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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

last modified: 2015-04-13 04:26:09 Contributors


Paul Thomas Anderson

토마스 앤더슨이 아니다. 앤더슨[1]도 아니다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감독 경력
4. 필모그래피


1. 개요

미국의 영화 감독. 팬들은 줄여서 PTA라고 부른다.

정말로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970년생으로 나이가 비슷한 대런 아로노프스키크리스토퍼 놀란이랑 같이 묶여서 언급될때도 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젊은 미국 영화 감독[2]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감독이다.

2. 생애

성우인 어니 앤더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영화제작에 관심을 보여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화 감독이 되는 것을 응원해주기도 했다. 영화광 시절을 보내면서 주로 1970년대 미국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들인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올트먼[3] 시드니 루멧, 나단 데미, 버트 다우니 시니어의 영화들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난 황소》와 《좋은 친구들》을 백 번 넘게 봤다고 술회할 정도.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LA의 근교, 샌퍼낸도 밸리로 이후 그의 영화 《부기 나이트》의 배경이 되는 곳이자, 미국에서 유통되는 포르노의 90%가 생산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포르노를 접하게 되었고, 수천 편의 포르노를 섭렵했다고 한다.

12살 때부터 베타맥스 비디오 카메라로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으며, 고등학생 때는 애완동물 가게에서 새장 치우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첫 영화를 찍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18살에 30분 분량의 모큐멘터리인 《 디글러 스토리를 만들었으며, 이는 《부기 나이트》의 전신이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마틴 스코세이지, 올리버 스톤, 파이크 리를 배출한 욕 대학 영화과에 진학하지만, 강의를 하루 듣고 실망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입학비를 환불받고 뉴욕대를 이틀 만에 자퇴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단편 영화를 찍을 준비를 한다.

그당시에 터미네이터2 같은영화를 만들고싶다면 이 학교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터미네이터2는 멋진영화라고 생각하고 나갔다고 한다.#


3. 감독 경력

뉴욕대를 자퇴한 후, LA와 뉴욕을 전전하면서 게임쇼, TV, 광고 제작에 조수로 참여하면서 영화 제작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한다. 1993년, 도박에서 얻은 돈(?), 여자 친구의 신용카드(...)등으로 지원받아 단편 영화를 만든다. 바로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의 제목을 패러디한 <담배와 커피>라는 단편으로, 선댄스 영화제 단편 부문에 초청된다. 그리고 신인 감독들의 신병 훈련소(...)라고 불리는, 선댄스 영화제작 워크숍에 참여한다. [4]

선댄스 영화제작 워크숍에서 교육받는 동안, 감독은 한 제작사로부터 장편 영화 제작 의뢰를 받는다. 그 작품은 그의 데뷔작인 노의 도박사로, [5] 첫번째 편집본은 2시간 반(...)이었다고 한다. 이에 열받은 제작자는 감독 맘대로 재편집하고, <Sydney>란 제목을 <Hard Eight>으로 제목을 바꾸기도 했다.

제작비도 상승해 출연 배우인 귀네스 팰트로존 C. 라일리가 지원한 20만 달러로 제작비를 메꿨으며, 제작사에서 강요한 <Hard Eight>란 제목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배급업자를 구하기도 힘들어서 2년 동안 허공에 붕 떠 있었으며, [6] 겨우 자신의 의도대로 만든 편집본이 1996년 칸 영화제 주목한 만한 시선에 초청되어 호평받는다. [7]

<리노의 도박사>는 24살에 만든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숙련된 장인이 만든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와 계속 작업할 촬영감독 로버트 엘스윗과 처음 만난 작품이기도 하며, 제임스 그레이틀 오데사, 쿠엔틴 타란티노저수지의 개들, 웨스 앤더슨틀 로켓과 함께 1990년대의 가장 뛰어난 데뷔작으로 평가받는다.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탄건 두 번째 작품 부기 나이트 때부터였다. 노의 도박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1995년에 디글러 스토리를 토대로 이미 각본을 완성한 앤더슨은, 뉴 라인 시네마의 사장 마이클 더 루카에게 각본을 보냈다고 한다. 루카는 각본을 읽고 너무 좋아서 이성을 잃을 뻔했다는 후문이(...)

