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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last modified: 2015-09-01 05:47:35 Contributors

역대 미국 대통령
32대 33대 34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의 일족 사이에 낑긴 S의 일족 트루먼의 위엄

풀네임 Harry S.[1] Truman
출신 정당 민주당
생몰년 1884년 5월 8일 ~ 1972년 12월 26일 (만 88년 7개월 18일)
재임기간
(미 합중국 부통령)
1945년 1월 20일 ~ 1945년 4월 12일 (만 82일)
재임기간
(미 합중국 대통령)
1945년 4월 12일 ~ 1953년 1월 20일[2] (만 7년 283일)
서명

< 194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time_1945.jpg
[JPG image (Unknown)]
1944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해리 S. 트루먼 1946 - 제임스 번스[3]

< 194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time_1948.jpg
[JPG image (Unknown)]
1947 - 조지 C. 마셜 해리 S. 트루먼 1949 - 윈스턴 처칠


1897년 사진. 아따 고놈 똘똘하게 생겼네.


대통령 재임 시절의 사진



The Buck Stops here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

트루먼이 대통령 재임 중에 책상 위에 올려놓은 명패. 그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정도의 의미. 미국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표현이다.[4]

미국의 33대 대통령. 그의 전임자 FDR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부통령이 된 지 82일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앤드루 잭슨의 뒤를 이어 평범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도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5]

Contents

1. 이름에 관하여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제1차 세계대전
2.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
2.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2.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2.5.1. 해군과의 불화
3. 평가
4. 인물됨과 일화
5.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
6. 관련항목

1. 이름에 관하여

트루먼의 미들 네임 "S."는 그의 선조 Shippe의 이름을 따온 것이긴 하지만 아무 뜻 없는 그냥 S다. 이런 한 글자의 미들네임은 트루먼 집안의 내력이라고 한다. 트루먼은 "할아버지가 내 출생신고를 하면서 서류 위에 국수 한가닥을 흘렸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뒷날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식 선서에서 그의 이름을 "Harry Shippe Truman."이라고 칭하자 본인이 알아서 "Harry S. Truman."으로 고쳐부른 일화가 있다. 뒷날 트루먼은 미들네임인 S가 이니셜이 아니라 완전한 이름이기 때문에 뒤쪽에 붙는 점을 빼는 게 맞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트루먼이 장난삼아 한 말이다. 하지만 트루먼 본인도 공문서나 조약 등에 서명할 때는 분명히 'Harry S. Truman'이라고 적었으며 트루먼 본인의 자서전에도 미들네임 뒤에 점을 찍어 본인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트루먼이 '굳이 따지자면 S 뒤에 점 안 찍는 게 맞는데 그냥 찍고 있다' 정도로 말했다고 이해하면 될 듯.

하필 그냥 'S.'를 미들네임으로 쓰게 된 것은 트루먼의 조상들이 모두 미들네임을 'S.'로 썼는데(문제의 Shippe와 또다른 'S'로 시작되는 미들네임) 서로 상대의 미들네임을 안 쓰겠다고 버티는 통에 "그럼 그냥 S.로 합시다."로 타협했기 때문이라고…….

증거자료인 트루먼의 친필 서명. 미들네임 S 뒤의 점이 선명하다.

다른 설에 의하면 S는 Sergei의 약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의 적대적 관계 때문에 미들 네임을 항상 S로 표기했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미주리 주 러마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안경을 쓰게 된 것도 너무 책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져서 근시가 되어 버린 것.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책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 본인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했지만 지독한 근시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우드로 윌슨과 함께 안경이 두드러지는 대통령이 되었다.[6]

2.2. 제1차 세계대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젊은 시절에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판을 통째로 외워서 통과하였다. 꼭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군 복무 경력은 대략 8년. 그리고 트루먼의 부대는 종전이 선언되는 그날까지 독일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1차대전의 마지막 교전에 참전한 부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게 그라는 걸 생각해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모로 무섭다.

