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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바르카

last modified: 2016-08-06 18:27:43 Contributors

Hannibal Barc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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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루브르 박물관 소장. 바로 옆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나란히 서 있어, 관람객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생몰 BC 247~BC 183

Contents

1. 개요
2. 유년기
3. 제2차 포에니 전쟁
4. 이탈리아에서의 행보
4.1. 로마의 반격
4.2.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
4.3. 자마 전투
4.4. 정리
5. 자마 이후
6. 능력
6.1. 군사 분야
6.2. 카리스마
6.3. 내정 운영
7. 로마 멸망의 맹세
8. 여담
9. 관련 항목


1. 개요



인류 전쟁사에 손 꼽히는 위대한 전략가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으로,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한 유능한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다.

로마 원정에서 칸나이 전투 전에 한쪽 눈이 눈병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되어 안대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애꾸눈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였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 만든 2부작 한니발에서 보면 한니발이 어떤 식으로 눈이 뻘겋게 곪아서 눈병에 걸리는 상황이 자세히 묘사된다. 당시의 상황은 곪은 눈알을 제거하지 않으면 상처가 악화되어 금방 죽게될 상황이라서 엄청나게 심각했다고 한다.

멸망 직전이었던 제정 로마 말기를 제외하면, 이 사람만큼 로마 자체에 위기를 가져온 자는 없었다.

2. 유년기


한니발의 유년기는 리비우스 사료에 간략하게 언급되는데, 하밀카르 바르카가 포에니 전쟁, 스페인 식민 전쟁을 하느라 분주한 시절 카르타고에서 남아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에 따르면 한니발을 스페인에 초청한 것은 하밀카르 사후 뒤를 이은 그의 매형인 하스드루발이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Fair).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과는 동명이인. 제1차 포에니 전쟁과 히스파니아의 정복에 하밀카르 바르카와 같이 종군하였다. 하밀카르 사후 유지를 이어 히스파니아 남부에서 바르카 가문의 도시인 카르타고 노바(신(新) 카르타고)를 세웠다. 이후 평소에 무시하던 갈리아 노예가 원한을 가지고 살해했다. 초청할 때의 서신이 카르타고 원로원에 보내졌는데 이에 대해 한노가 이의를 다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한노는 사령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군대의 지휘를 바로 맡긴 뒤 군대를 세습까지 시키는 일을 개탄하며 한니발이 다른 카르타고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료 의원들이 이를 남의 가정사(?)에 참견한다고 여겼는지 한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고 한니발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군사 경험을 쌓게 된다.

스페인에서의 한니발은 전투시 용맹함과 열정이 넘치고 여가시간을 모르는 성실한 태도, 그리고 하밀카르와 빼닮은 인상으로 병사들의 인망을 얻은 것으로 묘사된다.

하밀카르의 뒤를 이은 매형 하스드루발이 평소 무시하던 갈리아 노예에게 살해당하자 한니발은 그의 직위를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습하여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 지역) 주둔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3.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은 총사령관에 오른 뒤에 로마와의 전쟁을 결심하고, 우선 스페인에 있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사군툼은 당대 히스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이자 로마의 동맹시였는데 동맹시를 공격하는 것은 로마와의 전쟁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이때 사군툼은 로마에게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당시 동맹시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해줌으로써 로마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그것으로 동맹시 수를 늘리고, 다시 전쟁이 발생하면 이를 반복해 세력을 넓히는 것이 전형적인 로마의 패턴이었다. 이는 로마의 전통적인 파트리아, 클리엔테스 관계를 국가간의 관계에 적용시킨 것이었는데 사군툼의 함락은 스페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을 깎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에 로마는 이를 심각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단 여기서 로마는 병력을 보낼 여력이 안되었는데, 대부분의 병력이 갈리아 인들을 견제하느라고 북이탈리아 지역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한니발이 이를 예상하고 고의로 이때 전쟁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로마는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사절을 한니발에게 보내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투가 급하다 하여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달변가, 웅변가의 면모가 없는 한니발이 만날 생각도 없었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한니발도 전투 중 부상을 입는 등 전투가 급박하기도 하였다. 이들 원로원 의원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카르타고 본국까지 건너가 항의했다. 그런데 카르타고 원로원도 만만치 않게 로마에게 감정이 대단히 나빠서 에브로 강을 사이로 경계를 그어놓고 그 강을 건너서 동맹관계를 맺은 일과, 과거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치지 않은 점 등 조약의 위법성을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다.

의외로 강경한 카르타고의 답변과 나름 반박하기 어려운 사안을 맞닥뜨린 로마 사절은 전쟁이냐 사군툼 철수냐 양자택일을 강요하였고 카르타고 원로원은 로마 사절단이 그들의 질문에 해명을 하지 않고 그냥 협박으로 무마하려 든다고 여겨 분개하였기에 한니발을 말리지 않겠다, 전쟁을 선포하면 받아들이겠다고 강경하게 답변하였다.

이때 로마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것을 안 사군툼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한니발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을 그대로 성안에 두고 옷 한벌씩을 가지고 나오시오. 이후 우리가 마을을 건설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안내해주겠소."

그 소식을 들은 사군툼 시민들은 그들의 재산을 모두 불태우고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사군툼은 점령당하고 모든 주민은 노예로 팔렸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이 사군툼 점령을 일부러 늦추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으나, 사료에 나온 사군툼 시민의 항전은 점령이 오래 걸린 것이 납득이 갈 정도로 처절하였다. (이래서 비전문가의 말은 절대로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4. 이탈리아에서의 행보

로마는 선전포고 후 나름대로 빨리 대응하여 군단을 시칠리아프랑스 남부에 이동시켰다. 동시에 로마는 외교적인 방법을 사용하려 하였는데, 스페인 남부에 있는 부족들과 한니발의 예상 이동 경로에 있는 갈리아 부족에 원로원 의원을 파견, 그들을 설득하여 한니발을 적대하는데 협조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군툼의 함락은 로마에 대한 불신을 낳아, 스페인 부족들은 우리를 사군툼으로 만들려 하는가라면서 사절을 쫒아내고, 갈리아 부족은 그들의 영토 관련 문제는 그들이 신경쓸 일인데 어째서 로마가 관여하는 것인가,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 민족을 정복하는걸 보니 대관절 속셈이 무엇인가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때 한니발은 빠른 속도로 피레네를 넘고 북상했다. 한니발의 북상 소식은 로마인들에게 알려졌고 로마 정부는 즉시 두 집정관인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를 각각 갈리아와 시칠리아로 보내 수비하게 하였다. 스키피오는 첩보를 풀어 한니발의 북상경로를 파악하려 하였으나 한니발은 갈리아 내부 깊숙히 이동하여 스키피오의 추적을 피했다.

그 후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과감한 선택을 했고 론 강에서 한니발을 환영하지 않은 갈리아 족의 군대를 격파해 알프스 산맥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던 갈리아족은 처음에는 이 새로운 이방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알프스의 산맥은 매우 험준하였던데다 산을 넘는 시기가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라 알프스는 이미 겨울이나 다름없으므로 그 추위로 인해 그는 로마 영역에 진입하기도 전에 수많은 병력을 상실하게 된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알프스 산맥 등반을 놓고서 한니발이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고 하는데 사실 한니발은 갈리아 부족이 자주 왕래를 위해 알프스 산맥을 지나다닌다는 정보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로마군을 기만하려고 알프스 등반을 감행한거였다. 다만 대규모 군대가 알프스를 통과한 경우가 사실상 없다보니 로마군 입장에서는 알아내지 못한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산맥을 넘어오자 북이탈리아 지역과 인접했던 로마의 식민지화에 맞서고 있었던 갈리아 부족들은 로마와 싸우기 위해 온 한니발의 도착을 환영하였다. 단 한니발의 병력은 로마와 싸우기엔 결코 많다고 볼수 없었던 3만여 병력에 불과하였으므로 갈리아인들은 한니발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쉽게 말해서 로마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한니발 측도 믿을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한니발은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때 집정관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론 강을 건너자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갈 계획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귀환, 얼마 안 있어 북이탈리아에 도착하게 된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최초로 타키누스에서 기병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스키피오 휘하의 기병을 격파하고 스키피오에게 중상을 입혔다. 일설로는 스키피오는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빠졌으나 당시 17세였던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포위망을 향해 단독 돌격을 하여 스키피오를 간신히 구출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은 한니발을 신뢰하였고, 그들로부터 군량과 병력을 넉넉히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부상당한 스키피오는 자신의 진영에 머물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로마 집정관을 앞에 두고 한니발은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하면서 북이탈리아의 로마 세력을 급속도로 위축시켰다.

그 사이 원로원의 훈령을 받아 급히 시칠리아에서 북상한 또다른 로마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와 그의 군대가 도착했다.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 군과 연합하였고 한니발을 조속히 격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는 그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가는 입장이므로 빨리 군공을 얻을 수 있길 희망했기 때문이며, 장군직을 아버지 - 삼촌을 통해 세습한 젊은 한니발과 그다지 많다고 볼 수 없는 그의 군대는 1차 포에니 전쟁에 불만을 품은 20대 젊은이가 젊은 혈기로 로마에게 대드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로 비추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스키피오가 갈리아인들의 변덕이 심한 것을 감안해 그대로 겨울을 나자고 하였는데 이때 샘프로니우스는 지금 스키피오는 세번째 집정관을 기다리자고 한다고 비꼬면서 강하게 반발한다.

