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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

last modified: 2015-03-06 14:21:2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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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 창당한 정당
2. 2010년 창당한 정당

1. 1987년 창당한 정당


1987년 김대중통일민주당 내 자신의 교동 세력을 규합해 분당을 결행하여 만든 정당.

창당 당시 민주당이란 이름을 김영삼 쪽이 먼저 사용해 평화당이란 이름을 사용하려 했는데 "우리도 통일민주당처럼 민주당 이름을 못 쓸 이유가 없으니 우리도 평화당이라고 하지 말고 평화민주당이라고 하면 되는게 아니냐?"라는 제안이 당무회의에서 받아들여져 평화민주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풀네임이 길어 일반적으로는 축약어인 평민당으로 불렀고, 애초에 의도되었다. 반면 통일민주당은 통민당이란 약어 대신 민주당을 약으로 썼다.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는 구호와 함께 의욕이 넘치던 출발에 비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3위로 참패함에 따라 위기에 몰렸다. 당시 나름 전략도 있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호남, 노태우가 TK, 김영삼이 PK, 김종필이 충청을 나눠먹고 자신이 수도권에서 압승함으로서 도리어 양자대결이 아닌 4자 대결일 때 승산이 높다는 "4자 필승론"이다.[1] 하지만 KAL기 사건으로 PK와 충청의 지역주의가 옅어졌고, 군인 투표자들의 표가 대부분 노태우에게 날아가면서 결과는 3등으로 끝났다.

당시엔 제대로 된 여론조사[2]가 없어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정권에서 야권 분열을 위해 일부러 김대중에게 유리해보이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심지어 앨빈 토플러의 책에도 등장하는 컴퓨터 선거 조작설도 호남에서의 지나친 몰표에 따라 큰 인기를 끌었으나 총선 결과를 보면 그다지...[3]

다음 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이 선거를 운영하였는데 서울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4]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까지 올라섰다. 결국 4자 필승론이 맞았나? 4자 2등론이겠지 당 상징색이 누렇게 익은 벼를 상징하는 노란색이여서 지지자들로부터 황색 폭풍, 황색 바람이라고 칭해지기도[5].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당과의 규모 차가 안드로메다로 나 버리자, 1991년 3월 신민주연합당으로 명칭을 회복했다. 하지만 1991년 6월 광역 의원에서 참패.

결국 김영삼은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뒤지지 않는 치졸한 작전으로 복수에 성공했다. 두 사건으로 한국 정치는 정책과 이념 대결보다는 지역주의를 앞세운 저열한 이전투구로 크게 의미가 퇴색된다. 평민당의 창당이 김대중이 불복의 멍에를 쓰는 데 가장 일조한 사건이라면,[6] 김영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략으로 보답한 셈.[7]

여담으로 당시 김영삼 총재가 발음을 잘 못해서 '팽하민주당', '팽민당'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후에 극우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못된 별명으로 '펭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이후 1991년 9월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1991년)이 된다. 합당 후에는 후자의 민주당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통합민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 2010년 창당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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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과거 김대중의 동지였던 화갑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과거 민주화 동지 세력 및 호남 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 동명의 김대중이 만든 정당의 이름을 쓴 것도 이런 이유로 보인다. 민주당과는 차별화를 표방하며 "전라도에서 민주당 간판만 달면 이긴다는 오만을 꺾겠다."대놓고 지역주의 발언 자신감을 표방하여 선거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민주당이 전직 대통령을 계승한다는 국민참여당, 평화민주당이라는 두 혹으로 지방선거에 난항을 치를 수도 있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민주당(2008년)의 압승으로 끝났고 평화민주당은 전라도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은 커녕 지방의원 하나도 차지하지 못했다(…). 무소속들을 포섭하면 지자체장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 보면 국민참여당보다도 존재감이 없게 되었다.[8] 참여당은 유시민이 노무현 후광 말고도 자기 자신의 정치력이 어느 정도 있었고, 무엇보다 야권연대에 성공했지만, 평민당의 한화갑은 김대중 전 대통령 사후 존재감이 극히 없어져버려서 더더욱 위치가 위태로워졌다.

일부 보수 언론에선 민주당계의 적통세력이라고 띄워주기도 했다. 전남 도지사로 나온 김경재 전 의원이 빅모 언론의 ㅂ모씨와 친해서(...)

결국 19대 총선을 앞두고 당 대표 한화갑이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고 당을 이끌 구심점을 잃어버리자 그대로 민행복당에 흡수합당되었다. 그 국민행복당도 총선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2% 미만으로 해산되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평화민주당 출신 동교동계는 19대 총선에서 정통민주당을 차렸다가 다시 망했고, 한화갑, 김경재, 한광옥 전 대표들은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면서 확실히 민주당과 연을 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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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후에 이것이 1995년 1대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지역 등권론"으로 이어진다. 훗날 2번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는 한화갑이 제기한 것이라고 한다.
  • [2] 여론조사가 시범적으로 시행되긴 했고 한국 갤럽에서도 여론조사를 진행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독재정권 시절이다보니 제대로 된 표본을 잡을지 의문시 되던 상황이었다.
  • [3] 이전까지 호남은 여당 지지세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중대선거구기도 했지만... 이것이 단박에 뒤집어진 것은 김대중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 [4] 지금이야 중도 진보 성향의 시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이겠지만 당시에는 호남 출신 서울시민들의 지지가 컸다.
  • [5] 후에 자유민주연합의 선전도 "녹색 바람"으로 불렸다. 근데 황색 폭풍이라니 홍진호가 생각나잖아
  • [6] 이외에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낙선의 정계 은퇴를 번복했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후 의원 내각제 개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런데 김종필은 이전에도 이미 내각제 개헌에 낚여 표만 내준 흑역사가 있는데? 호구 김종필 그리고 후자의 경우 1990-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의 민자당(총 의석의 70%에 달했다.)과는 달리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을 합해서 과반을 넘긴했지만 개헌선에 한참 모자른 상태라서 내각제 개헌이 이루워질래야 이루워질 수가 없는 상태였긴 했다. 거기에다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조가 제대로 안 이루워지는 바람에 개헌선 확보는 커녕 군소정당과 무소속을 끌여들여서 겨우 과반을 확보했으니 뭐...
  • [7] 정확히 말하면 3당 합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미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후의 일이긴 하지만, 명색 민주화와 진보를 기치로 내걸고 정치 인생을 걸어온 김영삼이 유신독재의 당사자제5공화국의 주인공과 손을 잡았다는 점을 볼 때 배신에 가까운 행위인 것은 틀림없다.
  • [8] 실제로 전남의 모 무소속 당선자는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를 하여 민주당 현역 단체장을 이기고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