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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last modified: 2017-05-22 12:56:21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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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각뿔을 이르는 단어
2. 건축물의 한 양식
2.1. 이집트의 피라미드
2.1.1. 오해
2.1.2. 기원과 건축 양식의 발달
2.1.3. 피라미드의 몰락
2.1.4. 노동력 확보
2.1.5. 건설기술
2.1.6. 형상
2.1.7. 구조
2.1.8. 미스터리
2.1.9. 미스터리에 대한 반박
2.1.10. 기타사항
2.2.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
3. 사기 행위
4. 배틀스타 갤럭티카에 등장하는 구기종목
5. BEMANI 시리즈의 수록곡

1. 각뿔을 이르는 단어

서양에서는 흔히 피라미드라고 하면 밑면의 모양과 관계없이 다각형의 밑면과 삼각형의 옆면을 지니는 각뿔을 이르는 총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베르나르 베르베르개미에서도 정사면체(즉 삼각뿔)에 대해 피라미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2. 건축물의 한 양식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넓은 밑면과 하나의 정점으로 모이는 형태라는 공통점을 건축물을 이르는 총칭. 한자로는 뾰족한 모양이 한자의 금(金)자를 닮았다고 하여 금자탑(金字塔)이라고 부른다.[1] 대체로 사각뿔 형태의 것들이 많으나 사각형 외의 다각뿔 형태의 것들도 있으며, 때로는 원뿔에 가까운 형태의 것들도 피라미드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피라미드라고 하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야 문명의 치첸 이트사, 아즈텍미 문명들의 제단으로 쓰인 계단식 돌 피라미드(각 층의 위가 평평하다.)나 중국 고대 황제의 무덤, 고구려장군총 같은 무덤들도 피라미드이며, 넓게 보면 지구라트도 피라미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보스니아에 있는 거대한 흙 피라미드(산을 깎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나 요나구니 수중 유적 등 피라미드라고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사실 이런 보편적인 형태는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발생한다. 이렇게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형태는 무게중심이 아래로 몰리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인 형태인데, 고대의 대형 건축물들은 당시의 건축기술의 한계 때문에 붕괴되지 않고 높게 짓기 위해서는 높아질 수록 윗부분의 무게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고대의 대형 건물들의 상당수는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위키피디아피라미드 크기 비교. 엉뚱하게도 북한류경호텔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위키피디아에서는 고대 뿐 아니라 현대에 지어진 뿔 모양의 건물들도 피라미드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2]

2.1. 이집트의 피라미드


가운데가 제일 높아 보이지만 실은 맨 뒤의 피라미드가 제일 높은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 앞에서부터 멘카우레 부인들(3기) - 멘카우레 - 카프레 - 쿠푸 왕의 피라미드.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의 윗부분은 건축 초기의 매끈한 모습이 풍화나 석재 떼어가기를 견디고 아직 남아 있는 것. 여기에서 찍었단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고대로부터 매우 유명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물론 유럽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지만)로 꼽히기도 한다. 때문에 본 항목에서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관한 내용이 가장 비중이 높다. 다만 의외로 피라미드가 가장 많은 나라는 멕시코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엄청나게 크며,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모습이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석조 블럭들의 사이즈부터가 장난 아닌 수치인데다가 건축물의 수평 등이 매우 정밀해 찬탄을 자아내게 된다. 인상 자체가 매우 압도적이라 동시대의 이집트인은 물론이고, 주변 국가와 후대의 문명, 특히 유럽에 큰 영향을 남겼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되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파라오가 살 사후세계의 왕궁을 짓는다는 개념에서 만들어졌다. 즉, 기본적으로는 무덤으로 설계된 것이다. 지금은 거의 피라미드만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근처에 신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피라미드를 둘러싼 긴 벽 등이 존재했다.

이 피라미드들이 수천년 동안 보존된 것은 건축물에 있어서 치명적인 강수와 식물이 적은 환경에 위치해서다. 기자 고원에 위치한 이 고대 석조 건축물들은 미국 애리조나/네바다 주의 후버 댐에 이어서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가장 오래 보존 될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게다가 구조물 사이즈나 각 부재의 사이즈가 무식하게 커서 풍화를 상당히 오랫동안 견딜수 있었다. 실제로 벽돌로 지어진 초기 피라미드는 거대한 돌로 지어진 피라미드보다 보존 상태가 안좋다. 사실 맨 처음 지어질 때에는 저렇게 우둘투둘하지 않았으며 매끈하게 다듬은 화장석을 외장으로 사용하여 번쩍였다는데, 세월이 지나며 약한 외장은 떨어져 나가고, 때어내서 다른 곳에 써서 저렇게 거친 표면이 되었다.[3]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조차 후대 왕들이 건축 자재로 빼가는게 보통이었고 기자 3대 피라미드의 경우 카이로를 건설한답시고 돌을 빼갔다.

