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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

last modified: 2015-04-07 15:59:0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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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시기의 세 건축이 만나고 있는 곳으로 높이 평가받는 공간 사옥.


Contents

1. 역사별로 보는 건축 양식들
1.1. 전통 건축
1.1.1. 원시 시대
1.1.2. 삼국 시대
1.1.3. 통일신라, 발해 시대
1.1.4. 고려 시대
1.1.5. 조선 시대
1.2. 근대 건축
1.3. 현대 건축
1.3.1. 현대의 전통 목건축
1.3.2. 북한 건축
2. 한국 전통 건축의 장점과 단점
2.1. 장점
2.2. 단점
2.3. 오해/낭설
2.3.1. 경복궁의 크기
2.3.2. 기술이 없어서 2층 이상의 주택이 없다
2.3.3. 현존하는 전통 건축물 중 경복궁 근정전이 제일 크다?
2.3.4. 지붕 기와의 끝 치미부분에 하얀 회칠한 것이 그대로 보여 지저분하다
2.3.5. 한옥이 과학적이라는 것은 양반가에 한정된다
2.3.6. 한옥은 나무로만 지어 열등
3. 건축물 일람
3.1. 전통건축
3.1.1. 궁궐
3.1.2.
3.1.3. 무덤
3.1.4. 기타
3.1.5. 서원
3.1.6. 관아
3.1.7.
3.1.8. 기타문서
3.2. 근대 건축
3.3. 현대 건축
3.3.1. 교통 인프라
3.3.2. 박물관/미술관
3.3.3. 북한
3.3.4. 기타


1. 역사별로 보는 건축 양식들

1.1. 전통 건축

목재를 주로 사용한 건축으로, 구조적 결합에 못을 쓰지 않는다. 공학적으로는 중국식 건축의 구조인 대량식을 가져왔으나 공간 활용에 있어서는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마루와 같은 개방형 공간과 안방과 같은 폐쇄형 건축이 조합된 독특한 구조를 자랑하며, 이는 온돌과 매다는 문짝(들문)과 더불어 추운 겨울와 더운 여름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물에 닿으면 썩기 시작하는 목재를 주로 활용했기에 한 가지 큰 단점이 꼽는다면, 무너진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기와가 떨어지고 집이 기울어 비에 노출되기 시작한 목조건물은 불과 수십 년만 지나면 순식간에 녹듯이 썩어 사라진다. 전란 등으로 인해 불에 타서 사라지기 쉬운 것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대나 중세 건축물의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

크다거나 화려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대,중세 건축에 비해서 조선 건축은 유교의 영향으로 그 규모나 장식면에서 화려함을 억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 상공업의 발달로 다시 점차적으로 화려함이 강조된다. 특히 삼국과 통일신라는 건축의 스케일이 가장 큰 시기였으며, 발굴되는 기와나 치미 등이 조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1.1. 원시 시대

여기서의 원시 시대 건축은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집은 구석기시대의 막집과 신석기시대 움집이다. 막집은 말 그대로 막 지은 집이란 뜻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주거시설이다. 움집은 지열을 이용하기 위해 땅을 파서 움을 만든 뒤 그 위에 지은 집으로, 시대가 발전할수록 점차 움이 얕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구석기시대 막집.


신석기시대 토막식 움집의 모습. 초기의 움집으로, 땅을 이후 시대 움집보다 깊게 파고 그 위에 지부을 덮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둥과 주초가 나타나고, 나중에는 방과 초기형 온돌도 나타난다.


석기시대에 비해 많이 발달한 청동기시대 움집. 이런 형태로 벽이 외부에 노출되기 시작한 움집을 초옥토실식이라 한다. 이 초옥토실식 움집에서 한국 전통 건축물의 기본 형태가 나타나기에, 보통 한국 전통건축의 시원은 이 초옥토실식 움집으로 잡는다.

이 외에 누목식(귀틀집)과 고상식 집, 토실도 나타난다. 귀틀집은 통나무를 井자 형태로 쌓아올리고 통나무 틈은 흙으로 메워 만든 집을 말하며, 고상식 집은 윈두막처럼 지면보다 높게 지은 집을 말한다.


마한의 토실(土室)의 구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초옥토실(草屋土室)이라고 나온다. 단, 초옥토실은 지붕을 초가로 하고 흙으로 벽을 만든 집이라는 해석도 있다.#



가야의 고상식 주거의 복원. 비와 습기에 강한 고상식은 한반도 남쪽에서 올라온 주거 양식으로 추측된다. 일본 도다이지의 정창원 건물은 아직도 이러한 고상식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가야는 철기 도입은 빨랐지만, 기와의 도입은 상당히 느린 지역이었다.

또한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에 기와가 도입된다. 기와는 이전에 지붕재료로 쓰이던 풀이나 너와와 달리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제작 단가가 높고 무거워 근세 후기 부농/상공업자의 성장 이전에는 기와를 마련하고 좋은 원자재로 튼튼하게 집을 짓는 게 가능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1.1.2. 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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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의 복원모형

아쉽게도, 오랜 전란에 휩쓸렸던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삼국시대의 목조 건물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고대 목조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세부적인 면은 쉽게 알 수가 없으며, 남아있는 터의 기단과 주춧돌로 건물의 배치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본에는 호류지, 시텐노지 등 직, 간접적으로 백제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대 건축물이 존재하며, 무덤이나 조각 등의 유물로 간접적이나마 그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 건축으로 가장 덜 유명한 것은 (자료가 적은 가야는 논외로 치고...) 백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안학궁이나 황룡사 등 규모가 큰 고구려나 신라의 건축물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크기로 유명한 건축물이 부족해서이며,(미륵사가 있지만...)[1] 사실 백제가 삼국시대에 가장 수준높은 목건축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황룡사의 9층 목탑에도 백제의 기술자가 와서 도와주었으며, 일본의 고건축과 관련된 기록에도 거의 다 백제의 장인이 등장한다.

