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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

last modified: 2017-06-10 04:03:51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이름 표기에 대해
3.
3.1. 생애 초반
3.2. 저술 활동
3.3. 사망
4. 일화
5. 사회과학에서의 영향력
6. 여담
7. 대표저작

1. 개요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 테제, 11번

"20세기의 세계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장이였다."

Karl Heinrich Marx(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1] 1818년 5월 5일 ~ 1883년 3월 14일.

19세기 철학자 중 최강의 네임드다. 어찌보면 근대 사회과학의 분과학문들을 새롭게 창시한 창시자에 가까울 수도 있다.[2]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명언을 남긴 시대의 학자이자 자본론 등을 쓴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중 하나이며, 사실 상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인류 역사의 궤도를 움직인 사회과학의 본좌. 당시 하버드대 교수는 이과계통에 수많은 스타들이 있지만 문과계통은 마르크스가 유일한 천재라고 했으니...

반세기가 넘도록 냉전-반공체제에 익숙해진 한국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사실, "자유진영"이라고 불리우는 세상의 일반인은 모두 마찬가지겠지만...)은 그를 '원조빨갱이 마두' 정도로 취급하지만, 사실 그의 업적은 사회과학 뿐만이 아니라 순수철학 및 역사학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알고 보면 대학교에서 인문사회과정에서 학생들 엿먹이는 사황 중 한 명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독특성은 그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는 헤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헤겔처럼 역사가 단계를 통해 발전해 간다는 진보의 이론에 덧붙여 어떤 도달점, 헤겔은 절대정신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고 하는 도달점을 과학화하여 필연적으로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점에 있다. 물론 이러한 필연성이 곧잘 독단주의로 이어지고 혁명가들로 하여금 그의 이론이 만들어낼 필연적인 종착력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불러 오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 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 자신이 만들어낼 공산주의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운영할 지에 관한 그림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고, 추상적이고 이상적으로만 묘사했는데 이 점 역시 혁명가들이 제멋대로 마르크스 이론을 해석하면서 정치적 야욕을 정당화 하는데 쓰인 점이다. 포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비판가들이 곧잘 비평하는 점 역시, 마르크스의 체제가 과연 필연적으로 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과연 증명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며 체계 이후를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상론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마르크스의 견해를 어떤 이상에 대한 상상력 정도로 이해하자는 마르크스 이론가들은 여전히 현대에 많다.

말이 나온김에 조금 더 덧붙이면 포퍼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고 체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어떤 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것을 실제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비판가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며 형이상학적이며, 이상론이기 때문에 위험한 이론이거나 좋지 않은 이론이다. 포퍼는 마르크스 이론의 또다른 독특성을 마르크스 자신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도덕적 경향이 이론 가득 묻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본을 읽으면서 앞 부분의 선험적 명제들을 검증하는 내용을 지나 현실을 비판하고 사실들의 목록을 구성하는 측면 쯤에 도달하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분노하고 참여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폭로들을 전술적으로 기술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크르스 이론이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분명 이점에서 포퍼의 비판은 일견 중요한 지점을 가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론의 도덕성을 배격했고 철저하게 현실을 바꾸고자, 독일 이데올로기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바 처럼, 해석이 아닌 실천을 추구 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까지 그의 죄과로 씌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후대의 비판가들과 철학자들에게 똑같은 소리 들어먹는 포퍼 스스로도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

이 양반이 이룩해놓은 것은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갑툭튀하여 근대 인문학 전체를 재규정하고, 현 시대의 기본 개념을 모조리 재정립하고, 나아가 새로이 도래한 자본주의 시대(이것 역시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이다!)에 있어 핍박받던 "노동자"라는 계급 전체의 중대한 각성을 일으켰다. 또 그와는 다른 입장에 있는 텔리/지식인 및 중간적 위치의 계급들이 어떠한 사회적 의무가 있는지를 일깨웠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에릭 홉스봄이 정의한 "혁명의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자.