사실 원래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피라미드라 부르지 않고 메르(Mer)라고 불렀다. 하지만 기원 전부터 신화마저 이어져 있을 정도로 각별하게 가까운 사이였던 그리스의 관광객들이 본국에 돌아가 피라미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먹는 삼각형 모양의 과자인 피라미스에 비교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라 굳혀지게 된 것. 우리말로 하면 꼬깔콘인가 현재 이집트에서도 메르라는 이름은 잘 안 쓰는 분위기이며 현대 이집트 아랍어로 피라미드는 el-harram이라고 부른다.[4]

여담으로, 사실 피라미드에 가려서 그렇지 이집트의 석조 건축의 수준과 의의는 대단히 놀라운 수준이다. 원래 피라미드 주위에는 장례나 제사를 위한 신전과 부대시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한 긴 벽들이 세워졌는데, 신전 등에서도 돌기둥을 벽에 연결시킨 원시적인 구조부터 차근차근 발전해 벽에서 독립되어 세워진 돌기둥 등을 구현하는 등 석조 건축의 기본을 개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크레타 섬의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파르테논 신전 같은 것도, 이집트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1.1. 오해

워낙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대 인류의 솜씨가 아닌 더 이전 시기의 알려지지 않은 고도의 문명이 피라미드를 제작했다는 초고대문명설[5]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사실, 제대로 된 근거는 없는 설이다. 그 독특한 건축 스타일과 정교한 기술로 인해서 과연 이집트인들이 세운 것이 맞냐는 의혹에서 초고대문명설의 떡밥이 시작된다. 이런 떡밥이 존재하는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마야 등 곳곳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의 보편성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 교류가 없는 문화권끼리 비슷한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은 원형이 따로 있었지 않았겠냐는 것. 그러나 적어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초창기 마스타바부터의 발전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기둥의 자립과 아치도 모르던 건축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피라미드와 같은 삼각형 구조의 구조가 거대 건축물을 지을 거의 유일한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초고대문명설의 신뢰성은 한참 떨어진다.

정상적인 대다수 학자들은 이런 초고대문명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충분히 당대 이집트의 능력으로 피라미드의 건설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러싸여있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당장 지금은 사막밖에 없지만, 기원전의 북아프리카는 수목으로 울창한 비옥한 땅이었다. [6][7]성경에서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묘사가 있듯이, 당시 그곳에서는 농업도 굉장히 발달했다. (기후변화로 지금은 모두 사막으로 변했지만.) 게다가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초월적인 국력을 가진 나라였다. 매년 벌어지는 나일강의 범람 덕분에 기하학, 천문학, 측량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일강의 범람이 왜 기하학과 측량술에 영향을 주었냐면, 나일강이 한번 범람하면 새로운 흙으로 그 일대가 뒤덮이게 되는데 그러면 땅 소유주들은 땅의 어느 부분이 자기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것을 측량해 주는 전문가가 나서서 각 땅 소유주의 명확한 영토 크기를 알려주게 되는데, 이런 짓을 수천년간 반복하다 보니 측량 기술과 이에 필요한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것이었다.[8]

게다가 나일강의 범람은 해마다 일정한 주기로 계속되었는데 이때에 맞춰 대피하다보니 일년과 하루를 계산하는 것이 엄청나게 정확해 졌다. 일년은 공전주기이므로 일년을 계산하려면 천문학을 알아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천문학도 빠삭하게 되었다. 즉 이집트의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이집트 인들로 하여금 측량술, 기하학, 천문학의 전문가로 만든 것이었다. 덤으로, 나일강이 범람할때마다 새로운 흙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토질이 좋아져서 농사까지 잘됐다. 나일강이 범람하고 난 다음에는 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고대 이집트 번영의 이유로, 나일강의 범람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했고, 지금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하면서 놀라지만 땅 1헥타르만 틀려도 난리나는 땅 주인들에게 정확히 그들의 땅의 크기와 경계를 측정해 온 이집트의 측량사들에겐 이런 방위 계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걸 지을 기술력이 있을 리가 없다"라는 생각은 굉장히 오만하면서도 잘못된 생각이다.

게다가 현대에도 피라미드를 재현할 수 없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위의 류경호텔 등의 예가 있지만, 이미 현대인은 피라미드보다 훨씬 큰 건물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만들 기술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단지 할 이유가 없을 뿐. 그리고 고대 이집트 인들의 계단식 피라미드나 쿠푸왕의 피라미드 등에서 보이는 많은 시행착오와 설계변경, 하중을 견디지 못한 실패의 흔적들을 보면 너무도 완벽한 건물이란 인식은 다소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만의 오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고대 로마 시절 이집트로 단체 관광을 갔다와서 써놓은 수기를 읽어보면 관광지의 바가지, 추가 수수료를 요구하는 가이드에 대한 불평(이것 역시 현대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것이 "고대인들이 어떻게 저런 것을 지었지? 짱이다!" 라는 내용이다[9]. 참고로 로마 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피라미드는 이미 수백, 아니 수천년이 넘은 고대 유적이었다. 정말로. 한 예로 유명한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대략 기원전 2550년 즈음에 세워졌으며, 로마 공화정 말기(대략 기원전 1~2세기)를 기준으로 2400년이 지난 물건이다(...).[10] 쿠푸 피라미드와 클레오파트라 집권기[11] 사이의 시간 간격이 클레오파트라 집권기와 현대의 시간 간격보다 더 넓다.

