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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last modified: 2019-06-02 01:02:4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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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의 국기. 통상적으로 쓰인다.


에스파냐어: República del Paraguay
과라니어: Tetã Paraguái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경제
4. 정치
5. 스포츠
6. 문화
7. 외교관계
8. 리그베다 위키에 항목이 만들어진 파라과이 국적 인물

1. 개요

남아메리카 중앙에 있는 나라. 공식 명칭은 파라과이공화국(República del Paraguay)이다. 국명은 국토를 관통해서 흐르는 파라과이 강에서 유래한다. 수도는 아순시온(Asunción). 국토면적은 40만 7,000㎢, 인구는 약 650만 명. 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대평원인 그란차코(Gran Chaco)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원 국가이다. 공용어는 과라니어스페인어다. 화폐 이름도 과라니.

파라과이 국기는 잘 보면 네덜란드 국기 가운데에다가 문장을 새겨놓은 듯한 모양인데, 국기 가운데 문장의 앞뒷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앞뒤를 구별해서 걸어줘야 한다.

2. 역사

파라과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과라니어를 사용하면 물건값을 깎아주기도 한다나. 진짜 과라니족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백인과 메스티소임에도 국민의 90%가 과라니어를 할 줄 안다고 한다.

대부분의 남미지역이 그렇듯 식민화 이전에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1536년 경부터 에스파냐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1607년, 과라니족 원주민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친 스페인 정부는 파라과이를 예수회에 위임 통치를 맡겼다. 예수회는 1609년 '레두시온(reduccion)'[1]을 세웠우고 원주민들의 강제노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콩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 예수회의 레둑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우려내서 마시는 찻잎)의 수출로 국제무역의 강호로 떠올랐다. 흠좀무. 이런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의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 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둑시온 제도를 금지시켰다.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이에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내용.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18세기의 레둑시온 체제는 종교를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사에 있어서는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2]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민지 생활이 계속되던 중,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에스파냐(스페인)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에는 과거 레두시온 체제의 저력(?) 때문인지 유럽 은행의 빚에 기대지 않는 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남아메리카 최강 클래스의 국력을 갖췄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럽 열강의 미움을 받았고 쇄국정책을 펴는 정신 나간 독재자의 국가라는 욕을 먹기도 했다.(...) 그 당시에 자국 기술로 증기선을 만들어 띄울 수 있었던 유일한 남미 국가이기도 했다(영국 배를 한 척 사고 학생들을 유럽에 파견해 기술을 카피했다고 한다).

결국 자기네 빚을 얻어쓰지 않는 괘씸한 파라과이에 열 받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내전에서 반파라과이파를 밀면서 3국 동맹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이 일어났다...

...라고 지금까지 엔하위키에 적혀 있었으나, 영국이 3국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론은 사실 90년대에 폐기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에 한창 좌파운동의 바람이 불때 이런 이론을 주창한 남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이 이론을 뒷바침할만한 증거 자체가 없다! 그냥 대충 심증을 가지고 한 추측이었던것. 그 심증이라는 것도 웃긴것이 당시 파라과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유럽 열강을 열받게 할만한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영국이 전쟁의 흑막이었다는 주장의 다른 '근거', 즉 영국이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로 초토화된 미국 남부대신 파라과이를 수탈해서 목화를 얻고자 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이미 이집트를 장악하여 이집트에서 목화를 신나게 탈탈 털고 있던 상황에 전쟁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 이렇게 미약한 주장이 머나먼 한국까지 퍼지게 된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브라질아르헨티나가 이런식의 물타기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영국에 돌릴수 있었기 때문에 교과서에까지 실어올리며 대대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다. 일본?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전쟁에 대한 결과는 파라과이에 있어 거의 대학살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하여간 오늘날에 있어 정설은 야심만만한 로페즈 대통령 치하에서 국력이 상승세에 있던 파라과이가 이웃 3국과 충돌했다는것. 실제로도 당시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 로페스 대통령은 내륙국 파라과이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브라질 쪽으로 해안선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짜고 있었다.[3]

그러던 찰나 기회(?)가 찾아왔다. 현재의 우루과이지역이 브라질에게 반기를 들어 전쟁을 일으킨 것인데, 이 기회를 놓칠세라 파라과이가 국경선을 넘어온 것.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 측을 지지하여 브라질을 공격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냥 강건너 불 구경하듯 손 놓고 있었지만 로페스가 자기네 의향을 무시한 채 아르헨티나 국경선까지 넘어오니까 괘씸해서 거들게 되었다.[4] 우루과이는 당시 막 독립을 성취한 직후인지라 그냥 아르헨티나를 도와서 거들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삼국이 동맹맺은 꼴이니 삼국동맹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파라과이는 이 전쟁 초기에 3국 동맹군을 말 그대로 관광보냈다. 징병제 국가였던 파라과이의 병력은 10만가량으로 추정되나 이에 반해 3국은 기껏해야 2~3만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바로 얼마 전 까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관계였으니... 갑툭튀한 파라과이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영국의 은근한 뒷바라지로 무장한 끊임없는 물량전술, 그리고 파라과이에게 있어 숨구멍과도 같았던 라플라타 강 유역을 점령해버리면서 파라과이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로페스는 패배를 직감하며 온갖 외교적 수단을 써봤지만 3국의 분노를 잠재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되니 아예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식의 정신승리에 도취하기에 이르렀다. 항복을 권하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무조건 사형시키도록 대통령명이 떨어졌을 정도.