2.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소꿉친구였던 베스 윌리스와 결혼을 하고 양복점을 경영했지만 얼마 못 가서 말아먹었다. 이후 30대에 캔자스시티 법률학교를 졸업하여[7]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지역 판사(겸 서기)로 일했으며 1934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상원의원 활동 때에도 그저 활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하지도 않는 무난한 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이 된 과정이 좀 무섭다. 전임 부통령이었던 리 A. 월리스가 루스벨트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4선 선거(1944)에서는 부통령을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이 때 가장 가능성이 낮은 후보가 트루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것이 예상치 못한 사건은 아니었다. 1944년 당시 루스벨트의 건강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미 정가 고위층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당시 민주당 중진들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트루먼을 뽑은 것이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고 능력도 없어보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사후 자기들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만 루스벨트가 트루먼을 부통령직에 앉히는데 동의한 까닭은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이 4선을 꽉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가 트루먼을 선택하는 데 동의한 이유는 부통령 후보자들 중에서 뉴딜 정책을 옹호하는 유일한 후보자였기 때문이었다[8]. 하지만 그는 월리스가 스스로 자력으로 치고 나온다면 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고, 트루먼에 그의 의중이 있다는 것은 월리스를 경계하는 정객들에게 더욱 과대포장된 감이 있었다. 여하간 모든 것은 정객들의 계산에 들었고, 루스벨트도 크게 마음에 안 들진 않았고, 월리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9]

그리고 과연, 3개월만인 1945년 4월,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죽자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태로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트루먼은 이 소식을 하원의원들과 술을 먹다가 받았다고 한다(…) 급한 소식이 있다는 소리에 투덜거리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더니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첫 마디가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였다고 한다.

엘리너의 회고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오.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행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라고 소감을 밝혔다.

2.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전략) 한 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독재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 1945년 5월 8일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했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고 일본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한 인물이 바로 그다. 이 때문에 트루먼을 까는 표현으로 'give 'em hell, harry(엿 먹여줘, 해리)'라는 말이 나돌았다. 1975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다가 아니었으니,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 저지 문제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경제의 복구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화 방지를 천명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렵 대륙에 경제 원조를 하는 마셜 플랜을 세워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마셜 플랜 등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는 못해서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44년 이미 FDR과의 대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인 미국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16년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벼르던 공화당은 약이 오른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주권민주당(딕시크랫)이란 이름으로 따로 출마했으며, 실제로 3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더불어 월리스도 진보당으로 나왔다. 오랜만의 4파전.

트루먼은 패배를 예감하고 대통령 선거 전날에 '뭐 어차피 질 텐데 잠이나 푹 자자'라고 생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대선 당시 듀이는 자신의 인기를 과신했고, 미리 각료를 구성하거나 뱃놀이나 벌였으며, 트루먼의 지지율이 최악이었던 것에 자만한 나머지 선거 유세도 제대로 안 하는 비범함을 자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 2주 전인 10월 중순에 시행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듀이는 5%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2주일 사이에 표심이 뒤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후대에 들어서 듀이가 우세했다는 내용을 담은 <갤럽>의 여론조사는 <갤럽>의 삽질이었다는 시각도 나타났다. 전후 미국은 농촌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표본에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그 결과 듀이의 지지율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여하간 1936년 루즈벨트 당선을 예측하며 대박을 친 <갤럽>은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겼다.[10]


대통령 당선 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웃는 트루먼.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장면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이라는 신문이 앞서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고 설레발을 친 게 하루아침에 오보가 되어버린 사건이다. 원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고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인 트루먼의 패배를 아예 기정사실화하고 헤드라인을 저렇게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당선된 이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비웃듯이 저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 일화는 신문 보도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꼽히며 그와 함께 트루먼이 신문을 번쩍 치켜들고 웃고 있는 위 사진도 미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뽑힌다. 어쨌든 이런 역전극을 통해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2.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트루먼의 대통령 제2임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역시 한국전쟁이다. 보통, 특히 밀리터리 쪽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의 마찰이 유명하다. 애시당초 둘은 성격이나 정치사상부터가 달랐고, 트루먼은 쇼맨십이 강한 맥아더의 행동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대통령 말 안 듣고 혼자 설쳐대는 맥아더를 보고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을 정도이니……. 그래도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딱히 제재를 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1.4 후퇴가 벌어져 맥아더 원수의 체면이 크게 구겨졌다. 중공군을 막기 위한 전략으로 맥아더가 "핵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자 트루먼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냥 핵 한 발이 아니라, 만주중국 본토, 한반도에 모두! 이런 맥아더를 보자 평소의 악감정에 더해서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트루먼은 결국 그를 해임시켜버리고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맥아더의 핵 투하를 반대한 탓에 중공군이 개입해서 한국이 통일을 못 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만일 맥아더의 주장대로 핵을 떨어뜨렸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다. 한국전쟁의 참전국만 봐도 강대국 간의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나올 정도.[11] 물론 방사능의 여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949년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불과 4년만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미국이 함부로 핵을 쐈다가는 소련도 공산권의 반응을 의식해서 미국과 한반도에 핵공격을 가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맥아더의 만주 폭격계획에 사용되는 핵폭탄의 개수가 핵 한두 개가 아니라 핵폭탄 20여 개 및 방사능 폐기물들을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투하하여 중공군이 지나갈 수 없도록 방사능 오염 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 한반도는 3면은 바다, 한 면은 방사능 지대, 아니 3면이 방사능 지대[12], 한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지옥이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트루먼은 단순한 서방세계의 구원자가 아니라 좁게는 자국민을, 좀 더 넒게는 한반도를, 그리고 세상을 파멸의 위협에서 구해낸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전쟁 당시 그의 성 트루먼(truman)을 한역하여, 정감록에 나오는 백성들을 구하는 진인(眞人)이 바로 그라는 해석도 나왔을 정도다.

