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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하우서

last modified: 2015-01-24 23:43:4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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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Hausser
1880년 10월 7일 ~ 1972년 12월 21일

하우서는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중장이라는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육군에서 퇴역한 후 무장 친위대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해 무장 친위대의 아버지라 불린다.[1]


Contents

1. 육군 - 돌격대 시기
2. 무장 친위대 조직
3. 독소전선에서의 활동
4. 서부 전선에서의 활동
5. 종전
6. 평가
7. 주요 보직 내역
8. 진급 내역
9. 주요 서훈 내역


1. 육군 - 돌격대 시기

하우서는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벨(Brandenburg an der Havel)에서 프로이센 군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쿠르트 하우서(Kurt Hausser)는 독일 제국 육군 소령이었다. 1892년 군에 입대해 1896년까지 쾨슬린(Köslin)에 있는 유년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896년에는 베를린 리히터펠데(Berlin-Lichterfelde) 사관학교에 입학해 189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99년 4월 20일 소위로 임관해 포젠 시 오스트로보(Ostrowo)에 주둔하고 있던 제155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03년 10월 1일 동연대 2대대 부관이 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까지 5년 동안 이 보직으로 재직했다. 1908년 베를린에 위치한 참모대학에 입학해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1911년 7월 21일 졸업했다[2].

1912년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다양한 부대의 장군참모 장교로 근무했으며, 전후 격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 육군에 머물며 1927년에는 대령이 되었다. 1932년 1월 31일 중장 대우로 퇴역했다. 퇴역하면서 1차 세계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우익 준군사 조직 철모단(Stahlhelm)에 입단해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장이 되었다. 얼마 후 철모단은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에 편입되었으며, 장검의 밤 사건으로 인해 돌격대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친위대에 편입되었다.


2. 무장 친위대 조직

1934년에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제안을 수락하고 SS의 본격적인 전투 부대이자 무장 친위대의 전신인 SS전투부대의 육성을 책임지게 되었다.

1934년 11월 15일에는 정식으로 SS에 가입하고[3], 브라운슈바이크 SS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동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SS사관학교 및 자매 학교인 바트 퇼츠 SS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을 제정했다. 하우서는 의기만 높지 실상은 어중이떠중이 모임이나 다름 없던 무장 친위대를 강하게 훈련시키고 하우서의 육군 경력과 이후 무장 친위대 시절의 영향력은 SS전투부대에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지급하는 데 인색했던 육군의 도움 없이 초기 무장 친위대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전문 규격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35년 8월에는 SS사관학교 총감이 되었으며, 1936년 5월에는 SS소장으로 승진했다. 6월 1일 SS 군사 본부(SS-Hauptamt) 작전부장(Che des Führungsamt)에, 동년 10월에는 SS전투부대 총감에 임명되었다. 민족사회주의를 신봉하기는 했지만 나치당이 주장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던 하우서는 SS에 가입한지 2년이 넘은 시기인 1937년 5월 1일에야 나치당에 가입했다. [4]

1939년 9월에 벌어진 폴란드 침공전에서는 육군과 SS 연대 '게르마니아', '데어 퓌러', '도이칠란드'로 혼성 편성된 켐프 기갑 사단의 옵저버로 참전했다. 1939년 10월 SS전투부대가 차량화 사단으로 개편되면서 동 부대 사단장이 되었다. 1940년에 벌어진 프랑스 침공 작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까지 제2SS 기갑 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5]로 개칭된 동 사단을 지휘했다.

3. 독소전선에서의 활동

1941년 8월에는 당시까지의 공적으로 기사철십자장을 수훈했다. 1941년 10월 '태풍 작전' 당시에는 부상을 입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사단장 직을 빌헬름 비트리히 SS소장에게 인계하고 8개월 가까이 요양을 취하다가 익년인 1942년 5월 28일, 무장 친위대 초기 3개 기갑 사단인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를 통합 지휘하는 SS 기갑 군단장으로 전선에 복귀했다.

1942년,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이 포위되는 등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색이 짙어지며 이에 후속하는 소련군의 연속된 대공세로 하우서가 이끄는 SS 기갑 군단에도 비슷한 위기가 찾아왔다.

1943년 2월 하르코프에서 하우서는 소련군에게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한 휘하 군단을 구하기 위해 무조건 도시를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퇴각을 결행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의 분노를 샀지만, 약 한 달 후인 3월 21일 하르코프를 탈환함으로써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마무리지으며 신뢰를 회복했다.[6] 당시 격분한 히틀러는 일단 하우서의 상급자인 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을 면직시켰고, 하우서에게도 따로 책임을 물으려고 했지만 하리코프를 탈환한 공적에 따라 훈장 서훈만이 취소되는 선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 당시 다스 라이히, LSSAH, 그리고 토텐코프를 지휘해 프로호롭프카에서 소련 제5 근위전차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성채 작전 취소 후에는 제9 SS 기갑 사단 '호엔슈타우펜과' 제10 SS 기갑 사단 '프룬츠베르크'로 재편성된 동 군단을 지휘해 동부 전선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었고, 1944년 3월 25일에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야전군 전체가 포위되는 거대한 위험에 직면한 한스 발렌틴 후베 기갑대장의 제1 기갑군을 구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통칭 후베 포위망이라 불리는 카메네츠 포돌츠크 포위망의 한쪽을 무너뜨리고 4월 6일 프룬츠베르크 사단이 제6 기갑 사단과 부차치(Buchach)에서 조우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호엔슈타우펜과 프룬츠베르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4월 말 재편성을 위해 제2 SS 기갑 군단은 후방으로 물러났다.


