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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위 리즈

last modified: 2015-04-13 21:03:10 Contributors

선수시절

말년의 모습

이름 해롤드 헨리 리즈(Harold Henry Reese)
생몰일자 1918년 7월 23일~1999년 8월 14일
국적 미국
출신지 켄터키주 에크론
포지션 유격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38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자유계약
소속팀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40~1958)[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영구결번
No.1

"피 위는 나의 어린시절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뛰는 것을 실현시켜주었다. 피 위가 재키 로빈슨에게 어깨동무한 순간 모든 니그로리그의 선수들은 웃으며 처음으로 백인우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내가 브루클린에 왔을때 나는 피 위에게 가서 말했다. '흑인들은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재키에게 다가갔을때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 것이다. 당신의 유니폼에 있는 넘버 1은 우리 마음속의 넘버 1이다.'" - 1999년, 그의 장례식장에서 흑인 메이저리거 였던 조 블랙(Joe Black)[2] 의 헌정사.

"필드에서 재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 사람들이 그걸 보면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알테고, 그러면 재키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어." - 재키 로빈슨에게 어께동무를 한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묻는 인터뷰 중에서.

"You can hate a man for many reasons. Color is not one of them."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고작 피부색 따위여서는 안된다."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케이블 전기 기사, 메이저리거가 되다
2.2. 다저스의 레전드 유격수가 되다.
2.3. 선수 은퇴후
3.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 맨
4. 기타


1. 소개


시대를 앞서나간 선구자, 인격자, 휴머니스트

메이저리그의 전(前) 야구선수. 본명은 Harold Henry Reese이지만 Pee Wee Reese라는 이름으로 훨씬 유명하다.[3] 늦깍이로 야구를 시작해 브루클린 다저스의 전성시대를 이끈 명 유격수로 이름을 날린 선수이며, 훗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그리고 출중한 야구실력뿐만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포용력을 가졌던 사람.

2. 생애

2.1. 케이블 전기 기사, 메이저리거가 되다

1918년 미국 켄터키 주 에크론(Ekron)에서 태어났다. 그는 8살이 되던 해에 루이빌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인종차별주의가 극에 달했던 동네중 하나였다. 그는 듀폰 메뉴얼 고등학교(duPont Manual High School)에 재학했으며 고등학교 3학년때 비로소 야구를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내내 몸무게는 불과 54kg에 불과할 정도로 빈약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 선수시절 6경기를 2루수로 출전했던 것을 제외하면 출전 기회가 거의 없었다. 1937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루이빌 전화회사(Louisville phone company)에 케이블 기사로 일을 했고 쉬는 날에는 교회팀들이 주축인 리그에서 사회인 야구를 즐겼다.

교회 리그에서 뛰던 시절, 리그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후, 마이너리그팀인 루이빌 커널스(Louisville Colonels)[4]와 맞붙었는데 이날 경기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했고 리즈의 활약을 지켜본 루이빌 커널스의 구단주인 캡 닐이 영입 제안을 해왔고 계약금 200달러에 루이빌 커널스에 입단했다.

루이빌 커널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피 위 리즈

1938년, 루이빌 커널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마이너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기 시작했던 피 위 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빌리 에반스가 당시 레드삭스의 주전 유격수였던 조 크로닌(Joe Cronin)를 위해 1939년 7월 18일, 당시 루이빌 커널스의 메이저 팀이었던 브루클린 다저스에게 35,000달러와 피 위 리즈를 포함한 4명의 선수를 보내고 투수 한명을 받아 왔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트레이드 중 하나로 손꼽힌다.

2.2. 다저스의 레전드 유격수가 되다.


1940년,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시즌 첫해 뒷꿈치 부상으로 84경기만 출장했지만 .272 5홈런 15도루를 기록하며 데뷔 첫해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이듬해인 1941년부터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194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와의 맞대결을 펼쳤는데 .200의 타율, 4경기 3실책이라는 안습한 성적으로 결국 준우승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7년, 1949년에는 각각 12홈런 104타점, 16홈런 116타점을 올리며 뜨거운 방망이를 가동하기도 했고 타율도 꾸준히 2할 6푼 이상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스탯을 보였다.

