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테드 윌리엄스

last modified: 2015-04-13 20:17:37 Contributors


이름 Theodore Samuel "Ted" Williams
시어도어 새뮤얼 "테드" 윌리엄스
출생~사망 1918년 8월 30일~2002년 7월 5일
국적 미국
출신지 샌디에이고
포지션 좌익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36년 보스턴 레드삭스 자유계약
소속팀 보스턴 레드삭스(1939~1960)[1]

1946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뉴하우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1949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부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리주토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영구결번
No.9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2.1. 타격 스타일
2.2. 까다로운 성격
2.3. MVP와 뉴욕 양키스
2.4. 참전
2.5. 우승 없는 커리어
3. 은퇴 후
4. 여담
5. 명언


남자라면 그날의 목표,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나의 목표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하는것이다. "저기 테드 윌리엄스가 지나간다. 이제까지 존재한 타자들중 가장 위대한 타자다."(A man has to have goals - for a day, for a lifetime - and that was mine, to have people say, 'There goes Ted Williams, the greatest hitter who ever lived)


1. 소개

통산 2654안타 타율 .344(역대 7위) 521홈런 1839타점 2021볼넷(4위)을 기록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2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한 유일한 타자이며[2], 6번의 타격왕, 4번의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조 디마지오와의 라이벌리로도 상당히 유명하고 1941년에 기록한 4할의 타율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별명이 있다.

또 11번의 출루율 1위와 9번의 장타율 1위, 9번의 OPS 1위를 올랐으며, 통산 성적에서 역대 출루율 1위(.482) 장타율 2위(.634) OPS 2위(1.116)를 지키고 있다. 타율에서는 역대 7위이지만 앞선 6명은 모두 1920년대 이전에 데뷔한 선수들이다. 거의 5시즌에 달한 2번의 군복무 공백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업적이다.

메이저리그에서 3대 타격의 신을 꼽으라고 하면 베이브 루스, 타이 콥과 함께 항상 꼽히는 선수. 루스는 힘, 콥은 정교함, 그리고 테드는 그 둘을 조합한 밸런스 형 타자라고 할 수 있다.

2. 선수 시절

윌리엄스는 17세 때 마이너리그 퍼시픽코스트리그 소속의 고향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입단했다. 보스턴은 1939년 만 19세인 윌리엄스를 샌디에이고에서 사왔다.

데뷔시즌이었던 1939년부터 .327 31홈런 145타점을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도 4등에 들었을만큼 떡잎부터 달랐었다. 최초의 신인 타점왕 기록이었고, 이로 인해 'The Kid'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듬해에도 .344 23홈런 113타점을 기록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활약을 한다.

1941년 프로 3년차였던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9회말 2아웃에서 역전 쓰리런을 쳤으며 그 해 정규시즌 타율 4할이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그 이후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생긴 호칭이 '최후의 4할 타자'. 더욱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교타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도 장타력도 뛰어나 통산 홈런이 521홈런이며, 30홈런을 넘긴 시즌이 8시즌이나 된다.

1941년 마지막 날 더블헤더를 앞두고 4할이 인정되는 .39955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테드를 감독이 빼고 라인업을 구성하자 당장 감독을 찾아가서 내가 오늘 안타를 못치면 4할 타자가 아닌거지. 그렇게까지 해서 4할을 달성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고 경기에 출장했다. 결국 그는 그날 8타수 6안타를 기록, 4할 6리의 타율로(당시에는 희생타가 따로 집계되지 않았다 현재 기록으로 환산하면 .411) 20세기 마지막 4할 타율을 달성한다. 보고있나

전쟁 참전 등의 공백도 우습게 씹어주면서 쾌조를 보였던 그는 1950년 시카고 코미스키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프 카이너의 타구를 잡다 펜스에 부딛혀 팔꿈치를 다쳤다. 윌리엄스는 이 부상으로 60경기를 결장했고 타율도 생애 최저인[3] .317로 떨어졌다. 양키스와 우승경쟁을 했던 보스턴은 결국 4경기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부상은 이후 윌리엄스의 고질병으로 남았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사건으로 밀어치는 능력이 약화되어 타격 능력이 떨어 졌다고 한다. 테드윌리암스는 미세한 어퍼스윙에 로테이션히팅...허리를 돌리면서 방망이를 끌어안는 타격스타일이라 잡아당기는 거지 ...그의 자서전을보면 밀어치는 방법등이 자세히 기술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편집증적인 당겨치는 타자는 아닌걸로 보인다.)

