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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신야

last modified: 2014-08-18 23:44:42 Contributors


橋本真也
일본의 프로레슬러.
파괴왕 하시모토 신야(1965년 7월 3일~ 2005년 7월 11일).
183cm, 135kg.
주요 기술 : DDT, 수직낙하식 브레인 버스터 DDT, 삼각조르기, 춉, 중폭(重爆) 킥.

별명 "파괴왕"은 특유의 레슬링 스타일에서 비롯한 것으로, 거대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발차기 기술과 춉, DDT는 글자 그대로 상대방을 때려부숴버릴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전매특허인 "수직낙하식 DDT"는 아무리 봐도 수직낙하식 브레인버스터로 보이지만, 본인은 "스탭밟는 게 DDT니까 이건 DDT가 맞다!"며 죽는 날까지 DDT를 고집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설경구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역도산에서 후나키 마사카츠, 무토 케이지와 함께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시모토는 스모계 밑바닥에서 뼈를 깎는 고생을 하던 역도산이 동경하는 요코즈나 '아즈마나미'역을 맡았으며, 하시모토는 스모 선수 출신의 프로레슬러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며 '파괴왕'이라는 별명답게 화끈한 모습을 선보였다.


학창 시절에 유도를 하다가, 안토니오 이노키를 동경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한다. 신일본 투혼삼총사 가운데 한명으로, 무토 케이지쵸노 마사히로와는 동기.
무토가 '천재'로 불리는 레슬링 센스를, 쵸노가 '검은 카리스마'로 관객에게 어필했다면 하시모토는 파괴적인 파이팅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 셋은 90년대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대표적인 프로레슬러로 활동해왔다.
다만 하시모토의 스타일이 라이트팬에겐 좀 먹히기 힘들어서, 셋의 매치업은 무토vs초노 쪽이 더 인기를 끌었다.

1997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가와 나오야(小川直也)가 프로레슬러로 데뷰하면서, 하시모토와 대립한다. 두 사람의 대립은 전형적인 입식타격vs유술의 이종격투기 양상으로 흘렀다. 첫 싸움에서 하시모토는 포지션과 거리 조절에 실패해서 입식타격이 서브미션에 발리는 전형적인 패턴으로 패했고(...), 리벤지 매치에서는 반대로 유술가의 취약한 가드를 찌른 로우킥&미들킥 콤비네이션으로 기권승을 거뒀다.
그리고 세번째 시합에서 오가와는 지금껏 입던 유도복 대신 이종격투기 선수다운 복장-오픈 핑거 글러브와 팬츠, 슈즈 차림으로 나섰다. 그리고 유도를 베이스로 한 지난 시합과는 다른 격투가의 시합을 펼치서 하시모토를 압도한다. 경기 양상이 과열되면서 양측 세컨드끼리 패싸움이 터지는 등 시합은 무효로 끝났지만 사실상 하시모토의 패배였다. 백마운트에 사커킥에 스톤핑까지 얻어맞으면서 전혀 대응을 못하고 링밖으로 나가떨어졌으니(...)[1]
그리고 네째 시합도 패배로 끝나고, 2000년 4월 7일 도쿄돔에서 열린 다섯번째 시합에서 '패하면 은퇴한다'라는 조건까지 걸고 결전에 임했으나 끝내 패했고, 약속대로 신일본 링을 떠났다.
그러나 복귀를 바라던 어린이팬들이 100만마리 종이학을 접어 보내줬고, 이를 계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8월 프로레슬링계에 복귀한다.

이 무렵 일본 프로레슬링계는 미묘한 세대교체 시기를 맞고 있었는데, 자이언트 바바가 사망하면서 사실상 링의 헤게모니는 전일본 사천왕이나 신일본 투혼삼총사 세대가 쥐어야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이노키는 아예 흑막처럼 똬리를 트고 있고, 초슈나 텐류 등 바로 윗세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신일본 상부층은 전일본과 교류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하시모토는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이후 탄생한 프로레슬링 노아(NOAH)와 교류한다고 봤다. 이런 시각 차이 때문에 결국은 그토록 동경했던 이노키와 사이가 틀어지고 하시모토는 11월 신일본을 나온다.

2001년 1월 하시모토는 자신의 단체 제로원(ZERO-ONE) 설립하고, 3월 첫 시합을 연다. 제로원의 특징은 사실상의 풀컨택트 타격으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타격기를 소리만 날 정도로 때리고 피폭자가 오버해서 맞아주는 기존의 프로레슬링에 비해 리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출범 당시 메인 이벤트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으로 회자되는데, 하시모토 신야&나카다 유지vs 미사와 미츠하루&아키야마 준 태그매치였다. 신일본과 전일본의 탑을 달리는 수퍼스타와 차세대 수퍼스타가 한팀을 이룬,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매치업이었다. 흥행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네 사람이 보여준 기량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매치업에서 비롯한 팽팽한 신경전과 자존심 싸움 또한 일품이었다.
그리고 이날 경기장에 오가와 나오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 오가와는 이노키와 견해차를 보이며 신일본을 떠났고, 제로원에서 하시모토와 태그팀 OH포를 결성했다. 이노키 때문에 링에 뛰어든 두 사람이 숙적이 되어 싸우고, 끝내 이노키와 결별하곤 동반자가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여담으로 이 시합은 이후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선 단체간 진입장벽이 대폭 낮아지면서 교류가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경영난으로 제로원 붕괴를 선언했으며, 고질적인 어깨부상을 치료하고 긴 재활에 들어갔다.

2005년 7월 11일 갑작스런 뇌관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40세.

투혼삼총사를 비롯한 1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해 죽음을 슬퍼했다.

현재 그의 아들 하시모토 다이치가 프로레슬로러 데뷔, 제로원의 뜻를 잇기 위해 수행 중이다. 별명은 당연하게도 파괴왕자. 그의 오랜 벗 쵸노 마사히로타니 신지로가 육성 책임을 맡고 블로그를 개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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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시합은 시멘트 매치였다. 시합전 합을 맞추기 위해 미팅을 가졌으나 오가와가 불참했고 시멘트 매치임을 직감한 하시모토는 온몸에 오일을 바르고 경기에 임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지만 유도를 베이스로 하는 입장에서 유도 올림픽메달리스트인 오가와에게 실전에서 이길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경기를 보면 오가와의 펀치와 킥이 프로레슬링식이 아닌 이종격투기식으로 들어간다는것을 확연하게 느낄수 있다. 이는 이노키의 지시라는 설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단순 이노키의 단독 지시가 아닌 당시 하시모토를 탐탁치 않게 여긴 신일본의 현장 감독 초슈 리키의 묵인하에 펼쳐졌다는 설도 있다. 확실한 점은 이것이 프로레슬링의 시합이 아니었다는 점. 이러는데도 이후 오가와와 화해하고 뭉친 하시모토가 대인배라고 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