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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last modified: 2015-03-18 01:29:16 Contributors

대한민국 월드컵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 진출을 지휘한 감독

이름 허정무 (許丁茂 / Huh Jung-Moo)
생년월일 1955년 1월 13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학교 영등포공고 - 연세대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신체조건 174cm
혈액형 AB형
등번호 17번(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당시)
선수데뷔 1978년 한국전력 축구단
소속팀 한국전력 축구단(1978)
해병대 축구단(1978~1980)
PSV 아인트호벤(1980~1983, 77경기 15골)
현대 호랑이(1984~1986, 34경기 4골)
국가대표 1974~1986, 84경기 25골
지도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89~1990 / 트레이너)
포항 제철 아톰즈(1991~1992 / 코치)
포항 제철 아톰즈(1993~199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93~1994 / 코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95)
전남 드래곤즈(1996~1998)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98~2000)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2004 / 코치)
전남 드래곤즈(2005~200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2008~2010)
인천 유나이티드(2010~2012)

198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순호
FW
이태호
FW
종철
MF
박창선
MF
허정무
MF
영증
DF
용환
DF
박경훈
DF
박성화
DF
종수
GK
연교

Contents

1. 소개
2. 선수시절
3. 지도자 생활
3.1. 클럽
3.2. 대표팀
3.3. 2010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
3.4. 월드컵 이후
4. 허카우터
5. 허정무 재평가론
6. 해설자
6.1. 해설자시절 차범근과의 갈등
7. 기타

1. 소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前 축구 선수, 前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前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 현재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부총재. 무 재배에 특화된 영농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사상 처음으로 공한증과 월드컵 원정 16강의 벽을 허무는 양대 업적을 이룬 감독. 한때 국가대표팀이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한 탓에 4년에 한번 축구 보는 FC국대빠 사이에서 '허접무'란 조롱을 듣기도 했으나, 그가 지휘봉을 놓은 이후 국가대표팀은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선수 시절의 별명은 그의 출신지를 본뜬 진돗개.

2. 선수시절

K리그가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축구 팬들 사이에서 '고려대학교차범근, 연세대학교의 허정무'라는 인식이 있을 만큼 일세를 풍미한 스타 선수였다. 저도의 축까 사이에선 조중연 축협 부회장과 학연으로 연결되었다고 운운하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져 있지만 정작 조중연고려대학교 출신. 뭐든지 그렇지만 까는 것도 제대로 알고 까야 먹혀드는 법이다.

하지만 의외로 축구는 늦깎이였다. 7남매중 네째였던 허정무는 경제적 사정으로[1] 고등학교를 진학할 방법이 체육특기생 밖에 없었고, 먼 친척뻘인 허윤정[2]의 권유로 중동중학교의 유판순 감독을 만난다. 하지만 축구 비경험자에 당시 153cm의 왜소한 신체 조건을 보고 단칼에 거절당했으나, 사정사정해서 중졸이지만 2년을 꿇고 다시 중동중학교에 편입해서 축구를 배운다.
강훈련으로 유명한 유판순 감독이 나중에 질려서 만류할 정도로 독하게 훈련을 거듭한 끝에, 축구를 시작한 지 4년만에 U-20 대표팀에 뽑혔고, 다시 2년 뒤 국가대표에 뽑힌다. 흠좀무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에 자극을 받아 해병대에서 제대한 후 해외 진출을 꾀하다가, 1980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명문 클럽인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다. 에인트호번에서 활동했던 3시즌 동안 77경기에 출장해서 15골을 넣었다. 이 때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것을 감안하면 꽤 준수한 기록이다. 네덜란드의 전설인 요한 크루이프를 전담 마크해 인상적인 경기력을 펼치기도 했으며, 세계적인 공격수 뤼트 판 니스텔로이도 그가 어렸을 적에 허정무의 활약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3년 시즌 중 PSV와 계약이 만료되자 귀국한그는 현대 호랑이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K리그에서 활동했으며, 1986년에 월드컵 국가대표를 지낸 뒤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1986년 박창선, 차범근, 최순호 등과 함께 멕시코 월드컵 국가대표로 뛰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마라도나를 걷어찬 일화# 때문에 요즘 축구 팬에겐 독종 수비수로 오해를 사지만, 원래 포지션은 미드필더로 뛰어난 공격력을 보여 주었고 마지막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 1골을 기록했다.[3] 현역 시절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했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4] 강한 승부욕과 체력을 바탕으로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라, 전담 마크맨의 임무를 맡겨도 별 무리 없이 수행했다.관련한 칼럼

3. 지도자 생활

'무승부의 승부사 허정무승부', 무재배의 달인 등의 별명이 있는데 사실이다. 허정무는 감독 생활 전반기를 통틀어 이례적으로 무승부가 많은 감독이며, 전남 드래곤즈 감독 시절의 9연속 무승부 등 화려한 무승부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 이를 비칭으로 여긴다면 그건 왜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기 때문이다.[5]

3.1. 클럽

포항의 이회택 감독이 1992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물러나자 1993년 코치직에서 감독으로 영전하게 된다.
1993년 감독 첫 해는 리그 6팀 가운데 4위를 차지했지만, 아디다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1994년 전북 버팔로가 새로 창단하여 7개 팀으로 리그를 운영했는데 당연히 전북은 승점자판기 노릇을 하며 상위를 노리는 팀들은 치열한 레이스를 벌여야 했다. 결국 포항은 승점 50점 3위로 리그를 마친다. 2위는 유공(51점) 우승은 일화(54점). 한편 아디다스컵은 작년과 정반대로 신생 팀 전북에게도 밀려 꼴찌를 기록했다.
1995년 전후반기로 나뉜 리그에서 후반기 우승을 차지하여 전반기 우승을 차지한 일화와 대결하나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한다. 이 독특한 제도 때문에 오늘날 기록지를 뒤져보면 뭥미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우승을 차지한 일화는 승점 48점이고 준우승 포항은 승점 55점이다(...) 한편 아디다스컵 성적은 8개팀 가운데 7위로 역시나 좋지 못했다.[6]

이 시기 일화의 호화 멤버를 언급하며 포항의 호화 멤버 못지 않았다고 허정무를 커버해주는 의견이 있지만, 그래봐야 일화의 멤버와 포항의 멤버를 비교해 볼 때 누가 더 국대에 많이 뽑혔느냐로 가려 보면 우열은 명확하다. 그리고 허정무가 그 일화의 뒤를 이어 준우승이나마 차지한 것도[7] 이회택이 리빌딩까지 다 끝내고 물려준 우승멤버들을 3년이나 굴리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거기다 코치에서 영전해 올라온 거라 팀적응이고 뭐고 없던 시기였다. 그냥 이 시기 허정무는 지지리 못했을 뿐.

