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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프락토이

last modified: 2014-12-27 23:56:12 Contributors


사산 왕조 시대의 카타프락토스 재현.

κατάφρακτος(복: κατάφρακτοι). 영어로는 Cataphract. 고대기병들 중에서 특히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을 칭하는 단어로, 고대 그리스어로 '완벽하게 무장한 자'를 뜻한다.

Contents

1. 역사
1.1. 고대
1.2. 중세
1.3. 동아시아
2. 활용
3. 여러 매체의 카타프락토이

1. 역사

1.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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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프락토이의 기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기원전 5 ~ 6세기를 전후하여 이란 고원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중장기병들이 그 기원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메디아 왕국이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처럼 이란 고원에서 발흥했던 세력들은 항상 북동쪽의 트란스옥시아나스텝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유목민들의 위협을 받았으므로 기병 전력을 강화시켜야 할 동기가 있었다. 게다가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 모두 기병으로 유명할 정도로 말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고대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오리엔트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다.

좌측 그림은 크세노폰의 저서 아나바시스에 등장하는 소(小) 키루스[1]의 근위병에 대한 묘사를 토대로 그려진 것이다. BC 401년에 등장하는 모습인데, 80여 년 전 페르시아 전쟁 때의 페르시아 기병이 흉갑과 투구만 썼던 것에 비해 말의 콧잔등과 가슴을 가리는 마갑을 입혔으며 팔과 다리 역시 갑옷과 보호대를 갖추고 있다. 여전히 투창을 주 무기로 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인 기병 운용법, 즉 기동력을 이용해 투사 무기를 활용한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으므로 유목민 궁기병들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나 그리스 중장보병과의 근접전 등 새로운 전투 상황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유목민들 역시 그런 추세에 맞춰 갑옷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동원한 사카족 카타프락토이는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예 기병대인 헤타이로이보다 더욱 중무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사카족의 갑옷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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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은 이와 같은 추세로 발달했지만, 카타프락토이의 탄생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으니 바로 대형 기병창을 이용한 강력한 돌격의 발달이었다. 이런 기병창을 그리스어로 콘토스(kontos), 혹은 크시스톤(xyst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딱히 정설이 없다. 확실한 것은 BC 3~2세기 이후가 되면 마갑과 함께 스텝 지대의 유목민 전반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충격기병 전술을 발전시킨 마케도니아의 헤타이로이가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는 점이다. 우측의 사르마티아 기병 그림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새겨진 모습과 타키투스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려진 것으로, 스텝 지대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카타프락토이 형태를 보여 준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멸망 이후 그 영토 대부분을 승계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애초 헬레니즘 계열 왕조로써 팔랑크스와 마갑 없는 충격기병이라는 마케도니아식 군대를 고수했지만, 점차 군대가 중장화되는 과정에서 점차 마갑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 이후에는 특히 박트리아의 것을 모방한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하였다. 심지어 말 뿐만 아니라 전투용 코끼리까지 갑옷을 입혔을 정도였다. 그 결과 BC 200년 파니온 전투에서 명장 스코파스가 이끄는 라이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병들을 압도하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그네시아 전투의 참패로 빠르게 몰락한 이후에는 북방 유목민들 중 하나인 파르티아가 이란을 장악했으며, 그들의 주력 역시 카타프락토이였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폰토스, 르가몬, 나바테아, 팔미라 등 북방 유목민들과 별 관련이 없는 동방의 중소 세력들도 모두 카타프락토이를 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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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카타프락토이들이 전쟁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부터다.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와 벌인 그라노케르타 전투,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헤 전투에서 카타프락토이를 상대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대승을 거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참패했다. 이후 로마와 파르티아가 양강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양자의 전쟁은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이를 주력으로 한 파르티아 군대가 로마군의 견고한 군단병 전열을 뚫느냐 못 뚫느냐 하는 양상이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타프락토이가 아무 것도 못하고 로마군에게 쳐발린 돈만 잡아먹는 병종으로 묘사하지만, 로마군도 적극적으로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하는 현실은 제대로 서술하지 않고, 실제 카타프락토이를 막기 위해 로마군이 미친듯이 방어진을 짜고 측면 돌파를 막으려고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는 무시한 처사로 보인다. 각자 시대는 다르지만, 플루타르코스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파르티아/페르시아 중장기병의 돌격은 창으로 로마 병사 두 명을 꿰뚫어 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묘사했다. AD 3세기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사산 왕조 페르시아 역시 카타프락토이를 군의 주력으로 유지했다. 특히 유목민 출신 지배층이 세운 파르티아와 달리 파르스를 거점 삼아 건국된 사산 왕조는 경무장 궁기병은 주변의 유목민들을 끌어들여 충당했으며, 매우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페르시아 귀족들로 구성된 중장기병(Savaran)에 더욱 치중하였다. 우측의 사산 왕조 기병 그림은 타키 보스탄(Taq-e Bostan)의 암벽 부조를 참고하여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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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이후 로마군 역시 군대 내에서도 카타프락토이의 비중을 급격하게 늘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군단병들을 이용한 중장보병 위주의 전술과 선방어 전략으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게르만족의 공세를 감당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군이 점차 국경에서 수비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강력한 정규군을 이용한 기동전으로 적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교리를 전환하면서 주력 부대도 기병으로 바뀌었고, 이 때 카타프락토이의 비중이 높아졌다. 실제 고대 로마 후기의 근위병대 중에서는 마갑을 입힌 기병이 25% 가량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은 우측 그림과 같이 말의 전체를 가리는 마갑을 입힌 기병을 클리바나리(Clibanarii), 위쪽 그림과 같이 말의 앞부분만 가리거나 아예 마갑이 없는 중장기병은 카타프락타리(Cataphractarii)라고 불렀으며 페르시아 기병은 그 반대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엄밀한 구분은 아니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황제가 직접 쓴 'Militaria Praecepta'같은 비잔티움 서적에서도 그냥 카타프락토이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1.2. 중세