다만 위에 언급된 맥아더의 핵 투하에 반대하여 그를 해임했고, 그 때문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국의 노년층(심지어는 중장년층과 청년층 일부도)에서는 나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13] 심지어 맥아더가 6.25에서 승리하면 맥아더의 인기가 높아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할 것을 우려해 맥아더를 자른 것이라는 얘기까지 있다.[14] 정신 차리고 보면 두말 할 거 없는 집단적, 역사적 이기주의다. 일단 맥아더 말 그대로 했으면 위의 얘기 처럼 한국, 북한 따위가 아니라 생태학적, 물리적 차원에서 방사능에 오염 된 한반도가 남아 날리가 없고, 정색하고 말해서 나머지 세계가 한국을 위해 2차대전이란 악몽에서 빠져 나온지 몇년 되지도 않아 다시 한번 세계대전의 지옥에 빠져야 할 이유는 없다. 미국의 보수층도 마찬가지로 공산당을 결단낼 기회를 걷어찬 겁쟁이라고 까기도 한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채명신은 퇴임 후의 트루먼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채명신과의 만남에서 트루먼은 채명신에게 "내가 맥아더를 경질한 것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국인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듣고 싶군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오오 대인배 오오. 안타깝게도 뒷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것과 한국전쟁의 개입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여담이지만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트루먼의 전쟁(Truman's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트루먼의 두 번째 임기에 발족했다.

2.5.1. 해군과의 불화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의 친공군적 성향[15] 때문에 타군, 특히 해군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미국 국방부쟁부(육군부)/해군부로 나뉜 것을 통솔하는 '부 위의 부'로서 창설되었는데, 초대 장관이 해군장관 출신 제임스 포레스탈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되려 트루먼의 공군 위주 성향과 타군에서 "왜 미군은 해군에만 그렇게 돈을 퍼부어대냐"고 징징대는 영향으로 인해 극단적으로는 "어차피 2차대전 만큼 무식한 전쟁이 나지도 않을텐데 해군 예산 확 줄여도 되지 않을까?"[16]이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애초에 포레스탈 장관은 해군장관 시절부터 육군/해군부를 통합하는 안에 기겁하던 것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내정하여 겨우 진정시켰던 것이고, 트루먼이 하도 공군을 좋아하며 해군을 등한시하자 1948년 대선에서 제임스 듀이 공화당 대선후보와 비밀리에 짝짜꿍을 했다가(…) 선거 몇주 전 그 일이 들통나서 트루먼이 재선 후 2기 내각을 구성할 때 해임해버렸다.

제2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트루먼의 성격에 딱 맞는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가 해군이 핵무기 운용이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폭격기를 운용하기 위해 기획했던 초거대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건조 시작 5일만에 취소시켜버리자 급기야 참고 참아왔던 해군 제독들이 폭발했다. 오늘날에도 제독들의 반란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으로, 존 설리번 해군장관과 루이스 덴펠드 해군참모총장 이하 알레이 버크 등 수많은 제독들이 불명예 제대까지 각오하고 국방부에 항명했으며, 5월에는 포레스탈 前 장관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7] 그러자 존슨 장관은 해군에게 염장지르듯이 "앞으로 상륙작전 같은거 없을거니 해병대 필요 업뜸. 해군이 할 일은 공군이 하면 되니까 해군도 필요 업뜸." 같은 말을 해버렸다(……). 참고로 1949년은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게 하반기에 세계에 알려지자 핵무기 무턱대고 쓰다간 인류멸망이 온다는 공포 속에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조명되던 참이었고 루이스 존슨 장관이 저 말을 한건 12월이었다. 이건뭐(…).