다만 이 시기를 언급하기 애매한 것이, 포항을 과연 온전히 허정무의 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 부호가 달린다. 최상단 허정무의 커리어 연표를 보면 한가지 어이없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1994~95년 포항 감독직과 대표팀 코치/감독직이 겹친다. 즉 멀쩡한 프로팀 감독을 시즌 도중 월드컵 대표팀으로 데려갔다(...)[8] 사실 전임 이회택 감독도 199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납치당한 경력이 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정몽준 취임 이전 축구협회가 얼마나 주먹구구 행정으로 돌아가는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잠깐 국대 감독을 맡았지만 전임 감독제도 없던 시절이니만큼 반쯤은 봉사직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1996년 전남은 성적 부진을 구실로 창단 감독인 병탁 감독을 시즌 도중 경질하고[9] 허정무 감독을 영입한다.
그리고 1997년 전남은 역사를 쓴다. 바로 21경기 무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황신의 가호가 깃들면서 전남은 리그에서 승점 1점차 2위 분루를 삼켜야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아디다스컵 2위 프로스펙스컵 2위를 기록했다(...) 전남팬이던 아니던 보는 이로 하여금 참 웃프게 다가오는 기록인데, 더 골때리는 부분은 저 3개 부분에서 전남을 꺾고 1위를 차지한 팀이 똑같다. 바로 부산 대우 로얄즈 K리그에서 단 둘 뿐인 왕조 칭호를 들은[10] 바로 그 팀 바로 그 해였다.
결국 리그가 끝나고 열린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남에게 창단 3년만에 우승컵을 안겨 주었다. 다만 항목에 나와있지만 이 시기 FA컵은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느끼는 것과 위상이 약간 달랐다는 점은 참고하자.

1998년에는 4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나[11] PO 첫 경기에서 무재배 승부차기로 탈락한다. 그리고 1998년 차범근 감독이 네덜란드전 대패로 인해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 그 후임으로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감독에 임명된다.

대한축구협회 대표팀 수석코치 자리를 그만두고 2005년 전남으로 부임한다. 이즈음 전남은 2003년 이회택 감독이 리그 4위 FA컵 준우승의 호성적을 일구고 사임했고, 2004년 우승을 노리고 야심차게 영입한 이장수 감독은 리그 3를 차지했으나 프런트와 갈등을 빚고[12] 1년만에 사임한 상황이었다.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2005년 13개팀 가운데 11위를 차지했다.[13] 여기서 지적할 부분은 바로 2000년을 전후한 전남의 성적이다. 앞서 대표팀으로 떠난 허정무 감독의 뒤를 이어 이회택 이장수 두 감독이 맡았던 1999~2004년까지 리그 성적을 보면 4/10-7/10-8/10-5/10-4/10-4/10로 잠깐 주춤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노쇠한 스쿼드를 갈아엎고 리빌딩에 착수하면서 생긴 현상인데, 이회택 감독이 끝까지 매조지를 하지 못했고 설상가상 이장수 감독이 사퇴한 것도 전력 보강을 위해 외국인 선수 영입을 두고서 프런트와 이견이 생긴 탓이었다. 결국 전임 두 사람이 한참 다져나가다가 도중에 손을 뗀 기반을 또 다지는 삽질을 벌인 것이다.
다행히 이런 난맥상은 2006년 리그 6위를 차지하며 반등의 기미를 보였고, FA컵을 들어올리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2007년 리그는 10위에 그쳤지만 또 다시 FA컵을 들어올리며 2년 연속 FA컵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이 해는 일명 '파리아스 매직'으로 포항이 리그 5위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를 뚫고서 최종 우승컵을 들어올린 때였다. 또한 포항은 FA컵 결승전에도 올라왔기 때문에 더블을 노릴 수 있었는데 전남이 이를 저지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리그 감독 납치 좀 고만해 축협 미친놈들아

한가지 첨언하지면 이때 전남은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동남아 팀을 상대로 졸전을 벌이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극단적인 국뽕들은 전남 같은 팀이 아챔에 나가는 자체가 나라망신이라며 서울 수원 성남 등 호화 스쿼드를 갖춘 강팀만 참가자격을 줘야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14] 펼 정도였다.

결국 월드컵 원정 16강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2010년 9월 4일부로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으며 K리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데뷔전에서 모두의 예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인천 사령탑 생활을 시작했다. 두번째 경기인 상무와의 경기에서마저 후반 45분에 동점골을 먹히면서 또 한 번 무를 캐냈다. 인천 망했어요

다행히 3번째 경기인 대구 FC와의 2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완승하며 인천에서의 첫 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2007년 포항 스틸러스와의 FA컵 결승 2차전 승리 이후 무려 1022일 만의 K리그 승전보. 23라운드 서울전에서는 0-2로 무너지며 인천 부임 후 첫 패배를 당했다.

10월 9일 대전 시티즌전에선 유병수의 해트트릭으로 3골 차로 앞서가다 후반 중반부터 내리 3골을 허용하며 그 보기 드물다는 3-3 무승부를 연출했다. 정규리그가 종료된 시점에서 그의 성적은 10경기 2승 6무 2패. 과연 명불허전이다. 다만 이는 축구팬들이 농담조로 하는 말인 만큼 진지하게 새겨 들으면 곤란하다. 인천 유나이티드 항목에 상세히 나와있지만, 당시 인천 유나이티드는 팀 캐미스트리가 완전히 붕괴되어 승점 자판기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나마 허정무 부임 후 어렵사리 팀을 추스려서 성적을 낸 것.

2011년 3월 5일 시즌 첫 경기에서 상주 상무에게 2:0으로 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주(0:0)/대구(1:1)전을 연달아 무재배하는 권능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8무 2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8월 20일 리그 22라운드 경기에서 꼴지 강원 FC와의 안방 경기도 0:0으로 비기면서 10경기 무승의 무재배 저력을 보여주자 열불난 서포터들이 선수단 입구 쪽에서 '허정무 나와라!'며 야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몰래 피해 다른 입구로 빠져나왔다.

8월 27일 리그 23라운드 대전 시티즌과의 홈 경기에서 드디어 11경기만에 2:0으로 이기면서 무재배를 잠시나마 나왔다.

그러나 결국은 2011시즌을 14무라는 무승부 1위 기록과 역시 무재배 지존이라는 명성을 확인시키고 만다. 최종 리그 성적은 6승 14무 10패로 13위. 여담인데 10무를 넘게 무승부를 기록한 다른 팀은 전남(...)과 제주 뿐으로 딱 10무씩 거뒀다.

그리고 12월 6일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끄는 인천 구단의 부진에 대하여 구단 사장이 잘못이라는 말을 하다가 대폭 까였다. 알다시피 인천은 시민구단으로서 재정이 탄탄하지 못하다. 게다가 전임 시장의 엄청난 개발 논리로 인하여 10조원이 넘는 막대한 빚에 시달리는 인천광역시로서 인천 구단에 원하는 대로 돈을 대해줄 수가 없다. 게다가 이 인터뷰에 조건도 현 인천 사장은 원하는 대로 4명 영입해 주고 할 수 있는대로 해줘도 성적이 이 모양인 걸 남 탓한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인천 팬들은 조건도 사장이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는 입장이다. 2011년에 영입한 선수가 권정혁, 김한섭, 엘리오, 알미르 4명인데 이 중에서 이적료는 단 한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전부 트레이드 혹은 자유 계약. 자기가 데려온 것도 아니고 감독이 스스로 구해온 것을 두고 할 수 있는대로 해줬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 뻔뻔하다. 결국 2011시즌이 끝난후 조건도 사장이 사임하였다. 사실 인천 구단의 수뇌부는 구단주-사장-단장간 관계가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구단 운영의 여러 부분에서 사사건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일단은 인천 감독으로 있지만 다음 시즌 리그 8위에 들어가지 못하면 감독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 무재배 축구로 가능할까 결국 1승 1무 4패 14위의 성적을 마크하며 여론의 압박을 받자 2012년 4월 10일자로 자진사퇴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광주전에서 무재배를 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후 인천은 김봉길 감독의 지휘 아래 무기력한 모습을 깨뜨리고 시즌을 9위로 마쳤다.