2.1.2. 기원과 건축 양식의 발달

피라미드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개선되고 발전한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건축양식이다. 원래 이집트에는 마스타바[12]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을 지어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다. 완성된 양식의 피라미드의 거대한 돌과 달리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벽돌이었다.


▲ 이게 마스타바. 이하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조세르(Djoser)[13]라는 파라오 시대에 이르러 그 유명한 이모텝은 조세르의 마스타바를 공사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기게 된다. 당시 시대상으로는 파라오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그의 무덤을 공사해야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마스타바가 완성되어도 조세르는 멀정했던 것. 그래서 이모텝은 공사를 확장시키기 위해 마스타바 위에 작은 마스타바를 올리는 계단식 마스타바를 구상하고 실행한다. 이로써 마스타바는 다층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되었다. 심지어는 위로 층을 올리다가 그래도 빌어먹을 왕이 살아있자(파라오가 죽지않아) 옆으로 확장시킨 흔적도 보인다. 내부 구조 경우는 원래 지하에 석실이 있는 마스타바를 그대로 따라서 지하에 석실이 몰려있다.


▲ 이것이 계단식(스탭) 피라미드. 참고로 이 피라미드는 1992년에 일어난 지진때문에 붕괴 위기에 처해있다. 그로 인해 현재 수리중.

후대의 파라오인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매우 야심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만족하지 않았고, 영원히 기억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시도된 매끈한 삼각형 모양의 사각뿔 피라미드가 처음 시도되었다. 내부에 좁고 높은 계단식의 피라미드를 쌓고, 외부에 벽돌을 덧붙여 매끈하게 사각뿔로 마무리 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횡력에 취약한 작은 벽돌을 사용한 탓에 피라미드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전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지만 공사 도중에 외벽의 붕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실패작이 스네프루를 만족시킬리가 없었는지 결국 완성도 안되고 버려졌다. 당연히 이 피라미드에는 스네프루가 묻이지 않았다.


▲ 스네프루 왕의 무너진 피라미드

스네프루의 건축가들은 문제를 정확히 짚었고, 벽돌보다 크고 단단한 돌을 사용해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사 도중에 하중 때문에 돌에 금이 간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돌의 크기가 필요한 것보다 너무 작았고, 바닥 면적에 비해서 경사가 너무 급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주변에 돌을 더 쌓아 바닥 면적을 늘리고, 피라미드 높이의 절반 정도에서 경사를 확 낮춰 쉽게 마무리해버렸다. 물론 스네프루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 까라면 까야지...


▲ 스네프루 왕의 굴절 피라미드

결국 지금의 완성된 피라미드 수준의 거대한 석재를 사용하고, 처음부터 안정된 각도를 추구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피라미드의 형태를 만들고 만다. 그리고 내부에서도 엄청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천장 역시 역 계단식으로 쌓아 가장 상부의 하중이 벽으로 분산될 수 있게 하였다. 흡족한 스네프루는 아마도 이 안에 묻혔겠지만.. 미라가 없는 탓에 진실은 알 수 없다.


▲ 스네프루 왕의 붉은 피라미드

대를 이은 쿠푸 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보고는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두고 더 크게 지었는데, 그것이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다. 하지만 너무 큰 크기로 인해 내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돌이 금이가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처음으로 화강석을 왕이 안치되는 석실 천장으로 사용했는데, 계속해서 금이 가는 것을 보고 5중겹까지 쌓아서 겨우 하중분산을 시킬 수 있었다. 어쨌든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큰 이집트 피라미드이며, 7대 불가사의의 피라미드라면 이것을 말한다.


▲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

그래서 보통 최종적인 피라미드의 완성형은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라고 말한다. 이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는 좀 작지만, 내부가 안정되어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사용한 화강석 석실도 버렸다. 이렇게 해서 피라미드 건축 기술이 완성되었다. 특히 이 피라미드의 윗부분은 건축 초기의 매끈한 모습이 풍화나 석재 떼어가기를 견디고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직접 올라가본 관광객들말에 따르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맨위쪽의 석재를 도적질해갈 사람은 없을거이라고 할정도로 크다


▲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물론 이 외에도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많은 이집트 피라미드가 있으며, 사실 스네프루의 피라미드 이후에도 계단식 피라미드거나 마스타바를 만든 파라오들도 있다. 더 자세한 것들은 이것을 볼 것.

