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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만행사건

last modified: 2016-08-20 00:04:0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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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사건 당시의 사진.

한국어: 판문점 도끼만행(살인)사건
영어: Axe Murder Incident
일본어: ポプラ事件(じけん)(포플러 사건, 미루나무 사건)
중국어: 板门店事件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

Contents

1. 개요
2. 사건 경위
2.1. 북한의 개소리 주장
3. 본격 준전시태세
3.1. 폴 버니언 작전
3.2. 북한의 대응
4. 결과

1. 개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일어났던 남북한 무력충돌에 이어 전쟁이 일어날뻔한 사건이다. '판문점 도끼 만행' 이나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북한)', 'Axe Murder Incident' 또는 'Tree Cutting Incident(미국)' 으로 불린다.

2. 사건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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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UN군 자격으로 판문점에 주둔해 있었던 미군한국군은 제3초소 부근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다. 당시 판문점 내에는 별다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한국군 측 3초소는 북한군 초소 3개소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4초소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문제는 크고 아름답게 자란 미루나무가 4초소의 시계를 방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3초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때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1]와 병력들이 나타나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보다 한참 전인 8월 6일에는 아예 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했는데, 인민군이 협박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중단하고 가지치기만 하기로 한 것이었다. 인민군이 이렇게 반응한 이유는 미루나무 위치가 매우 애매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는 대한민국 영토에 가까웠지만, 인민군은 훈련 때마다 이 나무를 지나갔기 때문에 은연중에 나무가 북한영토에 있다고 인식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착각했다고 해도 다음에 일어날 사건은 그야말로 제대로 미친 짓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당시 국군은 인민군에게 그냥 가지치기 작업이라고 설명을 하고 승낙을 받아냈다. 그런데 정작 작업을 시작하니 인민군이 사사건건 참견을 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작업을 중단하라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UN군 경비대 장교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인민군의 협박을 무시하고 계속 작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박철 중위가 갑자기 병력을 더 요청하더니 30명이나 되는 병력이 모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보니파스 대위를 때려눕히고 한국 노동자들이 버리고 달아난 벌목도끼로 보니파스 대위의 머리를 찍어서 죽여버렸다!

지휘를 해야 할 경비대장이 먼저 죽은 데다가, 워낙 사건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대기 중이던 기동타격대조차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고 사건이 끝났다. 이 사건으로 여러 병력들이 부상을 당했고 경비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는 현장에서 참혹하게 살해를 당했다. 당시 판문점 감시단에 계시던 분이 월간조선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인민군이 가지고 있던 "미국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도끼로 수도 없이 찍어서 거의 토막시체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인간성이 뭐죠? 먹는건가요?

위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2대 돼지놈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정설로 확인된 것은 아님을 유의.) 박병엽 전 조선노동당 고위간부[2]의 증언록에 의하면 당시 국가주석인 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고,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라고 지시했다.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지 말고 총을 쓰지 말고 미국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혹한 살해 사건 당시 기자가 찍은 사진들이다. 여담으로 사진이 찍힌 것은 미군이 북한을 계획적으로 도발하고 역으로 자기네가 맞았다는 증거로 삼기 위해서 미리 기자들을 대기시킨 증거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있었다. 이는 당연히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들이다.이런 인간들의 정신승리는 만국공통

2.1. 북한의 개소리 주장

한편 북한측의 주장은 "미군이 나무를 자르는 걸 보고 순찰병들이 제지했는데 갑자기 미군이 도끼를 던졌다. 그래서 우리 병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서"(...) 다시 던져 죽였다." 뭐? 이 무슨 최고존엄 축지법 쓴다 카는 소리? 라는 양판소에 나와도 욕 먹을 심히 설득력 없는 개소리의 연발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사건상황이 기록된 사진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뻥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으면 좀 그럴 듯하게 만들던지, 이런 황당한 양판소를 써서 미군을 나쁜놈으로 만들고 싶어 터무니없는 사실을 지어내고 있었다. [3]

3. 본격 준전시태세


이 사건으로 장교를 둘이나 잃은 UN군, 특히 미군은 그야말로 제대로 빡쳐서 눈이 제대로 돌아갔다. 당시 UN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 때문에 일본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자마자 얼마나 급했는지 여객기도 아니고 전투기 뒷좌석에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거기다가 조선인민군은 뻔뻔하게 "경비장교 회의를 하자."라면서 대충 경비장교 회의 레벨에서 사건을 덮으려는 기색이었다.