일설에 따르면 원래 몹시 엄한 스타일이었던 허정무가 조용한 리더 스타일의 박지성과 함께하고, 또 그와 함게 일생의 숙원이던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업적을 일궈낸 이후 사람이 많이 변했고 그렇게 안 하던 일을 하게 된 것, 독기가 빠진 것이 폭망의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전남 시절 제자 정인환, 김명운 등과 김남일 설기현 등 본인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시민구단의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기존 선수를 내주면서까지 데려오며 대대적으로 스쿼드를 갈아엎으려 했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감독 자신의 축구철학과 전술과 걸맞는 선수를 모아서 스쿼드를 꾸리는 것은 감독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 돈은 구단주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선수를 데려오는 업무는 프런트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감독은 전술 못지 않게 정치와 경제 감각이 있어야 한다.
물론 허정무의 장점이 있는 스쿼드대로 성적을 낸다는 것이지만, 지금껏 감독 생활을 하면서 없는 스쿼드를 재주껏 메꾸는 능력만큼은 검증받은 바가 없었다. 각급 대표팀에서야 매의 눈으로 찍어둔 선수들을 콜업하면 구단들이 군소리 한마디 없이 갖다바쳤고, 포항과 전남은 액수가 좀 차이는 나겠지만 엄연히 대기업 구단이다.
오히려 거꾸로 허정무 영입은 구단 고위층이 파워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저명인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몇년 뒤 똑같은 일어느 시민구단에 또 한번 생기는데...

어쨌든 그의 파란만장한 감독인생이 월드컵이라는 최정점을 찍고는 일단락된 느낌이다.
허정무가 감독으로서 K리그에서 남긴 기록은 121승 128무 113패.

2013년 3월 7일 정몽규 축협회장이 선임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행정가의 길로 들어섰다.

3.2. 대표팀

1986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1990년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 1994년 월드컵 대표팀 코치 등을 역임한다.

1998년 네덜란드전 5:0 쇼크로 예선 도중 경질당한 차범근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직이 공석임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에서는 경쟁 청문회를 통해 감독을 선발하였다. 당시 함께 후보에 오른 지도자는 차만김호곤이었으며 이 경쟁에서 승리한 허정무는 올림픽 팀을 겸하는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으나 8강전에서 태국에게 1:2로 패하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리고 1999년 일본과의 평가전 원정경기에서 4:1로 능욕당하면서 25년만에 3점차 일본전 대패를 당해 비난을 당했다. 이에 복수로 벌인-미리 1,2차전을 평가전을 가지기도 했지만- 2차 평가전 안방경기에서도 1:0으로 지면서 일본전 2연패와 같이 비난을 속사포처럼 당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며 본선에 진출했다. 그런데 2승 1패 탈락이라는 황당한 성적표를 받는다. 1차전인 스페인전에서 3:0 대패를 당하는 바람에 이어진 모로코칠레전을 모두 1:0 승리로 거뒀지만, 2승 1패 성적에도 불구하고 칠레에 골득실이 밀려서 탈락했다(...) 참고로 칠레가 동메달, 스페인은 은메달을 받았다. 금메달은 카메룬으로, 2연속으로 아프리카 국가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성인대표팀은 비교적 주목을 덜 받았지만, 브라질을 1:0으로 꺾고,[15] 2000 아시안컵에서 3위에 오르는 등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 탈락에 이은 아시안컵 우승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벌어진 촌극 아닌 촌극이 또 하나 있는데, 2000 북중미 골드컵에 초청 팀 자격으로 출전할 때였다. 캐나다, 코스타리카와 예선 한 조를 이루던 중 세 팀이 모두 2무가 됨에 따라 다득점에서 공동 2위가 된 캐나다와 추첨으로 8강 진출을 가리게 되었는데, 이 때 동전을 잘못 고른 한국은 탈락하고(...) 간신히 8강에 오른 캐나다는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북중미 골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미국과 멕시코 이외의 우승팀이 나온 대회이기도 하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기술고문을 맡았다가, 2004년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에 오른다. 그러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잇달은 졸전 끝에 해임되고 조 본프레레 감독이 선출되면서 임시로 수석코치 자리를 맡았다. 약 5개월 뒤 본프레레 체제가 안정되자 수석코치를 사임하고 다시 K리그 감독으로 복귀했다.[16]

2007년 12월 핌 베어백 감독의 후임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자세한 행적은 허정무호 참조.

3.3. 2010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

2009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가 우승한 이후 포항의 공격적인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부 팬들이 맨날 무승부만 하는 허정무 말고 포항 스틸러스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을 국대 감독에 앉히자!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정작 허정무 감독은 2007년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K리그에서 우승한 포항 스틸러스를 FA컵 결승전에서 1, 2차전 통틀어 3:2, 3:1로 발라버리고 포항의 더블을 저지한 전력도 있다. 적어도 둘의 맞대결에선 허정무가 파리아스보다 위에 있는 셈.[17]

강도 높은 훈련과 피지컬, 투쟁심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호랑이'라는 별명도 있다.[18] 지장형이 아닌 카리스마형 감독으로 팀 장악력은 일품. 그리고 선수 특성을 생각해서 전술을 맞추는 경향도 있다. 과거 코엘류, 핌 베어벡 두 감독이 급작스레 사임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그때마다 선수들 사이에서 잡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내부 결속을 잘 이끌어 냈다. 그러나 전략 전술 능력은 평이해서 전술가형 수석코치가 옆에서 보좌할 필요가 있다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선수 시절 센터백까지 뛰어본 풍부한 경험 덕분에 전술 이해도는 대한민국 지도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다.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쳤고, 체육 장학생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전형적인 코스를 밟았기 때문에 학연 지연으로 선수를 뽑는다는 루머에 자주 시달린다. 그것은 3분류로 선수를 선발한다는 악성 루머였다. 특정 지역에서 태어난 선수, 특정 지역 연고 팀에서 뛰는 선수, 누가 봐도 뽑을 선수로. 하지만 하단의 허카우터 항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정말 저 3분류로 선수를 선발했다면 뽑지 않았어야 될 선수를 뽑아서 성공시킨 사례가 상당히 많다. 그 때문에 당연히 근거 없는 루머라고 부정되었다.

사실 201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까인 이유는 전적으로 축구협회의 언론 플레이 때문인데 핌 베어벡 前 감독의 사임 이후 맥카시(당시 울버햄튼 감독)[19]/제라르 울리에(당시 프랑스 축구협회 기술고문)에게 오퍼를 넣었다고 했지만 둘은 거절했다.(오퍼를 넣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축협은 계속 외국인 감독을 알아보겠다고 언론 플레이를 했지만 오퍼가 거절당했다고 발표한 몇 시간뒤 갑자기 '이제 한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 때가 됐다'며 허정무 감독을 선임했다. 이러니 욕을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역시 축협은 만악의 근원

일부에선 허정무의 박지성 활용 문제를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전술상의 실책으로 보긴 어렵다. 전통적으로 대표팀은 우수한 윙어가 많아 늘 경쟁이 치열했다. 또한 박지성은 수원공고 시절 스트라이커로 시작해서 명지대학교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이었고 히딩크 감독이 윙어로 조련했으며 아드보카트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능력에 주목한 글자 그대로 멀티 플레이어다. 넘치는 윙어에 비해 부족한 중앙 미드필더 자원을 고려했을 때, 당분간 박지성의 포지션 고정은 요원할 듯 하다.

