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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페르디난트

last modified: 2015-10-22 18:16:35 Contributors

이 인물에서 이름을 따온 스코틀랜드록밴드프란츠 퍼디난드 항목으로.

Franz Ferdinand (1863년 12월 18일 ~ 1914년 6월 28일)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결혼 논란
2.2. 정치 사상
3. 암살
4. 프란츠의 자녀들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통 계승자. 작위는 대공.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당긴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863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1830~1916, 재위 1848.12~1916.11)의 둘째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1833~1896) 대공의 세 아들 중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는 이미 1858년에 태어난 아들 루돌프(1858~1889) 황태자가 후계자로 있었고, 아직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맏동생 막시밀리안(1832~1867)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날 당시는 황제의 후계자로서는 그다지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친모인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결핵으로 프란츠가 8세 때 사망하였으며 이후카를 루트비히와 재혼한 계모인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1]가 프란츠를 양육했다.

1875년, 합스부르크가의 분가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모데나 가문의 핏줄이 끊기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모데나 가문의 상속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엄청난 부자가 된다.

그런데 루돌프 황태자가 1889년 1월 권총 자살한 사건 이후 그의 인생은 송두리채 바뀌게 된다. 황제의 맏동생 막시밀리안은 후손도 남기지 않고 이미 멕시코에서 처형된지 오래였기 때문에[2] 그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일약 후계자로 격상된 것이다. 그 후 189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3] 맏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태자로 낙점 되었다.

그러나 동복아우 오토(1865~1900)가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독일 작센 가문의 공주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한 것과 반대로 그는 황실의 중매를 번번히 거절하였다.

2.1. 결혼 논란

1898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른 분가인 테셴 가문의 프리드리히 대공 저택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대공비 이자벨라는 자신의 많은 딸 중에서 하나가 황태자비로 선택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신붓감은 바로 그들의 시녀에 불과한 조피 폰 초테크였다.

이 선택은 당연히 황실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피 또한 명색이 백작 가문의 영애로 아주 미천한 신분은 아니었지만, 이 당시 '통치가문'과 백작 정도의 '귀족가문' 사이에는 격의 차이가 컸다.[4]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는 이 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조피와의 결혼을 고집하자, 결혼을 결사 반대하던 황제와 황태자 사이에는 극심한 반목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귀천상혼을 이유로 그의 황위계승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귀천상혼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사례는 왕왕 존재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큰오빠 또한 귀천상혼을 이유로 계승권을 포기했었고, 따라서 그 작위는 둘째가 이었다. 하지만 이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황실의 스캔들에 대한 여론이 뒤숭숭한 마당에 또다른 황위계승자가 계승권을 박탈당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여론의 비난이 거세질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조피 폰 초테크와 그들의 자녀는 황실에서 지독한 냉대를 받았다.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조피 폰 초테크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단지 황제가 수여한 호헨베르크 여공작이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그들의 자녀[5] 또한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조피는 결코 공식 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 없었으며,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먼 대공녀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했다. 심지어 결혼식 때는 명색이 황태자의 결혼식인데도, 프란츠 요제프 황제 본인은 물론 황실 인사들이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친딸이자 프란츠의 이복 여동생 2명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여담으로 황실 인사 중 프란츠의 결혼을 지지한 사람도 오직 마리아 테레지아 뿐이었다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그런 아내의 서열을 올려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조피를 당당한 자신의 아내로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1914년 사라예보 방문 때 아내인 대공비를 대동한 것도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세워주고자 한 배려였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최악으로 끝났다.

2.2. 정치 사상

페르디난트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보수적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자주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6년 대(大)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제창하여[6] 민족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였다.

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만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 제국 내의 각 '민족'을 각각의 거주지 단위로 자치구를 만들어 '분리'하고, '합스부르크 황실'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서 통합적인 국가로 만드는 연방제 구상이었다.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이 자치권을 가지면서 연방으로서 오스트리아와 합동하게 된다는 자뭇 이상적인 구상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 체제에서 권익을 가졌던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이 불리했기 때문에[7] 기존 권력자들, 특히 헝가리 정계와의 반목이 극심했다. 헝가리 총리는 대놓고 황태자가 제위를 이은 뒤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며 명목상 황제가 지휘하는 '공동군' 외에도 미국의 주방위군처럼 독자적인 '방위군'을 유지하고 이는 각각 오스트리아 총리, 헝가리 총리의 지휘를 받았다. 이 때문에 헝가리 총리가 황태자에게 뻗댈 수 있었던 것.

