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한미관계

last modified: 2015-04-10 21:07:09 Contributors


韓美關係
United States-Republic of Korea Relations

대한민국미국 간의 관계.


Contents

1. 역사
1.1. 한미(韓美)의 외교적 첫 만남
1.2.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외교단절
1.3. 한국의 독립운동 이후
1.4. 해방 이후
2. 문화
3. 과거사 갈등
4. 경제적 통상압력
5. 향후의 관계
6. 관련 항목


1. 역사

1.1. 한미(韓美)의 외교적 첫 만남

미국이 한국과 외교적으로 첫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왕조 23대 임금 순조 재위시절인 1834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 아시아 지역에 특파된 로비츠 미국 특사가 미국 정부로 보고한 내용에서 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半島) 국가가 있는데 일본이라는 대륙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는 의사를 밝히게 되면서부터였다. 1845년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 때에 들어서 미국 국회의원 Z. 프래트가 조선왕조에 조선 통상사절파견안을 제안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1863년 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청 이외의 양놈들과는 모든 교역 및 통상을 거부하며 개방도 불허한다는 강경책을 내세우면서 외교적으로 미묘해져 있었다가 1866년 평양에서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통해서 평양에 입성을 시도하였다가 조선 관군과 분노한 평양 양민들에 의해서 화재로 전소되자 미국은 1871년 조선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항의+개항을 하고자 미군을 이끌고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전술적으론 압도적으로 이겼으나 조선은 끝내 통상하지 않았고 결국 미군이 물러가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882년 흥선 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정치일선에서 실각되고 명성황후가 돌아오고 실권을 잡으면서 그 해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이 때부터 한미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2.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외교단절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20세기의 격동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한미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 당시 미국은 1898년 스페인식민지 필리핀 문제로 전쟁을 하였던데다가 전쟁(미서전쟁)을 통해서 필리핀을 차지하게 되자 1905년 미국 육군장관이자 후에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는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의 수상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로 불리우는 가쓰라 다로 사이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지배에 대해 우월권을 인정하며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다는 명목으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을 외면하고 일본 편에 들게 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고종의 대한제국을 구원해달라는 요청에도 이를 무시하며 사실상 친일 성향을 드러냈고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는 입장을 밝혀서 결국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체결을 방조하게 되었다.

1905년 결국 루스벨트의 중재에 따라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대한제국의 수교국가 중 가장 먼저 조선의 한양에 주재해있던 외교공관을 철수하며 대한제국의 국가승인도 취소한다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미관계는 잠시 단교관계에 이르렀으며 경제적 통상면에서도 일본에 비해서 대거 축소되는 영향도 받았다. 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후임 대통령이자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이었던 윌리엄 태프트 역시 전임자 못지않게 일본을 두둔하고 지지하며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일본의 속령 및 식민지가 되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관이 대체적으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 것에는 당시 러시아 제국이 극동으로 손을 뻗치는 시점(예를들어, 의화단 운동 당시 러시아 제국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만주에 주둔시키고 그랬었다.)에서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는 등 이런 여론이 팽배했던 시기였다.(이러한 인식은 미국뿐 아닌 영국도 그랬다. 그래서 제1,2차 영일동맹을 맺었던 것..영미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과의 우호적 시각'은 1920년대 싱턴 회의때까지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중러를 견제하는 일본의 역할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변함이 없다.

1.3. 한국의 독립운동 이후

1914년 윌리엄 태프트의 후임으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우드로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통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있던 한국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그것이 바로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임자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리엄 태프트 행정부의 친일 성향 및 정책 등으로 인해서 조선과 사이가 멀어졌던 미국 일각에서는 3.1 운동을 계기로 일본이 명백한 침략자이자 의회에까지 일본의 속령으로 있는 한국과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자치정부 수립을 하려는데 대해 공감을 나타낸다는 의견을 냈는데 이 한국의 독립문제는 미국 의회에서도 3년간 논란거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의회 일부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병합으로 멸망한 대한제국의 입장에 대해서 깊이 사과해야하고 반성을 해야하며 과거 양대 행정부의 친일 문제 등에도 반성하고 사과할 기회를 가지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는 물론 필리핀을 속령지로 잡고있는 미국 행정부는 여전히 한국의 독립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공식 태도에 있어서도 미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한 명백한 입장이나 과거사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다. 일본은 미국의 협력자이자 우호국으로서 현재까지는 일본과 관계악화를 원하지 않는다. 의회나 언론사 등에게는 그에 대한 자제를 당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재미교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미국의 신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자세히 소개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미국은 독립자금 조달의 거점이자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외교의 거점지이기도 하였으며 안창호, 서재필 등이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한국과 미국은 친구이자 일본이라는 적성국을 물리쳐야하는 관계에 있다는 명목하에 일제의 만행과 악행을 폭로하고 나가서는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의 야만적이고 인륜을 저버린 만행을 폭로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양심적인 미국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한국친구회라는 단체를 세우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그 동안 친일 성향이 짙었던 미국의 외교노선을 바꿔놓게 되었으며 당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합국 수뇌들과 회담을 갖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1]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문제를 논하였던 카이로 회담을 채택하기도 하였지만 1945년 2월에 열렸던 얄타 회담에서는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건의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년 4월 노환으로 서거함에 따라 한국 문제는 후임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는 종전을 위한 수단으로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명령을 하달시키고 결국에는 미국을 승전으로 이끌어내 일본을 패망시켰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포츠담선언에 따라 미군 병력이 한반도 이남에 진주하게 되었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해방과 동시에 남북분단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1.4. 해방 이후