사태가 악화되던 1950년 6월 말에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미군이 참전하여 해군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해병대, 그리고 무엇보다 해군/해병 항공대의 맹활약을 통해[18] 그런 해군 무용론이 버로우탔지만 오랫동안 이들의 갈등은 남아있었고, 베트남 전쟁 등을 거쳐서야 그 갈등이 조금씩 중화되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이니 한국전쟁이니 하는 마당에 집안싸움까지 벌어지던 국방부의 혼란을 도저히 붙잡기 힘들게 되었고, 존슨 장관의 후임으로 조지 C. 마셜 원수가 임명되는 초강수가 나와야 했다. 마셜이 현역 군인 신분[19]으로 국무장관에 재직하며 마셜 플랜도 실행했던 경력이 있고 국방부와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먼치킨이기는 했지만 문민통제를 깔끔히 씹어먹는 인선이라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국방부 꼴이 이러다가 당나라 군대가 될 것을 걱정한 상원에서 마셜 원수의 국방장관 임명을 특례로 승인했다.

마셜 원수는 건강 문제로 짧게 재임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한국전쟁과 아이젠하워 원수의 백악관행이 겹치며 마찰은 점점 중화되었고, 오늘날 미 국방부는 예산 편성만 보면 여전히 해방부(?)이긴 하지만 각 군별로 균형이 잘 맞게 배정되어 있으며 협력체계도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해군 항공대는 여전히 공군을 한수 아래로 여기고 있으며 공군도 불쾌하게 여기는 등 티격태격하고 있다.[20]

훗날 니미츠급 항공모함 8번함 CVN-75가 이 대통령의 이름을 땄는데, 하필이면 이 배의 원래 이름이 바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21] 그래서 미 해군에서는 '트루먼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두 번 죽였다'고 수근댔다고 한다. 지못미...

3. 평가

한국에서는 한국전쟁과 많이 연관되어 설명되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훌륭한 편이다.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 조사나 업적 평가를 하면 항상 10위권 내에 들며 우수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훌륭한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냉전과 한국전쟁을 주도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의 지도국가로 굳힌 점이 높이 평가받는 모양이다.

언변도 정치인치고는 능숙한 편이 아니라서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유세를 할 때에는 야유를 받는 굴욕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기차를 타고 소도시, 지역 마을을 돌았다. 서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거의 유럽에 돈을 퍼붓다시피 한 마셜 플랜으로 인해 욕도 많이 먹었다. 특히 1953년 1월에 트루먼이 퇴임하여 고향 미주리로 돌아갈 때는 그 뒤에 대고 욕설을 퍼부은 국민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가 3선에 나서지 않고 한달반 일찍 퇴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22]

대통령 재임 중에는 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근면하고 정직, 성실한 태도나 위에 나온 그의 좌우명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에 따른 책임의식 역시 그가 높이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 '재임 중에 욕을 먹지만 퇴임 후 찬양받는' 전형적인 케이스. 그의 미들네임 S를 따서 3S라고도 한다. Stubbornness(고집), Sympathy(동정심), Stoicism(인내[23]).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그를 좋아했으며 철의 장막도 처칠이 트루먼의 모교(고등학교)를 찾아가서 한 연설에서 나온 말이다.[24] 처칠이 "서방 세계를 구했다"라며 붙여 준 긍정적인 별명으로는 작은 거인.[25]

CNN리 킹은 그를 "매혹적인 언변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라고 평가했고,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트루먼에게는 리더의 최대 걸림돌인 교만이 없었다. 그와 그의 일 사이에는 한 번도 자존심이 끼어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2년 12월에 그가 88세로 사망했을 때 칼럼리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트루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영웅도 예술가도 체스 선수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솔직하고 실수도 하고 어떨 때는 예기치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이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한국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 아니다. 좌파쪽에서는 공산권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펼처진 민족운동 탄압의 이미지로 비난을 받았고 꿀꾸리 치하에서 한달만 살아보면 이런 소리 못하겠지 우파쪽에서는 다 이긴 정말? 6.25 전쟁을 말아먹고 맥아더를 잘라서 비난을 받았다. 이런 레퍼토리는 1950년대 한국의 우익 정치인들부터 자주 써먹던 레퍼토리였다. 물론 위에 나와있는대로 핵이 터졌다면 이기나마나 지옥만 남았을 것임을 잊으면 아니된다.