한니발은 이에 셈프로니우스에게 기습을 하였고 이 도발에 넘어가 두 군대는 곧바로 트레비아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 싸움으로 인해 갈리아인 모두가 한니발의 편에 서게되고 방어가 여의치 않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인들은 후퇴한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한니발의 본거지인 스페인을 빈집털이하러 떠났고 샘프로니우스는 로마로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를 주재한 이후 그대로 원로원 의원으로 되돌아간다.

다음해 봄 한니발은 남하를 시작하였다. 이때 로마는 집정관으로 플라미니우스와 게미누스를 선출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건설한 자이자 원로원 의원들의 최종 영예이며 전직 집정관들 중에서도 가장 고명한 이가 맡는 감찰관을 지닌 인사로, 평민 계급들의 지지를 받는 후대의 민중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둘은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여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아마도 방어를 통한 물량전을 하고자 하였고, 따라서 둘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두 가도를 봉쇄한 채 대기했다.

이러한 종류의 싸움이 불리하다는 것을 안 한니발은 중간의 늪지대를 진군로로 선택하는데, 그 늪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역이 백여킬로미터나 뻗은 곳으로 어떠한 휴식을 취할 곳이 없는 지역이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한니발이 이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으므로, 한니발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이 지역을 3박 4일에 걸쳐 수면없이 지나간다. 군장을 매는 행군은 당연히 엄청난 피로를 동반하는 중노동인데, 수면을 삼일간 박탈한 것은 초인적인 강행군이었으며, 이 때문에 많은 병사들의 과로사를 낳았고 비교적 편하게 코끼리를 타고 이동하던 한니발조차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강행군으로 늪지대를 통과한 한니발은 병사들에게 우선 3일간의 휴식을 준다. 뒤이어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은 추격해왔다. 플라미니우스는 처음엔 다른 집정관인 게미누스의 군대를 기다리면서 한니발과의 회전을 미루었으나 한니발의 지속적인 초토화와 약탈, 방화를 목격하였고, 초초함으로 인해 정찰없이 한니발 군을 경솔하게 추격하다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매복 작전에 걸려든다. 여기서 플라미니우스는 전사하고 한니발은 로마군을 전멸에 가깝케 살육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 이후 곧바로 플라미니우스 군을 증원하기 위해 인근에 도착한 로마군의 주력 기병을 4천여를 다시 섬멸하는데, 칸나이 전투에서조차 로마인들이 6천여 기병을 동원하는 정도와 한니발 군에 맞서기 위해서 기병이 꽤나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당연히 상당한 손실이었다. 이러한 승리 후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플라미니우스의 패배 소식을 들은 로마 정부는 곧바로 독재관 파비우스를 임명하였고 파비우스는 군대를 편성해 곧바로 한니발 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을 무찌르기를 기대한 로마 시민의 바람과는 달리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회전을 피하는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하였다. 그러다가 분지 지형에 들어선 한니발 군을 쫒아와 가둬 놓았는데, 얼마 안 있어 한니발의 계략에 넘어가 한니발 군의 손실없는 후퇴를 허용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파비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로마 정부는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해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한니발과의 싸움을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그 동안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하였고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 곡창지대이자 물류의 집결지인 칸나이를 점거했다.

다음해 로마 시민은 집정관으로 바로와 파울루스를 선출하였고 원로원은 8개 로마 군단병과 8개 라틴동맹 군단병, 그리고 6천 4백에 달하는 기병을 뽑아 도합 9만 대군을 뽑은 뒤 두 집정관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들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칸나이에 있던 한니발과 싸우러 갔다. 뒤이어 벌어진 회전인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였다. 이때 로마군은 5만에 이르는 병사가 전사하였고 3만여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는 이것은 로마가 뽑을 수 있었던 모든 전력의 1/5이 날아간 것을 의미했다. 포로가 되지 않고 무사히 도망간 로마군은 1만명도 되지 못했다.

로마가 그 해에 뽑을 수 있었던 최대 전력이 한 싸움에 모두 날아가버리자 로마의 동맹시들은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칸나이 남쪽의 로마 동맹시들이 빠른 속도로 이탈하였고, 로마가 위치한 지역인 라티움의 바로 턱밑의 지역이자 삼니움 전쟁 때 내내 협력해서 싸워왔던 오랜 동맹 영역인 캄파니아 지역의 맹주이자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영한 카푸아 역시 한니발에게로 돌아섰는데 이는 로마에게 있어 큰 타격이었다.

사실 카푸아는 로마와 지리적으로도 꽤 가까운데다 오랜 동맹 관계를 맺었으며 매우 번영한 도시였으므로 칸나이 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의 공격을 견뎌낼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칸나이에서 로마군이 궤멸당하자 도시만 비교하면 규모상 그렇게까지 꿇릴리 없다고 보는 로마를 오랫동안 상전으로 모시는 카푸아 원로원에 대한 카푸아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원래 로마의 동맹시들이 벌이는 친로마 정책은 해당 시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사료에 보면 이탈리아 도시들의 전형적인 패턴으로서 항상 시민은 한니발에게 붙고 싶어하고 지배계층은 반대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로마는 언제나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병과 같은 수의 라틴 군단병을 편성하였는데 이 라틴 군단병을 구성하는 자들이 바로 이 동맹시의 시민들이었다. 로마는 매해마다 전쟁을 벌였고 이때마다 동맹시 시민들은 자신의 국가의 이익이 아닌 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쟁터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전리품조차 로마 군단병 위주로 배분되었고 점령한 땅은 로마 귀족들의 차지가 되었으므로 동맹시 시민들은 로마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그 동맹 시민들 중 카푸아 시민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이 유독 컸는데 그 주된 이유는 로마와 가깝고 친밀하고 번영한만큼 다른 동맹시보다 더 많은 수의 병력이 로마로 차출되었으며, 자신들만큼 번영한 곳이 로마에게 언제나 순순히 종속돼버리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군이 칸나이에서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카푸아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카푸아 원로원은 이들을 달래고 로마가 한니발에게 무너지는 상황이 자신들이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라 보아 철저하게 반로마 노선을 걷고 한니발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이 목숨을 건진 방법이 꽤 재밌는데,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이 자신이 의원들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말한 뒤 동료를 모두 원로원에 감금시켜놓고 시민들을 불러모았다. 이후 그 의원은 의원들의 목숨을 그들에게 맞긴다고 한 뒤 자신의 동료를 한명씩 불려왔다. 이때 시민들은 각 의원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분개하면서 그 의원은 천하의 악당이자 죽을 죄가 차고 넘친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때 그 일을 꾸민 의원이 이 동료 의원이 죽으면 그 공석을 메꿀 다른 이를 추천하라고 말하였다. 시민들은 침묵하였고, 누군가가 어떤 이를 추천하면 그때마다 시민들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어리둥절하거나, 또는 걔가 뭔데 의원을 하는가 하며 비웃었다. 결국 호명된 모든 원로원 의원들은 같은 이유로서 모두 지위와 목숨을 유지하게 되고 시민들은 모르는 악당보다 잘 아는 악당이 더 낫다고 낄낄대며 해산한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 뿐 아니라 카푸아가 로마로부터 결정적인 반기를 든 계기가 또 있었다. 카푸아 사절단은 한니발 쪽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는데 결정을 내리기 전 로마 집정관을 만나[2] 한번 동태를 살펴보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이때 로마 집정관은 카푸아를 철썩같이 믿었고, 따라서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게 로마가 얼마나 곤궁하고 위기에 처했는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카푸아측이 그 해에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 한도인 3만 중보병과 (6개 군단) 5천 기병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카푸아 사절단은 로마의 상태가 매우 나쁨을 알게 되었다.

이 요청을 들은 카푸아 사절단은 로마 원로원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이 지원의 대가로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요구했다.

1. 카푸아 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중 한명을 카푸아인으로 임명해 줄 것
2. 카푸아인에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줄 것

위의 조건은 로마측에게 있어서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는데, 당시 로마에서의 총사령관은 최소 집정관 레벨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단 둘뿐인 집정관 자리 중 하나를 카푸아에게 넘기라는 요구였고 두 번째 조건은 오직 로마만이 오로지 누릴 수 있었던 전 로마 세력에 대한 권력의 행사를 카푸아인에게도 나눠달라는 요구였다. 이러한 제안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극도로 분노하여 이런 상황에서 이익와 권력만 따지려고 하냐고 강력히 화를 내며 병사를 시켜 즉시 카푸아 사절단을 로마 성밖으로 내쫓아버렸다. 단 카푸아가 원로원에게 집정관 직위를 내놓으라는 요청에 대해 리비우스가 그런 일이 진짜 있었을지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문장을 써넣었다.