그 뒤 1959년 만 41세의 윌리엄스가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자(.254) 톰 야키 구단주는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거부했고 1960년 .316의 타율을 기록한 후에야 비로소 옷을 벗었다.

윌리엄스는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521번째 홈런을 날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홈런임을 안 펜웨이파크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그라운드를 돌았으며 답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오랜 고집을 꺾고 모자를 벗으면서 답례한 것은 한참 뒤인 1991년 4월, 테드 윌리엄스 데이에서였다.

2.1. 타격 스타일

테드 윌리엄스는 극단적인 당겨치기(풀 히팅)를 고수했고, 이 때문에 처음으로 특정 타자를 겨냥한 수비 대형인 '수비 시프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1946년 루 보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은 좌타자인 테드를 아웃시키기 위해 필드 왼쪽에 좌익수만 남기고 모든 야수들을 필드 우측으로 옮겨버리는 엽기적인 시프트를 시도했다. 테드가 밀어치기를 한다면 무조건 안타가 되지만 끝내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이 시프트에 대항해 밀어치기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전해진다.[4] 단, 빗맞은 타구가 아무도 없는 곳에 굴러가 그의 커리어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인사이드파크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라고 하지만 이 내용은 찰리 로의 추종자등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테드 윌리엄스 스스로 밀어치는 능력을 어필했기 때문이다. 테드 윌리엄스는 좋은 타자의 조건에서 상당한 선구안과 엄청난 훈련에 의한 타격매커니즘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순간순간적인 팀배팅보다는 타자 스스로가 더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한 타격을 설명한 것으로써" 좋은 타자란 자기의 스트라이크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쁜 공에는 배트가 나가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로 설명 가능하듯이 그는 배드볼히팅이나 정황상 밀어치기하는 팀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상적인 타격을 연습하고 연구하는 구도자적 신념을 가진 선수였기에 나온 이야기다.

테드윌리엄스는 바깥볼은 반드시 밀어 쳐야 하며 맞출때는 공의 윗부분을 노린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극단적인 당겨치는 히터가 된건 상기의 부상전력으로 바깥공을 밀어서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해석된다.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2루수 조 모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프레이 히팅과 레벨 스윙보다는 풀 히팅과 미세한 어퍼컷 스윙이 훨씬 더 고차원적인 스윙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곧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과 일맥상통한다.

“옮길테면 옮겨봐라. 어차피 빈 자리는 많다. 아니면 넘기면 된다”


그의 크고 아름다운 통산 스트라이크 존 9분할 타율. 몸쪽 높은쪽과 바깥쪽 낮은쪽에 약점이 있을뿐이다. 3할 8-9푼정도? 던질데가 없다



스트라이크 존 77분할 타율 (테드 윌리엄스의 저서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 중)

2.2. 까다로운 성격

윌리엄스는 아무도 못말리는 괴팍한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방망이를 관중석에 집어던지는 사고펠릭스 호세도 아니고...를 치는 등 19년 내내 팬, 매스컴과 충돌했다. 특히 싫어했던 기자들에게는 '키보드의 기사(knight of keyboard)'라는 별명도 지어줬다.(키보드 워리어의 조상격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린이 암환자를 돕는 등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걸 보면 그저 기자들과의 관계만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자들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윌리엄스는 펜웨이파크 홈경기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린 후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하지만 다음날 보스턴 신문에서 윌리엄스는 '건방진 신인'으로 묘사됐다. 이후 윌리엄스는 팬의 환호에 두 번 다시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불거진 기자들과의 갈등은 1942년 보스턴 신문에 윌리엄스에 대한 '비운의 가족사'(부모의 이혼과 형의 투옥이 그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기사화)가 소개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테드는 기자에게 침을 뱉은 적도 있다.)

얼마나 기자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나면, 1947년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와 MVP 경쟁을 했을 때 보스턴 기자들은 테드가 아닌 디마지오에게 표를 던졌을 정도였다. 특히 결정적인 것이 스프링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었던 어떤 보스턴 지역 기자였는데, 그는 10위표 한 장조차 테드에게 주지 않아 조 디마지오의 MVP에 결정적인 수훈갑을 달성했다. 당연하지만 성적은 상대가 안됐다. .343 32홈런 114타점의 타자와 .315 20홈런 97타점의 타자 중 누구를 MVP로 선정할 것인가?[5] 이로 인해 테드윌리엄스는 통산 mvp를 3회를 놓쳤는데 3회수상은 약쟁이 본즈(7회)에 이은 역대 2위다.


테드가 얼마나 기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그림.....