사실 트루먼이 마음만 먹었으면 개입은 커녕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도 얼마든지 있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미국의 대(對)공산권 방어전략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애치슨 라인을 참고하자.) 심지어 전쟁 후에도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에서 조선인민군에 밀리기 시작하자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정부 내에서 유엔군 철군론이 대두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다행히 월튼 워커 중장의 분투 덕에 철군론은 수그러들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및 마오쩌둥 정권 수립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 중국군 인해전술을 무력화한 계기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는 한국전쟁 한정이며,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당연하겠지만 과거 중화민국 시절 장제스 정권 때 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동맹국으로써 추축국 일본을 크게 무찌른 영웅 동료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해리 트루먼이야 말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왜노(일본의 비하 명칭)놈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린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일본 열도를 아예 지구상에서 없애버리는 몰락 작전이 진짜로 실행되었더라면 지금의 중국은 더욱 발전하게 되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는 중국 좌익들도 있다. 실제 중국에서 반미 감정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리 트루먼에 대해서는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원자폭탄 투하 최종명령으로 일왕을 굴복시킴과 동시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피해를 불러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치의 항복 이후에도 끈질기게 전쟁을 이끌었던 일본에게 패전을 자극시키게 하여서 원자폭탄이라는 희대의 수단을 사용하여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원흉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일본 미군정을 통해서 전후 일본에게 제재를 가해온 대통령으로도 평가된다. 동시에 일본 우익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희망해왔던 그 시절을 단절시킨 철천지 원흉격에 속하기도 하겠다. 또한 구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국방군을 현재의 방위급 자위대로 격하하게 만들었던 원인으로 지목되는 편. 사실 일본도 트루먼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냥 몰락 작전을 강행해서 일본을 지구상에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테니 원자탄 투하로 감지덕지해야 하는 판이다. 트루먼도 많은 미군 사상자와 전비 때문에 정치생명을 위협받았겠지만 아예 지구상에 사라지는 일본만 하겠나...

북한의 입장에서는 김일성과 간접적으로 대적한 원흉이자 한국전쟁 때 자국병들을 파병하여 자신들의 남침을 좌절시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남한 및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방해하고 좌절시킨 원흉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입장에서 주적이자 원흉으로 불리우는 미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하였기에. 하지만 1949년 남한에 있는 주한미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을 때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당연히 미군이라는 방해꾼에 골칫거리가 없어지면 남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 후 이 철수 때문에 남한이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서 위기에 처하자 트루먼이 대통령 자격으로 미국의 우방인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남한에 미군 전투병력을 파병한다는 명령을 내리자 다시 원수지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소련에서도 평가는 좋지 않았다. 종전 직전까지만 했어도 소련의 수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머리를 맞대고 전범국 소탕에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종전 이후 냉전기에 접어들고 한반도 문제까지 겹쳐서 그 당시 미국과 사이가 적대적이었던 입장에서 좋게 평가받은 인물은 아니었다. 또 한국전쟁 때 미군의 파병 명령을 내리게 된 장본인이기도 하여서 북한과 함께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했던 걸림돌이자 원흉으로 평가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도 1990년대부터는 여러 연구를 통해 업적이 평가되어 이제는 한국을 구원한 으로 맥아더의 자리를 대신한 면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여러 전략적 전술적인 실수[26]오만함이 객관적으로 연구되는 측면도 있고 냉전 초기의 트루먼의 전략적 결정의 중요성이 평가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4. 인물됨과 일화

  • 20세기 유일한, 그리고 미국 최후의 고졸 대통령이고, 아마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27]

  • 소꿉친구와 결혼해서 년해로한 인물인데 영부인 베스 트루먼을 6세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며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서 사귀었는데 둘의 결혼은 트루먼이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1919년(35세)에야 이루어졌다. 결혼 전인 1910년부터 1959년까지 부부는 매번 편지를 교환하곤 했는데, 이 편지를 따로 묶은 서간첩인 <Dear Bess>(베스에게)가 따로 책으로 나왔을 정도이다. 이 서간첩은 576페이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 부부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거릿뿐이었지만 트루먼이 만난 지 84년만인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글자 그대로 백년해로했다. 베스 트루먼은 남편이 죽은 지 딱 10년 뒤인 1982년 영면했다. 덧붙여 베스 트루먼은 2014년 현재 역대 미국 영부인 중 가장 장수한 영부인이다.(97세 247일)

