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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앙리

last modified: 2015-04-05 03:28:56 Contributors


풀 네임 Thierry Daniel Henry(티에리 다니엘 앙리)
생년월일 1977년 8월 17일
신체 조건 188cm, 83kg
국적 프랑스(France)
출생지 레줄리(Les Ulis)
포지션 스트라이커
별칭 킹 앙리(King Henry)
유스 클럽(1983- 1994) CO 레줄리(1983 - 1989)
US 팔레조(1989 - 1990)
ES 비리 샤티용(1990 - 1992)
클레르퐁텐(1992)
AS 모나코(1992 - 1994)
클럽 경력(1994~) AS 모나코(1994 - 1999)
유벤투스 FC(1999)
아스날 FC(1999 - 2007)
FC 바르셀로나(2007 - 2010)
뉴욕 레드불스(2010 - 2014)
아스날 FC (2012)(임대)
국가 대표팀 경력(1997 - 2010) 프랑스 U-20(1997) 5경기 3골
프랑스(1997~2010) 123경기 51골[1]
등 번호 14(클럽)
12(국가 대표팀)

2001 UEFA BEST 11
FW
다비드 트레제게
FW
티에리 앙리
MF
리 곤살레스
MF
지네딘 지단
MF
파트리크 비에이라
MF
데이비드 베컴
DF
비셴테 리사라수
DF
파트리크 안데르손
DF
사미 히피아
DF
스민 콘트라
GK
티아고 카니사레스
2002 UEFA BEST 11
FW
호나우두
FW
티에리 앙리
MF
이미언 더프
MF
지네딘 지단
MF
미하엘 발락
MF
클라렌스 세도르프
DF
호베르투 카를로스
DF
리스티안 키부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카를레스 푸욜
GK
슈튀 레츠베르
2003 UEFA BEST 11
FW
뤼트 판 니스텔로이
FW
티에리 앙리
MF
파벨 네드베드
MF
지네딘 지단
MF
데이비드 베컴
MF
루이스 피구
DF
호베르투 카를로스
DF
파올로 말디니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파울루 페헤이라
GK
지안루이지 부폰
2004 UEFA BEST 11
FW
안드리 셰브첸코
FW
티에리 앙리
MF
파벨 네드베드
MF
호나우지뉴
MF
니시
MF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DF
애쉴리 콜
DF
히카르두 카르발류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카푸
GK
지안루이지 부폰
2006 UEFA BEST 11
FW
사무엘 에투
FW
티에리 앙리
MF
호나우지뉴
MF
카카
MF
세스크 파브레가스
MF
스티븐 제라드
DF
필립 람
DF
카를레스 푸욜
DF
파비오 칸나바로
DF
루카 잠브로타
GK
지안루이지 부폰
2006 FIFPro World XI
FW
호나우지뉴
FW
티에리 앙리
FW
사무엘 에투
MF
카카
MF
지네딘 지단
MF
안드레아 피를로
DF
잔루카 참브로타
DF
존 테리
DF
파비오 칸나바로
DF
릴리앙 튀랑
GK
지안루이지 부폰

2003 Ballond'or
수상
파벨 네드베드
2위
티에리 앙리
3위
파올로 말디니
2006 Ballond'or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2위
지안루이지 부폰
3위
티에리 앙리

아스날 FC 역대 주장
파트리크 비에이라
(2002~2005)
티에리 앙리
(2005~2007)
리엄 갈라스
(2007~2008)

"나는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기억하길 원한다."

아스날의 킹

Contents

1. 소개
2. 출생 및 어린 시절
3. 프로 경력
3.1. AS 모나코
3.2. 유벤투스
3.3. 아스날 FC
3.3.1. 1999-2000시즌
3.3.2. 2000-2001시즌
3.3.3. 2001-2002시즌
3.3.4. 2002-2003시즌
3.3.5. 2003-2004시즌
3.3.6. 2004-2005시즌
3.3.7. 2005-2006시즌
3.3.8. 2006-2007시즌
3.3.9. 2011-2012시즌
3.4. FC 바르셀로나
3.4.1. 입단 전
3.4.2. 활약상
3.5. 뉴욕 레드불스
3.6. 은퇴 이후
4. 국가대표
5. 플레이스타일
6. 앙리에 대한 말말말
7. 여담
8. 기록
8.1. 대회 실적
8.2. 득점 기록

1. 소개

프랑스의 축구 선수

그의 커리어는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100년이 넘는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득점왕
그리고 축구선수로서 들 수 있는 트로피를 모두 들어 본 남자

2003~2004 시즌 아스널 무패우승 신화의 주역. 또한 프리미어 리그의 최고 외국인 선수로 꼽히기도 한다.