허정무호 A매치 성적은 2009년 11월 15일 기준으로 14승 13무 1패. 2008년 데뷔전에서 칠레에게 패한 것을 제외하면 압도적인 28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오만전이 비공식 경기가 된 탓에 공식으로는 27경기 무패. 어쨌든 최종예선 전까지는 상대팀이 모두 아시아권인 것을 감안해도 괜찮은 성적이라며 옹호하는 사람과 무재배의 달인이라며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이 상황은 최종예선 무패 통과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있다.

11월 15일에는 덴마크와도 비겼다. 진짜 월드컵에서 7무 우승[20]해버리는 건 아니겠지만 싶어도(...) 하지만, 11월 19일에 세르비아에게 지면서 무패행진이 끝났다.[21]

허정무의 무재배 기술(?) 때문에 디시인사이드의 국내축구 갤러리에서는 '허정무컵'이라는 가상의 대회 짤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정무컵 참고.

2009년 12월 4일 허정무호는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함께 B조에 편성됐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맡은 마라도나와 악연이 있기 때문에 어찌 될 지 주목되었다. 게다가 마라도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라고 언론에 언급했다. 이 때문인지 남아공 월드컵 B조 예선에서 대한민국-아르헨티나 전을 앞두고 있을 때,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신경전[22]이 상당히 심했다.

2010년 2월 10일, 동아시아컵에서 만만하던 중국에게 3:0으로 대파당하면서 미친듯이 까였다. 게다가 스코어로도 그렇지만 경기력으로도 완전히 시망수준이라 상당히 까인다.[23] 실제로 본 문서도 반달리즘으로 단 2줄로 줄어들었다는걸 감안하면 축구팬들의 반응이 싸늘해진것이 한번에 이해되는 대목. 2007년 다시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자신의 축구 인생 전부를 걸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축구 인생 날아가게 생겼다.(…) 그 와중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와야 할 일이 오늘 왔을 뿐"이라고 해버려 더더욱 씹히는 중.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32년 대 중국 무패 기록을 날려버린 날(그것도 3대0으로 참패...) 할 말은 아니라는 것. 아 망했어요. 허정무.

2010년 2월 14일 단두대 매치 동아시아컵 마지막 경기였던 한일전에서 일본에게 3:1로 승리하였다. 일본 도쿄 원정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지만 중국 쇼크로 인해 뒤돌아선 여론의 반응을 돌리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 쪽에서 '이제 우리감독 짤리는구나'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미묘한 상황(…)이다.[24]

그래도 다행히 드록국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한 3월 3일 평가전에선 해외파들의 대거 발탁과 되도않는 지배전술이 아닌 수비라인을 끌어내린 전술을 사용하여 문제되던 자동문을 고장(...)내고[25] 2:0으로 승리하였다. 그래도 아직 아쉬움도 있지만[26] 열심히 하면 16강을 노려볼 만 하다.

에콰도르와의 경기도 2대0으로 이기고, 일본 사이타마에서의 한일전 2대0으로 또 이기면서 일본의 출정식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또 영 아닌 경기로 져버렸기에 욕 먹고 있다.[27] 결정적으로 상대가 꽤나 거칠게 태클을 하던판에 그나마 조용형과 제일 잘 하던 센터백인 곽태휘를 잃고 말았다. 도대체 왜 월드컵 비출전국이랑 해서 선수들만 날리냐는 원성도 나오는중...

그리고…… 대망의 2010년 월드컵에서 그리스를 쌈싸먹는데 성공하면서 국내파 감독 최초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승리를 기록한 첫 자국 출신 감독이란 타이틀길다을 획득했다. 오오오오...허감독...그 승리로 당분간 까방권을 획득할 듯 싶었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차두리 대신 오범석을 기용하거나 실책을 거듭하는 염기훈을 냅두고 잘 뛰던 기성용을 빼버리는 등 용인술에 실패, 4:1 완패를 기록하면서 대차게 까였다. 아르헨티나가 강팀이니 패한 것 자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술적인 면이나 선수기용에서 비난의 여지가 너무 많았기 때문. [28] 카를로스 테베즈도 경기 후 한국 선수들이 그리스전처럼 공격을 하지 않아 굉장히 놀랐다 라며 인터뷰하였다.

아르헨티나전 패배 이후, 패배의 원인인 오범석을 아르헨티나전에 기용한 이유가 다름아닌 인맥 때문이었다는 루머가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오범석의 아버지가 허정무와 같은 연세대학교 동문이자 축협의 기술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한국 내셔널리그 이사이기 때문. 이에 대해 허정무는 오히려 오범석에 대해서 나름대로 잘했다고 평가했다.(...) 경기를 보긴 한건가[29]

나이지리아전에서는 다시 그리스전 때의 포메이션으로 돌아갔고, 선제 골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무승부를 거두며 국내파 감독 최초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한 첫 자국 출신 감독이 되었다. 소극적이고 수비적인 전술운용 및 선수기용으로 인해 이리저리 많이 까였지만 그래도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루어 냈으니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이름 한 줄 명예롭게 남기게 되었다.

16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우루과이에 2:1로 석패했다.[30]

3.4. 월드컵 이후

언론에서는 추후 행선지로 포항행 떡밥을 투척했다. 1990년대 초반 코치, 감독으로 재직한 연이 있기 때문인데, 막상 포항 팬들의 여론은 나빴다. 파리아스 이후 뿌리를 내린 '아름다운 축구'와 허정무가 추구하는 '견고한 축구' 스타일이 완전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2012년 인천에서 사퇴한 뒤, 2013년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복귀했다.

2014년 7월 3일 브라질 월드컵 졸전을 펼친 홍명보 감독의 유임여부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어 유임을 발표하였다.

1주일 후, 홍명보 감독이 자진 사퇴하자 본인도 결국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1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부총재로 선출됐다. 경기위원장을 겸임한다.

투자에 매정한 소속팀 때문에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황선홍 감독과 다르게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좋지 않다. 거스 히딩크가 자신을 밀어내고 부임해서 미래를 위해한창 삽질할 적에는 조광래 등 국내 지도자들과 더불어서 깠고, 코엘류나 베어백 등에게도 다분히 비판적이었다.
현재 국가대표팀 감독인 슈틸리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홍명보가 개판오분전을 만들어 놓고 있었을 때, 심지어 자진 사퇴 직전까지도 온갖 말로 쉴드를 쳐주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4. 허카우터

선수의 기량과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나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스카우터를 덧붙인 허카우터.