2.1.3. 피라미드의 몰락

이러한 피라미드는 한동안 무덤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훗날 고왕국이 쇠락하면서(제1 중간기)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는 당대의 기록을 볼 때 엄청난 사회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난 5천년중 최악의 가뭄이 닥쳐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을 구워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역병과 정치적 혼란은 덤. 이집트는 근 2백년간 혼란에 휩싸인다. 문명의 붕괴. 혼돈 파괴 망가 해당 시기에 대한 다큐를 여기서 볼 수 있다. 파트1 파트2 파트3[14]

덕분에 피라미드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의 축조가 어려워지고, 심지어 피라미드의 훼손까지 이루어졌다. 결국 중왕국시대에 이르면 단단한 석재대신 진흙벽돌로 속을 채우고 겉을 포장용 석회암으로 바른 짝퉁 피라미드가 쓰이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안전하지 않은건 마찬가지고, 더욱이 내부자재가 부실한 탓에 모두 침식되어버려 오늘날 남아있는 중왕국시대 피라미드들은 그냥 흙무더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 그나마도 중왕국 후기에 이르면 힉소스인의 침입도 그렇고 피라미드 만들 재력이 안되어서 그냥 바위산에 굴 파고 묻게 되었다.


▲ 12왕조시대 파라오인 아마넴헤트 3세(Amenemhet III)의 벽돌피라미드, 기자의 대 피라미드와 비교했을때 이게 더 옛날 피라미드로 보일만큼 상태가 나쁘다.[15] 아마넴헤트의 생존년도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저 벽돌피라미드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들 보다 적어도 800~900년 뒤에 건축된 구조물이다(...).

이집트가 다시 국력을 회복한 신왕국 시대에 와서도 기존의 피라미드 건축법을 잃어버린 데다가 정치적 상황도 변화하여, 수도가 고왕국 시대의 북부 이집트 멤피스에서 남부 이집트 테베로 옮겨오면서 최고신도 태양신 에서 창조신 아몬으로 바뀌게 되는 등, 피라미드를 건축할 이유도 사라졌기 때문에 왕의 시신은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매장했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도 피라미드가 아닌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오랜기간 그 존재가 비밀이었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됐는데, 유적 발굴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나 비밀이었지 이미 대부분이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2.1.4. 노동력 확보

헤로도투스노예 20만명을 동원해 지었다고 적었지만[16],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로는 노예가 아닌 홍수기의 농부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그 이유는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기간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이집트판 뉴딜정책이었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연히 이집트 국가는 수확기에는 세금으로 걷은 곡물을 비축했을 것이고,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업을 할 수 없게 되면 농부들은 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곡물을 농부들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냥 나눠주면 아깝지 않은가? 게다가 할 일이 없다고는 해도 놀면 뭐하나?

게다가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파라오를 신으로 여기고 있었고, 피라미드는 바로 그 파라오의 무덤이었다. 게다가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에게 보수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즉 영화에서처럼 채찍질을 하면서 피라미드 건설을 강요하는 장면은 없었으며, 피라미드 건설은 이집트판 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집트 민중의 파라오에 대한 신앙심과 존경심은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되었다. 자신들이 신의 무덤을 만든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추측도 있을 정도. 후기 왕조 시대에 들어서면 이러한 신앙심이 약해져 피라미드 같이 파라오 개인에게 헌사하는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된다. 다른 신들의 신전은 많이 지었지만.

또한 하인리히 야콥의 명저 '빵의 역사'에 의하면, 급료로서 빵과 술이 지급되었는데, 감독관이 이를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상의 '세계최초의 파업'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급료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시원한 그늘에 누워서 급료를 받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틴 것, 결국 그들은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줄 수 있었으면서 대체 왜 처음에는 안줬던거냐 지가 착복하려는거지. 대기업들의 시초인듯. 스테릭스 2 고증 쩌네요

참고로 이런 파업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시대에까지 계속되어서 지역 총독들이 이런 "지역특성"문제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언론인이자 학자인 리영희 교수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피라미드를 구경한 뒤 피라미드가 노예들이 아닌 자유민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설을 지지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근거는 '자유의지에 기반한 창조성 없이 피라미드와 같이 웅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수는 없다'는 것. 뭔 뻘소리냐 싶을수도 있지만, 사실 노예노동이라는 게 지극히 비효율적이라 몇십년씩 걸리는 대역사를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또 기회만 나면 땡땡이치고 대충 일하는 게 당연한 노예의 손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도 아주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일 수도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

