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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last modified: 2015-11-08 09:54:47 Contributors

Thomas Aquinas

Contents

1. 개요
2. 철학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3. 다른 매체에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1. 개요


1224년(1227년) 경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성(城)에서 출생, 1274년 3월 7일 교황령 포사노바에서 선종. 한국 가톨릭 공식 표기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지만, 사람에 따라 토마스 데 아퀴노, 도마 아퀴노, 토머스 아퀴나스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도미니코수사 신부로서 중세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 또한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토마스 학파의 창시자이며 교회학자 35명 중 하나로 이명은 천사 박사(Doctor Angelicus). 가톨릭성공회성인으로 축일은 1월 28일. 학자, 교수, 학생, 철학자, 서점 직원, 연필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네임드 뚱보. 뚱뚱해서 책상에 앉기 위해서는 책상에다가 그의 임산부스러운 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반원 모양의 홈을 파둬야 하는데 이 책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뚱뚱함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그레고어 멘델의 체형을 표현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한데 그것보다 좀 덜 뚱뚱해"라고 할 정도[1].

현대인 천재론등에서 현대인과 그 당시 사람의 지적 수준을 비교할 때 쓰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동료 수사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얼마나 똑똑한지 소리를 내지 않고도 책을 읽을 수 있다." 하고 말했기 때문.[2]

여기에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그 당시에는 띄어쓰기와 대소문자 구분이 전혀 없었다. 즉 자신이 말한 걸 소리 그대로 받아적는 게 책이었다. 의미가 아닌 소리를 기록한것이 책인데 이걸 머리 속으로 읽는다는 건 저자의 의도와 책의 중심적 내용,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가능하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들의 특성상 띄어쓰기가 없다면 문장 하나는 물론이거니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3] 그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괴수의 기록을 읽고 이해한데다가 스콜라 철학을 정립하기까지 했으니 천재라는 걸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지식은 쌓여왔지만 자극에 대해 발전하는 뇌의 역량과 지능, 지혜는 현대와 중세의 차이가 있을수 없다.

영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수도원장으로 키우려고 했는데,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놈이 졸업하더니 갑자기 기대를 배신하고 도미니코 수도회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포기하겠다는 얘긴데,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은 "이놈이 미쳤나" 하고는 중간에 납치해서 감금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러나 진중권미학 오디세이에 따르면, 가족들이 그를 감금할 때 정말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서경덕?.[4] 결국 가족들은 그 굳건한 신념에 두손 두발을 다 들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로 들어가게 된다.

파리에서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의 제자가 되어 지내다가 스승을 따라 쾰른으로 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수가 되기 위해 강사를 하러 파리로 돌아온다. 그 후 교수 자격을 취득해서 강의를 하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와 아나그니 오르비에토 사비나 수도원 등지에서 활약을 하던 중, 교황 레고리오 10세의 명령으로 리옹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길에 병에 걸려 선종한다. 1323년 7월 18일 교황 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568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는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5] 그러나 이 같은 지적에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축했다고 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2. 철학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콜라 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그리스도교 철학 사상 최대의 먼치킨.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가톨릭 철학의 양대 산맥이자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는 두 학자 중 하나. 주요 저서로는 《신학대전》, 《대이교도대전》, 《명제집 주석》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조화시켰으며, 보나벤투라와 함께 콜라 철학알파이자 오메가. 그 자신이 당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최고 전문가였다.[6] 전통적인 교부철학은 플라톤 및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당시에는 아랍권을 거쳐 최신 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는 유럽의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름이 아니라 '철학자'라는 대명사 자체로 호칭될 정도로 자연철학의 대가로 인식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한 자연철학적인 주제와 계시를 통한 신학적 가르침들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성적인 논리로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본인은 신학 입문자들을 위해 저술했다고 말하지만 맛이 간 방대한 분량과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인 구성, 주제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스콜라 철학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한 저서이다.