출토되는 유물이나 터로 봤을 때는 근대를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가장 건축물이 거대한 시기이기도 하다. 터도 크지만, 발굴되는 기와나 치미의 크기 등이 장난이 아니어서 기와의 무게가 조선시대 기와의 5배 정도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건축물의 크기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된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만 하더라도 당대 지어진 세계 건축물 중에서도 높이에 있어서 손에 꼽을 정도다.

삼국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고구려정릉사, 백제의 미륵사, 신라황룡사가 있다. 궁궐로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크고 아름다웠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안학궁, 신라의 경주 월성 등이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고구려/건축도 참고.

1.1.3. 통일신라, 발해 시대

통일 신라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신라의 연장선이며,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그 모습을 추측하기가 쉽다. 특히 안압지는 상당한 양의 건축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서까래 등에 사용하는 금속장식이나 섬세한 기와들, 늪에 빠져 보존된 목재 등 매우 다양하고 희귀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물론 성골의 건축물에 한정되겠지만, 상당히 호화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발해의 건축에 대해서는 고분이나 궁궐터, 기와나 건축 부자재 일부 외에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단일 건물로써는 한국 건축물 중 크기가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경용천부 정전도 기단으로만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석조물의 양식으로 보아 아마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사료부족으로 인해 연구중이다.

통일 신라 건축의 방향은 형식상의 완성과 균형미적인 면을 중시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특히 화강암을 적극적으로 다뤄서 만든 석굴암의 조각들과 불국사 석조물은 대단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의미부여를 통해 특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안압지 터를 통해 신라가 인공적인 조경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있어서는 1개 금당에 1개의 탑이 있던 일탑식 형식(가람 배치)에서 2개의 탑이 있는 이탑식으로 변한다. 특히 통일 후 백제에게서 뭔가 배웠는지 석탑이 마구 늘어나기 시작한다. 통일 이전 시기의 신라가 지은 석탑이라고는 분황사 모전 석탑만 남아있다. 불국사, 감은사 등이 이탑식으로 석탑들을 세웠다.

기본적으로 이 시기는 당나라가 중심이 된 중국적 천하가 완성되어 존재하던 시기라 신라와 발해, 그리고 많은 주변국 모두 건축뿐만 아니라 복식, 제례문화 등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당나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다만 신라의 경우 당나라식 건축 양식의 영향보다는 자국의 재래문화가 강하게 남았다. 대표적으로 도성을 비교해 보면 발해와 일본은 당의 좌우대칭식 도성 구조를 그대로 도입한 데 비해 신라는 기존의 도성 치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1.1.4. 고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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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경서분변상도. 단 이 관경서분변상도는 불화적 성격이 강해서 있는 실제 모습이라고 그대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건축물의 모습에 있어서는 다른 그림과도 유사한 편으로 일관성이 있는 편.

고려시대의 건축은 비록 삼국시대보다는 스케일이 작아졌지만, 역시 귀족적인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 봐서도 매우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2] 고려도경에는 백성의 집들은 누추하다고 하나, 관리들과 국상 부자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치스러워졌다는 부분과 선의문 안에 들어서면 수십집 가운데 하나씩 누각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이 시대의 건축물은 거의 다 사라졌고, 몇몇 사찰이나 양반가 건물의 경우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경우가 존재하긴 한다.

남아있는 그림 등의 기록으로 봐서는 붉은 색의 주칠과 검은색의 흑칠 등 옻칠을 활용한 단청이 상류층의 건축물에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도경에는 이와 관련해서 "궁궐 건물에 난간은 붉은 옻칠을 하고 동화(銅花)를 장식하였으며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본적인 색상 자체는 삼국시대부터 보이는 전통적인 단청법인 상록하단법에 따라 밝은 외부 기둥등 붉은 색으로 칠하고, 어두운 내부는 녹색 혹은 청색으로 칠하는 방법 역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집도대련 등의 그림에도 기둥 끝의 금빛 장식과 이중으로 된 처마, 금빛의 황기와와 처마 등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고려 문화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주었던 송나라의 건축이 고려 건축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사용된 황,청기와 등 장식용 기와나 실내용 타일은 지금도 출토되고 있다. 각종 옻칠과 특수한 기와 등으로 건물을 장식하는 양식은 고려시대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긴다. 검고 붉은 옻칠과 주칠로 건물을 장식하는 것은 광택이 나고 손이 많이 가기에 상당히 호화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양식은 당나라에서 유래되어 중국 송나라와 고려에서 유행했지만 결국 맥이 끊기고 일본에만 전해저 내려온다. 때문에 이 시기의 이러한 건물을 재현한다면 일본 건물의 색과 유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경에는 귀족들의 경우 "청자로 된 기와와 흙담벽에 중국 직수입 비단을 둘러 장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 외에도 전각에 옻을 칠해서 호화롭게 만들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화려한 처마 장식의 경우에는 원나라 이후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의 갈색과 녹색의 단청은 고려 말부터 도입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는 "아집도대련"이 유명하다. 이것은 귀족의 저택을 그린 것이다.

또한 귀족층의 경우 귀족문화 하에서 고구려의 귀족들처럼 입식 위주의 생활을[3] 했기 때문에 귀족층의 생활상을 그린 아래 두 그림을 보면 바닥에 타일을 깔고 의자와 평상을 놓은 곳과 타일을 깔지 않은 눕고 쉬는 곳이 구분되어 있다.


고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그린 아집도대련. 아마도 고려(혹은 송나라)의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바닥에 타일을 깐 외실과 문을 걸어닫은 내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이 그렸다는 기위도.
아집도, 기위도 출처

이 시대의 큰 건물로는 개경의 도심 사찰이었던 보제사의 5층 목탑이 있으며, 조선 전기까지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높이가 약 60미터 정도 되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보제사의 이름은 연복사로 바뀐다.