스틸웰 장군은 오자마자 바로 회의를 소집했고, 젊은 장교가 둘이나 살해를 당했는데 어떻게 해야할 지 말해보라면서 큰소리를 쳤다. 그 후 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상의를 하겠으며 "데프콘 3를 발동시키겠다." 라는 말과 함께 회의는 종료되었다.[4] 물론 북한은 계속 경비장교 회의를 하자면서 덮으려고 했지만, 그날 밤 UN군은 최후통보로 김일성에게 보내는 UN군 사령관의 메시지라면서 군정위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결국, 19일 경비장교 회의와 군사정전위 본회의를 동시개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은 위에 써있듯이 자기네 측 주장대로 가면서 심지어는 뻔뻔한 태도로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적반하장을 시도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스틸웰 장군은 그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 발동 이야기를 했고 마침내 "데프콘 3이 발령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체제에 돌입한 사건이었다. 이에 맞서 조선인민군도 북풍 1호(준전시체제)를 발동해서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3.1. 폴 버니언 작전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폴 버니언[5]작전(Operation Paul Bunyan) 계획이 세워졌다. 요약하면 "지원병력 감시하에 미루나무를 자른다." 로 축약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이후 1976년 8월 21일, 마침내 미국과 주변의 주둔 미군 기지에서 병력을 편성했는데 그 규모가 다음과 같다.

엄밀히 북한을 100%갈아서 없애는 것보다는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을 정리할 생각도 했다는데, 지금도 가끔 나오는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령의 수복을 충분히 고려할 가능성을 두고 작전에 임했다고 한다. 다만 공산측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북한이 추가 도발 없이 침묵한다면 무력시위로 끝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에서 데프콘 3이 "데프콘 2로 레벨업"했다. 그야말로 준전시체제 돌입. 유사시에 북한이 도발만 하면 바로 발포해서 북한을 영원히 지도에서 없애버릴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일단 미군의 계획은 "작전시 교전사태가 발생하면 포병대는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포격을 개시, 개성 위쪽 시변까지 포격해서 포병대를 없애버린다." 였으며 북한 전차부대 남하같은 구체적인 전시상황 계획까지 완벽하게 수립했다.

대한민국 국군측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제1공수특전여단 김종헌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64인의 특전사 대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7] 미루나무 절단조를 엄호하고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보복 작전이 수행됐다. 게다가 "여차하면 전쟁" 에 돌입할 미군과는 다르게,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반격을 유도해서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할 기세였다.

이유는 뒤에서 미군이 버티고 있으니까.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이때 당시 미군은 "진짜로 북한을 갈아버리려고" 했다. 물론 그랬다간 소련이나 중국도 난리가 난다는 이유로 당시 위협용이라는 의견도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없애고 난 다음 미군이 북한에 주둔할게 뻔한데 그걸 소련과 중국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북한을 없애는 게 아니라 연백평야 개성 등 휴전선 부근 일부를 타격하거나 탈환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사실 당시 북한이 한 짓이라는 건 정말로 터무니 없는 사건이었기에 중국과 소련조차 외면할 정도였다. 한편 이 사건 전까지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사이가 소원해져 주한미군 축소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국지전을 발발시켜 주한미군을 붙들어놓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결사대로 특공을 지시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당시, 유엔사 쪽은 전쟁을 하고도 남을 전력을 동원해 위력 시위를 했지만 정작 전쟁을 개시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북한초소 타격에 들어가려는 한국군 특공대를 보고 미군은 대경실색했다.] 북한군이 이에 무력대응을 할 경우엔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이었다.[8]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이, "우리도 참는 것이 한계가 있다.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내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이다.

카투사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간 뒤, 몽둥이로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로 이 때 당시의 특전사 지휘관의 인터뷰에 의하면 원래 "인민군이 30m만 접근해도 쏴버리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온 것을 특전사령관이 다시 "100m 안에 인민군이 접근만 하면 갈겨버려!!" 라고 고쳤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 계획인 미루나무 철거 작전이 완료된 미군들은 이런 정황을 몰랐기에 미루나무를 자른 특전사들이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가자 엄청 당황을 했다고 한다. 되려 미군 병사들이, "그러다가 전쟁이 난다."라고 말리고 북측도로 차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진격에 불응하는 미군 트럭 운전병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스틸웰 대장이 빡쳐서 결국 페이크로 김종헌 소령은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특전사가 북한군 초소를 다 때려부수는 동안, 인민군은 완전히 쫄아버려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간신히 고개를 내민 인민군도 없잖아 있었는데, 이미 전쟁을 각오한 특전사들이 일부러 북한말로 "이 간나 새끼, 이리로 와봐!"라고 욕을 퍼붓자 기겁해서 거의 기어서 달아났다고 한다. 특전사들은 초소의 김일성 초상화를 깨부수고 커튼 등을 약탈했으며, 북쪽을 향해 오줌발까지 갈겼지만 인민군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AH-1 공격 헬리콥터 7대와 다목적 헬리콥터 20대의 직접 엄호하에 한미 양국이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고 북한이 침묵했기 때문에 보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작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3.2. 북한의 대응


