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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last modified: 2017-12-11 01:07:33 Contributors

Contents

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2. 프로이센 왕국의 왕


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194년 ~ 1250년

시칠리아 왕: 1198년 ~ 1250년
독일인의 왕 : 1212년 ~ 1250년
신성로마 황제 : 1220년 ~ 125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이자 하인리히 6세의 아들.

네 살때 아버지 하인리히 6세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왕(1198)으로 등극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후견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1212년, 마인츠에서 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슈타우펜 왕조(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립하고 있던 벨프가의 오토 4세(당시 신성로마황제)의 대립왕으로 등극했다. 1215년, 오토 4세가 죽었고 1220년 황제가 되었다.

교황권의 절정기였던 인노켄티우스 3세 시절이었던 탓에 프리드리히 2세는 오랫동안 교황과 마찰을 빚어왔던 서임권을 사실상 교황에게 모두 양도하고 맏아들인 하인리히를 독일왕으로 만들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성속 영주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영방국가 체제 발전의 길을 열었다.

즉위식 당시 칙령을 통해 '이단들을 처벌해서 화형을 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이를 두고 중세 말부터 시작한 종교재판의 광풍의 계기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인노켄티우스 3세가 사망한 후,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법에 의한 절대정치를 시행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류하였고 알 카밀에게 천체 관측기를 선물로 받을 만큼 이슬람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122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십자군 전쟁을 지시하여 어쩔 수 없이 프리드리히 2세는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나 병사들 사이에 장티푸스가 퍼졌고 황제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파문을 선언해버렸다.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 2세는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은 없었고 외교를 통해 원만히 예루살렘을 확보하려 하여 아이유브 왕조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한 끝에 성전산에 대한 이슬람교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데 성공하여 1228년, 예루살렘왕에 등극했다.

귀국 후 이슬람교와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격렬히 분노한 교황과 교황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킨 아들 하인리히와 전쟁을 치루게 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인리히를 폐위하고[1] 둘째 아들 콘라트를 독일왕에 앉히게 된다.

이후 교황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1235년에는 마인츠에서 치안법령을 공포했고 롬바르디아 동맹[2]을 쳐부실 결의를 하였다.1241년 8월에 그레고리우스 9세가 죽자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 2명을 포로로 잡아 교황을 뽑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이 무렵, 몽골군이 동유럽을 간단하게 휩쓸고 헝가리까지 쳐들어오자 급히 기독교 제후들 및 사이가 안좋던 교회와 협력하여 십자군을 편성해 방어선을 마련하였다. 다행히 1242년 오고타이의 죽음을 안 몽골군이 회군했기 때문에 한숨 돌리게 되었다.

1243년 2년간의 공백 끝에 새로 뽑힌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다시 황제와 항쟁을 할 조짐을 보이자 롬바르디아의 겔프당과 치열한 전쟁을 펼친 끝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켜버렸다. 그러나 인노켄티우스 4세는 1245년 리용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파문시켰고 주종관계를 해산한다고 선포하여 독일 제후들의 반란을 선동했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반란을 일어나기도 했으나 양치기 소년도 아니고 계속된 파문과 복권에 질린 독일 제후들은 교황권의 신장도 바라지 않았고 프랑스 왕 루이 9세도 프리드리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생각외로 황권에 위협은 되지 못했다. 1248년엔 르마에서 일어난 반란과 서자 엔조가 볼로냐에서 포로로 붙잡히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교황도 황제도 자금이 부족하고 북이탈리아의 제후들도 격파되기 시작하여 결국 양측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중재로 다시 화해를 하였다. 이후 1250년 시칠리아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죽음에 교황과 겔프파는 크게 안도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기벨린파(황제파)는 크게 약화 되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위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그의 적자와 서자들이 모두 남계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다.

중세 시대를 산 사람이라고 하기엔 보기 드물게 시대를 매우 앞서간 인물로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무슬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 "최초의 계몽군주"라 부르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정신은 독일의 통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에도 일부 계승된 적이 있다.

아기의 언어에 대한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각국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상황에서, 인간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으면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알고싶어한 것. 갓난아기를 모은 후 유모들에게 젖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되 절대로 말을 걸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 본인은 아기들이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히브리어를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지만, 아기들은 다들 오래 가지 못해 죽었다고 한다. 아기를 키우는데 사랑과 스킨쉽이 필수라고 인용되는 이야기. 다만 이 실험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판본에 따라 이 실험을 명한 것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란 말도 있고, 아기들이 사용할 것이라고 예상한 언어가 라틴어라는 말도 있다.

프리드리히2세.png
[PNG image (Unknown)]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징기스칸 4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어쩐 일인지 지모가 100이다! (정치 62, 전투 74) 전 무장 중 지모 최고치를 자랑하는데 예루살렘 무혈 입성이나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란 평가 때문에 이런 고평가를 받은 듯. 하지만 행적을 보면 지모 고득점까지야 그렇다 쳐도 최고치를 줄 만한 인물인지는... 파워업키트에 추가된 시나리오 3 '늑대 무리들의 포효'에서는 가히 유럽 최강 세력이자 몽골제국의 대항마. 오프닝 이벤트에서 교황과의 대립이 묘사되고 있다. 플스판에서는 지모가 96으로 떨어졌다.

남긴 명언으로는
Wer alles verteidigt verteidigt nichts.
모든 것을 지키려는 자는 어떤 것도 지키지 못한다.
...가 있다.

2. 프로이센 왕국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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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나중에 하인리히는 유배지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저 죽었는데 자살이라는 말도 있다.
  • [2] 북이탈리아 밀라노와 볼로냐,모데나 등 주변 지역의 대도시들과 제후들이 연합해 교황을 지지하며 황제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다.나중에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참가했으며 겔프파(교황파)의 본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