십천교를 지나 곧바로 가서 연복사에 이르렀다.
한 중앙에 우뚝 솟은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서 있는데,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다.
유호인 명산답사기 중 <송도기행>

엔하위키에 등재된 주요 건물 : 만월대 - 고려시대 본궁터다.

문화컨텐츠닷컴에서 3d로 복원해본 영상이 있으니 참고. 한옥이라 하면 좌식 온돌방이라고 생각해온 선입견과 많이 다르다.

1.1.5. 조선 시대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검약주의의 표방으로 지나친 사치를 멀리하였기 때문에 큰 건축물을 짓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경복궁처럼 고려 왕궁인 만월대보다 면적이 컸던 경우에도 정전은 더 작게 지었으며, 건축 영역 전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보다 수수하고 규모가 작아졌다. 특히 장식에 있어서는 상당히 절제를 많이 했는데,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도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보통 가칠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 종묘 단청

또한 유교로 인한 강력한 신분사회는 가사제한령 등의 법을 통해 지배층인 양반의 가옥에조차 그 장식이나 재료를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수수해질 수 밖에 없었다. 건축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금과 은, 옻칠 등 사치스러운 물품에 대해 강력하게 금지하였고, 이런 제약으로 인해 수백년간 장식에 대한 기술이 수요를 잃어버리고 괴멸적인 전란으로 인해 기술자가 손실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중세 건축 관련 장식 기술이 퇴보하였다. 다만 조선시대가 매우 길었기 때문에 조선의 시기에 따라서 모습이 꽤 차이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후기에 와서는 암암리에 풀어지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의 폐단으로 인해 장인들의 수준과 의욕이 저하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바닥 전체에 온돌을 깐 온돌방이 비로소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는데,[4] 이는 당시 소빙하기 도래로 인한 저온 현상과 관련이 있다. 아무튼 이 온돌의 도입으로 인해 바닥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중층 구조의 가옥이 사라지는 한 원인이 된다. 또한 이 온돌은, 아마도, 땔감의 수요를 늘어나게 해서 쓸만한 재목을 사라지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거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왕궁 혹은 종교적 건축물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도 조선은 굉장히 건축에 있어서는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까지만해도 불교가 곧 국교였으며, 도시 특히 수도에는 도심 한복판 이곳 저곳에 황룡사, 흥왕사등과 같은 대형 사찰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세조 사후로는 노골적인 절에 대한 압박과 심지어는 고의적인 테러까지 벌어졌다. 심지어는 조선초에는 조선왕사라고까지 불렸던 회암사 역시 조선 중기 이후로는 몰락한다. 때문에 현재는 거대한 사찰이나 왕궁 건축물 중 후대까지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다. 많은 전란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타버린 대규모의 사찰, 특히 도심지 사찰들을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에서 재건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찰들은 대부분 왕실의 원찰이나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조포사, 능찰들이었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면서 숭유억불책의 약화로 사찰의 재건이 늘어나나 여전히 천대받는 건 똑같아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한 대규모 불사는 할 수 없었고, 절 건축 자체가 적다보니 사찰이 유교건축/관청건축과 유사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전자는 불국사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수원 용주사가 대표적이다.

다만 단청 기술자체는 화려하고 섬세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단청이 목재가 많은 건축물에서 좀이 슬거나 썩는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많은 건물에서 단청이 사용되었다. 특히 산간에 위치한 절이나 궁궐 건축등에서 많이 사용된 편.

또한 목재가 부족해지다 보니 나무를 절약하면서 맞배지붕의 단점(지붕이 보호하지 못하는 좌우 벽면에 비바람이 들이친다.)을 보완하기 위해 맞배지붕의 양 옆에 커다란 풍판을 달고 화재에 대해 저항력을 늘리기 위해 일반 벽 겉에 덧씌우는 화방벽이 출연하였고, 기둥이나 추녀같이 긴 부재를 만들 때 길이가 다소 짧은 부재를 이어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8번째 사진 기둥 참조[5]

풍판과 화방벽을 설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의 모습. 사진의 건물의 화방벽은 기둥을 덮지 않고 용지판을 대 기둥과 화방벽을 구분한 것으로, 화방벽이 기둥을 덮어 감싸는 완전밀폐형도 존재한다. 이 경우 습기슴가?로 나무로 된 기둥이 썩는 것을 막기위해 화방벽 아래쪽에 기둥의 목재 하단부 일부가 공기와 접촉하도록 작은 공기구멍을 뚫어 놓는다.

1.2. 근대 건축

이러한 전통건축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이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서양 양식의 건축들이 지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일본내부적으론 전통 건축이 아닌 서양식 건축양식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식민지(한국이라든지 대만등)에는 미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서양의 양식을 채용한 건축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이 시기에 대대적으로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 양식의 건축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총독부구 서울역사등이 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일본 전통 형식의 건축물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전통과 서양식 건축 양식이 합쳐진 절충식 양식들도 볼 수가 있다. 군산의 동국사적산가옥처럼 거의 완전한 일본식 건축물도 등장하며,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 나왔던 양조장 등 절충형의 건물들은 지금도 조금만 눈돌려보면 손쉽게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주요 도시. 즉 부촌이었던 동네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의 도시와 시골의 경우에는 전통 건축을 그대로 채용해왔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부촌이었던 군산, 강경, 인천 일본조계지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들은 6.25 즉. 한국전쟁을 통해 현대 건축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또, 19세기부터 재료와 수요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통양식이 발전해간 일본건축과 달리 한국의 전통건축은 쇠락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동안 자기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일본에 현재 남아있는 많은 2층 민간주거나 '중복도형'(중간의 복도 양쪽으로 방이 있는 형태) 저택은 사실 대부분 19세기부터 대대적으로 개조,확장되어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쉬운 부분. 종교 건축물은 서양식 벽돌건물이, 관공서를 위시한 근대적 행정,교육, 상업 건축은 일본식의 일본-서양 절충식 건물이나 일본 전통의 목조건축이 대체해버렸다. 주거에서도 조선식과 일본식의 대대적인 절충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절충하는 경우에는 지붕 기와를 일본식 평기와로 대체하거나, 미닫이 문의 도입,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한국식 온돌방을 도입하는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절충된 양식으로 유명한 한옥으로는 남일당 한약방 등이 있으며, 등록문화재 등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한옥 형식으로 넓은 2층 상가 건물을 짓는 등의 새로운 시도도 있었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저평가와 혼란기 속에서 곧 사라졌다. 1930년대 지어진 2층 상가 덕우당은 덕성여대 안에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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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2층 목조 상가. 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덕우당은 아니다.