부기 나이트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난 황소를 모델로, 동시에 로버트 올트먼의 영화들처럼 여러 등장인물들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탁월한 연출력으로 한 덩어리로 만들어 평단으로부터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와 수영장 시퀀스의 복잡한 스테디캠 롱테이크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 스코세이지와 브라이언 드 팔마에게 물려받은 듯한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과 올트먼 감독에게 물려받은 듯한 많은 인물들을 요리하는 뛰어난 극작술이 제대로 아우러져 27살에 이미 포텐을 터트렸다.

1970년대의 섹시 스타였던 버트 레이놀즈가 많은 비평가 협회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수상하며 다시 부활을 알렸으며, 앤더슨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른다. 또한 매그놀리아에서 다시 뭉칠 줄리앤 무어, 필립 시모어 호프먼, 리키 제이, 윌리엄 H. 메이시, 멜로라 워터스, 존 C. 라일리, 루이즈 구즈먼, 필립 베이커 홀같은 뛰어난 연기파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룬 작품이기도 하다.

앤더슨은 부기 나이트 편집 도중에, 매그놀리아를 구상하는데, 그는 매그놀리아를 the epic, the all-time great San Fernando Valley movie, 즉 거대한 최고의 샌퍼낸도 밸리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부기 나이트의 비평, 상업적 성공에 힘이 붙어 뉴 라인 시네마에서 제작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앤더슨은 싱어송라이터 이미 만[8]의 솔로앨범과 또 앞으로 신보를 낼 데모를 들으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9]그리고 부기 나이트의 캐스트의 대부분이 출연했으며, 톰 크루즈이슨 로바즈가 합류했다.

하지만 제작사측에서는 영화를 편집하고 있는 중에도, 포스터나 예고편을 만들지 않고 태만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앤더슨은 포스터와 예고편, 사운드트랙까지 직접 참여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개봉 후 매그놀리아의 반응은 엇갈렸는데, 대단한 걸작이라는 반응과 과욕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로버트 올트먼을 연상시키게 하는 다중 플롯 (그리고 188분 러닝타임까지 오마주함) 을 이용한 묵시록적이고 폭발적인 에너지가 만난 작품으로, 영화가 러닝타임은 물론 일종의 감정과잉에 부담스러워 하는 반응도 있었다.[10] 그래도 영화의 전반적인 기술적으로 완성도는 완벽했으며,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도 훌륭했다. 간혹 데어 윌 비 블러드와 함께 감독의 최고작 떡밥에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계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도 아니고, 코엔 형제도 아니고, 바로 폴 토머스 앤더슨이다"라고 칭했다. 매그놀리아는 제작비 3700만불에서 북미기준 2200만불의 수입을 거두고, 흥행에 실패한다. 아카데미에는 남우조연상(톰 크루즈), 주제가상(에이미 만), 각본상(폴 토머스 앤더슨)만 후보에 올랐으며, 무관으로 그쳤다.

하지만 매그놀리아는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고, 금곰상을 수상한다.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오히려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놓치고, 베를린이 선택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는 듯.

매그놀리아로 29세에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으며, 펀치 드렁크 러브로 칸 영화제 감독상,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베를린 은곰상, 스터로 베니스 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3대 영화제 감독상 트로피를 갈아치운 영화계의 괴물 중 괴물이라 할 수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많이 뽑히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됬지만 하필 상대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여서... 수상은 하지 못했다. 대진운이 안좋았다 할수있다. (하지만 주인공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역대급 연기를 펼치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펀치 드렁크 러브,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평가면 평가 흥행도 남부럽지 않는 명감독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로 영화들이 어째 다 극장 흥행에서 실패한다. 마스터는 3천만불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2천 8백만불에 그쳤고, 히어런트 바이스는 제작비 2천만불에 북미에서는 1천만불도 벌지 못해 폭망하고 국내는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바로 iptv로 직행. 평단에 대한 영화 평가는 준수하지만 영화가 점점 난해해지면서 관객의 평이 미묘하다는 얘기도 있다.