그가 발굴해 낸 대표적인 선수가 다름아닌 박지성이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2군 입단 테스트에 떨어지고 불러 주는 대학이 없어서 명지대학교에 겨우 들어갔던 미드필더 박지성의 재능을 눈여겨본 그는 박지성을 바로 올림픽 대표로 뽑았고[31] 이후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를 만나 승승장구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까지 가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무명이었던 미드필더 구자철을 발굴해 낸 장본인 역시 허정무였다.[32] 현재 K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수로 활약하고 있는 김주영도 허정무가 발굴한 사례. 과거 허정무가 김주영을 보고 "공격수라면 대학도 못간다, 하지만 수비수라면 국가대표도 가능하다."라고 했는데 그후 실제로 김주영 K리그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안착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안목의 날카로움을 알 수 있다. # 또한 국가대표급 수비수로 성장한 정인환 역시 허정무가 키워낸 인재. 정인환은 용인유소년축구센터(백암고) 시절 허정무가 조련한 인연으로, 후에 허정무가 전남 드래곤즈,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직 중에 핵심 선수로 영입하기도 했다. 전남 감독으로 있었을 때 센터백 곽태휘도 그의 손을 거치며 뒤늦게나마 성장했다.

그 외에도 2007년 당시 청대였던 윤빛가람을 보고 '재능이 있긴 한데 그리 특출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발언을 했는데, 2012년 윤빛가람이 폭망하자 이게 재조명되기도 했다. 김신욱김보경을 맨 처음 대표팀으로 콜업했던 사람도 허정무였다. 당연히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디서 듣보잡을 데려오냐?'였다.

1999년 대표팀 감독 부임 시절에는 무명이었던 이을용을 대표팀에 발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올림픽 대표팀 감독 시절에 이영표를 알아보고 올림픽 대표팀에 뽑아 올림픽 대표침에 뽑힌 후 3개월만에 국가대표까지 가게해준 장본인.

그 외에도 2002 한/일 월드컵 출전 선수 중 상당 수는 1999~2000년 대표팀 감독 부임 시절에 선발했던 선수들이다.[33]

그의 이런 능력 때문에 축빠들 사이에선 감독하지 말고 유소년 키우는 일에 전념해줬으면 한다는 말마저 나올 지경.어째 대립했던 차범근항목에도 이거랑 비슷한 소리가 있는거 같은데

실제로 허정무가 까일 때 별걸 다 까도 그의 선수보는 눈 만큼은 오히려 국내 톱으로 추앙받는다. 오오오. 매의 눈. 오오오! 그리고 이는 허정무가 까일 때 첫 월드컵 원정 16강과 함께 발동되는 가장 강력한 실드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발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아닌 부탁을 많이 한다. 정작 허정무 본인은 그 별명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 브라질 월드컵 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허카우터'라는 별명은 아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클럽 팀을 맡으면 유망주는 샘솟고 전술적으론 안정되지만 왠지 모르게 비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과도한 훈련으로 성적이 조금씩 내려가는 경향이 있었지만 허정무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 유망주 파워로 부임 전보다 성적이 올라가는 괴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5. 허정무 재평가론

국가대표 후임 감독인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의 부진으로 인해 묘하게 허정무 재평가론이 대두되고 있다. 2011.8.10에 있었던 조광래호의 한일전 3:0 떡실신 이후 재평가가 될듯 싶었으나, 그도 올림픽팀 감독 시절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4:1 떡실신을 당했던 과거가 있기에 피장파장이라는 의견도 있다. 무엇보다 이 양반도 중국전 3:0 떡실신 전설이 있잖아[34] 그러나 그 후 조광래호의 쿠웨이트 원정 비김으로 다시 축구팬들 사이에서 재조명 받고 있는 상태. 결국 조광래호의 레바논 쇼크이후 허정무 재평가론[35]은 힘이 실리게 되었다. 물론 조광래 호의 부진에 따른 결과론이자 비아냥의 의미가 강하지, 일선에서 물러난 그를 다시 국대감독으로 데려오자는 의견까지는 아니다. 다만 급조한 최강희호의 부진과 맞물리며 허정무를 적어도 아시안컵 까지는 연임시켰어야 했다는 의견도 많이 나온다. 비록 허정무호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축구를 했을지언정, 적재적소에서 깨알같이 승점을 캐내며 순항했으니까.

사실 허정무를 감독으로서 평가하자면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수 밸런스가 깨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안전지향적이라는 점이 주요 특징이다. 한 골 넣으면 괜히 기세를 올리다가 거꾸로 털리느니 그 때부터 뒤로 물러나서 걸어잠그는 쪽을 택하는 성향이다. 또한 상대를 꼼꼼히 분석해서 맞춤형 전술을 통한 판짜기에 강하고 세트피스를 통한 득점 루트 개선에 있어서는 능숙하지만, 현장에서 임기 응변은 떨어지는 편이다. 허정무가 무재배가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닌 이런 안전지향적인 성향 때문이다.

그런데 허정무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위협적인 세트피스나 이런 안전지향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후임 감독들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홍명보호의 박살이 나다시피한 수비력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듯.

재미있는 사실은, 허정무와 조광래 둘 다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을 연장전 결승골로 이겼다는 것과[36], 그 대회에서 3위의 성적을 올렸다는 점이 공통되는 부분이다. (...) 그러나 성적과는 별개로, 팬들 사이에서는 허정무와 조광래의 묘하게 대비되는 감독 스타일 때문에 심심치 않게 비교대상이 되기도 한다. 즉 조광래 감독이 자신의 전술에 선수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타입이라면, 허정무는 선수의 스타일에 맞춰서 자신의 전술을 유연하게 맞추는 타입이라는 것. 그래서 조광래 축구는 누가 봐도 조광래식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허정무 축구는 아무리 봐도 감독색깔이 드러나지 않고 그냥 선수가 잘 해서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허정무를 비난하는 까들의 주요 레파토리 중 하나가 "허정무는 그냥 선수빨로 이긴다"라는 주장이 많다(...) 안습.

하지만 선수빨은 일단 기본적으로 감독이 운용을 잘 해야 받는 것이다. 특히 2010 월드컵 16강 진출을 선수빨로 치부해버리는 까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역대급 선수진이라는 2010년 월드컵의 스쿼드도 선수빨로 16강 운운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양박쌍용이라는 대표팀의 중핵 역시 이청용과 기성용은 설기현과 김남일의 대체자로 리그에서 평범한 스텟을 쌓던 선수를 허정무 감독이 발견한 선수이며 박지성, 이영표 또한 허정무가 욕먹어가며 발탁한 선수이고, 조용형도 욕먹어가며 육성한 끝에 월드컵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김두현 조원희 김남일의 빈자리는 김정우를 과감하게 기용해서 김정우가 폼이 하락한 2011이후 그 대체자를 찾지못해 고민하고 있기도하다. 또 이후 유럽파로 이름을 날린 박주호나 구자철도 허정무가 처음으로 중용했으며, 수비라인의 곽태휘는 전남시절 키운 선수이고 그 밖에도 이근호의 과감한 발탁, 김주영의 어릴적 포지션 변경을 유도하여 국대급 센터백으로 만들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선수빨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근자감만 만땅이었던 국내 여론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을 예상했던 해외 언론의 분석은 거의 전무했다. 비교적 객관적인 해외의 전력 분석에서는 보통 멤버 전원을 유럽파로 무장한 나이지리아를 조 2위로 예상했지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고작 27.6%에서 많아야 33%로 꼽아 조에서는 거의 늘 최하위로 예상되었다.[37] 그만큼 제3자 입장에서 선수진만 놓고 봤을 때 당시 한국의 16강 진출은 의외의 결과였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0 남아공 월드컵 핵심 멤버들에 구자철, 손흥민, 곽태휘 등까지 가세한 아시아 최고 수준의 최정예 멤버로 아시안 컵 4강에 그쳐 박지성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를 망치고, 부상으로 신음하던 이청용을 굳이 친선 경기에 무리하게 차출하는 삽질을 하는 등[38] 선수 컨디션 관리 면에서도 엉망인 모습을 보여줬으며, 월드컵 최종예선도 아닌 3차 예선에서 월드컵 탈락 위기를 맞이했던 조광래나, 폼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네임벨류가 떨어지는 팀에서 뛰거나, 팀에서 출전을 아예 못하는 선수들을 오로지 자신의 원패턴적인 전술에 맞고 자기와 올림픽 등에서 같이 활동했다는것 때문에 무조건 기용하고 정작 자기라인이 아니면 제대로 실력을 증명받은 선수들이라도 홀대한 홍명보를 보자. 적어도 허정무는 팀 캐미스트리를 박살내거나 하는 등의 짓은 하지 않았다.