공산/자본주의라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자극받아 문화 혁명인 모더니즘이 태동되었다. 때문에 사실상 모던이라고 불리우는 20세기 전반의 세계는 마르크스의 강력한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고전 경제학에서 경시되던 공황이 아니라 공황의 주기적 발생을 지적한 사람이기도 하다. 요컨대 19세기에 두번에 걸쳐 발생한 공황과 비슷하게, 주기적으로 규칙적으로 경제 공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본 것인데 20세기 초반 이러한 이론에 맞는 세계공황이 다시금 발생하자 마르크스 이론에 관한 신뢰성이 확보됐다고 본 사람들이 생겼다. 물론 기존의 마르크스 빠돌이들은 거봐 마르크스쫭! 하면서 더더욱 쾌재를 불렀음을 말할 필요가 없겠다. 물론 케인즈가 나타났지만...

게다가 세계 거의 모든 선진국가들의 중요한 정치정당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회민주주의계열 정당들 또한 (비록 혁명과 공산주의의 수립의 전망은 사실상 완전히 포기했지만) 마르크스계열 사회주의 이념의 좀 발랑까진 후계자이기도 하니 사실상 오늘날 진보주의와 좌파주의의 직계조상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 마르크스 등장 이전 자본주의는 완전한 시장방임주의다 보니 비판받을 점이 상당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만 봐도 뒷골목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수천명이었다고 한다.[3] 죽음을 면한 아이들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의식주 혜택도 없이 공장 노동자로 내몰렸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수입이나 복지를 보장받지 못한 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근근히 살아가던 형편이었다. 또한 자본가들은 이와 같은 노동 착취에 관해, 그것이 일할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하는 것이자, 자본가들이 그들을 필요한 만큼 부려 먹을 자유 역시 보장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때였다. 자본론 1-1에는 이런 자본가들이 소아 청소년들의 노동시간을 제한하자는 법을 어떤 식으로 반대하는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보고 매력을 느낀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크스 등장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건 그들이 게을러서 그런거지 사회의 책임이 아님"이라고 자본가들은 생각했지만,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설파하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자 "빈부격차가 큰 데에는 사회적 책임도 있다는 걸 인정하겠음."으로 입장이 바뀌게 된 것.[4] 그후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여 사회적 책임과 분배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게 된다.[5]. 단적으로 복지국가로 이름높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정책은 공산화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기까지 수 백년, 온 세계에 퍼지기까지 2000년이 걸렸음을 생각할 때, 자기 살아있는 당대에 이미 유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하나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사후 반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지구상 땅덩이의 1/6이 가량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19~20세기 이전에 태어났더라면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취급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세계의 절반은 그를 찬양했고 세계의 나머지 절반은 그를 못죽여 안달이었다.

유대인이며 평소에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긴 했지만 그와 같은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유대교는 모계 중심인데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이었고 그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유대교를 포기하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 물론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이러한 개종에 관해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타고난 꼴통 기질과 반골 성향 때문에, 타협적이라고 아버지를 괄시한 점은 있다.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아버지와 달리 자존감과 열등감이 강한 비타협적인 성향이었던 마르크스는 아버지 말이라면 쌀로 밥하는 소리 까지 안 들어 먹었다. 종교적 의미로 생각하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히틀러 같은 인간들은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 등과 함께 싸잡아 열등 인종으로 분류해 철저히 탄압했다. 공영 재산의 공유와 관리 경제 체제등 사상, 방법론적으로 나치의 이론과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히틀러는 이념적으로 혈통적으로 마르크스 등등이 자신과 완전히 모순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안 하면 보통 이런 일들이 생긴다.

당시의 식민지들에 대한 인식에서는 계몽주의적, 유럽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그가 근대 유럽이 낳은 존재고, 인간이란 그 자신의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자. 당시 유럽인이 비유럽을 향해 갖고 있는 인식은 극단적으로 낭만적이었거나 극단적으로 차별적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르크스의 저작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후기에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후기 저작물 중에 미완성된 것도 있고 해서 분명하지는 않다.[6]

한편 그가 제시한 역사학에서의 시대구분론은 향후 역사학에서 크나큰 지침이자 족쇄로 남아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2. 이름 표기에 대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Karl Heinrich Marx의 이름은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가 맞다. 하지만 예전에 칼 맑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서, 요즘도 이런 표기법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를 감안하여 리그베다 위키에서도 이 항목을 맑스로도 들어올 수 있게 해 놓았다.

이 표기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연변 조선족들이 출판한 마오쩌둥 어록에도 이 표기가 쓰이고 있다. 항목 참조.