무려 47에러를 기록한 시즌도 있긴 하지만 통산 레인지팩터가 4.94에 이르는 좋은 유격수였다. 그러나 컨택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통산 타율은 .269에 그치나 대신 뛰어난 선구안으로 통산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타자이다. 하지만 통산 타율 .269에 2000안타(정확히는 2170)를 겨우 때려낸 성적만 보자면 유격수라는 점을 감안해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기자단 투표로는 가지 못했다. 대신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1984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니 뭐.

다만, 피 위 리즈의 통산 WAR는 66.2(bWAR)[5]로 이것은 인성이나 아래의 에피소드와는 전혀 상관없이 성적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유격수 루 보드로의 통산 WAR 63.0이나 어니 뱅크스의 통산 WAR 67.6, 루이스 아파리시오의 통산 WAR 55.7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게 없다. 또한 올스타전 명단에 10번이나 뽑힌 적이 있었으며, 그가 뛰었던 1940년~1958년까지 피위리즈보다 많은 안타를 기록한 타자는 단 4명뿐이었고 볼넷을 많이 얻은 타자는 3명 뿐이며 도루를 많이 한 선수는 1명뿐인 것만 보더라도 당대 최고의 유격수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피 위 리즈는 2차대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선수로서의 전성기 3년을 그냥 보냈다.[6] 만약 이 시절에도 선수로 뛰었다면 WAR는 70이상, 2500안타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후대의 선수들과 통산성적으로 비교할 때는 이 점도 감안해야 한다. 사실 이 때문에 2차대전에 참전한 선수들은 모두 통산기록에서 좀 손해를 봤다.

선수시절 7번의 월드시리즈 진출로 비양키즈 소속 선수 중에서 월드시리즈를 가장 많이 경험한 선수다.

2.3. 선수 은퇴후

1958년을 끝으로 선수를 은퇴한후, 1959년에 코치로 전향을 했었고 그의 생에 첫 월드시리즈 반지를 이때 껴보게 된다.

당시 사진

당시 모습을 본따 만든 피규어

여담으로 1959년,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이 캄파넬라(Roy Campanella)[7] 를 위해 구단측에서 준비한 "로이 캄파넬라의 밤"행사에서 그의 휠체어를 끌고 그라운드로 데리고 나온 이도 당시 코치였던 피 위 로즈였다.김형중 칼럼 참조

이후 방송에서 야구 해설을 중계했고, 루이빌에서 작은 야구업체를 운영했다. 그러다 전립선 암과 폐암을 앓게 되었고 1999년 8월 14일, 메이저리그와 미국에 커다란 경종을 울린 작은 영웅이 그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현재 그의 묘소는 루이빌에 있는 REST HAVEN 기념 공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유격수 겸 캡틴 1940 - 1957
SHORTSTOP & CAPTAIN OF BROOKLYN DODGERS 1940 - 1957
U.S. 해군 1943 - 1945
U.S. NAVY 1943 - 1945
이 주의 TV 중계 경기(해설자) 1960 - 1971
ANNOUNCED TV GAME OF THE WEEK 1960 - 1971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 1984
ELECTED BASEBALL HALL OF FAME 1984
그의 리더쉽은 다저스가 이뤄낸 7번의 페넌트 레이스 우승[8]에 기여했고,
HIS LEADERSHIP HELPED WIN 7 DODGERS PENNANTS
그는 메이저리그가 첫 흑인 야구선수를 받아 들이는데 동의한 인물이었다.
HE EASED THE ACCEPTANCE OF BASEBALL'S FIRST BLACK PLAYER INTO THE MAJOR LEAGUE.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온화한 사람이었다.
HE WAS A LOVED AND GENTLE MAN


HAROLD "Pee Wee"
JULY 23.1918
AUG 14. 1999

3.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 맨

Pee-wee는 '키가 매우 작은', '하찮은' 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9] 하지만 그런 이름을 달고 있었음에도, 그는 당대의 그 누구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간이라는걸 스스로 인증한 대단한 사나이다. 바로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과의 일화 때문이다.