2.3. MVP와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커리어 전체가 가히 매 시즌 MVP 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6]의외로 MVP의 수상 회수는 고작(?) 2회 (1946, 1949)가 전부다. 흥미롭게도 그가 MVP 급 시즌을 보낼 때마다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이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 이유는 간단하다. 기자들이 언론을 기피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테드 대신 비교적 온화하고 사교적인, 그리고 테드가 뛰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숙명적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을 MVP 투표 때마다 몰표를 주었던 것. 특히 스프링 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은 보스턴 지역의 기자들은 테드의 미친 듯한 시즌 성적에도 불과하고 10위표 한 장 테드에게 주지 않아 테드를 여럿 물 먹인 전력이 있다. 이후 알버트 벨 역시 기자단과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MVP를 모 본에게 뺏긴 전력이 한 번 있지만 테드는 적게 잡아도 자그마치 네 번이나 뺏겼다. 아래는 그렇게 MVP에서 물을 먹었던 사례.

1. 1941시즌
테드 윌리엄스 : .406/.553/.735/1.287 홈런 37 타점 120 조정OPS 235
조 디마지오 : .357/.440/.643/1.083 홈런 30 타점 125 조정OPS 184

마지막 4할 테드 윌리엄스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조 디마지오. 당장 겉으로 보면 압도적인 스탯의 테드 윌리엄스였으나 MVP는 여지없이 온화하고 사교적인 뉴욕의 신사 조 디마지오가 가져갔다. 뭐 당시에는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가 빅 이슈였고 윌리엄스 역시 인정한다는 인터뷰를 했으니 뭐 그렇다 치더라도...

2. 1942시즌
테드 윌리엄스 : .356/.499/.648/1.147 홈런 36 타점 137 조정OPS 216
고든 : .322/.409/.491/.900 홈런 13 타점 103 조정OPS 154

이듬해도 조정OPS가 200이 넘는 가히 신급의 성적을 올린 테드였지만 MVP는 역시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2루수 조 고든이었다. 심지어 테드는 이 해 커리어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 시즌이었지만 여지없었다.

3. 1947시즌
테드 윌리엄스 : .343/.499/.634/1.133 홈런 32 타점 114 조정OPS 205
조 디마지오 : .315/.391/.522/.913 홈런 20 타점 97 조정OPS 154

사실상 상대가 되지 않는 성적이었으나 기자들은 여전히 언론과의 전쟁 상태이던 테드 대신 조 디마지오를 선택했다. 이전 41시즌은 4할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대결이라도 있었기에 디마지오의 수상이 납득이 되었지만, 이 시즌은 그런 상징적 대결조차 없어 역사상 가장 아쉬운 MVP 선정으로 꼽히는 시즌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시즌 테드는 커리어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는데 역시 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이었지만 MVP 그런 거 없다. 이 때 조 디마지오는 202포인트, 테드 윌리엄스는 201포인트를 득표했다.

4. 1957시즌
테드 윌리엄스 : .388/.526/.731/1.257 홈런 38 타점 87 조정OPS 233
미키 맨틀 : .365/.512/.665/1.177 홈런 34 타점 94 조정OPS 221

만 38세의 테드가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시즌, 그 앞을 막은 건 역시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새로운 아이콘, 만 25세의 미키 맨틀이었다. 전반적인 성적은 테드가 앞섰으나,(타율 출루율 장타율 조정OPS 고의사구 리그 1위) 수비에 있어 맨틀이 다소 우위였고[7], 결정적으로 언론과의 전쟁을 통해 기자들과의 사이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던 테드에 비해 젊고 사근사근한 뉴욕의 아이콘 미키 맨틀이 MVP를 석권하고 말았다.

다만 19시즌 동안 총 18번 MVP 투표를 받았고[8], 1952년 고작 6경기를 뛴 시즌만 MVP 득표에 실패했다. 그리고 MVP 2위 4번 3위 1번 4위 2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실력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2.4. 참전

