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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역사

last modified: 2017-12-07 04:16:26 Contributors

캄보디아역사를 다루는 항목.

Contents

1. 전근대
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독립
3. 크메르 루주의 지배
4. 베트남 통치 시절
4.1. 현대

1. 전근대

역사는 정말 굴곡이 많은 국가이다.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 2,000년 전 부남(扶南)이란 나라가 세워졌는데, 캄보디아에서는 프눔(នគរភ្នំ)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실 이 나라 구성원이 현대 캄보디아인의 선조인지 아니면 참파와 동일한 오스트로네시아인인지 논란이 있으며, 둘 다 살던 다민족 국가란 설도 있다고 한다. 부남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고, 상업으로 잘 나갔으나 비교적 내륙 쪽에서 시작된 진랍(ចេនឡា첸라, 眞臘) 왕국에게 밀리기 시작한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이후 부남을 밀어냈으며, 이때부터 확실한 크메르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8세기 진랍은 내륙의 육진랍(陸眞臘)과 바닷가의 수진랍(水眞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수진랍은 인도네시아자바에게 시달리곤 했다. 그러다 자야바르만 2세(ជ័យវរ្ម័នទី២)가 자바로부터 독립한 후 육진랍까지 통합해 9세기 앙코르 왕조의 크메르 제국이 세워진다.


이렇게 세워진 크메르 제국은 전성기인 9 ~ 13세기에 걸쳐 동남아를 호령하고 유구한 문명을 이룩한 깡패국가였다. 캄보디아의 밥줄 대명사인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유적들도 이 시기 세워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했는데 금과 보석으로 도배를 했다는 중국 사신 주달관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니...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야바르만 7세의 과도한 사원 건축과 대외 원정으로 인해 그의 죽음 이후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그 뒤 왕위 친탈권이 심해짐과 동시에 몽골 제국에게 멸망한 대리국의 부족들이 현재의 태국자리에 이주하여 태국(씨암)을 건국하여 캄보디아를 털고 라오스 등에도 독립국가가 세워지는 등의 외부 요인까지 겹쳐, 이런 식으로 지금의 캄보디아는 코친차이나, 타이의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상실했다. 결정적으로 1431년 태국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캄보디아의 인구 대다수는 학살당하고 수도 앙코르도 불타버리면서 몇 군데를 거쳐서[1] 짝독목(현재 수도인 프놈펜)까지 천도했다. 그렇게 왕조가 기울어 가면서 옛 수도 앙코르의 잘 가꾸어진 관개 시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자연 속에서 잊혀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침공하러 온 쿠빌라이 칸의 두 장군을 역관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몽골에 조공을 보내느라 국고가 바닥이 나버렸다.

그 후 캄보디아는 이런저런 도시국가로 흩어졌지만 이후에도 타이에게 툭하면 얻어터지는 샌드백... 가끔씩 반격하긴 했는데 더 맞았다. 필리핀에스파냐포르투갈용병을 고용해서 공격하기도 했지만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무역으로 먹고살긴 했으며, 내륙의 수도 프놈펜보단 바닷가의 쁘르이 노꼬(ព្រៃនគរ)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7세기부터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응우옌 씨가 세력확장을 위해 캄보디아를 넘보기 시작했다. 마침 캄보디아의 내분과 캄보디아를 차지하려는 청나라인들의 협조가 겹치면서 응우옌 씨는 코친차이나를 강탈했다. 그리고 태국도 베트남과 청나라와 동맹을 맺고 앙코르 와트가 있는 씨엄리업 지역을 뜯어가다가 마침 베트남이 혼란에 빠지자 1772년엔 프놈펜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사실상 속국이 되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친하게 지내려 했지만 결과적으론 베트남에게 점령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베트남과 동화시켜 역사속으로 없애버리려 했다. 여기에 태국이 베트남을 몰아내고 캄보디아를 완전한 태국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캄보디아 국왕은 1853년 프랑스의 보호[2]를 요청했으나 태국의 악의적인 방해 공작으로 인해 좌절되었다가, 1863년 프랑스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해 캄보디아는 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되었다.