현대에도 피라미드 주변을 보면 피라미드 건설에 자원했던 사람들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하며, 관리자급이나 기술자 들 뿐만 아니라 단순 노무자들의 무덤 역시 발견되고 있다. 이들 무덤들은 귀족들의 무덤이 아니기 때문에 도굴이 거의 되지 않아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중 노동자의 유골이 부러졌다가 나은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에 대해 일정수준 이상의 의료 혜택이 주어졌다는것을 뜻한다. 거기에 심하게 다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한 자국이 있는 유골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당시로는 매우 고급 의료혜택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독관, 요리장, 보수지급을 위한 회계사 등의 무덤도 발굴이 되었으며(무덤에 그들이 생전 했던 일에 대한 문자가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의 존재가 추측되기도 하고 있다.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는 소비에트 연방이 아니었던건가 피라미드 노동자들의 삶

또한 신성시되며 지고의 가치를 갖는 파라오의 무덤 근처에 노예나 강제노역을 당하는 평민들의 무덤을 놓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라 볼 때, 역시 당시 피라미드는 노예 등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어지지 않았다는 쪽이 유력하다.

또 시대에 따라서 규모와 건축기법이 약간씩 달라, 역사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다만 대다수가 모래 속에 파묻히거나 훼손되어서 자세히 알 수 없을 뿐이다.

2.1.5. 건설기술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장소는 거의 다 석회석이 많은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피라미드의 구조 대부분은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는건 이런 이유. 지금이야 피라미드에 의한 관광산업 때문에 피라미드 주변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어 있지만, 당시(4000년 전!)엔 외따로 떨어진 석회석 산지를 골라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회석경도는 2로 인간 손톱의 경도 2.5보다도 약하여 굉장히 가공하기 쉬웠으며, 쐐기등을 이용하여 쉽게 가공하였다. 그리고 내부는 석실은 화강암과 나무로 만들었는데, 화강암은 겉에 나타난 암석의 결에 따라 절개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채석장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중간에 나일강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나일강은 장애물은커녕 오히려 좋은 통로가 되어 주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전, 절개한 석재를 끈으로 묶고 그 것을 땟목 위에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면 그 땟목이 석재를 운반해 주면서 나일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몇 십만개가 넘는 석재를 운반한 기록도 있었다고 한다.

피라미드의 외벽을 구성하는 석회석 블럭 하나는 측정결과 보통 2톤 정도로 계산되며, 벽돌이나 흙을 이용하여 경사로를 만들고, 돌 밑에 둥근 나무를 깔고 끌어올리면 10명 내외로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대학 건축학과에서 5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3주일 만에 186개의 돌을 쌓아 8층짜리 피라미드를 만든 기록이 있다.본격 공밀레?
또한 피라미드를 쌓기 위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안쪽에 만들어서 서서히 외벽을 만들어 가면서 올라가는 구조로 만들면 훨씬 더 공기 단축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국내의 한 건축학자 겸 고고학자는 자신의 서적에서 기중기사용을 주장하였다. 기중기는 기존의 이론인 경사로에 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과 효율성인데 당시의 이집트인들이 이집트 특유의 단단한 나무를 이용하여 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했을 거라는 이론. 그 기중기이론에 의하면 3천명의 인원이 60여개의 기중기를 가지고 7년동안 작업하면 대피라미드 제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중기의 흔적은 나무가 재질인만큼 사용이 끝나면 흔적이 남지 않고 이집트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제작기술이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다.

피라미드 주변의 무덤이나 각종 자료에 의하면 1만명 미만의 주민들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돌 230만 여 개인 피라미드는 대충 7년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피라미드의 건설이 농한기에만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즉위하자 마자 건설되기 시작해서, 죽기 전에만 완공되면 되니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강암으로 일단 계단식으로 쌓은 뒤 맨 꼭대기에는 캡 스톤(피라미디온)이라 하여 사각뿔의 돌을 하나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도 석회석으로 반듯하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사각뿔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쿠푸왕의 피라미드 등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석회석이 일부 떨어져 나가 높이가 좀 줄었다.

2.1.6. 형상

세계 곳곳에 유사한 건물이 있는 것도 간단히 그 대답을 낼 수 있다. 피라미드 형태는 무게 분산에 유리하고 매우 안정적인 구조이며, 그래서 고대의 미숙한 건축기술로 거대한 건물을 만들려 한다면 피라미드 형태로 만드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의 진짜 입구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있는 입구는 일꾼 탈출용 입구를 완력으로 찾아낸 것이며, 석실도 진짜 석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1990년에 독일 고고학 연구소 팀이 환기갱이라 알려진 곳에 로봇을 투입하여 탐사를 했는데 그 안에 문이 또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대한 탐사는 이집트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정말로 비밀에 가득 찬 피라미드라는 설도 있으며, 혹은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설계 미스로 인해 석실을 끊임없이 증/개축 했다는 설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2011년 현재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도 기술력 부족으로 석실이 끊임없이 파손되는 부실건축물이였다는 후자의 입장이 정설이 된 지 오래다.