하지만 로마와 사산 왕조가 나란히 아랍 이슬람 세력의 흥기로 관광당한 이후 카타프락토이의 활용은 크게 줄어들었다. 항상 카타프락토이를 주력으로 유지하던 페르시아는 완전히 아랍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아랍 군대는 보병 전투와 그를 보조하는 경기병의 뛰어난 기동력을 기본으로 했지 마갑을 갖춘 중장기병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로마 역시 시리아이집트 등의 알토란 같은 땅을 전부 이슬람에게 내줘서 더 이상 강력한 중장기병을 양성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로마와 이슬람 세력간의 싸움은 타우로스 산맥을 경계로 한 유격전 및 약탈전 양상으로 변했으므로 회전에서나 유용한 중장기병의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레오 6세의 전술서인 탁티카에 따르면 로마 제국 기병의 1, 2열 부대는 마갑을 전면에 입히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를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300여년 전의 병법서인 스트라테기콘을 그대로 따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적어도 회화 자료에서는 마갑을 입힌 기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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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프락토이가 다시 로마 군대에 등장한 것은 10세기 하딧 전투인데, 중장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황제는 이 중무장한 기병대를 클리바노포로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부대로 끌어모았다. 클리바노포로이의 재등장 배경으로는 로마 제국이 서서히 회복기에 들어가면서 공세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늘어났고, 이 때 적의 기병을 쳐바르고 보병 대열을 돌파할 수 있는 기병의 필요성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클리바노포로이 부대 편성은 일반 기병 4명이 돈을 모아 한 명의 중장기병을 만들어 교대로 복무했으리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주로 사다리꼴 대열을 짜고 창보다는 철퇴를 들고 적진에 돌진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한 걸 보면 돌진 - 충돌보다는 백병전 비중이 더 높은 부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바노포로이 부대가 로마 제국에서 얼마나 더 활용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바실레이오스 2세 치하에서 니케포로스 우라노스가 이끄는 정예 중기병대를 '카타프락토이'로 묘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마갑을 입히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따라 마갑을 입히지 않은 카타프락토이가 클리바노포로스를 대체했다는 설, 별개의 부대라는 설, 같은 부대이지만 임무에 따라 마갑을 벗겼을 것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지만, 어쨌건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는 이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아예 없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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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아시아에서도 압바스 왕조 이후 점차 아랍인들의 정치/군사적 위상이 추락하고, 그 공백을 페르시아인들과 튀르크인들, 특히 고도로 훈련된 직업군인 집단인 굴람과 맘루크가 메꾸기 시작하면서 마갑을 입한 중장기병이 다시 주력 병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상술했다시피 이란은 중장기병의 본고장이고, 튀르크인들 역시 유목민 출신으로써 항상 기병을 주력으로 활용해 왔다. 그 결과 셀주크 제국 이후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가 서아시아 일대를 주도하게 되면서 다수의 경무장한 궁기병과 소수의 중무장한 엘리트 기병의 조합이 다시 전장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몽골 제국 군대, 그리고 튀르크-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이나 티무르 제국 같은 몽골의 계승국가들 역시 마갑을 갖춘 중장 돌격기병을 적극 활용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마갑.출처
15세기 페르시아의 화가 카말 웃 딘 베흐자드가 그린 티무르 군대와 이집트 맘루크 군대의 전투 냉병기의 시대에서 열병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던 초창기 오스만 제국 역시 근위대인 카프쿨루 시파히 기병대에게 마갑을 입혔다. 반면 상대적으로 서쪽에 있는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 일대의 무슬림 세력들은 장식용 이외에는 실전에서 마갑을 많이 쓰지 않은 듯하다.