이 사건 뒤 카푸아 사절단은 이후의 대처를 서로 논의하였는데, 이들 중 하나가 한니발이 로마를 무찌르면 그 대가로 힘을 많이 소모하게 될 것이며, 이 힘이 빠진 한니발을 물리치면 카푸아가 로마를 대신해 전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이 그럴듯 하다고 느낀 카푸아 사절단들은 즉시 한니발에게로 가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동맹 조건은 카푸아는 한니발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카푸아의 자치권을 모두 인정한다는것과 카푸아인은 누구도 한니발 군대에 입대할 의무가 전혀 없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카푸아 지도자들이 한니발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 했다는것과 카푸아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 했으며 로마의 잠재적 힘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한니발은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그에게 붙는다는 소식을 듣자 답례로써 카푸아를 방문하였고 이때 한니발은 이미 전설적인 장군이 된 그의 모습을 보러온 수많은 카푸아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뒤이어 한니발은 카푸아 시내에 그의 군대를 주둔시켜 그해 겨울을 보내게 하였다.

카푸아의 이탈은 많은 도시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뒤이어 시칠리아의 가장 큰 도시인 시라쿠사 역시 로마를 죽는날까지 강력히 지원하던 히에론 2세가 사망한 후에 친 카르타고파의 공작으로 한니발 측으로 돌아섰다. 거기다 한니발은 이후 이탈리아 남부의 또다른 대도시 타렌툼도 계략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키게 한후에 손에 넣게 된다.

4.1. 로마의 반격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인들은 과거 독재관 파비우스가 고안한 지구전법이 일리가 있었다고 여기고 이로 방침을 바꾸게 된다. 한니발은 점령지로부터 보급과 원조를 받아가며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으나,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본대와는 싸우지 않으면서 한니발이 떠난 지역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한니발의 힘을 깎아내는데 주력하였다.

한니발의 승리 이후로도 로마 동맹시의 결속력도 와해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각 도시의 지배계층들은 전쟁하는데 병력만 제공해주면 그들의 특권을 굳이 침해하는데 별로 관심 없었던 로마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것 역시 어려웠는데, 포에니 전쟁 때 군단병을 20개씩 편성하는 대도시 로마를 상대로 공성전에 돌입하려면 대군이 필요했으며, 적은 부대로 공격하다 다른 동맹시에서 지원군이라도 오는 상황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로마가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병력을 적극적으로 공격, 격파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자 이탈리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니발은 공성전에서도 나름대로 괜찮은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술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는 한니발 개인의 역량 부족보다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었던 탓이 크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동생 마고를 직접 사절로 보냈다. 원조 요청을 받은 카르타고 본국은 마고에게 15000명의 보병과 1200명의 기병, 20마리의 전투 코끼리로 구성된 지원군을 맡겼고, 이 병력은 전투함 60척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사르데냐 섬에서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이 카르타고 본국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또한 스페인에서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함대가 에브로 강 전투에서 스키피오 형제에게 대패한 후 남부 영토에서 대대적인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카르타고 정부는 15000명의 보병과 1500명의 기병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사르데냐로 파견하고, 하스드루발에게도 4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을 보내주었다. 각 군대에는 임무를 마치면 이탈리아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중앙 아래쪽에 있는 큰 섬이 사르데냐 섬
사르데냐는 한니발로 인해 상황이 악화된 이탈리아 본국 대신 로마에 중요한 곡물 보급지가 된 상태였다. 사르데냐 섬의 위치와 역할을 감안할 때, 이곳을 점령하면 로마 본국을 더더욱 고립시킬 수 있었다.

제해권을 장악한 로마군은 인근 해역을 철통같이 감시했으나, 운이 따라준 덕분에 카르타고군은 무사히 사르데냐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2만 5천여 병력은 로마군에 큰 숫적 우위를 가지지 않았고[3], 카르타고군에 비해 우수한 지휘관을 보유한 로마군에게 의해 격파된다(코르누스 전투). 그리고 스페인에 보낸 병력 역시 하스드루발 휘하에서 로마군과 싸우나 이들마저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격파된다. 이 패배로 이탈리아로 향할 예정이던 마고 바르카의 원군은 스페인으로 향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니발은 적시에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4]

이때 한니발의 공적을 시기한 정적들 때문에 원조를 보내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으나 사료에서 정적인 한노의 발언은 승리에 도취된 카르타고 동료 의원들에게 그대로 씹혔고, 카르타고 원로원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병력을 준비해주었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위와 같은 지원군 편성이었고 따라서 카르타고 본국도 충분히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병력이 한해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궤멸되어 묻혀버렸으니 카르타고가 무책임하게 지원을 안 해준 것으로 여겨질 만하다.

카르타고 본국의 원조의 경우 이렇게 각지에 파견한 원군이 궤멸당한 뒤 얼마 안있어 누미디아의 시팍스의 반란에 직면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스페인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상대해야하는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아프리카까지 건너가 도움을 줘야 했던 것을 보면 한니발에게 보급을 해줄 여유가 없었다. 다만 이때 스페인은 데르토사의 패전 이후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여 전황이 안정되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작전이 가능했다.

시팍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스페인에서 스키피오 형제들이 계속 세력을 넓혀왔으나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엄청난 돈을 들여 스키피오 형제와 동맹을 맺고있던 스페인 부족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스키피오 형제의 로마군을 배신하게 하여 로마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다음에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두 스키피오 형제를 전사시키고 승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곧바로 스키피오 형제의 형의 아들이자 남동생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침입해 신(新) 카르타고를 점령해버린다. 젊은 스키피오는 후대의 명성 그대로 워낙 상대하기 힘든 적으로서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모두 패배한다. 이를 돕기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원래대로라면 이탈리아에 보내야하는 군대를 모두 스페인으로 파견해야 하였다. 즉, 카르타고가 한니발을 지원해 주려는 의도는 분명히 있었으나, 한니발 이외의 다른 장수들이 계속 패배하는 상황에서 이를 보충하여 전선을 유지하는데 여력을 소진한 셈이었던 것이다.

로마 역시 전력을 기울인 상황으로 해마다 20개 군단씩 편성하여 각지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한니발을 상대로는 전투를 피하면서 많은 병력을 보존하며 싸웠으나 카르타고는 편성 -> 몰살 -> 재편성 이런 식의 손실을 계속 감당해야하였다.

사실 카르타고에서 강경파, 주전파의 발언권은 상당히 강했는데 단적인 예로 훗날 스키피오와 카르타고가 강화를 맺은 이후 한니발이 돌아오자 주전파들이 원로원을 장악하고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카르타고가 한니발이 활약하는 기회를 방관할리 없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이 본국으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은게 없었던 것은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지휘관들이 워낙 무능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당대 로마의 전투기록을 볼 때 야전에서 로마의 중무장 보병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들어 반박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휘저음으로서 이탈리아 밖의 로마군이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였음을 감안하면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지나칠 정도로 무능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참고로 한니발이 사군툼을 공격한 이후 자마 회전에서 패배할 때까지의 15년에 걸친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 한니발이 없는 전장에서 다른 카르타고 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단 1번이었다. 그래도 소규모 기습작전에서는 나름 비등했으나 대규모 병력이 정면으로 격돌한 회전에서는 하나같이 힘을 쓰지 못했다. 병사의 질은 나름 비슷했지만 지휘관의 역량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는 증거. 베티스 고지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긴 것이 단 한번의 일이나 이렇게 이긴 것 또한 하스드루발이 뛰어난 전술로 격파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용병을 매수하여 수적인 우세를 크게 확보한 상태에서, 분산되어 병력의 열세에 처한 적군을 여러 부대가 포위, 협공하는 형태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즉 대형을 갖추고 정면으로 맞선 회전의 경우 한니발은 크게 뛰어났으나 다른 카르타고 장수들은 로마의 장수보다 크게 수준이 밑돌았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전선을 갈것도 없이 카르타고 장군들의 무능력함은 고립되다시피해서 싸워야하는 이탈리아의 한니발에게 직접적인 손실을 주기도 하였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의 대도시 타렌툼을 점령한 뒤[5] 한노라는 장군에게 2만여명의 병력을 주어 남겼다.

이탈리아에 고립되어 있었던 한니발에게 있어 2만여 병력은 꽤나 큰 규모였다. 한니발은 3만여를 직접 지휘하였을 뿐이므로 2만 병력은 그의 3분의 2에 달하는 규모. 그리고 이 한노는 로마가 카푸아 포위망을 구축하자 근처에 있었던 한니발과 합류하려 북상하였는데, 이때 베네벤툼에서 로마 지휘관 그라쿠스에게 급습당해 궤멸당하고 1천명(...)만 살아남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한니발만은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무적이어서 이탈리아 중부를 휘젓고 다니면서 6개 군단을 연이어 전멸시키는 활약을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212년 실라루스 전투에서 매복작전으로 3개 군단에 해당되는 1만 5천여 병력을 전멸시키고 그 뒤 헤르도니아에서 회전을 벌여 3개 군단을 괴멸시켰다. 기원전 216년 벌어진 칸나이 전투의 4년 뒤의 일로 로마가 한창 파비우스의 지구전법을 쓰고 있었을 때였다. 단 이러한 승리에도 한니발이 전황을 뒤집을 수 없었는데, 한니발이 이러한 승리를 하면서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 근처로 내려가게 되자 파비우스 전략 답게 로마는 그 틈을 타 두 명의 집정관들이 5만에 달하는 6개 로마 군단병과 6개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해 카푸아를 포위하였다.