오죽하면 라틴어로 된 원전을 통독하는 전공자가 드물다고 한다. 수백 페이지나 되는 책이 무려 100권이나 되는 것이 신학대전이므로, 교양 삼아 읽으려면 정리서를 읽는 편이 낫다. 내용 전부를 간명한 논리로 정리한 분량만 한글 기준 600페이지다. 원전을 다 읽으려다간 쉬지 않고 읽어도, 몇 달이나 지나간 뒤에 책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독서광이자 중세에 대해 굉장히 박식하고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읽는 움베르토 에코도 그의 칼럼에서 '이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나 요약본을 만드는 사람들 뿐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다만 다른 칼럼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들을 읽으려면 몇 달은 필요하다'라고 언급한 걸 보면 다 읽긴 읽은 듯 하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도 때도 없이 여행을 다닌 것으로도 유명한데, 저서의 분량이 상식적으로 여행다니면서 쓸 수 있는 분량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현대의 전공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행 중 비서에게 빠르게 구술하는 형식으로 작업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통해 이 말도 안 되는 작업량을 설명하려 한다. 구술 이론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서의 내용을 거의 쏟아내듯이(!) 읊었을 것이다. 신학대전 또한 혼자 모든 집필을 한 게 아니라 도와주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마치 현장법사가 다수의 불교경전을 번역한 방식과 비슷하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각광받았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논리를 주장한 '영민한 박사'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6~1308)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하느님을 이성의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선이라는 개념이 하느님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했으며, 이는 잠시나마 토마스 아퀴나스를 단죄받게 할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대 철학자 중에서 가장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지만 신학대전의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흥미롭다. 바로 미사 도중 신비체험을 한 것. 신비체험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 후 "내가 쓴 모든 것들은 조악한 위조품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한 뒤 펜을 놓고 두 번 다시 드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성과 논리로 체계화할 수 없는 영역의 신앙적 체험이 그의 논리적 사유와 집필을 중단하게 한 것[7].

물론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인적 체험이므로, 중세철학 전반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대부분의 저서는 신학적 논증을 위한 것이지만, 간명하고도 철저한 논리의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개인의 입장과 관계없이 논리적 훈련과 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 다른 매체에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천국편 제10곡에 등장하여 태양천의 첫 번째 구성원을 소개하고 성 프란치스코를 칭송한 뒤 자신이 소속된 도미니코회가 타락했다고 개탄한다. 뒤이어 나타난 동료 수사이자 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가 보다 못해 도미니코회의 창설자인 성 도미니코에게 실드를 쳐준다. 여기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스승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사상이 전혀 달랐다. 보나벤투라 역시 둔스 스코투스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74으로 나온다. 시나리오 2, 시나리오 3에서 프랑스 소속으로 등장.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등장인물 올소라 아퀴나스의 이름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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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서 당시 수도원 동기들한테 '황소'라는 별명으로 대차게 까였는데 이때 수도원장 왈, '언젠가는 저 황소의 울음이 저 세계를 강타할 것이다'대단한 통찰력이다
  • [2] 당시에는 책을 읽을 때 소리내서 읽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잘 없었다. 일단 당시 도서관이 지금과 같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책 저장창고에 가까웠으니까
  • [3]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복잡한 관현악 악보를 보고 머리속에서 그 음악이 재생되는 수준이다.
  • [4] 일설에는 여자가 적극적으로 성인을 유혹하려 했는데 그가 난로에 넣어두는 불쏘시개를 들이밀며 "나가지 않으면 이걸로 너를 지지겠다"(...)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 [5] 일반적으로 시성되려면 기적이 일어났음을 최소한 2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성인 참고
  • [6]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오늘날 읽는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 장에 붙인 소제목을 그대로 읽고 있다!
  • [7] 페르마도 비슷한 경험을 한 뒤 수학에서 완전히 펜을 놓고 세속을 벗어난다. 그 뒤 딱 한 번 수학 관련 집필을 한 적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