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팔라비 왕조

last modified: 2015-04-13 04:12:26 Contributors

이란의 역사
카자르 왕조 팔라비 왕조 이란 이슬람 공화국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왕조의 개창
2.2. 팔라비 1세의 통치
2.3. 제2차 세계대전
2.4. 모사데크 실각
2.5. 백색혁명
2.6. 외교
2.7. 민족주의
2.8. 왕조의 붕괴
2.9. 망명
2.10. 여담
3. 평가

1. 개요

Pahlavi dynasty (영어)
دودمان پهلوی‎ (페르시아어)

페르시아(이란) 역사상 마지막 왕조.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레자 한(레자 샤 팔라비)가 1924년 의회의 결의로 왕위에 올라 팔라비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 아들인 모하메드 레자 샤 팔라비 2세가 뒤를 이었고, 1979년 2월 11일 란 혁명으로 강제 퇴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팔레비'라는 표기법을 사용했었다.

2. 역사

2.1. 왕조의 개창

1878년 탄생하여 젊은 나이에 군인이 된 팔라비 1세는 1921년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점령하고, 1919년 체결 된 영국-이란 협정을 무시하며 치외법권을 철폐하는데 성공한다. 1924년 부터 1925년 이란군 사령관 겸 총리가 된다. 1924년, 레자 한은 카자르 왕조의 페지를 의회에서 의결하고 이듬해 왕위에 올라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2.2. 팔라비 1세의 통치

왕위에 오른 팔라비 1세는 국내 개혁에 착수한다. 1926년 사법 개혁, 1927년 국립은행의 창설, 1929년에는 징병제를 제정한다. 미국에서 재정고문관을 초빙하여 재정 개혁을 하였고, 차별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성 해방을 결의하고, 교육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 근대화에 노력했다.

대외적으로 국제연맹에 가맹하였으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1]하고 국왕(king)으로 변역되던 왕호인 황제(emperor)로 격상하였다. 중앙집권을 추진하며, 1938년에는 이란 횡단 철도를 완성해서 산업 육성에도 진력했다. 그러나, 국가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지지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황제 독재가 강했기 때문에 반발을 불러왔다.

2.3.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샤는 이란의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의 통과를 거부하는 한편 국내 독일인을 추방하는 것도 거절했기 때문에 추축국과 협력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독일이 이란의 유전을 차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소련은 이란을 침공하여 이란에 진주한다. 레자 샤 팔라비는 아들 모하마드 레자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퇴위하였으며, 모리셔스 섬으로 망명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 버그로 옮겨져 1944년 67세로 사망했다.

2.4. 모사데크 실각

1951년,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는 석유국유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이에 반감을 품은 서방국가들로부터 봉쇄를 당하자 소련에 접근했으나 CIA와 MI6의 지원을 받은 황제파 장군들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모사데크 총리는 실각했으며 팔라비 2세는 권력을 회복했다.

2.5. 백색혁명

1960년대부터 팔라비 2세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움직여, 반체제 운동을 단속하며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위에서 개혁을 도모하며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발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팔라비 2세는 1963년 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얻은 외국 자본과,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한다. 국영기업 민영화, 노사간 이익 분배와 노동자 대우 향상,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 문맹율 : 즉위 전 문맹률은 95%에 달했지만, 퇴위 후에는 50%까지 감소했다. 테헤란에서 2/3 정도가 비문맹이며, 약 1/3 정도가 문맹이었다고 한다.
  • 농지 개혁 : 국토의 60%를 차지하는 황야를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여 녹화하는 한편, 지주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관개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유효화게 활용하지 못하고,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와 슬럼가가 형성되었다. 농업생산량은 오히려 감소하고 식량을 수입하게 되었다.
  • 해외 유학 : 부유층 자녀의 해외 유학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학을 하면서 반왕정 주의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 여성 참정권 :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다. 이는 종교학자를 중심으로 비난을 받았다.
  • 일부 일처제
  • 히잡 착용 금지

2.6. 외교

팔라비 황제는 스스로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친서방 외교를 추진했다. 친서방 정책 때문에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다른 동맹국에 판매한 적이 없는 최첨단 F-14 전투기를 이란 공군에 판매하고, 키드급 구축함과 F-16, F/A-18이 이란에 판매가 확정되었던 상태일 정도로 이란을 최혜국으로 대우하였다.

