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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1세

last modified: 2015-02-23 06:28:26 Contributors

Franz Joseph I

청년기 노년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1세

Viribus Unitis[1], Virtutis Confido[2]

오스트리아황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 토스카나 대공, 로트링겐 공 등.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문장

Contents

1. 칭호
2. 즉위 배경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
4. 재위
4.1. 통치
4.2. 외교 문제
4.3. 이중제국 성립
4.4. 사망
5. 가족관계
5.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5.2. 후계자 후보들
5.2.1. 막시밀리안 1세
5.2.2. 루돌프 황태자와 마이어링 사건
5.2.3. 프란츠 페르디난트사라예보 사건
5.2.4. 엘리자베트 페츠넥
5.2.5. 카를 1세

1. 칭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도-베네토,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 및 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독일 연방의 대표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His Imperial and Royal Apostolic Majesty, Franz Joseph I, by the Grace of God Emperor of Austria, King of Hungary, Bohemia, King of Lombardy and Venice, of Dalmatia, Croatia, Slavonia, Galicia, Lodomeria and Illyria; King of Jerusalem etc., Archduke of Austria; Grand Duke of Tuscany and Cracow, Duke of Lorraine, of Salzburg, Styria, Carinthia, Carniola and of the Bukovina; Grand Prince of Transylvania; Margrave of Moravia; Duke of Upper and Lower Silesia, of Modena, Parma, Piacenza and Guastalla, of Auschwitz, Zator and Teschen, Friuli, Dubrovnik and Zadar; Princely Count of Habsburg and Tyrol, of Kyburg, Gorizia and Gradisca; Prince of Trento and Brixen; Margrave of Upper and Lower Lusatia and in Istria; Count of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etc.; Lord of Trieste, of Kotor, and over the Windic march; president of The German Confederation.)'

이후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창설을 통해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가 작위에서 사라진 것이 눈에 보인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사도왕,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 및 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세르비아의 군주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His Imperial and Royal Apostolic Majesty, Franz Joseph I, by the grace of God Emperor of Austria; Apostolic King of Hungary, King of Bohemia, Dalmatia, Croatia, Slavonia, Galicia, Lodomeria, Illyria; King of Jerusalem, etc.; Archduke of Austria; Grand Duke of Tuscany, Crakow; Duke of Lorraine, Salzburg, Styria, Carinthia, Carniola, the Bukovina; Grand Prince of Transylvania; Margrave of Moravia; Duke of the Upper & Lower Silesia, Modena, Parma, Piacenza, Guastalla, Oswiecin, Zator, Cieszyn, Friuli, Ragusa, Zara; Princely Count of Habsburg, Tyrol, Kyburg, Gorizia, Gradisca; Prince of Trent, Brixen; Margrave of the Upper & Lower Lusatia, in Istria; Count of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etc.; Lord of Trieste, of Kotor, and over the Windic march; Grand Voivode of the Voivodship of Serbia etc. etc..)'

2. 즉위 배경

오스트리아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아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의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갖고 있는 황위 계승권 서열은 높았다. 이에 조피 대공비는 일찍부터 장남인 그에게 계승 수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가 혁명의 와중에 퇴위하자, 황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마리아 안나 황후와 조피 대공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도 페르디난트 1세와 마찬가지로 정신지체 증상이 있다는 점 때문에 아들에게 양보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이에 따라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가 되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의 황제로 그가 재위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프란츠 요제프가 재위하던 시절, 별도의 내각을 가진 채 합스부르크-로트링겐왕가를 섬기는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의 재위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

프란츠 요제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재위 : 1837년 6월 20일~1901년 1월 22일, 63년 216일)처럼 60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 근면성실한 국정 수행(매일 새벽 5시에 어김없이 일어나서 10시간 이상 집무했다.)과 엄격함, 그리고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살아있을 당시와 사망 이후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과 두려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백발의 노황제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 당시 남자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수염과 구레나룻을 모방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간 시절에도 빈 시내 곳곳과, 가장 호화로운 호텔인 자허 호텔에 공공연하게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임페리얼 호텔에는 아직까지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존재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으레 그렇듯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상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사망한 후, 급속도로 제국이 붕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차 세계대전으로 이중제국의 국력이 파탄에 직면한 것도 있지만…).

4. 재위

4.1. 통치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은 황제. 역사적으로는 1848년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최종적으로는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헝가리 반란군(독립군?)을 진압)을 겪고 그 격동의 와중에 백부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양위로 즉위했다.

이후 1850년 러시아가 팍팍 밀어준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과 담판을 지어 올뮈츠 조약으로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인, 프로이센에 일대 굴욕을 안겨 주었다. 이 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지 검열과 경찰국가 체제를 동원한 강력한 신 절대주의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문제는 이게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것이었다는 점.