2. 출생 및 어린 시절

1977년 8월 17일[2] 파리 근교 에손 주(L'Essonne)의 도시 레줄리(Les Ulis)에서 태어났다. 출생지가 빈민가 지역이라 환경이 좋지 않았다고 하며 앙리 역시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악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3]

앙리의 아버지도 축구 선수였기에 불량스런 생활을 청산하고자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린 앙리도 축구에 관심을 보였지만, 타고난 신체의 유연성과 폭발적인 스피드를 유심히 지켜본 학교 체육선생의 권유로 육상 허들 선수를 하기로 한다. 이후 육상만 하다가 육상의 길을 접고 다시 축구선수가 되기로 한다. 그 계기는 바로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반 바스텐이었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 백넘버 12번을 달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도전에서 직접밝힌바 육상선수는 한적이없다고한다 그의 삼촌이 육상선수였다고)

3. 프로 경력

3.1. AS 모나코


AS 모나코 시절, 단짝 다비드 트레제게와 함께

1992년, 앙리는 클레르 퐁텐 축구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두각을 나타냈고[4] 이듬해인 1993년 AS 모나코 유스팀에 들어갔다. 이때 모나코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센 벵거.[5]

앙리의 첫 프로 경기는 1994년 8월 31일 OGC 니스와의 경기. 다음달인 9월 17일에 벵거 감독이 해임되었지만 이후 감독들에게도 역시 신뢰를 받았다. 1996-1997 시즌 모나코가 리그와 컵 더블을 하며 앙리 역시 커리어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다. 자국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윙 포워드로 출전하여 팀내 최다 득점을 기록,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다.

98년 월드컵의 우승 이후 1998-1999 시즌 중반까지 다소 부진했고, 1999년 1월에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로 향하게 된다.

앙리는 모나코에서 4시즌 반 동안 141경기에서 28골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2. 유벤투스


티에리 앙리 커리어의 암흑기

유벤투스가 107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6] 앙리를 데려왔지만 결과는 망했어요. 앙리의 장점은 탁월한 돌파와 스피드였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앙리의 스피드와 돌파력만 가지고 윙에 쳐박은게 문제다. 모나코에서 데뷔할때부터 앙리는 스트라이커로 데뷔했다.

이 때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카를로 안첼로티였는데 치아노 모지에게 앙리가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 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모지가 그냥 윙만 뛸줄 안다길래 판매에 찬성을 했다. 참고로 안첼로티가 가장 후회하는게 이때 앙리를 스트라이커로 써보지도 않고 팔아버린것이라고. 그리고 앙리를 팔라고 한 모지는 승부조작으로 유베를 제대로 말아먹는다

유벤투스에서 앙리는 반 시즌 동안 16경기 3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팬들도 월드컵 거품이 껴있다고 비판을 가했고 앙리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6개월이 앙리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위기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은 프로 데뷔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였다. 레알 마드리드로 니콜라 아넬카를 보내며 200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7]을 거머쥐고 있던 그는 의외로 세리에 A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윙어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3.3. 아스날 FC


나는 전설이다

아스날의 감독은 자신을 데뷔시켜준 벵거였고 이미 비에이라나 프티같은 프랑스 국대 동료도 있어서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앙리를 가장 잘 서포트해줄 수 있는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테크니션도 있었다. 프리미어리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스피디한 리그여서 앙리와 쿵짝이 잘 맞았다. 이러한 점들이 앙리의 성공 요소로 꼽힌다. 아스날에서 앙리는 4차례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03/04, 04/05, 05/06시즌에는 3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EPL 득점왕은 니스텔로이가 단 한번 페널티킥을 몰아차면서 25골로 간신히 득점왕을 한번 한 2002-2003 시즌 이외에는 모두 앙리가 차지했다.[8] 그나마 그 시즌도 득점왕 못했다고 못한 것도 아니고 PK골도 없이 24골, 23어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아스날도 앙리의 활약 속에 이 기간동안 2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전설적인 무패우승도 바로 이 때. 2000년대 중반까지 말 그대로 아스날의 왕이자 EPL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특히 아스날에서의 기록은 언터처블 그 자체.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총합 ''226골'''은 아스날 클럽 역사상 최다골이었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임대 확정 후 리그에서 1골, FA컵에서 1골을 추가하며 자기가 자기 기록을 경신 하였다. 이쯤되면 가히 레전드급.

3.3.1. 1999-2000시즌


처음 몇 경기에서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9] 그냥 적응기였을 뿐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9월 초 사우샘프턴과의 아스날 역사 첫골을 시작으로 첫 시즌부터 20골을 넘게 득점했다[10]. 벵거는 유벤투스에서 윙 포워드로 뛰던 앙리에게 스트라이커의 임무를 주고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아스날의 패싱 축구와 공간침투는 피지컬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하는 앙리에게 안성 맞춤이었다.
아스날에서 첫 시즌 프리미어리그에만 31경기 17골을 기록했으며 전체 성적은 47경기에서 26골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3.2. 2000-2001시즌

유로 2000을 우승하고 개막된 아스날에서의 두 번째 시즌. 앙리와 함께 유로2000 우승의 주역인 윌토르와 피레스가 아스날에 합류하면서 팀워크가 한단계 좋아졌다. 거기에 기존에 있던 데니스 베르캄프와의 호흡도 갈수록 좋아지면서 앙리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했고 프리미어리그 득점 3위에 랭크된다. 두 시즌 연속 리그에서 17골을 기록했다.
다만 첫시즌과 두 번째 시즌에 맨유의 기세가 너무 강할 때여서 아스날은 리그 우승 판도에서 잠시 밀려나있을 시기였기에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었다.