다시 북상한 한니발은 3만여 병력과 함께 근처에 주둔하였으나 로마인들은 매뉴얼대로 회전을 피했고, 한니발은 코끼리를 앞세워[6]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이 포위망을 지키려는 로마군도 필사적이었다. 지휘관인 두 로마 집정관 중 한명이 창에 꿰뚫릴 정도로 완강히 맞섰다.

한니발은 카푸아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로마를 직접 공격하여[7] 이들 로마군이 포위를 풀것을 기대하였으나 로마는 카푸아 포위를 풀지 않았고 결국 카푸아는 로마의 손에 떨어졌다. 사실 로마시를 둘러싼 성벽이 워낙 견고한데다 한니발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하는 게 아니라 방어가 목적이라면 수비군도 충분했기에 굳이 카푸아 포위군이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었던 측면도 있다. 한니발에게 병력이 충분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때 카푸아의 배신을 주도한 원로원 의원들은 위에 서술한 과거 그들의 목숨을 구한 바 있던 그들의 리더 의원에게 가서 대책을 물었고, 그 의원은 멋지게 상황 설명 겸 질타한 연후, 대책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집에 와서 같이 목숨을 끊자는 말이었다(...). 결국 이들은 그렇게 하고 마침내 카푸아는 함락되어 로마인들은 카푸아 지도층의 배신자들에게 처형으로 응수하고 카푸아는 로마연합의 동맹국에서 속주로 하락한다. 어떻게 보면 기회주의자들의 인과응보와 자업자득이었다.

카푸아의 점령 이후 타렌툼도 친로마계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쪽에 붙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상황이 나빠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2년간 버틴 끝에 점령당하였다. 시라쿠사 구원하겠다고 상륙한 카르타고 군은 또다시 전멸하여 사령관의 무능함을 다시 보여준다.

이렇듯 지구 전법의 효력으로 이탈리아 내의 전황이 나빠졌는데, 설상가상으로 스페인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스페인의 카르타고 군을 본격적으로 궤멸시키기 시작했다.

신(新) 카르타고 함락 후 바이쿨라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하스드루발은 휘하 군대 3만여 병력을 구성한 뒤 그의 형이 타고 온 루트를 따라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었다. 이때 알프스를 넘는 것은 이전에 비해 매우 수월하였는데 일단 겨울이 아니었던 데다가 한니발을 마구 공격했던 갈리아족이 하스드루발에게는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갈리아족은 로마와 매우 적대적이었고 하스드루발이 갈리아와 알프스등 그들의 영역을 침입했어도 이들이 로마군과 싸우려고 한니발과 합류하려고 가는 것이 너무도 명백했으므로 공격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예상보다 더 빨리 알프스 산맥을 넘을수 있었고 오히려 한니발에게 우호적인 갈리아인들에게서 병력까지 추가로 지원받아서 규모가 5만여명으로 증가하여 전력까지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이 온다는 것을 알았으나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좀 더 오래걸릴 것이라고 생각해 북상을 늦췄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스드루발은 알프스를 넘은 뒤 한니발에게 합류에 관한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를 도중에 로마군이 가로챘다. 편지를 입수한 해당 로마군단 총사령관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이 편지를 번역해서 읽은 후 신속히 젊고 건장한 병사들로만 구성된 정예병 보병 6천명과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하스드루발이 오는 지점에 있던 리비우스의 로마 군단 3만여명과 합류하였다. 그 직후 양군은 메타우루스에서 조우하여 격전을 벌였는데 네로는 전투 중 자신이 이끌고 온 지원군들로 카르타고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카르타고군을 무너뜨렸다. 이 싸움에서 하스드루발의 지원군은 북이탈리아에서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전사하였다(메타우루스 전투). 그리고 스페인에 남아있던 카르타고군은 막내동생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 지휘 아래 7만이 넘는 병력을 모아서 다시 한번 로마군 4만8천명을 이끌고 있던 스키피오에게 맞서나 리파 전투에서 대패하여 대부분이 전멸하고 이로써 스페인의 카르타고 세력은 일소되었다. 일리파 전투의 성과는 칸나에 전투와 비교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기록했다.

그 뒤 한니발의 전황이 워낙 불리해지자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한니발을 배신했고 남부의 핵심도시였던 타란토도 로마군과 타란토의 친로마파의 공작으로 로마의 편으로 돌아섰으며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장화 발끝인 브루티움으로 몰렸다.

4.2.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


로마의 전세가 많이 호전되자 스키피오를 대표로 한 많은 로마인들이 아프리카 상륙을 희망하였다. 원로원은 이에 회의적이었는데 '만일 적지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현지 동맹으로 누미디아 왕국의 마시니사나 시팍스와 동맹 약속을 받은것을 내세우며 워낙 자신만만했으므로 그를 시칠리아 담당 집정관으로 임명해 주고[8] 군대를 마음대로 편성할 자유를 부여했다. 이는 로마가 정규군을 편성해 주진 않을테니 스키피오가 직접 군대를 알아서 모집해 아프리카로 가라는 뜻이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시칠리아에 있던 칸나에 전투의 패잔병들과 스키피오의 명성을 듣고 자원한 다수의 신병들이 모이면서 스키피오는 군대를 모을수 있었다.

스키피오의 북아프리카 침공이 확실시되자 카르타고 본국은 적극적으로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보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로마 해군의 철통같은 감시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모두 막히고 간신히 이 감시를 피해 쭉 우회해서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가 이탈리아 북부의 제노바에 상륙했다. 지원군이 한니발이 머물고 있는 곳과 매우 떨어진 곳에 상륙한 것은 그만큼 한니발 주위를 로마 해군이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었다는 것. 마고도 상륙한 다음 나와서 로마군과 싸우나 심한 부상을 입고 패배하여 제노바에 틀어박혔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로 상륙해 마사에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과거 카르타고에 반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던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를 설득해보나 시팍스는 처음에는 스키피오의 로마군을 지원하기로 했다가 카르타고의 회유공작으로 카르타고인 미녀[9]를 아내로 맞은뒤 아내의 유혹에 카르타고 편에 붙었다. 이후 스키피오는 도망쳐나온 마시니사와 동맹을 맺고 우티카에서 시팍스, 카르타고 연합군을 맞아 이들을 안심시킨 뒤 몰래 화공을 걸어 이들 연합군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뒤 카르타고 사령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시팍스와 함께 바그라데스에서 대군을 이끌고 스키피오와 그와 손잡은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 연합군을 공격하나 거의 모든 군대를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수도 키르타를 공격해 시팍스를 잡아가두고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앉혀 누미디아 기병의 공급을 마음껏 받게 길을 터놓았다.

참고로 시팍스를 유혹해서 카르타고 편을 들게했던 소포니스바는 스키피오와 마시니사의 승리후 마시니사와 재혼하지만 스키피오가 소포니스바도 카르타고를 도우는데 협력했으니 로마에 포로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며 마시니사에게 곤란한 입장을 말한다. 여기에 스키피오와의 관계도 생각한 마시니사는 고민하다 소포니스바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기 입장을 말하고 소포니스바는 남편인 마시니사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스키피오가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강화를 맺었다. 이때 강화의 내용은 상당히 온건한 내용이었는데 한니발과 마고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면 스키피오도 철수하고 재해권을 로마에 양도하고 배상금만 물면 끝나는 아주 은혜스러운 내용이었다. 이토록 온건한 내용이었던 것은 아마도 무패의 장군 한니발이 멀쩡히 존재하고 있어서 그리했던것 같다. 사실 이때 카르타고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멸망 일보 직전이었다. 그들은 사방의 식민지를 몽땅 잃고 누미디아가 로마에 붙음으로써 아프리카 절반도 싸그리 날아간 상황이었다. 또한 시팍스 등의 패전으로 본토를 방어할 수 있는 병력도 장수도 모두 날려먹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단지 한니발만 철수해주는 것만으로 아프리카에서 아예 손 떼겠다는 말이었으니 그만큼 한니발의 위상은 로마인들 사이에 남달랐다.

카르타고는 좋다하고 강화 협정을 맺었는데 카르타고 원로원 내에 있었던 강경파가 한니발의 존재만 믿고서 한니발을 불러들이고 싸우기로 자기들 멋대로 결정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강화를 채결하고 5단층 갤리선을 타고 돌아가는 로마 사절단을 매복해있던 카르타고 해군의 5단층 갤리선으로 기습하는 비겁행위를 했다. 배는 파손되었지만 로마 사절단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카르타고 온건파 총수 한노가 이 사실을 알고 비겁하고 어리석다며 크게 질책하지만 강경파 책임자인 이테르바알은 한니발이 돌아오니까 아무런 걱정이 없다며 큰소리만 쳤다. 자마 전투 패배 후에 기습을 지시한 카르타고 강경파 다수가 크게 후회했다는 말도 있다. 그들의 실책은 너무 감정적이었고 지나치게 한니발만 믿었으며 전쟁터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제대로 보지 못했으며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의 능력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니발은 마고와 함께 동시에 카르타고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마고는 귀국 도중 이전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마고의 군대만 도착한다. 한니발의 귀국 사실에 고무된 카르타고 원로원은 강경파가 실권을 장악하며 로마 사절단 공격을 비난한 일부 양심있는 온건파 원로원 의원들의 만류에도 자기 고집만 부리며 이전에 맺었던 강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한니발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런데 한니발은 카르타고 강경파 원로원 의원들의 자신감과는 달리 이 시점에서 승패가 났으므로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럴만도 한 게 한니발이 위험을 무릅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전장으로 삼은것은 어디까지나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였다. 그런 한니발로서는 이탈리아를 떠났다는것 만으로도 전쟁에서 졌다고 인식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자마에서 회전하기 전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하자고 한 뒤 만나서는 강화를 맺자고 하였다.