이러한 전제주의 통치 동안인 1853년에는 헝가리인 애국지사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며[3],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빨리 후손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후의 계략(?)으로 이듬해(1854) 친척인 바이에른 왕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리자베트(애칭 시씨)와 결혼했다.[4]

4.2. 외교 문제

황제 본인은 황제가 수행할 중요 지상과제로 외교와 국방을 고려해 외교문제에 많이 간섭했는데,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토해낸 왈라키아-몰다비아를 점령, 러시아의 뒤통수를 쳤다. 이 행동은 1849년에 대군(약 16만 명)을 보내 혁명을 진압하도록 도와 준 러시아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에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분노했고, 오스트리아의 얌체짓에 영국과 프랑스도 빈정이 상해 크림 전쟁 후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당했다. 그야말로 병크였던 셈. 이 배신 행위로 러시아와는 관계 악화, 올뮈츠 조약으로 프로이센과 냉전,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얍삽한 짓에 냉소와 경멸, 이탈리아는 원래 반(反)오스트리아 지역 등등….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하게 된다.

1859년에는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 나폴레옹 3세(재위 1852~1870)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이 군비를 증강하며 도발해오자 재상 카보우르가 원하던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때려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른다(…). 그 결과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 잇따라 패하며 롬바르디아를 상실했고[5], 1866년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패배해 베네치아까지 상실했다.

같은 해(1866) 통일 독일 문제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프로이센에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강제 배제당했다(1866, 7주 전쟁). 그렇긴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그 외의 땅들[6]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사실 빌헬름 1세와 독일 장성들은 오스트리아 땅을 갈라먹길 원했는데 비스마르크가 억지로 가라앉힌 거라서 비스마르크가 아니었음 최소한 체코는 통째로 잃을 뻔한 대위기였다(…).

더불어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콘클라베에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레오 13세가 선종한 후 열린 1903년 콘클라베에서 전임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인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의 선출이 유력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라쿠프 대주교 푸치나 추기경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결국 이 해에 선출된 교황은 보수 성향인 비오 10세였다. 참고로 비오 10세는 선출 다음해인 1904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거부권을 폐지해 비(非)추기경의 콘클라베 간섭을 차단했다.

4.3. 이중제국 성립

결국 1866년의 잇따른 대실패로 말미암아 1867년, 헝가리인과 타협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구성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헝가리의 사도(使徒)적인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렇듯 평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떠받친 인물이지만, 1867년 이중제국 체제의 선택과 슬라브족에 대한, 황제 자신도 인정한 차별 정책과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운 발칸 반도로의 남진 정책이 공교롭게도 그의 사후 제국 해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과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최근까지 이어진 세르비아의 혼란에 일부 공과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4.4. 사망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16년 11월 21일, 68년간 제국을 짊어졌던 86세의 노황제는 쉔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황실묘지(Kaisergruft)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석관 양 옆에는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와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잠들어 있다.

5. 가족관계

5.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사적 영역이 매우 심각하게 불행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가 없을 정도. 당대 유럽 군주들은 숱한 염문을 뿌리는 등 스캔들을 달고 살았으나(특히 러시아 황족들이 문란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나름대로 가정적으로 매우 성실했다고 한다.[7]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말이 될 정도로 그와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 대부분이 불행하게 사망했다(아내, 동생, 아들, 조카 등...). 그런 비극에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고도 꿋꿋이 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 장수를 하긴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보게 된 셈이다. 오죽했으면 '프란츠 요제프가 젊었을 적 사형시킨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까지 돌았겠는가.

사실 황제의 가족 관계는 정말로 꼬일대로 꼬여 있었다. 젊은 시절에 프란츠 요제프는 유약한 성격인지라 여장부인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기세에 눌려 지냈다. 결혼한 이후에는 거기에 더해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어머니 조피 사이의 갈등이 더해졌다. 자유롭고 발랄한 가풍의 바이에른에서 자란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빈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제로 결혼식 직전 엘리자베트가 조피에게서 받은 건 예물이라든지 편지같은 게 아니라 6페이지에 걸친 궁중 예법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시어머니 조피는 며느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간섭했고, 첫 아이로 딸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후 엘리자베트에게서 뺏어 양육했다.[8] 거기다 어린 조피 황녀가 부모와의 여행 중 사망하면서 조피 대공비가 아이들의 육아를 맡는 것은 더욱 정당화 되여 조피는 그 후 시씨가 낳은 세 아이 중 막내딸 마리 발레리를 제외한 둘을 자신이 양육했고, 시씨는 아이들이 자기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중독자인 프란츠 요제프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불행에 황제는 어머니에게 자식들을 자신의 아내에게 돌려주라고 부탁했지만 조피는 아이들을 자신에게서 뺏어가려 한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한테 이렇게 휘둘리고 사니 이 양반도 한심한 인간일수밖에.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사랑한다지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했고, 결국 현실에서 도피하여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며 여기저기로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아내의 행동으로 크게 상처받았지만 그녀를 차마 비난하지 못했다.