결국 돌이켜보면 2008-2010 허정무호의 과실은 중미 4명을 동시 기용하는 전술 실험을 했다가 흑역사로 남은 중국 쇼크 정도가 유일하다. 부임 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총합 7승7무를 거두며 압도적으로 본선에 무패로 진출했고,[39] 이후로도 27경기 무패 행진 기록(14승 13무)을 세웠으며, 일본 원정에 두 차례 가서 3대1, 2대0로 모두 이겼고, 실전인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목표였던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넷상에서 오랫동안 욕 먹어온 것에 비해서 이후 성과에 대해서는 알아주는 사람 없이 당연하다는듯 넘어갔고, 오히려 원정 16강 진출의 업적마저도 선수빨, 박지성[40], 야쿠부빨[41] [42] 등의 소리를 들으며 부당하게 폄하를 당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 한 측면이 크다.

어쨌든 허정무호의 결과만을 보자면, 허정무호는 아시아에서 절대 강자였고 월드컵에선 2014년 H조보다 훨씬 어려웠던 조에서 16강을 이뤄냈으며, 4강에 간 우루과이를 상대로 분투했던 팀이다. 이 모든 게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었고, 이 이상의 결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훨씬 심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었는지는...그 다음 감독들, 특히 홍명보호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물론 허정무도 지금의 대표팀이 이 모양이 되게 만든 대한축구협회의 중역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감독으로서 능력과 행정가로서 능력은 구분해야 해야하겠지만.

6. 해설자

1998년 월드컵 당시 전남 감독으로 재직중인 상태에서 SBS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KBS에서 해설을 맡았었는데[43], 이 때 홍명바라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영상훼이크고 사실 '홍명바 드립'은 서기철 캐스터가 했다.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vs멕시코전에서 황선홍이 골을 넣자
역시 방귀가 잦으면 이 나온다고요라는 저질 망언을 남겼다. 그리고 깨알같은 서기철의 그렇스빈다 그렇습니다

인천 감독직에서 사퇴한 후 다시 MBC에서 해설자가 되었다. 이렇게 지상파 3사를 모두 돌았다. 주로 K리그 중계가 거의 없는 MBC의 특성상 공중파 국가대표 경기 해설을 하였으며, 2012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경기 해설도 맡았다.

해설자로서의 평가는 할 필요도 없지만 한 마디로 술 먹은 동네 아저씨.(...) 공격시엔 시도때도 없이 슛을 지르라고 외치고,슛~!슛~!슛~!슛~!슛~!슛~!슛~![44] 실점을 하면 거침없이 앙탈,짜증을 낸다.(...) 반면 선방이나 득점상황에는 누구보다 좋아한다. 런던올림픽 잉글랜드전에서 남긴 명언이 '이게 하늘의 뜻입니다'런던의 하늘이었는데...아잌!

까페베네슛에 한이 맺힌 건지 6월 4일 월드컵 지역예선 레바논전에서는 경기 내내 이동국을 극딜하는 모습을 보였다.[45] 전술적 분석보다는 결과론적인 선수 비난이 잦다. 게다가 A매치 경기 해설에 있어서 사전 정보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당연히 평가도 좋지 않다. 페루와의 경기 때 뒤에서 패스돌리는데 셧!이라고 소리쳤다가 10초간 명상하다 다시 나왔다.

2014 브라질 월드컵 홍명보호 단장을 맡으면서 MBC 해설진에 합류하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 해설을 맡지 않는 것으로 보아 MBC와의 계약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6.1. 해설자시절 차범근과의 갈등

현역시절부터 차범근과는 자의반 타의반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대학때는 연세대-고려대 선수로, 해외에선 네덜란드-독일 리그로, 감독생활도 포항-울산으로 계속해서 라이벌 비스무리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직접적인 충돌은 1998 프랑스월드컵 때의 감독 차범근 vs. 해설자 허정무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대개 많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전 오대영 참패 이후 허정무와 차범근이 언쟁했던 것만 알고 있으나 이전부터 둘의 충돌은 잦은 편이었다. 특히 월드컵 전부터 허정무는 차범근의 수비 중심의 전술은 안 된다고 계속해서 비판해왔으며 무조건 공격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차범근 이후 허정무가 감독을 맡았을 때 취임 일성이 "용맹한 공격축구" 그러나 현실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청출어람

어쨌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첫 경기 멕시코전을 앞두고 열린 공식 기자회견이었는데 여기서 차범근은 황선홍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이 불가함을 밝히고 최용수도 정상 컨디션이 아닌데다 돌파력이 약하다는 평을 받은지라, 몸빵되고 볼키핑도 되는 김도훈을 원톱으로 하는 3-6-1 전술로 멕시코전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기자도 아닌 해설자 허정무가 불쑥 끼어들어 이런 뜬금없는 돌직구를 날리게 된다.

"차 감독, 만약 황선홍이 뛰고 싶다고 하면 뛰게 해 줄 겁니까?"

이게 사석이라면 별로 문제가 안 될 발언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외신기자들까지 다 불러놓고 진행하는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이미 감독이 황선홍의 출장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하고 그에 따르는 전술까지 발표한 상태에서 기자도 아닌 사람이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대놓고 감독을 디스하는거나 다름없는 무식한 행위였다. 당연히 차범근도 이 순간은 상당히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고. 주변 사람들이 허정무에게 이번은 당신이 잘못한거라며 차범근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해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억지로 차범근에게 사과를 했으나 차범근은 이 사과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전개는 아시다시피..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 때 당시 타 방송국의 해설자였던 MBC의 신문선과 KBS의 이용수는 해설을 했는데, SBS의 허정무는 작정하고 경기 내내 차범근 비난만 했다. 어쩌다가 SBS로 한국 경기를 시청하던 사람들도 음소거를 하거나 타 채널로 돌려야 할 정도로 심한 수준이었다고. 이후 앞서 언급한대로 경질되고 나서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Round 2를 벌인 걸로 알려져있으며, 이후 차범근의 승부조작 발언에 대해서도 허정무가 앞장서서 차범근을 비난하였다. 차기 감독에 선임되고 나서도 밝힌 취임 일성이 "용맹한 공격축구" 로 또다시 차범근 간접 디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둘은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처럼 보였으며 차범근이 공개적으로 허정무를 콕 찍어 지목하며 너무 했다는 식으로 언급해 거의 종지부를 찍는 분위기였으나...

