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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last modified: 2015-04-08 14:45:19 Contributors



↑한신대학교 심벌마크. 자세한 설명은 '이곳'에서.

위 사진은 실제보다 200% 미화된 사진
위 사진은 한신대학교의 도서관 앞이자[1] 한신대학교 정문[2] 안 버스정류장[3]이다.

Contents

1. 개황 및 특성
2. 학풍 및 학내 정치성향 / 강의 특징
3. 학내 학생운동 현황
4. 위치
4.1. 한신대 분교? 이원화캠퍼스?
4.2. 캠퍼스 건물 및 교내외의 편의시설/환경 현황
5. 교통
6. 역사
7. 특징
8. 개설 학부
8.1. 단과대학 (2012학년도 현재 기준)
8.2. 대학원
8.3. 같이보기

1. 개황 및 특성

대한민국장로회 계통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대학교이다. 그 시초는 1940년 승동교회의 김대현 장로[4]에 의해 설립된 "조선신학교"이며, 해방 이후 서울에서 대표적인 장로회 신학교로 알려졌다. 1951년 한국신학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강의를 하는 등 장로회 신학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신대학교를 끼고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와 아빙돈 성서주석사건으로 불리는 성서비평학 수용 문제[5]로 갈라서게 되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총신대학교가 설립되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에게 한신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까였지만, 사실 한신대학교는 자유주의와 개혁주의의 변증법적 대안으로서 칼 바르트에 의해 제시된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이다. 신정통주의란, 간단히 말하자면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하되, 자유주의에서 제시된 비판을 수용하는 신학적 경향이다.[6] 하지만 근본주의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신학자들 입장에는 성서비평학 등을 학문적이나마 받아들이고 있는 신정통주의가 곱게 보일리 만무하였고,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누명을 쓰고 퇴출당한 것이다.[7]

이후 종합대학으로의 전환을 위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이유로 대학 이름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이 학교는 애초에 갈라선 이유부터가 성서비평학 수용 여부였을 정도로,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개신교계의 풍토에서 진보주의 성향을 맨 처음 표방한 신학대학이었다. 종합화 이후에도 그 성향을 계승하여 신학 뿐 아니라 학교가 전반적으로 진보성향이 상당히 강한 대학이다. 전반적으로란, 학생 및 총학생회 뿐 아니라 교수진부터 재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 TV나 라디오를 보면 아시겠지만, 모 교수는 진보측 패널로 거의 고정되어서 나온다. 대표적인 개신교계 진보 인사인 문익환 목사[8]도 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현재 학교법인 한신학원 산하에 속해 있다.[9]

2. 학풍 및 학내 정치성향 / 강의 특징

애초에 학교를 소유하고있는 교단이 다루고 있는 신학도 진보적인 편이었고, 설립 당시[10]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학교에 진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80년대 대학생들이면 다 한번씩 민주화운동해봤다고 치더라도, 평균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다른 학교보다 강하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솔직히 입학성적이 높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되려 민주화운동에 뜻이 있으나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한 고등학생/수험생들이 일부러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기 위해 한신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당시 재학하였던 동문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문쪽의 진입로는 연일 최루탄 냄새와 전경들이 가득 메웠고 꽤나 살풍경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형식적이나마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채 구태만 답습하던 운동권들의 각종 병크로 인한 반감과 IMF이후 취업문제등으로 관심사가 옮겨지면서 진보의 색은 점점 퇴색되어 갔고, 결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껍데기만 진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적인 성향의 학생은 학교가 전반적으로 너무 빨갱이 좌파지향적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분명히 존재한다.결론적으로는 중도

그러나 다른학교와 대비되는 이 학교의 특징은 무엇보다 학교를 소유한 재단 자체가 진보적이라는 점이다. 이미 학교단위의 OT나 강의에서 한신대의 역사를 민주화운동가(장준하, 문익환 등)들에게 두고 설명하고있다. 이러다보니 소속 교수진도 진보적인 지식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11][12], 때문에 학풍도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편이다. 다른 대학들처럼 학생회가 진보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우라면 학생회의 정권교체로 이러한 분위기는 사그러들 가능성이 있겠으나, 한신대의 경우 학교의 소유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보수적인 학생들이 학생회를 주도하게 되더라도 학풍 및 교내 분위기는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교수진의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종교와 관련된 과목이든 관련되지 않은 과목이든 묘하게 되려 수강생들이 비교인이나 무신론자, 타 종교인일 것을 감안/전제하고 수업하는 경향이 강하다. 수업 중엔 되려 목회자 출신 교수라도 종교적이지 않은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하는 강사들이 많다.

신학교이므로 채플 강의를 의무수강 해야한다. 비 신학과생의 경우 학기 당 1회씩 4학기 수강해야한다. 신학과 및 기독교 관련학과의 경우 주 2회채플을 이수해야 하는데(일반채플+신학대학채플) 1,2학년때는 주2회 3,4,학년때는 주1회(신학채플)만 의무수강하면 된다. 한번에 0.5학점씩 부여된다. 학점이 0.5학점인 것을 보면 알겠지만 1주에 하루 1교시만 들으면 된다. 평가는 Pass/Non Pass. 출결에 따라 평가하며, 지정좌석제를 이용하여 좌석에 따라 출결을 확인한다. 수업 중 교목실 측에서 출결은 알아서 확인하고 결석자는 수업 종료 직후 빔프로젝터로 고지하여 이의에 따라 수정한다. 이 외에도 지각 시간이나 횟수에 따라, 수업 태도[13]에 따라 결석 처리가 되기도 한다.그 이전 까지만 해도 4번 결석시 Non Pass 였지만,2015년 기준으로 3번이상 결석할 시 Non Pass가 부여된다.

채플의 주된 내용은 목사들의 설교나 교리를 배우는게 아닌,외부강사를 초빙해 강연을 한다.주로 졸업생 위주로 초빙되는 경우가 많으며,특이하게도 한신대에 음악과가 없는대도 불구하고 음악쪽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심심지 않게 초빙된다.강연 자체는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들을만 하지만,일부 학생을 제외한다면 그저 부족한 수면을 채울 훌륭한 시간일뿐이다.

신학과 채플을 제외한다면 학과 상관없이 원하는 시간에 채플 수강이 가능 하다.[14] 채플의 경우 졸업 전까지 들어야하는 만큼만 들으면되므로 공강이나 원하는 강의가 있다면 다음 학기에 듣기로하고 미뤄도 되지만, 저학년(1~2학년) 동안에 듣는 것이 권장된다고 학교 측에선 안내하고 있다. 물론 강제성은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수강신청은 학생의 편의에 따라서.

