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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울리히 루델

last modified: 2015-04-06 16:25:52 Contributors

1916.7.2~198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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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Contents

1. 그는 누구인가?
2. 전쟁 당시
2.1. 그의 전과
2.2. 그의 성격
2.3. 잡다한 이야기
3. 전후의 행적
4. 평가
5. 대중문화에서의 루델


1. 그는 누구인가?

인민의 적[1]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공군에 종군하며, 지상공격력은 좋으나 느려터진 Ju-87 슈투카를 타고 다시 없을 기록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전후의 행적으로 보아 확실한 나치다.

2. 전쟁 당시

그가 우리 유니폼을 입지 못한 것은 진정 불행한 일이다.
피에르 끌로스떼르망

귀관이아말로 지금까지 독일이 낳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위대한 군인이다.
아돌프 히틀러

루델 한 사람은 1개 사단 몫 이상이다.
페르디난트 쇠르너

2.1. 그의 전과

총 출격횟수만 따져도 2.530회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동안

  • 518 (519 대라는 기록도 있음)대의 적탱크 격파
  • 700 대의 트럭 격파
  • 150 대의 대공포와 포대 격파
  • 100 개 이상의 다리, 철도, 벙커 파괴
  • 소련군 강구트급 전함 "10월 혁명호"(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 반파, 마라(Marat) 격침(그것도 폭탄 한방으로).[2]
  • 70 여대의 상륙용 함정 격파
  • 적 전투기 11기 격추[3]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쉽게 말해, 혼자서 한개 전차군단을 섬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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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정복을 입은 한스 울리히 루델 대령. 황금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이 돋보인다. 원래 전사자 12명을 선정하여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정작 생존자인 루델에게 1945년 1월 수여되었다. 수여자는 루델 단 한 명뿐이다.)

2.2. 그의 성격

독선적인 성격이라 독일군 내에서도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독일군 에이스군터 랄의 인터뷰에 따르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그만한 실력은 있긴 했지만....). 게다가 절대 술을 마시지 않고 우유만 마시며 취미는 등산에 운동 뿐이어서 동료들과 어울릴 구석이 없었다고.

2.3. 잡다한 이야기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렸지만, 그만큼 당하기도 많이 당해서 30회 정도 격추당했고 5번 정도 부상당했으며 그 와중에 마지막 부상시 한 쪽 다리를 잃었다. 당시 독일군 에이스들이 마음놓고 제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부상을 입고도 출격할 정도의 근성을 보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출격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몰래 출격했는데 적 전차가 너무 많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루델이 몰래 출격한 것을 알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일화 때문에 일부에선 루델의 지금 알려진 전공마저도 축소된게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4]
전차 격파수만 봐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소련군의 주력인 5근위전차단의 T-34 수량보다 많다.

3. 전후의 행적

엄청난 전과를 올렸고, 또 전차 격파는 주로 소련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종전직전 미군쪽으로 비행기를 몰아서 미군에 항복했고, 그 결과 전후에 시베리아에 끌려가지 않았다(에리히 하르트만이 시베리아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던 것에 비하면…).

전후에는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목발을 짚고 등산가로도 활동했으며 1965년 49세 때 21세의 독일 여성과 재혼, 자식을 한명 보았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저서 cat shit one'80 vol.2를 보면, 루델이 뜻하지 않게 포클랜드 전쟁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클랜드 전쟁시 시 해리어와 함재 레이더로 무장한 제국의 역습에 대해 아르헨티나 공군은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달랑 대거나 스카이호크로 이루어진 공격편대를 보냈다. 비록 그들이 시해리어에게 많이 격파되긴 했지만, 영국함대에 타격을 주어 적함대의 진군을 많이 늦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루델이 있었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실업자가 된 루델이 아르헨티나 군사 고문으로 고용된 것. 그 때 루델은 아르헨티나에 없었지만, 그에게 지상공격항공전을 배운 루델의 제자들은 영국군과 이스라엘제 비행기를 타고 싸웠고, 아르헨티나 공군사령관인 발리디오 라미노소도 루델의 수업을 받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전후엔 네오 나치에 활동한 적이 있다. 게다가 그가 소속된 정당은 독일제국당(Deutsche Reichspartei)##이라는 극우 정당인데, 이 정당은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반헌법의 이유로 강제 해산한 사회주의제국당 (Socialist Reich Party)##의 주요 구성원 및 대부분의 당원이 가입한 당이다. 그리고 한스 울리히 루델은 1952년에 여기서 신나치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나치신비주의에 빠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으므로 그가 나치임은 빼도 박도 못한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 때 애도 비행을 하던 서독 공군 비행기 조종사들이 하늘에 하켄크로이츠를 그리는 바람에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했다 한다.

훗날 그의 전투 기록과 Ju-87 슈투카가 미국의 탱크 킬러 A-10의 모티브가 되었다고도 한다.