아이들 역시 불행했다. 아버지는 항상 일만 하느라 제대로 얼굴도 볼 수가 없었고, 어머니마저도 빈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할머니 조피는 지나치게 엄격한데다 손주들에게 사랑을 주기보다는 황족으로서 행동하기를 바랐다. 이런 가운데 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자랐다. 특히 황태자 루돌프의 경우에는 차기 황제라는 이유로 도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는데, 조피가 임명한 군사 교관에게 7세부터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9] 이것이 황제의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이 가장 필요할 나이에 받았던 것들이었다. 루돌프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원망하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자라났다.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루돌프를 이해하지 못해 부자관계 또한 막장이었다. 이처럼 황제의 가정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10]

1889년에 아들 루돌프가 사망하고, 1898년에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가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11],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소는 엘리자베트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집무실 책상 위였다. 부관의 보고를 받고 황제는 집무실 책상에서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으며, 깨어난 이후 한 말은 짐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짐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구나.였다. 이렇듯 이런 일들 이후에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의무감으로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

그 스스로도 당대에 조신에게 "나는 운이 없는 놈이야."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몰락해 가는 왕조와 제국을 떠받치는 일에 60년이나 매진한 스스로에게 남긴 자조일지도...

가정적으로는 완전체 와이프 때문에 시달린 피해자라는 평이 대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엘리자베트 황후가 좋기는커녕 평범한 아내였다고도 빈말로도 말하기 힘들다보니... 물론 요제프도 좋은 가장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엘리자베트처럼 힘들다고 자신의 모든 의무를 저버리진 않았다.

출판된 참고할 만한 자료로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와 <석양녘의 왈츠>가 읽을 만 하다.

그나마 프란츠에게 사적으로 위로가 되어 준 사람으론 정부타리나 슈라트(1853~1940)라는 여배우가 있었다.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고, 금전적으로도 깨끗한데다 성격도 좋았다고.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와의 관계는 애인이라기보다는 황제가 생애 단 한번도 갖지 못했던 인간적인 감정들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와도 같았다고 한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아내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자기에게서 떼내려고 일부러 소개해 준 여자라는 점. 실제 성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카타리나 슈라트와의 관계는 매우 플라토닉한 것으로 인식된다. 카타리나는 프란츠가 사망한 뒤엔 비엔나 근교에 있는 히칭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다가 1940년에 사망했다.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선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고 눈에 띄는 정치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정치적인(?) 행동으론 안슐루스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집의 창문을 가리고 바깥을 보지 않았던 정도.

5.2. 후계자 후보들

5.2.1. 막시밀리안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1832~1867)은 나폴레옹 3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1864년 멕시코 제국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멕시코에서 반군(막시밀리안의 입장에서는)이 들고 일어나 1867년 막시밀리안을 잡아 총살해버렸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참패하고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동생을 도울 여력이 딸렸던 듯한데...이 일로 인해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의 왕실들을 돌아다니며 외교를 하던 막시밀리안의 아내 샤를롯테는 그만 미쳐버렸고 오빠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유폐되었다. 또한 황제의 어머니로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조피 대공비도 차남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 사건 이후로 정치 활동을 그만둔다.

이 사건을 두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어리숙한 왕족이야 말로 이용해 먹기 딱 좋은 존재'라는 촌평을 남겼다.