'맑스' 표기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원음과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Marx'는 모음이 하나 밖에 없는 1음절짜리 이름인데 '마르크스'로 표기하면 4음절이 돼버리니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또 '마르크스'는 받침 발음을 할 수 없는 일본에서 '마', '르', '크', '스'의 네 음절로 나누어 표기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Marx'라는 단음철(單音綴)의 이름을 우리는 원음 비슷하게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맑스'라고 원고에 적으면 출판사에서는 에누리 없이 거의 일본식 표기처럼 '마르크스'라는 4음철의 표기로 바로(?)잡아 놓는 데에 나는 매번 당황하고 있다.
최정호 교수의 동아일보 기고.#

'마르크스' 표기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우선 '맑스는 옳은 한글 표기가 아니라는 것.'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받침에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사용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겹받침인 ㄺ은 사용될 여지가 없다. 비슷한 이유로 '맑시즘' 역시 '마르크스주의'가 맞다. 또 굳이 한글로 '독일어 원음과 비슷한 발음'으로 옮기려면 카알 마악스(/kaːɐ̯l ˈmaːɐ̯ks/) 정도 된다. 또한 표준발음법을 살펴볼 때, '맑스'라고 표기할 경우의 올바른 발음은 막쓰이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맞네 ㄺ 받침은 자음 앞에 올 경우 ㄹ이 탈락하고 ㄱ만 발음하기 때문. 그러므로 '맑스'라는 표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유 중 하나인 '부드러운 ㄹ 발음'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맑다', '밝다'의 올바른 발음이 '막따', '박따'인 것과 같은 이치.

'맑스'는 운동권 일각에서 '맑'을 이용해서 '맑음','맑다'는 느낌을 주려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표기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그 어원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이러한 유사성을 활동에 이용하기도 한다.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친 운동권 성향의 서울권 대학 연합동아리들 중 '맑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으며, 2000년대 초에 열린 '맑스 코뮤날레'라는 행사에서는 "날씨가 맑다"와 "맑스입니다."는 뜻을 함께 담아 "내일은 맑습니다."라는 이름의 문화행사를 열었다.#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맑'스
'맑'스는 맑음의 덩어리,
혹은 당원을 친 이념의 빵
칼 막 쓰지 마라
반박이 불가능한 이 빵에
입을 대는 순간
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
촛불처럼 타오른다.
너 이념 장사꾼이지?
칼 막 쓰지 마라.
이 빵으로 인해 세상은
맑거나 맑지 아니하며
공평하거나 공평하지 아니하도다.
오, 내 몸에 흐르는
타락천사의 붉은 피
너 칼 막 쓰지?

- 원구식, '맑'스 『시와사상』 (2008. 겨울)

미국식으로 발음하고 싶으면 '카알 마륵스'로 발음해주자. 마륵스라고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같은 국가들에선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먹는다. # 이에 관련된 드립으로는 "섹스를 세크스라고 읽지 않는다"가 있다.민나 세크스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marks와 발음이 동일해서인지 러시아식 유머와 이를 활용한 다음과 같은 개그가 있다.
In America, your job determines marks.(미국에서는 당신의 직업이 당신의 수준(marks)를 결정합니다.)
In Soviet Russia, Marx determines your job.(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가 당신의 직업을 결정합니다.)

여담이지만 북한에서는 막국수라고 돌려말하기도 카더라.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 치숙에서는 막걸리(...)로 언어유희가 되었다. 국어시간에 배우는 언어유희의 예시 중 하나.

대학생 사이에 떠도는 농담 중에 레포트를 작성할 때 '맑스'라고 표기하였더라도 레포트를 제출할 때는 '마르크스'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레포트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공안 당국의 학생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독재 정권 당시,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책가방을 검문하던 형사들이 막스 베버[7]가 쓴 책을 발견하곤 "이 새퀴 맑스 책 가지고 다니네? 너 빨갱이지?" 하며 잡아갔다는 도시전설급 이야기가 있다. 다만 도시전설이라고만 하기엔 1980년대 초반 학번들 중에 이 일을 실제로 겪었던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고 꽤 된다. 물론 당일 훈방 조치를 받았다고.[8]

3.

3.1. 생애 초반

독일(당시엔 프로이센) 트리어 태생. 트리어는 독일의 서부 지방으로, 당시 독일 동부 지방은 농촌이 많고 전통적 색채가 강했으나 서부는 영국,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산업화,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마르크시즘이 자본주의의 폐단에 반대해 나타난 사상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배경이 쉽게 이해된다. 어렸을 때부터 변호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가졌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가 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많아 마르크스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이미 어릴 때부터 상당히 총명했던 모양으로, 처음에는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종교, 철학, 문학, 거기에 술에 심취한 탓에[9] 아버지가 걱정 끝에 를린 대학[10] 법학과로 전학시켰다.