거인같은 두 나라를 상대하기엔 여전히 작은 파라과이인지라 장기전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구도였음에도 불구, 있는거 없는거 다 끌어 모아다가 혹독한 훈련을 시켜 무조건 전쟁터로 내모는 바람에 남성 인구의 90%가 사망하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당한 바 있다. 전후 남겨진 남성이 약 3만명이었다고 한다. 결국 1869년에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 패주한 로페스 일당을 이듬해 3월에 잡아다가 사형시킴으로서 전쟁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결과는 브라질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왕창 빼앗기고 인구는 53만명에서 22만명으로 대폭 감소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이 상처는 100년이 훌쩍 넘긴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뒤 1932~1935년간 볼리비아와 그란 차코 지방[5] 일부인 차코 보레알 지방(25만 9,000㎢ 넓이로 한반도보다 더 크다)을 두고 차코전쟁(Guerra del Chaco)을 벌이게 된다. 이 전쟁 당시 국제적으론 볼리비아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볼리비아는 인구도 3배가 더 많았으며 땅도 훨씬 넓고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장비와 무기도 더 우수했으며 1차 세계 대전 및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독일 장군 한스 폰 쿤트(1869~1939)가 군사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라과이군 지휘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1880~1940)는 차코 보레알 지방에 석유가 많은 것 같으니 해외 석유 기업들의 자본 지원을 요청했고 바로 네덜란드 이 이 지역 석유개발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장비 자금을 제공했다. 미국도 질세라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같은 조건을 요구해 이른바 정유업체 전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우선 저지대 늪지가 많은 차코 보레알 지방 특성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들을 군인으로 고용했으며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로 전투를 벌여 큰 효과를 거뒀다. 결국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사실 볼리비아도 고전했지만 전쟁 말에는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더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컸는데 전쟁을 피하고자 차코 보레알 지역 난민이 아르헨티나로 계속 오는 통에 신경쓰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겉으론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전쟁을 안 끝내면 아르헨티나도 전쟁에 끼어들어 두 나라 다 묵사발 내겠다고 으름짱을 내놓았는데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미 으뜸 경제 및 군사 최강국이기에 두 나라 모두 아르헨티나에 맞서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휴전협정을 맺는다. 전쟁은 1935년에 끝내고 여러 회의 끝에 1938년에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종전평화협정으로 완전히 끝난다.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4/3을 손에 넣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유역 및 푸에르토카사도 지역을 얻어서 어느 정도 땅을 확보했지만 전쟁 피해가 훨씬 컸기에 전쟁 중에 대통령이 사임하고 사령관도 여럿 교체될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전술적 승리및 이득은 파라과이가 더 컸기에 볼리비아는 전후 처리에 골치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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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G image (Unknown)]

두차례 전쟁으로 인한 파라과이의 영토 변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티가리비아는 1939년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겨우 1년만에 영토 순방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라과이에선 자국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으며 그를 기렸다. 그런데 웃기게도 전쟁이 끝나서 가장 좋아라하던 이들 중 하나인 쉘은 얼른 차코 보레알 지방에서 석유 탐사를 시작했지만 끝내 석유는 전혀 없던 게 드러나버리면서 실망해야 했다...

3. 경제

산업은 목화와 콩, 동물 사료 생산 등 대부분 1차 산업에 치중되어 있다. 남미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을 잘 살리면 대륙의 물류 허브가 될 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위치한 접경국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이고 앞의 두 나라는 특히 남미 경제의 양대 축이니까.

4. 정치

해방신학에 몸담았던 신부 출신의 페르난도 루고가 2008년, 61년간 지속된 우파 콜로라도당(赤黨) 집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 뒤 루고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여성들이 아기까지 데리고 자꾸 나타나 입방아에 많이 올랐다. 2012년 6월 15일 경찰과 빈농들 간의 충돌로 최소 1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야권은 루고의 탄핵안을 발의했고, 6월 22일 탄핵안 통과로 루고는 사임했다. 탄핵안 통과 당시 의사당에서는 수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이다 해산되었고, 중남미 좌파 진영은 "의회 쿠데타"라며 탄핵을 비난하기도.

위키릭스가 미국이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 난리가 나기도 했다. 이거?