학과에 따라 채플이 영어채플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실제로 외국에서 온 선교사/목사님이 영어로 강의한다.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한국말을 아주 잘하셔서(...) 한국말로 설명하며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다 강의하는 내용의 수준도 교인이 아닐 것을 전제하고 하므로 매우 낮은 편. 강의 내용 및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은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로도 왠만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

3. 학내 학생운동 현황

그러나 재단을 소유중인 교단 및 학교 교수진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라하여 총학생회와 원만하게 지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강의나 학내 활동에서 이념적으로 부딛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최근 재단 측의 학교 경영 방향에 있어 총학생회와의 갈등이 심하다.

최근 10년 동안 등록금은 꾸준히 올랐고 등록금 의존율은 약 80%에 달한다. 비축 적립금 200억을 만들고도 2011년에 또 다시 5% 대의 등록금 인상을 결정했다가 반발에 부딛혀 그나마 1.9%의 인상률로 내렸다. 미리 거둬간 등록금은 다시 돌려줬다. 60주년 기념관을 짓고도 또 70주년 기념관을 짓겠다는 계획은 만우관 옆에[15] 자그마한 강의동(늦봄관) 하나 짓는 것으로 축소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학생들은 2011년 6월 2일 동맹휴업을 추진했다. 자발적으로 수업을 쉬고 한신대를 비판하는 행사를 열자는 취지였다.

전국에서 최초로 하는 것이었으나 언플에 실패했다 인지도 낮은 학교의 서러움 아니 정작 학생들도 뭐하는지 잘 몰랐잖아 학생들의 참여율은 상당히 저조하였다. 일단 기말고사 직전시기였다는 점이 있는데다, 동맹휴업 자체가 상당히 저조한 투표율 아래에서 간신히 통과가 된 사안이었다. 또 등록금 문제를 둘러싸고 학생회와 등록금투쟁위원회의 알력다툼이 있어서 투쟁과정에 있어 일원화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당시의 64대 총학생회는 전 대 학생회가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인 2010년 말에 후보가 출마하지 않아 보궐로 간신히 선출된 학생회인데 반해, 등록금투쟁위원회는 학생회 선출 이전부터 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던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슈선점의 문제 등으로 대립각을 세웠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한편으로는 이전부터 총학생회 집권을 둘러싼 NL파와 PD파 양측 대립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사실상 두 쪽 모두 흔히 생각하는 정체성은 많이 흐려져 이제는 그냥 이전에 어느 쪽이었던 선배를 따라 활동하던 학생들의 모임 수준이다. 아무튼 뭐 이러니 동맹휴업이 잘 되었을리가... 이 모습은 현재 1.9% 인상률이 확정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문제다.

또한 등록금 인상 문제 뿐 아니라 대학 측의 경영 방향에 있어서도 총학생회측과 갈등이 많았다. 날로 빡세져가는 교육부의 대학평가에 호응하고 대학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2011년 이래 각종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기 때문. 일부 인문대 학과들의 정원 감축이나 전과 조건의 완화 등 인문대를 축소하고 교직과정을 폐지하는 방향의 구조조정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학생 및 교수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지지부진하나 2015년 현재까지도 구조조정안에 대한 학교 측의 의지가 완전히 꺾이지 않아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고있다.

결국 컨설턴트 회사의 여러가지 학교경쟁력 강화안 중 학내 반발 없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은 학과명칭 변경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제기가 아예 없지는 않은데, 학과 명칭을 너무 심하게 자주 바꾼다는 것. 어떤 학과는 몇년 사이에 학과 이름이 두세번 바뀐 경우도 있었다.

보수적인 학생들의 경우 전반적인 학내 분위기에 대해 반감이 있는 경우도 있는 듯 하나, 어쨌든 전반적으로 진보 성향을 가진 학생들이 많은 편에 속하고 있다. 이를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16]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경찰들을 쌍욕(...)하는 대학생들이 한신대학교 학생들이다. 작중에서 드러나지는 않으나 엔딩 크레딧을 보면 '한신대생'으로 나온다. 그리고 촬영장소제공 목록에도 한신대학교가 있다. 아무래도 작중에 나온 시위현장이 그곳이 아닐까 싶다.

2013년에는 제한적 절대평가제 라고 쓰고 제한적 상대평가제라고 읽는다. 와 75분 강의블록제가 시행되었다. 당초 강의블록제는 처음 시행된게 아니다. 이미 2007년 2학기부터 3학점(3시간)짜리 수업을 시행할 경우 반드시 1,2,3 / 4,5,6 / 7,8,9 교시로만 편성하게끔 제정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것을 다시 75분단위로 이틀씩 수업하게끔 만든게 현재의 강의블록제이다. 이 때문에 기존의 3시간 연달아 하는 수업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연초부터 많은 혼선이 빚어졌고, 21학점(일반적으로 학생이 수강할 수 있는 최대 학점이다.) 수업을 들을 경우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주 5일 수업이나 1교시 수업을 넣어야 하기도 하였다. 다만 여전히 일주일 중 화, 목요일은 오후에 3시간 연강수업이 가능하며 금요일은 하루 종일 연강수업 편성이 가능하다.[17]

2013년 1학기부터는 병점역 앞 스쿨버스 정차장은 1교시 통학을 하려는 학생이 몰려 2번출구에서부터 길게 줄을 서게 되었으며, 역에서 학교까지 도착하는데는 실질적으로 20여분 정도가 소요되고 있다. 이 때 남들보다 뒤에있던 학생들이 지각을 모면하려고 아는 사람이 앞에 서있을 경우 태연하게 새치기를 시도하는데... 리그베다 위키를 하는 지성인응?이라면 그러지 말자. 자신이 늦게 나온 이유로 지각하게 된 피해를 다른 사람이 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66대 총학생회 선거가 보궐로 진행되면서, 한신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비권(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들어섰다. 다만 이는 학보사의 견해이다. 물론 이 견해는 현 학생회장단의 성향 등으로 보아 적절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굳이 나누고자 한다면 NL쪽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니까 나누지말자 그러나 강경한 의미의 NL파가 아니라 이전에 그쪽 계열의 사람들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을 뿐이라는 뜻이다.[18]

2015년 현재 68대 총학생회를 기준으로 근 6년간 단일후보로 입후보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의 투표 참여율 저조로 단일후보조차도 투표기간 연장으로 간신히 통과시켰던적이 적지않다. 상술한 66대 학생회부터는 비운동권이니하여 학교측의 운영에 대한 투쟁동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잖이 나오는한편, 또 한쪽에선 나날히 저조해지고있는 일반학생들의 교내활동 참여율이 문제가 되고있는 것이 실정.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래 학교 분위기상 2015년 현재까지도 해당 사고와 관련하여 총학의 또는 총학이 아닌 여러가지 단체의 여러가지 교내외 활동이 산발적으로 이어지고있다.