당장 석실에 7중겹의 천장을 올리고도 그 천장이 다 균열이 가서 반쯤 박살난 상태라는 것과 석실의 구조도 천장이 어긋나있고 기울어져 있는 등 영 어설프고, 상기한 일꾼 탈출용 통로가 사실은 그냥 잘못 만들어진 틈이라는 주장등에 의해 뒷받침 된다. 즉 칼같은 동서남북 방향과 별자리 등은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설계 미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

2.1.7. 구조


▲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의 구조인데, 사실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는 거의 제각각이다. 모든 피라미드가 이런 구조로 지어지지 않았다. 공통적인 것이라면 입구가 북극성을 향하도록 지었다는 정도.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가면 왕의 묘실이 있고 왕의 묘실 바로 아래에 왕비의 묘실이 있다. 하지만 왕의 묘실로 가려면 천장에 있는 통로를 통해서 가야 하며 이 통로를 마개로 막아 놓았다. 통로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기만 하면 막다른 곳으로 빠지는데 그 아래에 함정이 있다.

피라미드 내부의 통로는 극히 좁다. 건물 자체의 중량이 무지막지할 뿐더러, 하중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아치 등의 구조를 몰랐기 때문.

2.1.8. 미스터리

위에 상세하게 피라미드의 발전과정 및 쇠퇴에 대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온갖 괴이한 학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서는 미스터리에 대해 언급하고 비판은 몰아서 하겠다.

  • 에리히 폰 데니켄은 "신들의 전차"에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람들이 지은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니켄은 당시 이집트의 기술력과 인원동원 능력으로는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을 짓기는 무리이며 결국 피라미드를 세운 고도의 건축술과 각종 과학, 수학적 사항들이 외계인들에게서 온 것이라 주장했다.

  • 데니켄처럼 외계인 개입설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그레이엄 핸콕은 로버트 보발과 함께 한 연구에서 피라미드가 오리온 자리의 소위 "오시리스 벨트"의 위치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고, 정확하게 오리온 자리의 별의 위치와 피라미드의 위치가 들어맞는 시기를 추적해 피라미드가 2만여년 전에 건축된 것이라 주장했다.

  • 피라미드 형상에 일종의 파워가 존재한다는 피라미드 파워 이론. 피라미드 형상으로 만들어진 면도날 재생기라던가...

  • 특히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여전히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정말 왕의 무덤이 맞긴 하냐 는 것.

    이런 의문이 나오는 이유는 피라미드 내에서 '이건 왕의 무덤이다'라고 납득할 만한 증거물이 석관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왕의 방이니 왕비의 방이니 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이건 왕의 자리 같고 이건 왕비의 자리 같으니 왕의 방, 왕비의 방이라는 식으로 대충 끼워맞춰 붙인 이름에 더 가깝다. 실제로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는 제대로 된 유물도, 심지어 유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설사 유해가 죄다 썩어 없어졌다고 해도 '여기에 유해가 있었다'는 흔적 정도는 남는게 당연한데도.

    도굴돼서 없는거라는 말도 있는데, 역사 기록상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제일 먼저 파고 들어간 인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알 마아문이 피라미드에 들어갔을 때도 완전히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도굴당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알 마아문 본인이 도굴해놓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본래부터 비어있었다는 드립을 쳤다는 말도 있지만 도굴당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도굴꾼은 당연히 돈 되는 물건만 훔쳐가기 마련이며 돈 안 되는 잡다한 쪼가리 유물들은 처녀분이 아닌 도굴된 무덤에서도 발견되는 게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설사 싹쓸이를 했다고 해도 도굴 과정에서 반드시 뭔가는 부서지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남게 되어 있다. 한 예로 당신이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박살난 도자기나 토기 파편 이런 유물은 도굴꾼들이 무덤에서 깽판친 흔적(...)일 확률이 꽤나 높다.

    실제로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정체불명의 공간만 세 군데고,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아직 발견되지 못한 (유적과 유물이 있는) 진정한 왕의 자리가 있다는 설 심지어 피라미드 자체가 왕의 무덤이 아닌 무언가 다른 목적모델하우스으로 지은 거라는 설도 있지만 가설 단계일 뿐이다.빡친 고고학자:야!피라미드 다헐어!

2.1.9. 미스터리에 대한 반박

  • 초고대문명설이나 외계문명기원설 혹은 외계인 개입설은 앞서 설명한 내용만 봐도 충분히 논파된다. 사실 상단의 신비주의적 해석과 초고대문명설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매우 부족할뿐더러, 이러한 해석이 주로 근대 서구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것은 결국 위에서 서술했듯이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것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제국주의오만함에 의거한 오리엔탈리즘과도 통한다.
    결론적으로 할 일 없는 이집트수십만 명이 일년에 3 ~ 4개월씩 들여 20 ~ 30년 간 꾸물거리면 못 만들게 없다.