1945년 9월 미국은 조선총독부의 뒤를 이어 38선 이남의 과도정부 역할을 하게 될 미군정청을 세우며 남한 통치 및 질서유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이때 악수를 두게 되는데 친일파와 조선총독부의 친일관료들을 효율성을 이유로 그대로 기용한 것이었다. 미군정청의 입장에서는 한국민족의 친일청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안정된 행정이 최우선 과제였고 결국 이러한 입장이 친일파와 뒤이어 건국되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역할이 축소되긴 했지만 일경에서 바로 국립경찰이 된 경찰인력은 대국민 정책이나 태도에서 일제시대보다 달라진게 별로 없었다. 이는 대구 10.1사건, 여순반란사건과 같은 악재들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고, 대한민국 체제에서조차 한동한 경찰이 나이든 어르신들 사이에서 순사로 불리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 행정에 익숙했던 총독부 산하 관료들의 영향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 구성에 일본의 행정요소가 섞이기도 했다.
또한 민족주의 우익계와 불협화음이 끊일 줄 몰랐고, 좌파에 대한 탄압에 따라 남한 영내에서 빨치산이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민족주의 우파와 미군 중장 J.R 하지 사이에도 견해차 때문에 반목이 심해지면서 한반도 문제를 UN에 넘기고 UN 한국위원단을 통해서 한반도에 수립할 정부형태 등을 논의하였는데 이승만남한 단독 정부수립 제안에 따라서 정계는 급속도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고 UN 총회와 소총회 등의 결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첫 선거를 열게 되었고 제헌국회가 마련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정청은 해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은 대한민국의 첫 외교관계 국가가 되어서 가장 먼저 대한민국을 승인하였고 대한제국 시절에 맺었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도 그대로 유효함을 인정하여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단교되었던 한미 외교관계가 43년만에 복원되었다. 이와 동시에 서울에 주한 미국대사관이 설치되어 초대 주한대사로 무초가 파견되었고 한국도 워싱턴에 주미 한국대사관을 설치하여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을 파견하였다. 이후 한미 양국은 북한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양국간의 군사적 협력, 경제원조 등에 총력을 기울이며 순조로운 상태로 가는듯 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 참전한 영향 때문에 군사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미국 정부의 승인하에 해외 파견 미군의 감축안이 발효됨에 따라 주한미군도 여기에 포함되면서 1949년 6월 일부 미군 군사전문가나 보조 병력만을 남기고 전투 병력을 한국에서 대거 철군시켰다. 또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에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장담하면서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거나 파병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도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김일성에게는 남한을 잡아먹을 수 있는 좋은 먹이감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1년 후...

1950년 6월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서 결국에는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1년 전 주한미군을 철군시켰던 미국 정부는 한국에 미군 전투병력을 대거 파병하며 대한민국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경제원조를 통해서 대한민국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에는 박동선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금메달 강탈사건, 미선,효순양의 미군 장갑차 사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논란 등 여러가지 문제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현재까지도 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최우선 우호국으로 손꼽고 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2011년 한미 FTA가 체결되어 2012년 3월을 기준으로 공식 발효가 됨에 따라 양국간 수출입 무역장벽 철폐는 물론 일부 상품에 대한 관세부과 등도 철회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이 수립한 이래 한국은 정치나 사회는 물론 문화에까지 대부분 미국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양국 국민들간의 현지 여행도 자유로운 편이며 미국의 기업 등도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한국본부 및 지사를 두고 있다. 또 헐리우드 영화와 팝송, 그리고 영어문화 및 교육을 통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 하였으며 동시에 한국영화 및 K-POP의 맞수 상대이면서 미국 진출을 꿈꾸게 하였던 영향도 있었다.