대신 난방연료가 나무나 숯에서 근대식 기름이나 탄으로 바뀌면서 전통건축처럼 부억을 굳이 낮게 만들거나 방높이를 올리지[6] 앉아도 되니 집의 높이가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해방후엔 툇마루를 없애고 그 자리에 타일을 붙이는 식으로도 변형되기도 하는데, 근래에 도심에 슬럼가처럼 남아있는 한옥들은 대개 일제말기와 해방후 새롭게 만들어진 바로 이런 도심형 한옥이다. 이런 도시형 한옥이나 유사한 구조의 건축물들은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구조를 제일 쉽게 보는 경우는 일일연속극 등의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집 세트 중 재산없는 집안의 집 세트장.

이 시기에 지어진 많은 건축물들은 해방 직후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천대받았고, 그 덕분에 상당수의 주요 건물들이 아무런 논의도 없이 헐려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에 대해 인정받기 시작하며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되고 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는 강제성이 없는 제도라서 아직까지도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3. 현대 건축

사실상 1950년대 이후에 현대(사실은 모더니즘) 건축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양식은 대부문 모더니즘의 변용이다. 서구에서 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건축이 유행할 당시에 한국의 건축가들은 대부분 모더니즘 건축을 공부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대부분 모더니즘 혹은 그것의 변형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것이 낡았다, 트랜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 건축보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진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리츠커상의 수상자가 아직까지 없다는 점에서 아직 대외적인 평가는 조금 낮은 편이라 안타깝다.

주거 양식으로는 단연 아파트를 가장 대표적인 양식으로 꼽을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여담이지만 골목길에서 많이보이는 벽돌로 지어진 연립주택의 난립이 아주 심각하다주택계의 아파트

1.3.1. 현대의 전통 목건축

2000년대 들어서는 그 가치가 상당히 재평가되고 있다. 해방 직후에만 하더라도 그저 헐어버릴 대상이었건만...아무튼 긍정적인 일이다. 도심지에서는 서울 북촌의 한옥마을, 전주의 한옥마을 등에서 신축, 개량된 주거, 상업용 한옥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불교 사찰 등이 세워지면서 황룡사 같은 삼국*고려시대의 건물을 복원할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본보기로 지어진 진천 탑사의 3층 목탑 등이 그러한 것 중 하나. 그리고 건물규모가 그간의 경제성장 덕분에 전체적으로 커지고 화려해졌다. 조선시대에 명맥이 끊긴 3층 건물도 지어졌고 구인사 조사전 분당 대광사건축평면양식도 이전의 획일적인 일(一)자형에서 탈피하여 아(亞)자형 형태처럼 다양해졌으며용인 법륜사 단청 중에서 가장 화려한 갖은금단청[7]을 칠하거나도봉산 능원사 건물전체에 금박을 입힌 데도 많이 생겼다. 서울 수국사 화려함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반면 예술의 다양성 및 취향을 존중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수입목재의 등장으로 길이가 긴 나무를 구하기 쉬워지다보니, 조선 후기 건축에서 비교적 짧은 나무를 이어 긴 부재를 만드는 방식이 다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1.3.2. 북한 건축

과거에는 공산주의, 오늘날에는 전제군주제 국가 답게 큰 건물을 매우 선호한다. 반면 그 취향에 비해서 낮은 기술력과 경제난으로 인한 자재난 때문에 안습인 상황. 21세기에도 기포가 들어간 질 나쁜 유리를 쓰고, 류경 호텔 같은 초고층 건축물에도 철골을 쓰기가 부담스러운지 철근 콘크리트로 짓고 있다. 그나마 이러한 대형 건축물들도 평양을 벗어나면 없다고 봐야 한다. 또한 도시 주거에서도 아파트의 비율이 높아서 아파트 그라드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 의의가 있다면, 전통 목건축의 형상을 현대식 건물에 접목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며, 나름대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고 있다. 물론 피상적인 외형만을 개량없이 붙이기만 한다는 비판점이 있지만 말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인민대학습당이 있다.김일성 개세끼 해봐

2. 한국 전통 건축의 장점과 단점

2.1. 장점

  •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과 같은 시각적인 균형감에 신경써서 건물을 지었다. 기둥 정도가 아니라 건물의 전체적인 형상에 있어서 미묘한 곡선으로 시각적인 균형을 추구했다. 바꿔말하면 한옥에 있어서 완전한 직선보다는 곡선이 훨씬 많다는 것. 이는 중세 이후로 중국과 일본 건축에서는 사라진 특징으로, 한국 건축만의 특징이 되었다.

  • 온돌과 들문 등으로 기온차 극복하고 있다. 다만 우리 상식과는 달리 온돌은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된 것으로, 좀 늦다. 온돌의 기원 자체는 길게 보면 선사시대며, 최소한 고구려 시대에는 온돌의 초기 형태가 발견된다.

  • 정원 조성시 타국의 정원보다 주위 환경에 잘 녹아드는 자연미를 구축하였다.
    이는 조상들이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에는 인위적인 모습을, 일본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의 모방을 보여주는 데 반하면 사뭇 다른 모습임을 알 수가 있다.

  • 지진에 강하다. 역사스페셜에서 소개한 한옥 내진실험에서 초가집은 진도 6.5, 기와집은 진도 6까지 버텼다.[8] 또한 해당 에피소드에서 소개한 돌 그랭이 공법과 석축의 돌못이 내진력을 강화시켜 주는 것을 소개한 바 있다.