  • 성질이 급하고 괴팍한 면이 있어서 욕도 잘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대통령직 승계 때도 백악관에 들어가면서 투덜거렸을 정도니까. 이 사람이 특히 즐겨 사용한(?) 욕설은 바로 우리말로 '개새X' 정도의 의미인 son of a bitch(약자로 SOB). 한국전쟁 전화 급보를 받고는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새X들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맥아더를 해임하고 나서는 "난 딱히 맥아더가 멍청한 SOB라서 해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그를 해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논쟁을 하다가도 이 욕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전 트루먼 대통령께서 저에게 SOB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제가 SOB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입니다.

또한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를 할 무렵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는데, 연설하러 온 곳에 공화당원들이 온 것을 보고 별안간 "지옥에나 떨어져라!(Go to hell!)"이라고 욕설을 내뱉어서 케네디가 트루먼에게 직접 '자제 좀 해주세염'이라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트루먼은 처음에는 지프 케네디를 싫어해서 그 아들인 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케네디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1950년 푸에르토 리코 국적 남성 2명에게 워싱턴의 블레어하우스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대응으로 암살범들은 사살되었다. 다음 날 어떤 기자가 트루먼에게 "만일 대통령님께서 암살범들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던지자 트루먼은 주저없이 "그 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목에 들이댄 후 방아쇠를 당길 거요(I would have taken the gun from him, shoved it up his gullet and pulled the trigger.)."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패기 쩐다

  • 아무튼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다보니 사석에서뿐만 아니라 공식석상에서도 벌컥 화를 내거나 욕설을 내뱉는 경우도 많았다. 그 에피소드 중 하나가 있다. 1950년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외동딸 마거릿의 공연에 대해 음악평론가 폴 흄은 "노래는 잘 못하며 전문 성악가로 남기는 힘들 것이다"라는 혹평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흄에게 다음과 같은 격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방금 당신의 형편없는 평론을 봤소. 난 한 번도 당신을 만난 적 없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새로운 코가 필요할 것이며, 눈에 멍이 들 줄 아시오."

요약하자면 "감히 우리 딸내미 기를 죽이다니, 나 만나면 넌 뒈졌어." 정도의 뜻이 되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거릿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어렵게 될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트루먼은 되려 "국민들의 80%는 내 편일 테니 넌 너무 걱정마라"고 여유있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백악관에 많은 편지가 도착했는데, 트루먼의 장담대로 대부분은 트루먼의 행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여성들한테서 "제 남편도 우리 딸을 대통령님이 하신 것처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란 내용이었다고. 그러나 일국의 대통령이 하기에는 부적합한 이런 행동들 때문에 그의 비판자들은 '도량이 좁고 비천한 인물'로 혹평하기도 한다. 혹은 미국인답게 American Bad Ass의 전형인 간지남으로 평가받기도. 그래도 서민층에서는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다'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 그 밖에도 전쟁 말기에 동남아의 어느 듣보잡 국가특이한 이름의 지도자로부터 "독립 후 당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어디 촌구석에서 날아온 편지따위는 신경도 안썼고(보기는 봤을까?), 그의 후임자들도 (어쨌든) 그 동네와 친구는 먹었지만 정작 친구먹고 싶다며 편지를 보낸 사람을 완벽하게 적으로 돌려버렸다. 결국 미국은 이 편지를 보낸 사람에게 쓴 맛을 보고 체면을 왕창 구겨버렸다.

  • 부통령이 되기 전에는 "백인 하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인데, 하딩의 one drop rule에 따르면 흑인인 연고로 인해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근데 하딩 흑인설도 이미 망한 떡밥이라(…),

  • 독서는 죽을 때까지도 즐겨서 은퇴 후 70대에 들어서도 어떤 기자가 트루먼의 자택을 찾자 책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기자가 "대통령께서는 주무시려고 책들을 읽으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아니오. 깨어 있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책벌레패기

    로렌 배콜(Lauren Bacall)과 피아노를 치는 트루먼.