사회적인 면에서 한국의 일부 진보계열 인사[2]들은 대체적으로 반미 성향이 있으며(5.18때 수수방관의 영향 그 이전엔 친미적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주한미군의 완전 철군 등을 주장하며 반대로 친미 성향이 짙은 보수 단체들과 대립하고 있는 편이다.

2. 문화

한국 내 입장에서는 1998년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이전까지는 주로 미국 문화가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를 압도하였기까지 하였다. 그 당시의 정서상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해대는 광신적인 부류도 많이 없었고 일본 문화에 대해서는 엄격히 제한을 두었던 점에다가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근친성에 이르렀다는 점을 보면 정말로 미국 문화가 대세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광신적 부류한 국가에 미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댔던 부류들의 생각과는 달리 일본 문화가 엄격히 제한되어있었던 시절에 학생시절을 보냈던 입장에서는 지금은 당연한 문화로 여겼던 일본 문화마저도 미국 문화보다 못하다며 외면을 당해왔던 것이 대부분. 그나마 일본 애니메이션이 아동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있다고 하지만 지금같이 매니아틱한 애니메이션을 접한 것은 거의 없었던 편이었고 당시 방송사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왜색 분위기 등을 대거 삭제하거나 수정하여 방영하였고 근데 정작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은... 일본어 배경 서체도 모두 한글로 바꾸었으며 한국 성우의 녹음을 통한 더빙판을 통해 많이 봤었던 입장이었고 지금같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문화에 오히려 밀렸던 편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빠에 비해 미빠(혹은 미국병 환자)가 많았다는 것. 여기에 미국 영화와 드라마 등이 활발하게 오래전부터 선보였던 편이기도 하여서 미국문화의 한국 내 인지도는 일본문화에 비해서 오래 전부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의 영화는 한국 정부에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장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한국 영화계와 첨예한 대립까지도 갔었다. 또한 의류 브랜드나 기타 생활용품 등도 미국산 상품이 많이 수입되기도 한 편. 게다가 영어의 영향도 커서 영어교육이 활발할 뿐 아니라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정규과목에도 편성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중학교부터 영어 과목이 적용되었으나 이 당시에도 사교육상으로는 초등학생 때부터 배웠던 편이 많았다. 현재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영어를 정규과목으로 편성하여 교육하고 있다.

3. 과거사 갈등

그러나 아무리 우호적인 한미 양국이었지만 특히 독도와 동해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의 시선이 매우 다른 편으로 나타나 있었다. 특히 미국은 같은 동맹국인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일본해 표기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주장과는 달리 거의 중립적인 편이라고 하나 사실은 일본 편을 들어가면서 독도에 관해서는 중립성향을 밝혔지만 동해에 대해서는 일본의 주장대로 일본해(Sea of Japan) 단독 표기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서 한미간의 갈등거리로 작용하였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을 하면서 일본에게는 센카쿠 열도의 미군 방어 의무를 천명했으나 한국 외교부에서 독도 역시 미군의 방어 의무가 있다고 성명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순방이 끝날때까지 독도에 대한 지지 성명이 없어 더더욱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향성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 독도 문제가 분쟁화된 것에는 미국 역시 큰 책임이 있다. 러스크 서한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참조.

특히나 미국은 과거 일제강점기 때도 일본 편을 들었던 전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한국 내에서 연이어 일어난 반미감정 및 성향 때문에 한국보다는 일본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참고로 일본의 자민당 정권은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시각을 보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을 두둔하는게 아니냐는 의문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에서 미국 본토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우는 것에는 긍정적이었으며 이를 통해서 미국인들이 일본의 침략행위와 만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동의하였다.

2015년 3.1절이 끝나기 무섭게 미 국무부 셔먼 차관이 한•중이 과거사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하여 값싼 박수를 받아내고 있으며 이는 일본에 대한 도발에 해당한다는 등의 아시아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비론을 꺼내고 나와 한국에서 셔먼 차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미 국무부와 한국 외교부는 이에 대해 미국의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태도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미국이 최근 중국 쪽으로 기우는 한국 탓에 약해진 한미일 삼각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셔먼 차관을 이용해 넌지시 한국에 압박을 넣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완전한 과거사 해결 없이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태도를 원하며 그로 인해 중러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태도에 국민들의 반감 역시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좋은 일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피습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한미동맹 강조 열풍이 불어 모든 반미감정을 덮어버렸으며, 셔먼 차관의 발언에 대한 대한민국의 질책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3]

2015년 4월 8일에 미국 국방장관이 일본 방문 당시 한중일이 과거보단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며 일본을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이렇듯 과거사 문제는 한국의 입장에선 역린이나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단순한 한미일 공조의 방해물로 여기면서 일본의 편을 자주 들어주기 때문에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고 있다.

