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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니크로

last modified: 2014-08-29 00:27:40 Contributors



이름 Philip Henry Niekro
필립 헨리 니크로
생년월일 1939년 4월 1일
국적 미국
출신지 오하이오주 블레인
포지션 투수
투타 투우타
프로입단 1958년 밀워키 브레이브스 자유계약
소속팀 밀워키 브레이브스 (1964~1985)[1]
뉴욕 양키스 (1984~198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86~1987)
토론토 블루제이스 (198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198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영구결번
No.35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투수.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너클볼러이자, (아마도) 최후의 위대한 너클볼러. 너클볼을 주무기로한 선수 중에 최초이자 (역시 아마도) 최후의 300승 투수. 물론 니크로 뒤로도 팀 웨이크필드같은 너클볼러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필 니크로만큼 완성도 높은 너클볼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투구영상. 정말 공이 엄청나다.

광부였던 아버지 필 니크로 시니어에게서 배운 너클볼을 무기로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너클볼만 던졌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데뷔 초기에는 너클볼만 던질 줄 알았을 뿐, 다른 구질을 던지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직구 그립도 잘 잡지 못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다른 너클볼러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너클볼을 택한 것과 달리 필 니크로는 처음부터 너클볼만 파고 들었기 때문에 너클볼의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다만, 초창기 완성되지 않았던 너클볼은 배팅볼 수준이라서 풀타임 메이저리거 선발로 자리잡기까지 정확히 10년 걸렸다. 즉, 마이너리그에서 10년을 굴렀다는 것. 1958년에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상기 항목의 출신지에서 나오듯 집이 오하이오였는데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열린 선수 선발 캠프에 누구나 참가 할 수 있다는 말과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탄광에 간 사이에 야구화를 챙겨서는 차를 얻어타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참가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스카우터가 전화가 와서는 니크로의 집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냐며 연락이 왔길래 어머니는 얼른 폴란드 요리 준비를, 아버지는 (몇 잔 먹이면 돈을 좀 더 얻어낼 것 이라는 생각에, 아니 후술될 내용을 보면 돈을 좀 아낄수 있다는 생각에;) 보드카를 사왔다고...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터가 집에 와서는 "계약금으로 250달러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어봤는데 니크로의 아버지는 당황하며 "전 광부라 그 정도 돈을 드릴 여유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들을 입단시키는 명목으로 오히려 돈을 지불해야 하는 줄 알았던 것)
스카우터가 "아뇨, 저희가 그 만큼을 아드님께 드리는 겁니다.(;)" 라고 말했고 계약이 이루어져 필 니크로는 월봉 250달러에 하루 식비로 2달러를 따로 받는 조건으로 브레이브스에 입단하게 된다.
이 옛날 옛날 이야기에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팀 웨이크필드는 그저 "와우..." R.A. 디키는 "하루에 2달러 라니 믿을 수가 없네요."라는 반응들이었다.[2]

풀타임 선발로 자리잡은 것은 1968년. 그의 나이 28세에 비로소 선발 기회를 잡아 그 해 200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 1.87로 리그 1위에 올라 비로소 화려한 메이저리그 경력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완벽한 너클볼을 주 무기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농락했다.

나이 28세부터 시작한 그의 메이저리거 경력은 나이 48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나는데, 그 기간동안 거둔 성과는 5404이닝을 던져 318승 274패에 3342삼진. 동생인 니크로도 선수 생활의 위기에 봉착하자 아버지와 형에게 너클볼을 배워 200승 투수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형제가 합작한 승수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다.

특히 300이닝 이상 소화한 시즌도 4차례나 되고, 나이 40세 이후에 기록한 121승은 거의 불멸의 기록이 될 듯. 이는 물론 체력 소모가 극히 적은 너클볼이라는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너클볼이 제구가 어려워서 폭투가 많고, 도루 허용이 쉽다는 약점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기록은 결코 폄하될 것이 아니다. 참고로 그는 빼어난 수비 실력을 자랑했고, 특히 견제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 때문에 너클볼의 약점인 도루 문제를 해결했다. 골드글러브 5회 수상자인 것에서 그의 수비 실력을 알 수 있다.