2015년 초(1학기 시작 전) 컨설턴트 회사의 충고를 받아 학과별로 조교를 두던 것을 각 단과대가 공통으로 조교 및 행정직원 인원을 두는 구조조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각 사무실도 통합되었다. 학교 측의 설명으로는 각 과별로 조교를 두면 과별 상황의 차이로 인해 업무의 질의 차이가 있고 현황파악은 어려워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각 단과대의 규모에 따라 조교와 담당 행정직원이 배치되어 종래와 비교했을 때 담당인원에선 별 차이가 없고 업무효율성은 더 뛰어나질 것이라고 설명하나 학생회 측에서는 단과대별로 업무를 보면 각 학과별 행사 진행에 차질이 생긴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4. 위치

경기도 오산시 양산동에 있다. 그런데 이 학교 위치가 매우 애매하기 짝이없다. 학교 건물 자체의 주소지는 오산에 속하는데 한신대 입구[19]는 주소상 화성시에 속한다. 한신대 정문에서 한신대 입구까지 도로명주소를 위한 '한신대길'이라는 주소가 이어지는데, 이는 행정구역상 화성시와 오산시에 걸쳐있는 것이 된다.[20] 또한 한신대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통학시 이용하는 병점역[21] 역시 행정구역상 화성시에 위치한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특이하게도 장공관(본부)나 만우관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독산성세마대가 있는 작은 산을 끼고 있다. 학교에서 조금만 나가보면 황구지천이 흐르고 있어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등교하면 안개가 짙게 끼어 한 치 앞에 지나가는 차량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하자. 말하자면 이 학교의 입지조건은 풍수지리상 좋다고 여겨지는 '배산임수'의 정반대인 '배수임산'이다. 재학생들 사이에선 한 겨울 캠퍼스에 등교하면 맞게되는 일명 '양산동 칼바람'이 유명하며, 실제로 근교 도시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날씨를 만만하게 보고 옷을 차려입고 오다가 추위에 떨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학교에 가보면 전투기들의 우렁찬 소음을 들을수 있는데 학교가 위치한 오산을 생각하고 오산공군기지에서 이착륙 하는 주한미공군 소속 항공기들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공군 소속 전투기들이 내뿜는 소음이다.

수원시 세류역 바로옆에 공군 제10전투비행단 및 제39전술정찰비행전대가 위치한 수원공군기지가 자리잡고 있어서 이착륙하면서 직선거리상으로 매우 가까운 한신대학교 상공을 지나면서 생기는 소음이다. 게다가 오산공군기지는 오산시에 없고 평택시에 위치하고 있다. 송탄역 근처.

덕분에 민항기의 소음 따위하곤 비교도 안 될 크기의 소음을 자랑하기 때문에 군용기가 뜨면 수업이고 채플이고 잠시 중단되는 기적이 일어난다.[22] 오오 공느님 오오 하지만 이미 적응되어 있는 고학년, 교수, 강사들은 없던 일처럼 무시하고 그대로 수업한다.

학교 측에서는 셔틀버스를 타고 병점역에서 택시타면 5분거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1교시 수업을 들으러 줄을 서봤어야 그런 소리가 안나오지.

4.1. 한신대 분교? 이원화캠퍼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 학교 역시 분교가 있다. 하지만 여타 대학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솔직히 말해 규모만 보면 동네 중고등학교 크기라, 부속 고등학교 아니였어? 캠퍼스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

대체로 캠퍼스라 하면 두가지의 경우가 있다. 하나는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와 같이 캠퍼스 간 학과 차이가 크지 않은 캠퍼스를 다른지역에 하나 더 만드는 경우와, 성균관대학교(인문사회계열, 자연과학계열 분리), 명지대학교(인문사회계열, 자연과학계열 분리),중앙대학교(예체능계열과 나머지 학과 분리), 경희대학교(어문계열,공학계열,예체능계열과 나머지 학과 분리)와 같이 캠퍼스 간 유사중복학과가 없는 경우이다. 전자를 흔히 분교라고 칭하며, 후자를 이원화 캠퍼스라고 칭한다. 이원화 캠퍼스는 소재지 차이는 있지만[23] 본교이다. 졸업장, 성적표에 캠퍼스명을 기재하지 않으며, 학적코드도 같다.[24]

이 대학은 본교는 그대로 두면서 신학대학원만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하고 있는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그 이유는, 현재의 수유동 캠퍼스는 원래 종합화 이전 한국신학대학 시절의 캠퍼스인데 종합화가 되면서 종합화된 학부(신학과 포함)와 종합화된 대학원(신학과 제외)을 현재의 오산 캠퍼스에 설립하고 수유동 캠퍼스에는 신학대학원만 남았다. 하지만 종합화가 되었어도 이 대학을 설립한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 양성은 여전히 이 대학의 신학과 학부와 신학대학원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과 관련 인사나 교단 관련 인사들 사이에서는 수유동 캠퍼스의 위상은 오산 캠퍼스 못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이 쪽이 원래 학교이고, 오산 본교는 확장할 자리가 없는[25]수유동을 벗어나 확대 성장해서 새로 만들어 나간 것이기 때문에 동문들도 수유동 캠퍼스를 분교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본 항목의 '역사' 항목에서 각 캠퍼스의 역사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참고하면 좋다.

4.2. 캠퍼스 건물 및 교내외의 편의시설/환경 현황

지도 및 캠퍼스 건물의 자세한 약도는 여기를 참고바람.[26]

오산캠퍼스의 경우 가장 오래되었으며 사실상 한신대 건물의 메인을 차지하고있는 만우관을 기준으로 좌우로 넓게 퍼져있다.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만우관이 보이고 그 뒤는 아무것도 없는 산이므로 얼핏 다른 대학교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다지 크지 않아보이지만 아마도 생각보다는 크다.여기에서 대학별 부지 면적을 이미지로 보았을 때 한신대 정도면 작은 편에 속하긴 하지만 아주 작은편까진 아니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사거리의 새마을금고 앞에서 한신대학교 앞, 그리고 정문안으로 진입하여 만우관 앞까지는 계속 경사진 길이다. 셔틀버스 및 마을버스가 전부 교내에 서게된 2015년 현재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셔틀버스가 교외에 정차하던 시기엔 이 경사가 학생들에게 나름 고통을 주었다. 그래도 어지간한 급경사를 자랑하는 학교들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가파른 경사는 아니다.

교내 상권의 경우 학생식당 2개, (식당에 딸린) 매점 2개, 안경점, 우체국, 국민은행[27], 교내 서점, 카페 하나가 전부. 매점의 경우 사실상 식당에 딸린 형태로, 식권을 팔고 있다. 한편 매점에선 문구를 팔지 않으며, 문구는 하나뿐인 교내 서점에서 구매에서 취급 중. 카페의 경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명 프렌차이즈 매장이 아니다. 또한 테이크아웃 만이 가능한 형태의 카페 점포가 두 곳 있었으나 계약관계의 문제로 결국 운영이 중단되었다. 테이크아웃 카페의 계약문제에 관한 내용은 학보의 기사를 참고할 것.