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독립

이렇게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되었으며 본래 캄보디아의 땅이었지만 옆나라 타이가 뺏아간 땅을 프랑스가 다시 환수하여 캄보디아에게 주었다. 캄보디아는 별 자원이 없는 동네라 프랑스는 개간을 하진 않았으며, 그나마 철도를 좀 깔아준다던가 도로가 좀 생긴다던가 프랑스식 건물들을 대거 지어준다던가 하는 지원이 전부였다. 20세기 초반 캄보디아는 고무와 옥수수 재배지가 되면서 크게 돈을 벌었으나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에 다시 망했다. 또한 엄연히 말하자면 보호령이기 때문에 군주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완전히 나라가 망했다기에도 애매하고 교육수준도 낮았던 캄보디아에선 그나마 프랑스의 힘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몰아냈기 때문에 민족주의 열기가 아예 없었다. 그래도 194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 도시의 엘리트 중심으로 캄보디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모두 일본이 점령했기 때문에 일본의 관할하에 있다가 일본이 패망하고 물자가 부족해진 프랑스가 베트남과 전쟁을 하다가 몇 년만에 간단하게 패하고 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남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된 지 91년 만인 1954년 독립했다. 한동안 옛 왕가의 후손[3]인 노로돔 시아누크 대공이 이끌었는데, 1963년 그는 수상으로서의 자신의 임기를 영구히 하는 헌법 개정을 국회에 강요하여 통과시켰다. 국민 투표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왕당파가 선거에 참패하자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한것이다.

시아누크는 좌파와 우파를 조절하고, 정치적 통제, 협박, 후원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이 과정에서 비밀경찰 등을 다수 동원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운 좋게도 세계전쟁에도 식민 시절 갖춰둔 도로나 철도 등의 시설이 거의 온전하게 보전되었기에 독립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경제성장을 이뤄낸다. 그러나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격화되어 가자 이러한 정책의 유지가 심각하게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경을 넘는 쌀 밀매가 캄보디아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시아누크 자신 또한 경제분야를 신경쓰기보다는 권력유지와 개인 축재에 신경을 많이 썼으므로 캄보디아의 경제는 점차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경제적 분야를 제외하더라도 시아누크가 나라의 우두머리로서 이루어낸 치적을 별 볼일이 없다. 그중 하나는 외교적 면이다. 시아누크는 자신의 사욕에 이득이 된다고 판단 될때마다 미국,중국,소련,유럽등에 무차별적으로 우호적 제스쳐를 보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각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런 줄타기 외교는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국제사회에서 시아누크 치하의 캄보디아는 믿을수 없는 국가로 낙인 찍혔다. 냉전시기의 국제사회에서 구분없는 외교적 구애는 득될것이 전혀 없었으나 시아누크는 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시아누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단계에서 의회를 해산했다. 지식인,반대파를 숙청했다.당시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는 서방세계와 다르기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아누크가 주장한 캄보디아의 질서는 불교식 사회주의였다. 이는 시아누크를 부처의 대변인으로 보는 것을 골자로 하며 시아누크는 종교적,정치적 양면에서 최고의 위치를 확보했다. 궁예? 캄보디아가 전통적으로 불교국가 였고 불교의 세력이 강했음을 염두에둔 포석이라 할 수 있다.

시아누크 치세의 캄보디아는 초반에는 비교적 원만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시아누크의 독재를 위해 국민 탄압이 가속화됐다.또한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으며 경제적 악화가 계속됐다.