그러나 베를린에 와서도 법학은 커녕 역사와 철학 공부에 열심이었고, 특히 베를린 대학은 헤겔이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라 겔주의가 성행했다. 비록 마르크스가 다니던 시절은 헤겔이 사망한 후였으나 헤겔의 제자들이 아직 베를린 대학에 남아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절. 헤겔의 제자들은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들과 주로 어울리며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원래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살려고 했었지만 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던 터라[11] 좌절된다.

사실 마르크스는 결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당대 자유주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매우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인, 말하자면 당대의 '학생운동권'에 속했으니 얄짤없이 코렁탕 좌절.

베를린대에서는 박사 논문을 내 봤자 학위를 안줄 것이라 생각한 마르크스는 당시 학위논문심사가 빠르고 정부의 입김이 덜 닿는 예나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딴다. 급진 헤겔철학을 공부했지만 정작 박사학위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Über die Differenz der domokritischen und epikureishen Naturphilosophie)"[12]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상가들을 다룬 비교철학 논문으로, 문과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현대사회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수록 오히려 박사논문만큼은 더욱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써 볼 필요가 있다."는 사례로 자주 활용된다.

3.2. 저술 활동

졸업 뒤에는 라인신문(라인지방의 신문) 신문 편집장[13]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라인지방은 개발이 본격화되던 산업도시였기에 정부와 산업부르주아지와의 충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아마 정부를 까려고 부르주아지들이 마르크스를 신문 편집장 자리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정부 비판적 기사를 꽤나 많이 다루었다.

아무튼 이 시기부터 당대 독일철학자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이슈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특히 이때의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막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때로,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14] 묵인해오던 나뭇가지줍기(즉 장작)를 정부가 금지하자,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유럽에서 19세기 내내 반계몽주의와 야만적 관습 및 탄압의 대명사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프로이센에 비해 힘이 강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맹렬한 탄핵문들이 실린 신문 한부를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했다. 프로이센 정부는 힘이 강한 러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1843년 4월, 라인신문은 경고도 받지 못한 채 폐간되었고 마르크스는 다시 한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인 신문에서 보낸 1년 동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부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1843년에는 귀족 집안 출신의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제니의 아버지는 훔볼트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는 등 출신성분에 학구적 가풍까지 여러 모로 빵빵한 집안의 딸내미가 사회에 불만 많은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집안에선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제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다고(...)

라인신문 폐간 후 마르크스는 프랑스로 거처를 옮겼고, 여기서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많은 만남을 가지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 자신도 '의인동맹'[15]이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했다. 이 때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프랑스-독일 연보'라는 부정기 간행물을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의인동맹의 영향을 받은 분파 중 하나가 프로이센에서 국왕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자 프로이센은 의인동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전 유럽에 검거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당연히 맑스도 파리에서 추방 당해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했다. 거기서 '독일 이데올로기' 저술. 1848년에는 의인동맹이 '공산주의 연맹'으로 개칭하며 창당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창당선언문을 의뢰받아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저술한다.

1848년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혁명이 발발(1848년 혁명)하였으나 늦어도 가을 쯤에는 모두 진압되고 만다.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영국에서 생활하며 마르크스는 지속적인 저술활동을 펼쳤다. 계속 엥겔스를 등쳐먹으며 대영제국 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하던 흔적이 담겨있는 노트 등이 여전히 유품으로써 남아있다. 이 때 매일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써낸 게 '정치경제학요강', '정치경제학비판', '잉여가치론' 등.(...) 영국 체류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중 특히 중요한 인물들에는 그의 맹우 엥겔스 이외에도 칼 카우츠키, 폴 라파르그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중요 사상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와 이들의 활동은 훗날에 세계 최초의 국제노동자연대 운동으로 발전할 "인터내셔널"을 낳게 된다.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자본론을 내놔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3.3. 사망

On the 14th of March, at a quarter to three in the afternoon, 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He had been left alone for scarcely two minutes, and when we came back we found him in his armchair, peacefully gone to sleep-but forever.
3월 14일 오후 2시 45분,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겨우 2분 동안 혼자 남겨져 있던 사이,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에서 발췌