병점역 후문 일대에서 한신대학교 앞까지는 대부분 논,밭으로, 매우 황량하여 상권이랄것이 별로 형성되어있지 않다. 그래도 병점역의 영향으로 학교 정문, 쪽문 측문, 후문 일대에는 주거지가 형성되어있으며 학교 정문 쪽에는 어느정도의 상권은 형성되어있다. 유명 프렌차이즈 브랜드 점포는 없지만... 학교 정문과 어느정도 거리가 있어 왕래 중에 잘 보이지않아 알아채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60주년 기념관 앞 문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백년가약 아파트 및 e편한세상 아파트는 각각 약 400세대, 1600세대에 달하는 엄청난 대단지다. 병점역 후문 근처 및 마을버스 운행구간 사이의 논, 밭, 하천이 워낙 시각적 임펙트가 강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산간오지/벽지는 아니다.

5. 교통

병점역에서 내려 병점역 2번출구로 나가면 학교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존재한다. 마을버스는 한신교통의 56번 버스로, 길을 건너지 않은 정류장에서 출발하여 한신대길을 통해 학교로 들어간다.

그리고 캠퍼스 정문으로 들어가기전 사거리의 GS25 앞쪽과, 그 맞은편 빵집앞에는 병점역 2번출구에서 정차하는 55번 마을버스가 정차한다. 이 55번 마을버스는 통학인원들이 많은 시간대에는 56번버스와 같은 노선을 달리기도 한다. 캠퍼스 정문의 등산로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주로 기숙사에 귀사하려는 소수의 학생들만 이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실은 55번버스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운행하는 관계로, 학교 근처에서 알코올과 함께 하는 인생공부하다가 밤 늦게 귀가하는 학생들이 멀찍이서 오는 버스를 발견하고서는 수지맞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한때 학교를 오갔던 두 노선의 버스가 병점역에서 다른 정류장을 이용하고 있는 바람에 등교시간대만 되면 학생들이 버스가 오는 방향을 따라 길을 우르르 건너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안전문제가 대두되어 2011년부터는 모든 버스가 아침과 점심 등교시간대에 한해서 예전에 셔틀버스가 사용하던 병점역 셔틀버스 정류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현재엔 스쿨버스와 마을버스가 병점역 2번출구 통학버스 승차장에 구분없이 들어오고 있다. 통학생이 가장 붐비는 시간대인 오전 8:50 부터 9:30까지는 약 5~10분 간격으로 배차된다.[28] 방학 중에는 아예 운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상의 버스들은 주요 등교시간(블록 상의 1교시, 2교시 시작 직전 30여분)에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만차로 인해 지하철 출구와 가까운 쪽 버스정류장에선 버스가 승객을 태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한가로운 시간대엔 노선대로 지하철 출구 바로 앞 정류장에서도 버스 탑승이 가능.

2011년 9월(2학기) 이후 그 동안 마을버스의 편리성에 밀려[29] 영영 사라질줄로만 알았던 셔틀버스가 교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차하는 지점은 경삼관(도서관)앞과 60주년 기념관 앞이다. 또한 마을버스 역시 주요 등교시간인 오전 11시까지는 경삼관 앞 뿐 아니라 60주년 기념관에서 하차할 수 있다.

또한 주요 하교시간인 오후 4시부터 송암관 맞은편 승차장에서 교내로 들어오는 마을버스 및 배차되는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를 빠져 나갈수 있다.

그리고 2011년 2월부터는 KD그룹 직행좌석버스가 사당역, 강남역, 성남[30]까지 운행한다. #

이로 인해 성남(신갈, 영통), 잠실, 사당에서 운행하던 셔틀버스는 없어지게 되었고, 학교 내 버스정류장의 모습도 이전의 한신관광 도색 일색 이었던 것에서 빨간색 도색의 직행좌석버스가 도배를 하게 되었다.

2010년 6월 버스 차고지 모습 #
이게 빨간색 버스로 죄다 변경.

참고로 직행좌석버스들은 원래 기숙사 앞 버스정류장에서만 승하차가 가능했었으나 기숙사 앞이 강의동으로 가기엔 지나치게 멀다.

그래서 오산시와 진통 끝에 캠퍼스 정문 진입로에 들어가기전 사거리, 좀 더 정확한 위치는 GS25 편의점과 새마을금고 ATM기 부스가 있는 곳과 그 맞은편 빵집 근처에 버스가 정차하게 되었다. 임시정류장이기 때문에 방송은 없으나, 대부분 학생들이 내리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으며, 승차할 때에도 역시 이쪽에서 승차가 가능하다. 하지만 학교 정문으로부터 완전히 아래로 내려온 위치에 있고 경사가 꽤나 급하다. 즉 직행좌석버스정류장 - 일반버스정류장 - 정문 - 만우관 코스는 그야말로 등산로나 다름 없는 극악의 언덕을 자랑하고 있다.그래도 양심상 교문 앞 극악 경사로 유명한 상명대 등의 학교에 비하면 양반이다

6. 역사

처음에 설립된 이유는 기존 장로교회의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반대하여 1939년 3월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되어[31] 장로교의 신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서울 승동교회 장로인 노석 김대현이 1939년 3월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발족하고, 그 해 가을 승동교회에서 개강하였다. 그리하여 1939년 9월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열린 제 28회 장로교 총회에서 종로구 효자동의 승동교회[32]를 임시교사로 하여 '조선신학원'을 정식 인준, 개설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해인 1940년 4월 19일에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란 이름으로 출범했다.[33] 당시 이는 이전 평양신학교 등과 달리 조선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출범당시 조선신학교의 초대 이사장 겸 원장은 설립에 많은 힘을 쓴 김대현 장로였다.

그러나 김대현 장로는 노환으로 학교를 설립한지 얼마 안된 1940년 9월에 사망하였다. 그러면서 자연히 조선신학교는 설립 초기에 참여하였던 교수진들의 신학적 경향에 크게 영향받게되는데[34], 특히 당시 재직 중이었던 장공 재준 목사가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35][36]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37]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38]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고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39]
이후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하에서 적산건물이었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일본 천리교 경서욕구 본부 건물을 인수하여 조선신학원이 사용하였다.[40]

한편 광복이 되어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자 분열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면서[41]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던 고신파는 이미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인해[42] 광복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 사실상 분리된 상태였다.

이러한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43] 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44]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니가가라 하와이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

한편 이 난리 중에도 194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는다. 그리고 재단법인 한신학원 인가와 함께 조선신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이 난리를 피우는 도중에 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을 계속한다.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 그 해 9월에 총회신학교가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한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45] 이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46][47]

이에대해 1952년 4월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37차 총회에서 한국신학대학교 측을 굴복시키기 위해 경기노회에 명하여 김재준을 면직하도록하고[48] 한국에 들어와있던 외국 선교회 중 유일하게 한국신학대학교 편을 들어주던 캐나다 선교회의 윌리엄 스코트 선교사는 본국에 소환을 요청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또한 조선신학교 출신자의 교역자 채용 금지 및 목회자격 박탈을 선언했다.