4. 평가

사상 최고의 파일럿을 꼽으라면 반드시 후보로 올라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엄청난 전과에도 불구하고 격추한 목표의 대부분이 지상에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인지 밀덕들 사이에서는 에이스로서의 입지는 좀 미묘하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유명한 에이스들이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을 쓰러트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듯. 까는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는 목표물을 맞춘 것 뿐인데 너무 띄워주는거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5] 또한 한번 격추당하면 그대로 저세상인 해군 소속의 조종사들과는 달리 육군 소속인지라 몇번이고 격추당하며 올린 전과라는 것도 저평가의 원인. 하지만 기본적으로 순수하게 조종사의 기량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공중전과 달리 지상공격은 재수없이 대공포화에 맞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은 조종사라도 그대로 황천행인데 루델은 2500회나 출격하면서도 종전까지 살아남았다(물론 격추는 여러번 당했지만...) 게다가 루델이 가장 많은 전과를 올렸던 1944년은 독일이 제공권을 상실했던 시점이었는데 적전투기만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슈투카로 이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점만 봐도 절대 그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대공포화가 있는 와중에도 전함을 단 한 발의 폭탄(특수제작이긴 하지만)으로 격침시킨다는것은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전투기로 적기 격추도 11회나 했으니..[6]

여담이지만 당시 독일 공군에 저런 에이스가 많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독일 공군의 상황이 막장이었다는 반증이 된다. 미국의 경우 일정 수 이상 격추하면 휴가도 주며 제대도 가능한데 독일이나 일본의 공군은 그런거 없었다.[7]사실상 영원한 휴가(…)만이 허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일본의 경우 섬으로 상륙부대가 오는 것을 정찰기에 있던 군인들이 철야 때문에 졸아서 못본 사태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5. 대중문화에서의 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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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스탈린은 그를 소련 인민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10만 루블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그 현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2] 그런데 정작 마라는 1.4톤 철갑폭탄으로 완전 격침됐다고 여겨졌으나, 침몰 후에도 하필 항구에서 가라앉는 바람에 포탑 2기가 여전히 사용 가능했으므로, 응급복구를 거쳐 항구 바닷물에 떠 있는 해상포대로 종목을 바꾼 후 레닌그라드 포위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독일군을 괴롭혔다. 이후 마라의 폐함은 1952년에 이뤄졌지만, 격침 당시 항해능력과 동력 및 사격관제능력을 몽땅 상실해서 전함으로서의 능력은 몽땅 잃어버린 점을 따지자면 격침된 것으로 인정된다.
  • [3] 이것은 슈투카로 거둔 전과가 아니다. 루델은 대지공격용 포케불프 Fw-190을 타고 출격한 적이 있는데 전투기 격추는 그때 얻은 전과다. 지상공격 전문가가 격추도 잘하니...
  • [4] 꼼꼼하게 전과를 조사했던 이런 성향 때문에 격추했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많다. 일례로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46100 회의 공중전투가 있었고, 소련은 여기서 106,400 대의 항공기를 잃었다는 공식 기록이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그 숫자가 약간 다른데, 그 숫자는 88,300 대 가량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에 반해, 당시 독일 공군이 집계한 격추댓수를 통합하면,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중 가장 수치가 떨어지는 77,000 대로 집계가 나온다. 이것은 독일 파일럿들의 격추 인정이 매우 까다롭고, 허풍으로 부풀린 과장된 전과 보고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며,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 전과가 상당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 [5] 그러나, 실제 공중전에서 사격 기회가 날 때는 도리어 지상공격보다 쉽다. 애초에 적기를 따라가며 꼬리에 붙을 경우인데(공중전에서 헤드온은 도박 오브 도박), 적기가 300km/h로 날아간다면 나는 보통 400km/h로 날기 때문에 100km/h차이만 극복하게 되지만 지상 목표물은 움직이고 있으며, 스쳐지나가는 속도도 내 전투기의 속도 그대로이기 때문에 도리어 정렬 시간이 짧아 사격이 더 어렵다.
  • [6] 일반적으로 5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하면 에이스로 본다.
  • [7] 미군은 전선에서 일정기간 근무하면 후방으로 보내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원한다면 후방으로 물러나서 신참들을 가르치는 교관이 되는길도 열어주었다. 독일도 전황이 괜찮았을땐 이런 체제였지만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숫적으로도 크게 밀리자 이런 체제가 무너져 전쟁말기엔 소수의 슈퍼에이스(수십에서 100대이상의 격추기록을 가진다. 최고는 352대를 격추한것으로 인정받은 에리히 하르트만)와 다수의 신참조종사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영 측은 신참이라도 실전을 겪은 베테랑교관들에게 제대로 배워 기본기량자체가 독일의 신참보단 훨씬 우수했다. 미/영측에 100대이상의 격추기록을 가진 슈퍼에이스가 없는건 이런 순환근무체제탓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