단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한데...

쫄았다(...)

이 한 마디로 압축이 가능하다. 위의 '폴 버니언 작전' 의 내용을 따져보면, 미 해군은 동아시아를 작전지역으로 삼고 있는 7함대를 총동원하고, 미 공군 역시 한국과 일본 주둔병력 외에도 한반도를 작전지역으로 삼고 있는 폭격기[9]를 동원했으며, 미 육군도 12,000명의 증파요청을 감안하면 최소 사단 단위의 병력의 증파를 계획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도 당시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10] 북한으로서도 미국이 이렇게 강하게 전력을 동원할줄은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작전 내내 단 한 번도 대응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특전사 대원들이 자기들의 경비초소들을 마구 때려 부수고 있을 때조차도 일체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다. 물론, 당시 냉전 시대였기 때문에 북한은 소련중국이라는 원군이 있기는 했지만 소련이나 중공 역시 노발대발하는 미군과 정면충돌하기 싫었는지 "야, 이 새끼들아! 니놈들이 잘못했잖아. 사과나 때려." 라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취해서 북한을 더더욱 쫄게 만들었다. 애초에 한국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소련이 지원해주었기 때문이고 (적극적이라고 하는사람도 있는데 소련은 독소전쟁때 큰 피해로 인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김일성이 자꾸 미군의 증원이 오기 전에 싹 다 밀 수 있으니 지원해달라고 해서 마지못해 해준 것.), UN군인천상륙작전 이후로 압록강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안된 이유 북한이 아직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늦게나마 중국이 참전을 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지,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다면 위의 저 말도 안 되는 도발을 자행한 놈을 위해 자기네 국운을 걸고 미국과 진짜로 전쟁하고 싶을 나라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심지어 미국과 소련이 정면충돌 한다면 그땐 바로 제3차 세계대전이다. 고작 나무 한 그루와 김일성의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소련도 중국도 원치 않았다. 그나마 진짜로 미국이 북한 전역을 점령하려 든다면 또 몰라도 미군이 동원한 전력은 충분히 북한을 갈아버릴 수는 있어도 고작 1만 2천 명의 지상군 증파만으로는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는 없다. 미국이 북한을 손보고(공중폭격으로 주요시설 작살) 휴전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온다고 한들 그 정도면 소련과 중국도 묵인했을 수도 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시기에 상대방의 영역을 일정 수준에서 존중하고 자기 영역을 관리하면서 위기를 관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북한이 멋대로 미국을 건드리면서 소련은 코딱지만한 동맹국도 관리 못한 등신 국가가 되었고 공산권 2인자이자 아시아 1인자인 중국도 자기 앞마당 관리도 못하는 국가가 되었다. 더구나 북한은 소련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해서 양다리 외교로 실리를 챙겼다. 거기다 한국전쟁 때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연명했으면서 전쟁 중부터 전후 복구 동안 지속적으로 친중국파와 친소련파를 숙청해댔다. 평소의 박쥐짓과 북한 내 우호 세력 숙청으로 완전히 미운털이 박혔는데 서로 견제하는라 소련과 중국이 냅둔거지 어지간한 국가였으면 누군가가 손을 봐주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데 미국의 분노를 굳이 정면에서 사면서 북한을 옹호할 필요도 없었고 이 기회에 주제모르고 날뛰던 북한을 미국이 자기들 대신 손 봐주고 이후 중재하면서 위신도 세우고 북한에게 빚도 좀 지우면서 북한이 고분고분해지면 그리 손해도 아니었다.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애초에 흥분해서 미군 장교를 죽이고 난 뒤에 위에 보고가 올라가자 김정일을 포함한 윗선에서 경악을 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 장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겁먹은기절초풍한 김일성이 노발대발하면서 "이런 짓을 왜 했느냐?"라고 질책하자 "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했다."라는 뻔뻔한 거짓말 보고를 올렸다. 당 비서들은 차마 김정일이 시켰다는 말은 못하고, 인민무력부 놈들이 미쳐서 그랬다고 보고를 했다. 김일성은 노발대발하여 인민무력부장 최현을 불러서 쌍욕을 있는대로 퍼부었고, 김정일 죄를 뒤집어쓴 최현은 역시나 열받아서 작전국장을 불러서 조지고 책벌했다고 한다. 내리갈굼은 남북이 따로 없구만? 상기된 대로 미군의 보복작전이 준비되자, 김일성은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명하라.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군이 사과를 했지 않았는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래도 이 사건을 써먹고는 싶었는지, 몇 시간 뒤에 스리랑카에서 진행중이었던 동맹회의에서 "이 사건은 미국놈들 탓이다." 라며 한미주둔군을 질타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결국 승인되었다(...) 물론, 이 사건의 주동자가 누군지 확실하게 밝혀지자마자 정세는 확실하게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위에 적혀있는 대로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실리자마자 주동자는 북한,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정의가 확실하게 성립되었다. 애초에 잘 생각하고 행동했어야지? 판문점의 중심에서 세계를 외치다