하지만 스키피오 입장에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는데, 강화를 맺었더니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전쟁터까지 골라놓고선 또 강화하자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도 이 제안에 "이미 카르타고에서 강화를 파기하고 싸우자고 하더니 또 강화를 맺자구요?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이요?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소. 그리고 전쟁터에서 속임수의 전문가로 유명하신 한니발 장군의 말을 어떻게 믿을수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한니발은 여기에 "이번에는 이 강화의 성사를 나 한니발이 직접 책임지겠소. 스키피오 장군께선 이제까지 한노같은 카르타고 온건파 원로원 의원들과 협상을 하셨는데 그들은 이 문제를 책임질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오. 이테르바알 같은 카르타고 강경파들도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기만 하였지 상황판단과 실질적인 문제처리 능력이 부족해 일이 이렇게 되었소. 그러나 나는 다르오. 난 카르타고 인들에게 더욱 혹독한 내용의 강화조건도 제시하고 그걸 받아들이게 할수있소. 카르타고의 실질적인 최고 실권자나 마찬가지인 나 한니발이 강화에 동의한다고 하면 내가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우는것을 직접 여러차례 보고들은 카르타고 시민들도 겁쟁이나 비겁자라고 비웃지 못하고 맏고 따를것이기 때문이오. 또다시 강경파나 카르타고 시민들 중에서 강화를 망치거나 로마 사절단에게 폭력행위를 하는 자가 나오면 그게 누구든지 나 한니발이 반드시 직접 엄벌에 처하겠소. 강경파들이 협의를 무시하고 로마군 수송선단을 나포하고 물자를 불법으로 탈취한 것과 로마 사절단을 공격한 비겁행위도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강화 재체결후에 전쟁 보상금과 별도로 반드시 모두 보상하겠으며 선원들도 강화 성사여부에 상관없이 전원 석방하겠소.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본토만 소유하고 에스파냐와 시칠리아 등의 해외 식민지를 모두 로마에 양도하고 다시는 그 소유권을 가지고 로마에 시비거는 일이 절대로 없게하겠소. 그밖에 로마에 재해권을 양도하는 것도 모두 동의하며 전쟁 보상금도 앞선 로마의 제안대로 지불하겠소. 이 정도면 로마의 자존심과 실리도 보상되고 양쪽의 소중한 병사들이 더 이상 쓸데없이 죽는 일도 없을 것이오." 하고 제안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진심으로 강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고 카르타고 내부의 파벌싸움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이 틀어진 것도 알았으며 한니발의 의견에 개인적으로는 동의했으나 이미 협상 결렬에 로마 수송선 나포와 사절단 공격행위로 로마 원로원이 분노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진심으로 그 의견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지난번과 다르게 이제는 협상 결정권이 자신의 손에서 떠나서 로마 원로원에 있어서 스키피오 본인도 어쩔 수가 없다며 공손하게 거부하고 강화 협상에 대한 한니발의 진심과 카르타고 정부의 악행에 대해 대신 사과한 것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한니발도 스키피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점잖게 답하며 결국은 자마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한니발과 마시니사가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어 같이 자라온 사이라서 한니발이 가능하다면 마시니사를 만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고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와 한니발의 관계를 마시니사에게 들은적이 있어서 알고 있어서 마시니사에게 협상장소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그가 오는걸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에 한니발은 카르타고 정부가 마시니사에게서 약혼녀인 소포니스바를 강제로 뺏고 정적이었던 시팍스를 지원해서 그의 마사에실리족 왕국을 파괴했던 등의 악행을 카르타고 정부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마시니사가 스키피오 장군과 동맹을 맺어서 카르타고 정부에게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전해달라고 했고 스키피오는 반드시 전해주겠다고 했다. 그걸 전해들은 마시니사는 한니발 바르카 장군에게는 악감정이나 여태까지의 문제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으며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4.3. 자마 전투

한니발은 전투 경험이 전무한 용병 및 카르타고 시민병으로 급조한 병력과 숫적으로 부족한 기병을 데리고 세계최강 로마 보병과 누미디아 기병으로 구성된 로마군을 상대해야 했다.

카르타고 본국에 신성 기병대라는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는데 한니발을 견제한 정적들의 음모로 이 부대는 자마 전투에 불참했다라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없는 것으로, 신성대가 카르타고에 있었던 적은 있었으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310년 전멸당한 이후 이러한 카르타고의 신성군대는 더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PC게임 로마: 토탈 워의 카르타고 팩션에 Sacred Band Cavalry가 있고, 해당 게임의 고증 모드로 통하는 EB모드의 Sacred Band Cavalry 유닛 설명에서 위의 에피소드가 언급되어 몇몇 역사 매니아들이 받아들인 듯 하다. 하지만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 등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신성 기병대라는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EB모드의 후속작인 EB 2의 카르타고 유닛 소개에서 "신성 기병대"가 "카르타고 귀족 기병대"로 대체되었으며, 귀족 기병대의 설명에서 "신성 기병대는 오해의 산물이었다"라고 제작팀이 인정했다.

이러한 강력한 기병들이 있었는데 카르타고 정치인들이 일부러 투입하지 않을 정도로 자폭했다는 것은 아무리 막장이라고 해도 그 정도일까라는 점. 특히 한니발과 회전을 결정했을 당시엔 강경론자들이 카르타고 원로원을 장악한 상황이었는데 이들이 뻔히 이러한 강력한 기병대의 투입에 대한 방해공작을 (만일 있었다고 한다면) 방관했을리가 없다. 또한 당시 카르타고 시민들이 카르타고 정부에 매우 성이 난 상태였는데 심지어 한니발이 오기전 스키피오에게 연이어 대패한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성난 시민들에게 맞아죽을 것을 두려워해 패전 후 목숨을 끊을 정도였다. 즉 방해공작을 하고 싶어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니발이 당시 보유한 병력은 카르타고 측에서 여력을 다해 쥐어짠 부대 전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이 보유한 카르타고 군은 보병과 기병 모두 로마에 비해 열세인 상황이었다. 이는 항상 기병전력의 우세를 유지한 이탈리아 때와 상황이 달랐다. 한니발은 카르타고 측이 맡긴 보병을 보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들을 로마보병에 맞서게 한 다음 뒤에 자신의 이탈리아에서 함께 싸운 정예군을 바로 뒤에 포진시켜 달아나는 군대를 모두 죽이게 하였다. 보병의 질이 워낙 낮아 이렇게까지해야 그나마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로마측은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함께 싸워온 정예 보병들로 구성된 데다 로마 시민병이라 사기까지 높았다. 앞서 말한대로 이들은 로마가 징병해서 뽑은 시민군이 아니라 대부분이 스키피오가 모집한 지원병들과 칸나에 패잔 군단병들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의 연전연승에 카르타고에 대한 증오심으로 사기도 드높았다.

물론 기병의 숫자도 압도하였으니 이렇게 보병도 약하고 기병도 약한 상황에서 한니발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을까. 또한 지휘관이 무능했다면 몰라도 하필 스키피오였다. 스키피오는 유명한 장군이 즐비한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급의 군사적 재능을 가진 장군이었으니 더욱 불리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인데도 한니발은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된 로마 군대를 위험에 빠뜨리고 - 실제 한니발의 부대에서 로마군과 맞설 만한 병력은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정예 보병부대 뿐이었다 - 보병 전투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상당한 접전을 하기까지 했다. 기병전력의 열세로 로마군 기병이 조기에 전장에 복귀하는 것을 불가항력으로 허용하여 결국 패하긴 했지만 한니발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자마 회전은 두 영웅적인 장군들이 맞붙은것 치곤 대접이 소흘한데 이는 워낙 한쪽이 우세한 상황에서의 일방적인 전투였기 때문이다.

4.4. 정리

훗날 로마가 두고두고 후회한 것은, 왜 처음에 사군툼에 원군을 보내지 않아 전장이 이탈리아가 되었냐는 것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뒤,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집적거릴 때 그리스에서 로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민회의 반응은 "16년 동안 싸움질에 질렸는데 또 전쟁이요?!" 하지만 원로원의 이 한마디에 침묵하고 그리스에 지원군을 파견한다. "처음부터 사군툼에 원군을 보냈으면 이탈리아에서 고생 안했을거요. 또다시 외교로만 해결하려다 같은 실수를 번복할 생각이시요?" 거기다가 해당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한니발 전쟁때 마케도니아를 견제해주는 중요한 역활을 했던 동맹국들이라 함부로 외면하기도 곤란했다고 한다.