3.3.3. 2001-2002시즌

아스날의 주장인 토니 아담스가 은퇴하고 토트넘의 주장인 솔 캠벨이 자유계약으로 아스날로 온 시즌. 캠벨이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스날 역시 더 강해졌고 그 정점에는 앙리가 있었다. 프리미어리그와 FA컵 더블을 기록한 시즌. 24골로 리그득점왕을 차지했다.

3.3.4. 2002-2003시즌

리그에서 막판 뒷심으로 맨유에게 역전 우승을 당했고 앙리 본인도 반니에게 득점왕을 내주었다. 하지만 24골 2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 토트넘전에서 80미터를 단독으로 질주해 골을 넣은 시즌이 백미. 득점왕이 유력했으나 드 반 니스텔루이가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추가하며 아쉽게 1골차로 득점 2위에 머물렀다.

3.3.5. 2003-2004시즌


그 유명한 무패 시즌. 리그 30골로 다시 득점왕을 차지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앙리의 최전성기.


하이버리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넣은 골장면.[11]

3.3.6. 2004-2005시즌

25골로 2시즌 연속 득점왕. 이 시즌에도 활약이 괜찮았으나 첼시가 승점 95점을 기록하는 바람에 아스날은 승점 83점을 기록하고도 2위에 그쳤다. 맨유와의 FA컵 결승전에는 부상으로 뛰지 못했다.
찰튼과의 홈경기에서는 힐킥으로 골을 넣기도..

3.3.7. 2005-2006시즌


아스날의 옛 홈구장 하이버리에서의 마지막 시즌. 주장인 비에이라가 떠나면서 앙리가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시즌에 챔피언스리그 프라하 원정경기에서 역전골을 터트리며 이안 라이트를 제치고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가 된다.
리그에서 27골로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팀은 전술의 중심인 비에이라가 이적하면서 많이 약해졌고 마지막 경기에서야 겨우 4위를 할 수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이자 하이버리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위건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을 챔스권 진입에 안착시켰다. 마지막 PK골을 넣고 잔디에 키스하며 자신의 전성기와 함께한 하이버리 경기장과 작별을 고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의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한다. 특히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을 농락하며 기록한 골은 진정 끝판왕의 포스. FC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에서는 캠벨이 선취골을 기록하지만, 옌스 레만이 퇴장당하면서 역전패를 당하고 만다.


3.3.8. 2006-2007시즌

아스날의 새로운 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의 첫 시즌. 그리고 앙리의 아스날 커리어 마지막 시즌.
앙리가 최고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큰 힘이었던 동료들은 에미레이츠 이전 정책으로 구단이 긴축재정에 들어감에 따라 어쩔수 없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었다.
비에이라와 에두는 이미 떠났고 베르캄프는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은퇴했고[12] 피레스는 비야레알로 갔다.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솔 캠벨은 포츠머스로, 애슐리 콜은 첼시로 떠났다. 기대를 많이 받던 호세 레예스도 프리미어리그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며 임대형식으로 스페인으로 떠난다. 프레드릭 륭베리은 예전같지 않았다. 팀은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주축으로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베르캄프와 피레스등과 환상의 궁합을 보이던 앙리는 젊은 선수들과의 호흡에도 다소 문제를 보였다. 사실 호흡은 그럭저럭 맞았는데 문제는 베르캄프나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과 너무 잘맞아서 상대적으로 안 맞아보였다는 것이다.
선수 본인도 최근 몇 년간 많은 경기를 뛰었고 또 스피드와 활동량을 주무기로 하기에 신체적인 노쇠화가 급격히 진행된 상태였다. 게다가 시즌 전 열린 월드컵에서 결승전까지 뛰었으니 시즌 시작부터 부진은 예상된 결과 였다. 결국은 잘 걸리지도 않던 부상까지 시달리며 시즌 중반 이탈하고 제 모습을 전혀 못 보여준 채 시즌을 마무리한다.

시즌이 끝나고 무한도전을 찍었다. 당시 개인 전용기로 밤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한국의 아스날 팬사이트인 ‘하이버리’에서 버스를 빌려 30명정도가 앙리를 열렬히 환영하기도.. 당시만 해도 아스날 소속이었는데 얼마 후 바르셀로나로 이적을 결심한다. 프리미어리그, FA컵, 유럽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거의 대부분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앙리에게 남은 것은 빅이어였다. 아스날은 이미 1시즌 전에 빅이어를 들어올릴 절호의 찬스를 놓쳤고 경기장 이전으로 인한 재정정책때문에 앞으로 또 언제 챔스를 들어올릴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챔스 우승권의 팀중에 호나우딩요, 메시, 에투가 있던 바르셀로나를 택한다. 벵거도 제자의 열망을 알고 있었고 새로운 팀에 앙리가 적응을 못한다고 판단하며 그를 보내기로 결정한다.[13]
이로써 앙리의 아스날 생활이 마무리 되었다. 369경기 226골.
이 기록은 몇 년 후에 임대생활을 통해서 업데이트된다.