2.2. 단점

  • 재료나 양식에 있어서 비교적 다양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는 고대 중세 건축물이 소실된 경우가 많다는 점이 크며, 조선시대가 화려함이란 것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던 측면도 크다.

  •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지 못하고 중국건축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9][10]

  • 구조체에 금속을 쓰지 않기 때문에[11] 내구성이 약하고,[12] 목조건축이 대부분이라 목재가 부족한 경우 큰 건축물을 만들기 힘들었다. 금산사 미륵전 등에서 내부의 쌍기둥이 여러 부재를 짜 맞추어 큰 기둥을 만든 구조다. 다만 이렇게 기둥을 만든 탓에 요즘 기둥에 한계가 와서 지금은 건물 안에 철제 빔으로 된 별도의 쇠기둥을 설치했다.

  • 축부에 보강재를 잘 안 쓰기 때문에 각 부위를 연결해 주는 결구가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지붕 자체의 하중으로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문제는 이런 형식으로는 규모에 한계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건물이 커질수록 지붕도 커질 수밖에 없는데, 무게는 부피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물리학적인 법칙상 지붕의 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없고, 그에 비해 제목의 크기는 한계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 이는 대량식 구조의 건축의 단점이며, 한국에는 대량식 건물만 있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힘든 문제 중 하나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대량식 건물들도 가지고 있는 문제이긴 하다. 일본의 경우에는 기둥은 얇고 그 수를 적게 할 수 있는 방법도 가지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보의 크기는 만만치가 않으며, 높은 공간은 거의 포기해야 한다. 히가시혼간지 등을 참고. 이런 동아시아 전통 건축의 딜레마는 서구 건축에서는 러스 구조 등으로 극복하고 있다.

  • 서까래를 깐 후 그 위에 기와를 곧바로 깔면 제대로 깔리지도 않고 모양새도 안 좋으므로 보통 흙을 반죽한 후 서까래 위에 깔아서 모양새를 잡아 그 위에 기와를 올리는데 돌이 풍화 및 기타 원인으로 분해되어 생성된 것이 흙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구조물에 막대한 하중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중량물인 기와를 더 올리니 지붕에 과부하가 걸려 시간이 지나면 부재가 하중 때문에 찌부러지고 구부러지는 등 변형이 생기고 건축 자체의 수명이 짧아지게 된다.

    흙의 이런 단점은 중량 문제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잘 흡수하는 흙의 특성상 항상 일정한 수분을 머금고 있는데, 유기물이라는 목재의 특성상 장기간 수분과 접촉하면 썩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중으로 건축물의 수명을 잡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전통 한옥 지붕의 평균 수명을 짧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관련 링크

    경복궁 근정전 등 각종 문화재 공사를 맡아온 목장 신응수도 전통 한옥의 최대 단점이 바로 지붕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다. 파리 고암서방 및 충북 진천 보탑사 등 다양한 문화재 복원에 참여해 온 신영훈 등 다수의 한옥 전문가들도 동일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흙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거나 아예 서까래 위에 덧써까래를 깔아 이중지붕을 만들어 흙의 사용을 배제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현대에는 스티로폴 등 다양한 보온재가 있으니 흙을 보온재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기와 대신 나무널을 얹는 너와집[13]이나, 풀을 엮어 올리는 초가집, 굴피나무 껍질을 얹는 굴피집의 경우 무게를 기와집보다는 줄일 수 있지만 유기질 지붕재료이기 때문에 화재에 약하고 수명이 짧아 주기적으로 바꾸어야 하며, 여기다 굴피집의 경우 공기 중 습도에 따라 팽창/수축률이 커서 건조한 겨울이 되면 방한력이 크게 낮아진다.[14]

    그래서 최근엔 기존 기와 대신 무게가 훨씬 가벼운 동(銅)기와를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월정사나 상원사 같은 강원도 사찰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15] 물론 가벼운 동기와를 씀으로 축부하중이 줄어들어 구조안정성이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으나, 기존방식에서 기와만 바꾸어 불필요한 중량만 줄이는 방식이고 동기와를 시공하는 측에서도 이점을 고려하고 방수자재인 동판이나 아스팔트 도포재 등을 더 사용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16]

2.3. 오해/낭설

2.3.1. 경복궁의 크기

'경복궁의 크기는 자금성 화장실 만하다.'라는 괴설이 나돌고 있다.

경복궁_자금성_크기비교.jpg
[JPG image (Unknown)]


경복궁의 면적은 자금성의 65%에 해당하는 수준이며[17], 일제시대를 거치며 없어진 지금의 청와대 근처에 있던 후원을 포함하면 이보다 더 커진다. 전부 복원 할 경우 75%~80%정도 된다.

참고로 한자까지 같은 자금성 안의 전각인 자금성 경복궁을 얘기한다면 이 명제는 사실이다. 어?

2.3.2. 기술이 없어서 2층 이상의 주택이 없다

물론 2층 이상의 주택이 존재한다. 덕수궁의 석어당이 그것. 그러나 그 외에 2층 주택이 거의 없는 것은 온돌 때문이다. 온돌의 과도한 무게로 인해 온돌을 가진 다층 주택을 짓는 것은 불가능했고, 겨울이 매우 추운 한국에서 온돌도 없는 다층저택을 지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다층의 건물은 주거지가 아닌 창고, 사찰건물, 누각 등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경북의 운조루 등 2층의 형식을 가진 특수한 형태는 남아있다. 주택은 아니더라도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18]목탑, 법주사 팔상전 등 다층구조 건물은 많다. 실제로 온돌이 설치되지 않은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19] 일부 사찰이나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덕궁 주합루의 모습. 원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나, 현재는 주로 건물 전체를 주합루로 부른다.


유형문화재인 방초정.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2층 구조다.


덕수궁 석어당. 역시 2층.