테드 윌리엄스는 1943년 방망이를 내려놓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정도면 이혼한 어머니를 부양하기 충분하다." 테드가 참전을 선언하며 외친 말이다. 테드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해군 비행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2차대전 막바지에 진주만에서 실전 배치를 기다리던 중에 종전을 맞아서 1946년 초에 예비역 중위로 전역했다. 선수 생활의 절정이었던 만 24세에서 26세 사이를 군대에서 보낸 것이다. 거기에 1952년 다시 한국전 참전을 선언하였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사실 한국전에 참전한다고 한군두를 일부러 감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뜬금없이 해군에서 신체검사를 실시하더니 덜컥 영장이 나와버렸고(...) 테드는 비행기 몰아본지도 꽤 오래되고 교관 노릇만 실컷 했을 뿐 실전 경험도 없는 야비군예비역을 뭣하러 끌어가려드냐며 해군청에 대한 불만이 많았으나 실전 배치 없이 군부대 위문을 다니는 걸로 대체해도 된다는 제안을 과감히 거절하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1952년 4월 30일 보스턴은 다시 군복을 입게 되는 테드 윌리엄스를 위해 'Ted Williams Day'를 정했고, 이날 그는 디지 트라웃으로부터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통산 324호 홈런을 뽑아냈다. 모두가 이를 테드의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홈런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알게 되지만 그것은 모두의 오판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테드 윌리엄스 대위는 해병 항공대 조종사로 복무하며 총 39회의 폭격을 수행했다. 한번은 평양에 폭격을 퍼붓고 오는길에 적군의 대공포에 맞아서 망했어요가 될뻔 하다가 수원 공군기지에서 동체 착륙을 하기도 했다고. 당시 일화에 따르면 동체착륙 직후 테드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밥먹으러 가버렸다고(...) 급작스레 끝난 전쟁에 전혀 야구에 대한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테드는 복귀 후 37경기에서 .407의 타율에 13홈런 34타점이라는 신들린 타격을 선보였다. 그의 나이 만 34세였다.

테드 윌리엄스는 나이를 생각하면 최고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43, 44, 45, 52, 53년, 총 5시즌간 군에 복무하였다. 그가 만약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5시즌을 온전히 뛰었을 경우 그의 통산 성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참고로 테드 윌리엄스의 참전 전후의 5시즌을 평균 내면 연 183안타 34홈런 124타점이 나온다. 3500안타, 700홈런, 2400타점의 기록이 꿈만은 아니었을 것. 하지만 그의 잃어버린 기록은 훗날 1991년 대통령 자유 훈장(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이란 명예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9]

2.5. 우승 없는 커리어

19년이란 선수 생활 동안 정말 불운하게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못했다. 1946년에 그나마 한 번 진출했지만 패배했다. 당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만났다.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가 브루클린 다저스와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동안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여기서 윌리엄스는 팔꿈치에 공을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200의 부진한 타율을 보인채 보스턴은 패배했다.

3. 은퇴 후


은퇴후 어부 생활을 하던 윌리엄스는 1966년에 93.38%이란 높은 지지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헌액식에서 윌리엄스는 명예의 전당이 니그로 리그 선수들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와 달리 보스턴은 흑인선수를 가장 늦게 받았으며 밤비노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던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1969년 윌리엄스는 워싱턴 세너터스(현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을 맡아 리그 꼴찌였던 팀을 지구 4위로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감독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1972시즌 후 해임됐으며 이후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았다.

1999년 펜웨이파크에서 올스타전이 열렸을 때 시구를 했다. 이날 페드로는 그야말로 외계인이었다. 자세한 것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항목 참조.

2002년 7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끝내 보스턴의 우승은 보지 못했다. 이후 유언에 따라 냉동인간이 되었는데 이는 유족들이 나중에 과학이 발달한 뒤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를 분리시켜 보관을 한 데다(...) 최근 유족들이 보관료를 내지 않자 신체가 함부로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고 전해진다. 머리에는 구멍이 두 개 뚫려 있고 두개골에 금이 갔다고... 살아날 수 있긴 한 건가?망했어요

4. 여담


  • 지상에서 7m까지 솟았다가 스트라이크존 위를 살짝 통과하는 립 서웰(피츠버그)의 마구인 '이퓨스(eephus)'를 공략하여 펜웨이파크의 담장을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부정타격을 했다고 실토했다.

  • 참고로 펜웨이 파크의 우측 펜스 뒤에서는 윌리엄스 버그라는 불펜 피칭 장소가 있다. 이 장소는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좋아했던 테드의 홈런 개수의 증가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후에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거포 중에서는 좌타자가 꽤 있다.(칼 야스트렘스키, 데이빗 오티즈 등)

  • 영구결번 되기 까다로운 팀중 하나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영구결번된 케이스. 사실 어느 팀에 가더라도 이 성적을 찍었는데 안되는게 이상한 것이겠지만.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유대인 병사 일라이 로스가 나치 병사를 후려치며 이 사람을 언급한다. 그 때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대사