이런 점도 황태자 부부가 황실과 정계에서 냉대를 받은 이유 중 하나였지만, 바로 이러한 개혁 성향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는데 황태자의 개혁이 성공하면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남 슬라브인(유고슬라비아)들도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게 되어, 굳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은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 수 있겠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현대 일본의 나루히토 황태자마냥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아주 뚜렷한 인물이었다.(심지어 결혼 문제로 제도권과 갈등을 빚는 것까지 닮았다) 이 성향은 오스트리아의 보수적인 정치세계에서는 크나큰 감점 요인이라서 황태자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정계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황태자가 꾸린 예비 내각만 보더라도 기성 정치권에서 소외된 슬라브 출신이 많았다.아웃사이더끼리의 모임

하지만 평화 유지에 대한 강력한 소신[8], 불평등한 국가 구조의 혁신에 대한 정치적 신념, 오스트리아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개선, 귀천상혼 같은 개념은 내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한 결혼 등 여러 모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서유럽의 보다 개방적인 가문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면 여러 모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2대 국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의 황족으로 태어난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3. 암살

갈등이 점점 깊어가고 그런 가운데 황제의 노쇠가 뚜렷해지던 1914년 6월, 황태자 부부는 육군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한창 민족주의의 열기가 들끓고 있던 보스니아로 향했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시가지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던 그들은 보스니아 출신의 광신적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단체 검은 손의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하여 저격당하였다. 이것은 일명 사라예보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에서도 잠깐 지나가듯이 등장하는 사건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저격당하자 죽어가면서 부인에게 '조피, 죽지마!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 라고 외쳤지만 조피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들의 죽음은 정확히 1개월 뒤 불이 당겨진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조피는 죽어서까지 황실에게 푸대접받았다. 황태자 부부의 장례식은 합동으로 치뤄졌지만 그녀의 관은 남편보다 15인치 가량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했고, 그 위에는 시녀를 상징하는 장갑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는 그의 장남 막시밀리안이 아니라 조카인 카를 1세였다. 귀천상혼으로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려고 모인 단원은 7명이었는데, 그 중 단 두 명만이 시도했고, 한 명이 성공시켰다. 그 한 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최후 위치. 한 마디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실패했더라면 그냥 그 날 황태자는 무사하게 살았을 것이고, 어쩌면 1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더라도 늦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살 성공에 대해서도 이보다 재수가 없을 수 없던 것이, 처음으로 암살을 시도한 네델코 차브리노비치(Недељко Чабриновић)가 투척한 폭탄에 피해를 입은 수행자 에리크 폰 메리치 중령을 보려고 암살 시도 후 진로를 바꿔 병원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이걸 기사에게 이야기 안했다! 덕택에 갈림길에서 지나쳐 버린 기사는 후진했는데 마침 후진한 곳이 바로 프린치프 정면(...)

더더욱 운이 없었던 사실은 당시에 이미 방탄복이 개발되어# 프란츠 페르디난트 역시 암살에 대비해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단 사실이다. 그가 입은 방탄조끼는 폴란드인이었던 카지미에시 제글렌(Kazimierz Żegleń)이 만든 것으로 제글렌과 방탄복을 공동개발한 얀 슈체파니크(Jan Szczepanik)가 만든 방탄조끼는 1901년에 이미 알폰소 13세의 목숨을 살린 바 있다. 암살범의 총이 380ACP를 쓰는 것이어서 방탄조끼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총탄은 방탄조끼가 아니라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명중해 경동맥을 끊어버렸다(...)

다만 프린치프는 조피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같이 있던 보스니아 총독인 오스카르 포티오렉 (Oskar Potiorek/1853~1933) 장군을 암살할 생각이었기에 조피의 죽음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했다. 겨우 목숨을 구한 장군은 황태자 내외 암살을 막지 못한 것에 계속 괴로워했고, 이 후 술에 의존하다가 1차대전 패배 후 보스니아 총독 및 군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삶을 마무리한다.