3.3.9. 2011-2012시즌


1월 10일 FA컵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만나 자신의 '후계자' 시오 월콧과 나란히 교체 출전하였고 0:0으로 답답하던 상황에서 78분 경 결승골을 뽑아냈다. 스피드는 느려졌지만 오프사이드를 뚫는 순간적인 움직임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슈팅으로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왕의 귀환. 더불어 기록은 현재진행형 ㅎㄷㄷ... 샤막 체임벌린 박주영 베나윤 다 필요없고 앙리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선수들과의 호흡 자체는 아직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앙리 본인 탓이라기보다도 팀 호흡 자체가 그리 잘 맞고 있지 않는 아스날이긴 하지만. 블랙번은 7-1로 폭격한 앙리의 마지막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경기에서 팀의 7번째 골을 기록했는데[14]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직후 2월 12일에 열린 리그 25 라운드 선더랜드 AFC 원정에서 인저리 타임에 극적인 역전골을 작렬하여 2:1 승리에 기여했다. 이로써 자신의 프리미어리그 통산 득점 기록도 1골 더 올려놨다.[15] 아스날 통산 376경기 228골 92어시스트.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어 아스날에 올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고 이 기록이 사실상 아스날의 최종 기록이라고 보면 될듯.

3.4.1. 입단 전

본인이 워낙 벤치에 앉아있는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크지않은 부상을 입었을때는 출전을 강행했고 국가대표팀에서의 혹사 또한 이어졌다.[16] 06/07시즌에는 시즌 중반에 시즌아웃 되었고 07/08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에이전트 데런 데인이 바르셀로나에 연락해 이적을 성사시켰다. 벵거도 앙리의 피지컬도 떨어지고 있었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앙리의 이름값에 비해 싼 가격인 2천 4백만 유로에 이적을 허락했다.

메디컬 체크 당시 바르셀로나 의료진에게 "이 몸으로 어떻게 축구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앙리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라는 이야기가 돌곤 하는데, 이런식의 이야기는 선수 이적시 선수 당사자의 사기진작(?), 언론 플레이 등의 이유로 나오는 이야기라 엄청나게 과장된 이야기라는걸 감안해야 한다. 아르연 로번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가 첼시에서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길때마다 새 소속팀의 의료진은 전 소속팀 의료진의 선수 관리 수준을 폭풍 디스 하였다. 노인에게 세계구급 의료진도 별 수 없다! 역시나 바르셀로나 이적 후 앙리는 그 엉망인 몸으로(?) 상대편 수비진을 피지컬로 압도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여줬다. 위 서술대로 축구를 못 할 몸이었으면 전혀 불가능할 일. 물론 부상을 안고 뛰면서 몸에 부하가 심하게 걸렸던건 맞다. 06/07시즌을 날리다시피한건 그때문이다.

3.4.2. 활약상


확실히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바르셀로나 구단 차원에서도 선수를 상당히 배려해주었고, 아스날 시절의 14번을 그대로 달았다.[17][18] 참고로 아스날 FC에서 그의 번호 14번은 현재 시오 월콧이 달고 있다. 앙리 본인 역시 움직임 자체는 예전 전성기만 못했지만 골 결정력은 살아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왼쪽 윙포워드로 출전하면서 앙리-사무엘 에투, 리오넬 메시의 공포의 삼각편대를 구성하면서 셋 다 엄청난 스탯놀이를 했다. 다만 앙리 팬들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왼쪽 윙포워드로 뛰던 점일 것이다. 윙포워드로서도 강력했고 더러운 스탯을 쌓았지만, 이따금 경고누적 등으로 에투가 결장해 센터포워드로 뛸 때는 더욱 무섭게 스탯을 박았으니까.[19] 결국 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풀이에 성공한다. 우승 직후 빅 이어를 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앙리의 모습은 축구팬이라면 보면서 가슴이 아리는 장면. 앙리는 시즌 26골을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넘은 6관왕이란 대업에 기여한다.

하지만 09/10 시즌에는 폼이 너무 하락한데다[20] 페드로 로드리게스, 보얀 크르키치 등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신예들과 경쟁해야했고 결국 페드로에게 밀려났다.[21] 여기에 바르샤의 재정난 크리가 더해지면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앙리를 팔기로 결정했다.

