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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last modified: 2014-10-19 12:56:42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일생
3. 씨알 사상
4. 연표



1. 개요


咸錫憲 (1901.3.13 ~ 1989.2.4)
대한민국의 언론인,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노년에 더 열심히 활동하셨기 때문에 "겨레의 할아버지"란 호칭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파 신도였다.[1]

2. 일생

평안북도 용천 태생이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그 이후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현재의 츠쿠바 대학)에 입학하였고, 1928년 졸업하였다.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글도 발표한다. 당시 이 동인지를 구독한 사람은 200명 내외에 불과했다고. 해방 후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시리즈가 큰 호평을 받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한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2년에는 <성서조선> 필화 시비에 휘말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한다.

그 이후로는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독재 체제, 5.16 군사정변,10월 유신, 제5공화국 등의 현대사의 모든 부조리에 몸을 아끼지 않고 사회의 원로 중 한명으로서 저항하였다.

법정 스님도 저서에서 함석헌에 대한 존경을 자주 표현했고 <뜻으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감동 받았던 것을 자주 이야기하였다.

3. 씨알 사상

民 대신 "씨알"[2]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저 "씨알"은 1948년 무렵에 함석헌이 월남한 뒤 YMCA에서 옛 스승[3]인 다석 유영모(1890.3.13~1981.2.3 위키백과 참고)와 재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유영모가 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겼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 (다만 전통 있는 순우리말겨레가 이미 있는데 굳이 "씨알"이란 새 단어를 만드는 건... 이란 비판도 있다.)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백성, 일반 시민들)이 지니고 있는 5가지 특성이 있다. 읽기 피곤하실 위키니트들을 위하여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주체성 - 자신들의 이름을 "씨알"이라고 짓고 그걸 가짐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 근본성 - 씨알은 씨앗과 알이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다. 씨알 역시 인간 사회의 근본이면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겼다.
  • 순수성 - 알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형태를 나타낸다. 씨알 역시 생명의 본질을 오염시키려는 악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 생동성 - 생명은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이에 따라 씨알(=시민들)을 압제하는 제도주의-형식주의-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 관계성 - 나무나 잡초가 여럿이 있으면 태풍과 홍수를 막듯이 씨알 역시 무리를 지어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4. 연표

  • 1901년 -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태어남
  • 1914년 - 양시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 1916년 - 4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
  • 1919년 - 3월 1일, 3.1 운동에 참가한 뒤 학업을 중단하고 2년간 집에서 휴양함
  • 1921년 - 민족 사학인 정주의 오산 학교에 편입학
  • 1924년 - 4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1부에 입학
  • 1928년 - 4월, 귀국하여 모교 오산 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함
  • 1932년 -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쓰기 시작함
  • 1938년 - 3월, 일제의 탄압으로 오산 학교를 그만둠
  • 1940년
    3월, 평양 송산리에서 김혁 선생이 경영하던 송산 농사 학원을 인수해 경영함
    8월,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 끌려가 약 1년간 고통당함
  • 1942년 - 5월,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함
  •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지역자치위원회 활동을 함
    11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책임자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 구금됨
  • 1947년 - 3월 17일, 주위의 강권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옴
  • 1948년 - 매주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가짐
  • 1956년 - 친지들의 도움으로 서울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하고, <사상계>에 집필을 시작함
  • 1957년 - 천안에서 '씨알 농장'을 경영함
  • 1958년 - 8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서대문 형무소에 20일간 구금당함
  • 1961년 - 6월,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발표하여, 5.16을 정면 공격함
  • 1962년 - 2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 여행. 그 뒤 10개월간 이커 학교에서 공부함
  • 1963년 - 6월 23일, 오산 학교·대광 학교 등에서 강연함. 월남 언론상을 받음
  • 1967년 - 장준하가 국회의원에 옥중 출마하는 것을 도와 당선시킴
  • 1970년 - '''4월 19일,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발행함
  • 1974년 -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 회복 국민 회의'를 만들고 대표 위원이 됨
  • 1976년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을 선고받음
  • 1979년
    퀘이커 협회 초청으로 미국 종교 대회에 참석.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름
    YMCA 위장 결혼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에 형 집행 정지를 받음
  • 1981년 - 계엄 당국에 의해 <씨알의 소리>가 폐간당함
  • 1987년 - 10월 12일, 제1회 인촌상을 수상, 상금 전액을 남강문화재단에 기탁함
  • 1988년 - 9월 12일, 서울 올림픽 평화 대회 위원장을 맡고, '서울 평화 선언'을 제창함
  • 1989년 - 2월 4일 오전 5시 25분, 6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남

※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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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퀘이커란 십일조에 반대하고 목사가 없는 기독교 일파이다. 인디언과의 우호 증진, 노예제도 반대 등의 주장을 펼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예제 철폐 이전에 남부의 노예들을 노예제가 없는 북부로 탈출시켜주던 지하 비밀조직의 상당수가 이 퀘이커 교도들이었다고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자서전에서 가끔 퀘이커교도 이야기를 했다.
  • [2] 본래는 '알'에 'ㅏ'가 아닌 아래아를 쓴다. 특수문자 가능하신 분이 수정바람.
  • [3] 정주의 오산 학교에 다닐 때, 유영모가 새로운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 때부터 그의 제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