 소제의 연호 광희(光熹)·소녕(昭寧)과 헌제의 첫 연호인 영한은 동탁 시절의 연호였다. 그래서 세 연호는 칙명에 따라 삭제되고 이 기간은 다음 연호인 중평이 쓰인 것으로 취급했다. 다음 주석도 참고.
  • [7] 앞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광희·소녕·영한의 연호가 삭제되고 그 기간은 중평의 연호로 표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년은 중평 원년이 아니라 중평 6년으로 취급된다.
  • [8] 촉한에서는 다음 연호인 연강을 인정하지 않아 221년까지 건안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유는 다음 주석을 참고할 것.
  • [9] 조조가 죽자 이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연호를 바꿨다. 연호를 정하고 바꾸는 것은 천자의 소관인데, 일개 신하인 조조의 죽음을 이유로 연호를 바꿨으니 조조가 실질적으로는 황제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때문에 촉한에서는 이 연호를 인정하지 않고 건안을 221년까지 사용했고, 이후 촉한의 황제에 즉위한 유비가 장무(章武)로 개원했다.
  • [10]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헌제는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인데 저 둘은 한경제의 아들이다. 하지만 전한 시대부터 갈라져 나온 셈이니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다. 참고로 유우유엽광무제의 후손으로 유우는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 유엽은 광무제의 7남 부풍질왕 유연의 후손이다. 더불어 헌제는 광무제의 4남 효명황제 유장이라 유우와 유엽은 유비보다 9대 정도 더 황실의 직계후손이라 정통에 가까웠다.
  • [11] 발해왕에 비해 역사상 매우 드문 작위였다. 정확히는 영제가 죽고 소제 유변이 즉위하면서 받았던 일시적 직위. 이름대로 조조의 고향인 진류의 왕으로 봉해진 것이다.이름부터 마리오네트 예감. 그런데 189년에서 정확히 76년 후 위나라 황제 조환사마염에게 선위하면서 받았던 직위도 진류왕이었다.근사한 수미상관법. 사마염이 조환을 진류왕에 봉할 때 헌제의 황제 즉위 전 작위였던 점도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진류가 조조의 고향이었던 점은 고려했을 듯하다.
  • [12] 유우는 상술했다시피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의 5대손이라 광무제의 후손이라는 점만 고려하면 정통성이 높았다. 다만 유강의 어머니 곽씨가 폐후라서 서자 취급을 받긴 했지만...
  • [13] 문제는 원소, 원술이 당시 중국의 양대 세력이었고 여기에 유표와 유언까지 더하면 이들에게 필적할만한 군벌은 공손찬, 조조 정도 밖에 남지 않는다.
  • [14] 헌제를 얻기 이전까지의 조조는 거대한 원소의 하북 세력에 붙어있던 여러 군웅 중 하나에 불과했다.
  • [15] 이 당시 여러 군웅들 중에 헌제를 옹립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군웅은 조조손책, 이 둘뿐이였다. 그래서 손책은 한 황실 조정을 습격하여 헌제를 조조로부터 구출해서 자신이 옹립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만약 손책이 그 때 죽지 않고 헌제를 옹립하는 데에 성공했더라면 손책이 천하를 통일했을 수도 있었는데 문제는 조조와 손책 이외의 군웅들은 죄다 이런 안목이 없었다. 원소는 동탁 따위가 옹립한 놈은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시도했고 유표와 원술은 그냥 자기들이 칭제했는데 원술이 대놓고 칭제한 것과는 다르게 유표는 은근히 칭제했다.
  • [16] 헌제는 동탁이 소제를 살해하고 앉힌 황제라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동탁사후 이각, 곽사의 난으로 근위세력도 소멸하여 실권도 명분도 다 잃은 상태였으나, 조조의 군사력을 의지하여 헌제 자신의 권위도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졌다.
  • [17] 연의에서는 이 과정에서 암살계획을 조조에게 누설한 동승의 노비도 조조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 노비를 죽인 이유는 한마디로 "주인을 무는 개는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
  • [18] 보통 '동귀비'로 알려져 있으나, 정사에선 '동귀인'으로 나온다.
  • [19] 앞에서 말했듯 제갈량과 생몰년 동일
  • [20] 200년 요절한 헌제의 장남 남양왕 유풍(劉馮)의 아들로 산양공 재위가 무려 51년이었으며 태강 6년(285년) 사망했다.
  • [21] 산양공 재위가 4년이었으며 태강 10년(289년) 사망했다.
  • [22] 산양공 재위가 20년이었으며 영가 3년(309년) 피살되어 산양공국이 소멸했다.
  • [23] 鼎 왕업을 상징하는 세발 솥.
  • [24] 아이러니한건 선양을 하고 물러난 황제를 죽이는 전통이 유송의 건국으로 시작된 점이다. 유유가 유송을 건국, 동진을 멸망시키면서 공제(恭帝) 사마덕문에게 선양을 받자마자 죽여버렸다. 이후 등극한 왕조들은 유유의 행동을 그대로 본받아 실행한 것일 뿐이다. 유방부터 그렇고, 유씨는 좀 문제가 있네요
  • [25] 하지만 이 소위 "평화로운 선양" 덕분에 황제를 협박해 신하가 황제가 되는 일이 잦아지자 이런 행위의 기틀을 세운 조조가 간신의 대명사가 되어 망탁조의의 한 명이 되었다. 물론 당대 역사가들도 같은 망탁조의라고 해서 동탁 같은 인간말종과 왕망 같은 비현실적 이상주의자와 조조, 사마의 등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 [26] 헌제 역시 동탁의 괴뢰정권에 의해 추대되었다는 정통성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 [27] 유유의 경우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이 만만치 않았고 동진의 치세가 고착되어 있어서 반발이 심했다. 따라서 동진 복권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세워진 유송이 워낙 막장이라서 소도성이 굳이 몰살을 시키지 않아도 유송이 복권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 [28] 당시 조조 세력내 순욱의 위치는 제갈량 이상이었다. 유비세력내에서 제갈량이 자살해 버린 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세한 건 순욱 항목을 참조하자.
  • [29] 석륵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황제까지 올라온 자이기 때문에 당시 민심을 잘 반영하는 황제였다.
  • [30] 조조가 악인으로 취급받은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헌제가 암군이었다면 조조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검증도 안 된 상태에서 조조가 권력을 꿰찼으니 애매하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