결국 앙리는 FC 바르셀로나에서 오랜 염원이었던 유럽 챔피언에 오른 후, MLS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3.5. 뉴욕 레드불스


첫 시즌 활약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18경기 뛰면서 11골 넣고 주장까지 하는걸 보면 그래도 클래스는 클래스인듯. 미국에선 당연하지만 헨리라고 부르는듯 하다.(...) 2012년 1월부터 아스날로 2개월간 임대가 확정되었다. 이로서 5년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팀으로 복귀를 하게되었다.허나 이때문에 박주영의 임지는 점점 좁아지기만 하고... 아스널 임대기간 동안의 활약에 고무됐는지 2012시즌엔 2011년보다 한층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 편이다. 시즌 성적은 25경기 15골 12어시. 물론 아스널 리즈시절에 비하면 좀 아쉬운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수는 없다.

2014 시즌 이후 레드불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고 옛 소속팀 AS 모나코로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이어갈 것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기사

3.6. 은퇴 이후


친정팀 아스날에서 아르센 벵거의 지도 아래 코치 연수를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스카이스포츠에서 개리 네빌제이미 캐러거와 함께 축구 방송 중계를 한다고 밝혔다. 해설판의 맨유vs리버풀vs아스날 스카이스포츠와 코치직 겸직을 가능한 계약을 맺었기에 웨일즈 축구협회에서 지도자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위한 연수를 받기 시작했고, 2015년 2월 20일부로 아스날의 U16팀 코치에 부임했다.

월드컵 기간에 BBC에 분석가로 출연했지만 스카이스포츠가 워낙 거액을 베팅을 해서 스카이로 가게 되었다. 기존 스타 분석가인 개리 네빌이나 제이미 캐러거보다 두배가 넘는 연봉을 받는다.

4. 국가대표


1996년 청소년 대표로 유럽 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긴다. 1997년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세계적으로도 유망한 선수로 인식된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티에리는 96년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 97년 프랑스 프로축구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최고의 유망주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후 뽑힌 국가대표에서의 활약도 준수한 편으로, 프랑스가 세계최강이라 부르짖던 때 98년 월드컵 및 유로2000을 쓸어담았으며 2006 독일월드컵은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98월드컵에서는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격수 중 최다 득점자/최장 시간 출장자가 앙리.[22][23]트레제게와의 조합은 이론상 완벽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으로 트레제게는 앙리에게 밀려 로테이션으로 활약했으며, 투톱으로 나오는 경기에서는 둘다 부진하는 등 궁합이 좋지 못했으나, 이상하게 비에이라-마케렐레의 중앙라인처럼 뛰어난 조합인 듯 평가 받았다.[24]7경기 0골 기바르쉬가 있는데 저 정도면

센추리클럽 멤버이며, 2007년에는 플라티니가 가지고 있던 국가대표 최다골 타이틀을 경신해버렸다. 123경기 51골.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럽대륙 플레이오프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프랑스의 결승골을 만드는 과정에서 핸들링을 했는데 심판이 이걸 골로 인정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프랑스는 이렇게 본선에 올라가놓고서도 우루과이와 비겼을 뿐 나머지 두 팀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이에 아일랜드 언론은 일제히 "프랑스 탈락은 쌤통이다."라며 대서특필했다. 쌤통 항목에 이 문단의 글귀가 그대로 적혀 있다.

앙리 본인은 경기 후에 핸들링임을 인정하긴 했지만 해결책은 재경기밖에 없다라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한 태도를 보여 전세계적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한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앙리를 죽입시다 앙리는 나의 원수 후덜덜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으며 급기야 수상까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재경기를 요청하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지단 이후의 프랑스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팀은 팀대로 막장의 끝을 보여주면서 예선 무승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나마도 앙리가 활약할 수 있는 기회조차 별반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워낙 막장으로 굴러가는 와중에 아오안 취급을 받고 있었다.지단은 박치기라도 했지 그리고 이어진 국가대표 은퇴 선언.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서는 여러모로 안습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5. 플레이스타일

플레이 스타일은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와 공간침투. 그에 이은 골 결정력도 탁월해서 수 차례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어시스트 능력도 있어서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특히 골대 측면에서 시도하는 오른발 감아차기는 소위 앙리슛이라고 불릴 만큼 명품 슈팅. 부드럽고 정확한 슛으로 유명하다. 다만 전성기에도 세트피스에서 헤딩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그가 전성기를 보낸 아스날과 바르셀로나 모두 헤딩을 요구하는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6. 앙리에 대한 말말말


  • "앙리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입니다. 티에리는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스피드, 파워, 그리고 골센스. 그와는 통하는 게 있어서 어디에 패스를 넣으면 좋을지 100% 이해하고 있습니다." - 앙리의 영원한 단짝 데니스 베르캄프[25]

  • "티에리 앙리는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선수 중 최고의 성장속도와 골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앙리는 프랑스 역대 최고의 골 감각을 갖춘 선수다." - 미셸 플라티니

  • "티에리 앙리는 상대편 수비수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지능적이고, 팀이 원할 때 언제든 골을 터뜨려 주는 선수이다." - 요한 크루이프