5.2.2. 루돌프 황태자와 마이어링 사건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황태자 루돌프(1858~1889)는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어머니 아래에서 외롭게 자라났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로서, 제국의 황제로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와 정치적으로 대립적인 관계에 위치해 있었다. 어머니의 자유분방하고 예민한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루돌프는 당대에 가장 폐쇄적이었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황실[12]을 갑갑해했고, 황실 내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정략결혼으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딸, 브라반트의 장미라고도 불리우는 아름다운[13]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했지만 당연히 사랑은 없었고[14], 스테파니가 딸을 낳자 사이가 급격히 멀어져 외도를 일삼았다.[15] 그러다보니 스테파니는 바람피우는 남편한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며 화를 냈고, 아버지도 루돌프에게 '왜 가정에 충실하지 않냐'고 질책만 하여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어머니인 엘리자베트는 아들 부부의 갈등을 귀찮아하며 그저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사실 그녀 역시 우울증이 심한데다 며느리랑 남편을 싫어하여 루돌프의 약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루돌프는 사촌인 라리쉬 백작부인에게 소개받았던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와 사귀게 되나, 문제는 독단으로 교황에게 처음의 정략결혼을 무효로 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게 된 것이다. 교황의 반응은 당연히 황제에게 사태를 알리는 것.[16] 이를 알게 된 황제가 경악을 하고 말아 아버지한테 찍혀버렸다. 황제에게 결별을 강요받고 모욕까지 받은[17] 황태자는 이 공개적인 창피랑 심한 질책에 결국 더는 견디지 못하고 1889년 1월 30일, 마리 베체라와 함께 마이어링으로 가서 자살한다.[18]

하지만 정확하게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가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카를 1세의 아내인 지타 황후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어렸을 적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가 '시신의 총상 주변에 화상이 없었다[19]. 따라서 암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타살설을 지지하는 증언들도 꽤 있다. 진보적인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파라는 세력도 있으니. 그 외에도 황실을 증오하던 공산주의자가 마이어링의 별장에 침입해 두 사람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암살설같은 타살설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중에는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가 교황의 인가를 받은 가톨릭 식으로 치러졌다는 점을 든다.[20]

실제로 루돌프와 마리 베체라는 약 14살 정도 나이차가 났으며, 루돌프가 (아무리 정략결혼이라한들) 가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둘의 관계는 대략 흠좀무.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좋았던 모양으로 2차 저작물까지 만들었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라는 작품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루셔니스트란 영화도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었고,[21] 루돌프에 대한 뮤지컬도 2012년 말, 2014년말 한국에서 공연.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는 제임스 모리아티가 개입한 사건중 하나로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기사가 나온다.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일대기를 다룬 엘리자벳에서도 '마이어링 왈츠'라는, 이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근데 루돌프보다 더 눈이 가는 등장인물이 있으니...항목 참조

5.2.3. 프란츠 페르디난트사라예보 사건

프란츠 요제프가 세 번째로 선택한 황태자[22]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인 조피[23]와 함께 1914년 6월 말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차 갔다가 가브릴로 프란치프[24]의 피격을 받아 죽고만다.[25]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26]

5.2.4. 엘리자베트 페츠넥

황태자 루돌프와 황태자비 스테파니 사이에서 태어난 손녀 엘리자베트(할머니의 이름을 땄음, 1883~1963)는 루돌프가 죽고 어머니 스테파니가 재혼하게 되자 할아버지의 곁에서 자란다. 그러나 살리카법으로 인해 여성이었던 그녀는 제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성장한 엘리자베트는 몇몇 스캔들을 겪은 후 결국 사회민주당원 레오폴트 페츠넥과 사랑에 빠져 두 번째로 결혼하고 아예 황족 신분을 버린다. 그녀의 별명은 붉은 황녀였다(…).



미모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손녀답게 굉장히 미인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폴란드에서는 평전도 나와 있는 모양.