결국 1953년 6월 10일 한국신학대학교 강당에서 9개 노회의 대표 47인이 기독교장로교[49]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50] 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고 목포, 전남 경남 노회가 참가했다. 또한 이 해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예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기장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며 선교사 21명을 파견해줌으로써 교단이 활기를 띄게된다[51]

1954년 대학원이 개원했고 1958년 수유리에 캠퍼스를 세우고 학교가 수유리로 이전한다. 참고로 수유리 캠퍼스의 현 위치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함태영[52][53]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직접 터를 보고 결정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교내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이후 한신대학교의 이사장까지 역임했던 당시 기독교장로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헬리콥터설을 제외하면 사실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1973년에 학생과 교수가 삭발투쟁을 감행하며 전 학교, 전 교단 차원에서 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다.[54] 이 때문에 1975년에 문교부로부터 휴교령의 철퇴를 맞는다.

한편 동시에 이 시기 즈음부터 종합대학교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그려진 밑그림은 이른바 문사철(문학,사학,철학)을 중심으로한 사범대학 중심의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현재의 한신대가 인문대 학과 위주로 구성되어있으며 일부 학과들의 교직이수 과정이 남아있는 이유도 이 때의 영향이다.[55] 2012년 이후부터는 되려 인문대, 교직과정을 없애지 못해 안달이더라 1980년에 종합대학으로써 '한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1981년에 현재의 오산캠퍼스가 개교한다.

참고로 원래 캠퍼스를 세우려고 했던 자리는 현재 중부지방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구 세무대학[56] 자리였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당시 오산의 그것도 외진 땅 한구석에 거처를 옮긴 이유가 이 학교의 전통대로 또 다른 전통(全統)에 격렬하게 항거하다 그 분의 눈밖에 난 바람에 80년대 초반에 한번 신입생 모집 금지(사실상의 폐교)를 당하고 머나먼 음산한 대지 땅으로 쫓겨난거라는 설이 있다. 기장교단 내부에서는 故 강원용 목사 등을 주축으로 한 교단의 정치적 실력자들이 신군부와 정치적 타협 하에 얻어낸 결과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57] 어딘가 모르게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근거가 확인된 바는 없다. 그렇지만 교단 바깥에 있는 이들에겐 '도시전설'이나 '음모론'으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 한신대가 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의 보루 같은 곳이었던 탓에 '폐교'를 밥먹듯이 당하던 학교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교단 내부에선 이미 공공연히 회자되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1991년도에 이공계 학과가 개설되었고 1992년에 한신대학에서 지금의 한신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 한신대의 초기 역사는 장로회 교단의 역사, 교단의 분열과정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장로회 및 장로회계열 주요 신학교 항목의 내용을 참고하면 좋다.

7. 특징

  • 학교의 길이가 상당히 길다. 그것도 납작하면서 길다. 아주 납작한 타원을 생각하면 되겠다. 이때문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등교 할 때 꽤나 고생한다. 기숙사에서 60주년기념관은 끝과 끝이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거의 1km는 족히 되니, 본의 아니게 2km씩 걷기 운동하는 셈이다.[58] 2009년 이전, 스쿨버스만이 병점역과 캠퍼스간의 유일한 통학수단이었을 적에는 등교 자체가 고역이었다. 특히나 1학기가 종강하는 시점인 6월초 무렵 오전 9시 30분에 (1교시 수업 시작시간) 60주년 기념관 5층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건...전교생의 체대생화
  • 전교생을 지칭할 때 오천한신이라고한다. 실제로 학생수는 2014년 재학생 기준 5600여명.

  • 근처의 병점역은 (한신대)를 병기하고 있다. 이는 2006년 실시된 코레일의 역명 병기 사업의 결과. 당시 3년 사용에 5천2백만원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후 기간이 만료되는 2009년에 연장이 확정되어 2015년 현재까지도 유지되고있는 상태. 참고로 이 가격은 비싼 편은 아니다. 역 근처에 학교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던 경우 억단위로 가격이 치솟은 경우도 있었다.

  • 대학교들 중에 가장 처음으로 교수평의회를 만들었으며 교수들의 힘이 강한것으로 알려져있다. 교수들의 연봉도 세다(2010년 기준 전국대학 34위, 출처는 교육통계데이터베이스) 대표적인 예로 모 학과는 학교측에서 합격규정을 만들 수 없다며 특기생 입학을 거절하려하자 학과장이 나서서 기준을 만들어 학교측의 반발을 진압이기고 그 학생을 합격시켰다고 한다. 즉, 학교와 교수의 관계에서 학교가 일방적 우위는 아니다.[59]. 그러나 이것이 되려 교수의 힘이 비대칭 전력비대화 되어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돈은 권력이다! 하지만 2013년~2014년동안 인문대장을 강제로 취소시키고 총장 마음대로 임명시킨다거나, 교수의 재량으로 수업 정원 외 몇명정도 추가로 넣는 것도 힘들어지는 등 교수의 힘도 다소 약화되고 있다.

  • 교단, 학교 운영 측, 교수진 측, 총학 측 모두 사회활동면에서 진보적인 학교지만 의외로 또한 군종목사 선발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지정 학교 중 하나이다. 다른 몇개 학교들과 더불어 거의 초기에 군목 선발 시험 응시 가능 학교로 지정된 곳이다. 신학과 재학 중 2학년에 시험을 치거나 전역한 후 35세 미만에 한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라면 응시 가능하다. 2007년엔 군종장교 선발시험 전체 1등(1차 필기시험 1등, 2차 면접시험 1등)도 나왔었다.
    현 한신대 신학대학원장도 군목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으며, 25대 공군 군종병과장(현재는 전역)도 한신대 출신 목사였다. 가끔 군선교신학 심포지엄 같은 것도 수유리캠퍼스에서 열리곤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험이다보니 애초에 입학성적이 높은 학교의 학생들에게 치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소수나마 선발은 꾸준히 되고 있는 편.