  • "전세계 모든 선수들을 둘러봤지만 티에리 앙리야말로 바르셀로나의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선수다. 바르셀로나가 앙리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앙리가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공격을 이끄는 것은 정말로 꿈만 같은 일이다. 앙리의 리듬과 스피드, 기술은 그를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할 수 있게끔 만든다."
    "나는 그들의 열렬한 팬이며 플레이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인간적으로도 앙리를 존경한다. 축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의 모습은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 호나우지뉴

  • "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인 티에리 앙리와 함께 뛸 수 있는 아스날을 선택할 것" - 토마스 로시츠키[26] , 아스날 이적설이 나돌때, 앙리와 함께 하고싶다며[27]

7. 여담

현재 EPL에는 시즌 MVP가 4개 있다. 선수단이 뽑는 PPY, 기자단이 뽑는 FWA, 팬들이 뽑는 FPY, EPL의 스폰서인 바클레이에서 주는 Barclays Player of the Year. 이 네 개의 상을 한 시즌 동안 독식한 것은 03-04의 앙리와 06-07/07-08의 호날두 둘 뿐이었으며, 최근에 13-14 시즌 루이스 수아레스가 MVP 4개를 석권하면서 겨우 3명으로 늘어났다.[28][29] 더불어 앙리는 00-01시즌부터 05-06시즌에 이르기까지 6시즌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팀에서 획득한 트로피 같은 것은 몰라도 순수하게 개인으로서 행사한 리그 지배력을 놓고 보면 EPL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를 통틀어도 손꼽힐 수준.

영국의 모델인 니콜 메리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으나 곧 이혼했다.
딸의 이름은 Tea. 앙리는 엄청난 딸바보라고 전해진다.

무한도전피해자 중 한 명(...). 출연 후 이혼당하고 자신은 폼이 급격히 하락했다. 다만 무한도전 덕분에 한국 내에서 호감형 선수로 주가가 올라갔다. 이제 약속했던 영국 한번 가봐야지. 그리고 앙리 본인이 말하길, 무한도전 멤버들과 했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수염을 일부러(...) 기르는 듯한데 아랍인이 따로 없다 무한도전에 나왔던 그 앙리 맞나 싶을 정도.

축덕후가 많은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축덕력을 자랑한다. 큰 경기는 물론 2~3부리그 경기까지 시청하는데, 심지어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가진 심층 인터뷰에서는 영국 2부리그 축구경기를 틀어놓고 인터뷰를 할 정도.[30][31]

그리고 상복이 지지리도 없는 선수로 유명하다. 발롱도르에서 2위, 3위를 잇달아 기록하며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콩까지마 아스날을 더블로 이끌고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2002년에는 월드컵의 부진으로 인해 호나우두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한다. 당시 발롱도르는 월드컵 활약도로 투표가 갈렸는데, 요한 크루이프는 아무리 월드컵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리그 활약도를 무시하고 투표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라며 앙리가 수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납득할만한 결과라며 비판했다. 20-20을 기록한 2002/2003 시즌은 프랑스의 월드컵 광탈 충격의 여파와 아스날의 챔피언스 리그 부진으로 인해 2위에 그쳤으며, 아스날의 무패 우승을 이끌며 유럽 골든 부츠, 프리미어 리그 골든부츠를 독식하고 모든 최우수 선수상을 싹쓸이한 2003/2004 시즌에는 수상이 유력했지만 아쉽게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상을 탈 기회였던 2006년에는 프랑스의 월드컵 결승을 이끌며 수상이 점쳐졌지만, 승부차기끝에 준우승에 그치면서 다시금 실패한다. 발롱도르가 없다는 점이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 바르셀로나의 트레블 주역, 프랑스에서 월드컵, 유로컵,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국대 탑 스코어러로 등극한 앙리의 무시무시한 커리어에서의 유일한 흠이다.

인종차별 반대로도 유명해서, 인종차별반대 홍보대사도 하고는 했다. 그런 앙리가 오히려 인종차별을 했다고 한국내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05년 1월 설기현이 소속된 버햄튼 FC와의 FA컵 경기에서 날개짓 흉내를 낸 것이 인종차별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제스처는 'poule mouillee'[32]로 당시 2부 리그 소속이던 울버햄튼이 속칭 10백을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겁쟁이라고 가볍게 놀린 표현으로 밝혀졌다. 앙리가 유럽 축구의 인종차별반대 홍보대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반응이었고, 앙리 본인의 해명도 있어서 빨리 마감이 된 사건이었는데, 이후 인종차별 드립이 나올 때마다 가져다 붙이는 바람에 이미지가 이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의 매너있는 모습으로 이미지회복을 다소 했고, 2007년 무한도전 출연으로 확실히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이슈가 나오면 다시 은근슬쩍 꺼내서 쓰이기도 하는데, 인종차별 논란은 뒤늦게라도 알게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해명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 파리 변두리에서 인종차별을 받으며 성장했기에 인종차별 반대 홍보대사로 십수년째 활약중인 앙리를 생각해 보면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루머다.그럼 수아레즈는... ㅡㅡ