묘하게 영화 한편 한편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감독이다. 초기 경력때는 3년 정도면 한편이 나왔는데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로는 5년마다 한편이 나온다. 사실 흥행 실패와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 때문에 투자에 난항을 겪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2014년 12월 머스 핀천의 소설 히어런트 바이스 영화판이 개봉했다.~~그러나 결과는.. 안나 푸르나 픽처스의 사장 메건 앨리스가 앤더슨 감독의 팬이라 더 마스터 제작 당시 후속작의 제작비까지 함께 투자했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다. 그래도 한편 나오는데 5-7년 걸리는 제임스 그레이보단 나은 편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까지는 브라이온이 음악에 참여했고 심지어 존 브라이온이 프로듀싱해준 뮤지션인 피오나 애플과 사귀기도 했지만 [11]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는 라디오헤드니 그린우드가 음악에 참여하고 있다. 아무래도 데어 윌 비 블러드를 기점으로 영화 색깔이 확 바뀌어서 그런듯. 지금은 SNL 출신 멤버 야 루돌프 (웨이 위 고)랑 살고 있다. 결혼 하지 않고 동거중이지만 아이를 네 명이나 낳는 등 사실혼 관계인듯 하다. 장모님 (그러니깐 마야 루돌프의 어머니)은 마성의 BGM으로 유명한 'Loving You'를 부른 흑인 소울 가수 니 리퍼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타크래프트에 영향을 준 것들에도 올라와 있다 (…)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어록 17선.#

4. 필모그래피

=트라비아=



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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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레지던트 이블, 에어리언 vs. 프레데터 등을 만든 영화 감독
  • [2] 웨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대런 아로노프스키, 소피아 코폴라, 렉산더 페인 등.
  • [3] 영화 매그놀리아는 소위 알트만식 촬영 기법들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알트만은 앤더슨을 재능있는 감독으로 인정하고, 그를 매우 아꼈다. 또한, 자신의 유작이 된 <프레리 홈 컴패니언 A Prairie Home Companion>(2003) 촬영 당시 자신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앤더슨을 유사시 감독으로 직접 채용하기도 했다. 다행히 직접 영화 촬영을 무사히 끝마쳐서 그럴 일은 없었지만.
  • [4] 그때 그를 가르쳤던 이클 케이튼 존스 감독은 "재능있고 창의적인 목소리로 가득 차 있지만, 경험이 부족해보였다"고 술회한다.
  • [5] 1992년에 2주만에 쓴 각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 피에르 멜빌박사 밥에 영향받았으며, 3백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들었다.
  • [6] 1994년에 찍은 영화였다.
  • [7] 그것도 영화제 하루 전에 겨우 의도대로 감독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 [8] 1980년대에 활동했던 뉴웨이브 밴드 Til Tuesday의 보컬. 부기 나이트의 음악을 맡은 같은 싱어송라이터 이클 펜의 아내이기도 하다.
  • [9] 윌리엄 H. 메이시가 가지고 있는 오두막에서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밖에는 뱀이 우글거렸다고...
  • [10] 오죽하면 국내 모 잡지에서 부기 나이트는 리듬감이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매그놀리아는 그 과욕의 에너지와 리듬감이 영화를 지치게 하고 만다는 반응까지 짤막하게 넣었다. 그것도 다른 영화를 소개하면서. 또한 케빈 스미스는 이 영화를 엄청나게 싫어해서, 이와 사일런트 밥의 역습에 '매그놀리아 팬보이'를 사정없이 깠다.
  • [11] 연인 사이일 당시 피오나 애플의 뮤직비디오를 여러 편 연출하였다. 2000년 <Paper Bag>을 마지막으로 끝난 둘의 협력은 2013년 <Hot Knife> 연출로 다시 살아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