유럽기사들 역시 처음에는 마갑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13~14세기 이후 갑옷과 전술의 발달, 경제적 성장 등의 요인 때문에 점차 마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얇은 이불(...)같았던 것이 갑옷의 발달에 따라 사슬 갑옷, 판금 갑옷으로 변하여 나중에는 말과 사람이 모두 번쩍이는 쇳덩어리로 덮인 우측 깡통인간 같은 모습이 된다. 이불이든 판금이든 주로 찰갑으로 마갑을 만들었던 로마나 서아시아의 중장기병들과는 외형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대개 로마의 클리바노포로이 이후로 마갑을 입은 중장기병들은 굳이 카타프락토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 시기(AD 10세기 경)를 전후로 등자가 완전히 정착되고, 유럽 기사들을 중심으로 카우치드 랜스 방식이 도입되어 중장기병 전투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활용" 부분을 참고하라. 유럽과 서아시아 모두 마갑의 사용은 14~15세기에 절정을 이뤘다가, 16세기 이후 총기의 발달로 인해 기병의 방호력보다 기동성이 중요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1.3.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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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로마와 페르시아 못지않게 중장기병이 발달한 지역이라면 동북아시아 일대를 들 수 있다. 이 동네도 고대부터 문명이 발달해 왔고, 북방, 서방의 기마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부대껴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동아시아에서도 마갑을 갖춘 기병들은 카타프락토이의 범주에 들어가며, 그 형태와 활용법 역시 거의 비슷하다. 4세기 초 흉노 선우의 친위 중장기병을 묘사하면서 마갑을 입힌 기병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위의 카타프락토이가 전래되었다는 설, 동아시아에서 자체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 전자가 좀 더 유력한 듯하나, 이미 중국에서도 전차 마갑을 입힌 선례가 있고 하니 반드시 서방에서 전래되었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회화 자료로만 따지면 안악 3호분에서 등장하는 고구려 중장기병이 완벽한 형태의 카타프락토이로는 최초이기는 하나, 얼마 안 되어 중국 곳곳에서도 관련 기록이 보이므로 고구려가 특별히 빠른 것은 아니다. 그 외에 삼국사기에서 묘사한 양맥곡 전투에서 동천왕이 이끌었던 철기(鐵騎)를 마갑을 입힌 기병으로 볼 것인지, 그냥 갑옷 입은 기병으로 볼 것인지, 강력한 정예 기병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장기병의 활용은 5호16국시대부터 나라 때까지 전장을 지배했으나, 돌궐을 모방하여 기동성을 중시한 의 경기병 전술에게 밀려 사라졌고 이후 , 을 비롯한 북방 왕조들이 나타나면서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이 석궁과 신비궁 등 기계식 노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중기병의 방어력을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 하지만 그런만큼 위력은 발군이어서 송군을 격파하는데 크게 활약했다.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이유는 한 명이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을 못치게 하겠다는 전의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느려터진 중장기병이 투사무기에 엄청나게 얻어맞아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할거면 애초에 전차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물론 저정도로 중무장시킨 말로 전차를 끌게만들면 더 끔찍한 속도가 나왔을 것이다. 지형 문제도 있고 속도로도 전차 특유의 충격력을 잡아먹었을테고, 백병전에서도 위력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애초에 여진족이 기마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이기도 하고...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말을 쇠사슬로 연결했을 경우 3마리 중 1마리가 전사하면 다른 2마리도 죽은 말의 시체 때문에 행동불능에 빠진다는 점을 들어, "쇠사슬로 연결했다"라는 문구는 말 세 마리가 한 조를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는 점을 비유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는 위 그림에도 나오는 '개마무사'로 유명한 고구려 중장기병들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이런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 활용은 당의 대두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전체적인 트렌드였으며,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다른 국가들도 모두 사용한 기록이 있다. 1992년 6월 6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해동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실제로 마갑이 출토된 바 있으며,# 2009년에도 경주에서 상태가 양호한 마갑을 비롯한 각종 유물이 발굴되어 언론에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다만 통일신라 이후로는 별로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삼국 통일 이후로 마갑을 갖춘 기병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기 어렵고, 신라도 나당전쟁에서 당군의 주력이었던 경기병 전술의 위력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한국사에 몇 안 되는 대규모 회전인 귀주대첩에서 고려 중기병들이 궁기병 위주의 거란 군대의 후방을 쳐서 대승을 거둔 예가 있지만 고려 기병들이 마갑을 입은 중장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이며,[2] 마갑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에서도 예전에 비해 중기병의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조선 기병은 사료가 많이 남아 있어서 마갑을 쓰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대규모 중갑기병을 운용한 사람은 견훤이라고 한다.