대한민국과도 관계가 양호했으며, 1977년에 테헤란로가 이 때 이름지어졌다.

2.7. 민족주의

팔라비 2세 황제는 자신의 칭호를 '아리야의 영광'을 뜻하는 '아리야 메헤르'로 정하고 이란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1967년부터는 황제의 칭호를 보다 더 높은 '샤한샤(샤 중의 샤)'로 격상시켰다.

팔라비 2세가 1967년 '샤'에서 '샤한샤'로 스스로를 높이는 대관식에서 찍은 사진.

1971년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유적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건국 2500년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는 다수의 국빈이 초청되었으며, 티오피아 제국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일본 히로히토 덴노의 사촌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이 있었다.

동시에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바빌론 유수에서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을 해방하고 각각의 고향에 다시 그들의 성전을 재건했다고 기록된 키루스 원통인장의 복제물을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서 국제연합에 증정했다.

샤는 이 행사를 기념하여 수도 테헤란에 샤의 영광을 의미하는 "샤 야드 타워"을 건설하고, 남쪽 마을에는 선대 황제이자 아버지 레자 샤의 무덤을 건설했다. 샤 아드 타워는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에서 따오 "아자디 타워"로 명칭이 바귀고, 레자 샤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개발살나서 이슬람 신학교가 됐다.

이 해, 셀주크 왕조가 만든 자라리 역을 대신하여 이란 역을 도입하고, 기원을 이슬람 사회의 히즈라를 대신하여 키루스가 메디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550년으로 잡았다.

일련에 사업에 투자된 비용이 1억 달러 이상에 달했으므로, 반체제적인 이슬람 율법 학자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뭐 그런데 전성기에는 이 양반 개인 자산만 20억 달러가 넘었던 것 같다.(...)

2.8. 왕조의 붕괴

1962년 10월 6일 지방선거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무슬림에게만 국한한 조항을 철폐하고, 하이 교 신도에게도 시민권을 주려고 했으나, 시아파 보수파 등에서는 비난을 받았고 법률의 철회를 강요받았다. 호메이니는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추방되었으며, 런던에 가려 했지만 영국 정부에 거부되었기 때문에 이라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 오일 쇼크가 가라앉고 유가가 안정되자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겼으며, 경제 발전으로 빈부격차가 확대하자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이 모여서 파업과 시위가 빈발했고 1979년 1월 16일 샤는 망명하게 된다.

호메이니는 2월 1일에 15년 만에 귀국을 완수하여, 이슬람 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샤가 임명한 총리와 샤에게 충성을 맹세한 황실 친위대 및 이란 육군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호메이니 지지를 포명한 육군 내부의 불평 분자와 전투를 벌이다가 2월 11일에 제압되었다. 총리와 황실 친위대 대장들이 체포되어 2월 13일 공식적으로 총리가 사임함으로서 완전히 이슬람 혁명 위원회가 이란을 장악하였다.

2.9. 망명

샤와 그 측근은 망명 직후에는 이집트로 갔는데 거기서도 별로 환영하지 못해 나가야 했다.[2] 그 뒤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등을 전전했다. 샤는 이후 암 치료를 명목으로 황후 등과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미국이 그 입국을 인정한 것에 반발하여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송환을 요구하는 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때문에 12월 5일 미국을 더나 파나마로 갔으며, 1980년 7월 27일에 다시 이집트에서 망명을 받아주기로 해서 카이로로 망명했다가 결국 실의 속에서 1980년을 넘기지 못하고 61살로 사망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 리파이 사원에 대리석으로 꾸며진 묘지가 있다.