4. 서부 전선에서의 활동

1944년 6월 6일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부 전선에 있던 제2 SS 기갑 군단이 노르망디로 급파되었다. 하우서는 휘하 제2 SS 기갑 군단을 이끌고 영연방군을 상대로 전략 요충지 캉을 탈환하기 위한 역공세를 기도했다.

6월 28일 제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이 르 망(Le Mans)에 위치한 자신의 사령부에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임으로서 B 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 원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독단으로 하우서가 제7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최초의 무장 친위대 야전군 사령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제7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공적으로 8월 1월에는 SS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 8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한 귄터 폰 클루게 원수 대신 잠시 동안 B 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레즈 포위전 당시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탈출시키기 위해 머리에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맹렬하게 전선 지휘를 했다. 팔레즈 포위망 북쪽에서 캐나다 제2 군단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던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경애해마지 않는 무장 친위대의 최연장자─파울 하우서를 자신들의 보병 수송 장갑차에 태우고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했다. 당시 하우서를 구한 것은 제12 SS 포병 연대 5포대장 쿠르츠바인 SS중위였는데 의식을 찾은 하우서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자넬 군사재판에 회부해야겠군. 어떻게 허락도 없이 사령관을 전장에서 옮겨올 수 있나?".

거기에 쿠르츠바인 SS중위는 부상이 심각했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부득이 허락을 맡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하우서는 그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을 하우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적 전차들이 쿠드하르(Coudehard) 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몽 오르멜(Mont Ormel) 구릉 북쪽 도로를 차단했다. 적들은 재빨리 차량으로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로 인해 도로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특정할 수 없는 위치에서 강력한 적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우린 어둠이 깔리길 기다렸다. 소규모의 기갑 전투단을 구성했고, 손상된 차량들로부터 연료를 구해 야간에 이루어질 돌파를 준비했다. 그 와중에 난 박격포 파편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21시경 다시 부대가 집결했다. 비바람이 몰아쳤다. 당시의 탈출로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간에 8월 21일 새벽이 되기 전 제2 SS 기갑수색 대대와 조우했다. 제2 SS 기갑 군단 사령부를 경유해 르 자프(le Sap)에 위치한 제7군 전방 지휘소로 가기 위해 서둘렀다. 가보니 이미 참모장 폰 게르스도르프 소장이 집단군 사령부에 상황보고를 한 후였다."

8월 26일 제7군을 위기에서 구한 공적으로 하우서에게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이 수여되었다. 두개골 우측 부위의 부상이 심각했기에 장기간 요양을 취한 후, 1945년 1월 23일 상 라인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상 라인 집단군이 바익셀 집단군으로 개편되면서 SS 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에 따라 하우서는 1945년 1월 28일 라인란트의 G 집단군 사령관으로 전속되었다.

이로써 하우서는 유일하게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 무장 친위대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서부 전선의 방어 전략을 놓고 히틀러와 격론을 벌인 후 G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4월 3일 남서 전구 총사령부 참모로 좌천되었다. 3월 초 남서 전구 총사령관은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에서 대전 초기부터 하우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셸(Heinrich von Vietinghoff-Scheel) 상급대장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하우서는 종전까지 이 한직에 머물렀다.


5. 종전

1945년 5월 9일 오스트리아 첼 암 제(Zell am See)에서 미군에게 항복한 하우서는 서부 방면 무장 친위대 부대들의 무장 해제를 맡았으며, 른베르크 전범재판에도 피고측 증인 및 참고인으로 입회했다. 이후 뉘른베르크 포로수용소 등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 1948년 여름에 풀려났다.[7] 그후 릭스 슈타이너, 요제프 디트리히, 헬름 비트리히, 르트 마이어 등과 함께 무장 친위대 퇴역군인 상조회(HIAG)을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남은 생애를 부하들을 돌보는 데 쏟았다. 1972년 12월 21일 루트빅스부르크에서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까지 무장 친위대 퇴역군인 상조회 회장으로서는 물론 전사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한 하우서는 아래와 같은 무장 친위대 전사 관련 서적을 출간했다. 사후 출간된 《Wenn alle Brüder Schweigen》는 무장 친위대 군인들의 사진집으로 본서의 서문을 하우서가 기고했다.