5. 명언

  • 꿈에서 난 랜디 존슨을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지.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외쳤어. '상대는 랜디 존슨이야. 밀어치라고, 밀어쳐'. 동료들에게 대답했지. '난 한번도 밀어쳐본 적이 없는걸'.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초구가 날아왔고 난생 처음으로 밀어쳤지. 깨끗한 좌전안타였어. 허허허"[10](http://blog.naver.com/generlst/)

  • 이보게, 만약 스트라이크였다면 윌리엄스씨가 자네에게 알려줬을 걸세.(스트라이크가 아니냐고 따지는 포수에게 주심이 한 말) - 이는 로저스 혼스비의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반개를 허용한다면 스트라이크 존은 무려 33%의 넓이가 늘어난다(선구안의 중요성을 강조)

  • 나는 매일 밤마다 알코올로 배트를 닦곤 했다. 배트를 우체국으로 들고 가서 그 무게를 달아보기도 했고, 나중에는 레드삭스 클럽하우스에 저울을 들여놓기도 했다. 배트는 아주 짧은 시간에 30그램 정도 무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 나는 지금 삼진을 당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 나무 방망이로 야구공을 저 멀리 날려 보내러 가는 거다.

  • 나는 거의 8,000번 가까이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8,000번은 나에게 하나하나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설레는 모험 같은 것이었다.

  • 나는 내가 300홈런을 칠 때까지 상대 투수가 누구였고 볼 카운트는 어떠했는지 구종과 코스가 무엇이었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 타격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관찰력의 문제고 경험과 실수로부터 얼마나 배우느냐의 문제다.

  • 어떤 타자도 모든 것을 갖추지는 못한다. 완벽한 타자란 없다. 베이브 루스도 홈런보다는 삼진을 훨씬 더 많이 당했다.

  • 구석으로 찔러오는 애매한 공을 때려내는 위대한 타자’보다는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세 개의 공 중에서 한 개만 때려내는 ‘좋은 타자’가 낫다.

  • 만약 .250짜리 타자가 40번의 타석에서 나쁜 공을 골라내 5번 더 걸어 나간다면 안타는 10개를 더 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타수는 5개 적어지고 안타는 10개가 늘어나 타율은 .286 정도로 오를 것이다.

  • 심판에게 따지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첫째는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길게 놓고 보면 심판들의 판정이 계속 틀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괜히 판정에 신경 쓰느니 다음 공이나 다음 타석을 준비하는 것이 낫다.

  • 야구 경기를 보게 된다면, 초구를 치는 타자의 타율이 어떤지 살펴보라. 아마도 1할도 안 되거나 기껏해야 2할쯤 될 것이다.

  • 배트를 크게 휘두르는 타자는 큼지막한 안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라 큼지막한 타구를 날리는 선수일 뿐이다.

  • .260 타자가 갑자기 .320을 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짧은 시간 내에 .260에서 .320으로 올라선 타자가 있다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땀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땀 말고 다른 것도 있더라고요.

  • 만약 이제까지 타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다.

  • 누군가 빨리 4할을 쳤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4할을 친 사람에 대한 질문을 그 선수에게 쏟아낼 것이며 그를 괴롭힐 것이다.[11]

  • 마지막으로 저는 너무나 행복하였으며 제가 미국에서 태어난 것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인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게된 것이 태어난 이래 얼마나 크나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2]
----
  • [1] 다만, 1943~1945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입대 때문에 빠져야 했다. 이는 라이벌 조 디마지오도 같은 부분.
  • [2] 1942, 1947시즌에 달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이 두 시즌에서 후술할 이유로 MVP에 선정되지 못했다.
  • [3] 1950 시즌 기준
  • [4] 다른 문헌에 의하면 밀어치기를 시도해본적은 있다고 하나...
  • [5] 전자가 테드, 후자가 조 디마지오
  • [6] 통산 조정OPS가 190으로 2위이고 wrc+가 188이다. 평균적인 타자의 2배의 생산력을 가졌었다는 말. 물론 통산 1위는 베이브 루스의 조정OPS 206과 wrc+ 197
  • [7] 맨틀은 중견수, 윌리엄스는 좌익수였고 윌리엄스의 수비는 좋지 못했다. 팬그래프에서의 WAR를 보면 이 해 WAR는 맨틀이 우위에 있다. 11.4 vs 9.7
  • [8] 심지어 1953년 37경기에만 출장했음에도 MVP 투표를 받았다.
  • [9] 스탠 뮤지얼도 2012년 이 훈장을 받았다.
  • [10] 죽기 전 기자들을 상대로 옛 이야기를 풀어가듯 말했다고 한다.
  • [11] 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에서
  • [12]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연설의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