  • 도올 김용옥이 2011년 2학기에 교양강사로 초빙되어 강의했는데, 이 강의가 대학의 정규 교양강좌로는 최초로 EBS를 통해 중계가 되었다.[60] 강의 제목은 중용, 인간의 맛[61]이었고 본인이 쓴 책으로 강의를 했다.
    • 그리고 그 강의를 방송하던 EBS에서 갑자기 돌연 방영중단을 논의하자 난리가 났다.인지도가 떨어지는 대학인 한신대 측에서는 홍보가 되는 셈이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을까 강의 방영이 중단되자 김용옥은 자신이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던 4대강 사업을 비판했기[62] 때문에 자신의 강의가 시청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EBS가 높은분들로부터 외압을 받아서 자신의 강의 방영을 억지로 중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EBS 측에서는 직접 보도자료를 내며 해명했다. EBS측에서는 김용옥의 주장을 당연히 부정하고 자신들이 방영중단을 결정한 이유는 특정종교에 대한 편향적 발언이나 비속어의 사용 등 과격한 언어표현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물론 김용옥의 강의는 원래부터 항상 과격하고 과장된 언어표현으로 유명했으므로 EBS측의 주장은 많은 대중들에게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다. 당시 김용옥은 자신의 강의가 방영 중단된 것에 대해 비난하는 1인 시위를 강화문 한복판에서 했고[63], 또한 당시 영향력 있던 인터넷 라디오방송인 나꼼수에 출현하여 관련 사건을 언급하는 등 EBS와 현 정권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을 여러번 했고, 때문에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로 커져나갔다.
      결국 EBS는 두손두발 다 들고 항복 강의 방영 논의를 철회하고 나머지 강의를 방영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리했다.
      • 참고로 도올 김용옥은 한신대학교 출신이다.[64] 원래 다녔었다가 졸업은 하지 못했는데 2011년 2월에 44년만에 졸업을 했다고 한다.[65]

  • 만우관의 경우 처음 들어가는 사람은 길을 잃을 정도로 강의실 호수 배치가 엉망이다. 이는 80년대 전,의경들의 급습을 막기위한 조처라는 해석이 있다.덕분에 학기 초엔 강의실을 못찾아 미아가 되는 신입생이 꼭 한두명씩 생긴다. 만우관 앞엔 빨간 보도블록이 깔려있는데 과거 운동권 학생들은 이것을 붉은 광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만우관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인 류동운열사 추모비가 있는데 전두환 재임기간에 세워진 추모비인지라 이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와 이 시도에 대한 저지가 많았다고 한다. 만우관은 지하부터 5층까지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각 층마다 있는데 이는 전,의경의 급습을 피하기 위한 설계라는 주장이 있다.
    • *참고로 "붉은 광장"이라고 처음 부른 것은 학생들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당시 제5공화국 정권은 상기 언급한 류동운 열사비를 엄청난 수의 경력과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부수려고 했었는데,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시위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당시의) 학장을 위시한 교수들의 항의로 열사비를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양측이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 5공화국 정권이 KBS 방송 헬기를 동원하여 상황을 왜곡 보도하게 하였고, 헬기에서 보도하던 KBS 방송국 기자는 레드컴플렉스를 이용하기 위해 한신대 상공을 돌면서 강의동 안쪽의 붉은 보도블럭이 깔려 있는 곳을 "마치 소련의 붉은 광장처럼 생겼다"고 했다. 이 때부터 학생들이 이를 따라 이 곳을 붉은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규모면에서 붉은 광장과 비교하기에는 좀...

  • 2007학년도2009학년도 사이에 으로 구성된 교가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2010학년도에 개교 70주년을 맞이하여 슬로건을 변경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해당 노래는 철학과에 재학중이었던 이찬란이 불렀다고 한다(교가 듣기). 가사는 아래와 같다.

들어봐
같이가요 한신
꽉잡았니 정신
점수 따라가는
젊은이들 대신
참교육을 통해
참인재를 길러
한신대학교에
너의 미래를 맡겨
여기서 넌
따뜻한 마음을 가져
실력과 소양을
바탕에 갈고
가 가 같이가요 함께
모두가요 한신대학교

  • 예전부터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이면 부르던 노래가 있다. 제목은 "민족한신 진군가"이다. 주로 집회/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렀고, 제목이나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붉은색채가 강하다. 이 노래는 과 단위로 신입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위에도 서술했듯 학생사회의 많은 변화로 인해 현재는 총학생회나 몇몇 운동권을 제외하고는 아랫 학번으로 갈수록 잘 모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노래는 채플실에 비치된 성가 가사집에 있다. 바위처럼도 천주교 군인 성가집에 수록된 마당에 새삼스러울것도 없지 않은가

항전의 역사를 일군 선배들의 숨결 안에
민족한신 이름높이 투쟁속에 살아온 우리
보아라 조국이여 통일의 새 역사여
단결의 교훈으로 큰 물결을 이루니
투쟁의 함성 조국을 흔들어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한신이여

보아라 조국이여 통일의 새 역사여
단결의 교훈으로 큰 물결을 이루니
투쟁의 함성 조국을 흔들어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한신이여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 한신! 투쟁! 투쟁! 투쟁!

위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 이미 80년중반부터 90년 중반까지 학생들 사이에 거룩하게(?) 불렸던 노래가 있다.

민족 한신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억압과 가난 분열에 싸여 (가사가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제는 이 사슬끊고 나가야 해
웅크린채 결코 시들지 않으리
갈라진 이 땅 하나됨 위해
용솟음쳐라 민족 한신여
우리 함께 사는 세상 다시 만들자
이 땅 위에 살기 위하여

8. 개설 학부

8.1. 단과대학 (2012학년도 현재 기준)

  • 신학대학
    • 신학과
    • 기독교교육학과

  • 인문대학
    • 국어국문학과
    • 영어영문학과
    • 독일어문화학부(독어독문학과)
    • 중국어문화학부(중국문화콘텐츠학부)
    • 철학과
    • 한국사학과(국사학과)
    • 종교문화학과[66]
    • 문예창작학과
    •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

  • 2016년부터 인문대학의 몇몇개를 통합해서 학부화 시킨다고 하지만, 학내 저항이 만만치않아 정확하게 언제 될 지는 알 수 없다. 학부의 이름도 현재는 미정. 현재 상황으로는 독일어문화학부, 철학과, 종교문화학과,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을 묶어 인문학부로 만들 계획이라고한다. 자세한 사항은 추가바람.

  • 사회과학대학
    • 국제관계학부(국제관계학전공, 정치학전공, 미국학전공[67])
    • 사회학과
    • 경제학과
    • 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
    • 국제경제학과
  • 휴먼서비스대학
    • 사회복지학과
    • 재활학과
    • 특수체육학과

  • 글로벌협력대학
    • 중국지역학과
    • 일본지역학과
    • 경영학과
    • e-비즈니스학과
    • 글로벌비지니스학부

  • IT대학
    • 컴퓨터공학부
    • 정보통신학부(디지털융합학부)
    • 수학과
    • 응용통계학과(정보통계학과)

8.2. 대학원


  • 일반대학원
    • 신학과
    • 기독교교육학과
    • 철학과
    • 국사학과
    • 재활학과
    • 종교문화학과
    • 중국문화콘텐츠학과
    • 컴퓨터공학과
    • 정보통신학과
    • 특수체육학과
    • 목회신학전공
    • 국가와시민사회전공
    • 노동정책및사회정책전공
    •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
    • 기록관리학전공