만일 로마가 사군툼에 원군을 파병하여 주요 전장이 스페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경우, 로마인들 중에선 한니발과 맞먹는 능력을 가진 장군이 없었고 한니발은 스페인의 자원을 무한정 쓸 것이므로 스페인에서만큼은 로마군이 힘을 못쓸 것이다. 하지만 전체 전쟁은 로마의 우세로 흐를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되면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방어전을 치를 것이므로 그의 역할은 스페인으로 한정되고, 무능한 장군 일색이었던 카르타고 본국의 경우 시칠리아라는 앞마당에서 공격해 들어올 로마군에 의해 단박에 작살날 것이다. 또한 한니발 역시 아무리 잘 싸워도 바르카 가문이 스페인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고작 1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라 스페인의 자원을 완전히 활용할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마침내는 로마의 물량에 압도될 수가 있다.

따라서 한니발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이탈리아 본토로 들어간 것이었고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 난리를 치면서 남부 이탈리아를 로마에게서 이탈시키고 로마의 병력을 이탈리아에 묶어둘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반신불수가 되고, 스페인,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지에 남은 로마군은 본국의 지원이 거의 없이 고립된 채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한니발이 카르타고 본국을 위해 유리한 판을 짜주었는데도 카르타고 본국은 코앞의 시칠리아조차 완전히 점령 못해 발이 묶이고 스페인 방어에만 급급하게 된다. 아마 한니발 역시 이 정도로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무능할 줄은 예상못했을 것이다. 칸나이 전투의 승리 이후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보고 한니발이 전략적으로 뛰어나지 않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당시 한니발의 군대와 카르타고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한니발의 군대는 병력의 부족이나 제대로된 보급선의 부재 등으로 인해 극단적인 소모전인 공성전을 할 만한 군대가 아니었다는게 정설이다. 야전이야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이길수 있지만, 비교적 정형화된 공성전은 그게 안 된다는 것. 실제로 한니발은 일관적으로 공성전은 최대한 피하고,[10] 로마군을 대규모 야전으로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만약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의 승리 이후 로마시를 공격했다면, 로마시를 포위하다가 주변에서 몰려온 로마 동맹시들의 연합군에 역으로 포위됐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카르타고의 군사적 무능함은 한니발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가령 칸나이 전투 이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동부가 통채로 카르타고로 떨어져 나갔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이들 지역에 대한 군사적인 원조를 보내지 못했다. 이 정도로 카르타고 본국을 위해 유리한 전황을 만들어 준 것은 일개 장군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은 것인데 어떻게 그에게 그 이상을 못했다며 뛰어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카르타고가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것은 이들이 방관해서가 아니라 대다수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정부가 방해했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소위 국내파의 수장이라는 한노도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칠리아 방어의 지휘를 담당한 자였으며, 구체적인 방해 공작의 예도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마고가 본국까지 와서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로마와 강화를 맺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정도의 모습만 보였을 뿐이었다. 한니발도 거절당하긴 했지만 한노처럼 생각해 강화 사절을 로마에게 보내기도 했으니 견해 차이로 대립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거기다 어찌됐든 카르타고 정부는 칸나이 전투 이후 수만에 달하는 대군을 즉각 편성하여 빈집털이에 나섰다. 하지만 사르데냐 섬, 스페인의 데르토사 양측에서 연이어 궤멸당하며 패배했다.

카르타고 장군들이 로마 장군들에 비해 기량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은 스페인의 전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스페인에서 로마 본국이 파병한 병사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건넌 해에 파견한 3개 군단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 형제들은 카르타고 본국에서 쏟아지는 물량을 상대로 10여년을 호각으로 버텼다. 이들이 마침내 패배하자 로마 본국은 4개 군단을 두 차례에 걸쳐 패잔병에게 합류시켰고, 이 정도의 지원만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계속 받으면서 저항한 스페인의 카르타고 세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일리파 전투에서 벌인 전략 전술적 성과는 칸나에 전투에 견줄정도 였으니 말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로마 장군들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카르타고 장군들의 역량으로 인해 패배[11]하였으나, 전쟁을 일으킨 시점에서 한니발이 반드시 이탈리아 본토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최선의 판단이었고 전쟁 이후 로마가 당시를 회상하며 사군툼에 원군을 파견했어야 했다고 후회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한니발의 활약상 때문에 이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자마 이후

자마에서 한니발이 패배한 뒤 다시 강화를 맺었는데 이번엔 강화조건이 엄격해져서 카르타고 측에 재해권 양도만이 아니라 카르타고 해군을 3단층 갤리선 10척만 빼고 완전히 해체한 뒤 로마의 허락없이는 카르타고 영토 밖에서 싸우는것을 할수없게 하였다. 이는 외부의 침략이 일어나도 로마의 허락없이는 군대를 소집할수 없다는 것이었기에 사실상 로마가 카르타고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갖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조항은 제3차 포에니 전쟁의 불씨가 되어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단초가 된다.

한니발은 그 이후 카르타고의 통치자가 되는데 카르타고도 로마와 비슷하게 두 집정관이 해마다 선출되었고 한니발이 이것에 선출된 것이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이 콘술이라고 불리나 카르타고에서는 소페트라고 불린다. 한니발이 자마 회전에서 졌을 때의 나이가 고작 43세였으므로 아직 완전히 활동을 접을 나이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정력적으로 일했으나 정적들에 의해 한니발이 로마에 복수하기 위해 세력회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로마에 알려져 망명하게 된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로 가서 군사고문이 된다. 셀레우코스 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3세는 육전 명장인 한니발에게 해군을 지휘하게 하고 자신은 육군을 지휘해서 둘 다 패한다.[12] 로마측은 한니발이 육군을 지휘하게 될 것을 대단히 우려하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을 사령관으로 뽑고 아프리카누스를 동행케 하여(사실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사령관이지만 지병으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는 지휘하지 못한다) 로마군을 지휘하게 하였으나 상대는 한니발이 아닌 안티오코스 3세였다. 안티오코스도 나름대로 유명한 왕이라 대제라는 칭호를 받고 인도 원정까지 지휘한 경험이 있었으나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뽑히는 스키피오와 한니발과의 전쟁 지옥을 극복해온 전쟁기계 로마군의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안티오코스 3세가 마그네시아 전투 직전 그의 군대를 보여주고 한니발에게 이 정도면 로마군과 맞설 수 있겠냐고 묻자 한니발은 로마놈들이 탐욕스럽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대답했다.[13] 마그네시아 전투의 패인은 셀레우코스 군대의 역량 부족보다는 안티오코스 3세의 형편 없는 지휘가 더 큰 문제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 기병을 격파한 뒤 로마군 보병 대열의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 본진을 공격했다가 2,000명 남짓한 수비대에게 반격을 당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왕의 뒤를 따라 3,000명의 카타프락토이들도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셀레우코스 군은 양익이 제압당하고 포위당해 완패하고 말았다. 한니발이 군대를 지휘했거나 적어도 한니발의 조언을 듣고 이를 충실히 수행했다면 셀레우코스의 기병 전력이 어이없이 소멸해버리는 일은 없었을텐데, 이 정도면 안티오코스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봐도 될 듯하다.[14]

셀레우코스가 대패하고 로마와 강화를 맺자 한니발은 아르메니아로 도망갔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와 강화를 맺으려고 결심하자 비티니아로 망명한다. 비티니아에서는 해군 지휘에 감을 잡은건지 해군을 지휘하여 큰 승리를 거두는 등의 활약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의 세력이 어느덧 비티니아까지 미치게 되었고 로마군이 한니발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요구하자 신병이 인도되면 로마에서 처형당할 것이 기정사실이기에 한니발은 반지에 숨겨두었던 독으로 자살하였다.

6. 능력

6.1. 군사 분야

세계 최고의 육군 명장 중 한 명. 전략의 아버지.[15] 손꼽히는 고대의 네임드 명장 중 하나인 동시에 한 사람의 의지로 카르타고의 위력을 보인 명장이다. 실제로 전쟁전부터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로마의 앞마당인 이탈리아를 전장으로 할 것을 정하고, 이를 위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전략적 우회기동을 계획하고 실현시켰다. 한니발 이전 세대의 명장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만 해도 경우 이런 식의 전략적 기동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평가는 틀리지 않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군인.[16]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진리의 산 증인.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나눈 대화는 유명한데,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키피오가 셀레우코스에 외교적 일로 방문하였을 때 한 집회에서 당시 셀레우코스의 군사 고문관을 맡고 있던 한니발과 접견하게 되었다. 그 집회에서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첫번째로 한니발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제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름을 댔다. 두번째는 누구냐고 묻자 에페이로스의 왕이었던 피로스를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를 묻자 한니발은 세번째는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키피오가 "당신은 저에게 패배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한니발은 "만약 내가 당신에게 이겼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넘어서 첫번째가 되었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17] 실제로 많은 로마인들도 구국의 영웅 스키피오보다 적장인 한니발을 더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유럽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알렉산드로스보다 한니발을 높이 평가하는데 시대를 앞서간 전략이라든가 부하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쓰는 성격,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보충이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보급 환경과 오랜 전투 경험으로 고도로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로마보다 떨어지는 군대[18]를 이끌고 로마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키피오에게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며 칭찬을 하고 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는 전술도 우수했지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겁먹고 도망친 덕을 톡톡히 보았으나 한니발의 경우 전쟁의 시작과 끝부분까지 완벽하게 계획하고 이를 실행했다는 점에서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나은 통솔력과 기획력을 보였다. 또한 로마 지휘관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적과는 달리 상당히 우수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19]

특히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망치와 모루 전술인 양익 포위 전술(double pincer movement tactic)을 선보였는데 이는 군사 전술사의 매우 중대한 진보였다.