6. 평가

육군에서의 경력과 무장 친위대 창설과 조직에서 세운 공으로 무장 친위대 내에서는 사실상 대선배이자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요제프 디트리히오도르 아이케는 각 사단으로 들어갈 인력 수급에 대한 알력을 하우서와 벌였어도 하우서에게 버릇 없게 대하지 못했다. 디트리히의 경우 하우서에게 눈치가 보여 상급대장 승진을 하우서가 승진한 이후로 미뤘을 정도였다.

군사적으로도 SS임에도 불구하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히틀러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하르코프에서 SS 기갑 군단을 철수시킨 것 등으로 높게 평가 받는다.

또한 무장 친위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하우서의 공적과 노고는 대전 이전에도, 대전 당시에도, 대전 후에도 부하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하우서가 히믈러의 정치 경찰화 계획으로부터 SS전투부대를 군 조직으로서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존경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막장 범죄 집단 무장친위대에서 몇 없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군인이었다는 점이다.[8]

7. 주요 보직 내역

  • 1934.11.15 : 친위대 가입(대원 번호 239,795)
  • 1937. 5. 1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가입(당원 번호 4,138,779)
  • 1939. 7. 2 ~ 1939.10. 9 : 켐프 기갑사단 파견참모 겸 연락장교
  • 1939.10. 9 ~ 1941.10.14 : SS 차량화 사단장, 개칭 후 제2 SS 기갑사단장
  • 1941.10.14 ~ 1942. 5.28 : 입원 가료
  • 1942. 5.28 ~ 1942. 9.14 : SS 기갑군단 지휘관
  • 1942. 9.14 ~ 1944. 6.28 : 제2 SS 기갑군단장
  • 1944. 6.28 ~ 1944. 8.20 : 제7군 사령관
  • 1944. 8.16 ~ 1944. 8.17 : B집단군 사령관
  • 1944. 8.20 ~ 1945. 1.21 : 입원 가료
  • 1945. 1.23 ~ 1945. 1.28 : 상 라인 집단군 사령관
  • 1945. 1.28 ~ 1945. 4. 3 : G집단군 사령관
  • 1945. 4. 3 ~ 1945. 5. 8 : 남서 전구 총사령부 참모

8. 진급 내역

  • 1892. 3.15 : 견습 생도(Kadett)
  • 1899. 3.20 : 소위(Leutnant)
  • 1909. 8.19 : 중위(Oberleutnant)
  • 1914. 3.26 : 대위(Hauptmann)(가진급 일자 1913.10. 1)
  • 1918. 3.22 : 소령(Major)
  • 1923. 4. 1 : 중령(Oberstleutnant)(가진급 일자 1922.11.15)
  • 1927.11. 1 : 대령(Oberst)
  • 1931. 2. 1 : 소장(Generalmajor)
  • 1932. 1.31 : 중장 대우 예편(Charakter als Generalleutnant)
  • 1934. 3. 2 : SA 대령(SA-Standartenführer)
  • 1934.11.15 : SS 대령(SS-Standartenführer)
  • 1935. 7. 1 : SS 상급대령(SS-Oberführer)
  • 1936. 5.22 : SS 소장(SS-Brigadeführer)
  • 1939. 6. 1 : SS 중장(SS-Gruppenführer)
  • 1939.11.19 : 무장 SS 중장(Generalleutnant der Waffen-SS)
  • 1941.10. 1 : 무장 SS 대장(General der Waffen-SS)
  • 1944. 8. 1 : 무장 SS 상급대장((Generaloberst der Waffen-SS)

9. 주요 서훈 내역

  • 1939. 9.18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 5.17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1. 8. 8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3. 7.28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261번째 서훈)
  • 1944. 8.26 : 검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90번째 서훈)
  • 1942. 5. 9 : 1939년 제정 전상장 은장
  • 1943. 1.30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황금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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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에 따라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Papa)"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요제프 디트리히도 파파 제프니까 이 영감은 그랜파여야 하지 않을까
  • [2] 독일 육군의 참모교육과정은 입학자의 75%가 3년후의 졸업때까지 탈락한다.고 하는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력은 하우서가 대전 후반기에 친위대와 알력이 심했던 육군 부대들을 지휘하면서도 트러블이 나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 [3] SS번호 239,795
  • [4] 당원 번호 4,138,779
  • [5] 줄여서 DR 사단으로 부르기도 한다.
  • [6] 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기갑부대를 시가전에 성급하게 몰아넣었다고 하우서를 비판했으나 3월 10일 자로 하리코프 시내로 진격을 명령한 것은 폰 만슈타인이다.
  • [7] 왜 바로 풀려났나면 이레나 센들러가 2500명의 유태인들을 구해준것과 자신이 총애했던 알베르트 괴링의 유태인과 포로석방을 묵인해줬기 때문이다.
  • [8] 왜냐 앞에 이레나 샌들러가 2500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항아리에 넣어 몰래 친구의 집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밑에 묻어 두었는데 이걸 파울 하우서가 알면서도 모른척 그 친구 집을 도로 공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 집과 사과나무를 밀어버리고 도로를 깔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