북한 종성읍성의 수항루. 이건 아예 3층이다!


백련사 만경루. 비탈길에 지어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란 게 보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가운데 길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20]

더 자세한 이야기는 디씨 건물갤의 관련 글 참조.

2.3.3. 현존하는 전통 건축물 중 경복궁 근정전이 제일 크다?

높이와 면적을 다 고려한다면 가장 큰 건물은 경복궁의 경회루다. 그러나 가장 면적이 넒은 건물은 높이 14m, 길이 75m의 여수 진남관이다. 그 다음은 통영 병관을 꼽을 수 있겠다. 근정전은 면적 30m x 21m에 높이는 22m(기단까지 합하면 25m 약간 못 미침)의 크기로 높은 편이긴 하지만 가장 넓지는 않다.

2.3.4. 지붕 기와의 끝 치미부분에 하얀 회칠한 것이 그대로 보여 지저분하다

일단 흰색 회칠 때문에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게 시멘트로 바른 것으로 오해하는데 시멘트가 아니라 회칠마감이다.[21] 이렇게 용마루나 막새 등에 흰 회반죽을 칠하면 단순히 기와를 쌓아 만드는 것보다 바람에 더 강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태풍이 한국보다 더 잦은 일본에선 회반죽 안 써도 용마루가 멀쩡한 것을 보면 그다지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이건 꼭 전통 건축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원래 막새라는 끝에 있어야 할 기와나 치미장식이 없기 때문인데 막새 대신 회칠을 하는 경우가 1970~80년대 이후부터 보인다는 것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기와를 그냥 올려놓으면 놓았지 딱히 흰 회칠이 보이도록 마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막새가 없는 이유는 신라 때부터 신분에 따라서 쓸 수 있는 장식과 집의 크기 등을 자세하게 규정했는데, 이게 조선에도 적용되어 궁궐이나 사찰을 제외하고는 단청이나 막새, 치미, 다듬은 돌 등을 쓰지 못하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가난하거나 미적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막새가 지붕의 완성이기 때문에 다른 기와보다 더 중요시 했지만, 그 때문에 일반인들은 쓰지 못하게 했다. 법이 문제였다면 모를까 건축 기술이나 센스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붕의 마감은 취향의 영역이기도 해서 오늘날에는 흰 회칠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일일히 기와 쌓는 것보다 편한 것도 있고.

2.3.5. 한옥이 과학적이라는 것은 양반가에 한정된다

온라인 상의 덧글에서 종종 보이는 중2병 병크발언. 이는 '난 고건축에 대해 눈꼽만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스스로 자폭하는 거나 다름없다.근데 원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게 함정 물론 스케일 차이는 크지만, 일반 민가나 양반가 건축이나 한옥으로서 갖는 기본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같다. 다만 양반가 건축물에서 보다 다양한 부가요소가 보이고,[22] 더 좋은 자재로 더 좋은 자리에 지어졌으며, 무엇보다 일반 민가보다 양반가가 현대까지 남아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23]

이건 어느 나라 고건축이나 신분이 존재하는 전근대적 시대의 물건이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저런 종류의 덧글을 달기 좋아하는 일빠/중빠들이 숭배하는 일본/중국의 고건축도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 레벨로 내려가면 건축물들의 수준은 바로 곤두박질친다. 일본이 자국의 대표건축으로 내세우는 고성이나 무가 건축물이 하층민들의 민가였는지 아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이 자국의 대표 고건축물로 내세우는 사합원도 하층민들의 민가는 아니다.

2.3.6. 한옥은 나무로만 지어 열등

'한옥은 서양 건축과 달리 불에 약하다. 그런데도 발전이 없었다.'라는 식의 논리.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온전히 남아 관광객들의 마음을 뺏는 유럽과 달리, 한국의 역사적 건물들은 대부분 목조건물인지라 잦은 전란으로 불타고 무너지고,(안학궁, 미륵사, 황룡사 등) 방치되면 목재가 썩어 붕괴되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고작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24]이라 관광 자원으로서의 건축 유산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아쉽다고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골룸한 일.
이쪽은 주로 서양빠들이 하는 병크발언. 한국 건축은 나무만 쓰는 게 아니다. 통나무를 쌓아 만든 귀틀집 수준이 일반적이고 기와조차 도입되지 않았던 삼국시대 가야 수준이라면 몰라도, 다양한 돌과 여러 흙과 복합재를 섞어 만든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해[25] 축대를 쌓고 벽은 현대 철근 콘크리트처럼 井자 형태로 여러 차례 엮은 골조에다 진흙을 발라 만들고 바닥에 온돌과 흙을 깔아 만든다.

그리고 한국도 다듬은 돌이나 벽돌로 아치의 원리를 이용해 다리를 짓고 성을 쌓는 등 생각외로 많이 활용했다.[26] 근데 왜 서양처럼 정교한 석조 건축이 없었냐 하면 이는 한국에서 주로 생산되는 석재가 화강암이기에 그렇다. 화강암은 경도는 HS) 70~80으로서 철 중에서 가장 경도가 높은 주철의 32~40의 거의 두배가 되기에 가공하기가 매우 힘들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흔했던 석재가 대리석 및 석회석인데 이 둘은 손톱으로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도가 약하고[27] 따라서 가공해서 사용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석조건물이 발달 못했던 것은 이러한 환경적 요인의 작용이 크며, 동시에 그런 화강암으로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굴암과 고구려 [28]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및 오벨리스크 같은 정교한 화강암 건축물을 예로 들며 석조건축에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하는 이도 있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이집트는 사막 국가여서 건축에 쓸 목재 자체가 아주 귀한 환경이었으므로 자연히 석재를 활발히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인프라 및 기술발달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온대 기후대에 속해 목재가 석재보다 훨 싸고 구하기도 쉬웠던 한국과는 일대일 비교는 금물이다.