이러한 한니발의 우수한 전술 능력은 같은 카르타고인이 아닌 로마인이 계승하는데 이는 먼데서 방관하다시피 한 카르타고인들과 달리 로마인들은 한니발과 직접 무기를 맞대고 무수한 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서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전술을 익혔고 그 결과 지중해 세계에서 로마군은 무적이 된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로마군의 스승이었던 셈이다.

결국 한니발의 의도와는 달리 로마인의 지중해 제패를 돕는데 한니발은 큰 일조를 해준 셈이었다. 로마는 한니발이라는 강적과 싸우면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니발에 관한 대부분의 사료는 로마인들이 남긴 것이지만, 대부분의 로마인 역사가들도 한니발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했으며, 대체로 한니발이 스피키오보다도 더 명장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후 역사를 봐도 한니발만큼 로마를 철저히 묵사발로 만든 적은 없었으니...

한니발 때문에 생긴 라틴어 속담으로 "한니발이 바로 문앞에 있다(Hannibal ad portas)"라는 말이 있다.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말이며, 영화제목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The enemy at the gate)도 여기서 따온 말이다. 로마 여인들은 이 말로 우는 아이들을 달랬다고 하며, 이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한니발에 대한 로마의 감정은 증오심보다는 경외심에 가깝다고 봐도 될 듯하다. 후대에 가면 한니발의 이름을 딴 "한니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왕족에게 붙여줄 정도가 된다. 참고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다.

죽은 뒤에 유럽에서 명장으로 찬양하며 여러 동상을 세우고 그의 공적을 기렸으며 사관학교 교육에서도 빼놓지 않았다.

6.2. 카리스마


지장의 면모만 곧잘 부각되지만 부하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 기록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루는 한니발이 야영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병사들은 누구 한명 예외없이 한니발이 깨지 않도록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조용히 하며 그 곳을 지나갔다.' 조금 확대된 해석일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누구하나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캐릭터였지만 병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고대의 전장에 나선 병사들이 명령에 불복종하고 파업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니발 휘하의 병사들은 이러한 파업을 단 한 차례도 일으킨 적이 없다. 심지어 카르타고군의 상당수가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복자들이 정복 중에 여성편력을 문란하게 발휘하기도 했던 것에 비해, 한니발은 긴 원정동안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6.3. 내정 운영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는 로마에 1만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카르타고는 부국이었지만, 해외 식민지를 모두 상실하고 오랜 전쟁으로 국고는 텅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

한니발은 전쟁에 지친 나라에서 세금을 더 걷으면 안된다면서 세금 누수를 최소화하고 혁신적인 재정 개혁으로 로마의 예상보다 3배나 빨리 빚을 갚게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 시절 넉넉한 은광과 많은 해외 식민지를 보유하고도 용병에게 줄 월급이 없어[20] 나라 망할뻔한 걸 생각해 보면 한니발의 재정 운영 능력은 극히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21]

문제는 한니발이 40이 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지휘관으로서만 살았다는 것이다. 한니발이 성장한 이베리아 반도는 카르타고의 식민지이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하밀카르 바르카 이래로 바르카 가문의 영지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카르타고나 로마 같은 과두체제에서 한니발의 독단적인 방식은 먹히지 않았고, 그 결과가 한니발의 망명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아무리 로마의 압력이 있었다고 한들, 일국의 통치를 맡고 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해외로 도피할 리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니발의 정치가로서의 역량은 무능하지는 않더라도 장군으로서의 역량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7. 로마 멸망의 맹세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릴 적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전에서 카르타고의 신 바알-함몬 앞에서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맹세했고, 이 맹세에 일생을 바쳐서 로마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로마인 역사학자인 티투스 리비우스와 그리스인 역사학자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분명히 남아있기 때문에 후세에 무작정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기록을 보면, 한니발이 로마사절을 만났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자(그 유명한 스키피오와의 명장론이 여기서 나왔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함께 신전에 가서 영원히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한니발의 움직임을 보면, 한니발은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는 맹세에 집착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진군한 것은 대단히 과감한 결단이었으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성문 앞까지 쳐들어온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습에 로마인이 엄청난 공포를 느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한니발 자신이 칸나이 전투 직후 같은 유리한 상황에서도 로마와 '협상'으로 전쟁을 끝맺으러 한 적이 여러 차례 있다. 또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을때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로마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혹은 로마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전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자마 전투 직전까지 한니발은 로마와의 협상을 시도했을 정도.

이런 점에서 볼 때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시키려는 맹목적인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한니발에게 느낀 자신들의 두려움 때문에 한니발을 "로마를 멸망시키려는 잔인하고 무서운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로마 집정관은 사절을 만난 뒤 한니발과 그의 군대를 설명하면서, 다리와 진영을 건설할 때 전사자의 시체로 만들고, 배고프면 전사자의 고기를 먹는 매우 무시무시한 집단이라는 묘사를 하기도 하였는데 [22]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또한 한니발이 맹세를 언급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단지 한니발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설령 사실이라 한들 10살도 안됐을 때 한 맹세가 커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까? 따라서 한니발이 로마에 대해 적의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맹세로 로마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

8. 여담

1. 코끼리 이미지로 유명해진 장군이지만 실제로 한니발이 코끼리를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패배했던 자마 전투 뿐이다. 한니발이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코끼리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상당수 죽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력외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최초의 회전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전열을 완전히 이탈해버렸다. 오히려 한니발은 기병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편이며, 칸나이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정 당시 한니발군이 운용한 37마리의 코끼리중 대부분은 지금은 멸종하고 없는 북아프리카 숲 코끼리로 스키피오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게 진화한 종이었다.[23]

수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니발의 승용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훨씬 체격도 크고 힘도 셌는데 학자들은 인도 코끼리로 추정하고 있다. 수루스는 수컷이었고 주인을 닮아 애꾸눈에 한쪽 상아가 없었다. 수루스는 트레비아 전투 이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코끼리였다고 한다. 다른 코끼리들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한 탓에 모두 그 전투 이후 사망했다.


2. 흔히 로마 동전에 그려진 이미지가 떠돌지만 그것은 후대의 상상화이며, 실제로는 흑인이었고 어떤 초상도 남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흑인이 절대로 아니다. 카르타고는 엄연히 페니키아 인들의 국가였고, 한니발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던 카르타고 귀족이다.[24][25] 현재 쾰른 박물관에 있는 주화 중에 한니발로 추정되는 인물의 주화가 있는데, 흑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지금의 북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유목민들의 주축을 차지하는 인종이 흑인은 아니다.[26] 카르타고 인의 조상격인 페니키아 인들은 현재 레바논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현재 아랍인과 비슷했을 가능성은 있다. 물론 아랍인은 백인이다.

여담으로 후대에 '흑인'인 한니발이 실제로 있었다.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27]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러시아표트르 1세에 등용되어 장군이 되었다. 이 사람의 후손이 알렉산드르 푸시킨으로 푸시킨이 전기를 쓰기도 했다. 이름이 같고 "아프리카 출신","장군"이라는 점 때문에 혼동해서 퍼트린 사람도 있을 수 있다.

3. 알프스에서 바위로 길이 막히자 식초로 녹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불로 달군 다음 찬 식초를 부어 쪼갰다는 말이 오역되어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당시 병사들이 식수 대신 식초를 들고다니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바위가 식초에게 녹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식초를 부어서 바위의 강도를 약화시킨 후에 바위를 부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4.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왕국에 있었을때 포르미오라는 그리스 철학자의 강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포르미오는 '장군의 의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강의를 한 뒤 포르미오가 한니발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때 한니발은 '내 생에 많은 어리석은 노인들을 만나왔는데 이 자는 그들 모두를 능가하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실제로 전쟁이 무엇인지 겪어보지도 않은채 탁상공론이나 하는 그리스 학자의 강의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실전 경험이 많은 한니발이었던 만큼 탁상공론 주의자들의 미련하고 실속없는 태도가 더욱 불만이었을것이다.
원래 페니키아 문화가 그리스 문화와는 달리 시나 철학보다는 농장 경영 같은 실용 학문을 중시한 것도 한가지 원인이 아닌가 싶다.

5. 한니발이 죽기 전에 한 말은 '로마인들을 그들의 가장 큰 염려에서 해방시킬 때가 되었군. 그들은 이 노인의 죽음을 그토록 고대해 왔으니'라고 한다.

6. 튀니지 독립 이후에 튀니지는 카르타고가 자국 영토에 있다면서 한니발을 튀니지의 영웅으로 추앙하지만 레바논에서는 페니키아는 레바논 쪽이라면서 이런 튀니지를 코웃음친다. 참고로 한니발의 무덤은 현재 터키에 있는데 튀니지 측에서 한니발의 시신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 적도 있다. 물론 터키에서는 무시했지만...
한니발은 튀니지 5디나르 지폐에 사진이 실려있으며 튀니지 최대 방송국 이름이 Hannibal-TV라는 점 등에서 보여지듯 튀니지 사람들은 한니발을 대단히 존경한다.