이후 북한은 긴급하게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성명을 표했다. 처음 미국은 "유감성명은 잘못 인정이 아니다." 라면서 거부했다가 하루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또 쳐들어올까봐 쫄아서 1년 동안이나 준전시체제를 유지했고, 미군은 일단 폴 버니언 작전 병력들을 철수시켰지만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대결이 일어났다.

북한은 일이 잘못됐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총동원령을 내렸고 대학생들을 군에 동원했으며 노농적위대, 교도대 등의 예비군들도 모조리 동원했다. 심지어 당시 김평일은 이 사건 직후 일성 종합대학학생들을 불러모아 놓은 자리에서 전 학생들의 군입대를 독려했고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인민군에 입대함으로 군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대한 장교들도 60세 미만은 전부 다 군으로 복귀했고, 생산 시설들을 후방에 옮길 준비가 착수되었다. 또한 평양, 황해도, 강원도의 전연지대 주민들의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노약자, 성분 불량계층을 함경도로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해당 지역은 완전히 난리통이었다고 한다. 소개 작업은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보위부가 주도했으며 평양에 주민소개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어 장성택이 모든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8월말부터 11월 중순에 걸쳐서 20만명의 주민들이 이주되었고 황해도, 강원도에서 8천세대의 성분 불량자와 노약자들이 '솎아졌다.' 작업은 은밀하고도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는데,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을 전달하며 정해진 시간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다음에 옆집도 모르게 온 식구를 실어날라버렸다고 한다.

8~11월까지 석달 동안은 모든 군인들이 군장을 싸놓고 잠을 잤다고 하며,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나와 전투위치로 배치되었고 대학생들도 건장한 사람들은 죄다 인민군에 끌려가서 사실상 휴학 상태에 들어갔다.[11] 너무도 급한 소개 작업 때문에 식량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게다가 책임자 장성택이 어찌나 심하게 일을 몰아붙혔는지, 김일성이 자문으로 삼던 김일성대학 통계경제학 교수도 월북자란 이유로 소개되었고 김일성이 당시 국가계획위원장 최재우에게 그 교수를 불러오라고 했다가 소개되었단 소릴 듣고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격노하기도 했다. 그래서 항일 빨치산 가족을 비롯한 7만명을 도로 불러오는 개뻘짓을 해야 했고(...) 책임자 장성택은 일을 과격하게 했다고 책임 추궁당했다. 장성택 밑에서 실무를 맡았던 국가보위부 4국의 보위부원들은 철직당했고 국가보위부장 김병하도 센 문책을 당했다. 김일성은 "해독분자의 소행이다. 당과 국가로부터 인민들을 분리시키려는 자이다. 소개를 시키려면 잘 설복해서 해야지,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날로 짐 싸게 해서 데려가면 되는가?"라고 당간부들을 전부 다 불러모아놓고 비판을 퍼부었다고 한다. 나중엔 더 한 꼴도 당하게 만들었다지 김정일도 "군중 사업에서 10년 후퇴했다", "사람과의 사업에서 10년 손해봤다."고 했는데 이 일이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입안자였던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12]