  • 피라미드 파워 운운하는 이야기는 전부 개소리다. 애초에 그런 파워가 있다면 이집트 파라오의 미이라가 엄청난 수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인가 아닌가에 대한 미스테리도 간단히 풀린다. 원래 이집트의 고왕국과 신왕국의 격차만 수천년이다. 이미 고왕국 중기를 넘어가면서부터 안털린 피라미드가 없는 판국에 수천년 이상의 시간이 추가로 흐른 다음인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따위가 왔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당장 사막 한가운데 거대하게 서 있는 피라미드에 흑심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사실, 도굴문제는 이집트의 왕과 왕족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는데, 자신들이 먼 훗날 영생할 때 필요한 자신의 신체인 미이라가 도굴과정에서 파손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미 고왕국 시대도 후기에 들어오면 피라미드중 도굴꾼에게 안털린 피라미드가 없었으며, 파라오의 주요 임무중 하나가 털린 피라미드를 수선하고 미이라를 수습하며 재봉인하는 것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 임무도 나름대로 돈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임무를 포기한 후, 아직 멀쩡하게 남은 미이라를 한 곳에 모아서 땅 속에 석실을 세우고 그냥 공동묘지처럼 묻어버렸는데, 아무런 부장품 없이 묻혔기 때문에 누구도 도굴하지 않아서 19세기 영국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외로 많은 수의 미이라가 현재도 박물관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미라를 한 곳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털린 피라미드를 싹 청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런 과정에서 나오는 부장품은 미라를 정리하는 비용이나 국가재정으로 썼다는 기록이 당당하게 남아있다. 애초에 이집트의 고왕국만 하더라도 왕조숫자가 십수개 이상이다. 당연히 왕조간에는 혈연관계가 별로 없고, 있더라도 신왕조 창립기념으로 구왕조와의 결별을 위해 피라미드 털어먹기는 국가급으로 행해졌다. 그래서 피라미드 자체는 털어먹을 것은 다 털어먹고 깨끗이 내부를 청소한 후 닫아놓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피라미드는 털려고 와봤자 아무것도 없으므로 누구도 털지 않았고, 손을 댄 사람들도 곧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고 그냥 철수한 것이다. 그래서 별 흔적이 남지도 않는 것이다. 당장 그렇게 비밀을 유지하고자 했던 왕가의 계곡도 싹쓸이되는 마당에 피라미드에 뭔가가 남을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여러번 언급했듯이 부실공사의 산물이다. 항상 이런 미스테리를 언급할 때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언급되는데, 부실공사의 산물이 건물 내부에 틈새가 많은 것은 당연하므로 미스터리의 소재가 되기 딱 좋다.[17] 당장 바로 옆에 있는 피라미드의 정점인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는 미스터리의 소재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2.1.10. 기타사항

사실 쿠푸 왕의 아들이었던 제데프레의 피라미드가 몇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 석재를 약탈해 가서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스핑크스도 카프레 왕의 얼굴을 본뜬 것이 아니라 쿠푸 왕을 기리기 위해 쿠푸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 진실. 카프레는 제데프레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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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것이 아니다. 기자 시의 외각에 있다[18].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도 매우 가깝다[19]. 카이로 공항에서 자동차타고 가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한다. 피라미드를 보려면 지하철 타고 기자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경주 왕릉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자 시내 피자헛 2층에서 피자먹으면서 보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정말 멋있다고 한다. 구글맵에서 다음 주소를 검색해보자.
Pizza Hut
1 Abou El Houl Sq.
Giza

구한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보빙사 일행들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유행이었던 피라미드 등반과 탐사는 하지 않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선비된 입장에서 남의 나라 국왕의 무덤을 밟고 올라가거나 들어가볼 수 있을 리가...

모 게임개발사에서는 모 게임을 하다가 "그냥 만들다 보니까 만들어졌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반쯤 맞는 말이다.

어느 트위터리안의 의견으로 T24 소셜 페스티벌을 보고 나서 피라미드는 100% 사람이 만든게 확실하다고 한다.출처

스타게이트에선 우주선 착륙장으로 나온다. 어째서인지 우주선도 피라미드 모양.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선 디셉티콘의 스타 하베스터가 피라미드다.

10000 B.C.에는 이집트인들이 이걸 BC10000년에 만드는 게 나온다.

2014년 여름에는 모 업체에서 하청으로 노예를 동원해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행패를 부리기에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2.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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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근교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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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동부 마야 문명치첸 이트사.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훨씬 더 유명하고 위 항목도 훨씬 더 길지만 사실 피라미드 갯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는 멕시코이다. 멕시코 중부부터 동부, 그리고 중미과테말라온두라스에 걸친 지역에 대부분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집트 피라미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덤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는 점. 아즈텍 제국을 비롯한 여러 중미 문명의 악명높은 인신공양이 피라미드 위에서 행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견도 있다. 제단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힘들지만 올라가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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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위 사진의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 멕시코시티 인근에 있어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며, 아쉽게도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아서콩라인 덜 유명하게 되어버렸다. 위에서 보듯 그늘 따위 없으니 올라가 볼 생각이라면 각오를 단단히 하자. 사진엔 계단에 그늘이 졌는데...?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재현된 피라미드들이 등장한다. 인신공양은 덤.

