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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

last modified: 2018-03-04 01:28:29 Contributors

太平天國
TaiPing Rebellion
(1851~1864)


(네이버 백과사전의 태평천국 전개도)


전후세력범위를 나타낸 모습.[1]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발달
4. 몰락
5. 의의

1. 개요

중국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정국가 건국 운동. 관점에 따라 태평천국 운동으로도 불린다.

14년간 이어지다가 결국 무너졌으나, 청나라의 정규군은 제대로 활약하지 못해 그 위상이 크게 떨어졌고,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신사들이 만든 의병이 서방 열강과 연합하여 난을 진압하였다. 또한 이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상당수는 기득권층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기득권에 편입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가진 실력자들이었으므로 그 자체로 청나라의 직성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결과 지방의 기득권층들이 청 왕조로부터 등돌리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렇게 버려진 청은 50여년 뒤 결국 멸망하게 되니, 반란이 일어난 국가 대부분과 그 운명이 일치한다.[2]

2. 배경

태평천국의 건국자인 홍수전(洪秀全)은 본래 광동성 출신의 유생이었다. 중농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다른 형제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부모는 그의 학업을 지지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급기야 상심한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꿈 속에서 한 백발의 신선이 나왔는데, 그(홍수전)가 자신의 아들이니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홍수전은 예전에 선교사에게 받아두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처박아두었던 '권세양언'이라는 선교서[3]를 읽고 자신은 조물주(造物主) 천성부상주황상제(天聖父上主皇上帝) 야훼의 둘째 아들이며 예수의 동생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태어난 제2의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게 된다.[4] 이후 홍수전은 상제회라는 종교단체 겸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농촌 지방 등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권세양언의 기독교 교리에 중국 토착적 종교의 모습이 가미되어 일신교적 단체가 형성되었고, 공자상을 파괴하는 등 그 활동이 점차 과격해졌다. 이 과정에서 홍수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상제회는 1만여 명의 규모가 되어 금전촌[5]에서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다. 건륭제 말 대외 원정에서 시작된 재정 악화와, 그에 따른 향촌사회와 농촌의 붕괴, 이민족 왕조의 통치에 대한 불만, 아편전쟁 이후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불만 등이 쌓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태평천국의 난에 합류하게 되었다.

3. 발달

태평천국군은 그해 영안(永安)을 점령했고, 광서성을 중심으로 외세의 침투가 특히 심했던 호북, 호남 등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빈농 및 일용직 노동자들을 합류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 세를 확대하였다. 영안을 버린 태평천국군은 북상하여 1852년 장사(長沙) 공략에 실패했으나, 1853년에는 1월 (武昌)에 이어 기어이 3월 남경(南京)을 점령했다. 이후 남경을 천경으로 개칭, 수도로 삼았으며 화남지방 대부분을 장악하고, 토지제도의 개혁 및 전족 등 악습철폐, 남녀평등[6], 사유재산 금지, 아편의 금지 등의 사회개혁을 내세워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에서 실제로 이러한 개혁을 제대로 실시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점령지에서는 토착지배계급이 '투항'해서 지역적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토지제도 개혁은 결국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계급제도의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홍수전을 비롯한 '노형제'(처음 거병 때부터 홍수전을 추종했던 광서성 출신들) 집단은 왕과 사실상의 귀족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청나라의 지배계층 이상으로 많은 비빈[7]들을 거느렸다.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태평천국은 초기의 열정적 지지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더구나 미신타파라는 명분아래 농촌에 있는 사당과 유학자들이 조상신과 유교현인들을 모시는 사당을 부수거나 점령지에 청나라에 협력한 부자들에게 약탈한 재물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외는 당시 농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토지개혁을 하지 않고 오히려 태평천국 수뇌부와 그 친척들이 새로운 대지주로 농민들을 더 착취하였다. 이는 당연히 농민지지를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4. 몰락

여기에 내분까지 겹쳤다. 천왕(天王) 홍수전 아래의 다섯 왕인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은 각각 독립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분기 이전에 서왕 소조귀와 남왕 풍운산은 호남지역 공략전에서 전사했으니, 천형(예수)의 대행자(천형하범)[8]를 자처했던 소조귀(1852년 9월)와 초창기 홍수전 대신 조직을 구축했던 친족 풍운산의 죽음(1852년 6월)은 양수청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을 겸임한 양수청은 스스로 신탁을 받는 방식[9]으로 배상제회의 신도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홍수전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고 하다가[10] 홍수전, 위창휘, 석달개에게 숙청당했다. (이는 양수청이 주도한 베이징 공략이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양수청에게 원한[11]이 있던 위창휘는 양수청의 가족, 추종자 2만명을 학살하고, 이를 만류하던 석달개 역시 의심하며 마찬가지로 석달개의 가족, 부하를 학살한다. 이에 경악한 홍수전과 석달개가 힘을 합해 위창휘를 숙청하고, 석달개 역시 홍수전과 그 형들의 시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촨성()으로 진출하다가 1863년 그곳의 청군에게 전사한다. 초반 태평천국을 이끌었던 집단지도체제가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반면 청은 초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에서 숨을 고르며 진영을 가다듬었고, 한인 출신의 신사층 증국번이 조직한 한족 자위집단(단련이라 부른다.) 연합체인 상군(湘軍)이 반란군 대신 청 조정의 편을 들면서 전황을 반전시킨다. 그리고 상군을 모티브로 삼아 회군이라는 부대를 만들게 되는데, 이 회군을 지휘하여 훗날 정계의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유명한 이홍장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동 때문에 북경을 공략하기 위해 출병한 북병군이 북양군벌에게 참패한 이후 태평천국은 수세로 돌아섰고 세력도 축소되기 시작했다. 사실 여느 반란 같았으면 내우외환이 겹친 이 시점에서 대책없이 붕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나마 태평천국에는 이수성, 옥성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등장하여 분전한 덕분에 멸망이 늦추어 질 수 있었다. 이수성 같은 경우 거의 상해를 점령할 뻔 했지만 남경이 청군에 포위되는 바람에 군사를 돌려야 했을 정도.