이렇게 되자 군부 지도자 론 놀과 우파 쪽은 시아누크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결국 1970년에 론 놀과 국회에서는 시아누크를 수상 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크메르 공화국을 수립한다.[4]

3. 크메르 루주의 지배

그러나, 베트남에 인접한 동부 캄보디아 지역(지금의 스바이 리엥과 껌퐁 참, 몬돌끼리 지역)이 북베트남 쪽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데다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Khmer Rouge)가 농촌 지역의 지지[5]를 기반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당시 캄보디아에 대규모의 폭격을 하였으나 효과는 별로였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 크메르 루주에게만 도움을 준 꼴이 되었다. 거기에 쿠데타로 새로이 세력을 잡은 론 놀 정권도 삽질을 연달아 하고 있었던 덕분에 사실상 크메르 공화국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고, 결국엔 1975년에는 수도 프놈펜과 그 외곽 지역만이 크메르 공화국의 영역이었다.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짐에 따라 크메르 루주가 그해 4월 17일에 프놈펜을 점령하여 크메르 공화국은 사라졌다. 이때 론 놀은 국외로 탈출했고 수상이였던 시소와트 시리크 마타크[6], 론 논(론 놀의 동생), 롱 보렛 등 론 놀 정부의 수반 대다수는 탈출 권유를 거부하고 남아있다가 크메르 루주에게 처형당했다. 이렇게 크메르 루주 체제에서 시아누크 왕의 손자 및 핏줄 14명이 처형당했다.[7]

1976년, 크메르 루주는 캄푸치아 민주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크메르 루주가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프놈펜을 비롯한 캄보디아의 주요 대도시에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농촌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그 시절 영상기록을 보면 심지어는 총으로 위협해서 그냥 집에서 무작정 끌어내는것도 볼 수 있다. 전국의 대도시가 유령도시화 되었으며 수 일 이내로 프놈펜에선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식량을 운송할 수단이 없다는 게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정치적인 의도도 존재했고 농업을 매우 중시하는 폴 포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강제이주당한 이들은 '새로운 사람들'이라고 불리며 매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배급되는 식량도 제일 적었고 불시에 처형당할 수도 있었으며[8], 폴 포트 정부의 야심찬 정책들에 맨 먼저 소집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제노동을 해야했다.

그 반면에 농촌에 계속 거주했었던 '옛 사람들'은 대우가 좋은 편(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과 견주면 좋다는 것이다.)이었고, 강제로 이주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협력한다는 전제 하에서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화폐가 사라졌다. 모든 상업과 무역은 사실상 중지되었으며, 사람들은 배급받는 을 양철로 재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일부는 귀금속이나 개인 소지품을 물물교환하기도 했다.

우표 및 전화 역시 사라졌다. 1978년 4월 1일에 우표 5장이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실물은 당연히 없다. 누가 쓰겠냐 쓰거나 가지려는 순간 그곳에 끌려갈텐데... 더욱이 외국과의 교류란 폴 포트, 키우 삼판 등 정권 최고위층 중에서도 소수만 가능했다. 세계 우표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도시전설, 아니,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급. 국제 무역도 사실상 중지였으나, 홍콩을 경유하는 3자 무역이 잠깐 행해지기도 했으며 주 교역국은 중국이었다.[9]

1975년 이전, 교육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처형되었으며 생존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육은 간단한 수학과 읽기 정도만 제공되었고 그 외에는 혁명의 의식을 심는 것이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폴 포트의 중요한 '군대'였으며 어른들을 감시하고 밀고했다. 이것은 영화 킬링필드에서 상세하게 묘사된다.

의료 부분의 경우, 의사들은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되고 의료 행위도 금지되었다. 고위 당 간부들은 상당한 수준의 서구 의료 기술과 의약품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은 효과가 떨어지는 전통 요법에 의존해야 했다. 일부 사람들은 귀중품을 물물교환하여 아스피린이나 다른 단순의약품을 구했다.