1870년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주요활동이 없으며 대중적인 저술만 가끔 하는 등 조용히 살다가 1883년에 사망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는 최우선 발생국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프랑스를 꼽았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가 득세했던 조국 독일 역시 후보로 보기는 했다. 그런데 세계정치의 흐름 및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말년의 마르크스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 약간의 수정/보완을 가미하여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같은 낙후된 조건에서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했으며, 러시아를 공부하는 등 흥미를 드러냈다. 그리고, 실제로 1905년1917년, 총 세 차례에 걸쳐 혁명을 통해 마침내 러시아 땅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한편 미국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좌초되었다.

4. 일화

그의 딸 엘리노어에 의하면 매우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가족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얻곤 했는데, 엥겔스가 자신의 아내(정확히는 정부인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의 여자)가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도 이에 대한 답장에 돈 좀 부쳐달라는 말을 넣었다. 격분한 엥겔스는 절교를 선언했고, 마르크스의 친지들이 애걸해서야 겨우 화를 풀었다. 이때 마르크스가 사과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번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시에 재정적으로 굉장히 궁핍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 그 사과조차도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절친까지도 절교를 선언할만한 인간성

아내가 사망할 당시 둘 다 병은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골골거렸을 때 자기 아픈 건 끝까지 숨기면서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 평생 혁명 생각만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킨 마르크스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잘한 일로 꼽힌다. 그나마 자식들에게는 잘해준 편이지만 반대로 형제자매나 모친을 멀리했다고 한다. 부친은 예외로, 죽는 날까지 아버지 사진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대단히 냉담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뛰어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생활에서의 경제관념은 안습이었다고 한다. 매일 대영도서관에서 책읽고 책만쓰고, 가끔씩 신문사에 기고하는 글로 쥐꼬리만한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16] 그런데 여기에 부잣집 출신 엥겔스[17] 의 지원금까지 포함하면 당시 노동자의 세배 정도로 벌이가 괜찮았다고 한다. 그는 집에 하녀를 두고[18], 종종 온가족이 예쁘게 차려입고 소풍을 가며, 집안의 가구를 수시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적 생활은 단순히 개인적인 생활 문제가 아니라 19세기 이후 좌파 사상과 행동 자체의 연결에 대해서 나름 재미있는 관점을 시사한다. 역시 유대계 중상층 출신이었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마르크스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후대 아나키즘과 민주 사회주의, 그리고 러시아 대중적 사회주의의 도덕적 지향성을 놓은 렉산드르 게르첸도, 국제 아나키즘의 선각자이자 1차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차게 싸운 후 공산주의와 결별한 미하일 바쿠닌도 해당된다. 실제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중상층 출신자들도 꽤 있었고, 레닌도 변호사 집안 아들이었는데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양식에 익숙했고, 관용적이었다. 룩셈부르크 시절 숱한 이론가들과 혁명가들이 모여있던 독일 사민당은 왈츠 파티를 열고, 와인을 마시는 등의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재밌는 것은 이런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이 하층 출신 운동가에 비해 변절하는 일은 적었다고.

베를린의 고위 관료의 1년 평균 수입이 800 탈러였고, 부잣집의 돈 잘 쓰는 도 1년에 500탈러 이상을 쓰는 일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1년 지출은 700탈러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에 빡친 아버지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아이가 여섯 명이 있었는데, 밥은 못 먹여도 춤과 피아노 교습은 시켰다. 이 결과 세명이 어려서 요절. 딸이 죽었을때 외상으로 관을 사려 했는데, 외상을 못해서 절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자녀들 중 유명한 인물은 여섯 번째 자녀인 엘리노어 마르크스(Eleanor Marx)이다. 카를은 그녀를 가리켜 사내아이로 태어나야 했어야 했다고 자주 농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은 여성스럽고 인간을 그대로 사랑할 줄 알아 적들도 인간적으론 존경했다 한다. 부전여전(?)이라고 딸도 영국에서 진보적 활동을 많이 했다. 사회민주연맹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활동. 43살의 나이에 으로 자살했다.

그나마 부인이라도 금전관념이 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을 것이나 마르크스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의 부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밥은 굶어도 '폰 베스트팔렌 남작부인'(베스트팔렌 남작의 영애)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달린 비싼 편지봉투만 애용했다고 한다. 역시나 부창부수. 말년에야 좀 삶이 풀려서 그가 이론에선 극도로 싫어하던 부르주아 라이프를 조금이나마 맛보다가 죽었다.