5. 스포츠

남미 국가 답게 축구가 인기좋다. 국대에 관한 것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한국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파라과이 사람으로는 다혈질에 골넣는 골키퍼로 유명한 칠라베르트[6]와 옛 미수다에 출연한 아비가일 등이 있다.
사족이지만 칠라베르트는 1999년 파라과이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불참하면서
"파라과이에는 미국거지보다 못사는 1,800만 인구가 살고, 미국 부자보다 잘사는 20만명 부자가 산다. 그런 부자들 이득을 대변하는 오비에도-당시 파라과이 대통령- 정권을 찬양할 결과를 만들고 싶지 않다."
라는 말을 남겼다. 오비에도는 무척 불쾌해했지만 당시 파라과이 대학생들이 칠라베르트를 대통령으로 추천하자고 무척 칭송했었다. 하지만 칠라베르트는 내가 정치에 나서면 상대방을 의회에서 패줄테니 말은 고맙지만 사양한다는 뜻을 밝혔다.

2010년 6월 29일 11시부터 6월 30일 새벽까지 월드컵 16강전 파라과이 vs 일본 경기 때(#, #). 한, 일 양국 네티즌 사이의 키워 때문에 주한 파라과이 대사관 사이트가 다운되는 일이 발생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병림픽. 여담으로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 특별참가한 일본을 4-0으로 박살 낸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선 승부차기로 간신히 승리

6. 문화

의외로 파라과이에서 한식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수도인 아순시온의 센트로에 자리잡은 한식당 restaurante seul은 관광객은 많이 없는 곳이라서 매일 현지인 손님이 이어지고 있는데 1인당 한화 1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참고로 파라과이에서 빅맥이 한화 1700원인데!) 줄 서서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메뉴는 갈비찜,닭도리탕,짬뽕,불고기,탕수육,김밥,돈까스,김치 등으로, 다소 한식이라기엔 애매한 것들이 많다. 몇몇 메뉴는 중국음식이나 일본음식이다. 심지어 김치는 우리나라의 짠 맛이 아니라 단 맛이 대단히 강하게 개량되었다. 그러나 이게 꼭 나쁜 게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봐도 정통 중식이나 일식은 정말 얼마없다. 우리나라 짜장면이나 일본 나가사키 짬뽕, 그리고 그걸 맵게 한국화한 한국 짬뽕처럼 정통 중식과 거리가 먼 중식은 이미 중남미에 쌓이고 쌓였다. 그렇기에 정통한식을 고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맵고 짜게 만드는 게 정통 한식?

여하튼 파라과이에선 갈비찜이나 불고기가 굉장히 유명하고갈비찜은 항상 옳습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심지어 탕수육까지 이미 훌륭한 한식으로 알려져있어서 덕분에 한인파워가 남미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현지인들도 몇몇 한국단어를 알 정도라고 한다. 한식이 알려진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일식집과 중식집마저 파라과이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 순수한 전통적인 한식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한식의 세계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
그 이유는 파라과이는 한국인 이민 1세대가 정착한 곳이라서 한국인들이 많다. 노래방도 흥행하고 있고(일본식 가라오케가 아니라 한국에서 운영되는 노래방과 같다) 전국노래자랑도 다녀갔을 정도이며 사시장에 가보면 한국인이 주인인 곳이 많다. 브라질과 칠레의 교민들이 매우 조용한 데 비하여, 파라과이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소 낙후된 곳이라서 한국인 교민들이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교민들이 소주나 삼겹살, 한인 청년들의 주말 축구 등 한국문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현지화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다 보니 인프라나 교육수준이 낮은 현지인들도 한국에서 만든 것이면 좋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7. 외교관계

한국과는 1962년에 외교를 맺었고 2002 한일월드컵 때 전 경기를 한국에서 경기를 한 사례가 있었다. 북한과는 미수교 상태이다.

대만과 수교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가장 큰 나라이다.

8. 리그베다 위키에 항목이 만들어진 파라과이 국적 인물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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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마을
  • [2] <최초 인류의 후예들> 63~64쪽에서 인용.
  • [3] 조선 기술을 가져하도록 한 것도 항구를 차지한 다음에 쓰기위함이 컸다고 볼 수 있다.
  • [4] 브라질 군을 우루과이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며 파라과이의 남쪽경로, 그러니 아르헨티나 영토를 열어달라고 요구한 것인데 길을 빌려 씨를 말릴 것이라 예측한 아르헨티나가 이를 거부하였다.
  • [5] 그란 차코 지방을 모두 합치면 60만㎢가 넘는다.차코 보레알을 빼면 나머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땅이다.
  • [6] 필드골을 넣는다는 건 아니고 페널티킥과 프리킥으로 30~40골 정도를 득점했다. 90년대 후반(1998 프랑스 월드컵)에 유명해진 선수로, 골을 넣는 것만 유명하지만 파라과이 축구의 황금기를 열은 칠라베르트는 최후방 수비수 역할까지 하면서 맹활약했다. 그 1998년 프랑스대표팀과 반코트 경기를 하면서도 로랑 블랑의 결승골이 터지기 전까지 전후반 90분, 연장전반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는 괴물같은 활약을 했다. 은퇴 후에는 정치에도 뛰어들기도 했고 해설자로 전업해서 2010년 6월 29일 vs 일본전을 해설하는 등 여러모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