서로 갈등한 것도 인간적으로 싫어서라기보다는 서로의 축구관이 다르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허정무 본인도 처음 국대 감독 맡을 때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차범근과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서인지 둘은 2005년에 전격적으로 공개 화해를 했다. 당시 수원 감독이었던 차범근과 전남 감독을 새로 맡게된 허정무가 오랜만에 감독으로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둘이 서로 쌩깔꺼라고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허정무가 어찌되었건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지켜야 한다면서 수원 벤치로 찾아가 차범근에게 폴더인사를 하면서 둘이 앙금을 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서로 허물없이 잘 지내는 듯. 남아공월드컵 땐 입장이 바뀌어 허정무가 감독-차범근이 해설자였는데 당시 허정무가 아르헨티나전 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차범근은 전쟁 중에는 장수를 흔들어선 안된다며 허정무를 적극적으로 감쌌다. 아직까지도 본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공개적으로 언급하길 꺼리는 프랑스월드컵 사태에서 차범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긴 인물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싸는 걸 보면 이제 서로간의 앙금은 털어냈다고 볼 수 있을 듯. 최근 2013 U-20 월드컵때도 훈련장에서 둘이 사이좋게 함께 있는 사진이 기사로 올라오기도 했다. #

7. 기타

컬투쇼에 소개된 사연에 의하면 1980년대 초반, 프로 선수가[46] 자기 고향 면민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다른 리(里) 주민대표팀을 능욕한 전설이 해당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경기 전 프로선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상대 쪽이 항의해서, 허정무는 경기 중앙선을 넘으면 안된다는 약속을 하고 시작했지만 중앙선에서도 쉽게 골을 넣었다고……. 에인트호번 리에서 오신 님 좀 너무한 거 아니요!

실제로 뛰어 보면 국제 리그 선수들의 경우는 축구 좀 한다고 하는 일반인과 리듬과 템포, 몸싸움, 발재간이 차원이 다르며 중앙선에서 골을 넣을 정도의 킥력을 보유하고 있다. 빅리그 선수 정도 되면 만약 EPL 선수가 먼저 공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1:11로 뛰어도 EPL 선수에게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내셔널리그 선수랑 시합 하다가 그냥 대놓고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는데 그냥 튕겨나갔다고 할 정도라고……. 어떤 군대축구 대회에서는 한 팀이 영혼의 9백 수비를 하고, K리그 수비수 출신이 혼자 공격을 했는데, 나름대로 축구 좀 한다는 사람들을 전부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팀이 그 혼자서 공격하는 걸 못 막아서 패했다고 한다.

해병대 357기라고 한다. 인천 구단은 현빈이 인천 백령도로 발령나자 이를 이용해 인천 유나이티드 경기에 꼭 초청하고 싶다고.