다만, 지지리도 상복도 없었는데 이는 그가 뛰던 시기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암흑기를 맞이하던 때라서 승수도 잘 챙겨주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1979년 다승왕에 오를 당시 21승으로 동생 니크로와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지만, 그 해 패수도 정확히 20패로 다패 부분 1위였다. (참고로 당시 필 니크로의 나이는 40(...)) 말년에 오래도록 뛴 애틀랜타를 떠나 뉴욕 양키스로 갔는데, 애틀랜타 팬들이 오히려 축하줬다고 한다. 이유는 이 약체에서 뛰면서 20년 동안 겨우 PO만 두 번 밟아본 노장이 은퇴하기 전에 우승 반지를 하나 끼기를 바랬던 마음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시기 뉴욕 양키스도 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서 결국 은퇴할 때까지 월드시리즈 한 번 밟아보지 못했다. 이 기록은 역대 최고 기록.

필 니크로가 치른 경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경기는 300승 달성 경기다. 자신의 스승이던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자 시즌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병상에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300승 경기에 나서게 되었다. 1985년 10월 6일에 열린 그 해 마지막 300승 도전 경기에서 충격적인 발표를 하는데, 바로 마지막 타자를 상대할 때까지 너클볼을 던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자신의 성공이 너클볼 때문이라는 인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이 경기에서 9회 2아웃까지 너클볼을 단 하나도 던지지 않았고, 마지막 타자에게만 너클볼을 던지면서 완봉승으로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3] 이 완봉승은 훗날 제이미 모이어가 깨기 전까지 역대 최고령 완봉승 기록이자, 현재까지 300승 달성 경기에서 나온 유일한 완봉승이다.

은퇴 후, 너클볼로 먹고 산 선수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대단히 섭섭한 대우를 받았다. 다섯 번째 투표에서야 비로소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는데, 반칙 투구의 달인인 게일로드 페리가 단 세 번만에 입성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섭섭한 대우. 기자 개객끼 해봐. 명예의 전당 입성과 함께 오래도록 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단은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 3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워렌 스판그렉 매덕스-톰 글래빈-존 스몰츠 시대의 사이를 연결해주는 암흑기 애틀랜타의 에이스로서 의미가 있는 결번이다.

은퇴 후에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삽질하던 한 너클볼 투수에게 제대로 된 너클볼을 전수해줬는데, 그 양반이 바로 팀 웨이크필드다. 그리고 프로 선수도 아닌 주제에 계속 너클볼을 가르쳐 달라며 징징거린 아마추어에게 한 달 정도 합숙훈련을 하며 너클볼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너클볼을 배워간 그 아마추어는 현재 한국 최초의 독립 구단인 고양 원더스의 대표 허민이다. 관련 기사

그런데 2012년 8월 7일, 허민 고양 원더스 구단주와의 인연 덕분인지 생애 처음으로 방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8월 9일에는 원더스 모자를 쓰고 잠실에 직관을 왔다! 관련 기사 초청자인 허민 구단주와 함께 직관한 경기는 명불허전의 엘꼴라시코. 세계로 뻗어나가는 크보의 빅매치 한국 특유의 응원문화가 인상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덤으로 허구연의 저녁식사에 초대됐다(...) 네이버의 매거진S에서 허민 구단주가 인터뷰를 했을 때 필 니크로와의 일화를 소개했는데, 필 니크로가 허민에게 너클볼을 가르치며 그를 '브라더'라 부르는데, 허민을 가르치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 조 니크로를 생각한다고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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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66년에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 [2] 출처는 EBS에서 방영된바 있는 EIDF 2012 스포츠 다큐멘터리 '너클볼!' 에서의 필 니크로 본인의 이야기
  • [3] 참고영상. 이게 정녕 마흔을 넘어 쉰을 코앞에 둔 사람이 던지는 공인가
  • [4] 조 니크로는 2006년 뇌동맥류로 세상을 떠났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