  • 신학대학원 [68]
  • 교육대학원
  • 사회복지실천대학원
  • 문예창작대학원
  • 스포츠재활과학대학원
  • 정신분석대학원

8.3. FM(구호)


한신대학교 총학생회 자체의 FM으로는 '민족한신'을 붙인다. 주로 총학생회 자체가 NL계열에 의해 이어진 전통이 강하기에, PD계열이 집권할때는 이 FM을 폐기하기도 하였다고 하나 2012년 현재 총학의 성향이 PD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별 상관없이 쓰고 있다. 선배들에 의해 유지된 전통이 강하거나 운동권 학생들이 대대로 과 학생회를 맡는 경우 꾸준히 계승되어 오지만, 실제론 졸업할때까지 "그런거 처음 들어본다."라는 식으로 모르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보통 과의 FM은 (기조)+(학과명의 두문자)의 4글자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대체로 호칭문제에 있어서 나이제보다 학번제를 채택하는 과들이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둘 간의 상관성은 얼마나 예전의 관습이 많이 남아있는가의 차이이다. 여기서 예전의 관습이란 학생운동적 색채를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운동권의 색채나 사회문제의식과는 거리가 먼 전공들은 원래 없기도 하고, 있다고 해도 일종의 '급훈'이나 '좌우명' 처럼 쓰이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 교수진에서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 신학대학
    • 신학과 : 통일신학
    • 기독교교육학과 : 민족자주교육의선봉

  • 인문대학
    • 국어국문학과 : 민중의벗국어국문
    • 영어영문학과 : 하나영문
    • 독일어문화학부(독어독문학과)
    • 중국어문화학부(중국문화콘텐츠학부)
    • 철학과 : 한신철학
    • 한국사학과(국사학과) : 변혁국사
    • 종교문화학과 : 혁명종문
    • 문예창작학과 : 진보문창
    •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 : 청춘디문콘

  • 사회과학대학
    • 국제관계학부(국제관계학전공, 정치학전공, 미국학전공) : 청년국관
    • 사회학과 : 선각사회
    • 경제학과 : 정치경제
    • 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 : 최강광홍
    • 국제경제학과 : 전진국경
  • 휴먼서비스대학
    • 사회복지학과 : 민중복지
    • 재활학과 : 실천재활
    • 특수체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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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학과 : 선봉수학[69]
    • 응용통계학과(정보통계학과) : 한얼통계