이 있는데 방송에 출연되어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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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개인의 가정사가 아니라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 사정이 그랬다. 장남, 그것도 신동 소리는 들어야 공부하라고 대학을 보냈고 보통은 상고를 나와 고졸로 은행원이 되는 것이 출세였던 시대였다. 하물며 차남부터는 중졸도 감지덕지, 곧장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여자는....
  • [2] 1960년대 국가대표를 지냈고 홍콩 세미프로에 진출했던 축구 선수다.
  • [3] 이탈리아전에서 대한민국은 2-3으로 졌다. 대한민국의 첫 번째 골을 넣은 선수는 최순호다.
  • [4] 대한민국 축구에서 이런 유형의 선수는 허정무와 유상철뿐이다. 각종 대표팀마다 소속팀에서 매번 다른 포지션을 맡으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을 보여 줬다.
  • [5] 특히 컵 대회만큼은 강한 면모를 보인다. 비록 무승부와 연장 끝에 승부차기로 이긴 전적이 많아서 여기서도 무재배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 [6] 전후반기로 나뉜 리그에서 전반기 우승팀이 힘 빼던 일은 매양 있는 일이고 축구뿐 아니라 야구도 비일비재했다.
  • [7] 치열한 명승부긴 했지만
  • [8] 배운 짓이 도둑질이라고 20년 뒤 허정무도 똑같은 짓에 가담한다(...)
  • [9] 이 부분을 설명하자면, 1995년 전남은 신생팀이면서 8개팀 가운데 6위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킨다. 때문에 프런트에서 투자를 보강하며 다음 시즌 호성적을 기대했으나 예상 밖으로 컵대회 최하위를 기록하자 초강수를 둔 것이다.
  • [10] 다만 축구팬에 따라서는 리그 3연패를 2회 달성한 시기 일화를 유일한 왕조로 치기도 한다.
  • [11] 8위팀까지 승점 3점차가 나는 혼전양상. 물론 1위도 독주는 아니었다.
  • [12] 외국인 선수 영입을 둘러싼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 [13] 선수단 내분이 일어나며 조윤환 감독이 사임한 전북과 상무를 밑에 깔아놨다. 그리고 조윤환 뒤를 이어 전북에 부임한 감독이 바로 최강희.
  • [14] 전남도 창단시점부터 꾸준히 설비 투자를 해왔고 프런트에서 선수영입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만 전술한 팀들이 K리그의 대표적인 큰 손이라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비출 뿐이지, 결코 전남이 거지 구단이었던 건 아니다.
  • [15] 1999.3.28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우측을 파고든 최성용의 크로스를 김도훈이 발리 슛으로 마무리하며 대어를 잡았다.
  • [16] 본프레레는 결국 수석코치를 다시 뽑지 않았고, 월드컵 최종 예선이 끝난 뒤 해임당했다. 국내외 양쪽 모두 본프레레 개인의 인맥과 영향력이 약했다는 증거다.
  • [17] 물론 이는 같은 계열사라 포항과 전남이 선수와 스태프를 자주 스와핑(?) 하는데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는 전남이나 포항이나 전력이 엇비슷했다. 리그 우승한 팀이랑 10등팀이 어떻게 엇비슷하냐고? 파리아스 매직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진 이유 자체가 득실차가 -4였던 5등팀 포항을 6강PO에서 우승시켰기 때문이다. 정규리그만 따지고보면 파리아스 시절에서 가장 나쁜 성적이었다. 진짜 전성기는 아챔 우승이란 결실을 맺은 2009년. 다만 이후 국가대표 감독이 되면서 전남 드래곤즈박항서 감독을 앉히게 되었고 나란히 2008 AFC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한 포스코 동맹 두 팀은 조별 예산 탈락으로 K리그 망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포항의 경우 2009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전화위복에 성공했지만.
  • [18] 하지만 2008년 감독 이후 이러한 면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2002 월드컵때 깨달은게 많았다고 그래서 박지성을 주장으로 내세우고 16강 진출을 '유쾌한 도전'이라는 걸 내새우며 남아공월드컵 때 원정 16강 진출을 이루게 되었다.
  • [19] 축구 팬들에겐 선수들과 같은 반바지 입고 어깨동무하며 독려한 2002년 월드컵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익숙할 것이다.
  • [20] 전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게 문제다.
  • [21] 웃긴 건 이 경기 경기력 자체는 제법 괜찮았다는 평이 많았다.
  • [22] 원한이 있을 마라도나도 마라도나지만, 허정무가 마라도나를 상대로 펼친 태권도 축구라고 쓰고 일방적 구타라고 읽는다는 당시 전 세계 축구계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들의 국보를 두들겨 팬 아시아의 축구 선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에서 토크쇼를 진행할 때 허정무를 게스트로 초청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 [23] 이번 대패로 위키피디아에서는 아주 중국인으로 설정시켜 버려서 과연 그 분노를 실감케 한다.
  • [24] 물론 카다 타케시 당시 일본 감독은 짤리지 않고 허정무와 마찬가지로 월드컵에서 원정 16강 성과를 거두게 된다.
  • [25] 조용형 등의 기량문제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기량이 부족하다기보단 되도않게 공격적으로 끌어올린 수비라인이 문제가 컸었기에 그런 듯하다. 수비라인을 끌어내리니 자동문 조용형도 조율형으로 변신하여 드록바를 4, 5명이서 포위하여 쌈싸먹었다.(…)
  • [26] 다른 국내파들 못지않게 부진하던(…) 이동국이 골을 넣은건 좋지만 상대 수비 실수에서 비롯된 찬스였으므로 전술 상 100% 만족까지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그래도 박지성이나 이청용이 빠른 주력으로 공격찬스는 잘 만들어내는 편이므로 빠른 역습은 기대해도 좋을것같다.
  • [27] 벨라루스는 대한민국 이상의 변방국이라는 것을 상기해보자. 말고 어디 빅 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없고...
  • [28] 이 당시에 히딩크가 아르헨티나 전을 시청한 후 '한국은 축구가 아니라 야구를 했다'라며 허정무에 혹평을 했다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하지만 정작 원 출처라던 풋볼 인터내셔널에서 그 인터뷰의 원문은 커녕 히딩크와의 인터뷰 자체도 전혀 찾아 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소설로 판명되었다.
  • [29] 오범석은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주전 오른쪽 풀백이었고 사실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서도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전에 오범석이 선발됐을 때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차두리와 오범석의 장단점의 차이를 들며 찬성했지만 결과는 망했어요. 그 후 나이지리아전에서 오른쪽 풀백을 되찾은 차두리가 실점의 빌미가 된 실수를 하는 등 기동성있는 선수들에게 자주 돌파를 허용하는 약점을 노출해서 의혹이 거의 해소됐다. 오범석의 문제는 감독의 문제라기보다 기대치를 충족못한 선수의 문제라 볼 수 있다.
  • [30] 김남일은 기용 실패가 맞는데 이동국의 경우 좋은 슛기회를 잡았고 적당한 퀄리티의 슈팅까지 이어졌으나 못 넣은 것이니 맞아떨어졌다면 맞아떨어졌다. 슈팅의 성공여부야 뭐....
  • [31] 무명 선수의 깜짝 발탁이라 언론에선 명지대학교 감독과 허정무 감독의 친분 관계를 놓고 바둑내기해서 허정무가 지는 바람에 박지성을 뽑았다는 루머가 돌았고 추후에 직접 해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 [32] 당시에도 이런 무명 선수를 뽑았다는 이유로 욕이란 욕은 다 먹고 해명에 가까운 인터뷰도 했었다...
  • [33]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이을용, 안정환, 이천수 등... 차두리, 윤정환 정도를 제외하고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월드컵에 첫 출전 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허정무가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소집했었다고 보면 된다. 흠좀무...
  • [34] 중국전에서는 실험 문제로 생소한 국내파 위주로 라인업을 짰다. 조광래 감독의 일본 경기는 핵심 선수들 모두 출전.
  • [35] 올림픽팀 때의 부진(일본전 4:1 대패...)은 그렇다쳐도 국대감독 시절 약체급인 벨라루스 전 패배,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2명이 퇴장당한 태국을 상대로 1-2로 8강에서 패하던 경기 등 경기 자체로만 따지면 허정무도 까일건 많다. 다만 알아둘 것은, 벨라루스 전이나 중국전은 평가전 성격이 강했다. 중국전의 경우 라인업을 보았을때 대놓고 실험을 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고, 벨라루스전 역시 월드컵 직전 평가전이었다. 2002년의 신화를 이룬 히딩크도 평가전에서 패배는 숱하게 겪었다. 이미 가시적인 결과를 낸 감독인데 이전 평가전 갖고 까는건 전혀 설득력 없는 주장일 뿐이다.
  • [36] 2000년 아시안컵 이란전은 무릎에 테입을 둘둘 감은 이동국의 연장 골든골로 유명하다.
  • [37] 당시 골닷컴의 B조 분석
  • [38] 결국 부상 중인 선수를 불러놓고 쓰지도 못 해 선수의 컨디션만 망치는 결과가 되었다. 애초에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태이긴 했다만..
  • [39] 아시아 무대라 별거 아닌 기록이라 할 지 몰라도 바로 다음 2014 월드컵 예선 때 레바논에 패하고 최종예선에서 이란에 2패를 당하며 월드컵 예선 탈락의 위기가 그야말로 턱밑까지 닥쳤던 걸 보면..
  • [40] 당시 월드컵 국대에서 박지성의 비중이 컸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전통 강호들도 삐끗하면 광탈하는게 월드컵 조별 리그 무대인 만큼 한 선수빨로 통과가 가능한 무대는 절대 아니다.
  • [41] 야쿠부의 실책이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16강에 못 갔을거라는 논리는 반대로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 선수가 못 넣으면 실력 부족이고, 상대 선수가 못 넣으면 천운이 따라준거라고 주장하는건 분명한 이중잣대이다.
  • [42] 게다가 당시에는 큰 논란 없이 넘어갔지만 애초에 야쿠부의 위치가 화면상 오프사이드였다는걸 알 수 있다. (공을 잡은 채로 최종 수비수보다 뒤에 있는 상태라면 오프사이드 라인의 기준은 최종 수비수가 아닌 공의 위치가 된다. 따라서 이후에 패스가 이루어졌을 때, 공을 잡은 선수보다 받는 선수가 공보다 앞서있다면 오프사이드로 판정되어야 맞다.)
  • [43] 2002년 당시 해설자로서는 부진했다. 경쟁사인 MBC는 차범근, SBS는 신문선이었다. KBS는 허정무 단독으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상철도 불렀고, 공동해설자로 최수종을 옆에 앉혀놓기도(...) 지못미
  • [44] 대표팀 선수들이 슈팅을 너무 아끼고 있으니 더 잦은 슈팅을 해달라고 조언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의 철학에 맞게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하게 지나치다...공이 골라인에 걸쳐있는데 슛을 외친다?!
  • [45] 이동국은 허정무가 02년 대비한다고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겸임할 때 수시로 소집하며 굴려먹은 선수였다. 특히 허정무가 아시안컵 3위를 할 때 이동국이 대회 득점왕을 먹으며 수훈갑 역할을 했는데 이 때 이동국은 대회 내내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경기를 뛰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허정무가 이동국을 극딜한다는 건...
  • [46] 에인트호번 소속으로 가장 전성기였을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