8. 기록

8.1. 대회 실적


8.2. 득점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4/95AS 모나코리그앙 8 3 0 0 0 0
1995/96AS 모나코리그앙 18 3 3 0 1 0
1996/97AS 모나코리그앙 36 9 3 0 9 1
1997/98AS 모나코리그앙 30 4 5 0 9 7
1998/99AS 모나코리그앙 13 1 1 0 5 0
1998/99유벤투스세리에 A 16 3 3 0 0 0
1999/00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1 17 5 1 11 8
2000/01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5 17 4 1 11 4
2001/02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3 24 5 1 11 7
2002/03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7 24 6 1 12 7
2003/04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7 30 4 4 10 5
2004/05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2 25 2 0 8 5
2005/06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32 27 2 1 11 5
2006/07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17 10 3 1 7 1
2007/08FC 바르셀로나라 리가 30 12 7 4 10 3
2008/09FC 바르셀로나라 리가 29 19 1 1 12 6
2009/10FC 바르셀로나라 리가 21 4 3 0 8 0
2010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 11 2 1 0 0 0
2011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 26 14 3 1 0 0
2011/12아스날 FC잉글랜드 프리미어 4 1 2 1 1 0
2012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 25 15 2 0 0 0
2013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 30 10 2 0 0 0
2014뉴욕 레드 불스메이저리그 사커 30 10 5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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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역대 최다 득점자, 2위는 미셸 플라티니 41골
  • [2] 프랑스 축구 선수 리엄 갈라스와 생일이 똑같다. 1992년에는 클레르퐁텐 유스팀에서 잠시 같이 있었다. 이 둘은 나중에 아스날에서 재회한다.
  • [3] TiTi는 이때 붙은 별명으로 ‘불량소년‘이라는 뜻.
  • [4] 클레르 퐁텐 출신에는 니콜라 아넬카, 윌리엄 갈라스, 루이 사하, 아부 디아비, 템 벤 아르파등이 있다.
  • [5] 벵거는 1987년 여름부터 모나코의 감독이었다.
  • [6] 이적료가 높지 않은 겨울 이적 시장을 감안하면 다소 이례적으로 큰 돈을 쓴 것이다. 앙리에 대한 기대감을 알 수 있다.
  • [7] 1997년 PSG에서 단돈 50만 파운드에 사왔는데 2시즌 쓰고 2250만 파운드에 레알로 팔았다. 이적료 차이가 40배가 넘는다.
  • [8] 다만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몇몇 팬들은 앙리 > 호나우두, 반니, 쉐브첸코, 그 외 기타등등이란 공식을 남용하는데 꼭 이렇진 않다. 반니가 epl에선 앙리에게 뒤졌다지만 챔스에선 반니스텔루이가 앙리를 압도하는 활약을 보였다. 단순히 경기당 골기록만 봐도 앙리가 0.44골이고 반 니스텔루이가 0.74골을 기록했으며 앙리는 한 번도 득점왕을 차지하지 못했으나 반 니스텔루이는 3차례나 득점왕을 차지했다.
  • [9] 이적 직후 공격수로 뛰라는 벵거의 지시에 '네? 저는 윙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 [10] 스트라이커 롤에 자신감이 없었던 앙리에게 아스날의 레전드 마틴 키언이 아스날 선수였던 어느 선수의 득점 영상을 보여주며 '너보다 발도 느리고 키도 작은 선수였지만 아스날에서 100골을 넣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이것으로 앙리의 마인드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다. 앙리보다 키도 작고 발도 느렸던 그 선수는 바로 이안 라이트.
  • [11] 처음에 넘어진 선수가 독일의 디트마어 하만이고 골 넣기 직전에 훼이크에 속은 선수가 제이미 캐러거다.
  • [12] 다만 은퇴경기는 에미레이츠 개장 기념 경기였다. 06년 7월 22일 베르캄프의 전 소속팀인 아약스와의 경기. 60세가 넘은 요한 크루이프도 베르캄프 기념경기에 와서 뛰었다.
  • [13] 이때 아스날팬뿐만 아니라 많은 축구팬들이 앙리의 빈자리를 걱정했다. 대체자라고 영입한건 크로아티아리그의 에두아르도 다 실바에 뜬금없이 오른쪽 풀백 바카리 사냐를 영입한게 전부. 그런데 막상 새 시즌이 시작되더니 아데바요르가 갓데발이 되면서 1위를 질주했다. 물론 중반 이후에 팀이 흔들리면서 우승은 실패했지만 적어도 시즌 전체로 볼때 앙리의 공백은 느껴지지않았다.
  • [14] 이후에 자책골로 변경되었다.
  • [15] 이 시즌 아스날은 승점 1점 차이로 토튼햄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는데 만일 이 골이 터지지 못했으면 아스날이 챔스를 못갈 뻔 했다.
  • [16] 06/07시즌 초반 아스날은 월드컵까지 풀로 뛴 앙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앙리를 벤치에 앉혔지만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인 도메네크는 그런거 없이 친선경기에도 앙리를 풀타임 소화시켰다