종교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캄보디아인 대다수가 신봉하는 소승불교의 스님들은 주직을 박탈당하고 노동 부대로 강제 편입되었다(처형된 사람도 많았다.). 특히 기독교이슬람교는 서구의 상징으로 여겨 탄압이 더욱 극심하여 성직자들은 처형되었으며, 프놈펜에 있던 가톨릭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 금기인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물론 거부하면 처형되었다). 이중에서 특히 이슬람교가 탄압이 심했다고 얘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어쩌면 히틀러의 그것과 유사할지 모르겠지만 크메르 루즈 역시 캄보디아는 정통 크메르족이 주인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소수민족을 탄압했기 때문일것이다. 캄보디아에도 꽤나 많은 소수민족이 아직 남아있는데 특히 이슬람을 믿는 참 족이 그나마 숫자가 많아 유명하기에 이런 설이 생긴것.

여러 곳에 강제 수용소가 생겨 반혁명 사상을 가지고 있다거나 외국의 스파이 등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수용했다. 이들 중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은 현재는 뚜얼 슬렝 학살 박물관인 S-21이었다. 약 1만 7천명(최대 2만명)의 사람들이 이 곳을 거쳐갔으며 이 가운데 베트남군의 프놈펜 탈환 당시까지 생존하여 구출된 이는 겨우 12명 뿐이었다. 이러한 대학살은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베트남과 가까운 성향을 보였던 동부 지역에서는 쿠데타의 조짐이 피어나고 있었고, 실제로 미수에 그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여파로 동부 지역에서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대부분은 베트남으로 도망쳤다.

4. 베트남 통치 시절

1978년, 캄보디아와 베트남간의 국경 분쟁이 베트남의 인내심을 넘어섰고 베트남에서는 캄보디아에 대한 군사 공격을 결의하여 12월 22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12만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남동 지역에서 서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해나갔으며 17일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10]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타이 국경 지대로 도주하여,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다른 나라들과 합의하여 타이 국경지대를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게릴라전을 하였으나 이미 크메르 루주는 새로운 국가를 전복시킬 힘은 없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가 남아 있는 한 안정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 때의 여파로 캄보디아에서 타이 국경과 가까운 반떼이 멘쩨이, 오다 멘쩨이 지역에는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바로 크메르 루주가 방어를 위해서 대규모로 지뢰를 매설했기 때문. 지뢰가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너무 많고 캄보디아의 경제상황도 막장이라 지금도 지뢰 제거는 요원한 상황이다.[11]

하여튼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세웠으며,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한 헹삼린이나 훈센이 지도자가 되었다. 앞에 설명했듯 크메르 루주는 일단 게릴라전을 벌였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15만여 명의 베트남군을 주둔시켰으며, 캄보디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당시 베트남은 고문관을 파견하거나 베트남인을 이주시키곤 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제재당한 베트남은 결국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결국 1991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 후 1993년 9월 왕정이 복고된다. 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던 나라중 유일하게 1992년 이후에 무너져 가장 늦게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나라다.

1993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첫 총선에서는 왕정주의적 정당인 푼신펙(Funcinpec)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캄보디아 인민당이 뒤를 이었으며 푼신펙의 라나리드와 인민당의 훈센이 함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 쿠데타 기도가 일어나는 등 정국이 혼란했으며 양 계파 사이 충돌이 일어났다. 1997년 훈센과 라나리드 총리 사이 무력충돌 사태가 일어나 결국 라나리드는 축출되었다.