2.10. 여담

모하메드 레자 샤 팔라비는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트와 비행기 조종을 좋아했다. 이란 공군의 차기 전투기 도입에서는 스스로 후보기의 조종간을 잡고 시험비행을 하여, 최종적으로 F-14를 도입했다. 망명할 때도 직접 전용기 보잉 727을 조종하여 황후와 측근과 함께 망명했다.

자동차 컬렉션을 좋아하여 이탈리아의 슈퍼카 람보르기니와 서독의 메르세데스 벤츠 600 등 고급차를 애용했다. 이 콜렉션은 이란 국립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고흐르누아르, 마티스, 드가같은 유명 화가들 그림 및 조각같은 예술작품도 마구 사모았다. 덕분에 그가 쫓겨날때 테헤란 미술관에 남은 이 그림들을 호메이니 정권이 팔아치운다는 소문도 있어 수집가들이 군침을 흘렸으나 팔긴 커녕 미술관 지하에서 비공개로 만들어 보관하면서 되려 미술 애호가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3. 평가

냉정히 말하자면 국내 분야에서는 국가 상황을 감안한다면 평범한 수준.
[3]

그렇다 하더라도 민심 문제에서는 문제가 많다. 이란은 원래부터 문명국이고 또한 그들이 펼친 친미, 친서방정책으로 인해 국민들의 사고방식이 고도로 서구화되어 무조건적이며 강압적인 독재는 유효할진 몰라도 전혀 영리한 방법이 아니었다. 또한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반서방적 정서가 강하였고 외부에서도 한창 반서방, 아랍민족주의, 이슬람주의가 서로 맞물려서 횡횡하는 시절이었다.
헌데도 팔라비 샤는 모사데크에게 데인 게 트라우마라도 되는지 강경 일변도로 나갔고 오일쇼크와 빈부격차, 경제문제가 겹쳐서 위기상황인데도 변하지 않아 팔라비 왕조 말기에는 무력사용을 동반한 강경대응->시위대 및 반정부세력의 강경화->더 큰 무력사용의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며 유혈진압으로 팔라비 왕조의 역사를 더럽히게 되었다.
그나마 그렇게 할거라면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제 스스로도 민심이 무서웠는지 국민들을 아예 총부리로 찍어누르지도 못하였다. 거기에 팔라비 왕조가 추진한 여성 참정권으로 인해 이란 내 소수 민족 출신의 여성 의회의원 등이 배출되었는 등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닌데 치적 홍보나 프로파간다를 제대호 하지못해 지지세력을 제대로 결집하지도 못했으며 의회가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인데도 절대왕정 마냥 국가를 이끌려 했으니... 이러니 도저히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망했어요.