3. 사기 행위

불법 다단계 판매를 지칭하는 단어.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4. 배틀스타 갤럭티카에 등장하는 구기종목

배틀스타 갤럭티카에 나오는 스포츠, 꽤 인기있는 구기종목인데 경기모습이 잠깐잠깐 나오기는 하나 정확한 룰은 불명(혹시 아는사람 있으면 추가바람) 카라 트레이스가 예전에 했던적이 있는듯 하다.(극중 프로선수들과 연습경기하는신이 있음)

5. BEMANI 시리즈의 수록곡

팝픈뮤직에 수록된 永遠という名の媚薬의 장르명.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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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흔히 역사에 길이남는 것과 그러한 행동을 금자탑, 금자탑을 쌓다라고 하는데, 모두 피라미드에서 따온 말.
  • [2] 사실 저 이미지에서 류경호텔 말고도 Transamerica Pyramid와 더 샤드는 류경호텔처럼 뿔 모양을 한 현대 빌딩이고, Luxor Las Vegas Pyramid는 피라미드 형상을 한 라스베가스의 한 호텔이다.
  • [3] 위 사진을 보면 중간의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상부의 화장석 외장이 조금 남아있어서 다른 피라미드보다 그럭저럭 깔끔해보이는게 눈에 보인다.
  • [4] 근데 아랍어에서 '하람' 이라는 단어의 뜻은 '금지된', '허용되지 않은' 등의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피라미드가 파라오 시대 이후로 주민들에게 점차적으로 터부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할랄 참조.
  • [5] FPS 게임 시리어스 샘에서 이 설을 채택했다. 작중 등장하는 고대 이집트 문명은 멘탈을 피해 지구로 도망온 외계인들이 건설했다는 설정. 3편 BFE 본편을 진행하다 보면 이런 요소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 [6] 수목이 울창한 것 까진 아니고 수풀이 대부분을 덮고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사바나 지역이었다. 물론 모래사막에 비하면야 사바나라도 축복의 땅이다. 사바나에서는 인간이 자체적으로 생활을 영유 할 수 있다.
  • [7] 북아프리카의 사막화는 수백년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 고왕국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피라미드 짓고 한걸보면 그다지 큰 타격은 입지 않은 모양.
  • [8] 에초에 기하학(γεωμετρία, geometry)의 어원 자체가 땅(γεω, geo)+측정(μετρία, metria)의 그리스어 이다.
  • [9] 로마의 건축물도 멸망 후에 그 놀라운 건축기술 덕에 비슷한 말을 들은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 [10] 참고로 저 때 시베리아에는 아직 매머드가 살아있었다.
  • [11] 클레오파트라 시절 이집트가 로마 제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사망에 로마 집정관과의 염문설까지 개입되어 있는 만큼 로마인들의 피라미드에 대한 감상을 설명하는 본 문단에 클레오파트라를 집어넣는 건 결코 빗나간 예시가 아니다.
  • [12] 아랍어로 긴의자(벤치)라는 의미
  • [13] 사족으로 이 피라미드에서 조세르 파라오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팔한짝만 있었다.(...)
  • [14] 자막에서는 Old Kingdom을 '고대 왕국', '옛 왕국', '고대 이집트 왕국' 등으로 오역하고 있으나 이는 '고왕국'을 뜻한다.
  • [15] 뭐, 이 사람은 기세좋게 12왕조 세우고 난 뒤에는 이혼당하고 암살위협에 시달리다 일찍 사망한 왕이니.....
  • [16] 사실, 노예 20만명설 자체가 실질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이야기인 것이, 이집트의 인구는 톨레마이오스조 시대와 와도 100만명 정도였다.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는 인구가 더 적었을 것이 분명한데, 인구의 20% 이상이 노예인 사회가 존속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 [17] 단 이 점에 대해 이견이 있는데 부실 공사라기 부단 단순히 오래되서 갈라진 틈이라는 의견도 있다.
  • [18] 정확히 말하자면 피라미드 바로 앞이 시가지다. 피라미드는 이미 몇천년 전부터 관광명소라서 그 근처를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했다.
  • [19] 많은 이집트인들은 아예 기자를 카이로의 위성도시쯤으로 취급할 정도로 가깝다. 카이로에서 기자까지는 약 6km으로, 서울역에서 노량진역 사이의 거리와 비슷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즉 이집트 입장에서 기자는 수도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