4. 경제적 통상압력

정치적, 국제적으로는 우방 및 우호국인 한미 사이에도 경제분야 특히 경제적 통상압력이라는 갈등의 불씨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였다.

1996년에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한국진출을 위한 발판과 한국 자동차시장의 개방목표를 바탕으로 미국 정부에서 한국 정부에게 자동차시장의 조속한 개방을 통해서 통상압력을 가한 적도 있었다. 자동차 외에도 나머지 유통개방 문제에 대해서도 통상적인 압력이 가해지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던 편이었다.

또한 영화계의 경우는 스크린쿼터 축소문제로 한국영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는데 미국 영화계는 미국산 영화의 한국진출 활로개척과 시장개선을 위해서는 한국 영화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한국 영화계와 영화인들이 반발하였으며 이들은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한국 극장가에는 한국영화 상영은 줄어들고 미국영화들이 대거 상영될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며 주한 미국대사관에 항의서한을 보내거나 삭발 및 단식투쟁을 하며 스크린쿼터 사수에 나서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2015년에는 한국이 미국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도의 AIIB에 가입하면서 경제적인 관점에서만큼은 꼭 친미는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유럽 국가들도 가입하는 상황이라 미국 입장에서 직접 가입하지 않더라도 중국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묵인한 측면도 있다. 아울러 영국과 같은 유럽국가들까지 가입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나온 점이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향후의 관계

어쨌든 한미 양국은 현재와 같은 남북분단 시절에는 물론 남북이 통일되는 때와 그 이후에도 함께 하게 될 군사적, 외교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다[4].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온갖 정치적 악연이 많긴 하지만 남한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도 하였기에 더욱 그렇기도 하겠다. 왠지 한미관계 문서인데 일본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한국입장에서 미국의 중요성이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 입장에서도 한국은 매우 중요하다. 당장 미국의 무역상대국 순위 6위가 한국(2014년 기준)으로 프랑스는 물론 7위인 영국보다도 크다. 게다가 한미간의 무역은 계속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로, 2012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7위였지만 바뀐 것이다. 따라서 만약 한국에 정변이라도 일어난다면 미국의 경제도 엄청난 타격을 입을게 분명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국에서 한국을 포기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한국이 통일이 될 경우,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서 한국의 중요성이 커진다. 당장 중국과 러시아를 확실하게 견제하는 교두보가 마련될 뿐 아니라 양안관계에 있어서나 중국의 서진정책에도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렇기에 중국이 비난을 무릅쓰고 북한을 유지시키고 있으며 러시아도 통일한국이 친미에서 벗어나 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통일이 될 경우 중국과 더불어 북한지역 재건사업에 참여할 가능성이 큰 후보 0순위다.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군사적으로도 한반도는 미국에게 매우 중요하다.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중국•러시아에 대한 지역 사령부 역할을 한다면, 한국은 전진기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미국이 한국을 방패막이로 쓴다는 것을 뜻함으로 친미진영에서는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5].

6. 관련 항목

----
  • [1]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자고 제일 먼저 안건을 낸 사람은 장제스였다.
  • [2] 주로 진보당쪽
  • [3] 사실 무조건적인 비난만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한다. 지도자의 무능과 실책들을 아주 민감한 과거사들을 언급함으로써 그 치부를 가리려는 치졸한 행위를 까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셔먼 차관이 말하는 그 양비론은 의도야 어쨌든 일본이 한국과 중국, 그 외의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로 현 정치적인 측면을 억지로 호도한것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수 밖에 없다.
  • [4] 통일이 된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될 가능성은 많지않다. 지정학적 위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 있어서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 격이 될 비율이 커진다. 중국은 물론이고 서해지역, 그리고 러시아, 극단적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커버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미국이 쉽게 손땔 곳이 못된다. 그리고 북한이 사라지면 주한미군의 중요성 역시 약화된다지만 통일 이후 한국은 중국 러시아 영토 분쟁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특히 중국은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주한미군을 계속 유치해야 할 필요성이 북한이 존재할 때보다 훨씬 더 높아진다. 아예 친중이나 친러 국가로 전향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낮고... 무엇보다 미국은 한반도 주변 4강 중 유일하게 한국과 영토 문제가 없는 나라다.
  • [5] 아울러 중국이 굉장히 우려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상 통일이 되면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이기도 할 뿐 아니라. 러시아, 나아가서 중앙아시아까지 영항력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까지 갖게된다. 다만 중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실효성은 없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