4.1. 현대


1998년, 크메르 루주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캄보디아 서북부의 한적한 마을 안롱벵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어서 지도자였던 키우 삼판과 이엥 사리가 훈 센 정부에 항복하였고 타 목만이 크메르 루즈 지도자로 남았었으나, 이 역시 다음해인 99년 항복하여 크메르 루주는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재구성되어 망명중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맞아들여 정식 국왕으로 모시는 대신 실권은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현재는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UN의 도움에 힘입어 ECCC라는 간판을 걸고 08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http://www.eccc.gov.kh/en/

그러나 S-21 교도소[12] 소장이며, 일급 고문자였던 카잉 구엑 이에우(Kaing Guek eav 또는 lew. 1942~ 일명 두치 동무위키미디어 )는 1979년 베트남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부가 무너지자 신분을 숨기고 달아나 한적한데서 숨어살다가 1995년 그를 알아본 이들에게 공격받아 아내가 죽고 또 달아났다. 그는 기독교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차리고 선교에 앞장섰다가 그를 알아본 현직 형사[13]에게 잡혀서 1999년 구속되었으며 상소가 기각되어 2009년 2월에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0년 징역 3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유엔 전쟁범죄 법정은 2012년 항소를 기각했다.

더더욱 캄보디아 여론을 격분하게 한 것은 10년 동안 회개한다고 이러던 두치는 정작 재판에선 난 억울하다며 하나님의 힘으로 회개했으니 용서해달라는 소리를 하며회개했다며? 왜 목사인 자신을 외면하냐며 교회들을 원망하는 말까지 하여 재판에서 야유를 받았다. 이거 이근안 생각나게 하는데 둘이 하는 짓과 이후 회개했다느니 애국자라고 자신을 옹호하는 거 보면 둘이 의형제 맺어도 된다

재판과 관련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기사를 발췌해보면...

<이 현장을 보던 랑 뚜야우 페르난데스 목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잉 구엑 이에우를 옹호하려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말없이 쳐다봤을 뿐이었다. 바로 그도 크메르 루주에게 형과 아버지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그 또한 어릴적에 수용소에서 맞아 남은 상처가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과거를 뉘우치는 말이라도 했더라면 덜했을텐데 카잉 구엑 이에우의 종교적으로 회개했다는 말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면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크메르 루주 소속으로 회개한 이들은 많다. 사실 살기위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가서 자신은 다르다고 어필(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해야 했기에 악랄하게 굴던 이도 많았다. 하지만 캄보디아 여론을 격분하게 한 것은 승려들이 된 전직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그래도 회개하고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주면서 용서를 빌었던 것[14]과 대조적인 카잉 구엑 이에우의 저런 발언을 보면 더 분노할 수 밖에. 참고로 동남아에선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한마디로 내가 머슴이 되어 당신을 대접한다는 뜻과 모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동남아에서 함부로 남에게 내 발 씻겨라 소리를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살인난다[15]

이후에도 전범 재판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크메르 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전 부서기장, 이엥 사리 전 외무장관,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 이엥 티리트 전 내무장관의 재판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킬링필드에 전혀 관련이 없으며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서 전 세계인의 공분을 사고 있다. 천하의 개쌍놈 게다가 캄보디아 정부 또한 "이번 재판이 마지막 전범재판"이라는 태도로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어 이들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질지,[16] 그리고 다른 전범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그리고 이엥 사리가 먼저 심판도 안 받고 죽었다.

한편 1997년부터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1977년 폴포트에 반대해 캄보디아를 탈출한 후 베트남 괴뢰 정권의 지도자로 있던 훈 센 총리가 2012년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다. 그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독재자란 평이 우세하다만 어쨌든 캄보디아 국내에선 경제도 살아나고 정치도 옛날보단 아주 안정된지라 지지받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2009년 그는 캄보디아를 독재정권이라 부르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으며, 또한 부자세습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독재 맞잖아