더군다나 서양의 열강도 '상승군'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조직하여 청조를 지원하였다. 서양에서는 처음에는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진 것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지만, 태평천국은 농민공산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반외세를 외쳤으며 실제로 유럽 각국의 조차지를 공격하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징조약으로 자국 수출품의 주시장인 장강 유역을 얻었던 영국 등은 이 지역을 태평천국이 차지한 것을 우려해 본격적으로 청조를 지원하게 된다. 게다가 처음에는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이건 뭐 기독교 껍데기만 뒤집어 쓴 사이비 종교가 아닌가.(…)

결국 1864년 6월 1일 홍수전이 사망한 뒤[12] 1달만에 천경이 함락 당했으며, 태평천국의 잔존세력인 뇌문광이 도적떼의 연합체인 장낙행의 염군(捻軍)과 연합해 4년간 청에 저항하지만 결국 이홍장과 좌종당에게 진압되는 것(1868년)으로 태평천국의 난은 끝이 나게 된다. 안 그래도 국가 막장 테크를 타던 청조는 이를 계기로 그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청의 정규군으로는 태평천국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며, 청조에 대한 민심 이반은 가속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약 200~800 만명이 사망했다. 대부분의 자료가 2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건 당시의 사료는 흔하게 사망자를 부풀리는 사건이 많았기 때문.

5. 의의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로는 2007년작 명장, 드라마로는 TVB에서 제작한 태평천국(1988), CCTV에서 제작한 태평천국(2000)이 있다.

후에 쑨원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최초의 반제 반봉건적 농민 운동으로 일찍부터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연구가 활발한 분야로 관련 논문만 수만편이 넘는다.[13] 덕분에 국내 연구자들이 석,박사 논문쓸때 잘 선택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논문만 읽다 대학원 졸업하는 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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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도에는 상하이를 점령한 것처럼 나타나지만 1860년, 1862년에 상하이를 공격한 태평천국군은 청군과 열강의 연합으로 인해 모두 실패했다.
  • [2] 참고로 비슷한 시기 조선도 역시 몰락 양반이 다수 포함된 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그로부터 50여년 뒤 멸망했다.
  • [3] 중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인 '양아발'이란 사람이 간행했다.
  • [4] 나중에 중국 군벌이 난립할때 똑같은 포지션을 달고나온 장군이 한 명 나왔다. 이름은 차오쿤. 별명이 크리스천 제네럴. 그는 "내가 짱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메시아의 명령(...)"이라고 부정선거를 일삼았지만 곧 베이징에 쿠데타가 발생. 쫓겨나는 신세를 지게된다.
  • [5] 때문에 금전기의(金田起義) 라고도 한다
  • [6] 과거 허용은 물론 여군(여영)조차 있었다고 한다.
  • [7] 태평천국 수뇌부가 미인들을 강제로 공출하여 수많은 처녀들이 얼굴에 흙이나 숫검댕을 바르면서까지 저항하자 여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목욕시켰을 정도였다.
  • [8] 이 '천형하범'과 아래에 나오는 양수청의 '천부하범'은 본래 광서성 일대 무당들이 신내림을 가장해 사람들을 현혹할 때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비웃음을 샀을 뿐이지만 당시 중국 내에서도 가장 의식구조가 뒤떨어진 광서성에선 잘 먹혔다. 이들이 광서성에서 제일 먼저 세력을 얻어 일어난 것도 이것이 원인.
  • [9] 즉, 하나님이 양수청의 몸을 빌어서 명령을 했던 것이다(천부하범). 명목상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홍수전이었지만 양수청의 몸에 하나님이 강림했다면 꼼짝 없이 쩔쩔매었고, 실제로 하나님이 현현한 양수청 밑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 [10] 기껏 하나님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게, '왜 천왕 홍수전에게는 만세를 부르고, 동왕 양수청에게는 구천세를 부르느냐. 동왕에게도 만세를 불러라' 따위의 속보이는 것이었으니…. (참고)
  • [11] 위창휘는 지주 출신이었고 양수청은 숯구이 출신이었으나, 양수청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위창휘와 석달개에게 모욕을 자주 주었다.
  • [12] 자살설, 병사설이 있다. 병사설의 안습한 최후는 홍수전 항목을 참조.
  • [13] 여기에는 중국이 한국과 달리 논문쓰기가 쉽다는 점도 작용했다. 한국 기준으론 도저히 논문으로 볼 수 없는 적은 분량의 논문도 많다.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로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이라는 것들이 대개 2~4페이지 분량인데, 그쪽의 논리를 소개해보자면 이미 다 검증된 사람들이 쓰는 논문이라 딱히 검증 어쩌고를 할 필요가 없어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