2. 활용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로마군이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와 교전할 때에는 말갑옷 사이로 드러난 말의 배 아래부분과 말의 다리 부분을 노려 공격해서 승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무장한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 1,000명과 카이사르가 애지중지하던 1,000명의 갈리아 귀족 중기병이 포함된 3000명의 로마군 기병이 격돌한 카르헤 전투에서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는 전멸했다. 이들이 얼마나 결사적으로 싸웠는가 하면, 도무지 갑옷을 뚫을 틈이 안보여서 일부 갈리아 중기병들은 말에서 떨어져도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말의 배 밑으로 기어들어가 갑옷이 없는 말의 배를 창으로 찌르는거나 말에 매달려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장창을 피한 다음 반격하는식의 정도로 장렬하게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전멸당했다.

이처럼 상반된 결과가 나온 것은 두 전투의 상황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의 경우 강둑을 끼고 있던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들을 상대로 로마군이 일부 병력을 우회시키는 데 성공하여 포위망을 이뤘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들은 아군 병력으로부터 고립당한채 좁은 곳에 갇혀 중장보병들과 백병전을 치르게 되어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반면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들은 탁 트인 개활지에서 다수의 궁기병들이 화살을 쏟아부어 적진을 교란시키는 가운데 적진의 약점을 찾아 돌격력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싸울수 있었다. 게다가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은 용맹하고 기동성이 뛰어나긴 했지만 카타프락토이와 비교하면 기병만 투구와 사슬갑옷을 갖추고 있어서 경기병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거기에다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기병은 후방에서 궁기병들의 지원사격까지 받고 있었으며 처음부터 로마 기병대를 유인했다가 포위해서 기습한거라 용맹하던 갈리아 귀족 중기병들도 1000명의 숫자라서 그상황에서는 이길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참고로 나머지 2000명의 로마 기병대는 서남아시아 출신의 경기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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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 이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와 사르마티아의 중장기병 양식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이후 사산 왕조와 로마 제국의 중장기병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등자 없이 충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큰 창을 양손으로 잡고 돌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갑옷이나 투구의 형태는 다음 유물들을 참고하라. 두라-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파르티아 기병 그림, 사자와 싸우는 파르티아 기병 부조

카타프락토이는 기본적으로 돌격기병이므로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돌격이다. 돌격시에는 보통 창을 양손으로 잡고 돌격했는데, 그나마도 돌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창은 길이가 최소 4미터는 넘는 굵고 무거운 것을 썼다. 발을 디디고 말 위에서 단단히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등자, 한쪽 겨드랑이에 랜스를 끼우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잡거나 방패를 들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방식 등을 갖춘 중세 중기병들의 돌격에 비하면 불안정한 동시에 훈련하기는 더 어려운 방식이었다. 따라서 양성하기 어려운 충격기병들을 더 잘 보호하고, 질량과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강화시켜 돌격에 이어지는 백병전에서 적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발전한 결과물이 카타프락토이였다.