팔레비 왕가가 유능했더라면, 아니 최소한 몇십년을 더 유지해 몇백년 전 유럽이 한 정교분리를 어느정도 확립시켰더라면 불안하더라도 터키처럼 근대화되고 세속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겠지만, 일단 사회면에서는 급속히 탈종교화와 서구화를 추진하려 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어그로를 끌었고, 그러면서도 정치체제는 의회가 있는 등 입헌군주정인데도 절대왕정으로 끌고가려고 했으므로 공화세력의 어그로까지 끌었다. 거기에 왕가를 둘러싼 지배세력의 부정부패까지 겹쳐서 민심은 완전히 떠났고, 결국 왕정은 전복되었고 이후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신정체제로 새출발 하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팔라비보다 못하면 못했지 잘한 것은 없는데 우선 이슬람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려는 상황에서 이에 반대하는 민주화세력 등을 아예 갈아버렸으며 이당시 이란은 그야말로 피로 물들여졌었다. 물론 이 이후에도 총칼과 법 등을 통해 반대파들을 찍어눌렀다.이란-이라크 전쟁덕분에(...) 그나마 완화된 것이 이정도. 거기에 팔라비 시절과 다르게 이슬람 신정 정치를 모토로 삼은 탓에 팔라비 시절에는 없던 여러 사회적 억압들이 생겨났으며[4]이전부터 있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것도 많다.[5][6] 거기에 이젠 본격적으로 반서방 행보를 보인 것까지 합쳐져 이란은 많은 면에서 정체되었고 일부면에서는 퇴보되기까지 하였다.[7](나아진 면이 있다고 해도 그 반대가 너무많다.)그렇다고 높으신 분들이 이슬람적 삶을 제대로 사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겉으론 그런 척 하면서 뒷편으로는 자기들도 즐길 건 즐겼다. 그 예가 대 이란의 술 소비. 밑의 계층들은 술마시면 처벌하면서 윗분들은 뒤에서 알아서 구해서 마시는 바람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싫어하는 미국터키, 이집트의 배만 불려준다.(...) 그렇다고 부정부패문제가 해결됬느냐 그것도 아니다. 결국 삶은 나아진 게 없고 문제점은 변화하거나 오히려 늘어나게 되버린 상황을 초래해 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팔레비처럼 정권유지에 관해 속된말로 아주 빠가(...)는 아니었고 또한 그들만의 힘으로 국가를 세운 것도, 유지한 것도 아니며 그들로만으로 유지할 수는 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전쟁 수행 및 이후의 군사력 구축을 위해 구 제정 이란군인사들을 사면시켰고 그들이 싫어하는 서구의 군사기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인들에게서 전쟁수행 자금을 받는 대신 그들에게 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히 풀어주었다. 또한 호메이니와 신정위원회의 권한이 훨씬 우월하고 그들이 윗선에 존재하며[8] 이란혁명수비대가 반 이슬람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면 좌시하지 않겠다 나서며 부정선거와 부정선거 의혹이 나오는 등 지지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유도하는 변형되고 기형된 체제지만 공화주의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공화정 체제를 만들었고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는 반대파 정치인에게 견제와 훼방을 놓을지언정 체제에 위험이 가지 않으면 어느정도 눈을 감아주었다.또한 팔라비 시절에 추진한 개혁정책 중 수용할 만한 것은 수용했다.[9] 그러면서 팔레비 왕조 전복당시 팔레비를 지지하며 저항한 것이 그저 근위대와 공수부대밖에 없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이란혁명수비대 같은 것을 통해 경제적이권과 군사력을 취하고 갖추어 정권유지의 근간으로 삼았다. 물론 국민들이 원하는 반서방 정책은 기본 밑바탕에 깔고간다.


요약하자면 이들은 팔라비와 비교하면 못했으면 못했지 잘하진 않으나 이들이 팔레비 보다는 정권기반이 튼튼하며 팔레비보다 더욱 과감하다. 또한 이란 민중들의 지지를 훨씬 많이 받고 어느정도는 민의에 신경쓰며 그에 맞춰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체제의 안정도가 팔레비 왕조보다 훨씬 높으며 다른 중동국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슬람 국가가 떠오르자 중동에서 비교적 혼란이 적고 안정되어 있으므로 이라크에 간섭할 수 있었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부시의 삽질때문에 미국의 중동에 대한 대규모 간섭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고, 현재 미국에서도 중동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파트너는 이란이라는 걸로 결론이 났기 때문에 [10] 미국도 어쩔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고 이란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IS전선에 동참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5년 4월에는 그동안 미국과 이란의 관개개선을 발목잡아온 핵협상도 거의 타결되었기 때문에 쿠바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대이란 봉쇄정책을 풀고 이란을 파트너삼아 IS퇴치 및 이라크 안정을 도모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미국의 충실한 주구였던 이스라엘과 공화당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지만, 이미 미국의 국력의 한계가 드러난 이상, 공화당이 재집권한다고 해서 이란과의 화해분위기를 다시 되돌리기는 힘들듯 하다.