  • 의외(?)로 피아노가 취미였다. 실력도 제법 괜찮았던 듯. 당시 유명한 헐리우드 여배우인 로렌 배콜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치는 위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본 트루먼의 친구가 "자네 그 사진보고 마누라가 뭐라 안하던가?"라고 묻자 트루먼은 "집사람이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어로는 (피아노 등을) 연주하는 거나 노는 거나 둘 다 to play다. 이를 이용해 트루먼이 말장난을 한 것이다.

  • 한국에 동상이 세워진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이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의 남한 파병을 최종승인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때에 세워진 것으로 파주 임진각에 위치하고 있다. 맥아더 동사도 논란이 되는 와중에 미국의 대통령인 트루먼의 동상이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그의 업적에 비해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듣보잡이라이기 때문인 듯 하다.

  • 대통령 재임시절 예산위원회장을 만나면 늘 직접 나와서 악수로 맞아주었다. 그래서 "늘 뵙는건데 이렇게 직접 나오셔서 악수로 맞아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예산위원회장이 말하자 트루먼 대통령 왈, "아니오, 언론을 모르셔서 그런데 만약 내가 이렇게 나와서 맞아주지 않으면 '대통령이 예산위원회장에게 화났다,'라고 신문에서 쓸거요.".

  • 대통령재임시, 백악관에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기도 했다.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만년필이 엉뚱한 곳으로 가있거나, 잠을 자려고 할때 옆에서 사람이 혼잣말 하는게 들린다던가, 에이브러햄 링컨 귀신을 마주쳤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한성깔 하시는 분 답게 백악관 일부를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그후에는 쫄았는지 귀신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 저것들을 종합해보면 패기넘치는 화끈한 성격과 다르게 얌전한 취미, 딸바보에 소꿉친구와 결혼, 평범한 사람으로써 대성공한 인생에 자기 손으로 전쟁을 매듭짓고 귀신과 마주하는 등 여러모로 문학 주인공으로나 나올법한 인물이다