  • [17] 크루이프의 영구결번 14번을 달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크루이프는 9번을 달았고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14번이 영구결번인 클럽은 크루이프의 친정팀인 아약스. 골닷컴 만화작가 오정현이 이 잘못된 지식으로 웹툰을 그렸지만 아직까지 수정되지 않고 있다. 앙리편 그리기 얼마 전에 크루이프편 그렸는데 조사를 어떻게 한 건지;; 참고로 앙리 이전의 바르셀로나 14번은 산티아고 에스케로라는 먹튀로, 결국 자유계약으로 쫓겨나다시피 오사수나로 이적한다.
  • [18] 참고로 앙리가 좋아하는 백넘버는 원래 12번. 마르코 반 바스텐을 우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스날 이적시 다른 선수가 그 번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어있던 14번을 선택했다.
  • [19] 앙리의 전성기 시절이라도 에투와 센터포워드 대결에서 과연 누가 우위를 점할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앙리는 하락세였고 윙포워드 소화능력은 앙리가 훨씬 뛰어났다. 그리고 바르샤의 윙포워드 자리에서 앙리만큼 해준 선수는 아직까지도 없다. 페드로와 득점력은 엇비슷하지만 공격전개능력이 앙리가 앞서고, 비야는 둘 다 준수하지만 앙리의 이 시즌에 비하면 조금씩 미진한 점이 있다. 산체스는 드리블 돌파나 활동범위 및 활동량은 준수하지만 패스를 통한 공격전개나 득점력은 앙리에 비해 부족하다. 다만 바르샤가 메시 위주의 전술을 적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뭐, 따지고 보면 앙리보다 잘한 윙포워드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이 둘은 자신이 전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보조자 역할이던 앙리의 활약상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어렵다.
  • [20]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유일한 이유였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이뤄지면서 바르셀로나에서의 동기부여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등부상이 악화되어 신체능력이 급감하였다.
  • [21] 앙리가 결정적으로 신예 페드로에게 밀려난 원인은 수비 가담 문제였다. 바르셀로나의 수비시 전방압박에서 메시와 앙리는 최전방을 압박하는 에투의 뒤를 받쳐 주면서 패스 루트를 측면으로 한정시키거나 직접적인 가로채기를 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본래 센터포워드인 앙리는 측면에 너무 많은 공간을 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공격 스탯이야 나무랄데 없었지만 말이다.
  • [22] 하지만 98 월드컵의 국대 주전은 조르카예프, 뒤가리, 기바르쉬였으며 트레제게, 앙리는 후보 선수였다. 유로 2000에서는 주전 원톱으로 출장.
  • [23] 앙리가 1998 월드컵에서 에메 자케 감독의 최초 계획에는 로테이션 정도로 평가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회에서는 많은 경기를 선발로 출전했다. 그 이유는 주전 스트라이커 기바르쉬가 매우 부진했기 때문이며 앙리의 컨디션이 좋았기에 주로 왼쪽 윙포워드로 출전해 특유의 스피드를 바탕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괜히 1998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 공격수 최다 출전시간 및 최다 득점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앙리는 1998 월드컵에서 주전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매치 리포트
  • [24] 트레제게의 영혼의 파트너로 꼽는 공격수는 유벤투스의 파트너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였으며, 둘의 찰떡궁합은 역대 최고의 투톱을 뽑을 때 거론될 정도이다. 참고로 앙리와 정말 영혼의 파트너였던 선수는 베르캄프다. 비에이라-마케렐레 라인은 그야말로 현시창으로 2006 독일 월드컵을 제외하면 이름값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사람들은 도메네크의 유일한 업적이 마케렐레-비에이라 라인의 완성이라 말한다.
  • [25] 앙리를 논함에 있어 벵거와 함께 결코 빠져서는 안될 인물. 앙리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베르캄프의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는 그야말로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축구 역사에 남을 완벽한 투톱조합이었다.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였던 셈.
  • [26] 로시츠키는 사실 앙리가 아스날에 오기 이전부터인 1997-1998시즌 더블을 할 당시에도 베르캄프의 플레이를 좋아했던 체코의 구너였다.
  • [27] 로시츠키가 06-07시즌에 아스날로 오면서 앙리의 마지막 시즌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 [28] 그런데 수아레스는 둘과는 다르게 이 시즌에 리그 우승을 못했다...지못미.
  • [29] 물론 FPY나 바클레이 상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상이긴 하다.
  • [30] 그렇지만 이건 선수들 취향에 따른 문제로, 축구 별로 안 보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앙리처럼 지독하게 보는 선수도 많다. 예를 들면 에투는 경기의 흐름을 관찰하기 위해 시간 나면 그냥 축구 나오는 아무 채널이나 틀어서 세계 어떤 리그나 시청한다고 한다.
  • [31] 반면 직업으로 축구선수를 하지만 여가시간에는 축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 [32] 직역하자면 물에 젖은 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