황태자는 죽어가면서도 아내를 부르며 "당신만이라도 살아야해! 안 그러면 아이들은...."이라고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끝내 두 사람 모두 두발의 총알에 이 세상을 뜨고 만다. 그 후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뒤를 따르게 된다.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란치프는 당연히 처음에는 악인을 처단했을 뿐이라고 당당했지만 이후 뒤따라온 엄청난 일들을 보고 후회했다고 한다.[9]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에서 갇혀있다가 1918년 폐렴으로 24살로 죽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전쟁으로 세르비아인도 많이 죽었다는 말을 비웃음과 같이 "결국 네놈이 네 동족도 마구 죽인 셈이지."라는 비아냥을 듣고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민족주의자였던 이가 동족을 죽게하는 전쟁 원흉이 되었다고 하니...

여담인데 프린치프 말고도 다른 공범 4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인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는 1916년 교도소 안에서 21살 나이로 병사했으며, 다른 3명도 교도소에서 지내야했다. 그 가운데 1명인 바소 추브릴로비치는 1930년까지 16년동안 복역 후 출소한 뒤 60년이나 더 살면서 유고슬라비아 정치인으로 활동다가 1990년 93살에 병사하면서 범인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조금만 더 살았으면 유고슬라비아 내전까지 봤을 듯.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묘는 본래 오스트리아 황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아내 조피는 황실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계모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나서서 황실 묘지에 프란츠를 혼자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조피와 함께 안장하는 것이 났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페르디난트 부부의 묘는 그들이 기거하던 지방의 성에 함께 안장되었다.

4. 프란츠의 자녀들

위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은 부모가 암살당한 뒤 더욱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조피가 하사받은 칭호인 호헨베르크 공비에서 비롯한 호헨베르크 가문으로 분류되었는데, 오스트리아 황실에선 그들이 황실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며 연금 지급까지 거부했을 정도. 프란츠가 물려준 유산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토지 등 부동산의 형태라서 아직 어린 자녀들이 그것을 가지고 생활하기엔 곤란했다. 그나마 다행히 이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인사들이 이들을 보호해 주었는데 특히 이들의 계조모인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는 황실에서 자녀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마리아 본인의 연금을 대신 주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강짜를 부렸다. 당시 황실의 여성 중에선 그녀가 가장 지위가 높아서[10] 그녀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황실에서 연금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황실이 해체되면서 재산들의 대부분을 몰수당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녀 중 아들들(막시밀리안, 에른스트)은 나치의 안슐루스에 반대하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독일의 2차대전 패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막시밀리안은 1945년부터 10년간 소련군정 하에서 아르츠테텐(Artstetten)이라는 소도시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딸인 조피는 1920년에 결혼해 4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장남과 차남은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차남은 전사하고 장남은 소련 굴라그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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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는 동명이인. 계모이긴 하지만 프란츠와는 8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1855년 생)
  • [2] 멕시코의 혁명을 틈타 나폴레옹 3세가 그를 멕시코의 황제로 만들어 그를 통해 멕시코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혁명군에 의해 오히려 처형당하게 되었다. 안습.
  • [3] 신앙심이 깊어서 매일 성지에서 떠온 물을 마시다가 위장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 [4] 이 무렵 독일권에서 통치가문은 일국의 통치자가 되는 오리지널 '로열 패밀리'나 그의 분가 가문에 한정되었으며, 백작 이하 귀족 작위는 고위급 관료나 군인이면 받을 수 있었고 그 자녀에게는 단순 칭호로서 백작 칭호를 내리기도 했으므로 격차가 상당히 컷다.
  • [5]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 [6] 이 방안을 제안한 포포비치는 루마니아 인이었다
  • [7] 두 민족을 합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전 인구 비율에서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
  • [8] 합스부르크 제국과 로마노프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보고 러시아에 대한 적대정책에 반대했다. 실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 [9] 민족주의적 열광에 젖어 있던 제1차 세계대전으로만 무려 1000만 명이 사망했고,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의 후속편(...)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자그마치 5000만 명이 사망했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불러 일으킨 테러라고 할 만하다. 고작 두 발의 흉탄으로 6000만 명을 사망케 한 공전절후의 사건 거기에 제1차 대전 중과 직후 러시아 혁명을 불러 일으키고 극도로 억압적인 스탈린 체제의 소련을 만들어 냈고, 제1차 대전의 후속편인 제2차 대전 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대치해 40년이나 냉전을 진행했다. 그야말로 단 두 발의 총탄으로 그 전까지의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은 셈.
  • [10] 황후 시씨(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암살당했고 막시밀리안의 아내인 샤를로테(카를로타)는 막시밀리안이 총살당한 후 정신병에 걸려서 유폐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1927년 사망) 사실상 마리아가 황실 내 최고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