더욱이 아무리 석재라도 나무가 연소될 정도의 강한 열(나무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나무의 착화점이 270~280도 정도다. 자연 발화점은 450도 정도.)에 화재 등으로 오래 노출되면 가뜩이나 인장력이 약한 석재가 열팽창으로 인한 균열과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 내구력이 급격히 떨어져 쉽게 부스러지게 된다.

서양 건축도 중세/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석조 아치와 돔 구조가 건축에 대대적으로 쓰이기 전에는 목조 골격에다 석재를 혼용했고,[29][30] 석조 아치 건축도 대형 종교건물/왕궁에나 주로 사용했지 그 이하로 내려가면 목조 골격구조를 많이 사용했다.[31] 그리고 같은 서양 건축도 목재자원이 풍부한 동유럽/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지리적/환경적인 이유로 목재가 많이 사용되며,[32] 건조한 기후로 수목이 자라기 힘들어 대형 목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남부 유럽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즉 지리적/환경적 문제와 직결되는 재료수급 문제로 인한 것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근대에 시카고 대화재로 도시 전체가 홀라당 다 타버린 사례가 있다.[33]

벽돌사용의 경우 알고보면 의외로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벽돌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자주 나오고, 수원화성 이전에 전축성 건설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벽돌 사용이 많았다고 하는 삼국시대에도 벽돌의 사용은 국영사찰의 장식벽돌이거나, 일부 성곽과 백제의 남조식 무덤 등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축되고 관리되는 건물들이었다. 이는 사용빈도의 차이는 있어도 조선시대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에 벽돌 사용이 중국처럼 많지 못했던 이유는 (1)조선의 토질상 중국 화북지역만큼 낮은 온도에도 벽돌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 조선후기 중국식의 벽돌제작전용 원추형 가마 도입 전까지 좋은 벽돌 만들기가 힘들었고 (2)대륙성 기후인 중국 화북지역보다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에 잘 붙어있지 않았고[34][35] (3)자본주의와 상공업의 충분한 발달이 되지 않아 벽돌과 관련 산업에 대한 민간투자가 부족해 민간에 벽돌이 대중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후기에 들어 중국건축의 영향과 국가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벽돌이 보급되기는 했지만, 이 경우에도 담장이나 조선 초중기와 마찬가지로 기단 만들 때, 종묘에서처럼 조선 후기 등장한 화방벽을 만들 때 종종 사용되는 정도로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이 완전히 대중화된 것은 관련 기술과 자본이 들어온 개화기~일제강점기부터였다.

사실 이런 온라인의 비판은 다분히 꼬투리 잡기에 가깝다. 굳이 이런 식으로 꼬투리잡자면 북유럽 고대건축은 "어휴 무식한 통나무덕후들"로, 로마건축은 "어휴 인장력 떨어지는 돌에만 하앍거린 아치덕후들"식으로 원한의 무한루프가 이어진다. 목조건축이라는 이유로 깐다면 일본 건축도 까야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목조건축 까들의 대부분은 한국 건축만 까고 있다. 목조건축이 무조건 열등하다고 치면 건축 중 제일 우월한 것은 목재를 가장 적게 쓰는 아프리카중동 건축이다. 이쪽은 기후상 거의 흙과 돌만으로 지으니. 하지만 이쪽도 까자면 아프리카 전통 건축은 커다란 두꺼비집에 통나무를 삐죽삐죽 박아놓은 꼴이고, 중동 건축은 로마 건축처럼 돌과 아치, 돔덕후들이 된다. 건축이란 건 각 국가/집단의 자연 환경과 문화에 따라 각각의 장단점과 특색을 띄는 것이지, 쓸데없는 꼬투리만 잡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3. 건축물 일람

3.1. 전통건축

3.1.5. 서원

3.1.6. 관아

3.2. 근대 건축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항목에서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3.3. 현대 건축