----
  • [1] 사산 왕조 때부터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다.
  • [2] 웃기게도 이집트 마지막 왕이던 파루크 1세는 누이동생 파우지아 시린이 바로 레자 샤 팔라비의 첫 번째 아내였기에 왕위에서 쫓겨난 파루크 1세는 이란으로 가서 살려고 했지만 레자 샤가 입국을 거절해서 갈 수 없었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파루크 1세는 "그놈이라고 언제나 그 왕위를 유지할 지 아느냐?" 라고 분노했는데 그가 죽고 15년도 안돼 그 말이 이뤄졌다.
  • [3]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란은 국가체제 자체가 기본적으로 생존보장이 되어있지 않을 정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공화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절대군주정이든 국가체제가 일단 생존보장은 되어야 무언가를 할텐데 여기는 그런 거 자체가 없던 상황인데다가 정교분리도 안된상황. 그런 것들을 감안해야 하지않고 무언가를 평가하고 단정짓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팔레비는 이런 상황에서 장사접을 거 아니면 국가체제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타개책을 마련했어야 했고 그것을 위해 근대화와 페르시아만의 경찰국가, 친미라는 카드를 들었으며, 이를 추진하다가 반체제세력들을 통제내지 이기지 못하고 망한 것이다.
  • [4] http://hyukjunseo.egloos.com/3338133 간통죄에 대해 투석형이라든지 동성애에 대해 짤없는 교수형이라든지.
  • [5] 그 예가 명예살인. 이건 호메이니가 비 이슬람적이라고 욕했지만 해결되지는 못했다. 폐지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구글을 돌아봐도 폐지되었다는 말은 찾기 힘들고 설령 폐지 되었다 하더라도 조금만 찾아봐도 명예 살인에 관한 글이 주르륵 올라오는 것을 봤을 때 장식품 수준으로 봐도 무방하다.
  • [6] http://www.landinfo.no/asset/960/1/960_1.pdf, http://www.justice.gc.ca/eng/rp-pr/cj-jp/fv-vf/hk-ch/p3.html, http://en.wikipedia.org/wiki/Honor_killing#Iran, http://www.centerforinquiry.net/isis/islamic_viewpoints/the_lethal_combination_of_tribalism_islam_cultural_relativism, http://www.islam-watch.org/SyedKamranMirza/honor_killing.htm
  • [7]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운 샤리아는 7세기 시대를 반영한 법인데 시대가 한참 지난 현대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난 변화같은 것은 무시하고 이것을 적용하겠다는 것. 게다가 이거 해석 범위가 매우 넓다(...) 게다가 근본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문물들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정말 필요해서 도입하는 군수분야를 제외하면 과학기술의 발전도 기대하기 힘들다.(사실 서구와 서구문물을 싫어하고 배격한다는 사람들이 서구무기를 잘만 쓰는 거 차제가 모순이지만). 내부에서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이슬람 답게 외부에도 자신들의 사상과방식을 강요한다.(이들은 자기 내부에서는 예수나 서구를 잘만 까면서도 정작 외부에서 이슬람 관련 풍자에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또한 그냥 이슬람 국가도 현실과 적절히 절충해서 국가를 운영하는 판국에 강경한 근본주의자들이 샤리아와 반서방을 외치며 집권했으니 퇴보되는 것은 당연하다.
  • [8] 이란은 이맘 밑에 3부가 존재한다. 즉, 이맘의 의중이 대통령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 근본주의자 측은 이것과 혁명수비대로 반대파가 득세하더라도 대처할 만한 권한과 힘을 마련해두었다.
  • [9] 그 예 중 하나가 여성의 대학진학률과 무기 국산화. 특히 이란의 군사력은 팔레비의 유산을 전용하고 거기에 기반해 그들 나름대로 노력해서 만든 것의 결과물이다. 팔레비 왕조시절 구축한 인프라의 힘이 절대적인 분야. 물론 신정 체제가 들어선 이후 거기서 변화를 할 지언정 발전은 그다지 없다.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니며 국가 자체가 팔레비 왕조의 유산 위에 얹어사는 수준이다.
  • [10] 미국읟 동맹국 사우디는 사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태나 다름없다. 자세한 사항은 와하브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