군 복무 시절 휴 케이시(Hugh Casey)와 피 위 리즈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했고 피 위리즈는 당시 군복무 중[10]에 그 소식을 들었는데 재키로빈슨이 "흑인이냐 아니냐"를 궁금해 한것이 아닌 "재키 로빈슨이 그로리그에서 얼만큼 활약을 했고 나와 같은 포지션이냐"라는 것이었다. 물론, 니그로 리그에서 유격수로 뛴 재키 로빈슨은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그와 경쟁을 하지는 않았다.

1947년 5월 14일, 브루클린 다저스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경기를 위해 경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어서 브루클린 다저스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도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흑인 선수가 나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은 극도로 분노해서 협박편지들을 구단과 재키 로빈슨에게 보냈다. 그 협박 편지들은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만약 니가 경기를 하러 크로슬리 필드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우린 널 죽여버릴꺼야." 그리고 경기 시작전, 경기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살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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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크로슬리 필드

그리고 당시 레즈의 홈구장인 크로슬리 필드를 찾은 6,688명의 관중은 재키 로빈슨이 필드에 나서는 순간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고, 곧 이어 니그로[11]라는 말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상대팀인 신시내티 레즈 선수들마저 재키 로빈슨에 대한 폭언을 퍼부으며 경기를 거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재키 로빈슨의 전기영화 42에서의 장면

경기장 내부의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을 무렵 당 경기에 유격수로 출전한 피 위 리즈[12]가 자기 자리를 떠나 1루수 재키 로빈슨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는 글러브를 벗더니 6천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재키 로빈슨을 끌어안았다. 둘은 가볍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고, 야만적 분위기에 휩싸였던 크로슬리 필드는 한순간 얼음물을 끼얹은듯 정적에 휩싸였다.

경기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속개되었고, 재키 로빈슨은 4타수 2안타, 피 위 리즈는 2타수 1안타 1볼넷의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다저스는 레즈의 이웰 블랙웰에게 0:2로 완봉패 당했다. 그러나 이 날은 메이저리그미국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수만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인 피 위 리즈가 흑인 재키 로빈슨을 끌어안은 이 사건은 미국전체에 대단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피 위 리즈는 당시 노골적인 인종차별정책을 펴던 켄터키주의 중심도시 루이빌 출신이였다. 결국 재키 로빈슨을 야구계 전체가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수많은 흑인선수들이 야구계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대신 피 위 리즈는 나중에 고향인 루이빌에서 이 일에 대한 항의에 시달리게 된다. 꼴통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이분이 없었다면 행크 아론도, 배리 본즈도, 기타 수많은 흑인 스타들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예 없었다는건 좀 오바라고는 해도 최소 몇십년은 늦춰졌을거다.[13] 사실 그가 로빈슨에게 처음부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로빈슨 입단시 '그가 내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훌륭하다면 그건 별로 달갑지 않지만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럴 자격은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 하지만 그것은 선수의 입장에서 포지션에 대한 자존심이지 인종적인 부분은 전혀 아니었단 점과[14] 그의 의식과 행동이 이후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피 위 리즈는 죽을때까지 서재에 자신과 재키 로빈슨이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뒀다고 한다. 인종차별이 횡횡하던 살벌한 사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영웅이라고나 할까.

Keyspan park에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13년에 개봉하는 재키 로빈슨 전기영화인 '42'의 홍보 포스터 중 하나도 위 일화를 소재로 제작되었다.