또한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던 그도 집에선 하녀를 고용해서 생활했는데 그 하녀를 거의 노예로 부려먹었고 심지어는 관계까지 가져서 아이를 가지게 했지만,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아이를 처리(?)하는 데도 엥겔스가 도움을 줬다. 엥겔스가 그 아이는 사실 내 아이라고 둘러대준 후, 평범한 가정에 입양을 시켜주었다. 그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었다

이렇게 빈민촌에서 고생을 한 시절도 있지만 그래도 유산 받은 것과 엥겔스의 도움 등으로 교외 괜찮은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레알 관포지교? 고로 흔히 알려진 마르크스가 가난해서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도 천생 기자인지라 마감이 닥쳤을 때만 능력을 발휘했다. 만화가, 소설가, 기자들의 창작욕구는 마감에서 나오는 듯하다(출처). 반면에 마감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히 강해서, 자본론의 경우도 엥겔스는 빨리 낼 것을 독촉하였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초저속 마감 시스템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본론 2, 3권은 아예 끝을 못냈다!

자기가 의도한 바였는지 모르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로 또다른 떡밥도 만들어놨다.

잘 알려진대로 혈통은 유대인. 하지만 아버지대에 기독교로 개종해서 당시 분류로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유대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의 사상에 대한 반대자들이 유럽서 수천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은 유대인드립과 엮어서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의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물론 가장 많이 울궈 먹은건 나치.

자신을 전혀 유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로를 "폴란드 유대인은 모든 종족중에 가장 천박한 족속이다"라고 유대인 드립으로 디스한적도 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라살로를 "진정한 폴란드 유대인"드립을 하면서 또 한번 디스를 한적이 있다. 마르크스 처럼 후대 사회주의자 중에 유대인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트로츠키,로자 룩셈부르크등)도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없던건 마르크스와 마찬가지였다. 이론상으로는 국가나 민족같은 개념은 종국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란 자각이나 민족 의식, 해방 같은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대를 초월한 포스 넘치는 명언을 여럿 만든 사람 아니랄까봐, 유언도 상당한 포스가 느껴지는 양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길 유언이 뭔가?"라는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의 질문에 대한 이 양반의 대답.
"집어치워! 유언이란 살아서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남기는 거야!"

정말 비범하다. 그런데 말년에는 드디어 자기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 제정적으로도 어느 정도 돈을 벌며, 각지의 추종자가 도움을 주면서 [19] 어느 정도 삶이 펴서 자기가 그리도 까던 부르주아 라이프를 누리다 죽었다. 특히 자신의 언변을 이어 받은 로라와 라파르그 커플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 노년의 낙이었는 듯 하다.

정작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친 그가 일화, 성격등 모든 면에서 노동자적인 면이 눈꼽만큼도 없었다는 점이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5. 사회과학에서의 영향력

인류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학자 중 하나인지라 수능 사회탐구 영역의 거의 모든 과목에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평가원양반! 단적으로 현대 역사에서 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론과 완전히 같다. 시대구분론이 기본적으로 경제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와 현대 역사학의 차이는 공산주의를 현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뿐으로, 애초에 큰 틀에서 역사분류할 때는 고대-중세-근대현대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그나마 현대를 구별하는 경우도 2차대전 종료가 기점이지만, 이 역시 근대자본주의의 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기록하는 경우는 드물다. 2차 대전 이후의 시기에 대한 가장 흔한 표현은 에릭 홉스봄이 주창한 장기 20세기를 포함한 세기별 분류. 같은 이유로 최초의 시대구분론이 등장해서 스스로를 근대라고 선언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현대 역사학에서 근세로 만들어버린 것 역시 근대의 상징인 자본주의 발달의 부족 때문.[20]

대학을 가도 사회계열에서 사회학의 최종보스는 마르크스고 인문학계에서는 근대 철학의 방법론 및 그 내용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고 사학계에도 유물론적 사관을 남겼다. 그냥 쉽게 말해 근대 인문사회과학의 보스는 마르크스와 스 베버(Max Weber)[21] 정도이다.