8.4. 같이보기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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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뒤에 보이는 건물이 한신대 도서관인 경삼관이다
  • [2] 정문이라고 하는 표현은 틀리진 않았지만 매우 미묘한데, 한신대학교 입구라는게 따로 있기 때문. 다만 입구라는게 저 멀리 송산교 앞 사거리에 있다. 실제 한신대에서 한신대 입구까지는 거리상 버스로 무려 3정거장이나 된다. 아무래도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주소상 한신대길은 한신대 정문에서 입구까지 쭉 이어져있다.
  • [3] 정류장이라곤 하나 경삼관 앞에선 하차만 가능
  • [4] 수정 이전에는 장공 김재준 목사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가 한신대의 신학과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실제 설립에 착수하고 직접 자비를 들여 학교를 세운 것은 부호였던 김대현 장로였다.
  • [5] 기존의 보수주의(근본주의)신학은 개혁주의로써 성서의 완전무결함(=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쪽은 성서유오설(=조금은 틀릴 수 있다)을 주장했다.
  • [6] 그래서 일부에서는 개혁주의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나타난 경향이라고도 한다. 그 외 신학자이자 실존주의에 속하는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 [7] 일단 실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예장 통합) 김명용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창시자 김재준 목사를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이해했다. 물론, 김명용 교수 혼자서 예수교장로회 전체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순 없지만.
  • [8]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인 그 사람 맞다. 문익환 목사 역시도 신정통주의 경향을 가진 프린스턴 신학교 석사 출신이다.
  • [9] 수원시에 위치한 영생고등학교가 같은 법인에 속해있다.
  • [10] 종합대학으로서의 한신대 설립을 의미
  • [11] 한신대에서 강의한 적 있는 유명한 진보진영 인사로는 도올 김용옥, 전 경기도교육감 김상곤 등이 있다.(김상곤의 경우 교육감 당선 전에 출강했다)
  • [12] 사담이지만 주로 교양과목의 경우 한신대와 비슷한 종교적, 정치적 색채를 가진 교단 및 그 교단에 의해 운영되는 성공회대학교와 교수/강사를 공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리상의 현저한 차이로 같은 학기에 출강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 서로 다른학기에 이쪽 학교에서 저쪽학교로 오거나 가거나 하는 경우.
  • [13] 자거나 딴짓을 하면 결석처리 시키겠다는데, 실제로는 눈치껏 딴짓이 가능한 편.
  • [14] 원칙적으로는 학과 별로 배정된 요일 및 시간대에 신청하는게 맞다. 이는 인기 시간대에 사람이 몰려 채플을 들을 수 없게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시간대에 강의를 듣느라 어쩔 수 없는 경우 다른 채플을 신청할 수 있다.
  • [15] 구조적으로 이어져있다.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왕래가 가능.
  • [16] 물론 단지 화성과 오산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 [17] 그리고 사실 이는 다소 여지가 있는 것이, 최근 대학 교육계는 학생들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75분제를 실시하는 것이 대세다. 한신대는 비교적 75분 블록제 강의 도입에 늦은 편이다. 게다가 아예 3시간 연강수업 자체가 없어지고 1주일 내내 75분 블록제 강의를 강제하는 대학도 적지 않다.
  • [18] 애초에 민주화운동이 매우 격렬했던 역사가 있어 학생운동계의 숫적 주류였던 NL과의 최소한의 연결고리는 끊기 어렵다. 80년대 학생운동계는 어떤 학생회/단체건 강온의 차이만 있을 뿐 절대다수는 (큰 틀에서 볼 때) NL이었다. PD파는 끝내 학생운동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했다. 다만 PD/NL의 파벌 구분은 이념/사상으로 구분해야 마땅하겠으나 실제로는 그런 거 없고 인맥/소속/출신/계열에서 따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해당 학생회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NL계열 사람들과 인맥이 맞닿아있다는 것이지 그 자신이 NL이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분류된다는 것이 아니다.
  • [19] 한신대 정문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주의할 것! 학교에 실제로 드나들 때 사용하는 입구가 정문이고 주변이 허허벌판인 송산교 앞 사거리(주변에 해병대 전우회 컨테이너가 위치)에 '한신대학교' 및 표어와 교훈(校訓)이 쓰여있는 문이 '한신대 입구'이다.
  • [20] 도로명주소상 한신대 앞 태안성호2차 아파트의 경우 화성시 한신대길이고 한신대학교는 오산시 한신대길이다.(...)
  • [21] 현재 병점역은 명칭에 한신대를 병기하고 있다
  • [22]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이 수원시 서둔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당시 이전 명목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 군용기 소음이다.
  • [23] 대체로 서울에서 벗어난 지역에 위치해있는 경우.
  • [24] 캠퍼스 간 전과도 자유롭지만, 캠퍼스가 자연과학계열과 인문사회계열로 나뉘어져있는 경우 전과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 [25] 개발 제한 구역인 국립 공원 북한산이 서쪽을 막고 있고 주변이 이미 도로와 주택가로 차 있어, 확장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고 주변에 빽빽히 들어선 주택가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6] 참고로 해당 약도의 모습으로 본 캠퍼스 방향은 방위상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캠퍼스 방향이 정 북향이라는 뜻.
  • [27] 한신대의 경우 학생증이 국민은행의 체크카드로 만들도록 되어있다.
  • [28] 실제론 배차간격은 거의 의미가 없고, 한번에 두세대 씩 한꺼번에 들어오기도 한다
  • [29] 원래는 마을버스가 정작 교내에서 하차해줌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학교 셔틀버스가 학생들을 교문 밖에 내려줬다.
  • [30] 2013년 3월 폐선
  • [31] 신사참배에 불복하자 일제는 1938년에 평양신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학을 선언했고, 결국 1941년 3월에 이사회는 자진 폐교를 결의한다
  • [32] 그러나 현재 승동교회는 한신대가 속해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는 상당히 (정서적으로)거리감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이다
  • [33] 설립 당시 학교 인가를 위해 50만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김대현이 전부 자비를 털어서 냈다. 현재 시가로는 족히 수백억은 될것이라고...
  • [34] 게다가 김대현은 신자이지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목회자가 아니므로 조선신학교의 학풍에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 [35] 그 결과 과거 이 항목에 있었던 오류처럼 설립자가 김대현이 아닌 김재준인 줄 아는 불상사가 생기게 된 것이다. 무려 당시 돈 50만원을 쾌척했는데 안습...
  • [36] 사실 당시 김재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이 세워진 (후)평양신학교에 재직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하여 (후)평양신학교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때문에 그는 조선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 [37]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되긴 했지만, 사실 김재준의 신학 노선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 [38] 굳이 언급하자면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의 송창근 목사, 부산출신의 윤인구 목사 등이었다
  • [39]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이 그런거나 하고 있을 때야?
  • [40] 이것은 참조한 기록의 한계로 어느시점의 일인지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40년대 후반기~50년대 전반기의 일이다
  • [41]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 [42] 그리고 이것이 장로교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 주류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 [43] 당시 그들은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조선신학교가 고등비평에 입각하여 성서절대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 [44] 심지어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까댔는데,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
  • [45]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
  • [46] 1951년 4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 [47]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 [48] 그러나 경기노회가 김재준을 면직시키지 않았기에 결국 다음해(1953) 4월에 열린 38차 대구총회에서 총회장이 직접 면직을 선언했다
  • [49] 대한예수교였다고 설명하는 글도 있다
  • [50] 물론 기장 그들만의 총회다. 단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총회 회기를 잇는것 뿐...
  • [51] 참고로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재차 분열되었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오늘날 장로회 계열 교단만 대충 170여개가 넘어간다.(...) 장로회에서 분리한 교단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괄호 안에 나름대로의 명칭을 적어 구분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은 쫓겨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않고 아예 별도의 교단을 따로 설립한 모양새가 되었다.
  • [52] 대한민국에 4대까지 존재했던 부통령 중 3대째 부통령이었다. 4명의 역대 대한민국 부통령 중 유일하게 임기를 모두 소화했다
  • [53] 법관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배웠지만 신앙인으로써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교단 분리 이후 1951년 '한국신학대학교'가 성립하였을 때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부통령 임기 중에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된 적도 있다. 부통령 퇴임 이후엔 한신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적도 있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위키백과를 참고할 것 #
  • [54] 학교 및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도 교단의 정신적 지주인 장공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교단 원로들이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입장이었던 영향이 크다.
  • [55] 한신대학교에서 인문대 외의 학과들, 특히 아예 문과가 아닌 공대나 체대 등의 학과들은 대부분 한참 뒤에야 생긴 것이다.
  • [56] 현재의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해당한다. 참고로 세무대학은 세무공무원을 양성하던 2년제 국공립 전문대학으로 1997년 외환 위기 때 공무원조직 축소의 일환으로 사라졌다.
  • [57]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새로 대학을 개교할 수 있게 허가해주는 대신 수원 북부의 부지를 전두환의 장인이 갖고 있던 오산의 부지와 맞바꾸는 것이었다고. 실제로 현재 전두환의 처남 명의(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았다고한다)로 되어있는 오산 일대의 땅이 바로 한신대학교 오산캠퍼스 뒷쪽에 있으며 검찰은 이 일대 땅(500억원대)을 추징 대상으로 보고 압류했다. 관련기사# #
  • [58] 참고로 60주년 기념관의 동수는 이런18동이다. 더운 날에는 아주 쪄죽기 딱 좋다.
  • [59] 단, 최근 교수임용에 있어서 세례자만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이 만들었다. 이에 일부에서는 교수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것이 아니냐고 하고있는중. 물론 교수들은 반발하는 중이다
  • [60] 당시 학교 측에서 강의실에 커다랗게 달아놓은 한신대학교 심벌과 이름이 카메라에 어쩔수없이(?) 여러번 잡혔다. 공짜광고
  • [61] 그러나 김용옥의 강의스타일에 따라 강의 제목이 중용일 뿐이었지 실제로는 동서양 고전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 다루었다. 교양이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망한 사람 여럿 있을듯
  • [62] 정확히는 실제 강의에선 그런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았었고, 다만 강의 교재의 서문에서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 [63] 사실 꼭 EBS를 비판하는 시위는 아니었고, 당시 있었던 35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시위도 같이 했다
  • [64]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고등학교를 마치고 진학한 학교는 고려대학교였다. 그것도 생물학과. 그러나 집안이 장로교 집안이었기에 목사를 꿈꾸며 잠시 한신대학교에 다녔다가 이후 목사를 포기했는지 결국 졸업은 다시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했다.
  • [65] 사실 명예졸업이라 학력으로 쳐주진 않지만...어차피 이사람은 학력문제로는 아쉬울 것이 없다
  • [66] 개신교계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설치된 종교학 관련 학과. 종교학과가 서울대나 가톨릭계 대학(가톨릭대, 서강대)에서만 설치된 걸 생각하면 흠좀무
  • [67] 2015학번부터는 미국학 전공이 사라졌다.
  • [68]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소재 서울캠퍼스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 [69] 2014년 수리금융학과로 개편된 이후에는 변화에 따라 수정바람.
  • [70] 특히 역사항목
  • [71] 한신대가 학교 측에서 스스로 역사라고 주장하는 인물들 중 특히나 한신대학교와 관련이 깊은 사람이다. 윤동주 시인이나 정치인 장준하의 경우 사실 한신대학교와 겹치는 부분이 그렇게 크지는 않아 직접적으로 같이보기에 기재하기는 그렇지만 해당 항목의 내용을 일부 참고하면 좋다. 그 외 실제 한신대학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정작 위키에 항목이 없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