5.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

당대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자서전도 있다. 오늘날에는 2차대전 말기와 냉전에 관한 정책적 결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는데. 자서전답지 않게 의외로 진솔하고 책임질 일은 확실히 책임지고 있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싫어했던 맥아더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트루먼 오오.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데이빗 맥클로우[28] 트루먼 전기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고전작품이다. 이 작품은 게리 시니즈 주연으로 TV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말년에 의하면 주 무기는 핵폭탄이란다.미합중국 대통령의 패기어린 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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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S는 약자가 아니라 원래 본명에 미들네임이 그냥 S다.
  • [2] 원칙대로라면 그의 임기는 한달 보름 뒤인 3월 4일에 끝나야했다. 그가 부통령 취임을 1월 20일에 했기 때문이다. 이는 존 낸스 가너가 사퇴했음에도 루스벨트가 3선, 4선을 거치면서 전임자 리 A. 월리스와 트루먼 모두가 정확히 4년간 재임했기 때문. 이 때문에 조지 워싱턴이 퇴임한 이래(1797~1953) 156년간 계속 같은날로 유지되던 대통령의 취임식은 전후 모두 1월 20일이 되었다. 이는 수정헌법 20조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부통령 항목 참조.
  • [3] 트루먼 시절 국무장관. 대소 강경파.
  • [4] 정말 여담으로 앤디 앤드루스가 쓴 "우화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인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천사장, 링컨 대통령, 솔로몬 왕보다 더 먼저 등장한 트루먼은, 주인공이자 60년 뒤의 미래에서 타임슬립해 온(…) 40대 백수인 데이비드 폰더에게 이 좌우명에 바탕한 충고를 해주어 책임감을 북돋워준다.
  • [5] 출신만 따져도 일전까지 대통령 한 명 나오지 않았던 '깡촌' 미주리, 그것도 (미국 역사상 최후의) 고졸 출신 대통령이다. 흥미롭게도 제럴드 포드와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다. 유이한 중서부 출신, 초임이 아닌 후임자 부통령, 그리고 승계, 재임 당시의 낮은 인기 등등… 다만 트루먼은 재선에 성공했고 주요한 결정으로 미국 역사에 정말 한획을 긋고 갔다.
  • [6] 물론 시어도르 루즈벨트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그랬듯이,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은 한번씩 안경을 써본 경력이 있다. 하지만 대중적 공식 이미지로서 쓴 이미지가 남은 대통령은 윌슨과 트루먼, 거기에 더 더해야 두 명의 루즈벨트 정도이다. 참고로 안경은 1500년대(16세기)에 나타났다.
  • [7] 이후 법대 야간 코스를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했다.
  • [8] 실제로 트루머는 재임기간 뉴딜을 한층 강화한 "페어 딜Fair deal"로 사회보장정책과 완전고용을 완수하였다.
  • [9] 흥미로운 건 월리스는 전시 각료감이었는지 맨하탄 프로젝트에 깊게 관여했고, 또 민주당 내에서 대단히 진보적이었으며 소련에도 가장 우호적인 정치인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기에 월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냉전의 불안감이 줄어들었을 것이란 옹호론과, 미국이 소련에게 끌려다니는 호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비판론이 있다.
  • [10] 사실 여론조사와도 별도로 선거인단 제도에서도 트루먼은 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언론은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루먼은 전국적으로는 듀이보다 4.5%를 더 득표했지만, 78석이 걸린 오하이오, 일리노이, 캘리포니아에서 1%도 안되는 격차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월리스가 유독 4.7%를 득표한 상황이었다. 고춧가루를 이겨냈다 이 세 주의 격차였던 2만9천표만 뒤바뀌었어도 대선은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
  • [11]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에다 미국이 대표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중국, 소련이 대표하는 공산 진영이 모두 참전했다. 소련은 물론 곁다리로만 했고 직접 참전한다고 하진 않았다.
  • [12] 방사능 폐기물들이 압록강, 두만강 강물을 따라 동해와 황해로 흘러들어갈 것이므로(…) 남해는 무사할까?
  • [13] 다만 일부는 으레 유명한 트루먼의 말버릇 대로 소식을 듣자마자 "개새X들, 당장 파병해!"라고 하고 바로 파병해 준 천조국 천자님이라고 고마워하는 경우도 있다. 정확한 인용은 “이 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와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란 대목으로, 군통수권자로서 의회 승인과 관계 없이 미군을 파병했다.
  • [14] 수정헌법에서 3선 금지 조항이 나온게 1951년이라 트루먼이 원했다면 3선을 나설 수도 있지만 나가지 않았다.
  • [15] 미 공군은 1947년 육군 항공대가 독립하여 창설되었다.
  • [16] 일본은 망했고, 영국은 쇠퇴한데다 동맹이고, 러시아해군력이란 볼품 없으니.
  • [17] 이후 포레스탈 장관의 헌신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이 명명되었다.
  • [18] 서해5도도 그렇지만 사실상 북한 지역 황해의 모든 도서는 미군의 지원을 바탕으로 남한이 차지했으며, 서해안 전역에서 공수, 상륙 작전 역시 빈번했다. NLL은 그걸 다 포기해주고 새로 그은 선에 가깝다.
  • [19] 5성장군 원수는 종신계급이다.
  • [20] 이들의 갈등은 점점 중화된다 뿐이지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군용 항공기 이름도 한국전쟁 끝난뒤 10년 가까이 제각기 이름짓다가 1962년에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지시로 공군 스타일로 통합했고, 50~60년대 우주개발 경쟁에서도 미사일/로켓 개발이 각군별로 따로따로 이뤄지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겪었으며, 우주인 프로그램에서도 해군과 공군 출신 우주비행사들이 서로 대놓고 싸우진 않아도 서로 끼리끼리만 뭉쳐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결정타로 해군 예비역인 닐 암스트롱이 현역 공군인 버즈 올드린보다 먼저 달을 밟아서 공군은 망했어요...
  • [21]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의 이름을 붙이자는 정책 때문에 개명당했다고...참고로 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이름은 1대함을 빼고는 모조리 저런 식으로 취소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엥?
  • [22] 트루먼의 재임시기에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이 헌법에 성문화되었으나 현직 대통령인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조항이었기 때문에 3선 도전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했다.
  • [23] 토아 철학이란 의미인데, 흔히 , 인내로 번역된다.
  • [24] 리그베다 위키철의 장막 항목에 있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연단에서 연설하는 처칠 뒤에 트루먼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 [25] 아 물론, 175cm는 충분히 되었으니 실제적으로 그리 작진 않았다. (무엇보다 토머스 듀이가 그보다 작았다. 역시 루저)
  • [26] 그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드워드 아몬드 소장…….
  • [27] 그 이전에는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유일하다 싶은 고졸이다. 흥미롭게도 역시 민주당 출신이며 변호사를 땄다. 또 밀러드 필모어가 고졸 출신 대통령인데 트루먼은 그를 아주 신랄하게 깠다. 항목 참조.
  • [28] 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의 원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