마르크스가 좌파적 관점에서 거시적인 인문사회의 제반을 해석한다면, 베버는 대체로 우파적 관점을 가진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미시적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다[22]. 물론 둘을 단순한 좌우 대립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극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오히려 베버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시켜 연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실, 베버 본인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사기꾼'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나 베버나 한결같이 글쓰기 스타일이 독일인 학자다운 악랄한 만연체라 학적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대학원생들이 둘 중 하나의 저서를 읽다가 수없이 학을 떼면서 사상적 기반을 만들기 때문에 둘의 이념을 다 포섭하여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만드는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는 보기가 힘들다(안습). 그래도 이 둘은 헤겔보다는 낫다고 하는데 그럼 헤겔의 글은 어떻게 돼먹은거야?!장비를 정지합니다 물론 우파적인 학문으로 알려진 경제학을 봐도 사정은 사실 비슷하다. 경제학의 대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만 해도 제대로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다. 원래 고전이란 누구나 사고 아무도 안 읽은 책이란 뜻이다.(음?)

그의 사상은 현대 공산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23]. 그러나 정작 그는 사회주의가 성립한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말한 것이 거의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수 많은 사람들 - 레닌, 플레하노프, 로쟈 룩셈부르크 , 트로츠키, 스탈린, 마오쩌둥, 그외 멘셰비키 및 사회주의자들 - 사이에서 토론과 논쟁으로 분파가 세분화 - 수정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이즘 등 - 된 이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6. 여담

마르크스가 저술한 서적들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인식이 박혀버려서 근데 정작 북한에선 자본론이 금서다,(근데 북한은 공산주의를포기했다순수한 공부 혹은 연구 목적으로 마르크스가 저술한 책을 소지하거나 보고 있어도 나이 드신 분들은 몹시 안 좋게 본다. 특히 나이 좀 있는 경찰이나 군인들은 굉장히 의심스럽게 본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주로 '맑스'로 표기하던 시절에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성향이 아주 다른 막스 베버의 서적 역시 문제되기도 하였다.[24]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하다가 말년에 공부할 시간이 난 병장이 복학 준비를 하려고 대학에서 보던 책들을 반입시키다가 마르크스 서적이 끼어 있어서 개난리가 나기도 한다. 사회에서는 그냥 공부할 때 쓰던 책이라서 무심결에 들어왔겠지만... 과장 없이 헌병대 + 기무사 선물세트가 헐떡벌레 냄새 맡은 개떼마냥 몰려와 무슨 목적으로 갖고 들어왔냐고 갈구는데, 안 좋게 끝나서 재수 없으면 말년에 군사법원 순례 혹은 영창을 갈 수도 있다고 한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랑잎에도 베여 죽는 법

군대의 레드 컴플렉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다. 범우사에서 출판된 카프카의 <>(Das Schloß)의 표지가 단지 빨간 색이라는 이유로 압수당한 사례도 있다 (1999년의 사례라고 한다). 근데 왜 유격 조교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건데?? [25]

사회발전론도 유럽 외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얻고 있다.

딸이 아빠는 어떤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빨간색이라고 대답해서 빨간색이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색이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이전부터 빨간색은 좌파 내지는 진보의 이미지로 차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때 시민들은 빨간색 깃발을 휘날리며 혁명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실은 망명 생활 당시 한국에도 잠시 들어와 길음역 근처에서 해장국집을 운영하였다 카더라
창업 비용은 엥겔스가 대줬다고 한다

7. 대표저작

1842년 24살 이래 계속 책을 썼고 65세로 죽고 나서도 책이 나왔다!
  • 1842년, The Philosophical Manifesto of the Historical School of Law
  •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 1845년, 《성가족
  • 1845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
  • 1847년, 《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1847년, 《임금 노동과 자본》(Wage-Labour and Capital)
  • 1848년,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 1862년, 《여가치론》(Theories of Surplus Value), 3권
  • 1865년, 《임금(혹은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Lohn, Preis und Profit/ Value, Price and Profit)
  • 1867년, 자본 I》(Das Kapital)
  • 1875년, 《고타강령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
    사후[26]
  • 1885년, 《자본 II》(Das Kapital)
  • 1894년, 《자본 III》(Das Kapital)

