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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

last modified: 2020-08-27 21:46:05 Contributors

高畑 勲(たかはた いさお)
일본애니메이션 감독. 1935년 10월 29일 ~ 2018년 4월 5일.

미에현 이세시 출신으로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된 계기는 프랑스의 장편 애니메이션 "왕과 새"의 원형이 된 1952년 작 "사시의 폭군"을 본 이후라고 한다.

대학 졸업 후 토에이 동화에 입사하여 "개구쟁이 왕자의 큰뱀 퇴치"에 투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터의 경력을 쌓았으며,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으로 감독 데뷔했다.

토에이 동화에 입사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열악한 토에이 동화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조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고, 그 성과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의 연출을 맡았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작품성에선 인정 받았지만 상업적으론 실패하여, 결국 타카하타는 미야자키와 함께 도에이를 떠나 A프로덕션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미야자키와 함께 A프로덕션에서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강판된 루팡 3세의 연출을 담당, 판다코판다의 TV판과 극장판 감독, 닛폰 애니메이션에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1974), 플란다스의 개 (1975), 엄마 찾아 삼만리 (1976), 빨강머리 앤 (1979)을 잇달아 연출했다.

1981년 자린코 치에의 첫번째 극장판을 감독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첼로켜는 고슈를 감독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프로듀서를 맡았고, 이를 계기로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설했다.

지브리 근무 시절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프로듀서 혹은 음악 연출을 맡았으며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감독했다.

수수하고 차분한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을 추구했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특기였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감히 말한다면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의 연출 실력은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위라고 말할 수 있다." 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오랜 동료이자 친구로, 미야자키의 사상과 연출에 타카하타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두 사람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두 사람의 작풍이나 사상 차이라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어떤 강연에서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의 스튜디오다. 그는 임원이지만 나는 다르고..."라고 해서 일각에선 타카하타 이사오가 99년 이후로 신작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가 미야자키가 지브리를 틀어쥔 탓이 아니냐고 분석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미야자키와는 달리 타카하타는 각본과 연출 타입의 감독이라, 자신이 구상한 것을 구현할 애니메이터가 필요해 작품의 제작 속도가 느렸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때는 느린 제작 속도 탓에 프로듀서가 몇 번 교체되었을 정도였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한 프로그램에서 "가능한 빨리 타카하타의 신작을 내놓고 싶다." 고 발언했으며, 결국 2013년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공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와 2013년 여름에 동시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콘티 작업이 예상보다 늦어져 불발되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개봉과 함께 프로듀서가 밝히는 작업 과정의 뒷이야기가 공개되었는데, 그가 스태프들을 비효율적으로 관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문 한글 번역)

2018년 4월 5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Youtube(https://youtu.be/q7wAIrXDFKM)
타카하타 이사오의 작별회. 그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주제가 '생명의 기억 (いのちの記憶)' 을 부른 가수 니카이도 카즈미 (二階堂 和美)가 해당 노래를 직접 불러 추모했다. 울음을 참아가면서 끝까지 열창하는 가수와 중간에 비친 미야자키 하야오, 스즈키 토시오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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