전 국왕 로돔 시아누크2012년 10월 15일,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들인 노로돔 시하모니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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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중에 그나마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가 프놈펜 서북부의 껌퐁 츠낭 주에 있는 우동이라는 도시이다. 앙코르나 웬만한 관광코스를 다 둘러보고 어딘가 좀 더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 [2] 말이 보호지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다. 아예 나라를 떠받치는 수준이니 을사조약 이후의 대한제국이나 고려의 태동 당시의 신라와 같은 느낌이다. 사실 이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캄보디아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 [3] 사실 앙두엉, 노로돔 왕을 비롯해 프랑스 아래에서도 왕은 계속 자리를 지켜내었으며 지금의 왕궁도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지어준 것이다.
  • [4] 시아누크 왕자는 옛부터 한편으로는 적색노선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걸로 생각된다.왕족이 공산주의라니 실제로 쿠데타가 터지자 북한(!)으로 망명해 초대 김씨 왕의형제를 맺었다는 얘기도 있고 왕위에서 내려와 여생을 보냈던 2000년대에도 요양차 베이징에 자주 들렀다.
  • [5] 민족의 상징이었지만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즈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적의 적은 나의 편!
  • [6] Sisowath Sirik Matak. 시아누크의 사촌동생으로 그가 탈출 권유를 거부하면서 남긴 편지는 80년대 한국의 고교 교련 교과서에도 나와 자주국방 예시로 쓰곤 했다. 당시 교과서에선 미국만 믿다가 망쳐버린 내 자신을 용서 못하기에 수상으로서 조국에 남아 죽겠다는 마다크(여기선 이름이 마다크로 나왔다.)의 편지글로 나와 있었다.
  • [7] 일설에 의하면 노로돔 시아누크의 계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 [8] 론 놀 정권 하의 군인, 관료 등은 최우선적으로 처형당했다.
  • [9] 이런 정책은 사실 공산주의/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1848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발표이래 수십, 수백가지 분파가 형성되었지만, 화폐제도의 폐지와 물물교환, 자급자족 사회로의 회귀는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다. 폴 포트는 정통 공산주의 이론이 아닌 마오쩌둥의 농업 중심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여 그것을 마오쩌둥보다 더 엄청나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천했다.
  • [10] 크메르 루주 정권의 막장 짓거리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베트남군을 환영해주기도 했다.
  • [11] 지뢰 때문에 출입이 불가능한 유적지도 많다. 후손들 밥줄까지 끊어놨다, 천하의 개쌍놈들 아니 근데 킬링필드 보려고 거기도 관광객 엄청 많이 오잖아?
  • [12] 20만이 넘는 수용자가 있었고 여기서 공식적인 사망자는 1만 7천명이지만 수감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몇 배는 더 된다고 한다. 크메르루즈 집권 시절, 교도소들이 다 그렇지만 소장이 직접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했다고. 정신무장이란 이름으로 똥을 먹게 하지 않나,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명령을 내렸다든지 아주 지옥이었다. 그러니 여기 소장이니 잊혀질 리가 없었다.
  • [13] 바로 두치에게 잡혀서 고문받았던 수용소 수용자였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 [14] 카잉 구엑 이에우를 체포한 형사의 어머니도 크메르 루주 대원에게 호되게 고문당해 절름발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대원도 승려가 되어서 나중에 찾아와 어머니의 발을 씻으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 [15] 실제로 태국 대사관 근무한 이가 쓴 책자에서 한국인이 태국인에게 이 발냄새나는 게...라고 술 취하여 한 말에 병으로 상대방에게 얼굴을 난도질당해 수십바늘을 꿰멘 일이 있다. 하지만 태국 현지에선 거의 무죄로 처리되었다. 이슬람권에서도 마찬가지. 조지 워커 부시에게 신발을 던졌던 이라크 기자인 문타다르 알 자와디를 봐도 그렇듯이 신발로 남을 치는 것은 나랑 죽을 각오로 싸우자는 선전포고로 정말 이렇게 하면 피범벅 싸움판이 벌어진다. 더불어 발바닥을 남에게 내미는 것도 모욕이다. 모스크 앞에 발을 씻는 세면대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 [16] 유죄 판결이 내려져도 이들이 그 죄의 대가를 치룰 지도 불분명하다. 다들 하나같이 70, 80세를 넘은 고령이라 최종판결 전에 폴 포트처럼 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