4. 결과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기존처럼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경계 밖에 있던 상대편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판문점에 전시되어서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 밑동 앞에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미루나무 밑동은 판문점 관람 코스에 들어있기는 하지만, 버스 안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판문점 미루나무 작전>이라는 영화이다. 두 편 다 이낙훈과 태현실이 주연을 맡았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명소가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담당하는 미군 부대는 원래 캠프 키티호크였으나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캠프 보니파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건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박철 중위와 경비대는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판문점에서 심심하면 행패를 부렸는데, 8년후 판문점 소련 관광객 귀순사건 당시 경비병 간의 총격전에 휘말린 후 영원히 판문점에서 사라졌다. 이때 카투사 소속 장명기 상병이 전사했다. 공식적인 문서는 없지만 그 때 미군 경비병들에게 벌집이 된 북한군 시체 중 하나가 박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망 추정인 박철 이외에도 이 사건 이후 판문점 북측 경비원 전원이 교체되었다. 책임자는 숙청돼서 아오지 수용소에 갔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잘가라 이 천하의 개쌍놈

북한은 이후로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감히 무력도발을 하지 못했다. 방송이나 성명서는 미 제국주의자를 맹비난하지만, 진짜로 건드리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미국을 건드렸다가 진짜로 지도에서 나라가 지워질뻔한 경험은 북한이 주제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미국이 진짜로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환영성명이나 미국 비난 성명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면서 불똥이 튈까봐 눈치를 살폈고,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때도 테러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드러냈다. 무서워요 징징 샤를리 엡도 사건이 터지자 북한은 역시 테러리즘을 비난하며 프랑스에 위로 전문을 보냈다. 물론 남한을 상대로는 전면전 아니면 뭐든지 하겠다는 자세이지만 애시당초 미국은 전면전 상황이나 영토가 침탈된 게 아니면 우방국의 전쟁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랬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인민군의 영웅적 행위로 칭송되어 관련자들이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북한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 사건이 북한내에서 어떻게 선전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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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하도 욕을 많이 해서 이전부터 미군은 박철을 '미친 개' 라고 불렀다고 한다.
  • [2] (1922~1998) 1980년대에 3국을 통해 탈북했으며 북한 정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 서용규, 신경완, 신평길 등의 가명과 필명을 썼다.
  • [3]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도 있다(...).
  • [4] 몇 십년 후 공개된 미군 비밀문서에 의하면 이때 미국개성에 포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진짜로 북한을 갈아 엎어버릴 계획까지 세웠었다고 한다. 참고로 데프콘 3는 훈련(연습) 용어로는 '라운드 하우스'라고 부르는 그것으로, 영내에 있는 모든 물자를 방치품/적재품/파기품으로 분류하고 "당장이라도 막사 뺄 준비 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 [5] 북미의 벌목꾼들 사이에 전해지는 설화에 등장하는 거인 나무꾼이다.
  • [6] 당시 미해군 제7함대는 미국 함대 중에서 약체였다. 그렇지만 그 약체인 7함대조차 소련과 중국이 쩔쩔 맬 정도였다. 이 당시나 지금이나 7함대를 총동원하면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단독으로 갈아먹을 수 있을 수준이다. 미국이 대놓고 북한을 지도상에서 초고속 즉시 삭제해버리려고 했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더욱 자세한 사항은 제7함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7] 일설엔 2012년 대선에 출마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이 결사대의 일원이었다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돌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 의원이 당시 특전사이기는 했지만, 이 작전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았고 유사시에 돌입할 대기조에 속해 있었다.
  • [8]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고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즉, 북한군을 구타하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인원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조로서의 투입이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처음부터 저항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 [9] F-111이고 B-52이고, 이 작전에서 동원된 폭격기는 적의 전략목표를 죄다 흔적도 없이 조져버릴 목적으로 설계된 전략폭격기다. 둘 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핵폭탄 떨군 녀석후계기였다. 적 병력을 타격하거나 제압하는 전술타격 목적은 그 목적으로 따로 설계된 전술폭격기나 A-10 등의 공격기가 수행한다.
  • [10] 당시 미군 병사들의 희생으로 미군은 물론 미국 국회도 빡친 상황이였지만 이만한 전력을 동원한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특성상 미국이 이정도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온갖 정신승리를 벌여 나중에 이보다 더한 짓거리를 할 수 도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 [11] 그리고 이 시기 대학생이던 사람들이 대강 중년의 당간부가 되는 시점이 바로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다(...) 괜히 돌머리짓 하는 게 아닌 듯
  • [12] 출처: 신경완의 증언. 중앙books 김정일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