7. 시드마이어의 문명4에서 확장팩으로 추가된 카르타고의 지도자가 바로 한니발 바르카다. 처음 조우할 때 던지는 대사가 "찬란한 카르타고인들은 깜찍한(...) 그대의 문명을 환영합니다." 라고 나온다. 다른 문명은 대체로 유명하면서도 해당 문명이나 국가를 번영시키거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나 정치가가 나오는 반면 카르타고는 일개(?) 장군이 지도자로 선정된 특이한 경우이다. 카르타고의 유명세가 그다지 없는 탓도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카르타고=한니발이라는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카르타고의 특수유닛마저 생전에 한니발이 애용한 누미디아 경장기병이다.[28][29]

8. '로스 레키'의 소설 3부작 중 1부에서는 한니발의 아내인 시밀케가 전투 도중 무방비한 후열을 덮친 로마인에 의해 잔인하게 윤간당하고 성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소설의 허구로서 한니발의 증오와 분노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데, 종종 실제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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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바르카는 페니키아 어로 번개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2] 해당 집정관은 칸나이 전투의 지휘관 바로로 보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전투 직후 50명의 기병들과 베누사(Venusa)에 도망갔다고 하고, 카푸아 사절과 집정관과의 대화는 베누사에서 일어났다. 해당 집정관은 아풀리아의 카누시움이라는 도시를 수비할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칸나이 전투 이후 아풀리아 지역의 수비 담당 사령관은 다름아닌 바로였다.
  • [3] 여기엔 좀 불운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원군이 상륙하기전 그들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이를 피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에 잠시 정박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 로마군과 사르데냐 반란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반란군 측이 상당한 병력손실을 입었고, 이 손실이 나중의 전투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 [4] 다만 코르누스 전투 이후 본국의 함대 일부가 이탈리아 로크리에 도착하여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전투 코끼리 40마리를 지원해주기는 했다.
  • [5] 타렌툼은 한니발에게 붙은 도시 중 카푸아, 시라쿠사에 못지않는 대도시였다. 피로스 전쟁을 일으킨 도시가 바로 타렌툼임을 상기해 보자. 즉 이탈리아 남부의 맹주였고 로마와 맞짱을 뜬 적이 있을 정도의 대도시.
  • [6] 코끼리 군단은 알프스에서 다 죽었으나 훗날 카르타고의 보급을 받게 된다. 사르데냐 섬에서 패한 뒤 철수 중인 카르타고 함대가 로마 함대의 추격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카르타고의 보급선이 한니발에게 4천명의 누미디아 기병대와 코끼리 40마리를 내려주고 떠난 일이 있었다. 이는 한니발이 본국 카르타고에게서 받은 유일한 보급이었다.
  • [7] 한니발이 로마를 직접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로마 시민들은 대단히 공황 상태에 빠졌고 여자들은 밤낮에 걸쳐 울부짖었다고 리비우스는 기록하였다. 한니발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공포심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 그 뒤로 '문 앞에 한니발이 왔다'라는 관용어가 생길 정도.
  • [8] 이때 스키피오의 나이가 30세였는데 이렇게 어린 장군이 한 군단의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한니발의 동생들을 맞아 연전연승한 스키피오에 대한 로마의 신뢰를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 [9]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이자 당시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자였던 마시니사의 약혼녀인데 정치적 이유로 마시니사와의 약혼을 강제로 파기하고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아내로 보냈다. 이름은 소포니스바라고 전한다.
  • [10] 한니발이 공성전을 했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이탈리아에서 점령한 도시(성)들은 대부분 도시 측에서 먼저 항복해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 [11] 가령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정도의 천재적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대단히 유능한 로마 장군들은 다수 있었다. 마르켈루스, 그라쿠스, 네로, 파비우스 등. 심지어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아작난 집정관 파울루스조차 일리리아 전역(그리스 서부)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의 전권을 위임받아 1년만에 진압해 버린 군사적 영광에 빛나는 장군이었다. 이러한 명장들이 우글거렸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자신의 부대만으로 로마를 궁지에 몰아붙였고 자마 때까지 무패에 빛났으니 그의 군사적 재능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다.
  • [12] 한니발이 카르타고인이기 때문에 해군을 맡긴 것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평생 육지에서 이름을 날린 한니발에게 해군을 지휘하게 한 것부터가 육전과 해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어이없는 패착이다.
  • [13] 사실 병종으로만 따지자면, 헬레니즘 팔랑크스는 정면 한정이지만 로마 레기온과 동급 이상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오리엔트의 카타프락토이 역시 높은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시까지 2류 기병 취급받은 로마 기병보다 우위에 있다. 한니발 식의 망치와 모루 전술에 적용한다고 보면 '최강의 모루'와 '최강의 망치'를 준비해둔 것이니 높이 평가할 만 하다.
  • [14] 심지어 안티오코스는 약 20년 전 라피아 전투에서 거의 다 이겨놓고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역전패해버린 전적이 있었다. 물론 안티오코스가 이전에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도 했고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조를 밀어내는 등 군사적 업적이 모자란 왕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한 점이 있었다.
  • [15] 영어로는 father of strategy. 이 말은 Ayrault Dodge, Theodore라는 미국의 전쟁사 전문가의 저서인 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 168 BC. With a Detailed Account of the Second Punic War에 나온다.
  • [16] 전투 스타일은 약간 다르지만 전투에선 언제나 이기고 전쟁에서 졌다는 부분은 중국의 항적과 동일하다. 공교롭게도 몰락한 시기까지 비슷. 물론 그 자신이 군주였고, 군주로서 중대한 허점을 가지고 있었던 항우와 바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 [17]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거쳐 내려온 망치와 모루 전술을 완성시켰으며 만약 자마에서 이겼다면 기병 전력의 현저한 열세를 극복하고 망치와 모루 전술을 뛰어넘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 된다. 타당한 평가다.
  • [18] 앞에서도 나왔지만 2차 포에니 전쟁 내내 한니발 외의 장군이 로마군을 이긴건 딱 한번뿐이다. 그마저도 로마측 스페인 용병을 매수해서 이긴거지 군사적 능력에서 앞서서 이긴게 아니다.
  • [19] 그 예로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한니발의 매복에 걸려 전멸당한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북부 갈리아족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여 플라미니아 가도를 건설한 장군이었다. 또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파울루스의 경우 2차 일리리아 전쟁을 위임받아 이를 신속히 진압하고 개선식까지 거행한 장군이었다. 즉 한니발과 상대한 로마장군들은 모두 군사경험이 매우 풍부하고 한니발와 맞서기 전까진 패배를 모르는 장군들이었다.
  • [20] 후에 로마가 망할 때의 예와 같이 개인 자산이 풍부하면서도 금고 문을 잠가두었던 카르타고 지배층들의 이기심의 발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명목 자산과 실질 자산, 그러니까 당장 융통할 수 있는 유동 자산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고...하여간 돈은 없지 않았다. 쓸 수 없었거나, 쓰고 싶어하지 않았거나, 어느 쪽이건 안습이지만.
  • [21] 애초에 1차 포에니 전쟁 배상금은 3200탈렌트였다. 인플레가 거의 없던 고대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 [22] Savage and barbarous by nature and habit, their general has made them still more brutal by building up bridges and barriers with human bodies and - I shudder to say it - teaching them to feed on human flesh - Livy 23.5
  • [23] 사하라 사막이 형성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코끼리들은 남쪽의 동족들과 교류가 단절되었다. 즉, 생태학적으로 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포유류는 조류와 달리 섬에 들어간 동물들이 일반적으로 왜소화되는 경향이 있다.
  • [24] 단 한니발의 아내는 이베리아 원주민 족장의 딸이었으며, 그 사이에 아들도 한 명 있었다고 한 걸로 보면 한니발 본인은 순혈주의를 고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불어 이탈리아에서 한니발무쌍을 시전하던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한 적도 없다고 한다.
  • [25]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카르타고는 카르타고 적자와 혼혈 서자와의 차별이 존재했다.
  • [26] 지단, 벤제마는 알제리 혈통인데 피부가 한국인보다 하얗다.
  • [27] 한니발에서 이름을 따왔다. 여담으로, 이 사람이 당시 아직 병약한 어린애였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로 하여금 군인의 길을 걷게 해준 사람이다.
  • [28] 사실 엄밀히 따지면 누미디아 경장기병은 카르타고의 대표 유닛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카르타고의 동맹국 누미디아에서 참전한 용병이기 때문이다! 문명에서 특수유닛 선정시 그다지 고증~을 따지지 않는 경향이 많다고 해도 이는 다만 한니발이 애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나라의 특수유닛을 꿰찬 이례적인 사례.
  • [29] 하지만 이로 인해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한니발의 몰락을 가져온 자마 회전의 패배 요인 중의 하나가 지급하기로 한 전쟁보수의 연체 & 로마군의 자금 매수 크리로 인해 일어난 누미디아 기병의 배신이었다는 것이다. 한니발이 이걸 안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