중세 기병들은 일단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한 번에 적진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대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 돌격을 재개하는 식으로 여러 번 돌격하여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카타프락토이는 매우 중무장하여 이런 기동이 쉽지 않았고, 양성하기 어려워 숫자가 적었으므로 한 차례의 돌격과 이어지는 백병전으로 적진을 무너뜨려 승부를 보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물론 다른 병과의 지원 없이 카타프락토이만 가지고 돌격을 했다가는 상술된 아르메니아 기병들과 비슷한 꼴이 나기 십상이니 신중한 활용이 필요했다. 고구려 중장기병들이 스파이크 덧신을 신은 것도 돌격 후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적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것 이었다.

어쨌든 당대 전장에서는 압도적인 돌격력과 방어력을 가진 특수한 병종으로써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카르헤 전투의 파르티아처럼 다수의 궁기병으로 스웜 전술을 펼쳐 적을 괴롭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카타프락토이를 돌격시켜 무너뜨리는 전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 외에도 경무장한 궁기병들에 대항해 중장갑을 바탕으로 사격전[3]에서 우위를 점한 뒤 돌격하여 격퇴하거나,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로 활용하거나, 앞장서 돌격하여 적진에 틈을 만든 뒤 좀더 경무장한 기병이나 보병의 연이은 공격으로 그 틈을 넓히는 방식으로 적진을 무너뜨리는 등 지휘관의 역량이나 전장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활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완전 철제 마갑은 그 무게 때문에 말의 기동성을 크게 해치고 말이 쉽게 지치게 하였기에, 서양의 경우 1500~1600년대에 가면 중요 부분만 철제로 만들고, 다른 부분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뒤 겉에 철을 덧대 중량을 줄이면서 방호력을 최대한 유지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동양의 경우 이미 수나라 때 기록인 <수서>에 가죽마갑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참조) 당나라는 유목민족의 경기병 전술을 받아들이면서 예전의 무거운 전신마갑에서 옛날의 부분 마갑을 쓰거나 아예 마갑을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주변국들 역시 점차로 마갑의 사용빈도가 낮아진다. 물론 이 때 마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의 뒤를 이은 과 비슷한 시기 주변 세력들도 여전히 마갑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장기병의 고질적인 단점인 낮은 기동력과 말의 체력 저하 때문에 마갑의 퇴보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거란의 기록에도 철제 마갑은 말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말만이 버텨낼 수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4] 몽골의 경우 철제마갑도 물론 있었지만 옻칠한 가죽제 마갑이 많이 쓰였다.

몽골 기병을 묘사한 삽화, 그림에서 말들이 입은 마갑들은 가죽제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에 쓰이긴 하였으나 타국에 비해 대규모 기마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일본의 특징상 의장용이나 과시의 목적이 강했으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는 의장용으로만 쓰였다.

의장용 마갑을 입은 일본 기병의 모형.(출처) 기수의 뻐드렁니가 심한 것 같지만 착시일거다...아마도...

3. 여러 매체의 카타프락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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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Cyrus the Younger. 다리우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의 왕자(...)였으나, 친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쿠낙사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고용한 1만 명의 그리스 용병대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그가 고용주를 따라 페르시아의 심장부까지 갔다가 패전한 뒤 그리스로 돌아오는 여정을 쓴 것이 아나바시스다.
  • [2] 다만 거란의 중장기병을 묘사하는 벽화에서 마갑의 존재가 확인되는 만큼, 그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기술을 교류했던 고려의 기병도 마갑을 입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3] 유목민들이나 페르시아처럼 기마궁술의 전통이 있는 이들의 경우 대다수의 중장기병들이 활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카타프락토이들이 활을 포기한 경우는 갑옷을 너무 빡빡하게 입어서 활을 땡길 수가 없을 정도로 중무장한 일부, 혹은 로마처럼 기마궁술의 전통이 아예 없는 경우였다. 대신 로마는 궁보병을 대폭 늘려 이에 대처했다.
  • [4] 출처 -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수막새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