5.2.5. 카를 1세

결국 네 번째로 선택된 황태자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번째 남동생의 손자인 카를(1887~1922).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기도 하다. 그러나 카를 1세는 즉위 후 딱 2년만[27]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쫄딱 망하고 만다.(…) 카를 1세는 일반적인 "망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상 제국의 해체를 막기 힘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카를 1세 항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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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with united forces(단결)
  • [2] My trust in virtue(미덕)
  • [3] 잠입한 헝가리 애국지사가 칼을 들도 덤벼 찔려죽을 뻔했다. 근위병들이 빨리 달려왔기에 살수 있었던 것.
  • [4] 원래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애칭 네네)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네와의 첫 대면에서 헬레네 옆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뿅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서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도록 했다.
  • [5] 그나마 상당한 희생자(7,000명 이상)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에게 배신 때리고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덕분에 베네치아는 간수했다. 하지만 7년 뒤...
  • [6]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포어아를부르크, 캐른텐, 슈타이어마르크, 티롤, 뵈멘(보헤미아), 매렌(모라비아), 슐레지엔, 갈리치엔-로도메리엔, 부코비나, 크라인, 달마티엔, 퀴스텐란트, 운가른(헝가리), 크로아티엔-슬라보니엔, 보스니엔-헤르체고비나.
  • [7]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가정에 결코 성실한게 아니다.
  • [8] 합스부르크 황실과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조피 대공비의 입장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가혹한 시어머니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어머니한테 휘둘리고 산 요제프 역시 좋은 남편이 아니다.
  • [9] 겨울 새벽 눈 속을 행진시킨다든지, 냉수로 목욕한다든지, 숲 속에 혼자 내버려두고 온다든지. 심지어 루돌프를 깨울 때는 옆에서 권총을 쏴서 그 소리로 일어나게 했다고 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할머니란 사람이 진짜 인정머리 없던 셈. 이러다보니 루돌프는 죽을맛이며 우울증에 빨리 걸렸다. 그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황제한테 교관을 엄한 사람에서 관대한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요제프도 수락하여 태후 조피를 설득해 교관을 바꾼다.
  • [10] 사실 이것도 전체적으로 보면 프란츠의 책임이 가장 크다.
  • [11] 루이지 루케니는 체포되고 나서 스위스 정부에 사형을 원했지만 스위스는 사형이 폐지된터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를 분하게 여긴 그는 교도소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 [12] 오스트리아에서는 조부 대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면, 황제의 특허가 아닌 이상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도 없었다.
  • [13] 하지만 실제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그리 예쁘진 않다, 시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스테파니를 싫어한 이유 중에 못생긴 외모도 포함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 [14] 스테파니는 외향적이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인터라 내성적이고 우울증 않는 루돌프를 이해할 턱이 없었다. 게다가 남편을 나약하다고만 생각해 초반부터 루돌프가 싫어했다.
  • [15] 아내 스테파니랑 딸 엘리자베트 마리한테는 아예 무관심한데다 처소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틈만나면 정부한테 갔다.
  • [16] 애초에 가톨릭이 이혼을 사살상 금지하는터라 해줄 턱이 없다. 더욱이 왕실의 일은 더 안해준다. 영국의 헨리 8세도 이것을 안들어주자 빡쳐서 가톨릭 버렸던 것. 이를 황실에서 가르쳐 줄리가 없으니 모르고 할수밖에.
  • [17] 신임 대사를 환영하는 접견식에서 황태자가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러 나오자 꼴도 보기 싫다며 등을 돌려 외면하는 굴욕을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따로 불러 당장 정부랑 결별하고 가정에 충실하라며 크게 화를 냈다.
  • [18] 마이어링 사건은 흔히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로 포장되곤 하는데, 사실 루돌프에게는 미치 카스팔이라는 이름의 정부가 따로 있었다. 루돌프가 같이 죽자고 처음으로 꼬드겼던 이도 미치 카스팔이었는데 그녀는 거절했고 그 다음 순위(?)인 마리를 꼬드겨서 동반자살한 것.
  • [19]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면 총 내부의 가스가 터져 나오면서 총상 주변에 총구 모양의 화상이 남게 된다. 화상이 없다는 것은 멀리서 쐈다는 뜻.
  • [20] 자살한 사람은 교회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루돌프도 처음에는 교황이 장례를 거부했는데 후에 입장을 바꿔 장례를 치렀다. 이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교황에게 아들이 반 황실세력에게 암살당했다는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교황이 인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제가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지 않은 것은 제국내 혼란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 [21]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많은 내용이 사실관계와 정말 많이 다르다. 이 영화내 오스트리아 제국은 현실 역사와는 무관한 패러럴 월드로 보는 것이 맞다만 여기선 약혼녀를 죽인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려서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약혼녀는 주인공 마술사에게 뺏긴다 덤으로 천하의 개쌍놈으로 모는데 그 약혼녀도 일조했다.할리우드 개객끼
  • [22] 두 번째는 동생 칼 루트비히.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보다 먼저 1896년 사망했다.
  • [23] 조피는 왕녀가 아니라 백작 영애였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계승권이 없었다. 그러나 불쌍했던지 프란츠 요제프는 이들의 결혼과 함께 조피에게 호헨베르크 공작 작위를 주고 그 후손들이 계승하게 했다.
  • [24] 1894~1918.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 조직원으로 수감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참고로 공범 중 하나는 잡혀서 16년 동안 복역하다가 나왔는데 1990년 93살로 죽었다.
  • [25] 귀천상혼 문제로 조피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사라예보에서의 행사는 공식행사 이긴 해도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아닌 군 사령관으로서 참가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둘이 같이 참석할 수 있었다. 기필코 아내를 공식석상에 동행시키려는 페르디난트의 꼼수였으니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는 셈. 참고로 페르디난트가 필사적으로 남긴 유언은 "안돼! 여보...우리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찌되라고...당신만이라도 죽으면 안 돼!"였다고 한다.
  • [26]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에서도 이 사건이 짧게 등장하는데, 이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언급을 한다.
  • [27] 1916년 11월 말에 즉위해, 1918년 11월 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