의미가 심하게 변한 잉여(...)를 포함해 수많은 말들을 창조한 사람이다. 제목들만 봐도 어디선가는 들어본 제목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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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름의 표기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 [2] 국내에서 반백년 가까이 독일 사회과학과 막스 베버 사회학을 연구한 전성우는 "마르크스는 생존의 사회과학을, 베버는 자존의 사회과학을, 뒤르케임은 공존의 사회과학을 펼쳤다."라 요약한 바 있다.
  • [3] 거기에다 영국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아일랜드 대기근과 그 대처 방법을 생각해보면.....
  • [4] 강하게 표현하자면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다간 한밤중에 노동자들이 들이닥처 자기 머리통은 꺠지고 집은 불탈까봐 그랬고 마르크스의 이론이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진시켰다
  • [5] 애초에 사회복지정책이나 수정경제체제 자체가 자본주의의 맹점을 열렬하게 까면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빈부격차 증대에 대한 반발 확산이지만
  • [6] 실제 마르크스 추종자들도 전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부분, 특히 전기 마르크스 저작의 공부와 이해에만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있다.
  • [7] Max Weber. 마르크스와 함께 근대 사회과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로 대표적인 보수 우파 학자이다(...). 사실 철자도 다르다. 전술했듯이 이쪽은 중간에 r이 없는 Max. 그리고 이쪽은 막스가 이름이고 베버가 성이다.
  • [8] 이것은 영화 변호인의 중심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으로 나오게 된다.
  • [9] 본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끼리 술 먹고 소란 부리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당시 독일 젊은이들의 유행이었던 결투 경험까지 있다.
  • [10] 오늘날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 '훔볼트 대학'이란 명칭은 1949년 동독 정부 수립 이후의 명칭이다.
  • [11] 베를린대는 수도에 있어 특히 영향이 강력했다. 그리고 베를린대에 남아있던 헤겔의 제자출신 학장이 해임된다.
  • [12] 사실 후일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큰 관련이 없어서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 논문을 찾아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우리나라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할 때 마르크스의 인기에 힘입어 그다지 학술적 가치는 없는 이 논문까지 번역출판되기도 했다.
  • [13] 실제로 신문의 편집장은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갖고있다.
  • [14] 여기서 '전통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한데, 유럽 봉건시대의 판단기준(법)은 이전의 관례/관습에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확신에 의해 지속된 관습법 수준이란 말
  • [15] 프랑스 혁명 시기의 선동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단체.
  • [16] 우리도 잘 아는 《뉴욕트리뷴》의 런던 주재 특파원으로 송고한 기사가 남아있다.
  • [17] 엥겔스가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것은 사실이나, 그도 집안에서는 반쯤 '내놓은 자식' 취급을 당했기 때문에, 가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삥땅 친 돈을 마르크스에게 부쳐준 것이라는 말도 있다. 연세대학교 '정치경제학' 강의 中 담당 교수님의 잡담
  • [18]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처가에 부탁을 하니 돈 대신에 하녀를 보냈다. 처가가 귀족가문인 베스트팔렌 남작가 였기 때문에 이런 당황스러운 지원이 가능했다.
  • [19] 그 중에서 두 프랑스인인 샤를 롱게와 파울 라파르그는 자기 두 딸 예니와 로라와 결혼하여 사위까지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상적으로 명석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나키즘 논쟁에서 마르크스와 각을 새웠던 파울 파라르그를 총애했다.
  • [20] 애초에 대부분의 역사학에서는 근세 그런 것 인정 안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르네상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중세의 전성기이다.
  • [21] 이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관료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현대의 모든 조직은 관료제를 사용(혹은 변용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은)하지만 관료제를 부정하거나 탈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우린 안 될거야
  • [22] 막스 베버의 대표적인 저작이 자본주의를 기독교적 도덕관념에서 정당화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현대 미국식 자본주의자들의 사상적 원류.
  • [23]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마르크스 사상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달이 극한에 다다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린 것에 대하여 후대 공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키배가 오갔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중세적 요소가 강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말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며, 실제 러시아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상한 이론이 많이 등장했다. 참고로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꼽은 것은 자신의 조국인 독일.
  • [24] 이시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중국어 사회과학 서적이 슬금슬금 들어오기도 하고, 계급 투쟁class struggle같은 내용을 '학급 문제'와 같은 내용이라고 검열원에게 둘러대는 일도 있었다.
  • [25] <del>빨간책이지만 제목처럼 야한책일텐데</del> 라는 농담이 있는데, 물론 카프카의 성은 야한 내용도 아니다.
  • [26]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했다.