3.3.1. 교통 인프라

3.3.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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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면적에서는 안학궁보다는 작고 개별 건물의 크기는 황룡사보다 작으니...안습.
  • [2] 실제로 자기, 회화 등을 봐도 고려가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화려하고 섬세하다.
  • [3] 평민이나 하층민들의 경우 지금의 원룸과 비슷한 구조의 좌식생활을 했다. 귀족들이야 사회의 부 대부분을 차지했기에 난방비가 많이 들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야 했던 하급계층에게 입식생활은 사치였다.
  • [4] 온돌 자체는 고구려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
  • [5] 기차 참조서적 :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결구법: 맞춤과 이음(정연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김왕직 저)
  • [6] 궁궐에 가보면 단층 주거인데도 방바닥의 높이가 성인 남성의 키보다 높다! 시골의 양반집도 사실 방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온돌과 바람을 고려한 설계.
  • [7] 금단청의 금자를 황금 금(金)자로 흔히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비단 금(錦)자를 쓴다. 비단처럼 섬세하면서 화려하고 우아한 단청이란 뜻이다. 하지만 금단청을 칠할 때 실제로 금박을 쓰는 경우도 꽤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단 전체를 완전히 금박을 입히는 식은 아니다.
  • [8] 참고로 진도6은 산사태가 일어나는 수준의 강진이다.
  • [9] "조금도 중국 본계의 양식을 이탈함이 없으나 또한 향토색의 수이(殊異)를 따라 다소 상위(相違)함이 있다. 일례를 들면 지붕의 곡선이 중국의 그것보다는 완만하여졌고 일본의 그것보다는 굴곡 있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향토색을 구비한 조선건축이 타방인국(他方隣國)에도 영향함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또 중국의 그것과 다른 독창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건축은 중국양식의 일퇴화(一退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은 중국의 양식을 전부 포괄하여 그것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다만 조선의 힘이 자라는 한에서 그를 섭취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 건축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다." - 고유섭, 조선건축미술사
  • [10] 참고로 이 고유섭(1905~1944)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선구자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면...
  • [11] 엄밀히 말하자면 사용한 사례는 있다. 궁중 건축물 등 부유한 지배층 건축 일부에서 밖으로 길게 뻗어나온 처마가 처지지 않도록 건물 안쪽에서 철띠로 감아 고정시키는 사례가 약간 있다. 하지만 보통은 건물 외부에 처마를 받치는 보조기둥을 쓰거나, 건물 안쪽에 강다리라는 나무 고정장치를 쓰거나 돌을 끼워 눌러 고정시킨다.
  • [12] 조금 있는 것들도 대부분 문에 다는 돌쩌귀나 문고리, 아니면 건축물이 완성된 후 겉에 다는 장식성이 강한 철물 일부 정도다.
  • [13] 돌너와집 제외. 해당 항목 참조
  • [14] 초가집도 기와집에 비해 지붕무게가 가볍지만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이고 초가집 지붕도 중량이 많이 나간다. 최종 마감재가 기와가 아닌 짚/억새란 점을 빼면 구조가 기와집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짚을 써서 생기는 아이러니한 단점이...여름, 겨울에 폭우 및 폭설이 쏟아지면 안이 비어있다는 짚의 특성 때문에 물기를 많이 흡수하게 되어 갑자기 늘어난 지붕 중량때문에 집이 폭삭 주저앉을 수 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말이다.
  • [15] 동기와를 썼다 하더라도 반년만 지나면 부식되어 일반기와와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용마루 같은 물이 닿지 않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면 구리 특유의 붉은 빛이 도니 식별이 가능하다.
  • [16] 동기와의 또다른 장점은 내구성이 매우 좋다는 것인데, 부식 및 산화에 매우 강한 구리의 특성상 수백년이 지나도 원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따라서 외장재로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리는 탄력성 및 복원성이 매우 우수한 자재란 점이 기와와 궁합이 맞는 것이 지붕을 보호하는 외장재인 기와는 특성상 빛,물,추위,더위 같은 외부환경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데 특히 열과 추위가 문제되는 것이 견고한 재질이라도 열과 추위를 만나면 늘어나고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괜찮지만 수백번을 반복하면 미세한 균열이 갈 수밖에 없고 그 틈사이로 물이 침투해서 얼어버리면 결국 깨져버린다. 도자기같이 경도는 높지만 연신율 및 탄력성이 매우 낮은 재료일수록 그러한데, 한국의 기후가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큰 편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의 유명 사찰이 조선시대 승유억불 정책때문에 하루 사이에도 날씨가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산중에 위치해 있어 일반기와를 쓰면 매년마다 기와를 갈아야 하지만, 열과 압력이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총포류의 탄피로 쓰일 만큼 탄력성 및 복원성이 좋은 구리로 기와를 쓰면 이런 문제점이 발생할 여지가 거의 없어진다.
  • [17] 천안문 광장은 자금성 밖에 있다.
  • [18] 이들 목탑은 현대의 20층대 아파트 수준 높이를 자랑하는 건축물로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 [19]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 [20]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고 한다.
  • [21] 뭐 회반죽도 넓은 의미의 시멘트에는 들어가긴 한다. 석회가루와 물, 고운 흙, 느릅나무 접착제, 잘게 찢은 한지 등을 섞어 만드는데, 석회와 석고가루를 주성분으로 만든 초기 이집트 시멘트랑 비슷하다.
  • [22]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양반가 건물은 일반 민가와 달리 여름에 통풍이 필요할 때 위로 올려 바람이 잘 통하게 하는 덧문이 있고, 마루가 더 넓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가에 통풍용 뒷문이나 마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되, 덧문같은 부가적인 요소들이 없을 뿐이다.
  • [23] 당장 현재 남아있는 고건축 중에 전통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양반가 건축이나 고궁, 사찰 제외하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자.
  • [24] 피라미드나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안습.
  • [25] 시멘트는 이미 피라미드 건축시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건축자재다. 현대건축에 와서야 주류로 쓰여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경우 몽촌토성을 지을 때 흙과 석회를 60:40비율로 섞어 일종의 고대식 콘크리트를 만드는 증토축성법(蒸土築城法)으로 지어졌다.
  • [26] 멀리 갈 것 없이 서울이나 수원의 아치형 성문만 봐도 된다.
  • [27] 성 비투스 성당이나 까를 교 같이 사암을 사용한 건출물도 있지만, 아무래도 화강암의 강도와 무게는 못따라간다.
  • [28] 참고로 고구려의 성 중 백암성은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이 성은 이름 그대로 하얀 색을 띠고 있어서, 성벽이 주저앉고 잡초가 자라는 지금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
  • [29] 석재는 풍화에는 목재보다 강하지만 인장력이 약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콘크리트가 왜 근현대에 들어 철골 콘크리트 기술 개발 전에는 지금처럼 주 건축재료로 쓰이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자.
  • [30] 그 대표적인 예로 로마 판테온을 들 수 있다. 출입구 부분의 삼각형 파사드 부분은 분명 목조 골격이 버티고 있으며 그 안의 돔은 순수 콘크리트로 버티고 있으니 건축적인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 [31] 사실 석조 아치 구조도 목재 골조가 전무하지는 않다. 금속공학기술의 발달로 강하면서도 적절한 탄성을 가진 철근이 등장하기 전까지 건물의 인장력을 버텨내는 데 가장 좋은 재료는 오직 목재뿐이었다.
  • [32] 추가로 목재가 단열성이 좋다는 점도 있었다.
  • [33] 미국은 개척시대 문화의 영향으로 나무집이 의외로 굉장히 많다. 흰개미 구제업체들이 관해 때돈 버는 게 아니다.
  • [34] 김왕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참조
  • [35] 동아시아에서 벽돌사용의 본좌인 중국 건축에서도 전축건축은 대륙성 기후면서 좋은 흙을 구하기 쉬운 화북지역에 특히 집중되며, 습기가 많은 남부로 갈수록 전통건축에서 벽돌 사용은 감소하고 흙벽이나 목조 건축이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
  • [36] 사실 2012년 완공 작품은 신관뿐 아니라 본관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