참고로 NBA는 1950년 데뷔한 얼 로드가 최초의 흑인선수이다. 하지만 실제로 흑인선수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건 1970년대 이후. 대학농구 NCAA도 마찬가지로 60년대 초반까지 흑인이 출전하면 상대팀이 경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흑인이 농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건 사상 최초로 주전 전원을 흑인으로 세운 텍사스 주립대학이 1966년 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다. 이 실화를 다룬 영화가 2006년작 글로리로드(Glory Road).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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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군입대로 빠졌다.
  • [2] 1924~2002. 볼티모어 엘리트 자이언츠라는 니그로리그 팀에서 뛰었으며 재키 로빈슨이 인종의 벽을 깨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자, 1952년 5월 1일에 브루클린에 입단한 흑인 투수. 이후 신시네티 레즈와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잠깐 활약한후 1958년에 은퇴했다.
  • [3] Pee Wee는 "땅꼬마"라는 애칭으로, 그가 어렸을때 몸집이 왜소했던 것때문에 붙여졌던 별명이다.
  • [4] 1901년~1962년, 1968년 ~ 1972년까지 존속했던 팀으로, 1945년까지는 더블 A소속, 이후 1946년부터 해체될때까지 트리플 A소속으로 뛴 팀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제휴기간이 가장 길었던 팀이었다.(1939년~1955년, 1968년~1972년)
  • [5] 참고로 역대 다저스 통산 WAR 2위에 해당한다. 1위는 돈 드라이스데일의 67.1.
  • [6] 24살부터 26살까지. 참전 직전해에도 올스타에 뽑혔고, 전역한 직후에도 올스타에 뽑혔으니 그야말로 전성기 시절이다.
  • [7] 1921년~1993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번째 흑인포수 였으며, 3차례 리그 MVP를 수상한 당대 최고의 포수이기도 했다. 1958년, 시즌이 시작되기전인 1월 28일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전신마비가 되었으나 불굴의 의지로 사고를 당한후 이를 악문 재활훈련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는 35년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남긴후 1993년 세상을 떠났다.
  • [8] 1941년, 1947년, 1949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6년.
  • [9] 그는 어릴적 덩치가 작아 pee-wee(땅꼬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이름처럼 고유명사가 되버렸고.
  • [10] 당시 전역을 앞둔 년 병장이었다. 1947시즌이 시작되기전 전역해서 곧바로 팀에 합류했다.
  • [11] 단, 현재의 Negro는 '검둥이'정도의 경멸적인 표현이지만 당시 1940년대의 니그로는 어느정도는 학술적 용어로서 중립적인 뜻으로 쓰이는 단어였다. 현재의 욕설로 굳어진 것은 1960년대 이후. 물론 저 사건에선 욕설로 쓰였겠지만... 참고로 그보다 더한 것은 Nigger로 '망할 깜디 노예 새끼' 정도의 어감이 된다. 이걸 일명 'N' word라고 하는데, 흑인에게 이런 말을 해도 용서받는건 말하는 사람이 흑인이거나, 둘이 진짜 친할때뿐이다. 절대로 흑인 앞에선 사석이던 공공장소던 이 표현들을 사용하지 말길 바란다. 참고로 한국어의 '니가'라거나 '니 꺼'라고 할 때(정확히는, 이 경우는 원래는 '네'라고 발음해야 하는데, 현대인들이 ㅐ와 ㅔ의 구분에 둔한 탓이 더 원인이지만) 발음이 딱 그대로 나오니 근처에 흑인들이 있다 싶으면 그냥 쓰지를 마라.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총 맞는다. 좀 더 자세한 것은 니그로 항목 참고.
  • [12] 재키 로빈슨의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해당 경기에선 1루수로 출전했다. 경기 전 벌어졌거나, 타임이 불릴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나보다. 경기 도중 유격수가 1루수 옆에 갈 일은 거의 없으니까. 재키 로빈슨의 전기영화 42에서는 경기시작전에 야유가 쏟아져, 캐치볼을 하던 도중에 어께동무를 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 [13] 야구계가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미국 메이저리그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런 메이저리그가 미국내 다른 스포츠보다 빨리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게 된데는 바로 이런 사람이 있어서다.
  • [14]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실력이 우선한다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상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처음 만난 호적수를 그 자리에서 바로 좋아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 [15] 전기영화인 42에서는 피위 리즈가 "아마 내일은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